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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For rhe himself is our peace, swho has made us both one and has broken down tin his flesh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15 by abolishing the law of commandments expressed in uordinances, that he might create in himself one vnew man in place of the two, so making peace, 16 and might wreconcile us both to God in one body through the cross, thereby killing the hostility. 17 And he came and x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yfar off and peace to those who were znear. 18 For athrough him we both have baccess in cone Spirit to the Father.

r Ps. 72:7; Mic. 5:5; Zech. 9:10; [Col. 3:15]; See Luke 2:14

s See Gal. 3:28

t Col. 1:21, 22; [Rom. 7:4]

u Col. 2:14, 20

v See Rom. 6:4

w Col. 1:20–22; [1 Cor. 12:13]

x Isa. 57:19

y ver. 13

z Deut. 4:7; Ps. 148:14

a [John 14:6]

b ch. 3:12; [John 10:7, 9]; See Rom. 5:2

c ch. 4:4; 1 Cor. 12:13; [John 4: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14–18.

 

앞서 13절에서 이야기한 내용,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줬다’라는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오늘의 본문이다. 13절에서 너희가 이제 14절부터 우리로 바뀐다. 그리고 계속해서 17절에 너희, 18절에 우리로 표현된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To say Christ—that is to speak of peace. To speak of peace—that is to speak of Chris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

 

14절) 

중간에 막힌 담, 분리하는 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 뜰,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다. 구약의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 지성소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고 대제사장의 경우라도 죄를 지으면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 상징적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들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스스로 화평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직적인 화평(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과 수평적인 화평(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수평적인 화평은 단지 적대감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14, 15, 17절에 화평(에이레네)가 4번 등장한다. 본문속에서 화평은 연합, 나뉨과 적대감을 없애는 것, 접근과 화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는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고 그리스도는 화평을 선포하셨다. 바울은 가능한한 그리스도와 화평을 연결시킨다. 그는 화평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고 그것의 유용성을 선포하시고 그분안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바울신학의 여러 중요 주제들은 화평과 관련되어 있다. 

  •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다. 

  • 평화는 종말론적인 보상이다. 

  • 평화는 구원과 동등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 그 왕국은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 화평은 인간 관계의 목표이다. 

  • 화평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초이다. 

  • 성령의 열매는 화평이다. 

  • 평강은 우리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지킨다.

 

화평은 단순히 적대감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과 하나님과의 삶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사용의 배경이 되는 것이 구약에 사용된 샬롬의 의미이다. 이는 온전함, 육체적인 안녕, 풍요, 안전, 좋은 관계 그리고 고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윗은 심지어 그의 전쟁에서 샬롬을 묻는다. 샬롬은 단지 분쟁이 부재한 상태보다 더 긍정적이다. 그것은 그래야만하는 삶의 방식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양한 본문에서 샬롬은 공의, 정의, 구원과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 된다. 여호와는 화평이시다. 여호와는 평화의 언약을 그의 백성들과 맺고 평화를 가져올 것을 약속하신다. 평화는 미래에 대한 위대한 예언들에게 보여지는 바대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시다. 

본문 14-18절 속에서 평화는 뜻밖에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건설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나뉨과 적대감은 파괴되어야만 하고 연합과 평화는 확립되어야 한다. 화평과 화해는 수평적, 수직적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야 한다. 일차적인 초점은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수평적인 평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14절의 그 둘은 11-12절에서 언급된 두 부류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는 표현은 수직적인 차원을 묘사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적대감은 16절에 “그들의 적대감, 원수된 것을 죽이라”는 표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새로운 존재로 참가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양쪽 모두를 한 몸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십니다. 

17절에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는 그리스도의 선포는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전한 내용을 말하며 문자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구는 바울이 그 자신과 다른 선포자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로 보았는지를 보여준다.  

Peace dominates this section both explicitly (vv. 14, 15, 17 [twice]) and implicitly (unity, destruction of division and hostility, access, and reconciliation). Christ is our peace, makes peace, and proclaims peace. Paul seeks to connect Christ and peace as comprehensively as possible. He is the one who makes peace possible, who announces its availability, and in whom peace is enjoyed. This theology of peace is both a Christological and a soteriological statement.

The word for peace (eirene) occurs forty-three times in Paul’s letters, eight of which are in Ephesians (1:2; 2:14–17; 4:3; 6:15, 23). Peace is a central and fundamental component of Paul’s theology. Virtually every topic of doctrinal significance is brought into relation to peace. In addition to occurrences in greetings and blessings, note the following:

God is a God of peace (Rom. 15:33; 16:20; 1 Cor. 14:33; 2 Cor. 13:11; 1 Thess. 5:23).

Christ is the Lord of peace who gives peace (2 Thess. 3:16).

The gospel is a gospel of peace (Eph. 6:15).

The mindset of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Rom. 8:6),

Peace is an eschatological reward (Rom. 2:10),

Peace is equivalent to salvation and describes relation to God (Rom. 5:1),

The kingdom is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Rom. 14:17),

Peace is the goal for human relations (Rom. 14:19; Eph. 4:3; 2 Tim. 2:22).

Peace is the foundation for problem solving (1 Cor. 7:15; 14:33).

The fruit of the Spirit is peace (Gal. 5:17).

Peace guards our hearts (Phil. 4:7) and rules in them (Col. 3:15).

With such varied use it is not surprising that Paul summarizes the gospel by saying, “He [Christ] is our peace.” Peace is not merely the cessation of hostility; it is a comprehensive term for salvation and life with God. The background to this use is the Old Testament concept of shalom, which covers wholeness, physical well-being, prosperity, security, good relations, and integrity.23 David even asks about the shalom of his war (2 Sam. 11:7; niv, “how the war was going”)! Shalom is much more positive than merely the absence of conflict. It refers to the way life should be and is a gift of God that is received only in his presence. In various texts shalom is equated with righteousness, justice, salvation, and the reign of God.24 Yahweh is peace (Judg. 6:24), makes a covenant of peace with his people, and promises one who will bring peace.25 Peace is what God wills for his people, as can be seen in the great prophecies about the future.26

In 2:14–18 peace is unexpectedly both a destructive and a constructive act. Division and hostility had to be destroyed, and unity and peace established. Peace and reconciliation (v. 16) take place on both horizontal and vertical levels. Most of the focus initially is placed on the horizontal peace established between Jews and Gentiles. “The two” (v. 14) refers to the two parties mentioned in verses 11–12, the Jews and the Gentiles,27 and the mention of the law (v. 15) and of Gentiles being included with God’s people (v. 19) is further confirmation. In Christ, Jews and Gentiles are made into one new being.

At the same time, “he himself is our peace” describes the vertical dimension. We have peace with God (Rom. 5:1). Hostility between humanity and God is at least implied here and may be explicit in 2:16 with the words “put to death their hostility”28 (if this does not refer again to the hostility between Jews and Gentiles; see Rom. 5:8–10). Christ not only joins Jews and Gentiles into a new being, but he ushers both of them in one body into God’s presence.

Christ’s preaching of “peace to you who were far away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 (v. 17) refers to the preaching done by the apostles and missionaries to Gentiles and Jews respectively, not literal preaching by Jesus. But this phrase does show how much Paul viewed himself and other proclaimers as representatives of Christ. “Preached peace” is adopted from Isaiah 52:7 (cf. also Zech. 9:10).29

23 As examples, see Genesis 37:14 (niv, “well”); Psalm 38:3 (niv, “health”); 73:3 (niv, “prosperity”); Leviticus 26:6; Judges 4:17 (niv, “friendly relations”); Zechariah 8:16 (niv, “sound” judgment). For good discussions of peace see Ulrich Mauser, The Gospel of Peac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2); Perry B. Yoder, Shalom: The Bible’s Word for Salvation, Justice, and Peace (Newton, Kans.: Faith and Life, 198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4 See Leviticus 26:3–23; Psalm 34:14; 37:37–40; 85:10; 119:165; Isaiah 32:16–17; 52:7 (to which allusion is made in Eph. 2:17).

25 See Numbers 6:26; 25:12; Isaiah 54:10; Ezekiel 34:25; 37:26; Malachi 2:5; for the promise of one who will bring peace, see Isaiah 9:1–7; 11:1–9; Micah 5:2–5; Zechariah 9:9–10.

26 Such as Isaiah 2:2–4; 11:1–9; Jeremiah 29:11 (niv, “prosper”).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peace in the New Testament is no less important. Not surprisingly, the first word of the risen Christ to his disciples in the Gospel of John is “peace.”

27 That the neuter is used for “the two” (rather than the masculine as in 2:16 and 18) is no proof that reference was originally to two parts of the cosmos (contra Lincoln, Ephesians, 128–29). The neuter and the mixing of genders often occur in reference to people (note, e.g., John 1:11; 6:39–40; 1 Cor. 1:27–28).

28 Literally, “having killed the hostility in himself.” The phrase means that the killing takes place in his own being, not that the hostility is his.

29 Koshi Usami, Somatic Comprehension of Unity: The Church in Ephesus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3), 53–55, suggests that Paul intentionally avoided the pronoun “we” in verse 17, in order not to express an attitude of superior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131.

 

본문에서 막힌 담, 나누는 벽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1. 육체

  2. 영지주의 본문에서 언급된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적 장벽

  3. 율법

  4.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

  5.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을 나누는 성전의 장벽(행 21:28-29)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에는 요세프스와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라틴어와 헬라어로 이 벽을 넘어가면 죽음을 당한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행 21:28-29에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갔다라고 고소한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단지 물리적인 성전의 장벽만을 의미하는 것은 너무 좁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5절) 법조문과 율법의 역할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으로 대변되는 옛 언약을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새언약으로 대치하셨다.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세 율법은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장벽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새 언약의 신자들이 모세의 율법하에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법아래에 있다라는 것이다. 

신약의 바울서신에 이 화평(에이레네)라는 단어가 43번 등장하는데 이 에베소서에 8번이 사용된다. 이처럼 화평(평안, 평강)은 바울 신학의 중심적, 기초적인 구성요소이다. 

Christ sets aside the old covenant with its Mosaic law and replaces it with a new covenant for all believers. Consequently, the Mosaic law cannot serve as a barrier between Jewish and Gentile believers. Although new covenant believers are not under the Mosaic law, they are under “Christ’s law” (1 Cor 9:21; cf. Matt 5:17; Rom 3:31; Gal 6:2).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3.

 

본문에서 율법을 폐하셨다라는 표현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이나 도덕적인 지침을 파괴했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폐한 것은 바로 이방인을 제외시키는 규정으로서의 일련의 율법을 폐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애써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거나 제사, 음식법을 강요함으로 그들이 유대인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바울은 이러한 것을 폐한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안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벽 철폐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이루어졌다. 11절에서 ‘육체로는’이 문제의 핵심이었는데 이제 14절에서 ‘자기의 육체로’이것을 허셨다. 이는 바로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 적대감을 없애셨다. 갈 3:13절은 이렇게 말한다. 

(갈 3:13, 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스스로 제사장으로서 또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14-16절에서 화목하게 함은 파괴적이며 건설적인 행동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이 둘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4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자기 육체로’, ‘자기 안에서’, ‘한 몸으로’, ‘십자가로

이처럼 그리스도는 적대감을 제하시고 파괴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다. 이는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됨, 연합은 이 서신의 주요 주제이다. 14-18절에서 4번의 확언이 이루어진다. 

  1. 둘로 하나를 만듬(14절)

  2.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음(15절)

  3. 이 한 몸안에서 그들 둘을 화해시킴(16절)

  4.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음(18절)

 

화목, 화해는 ‘아포카탈라쏘’라는 단어이다. 신약에서 각각의 화해에 관한 단락의 초점은 서로 다르다. 롬 5:10-11에서는 하나님과 죄인간의 화해에 초점을 맞춘다. 고전 5:18-21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우리(세상)를 화목케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다. 골 1:20-21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화목케하신다. 엡 2:16에서는 두가지의 화해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화해이다. 하나님은 화목케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화목케되어지는 존재들이다.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가 화목케하신다. 이 일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다. 십자가는 사람들과 그분 자신과 화목케하기위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노하심에도 그분은 사랑하시고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이 화목의 결과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나아감의 의미는 왕께 나아감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다. 

Reconciliation. This passage is one of the few that discuss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which focuses on the restoration of broken relations. In the New Testament this language appears only in Paul’s letters, and then only infrequently.46 The verb to “reconcile” (apokatallasso) does not occur prior to Paul’s use, and in the New Testament appears elsewhere only in Colossians 1:20 and 22.47 In each reconciliation passage the focus is different. Romans 5:10–11 focuses on reconciliation between God and sinners who are enemies. In 2 Corinthians 5:18–21 God reconciles us/the world to himself and gives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Colossians 1:20–21 God reconciles to himself all things on earth and in heaven. In Ephesians 2:16 a double reconciliation occurs—that between God and humanity and that between Jews and Gentiles.

In New Testament texts, God is always the one who does the reconciling. Human beings are reconciled; God (or Christ) reconciles. The initiative always lies with God. The cross is God’s act to reconcile people to himself, not an act by which he is reconciled. Even when people are hostile to God and God is angry, he loves and works to restore relations.

46 See Romans 5:10–11; 11:15; 2 Corinthians 5:18–21; Ephesians 2:16; Colossians 1:20–22. Still, Ralph Martin considers it the center of Paul’s theology. See “Center of Paul’s Theology,”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eds. Gerald F. Hawthorne and Ralph P. Martin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1993), 92–95; see also his Reconciliation: A Study of Paul’s Theology (Atlanta: John Knox, 1981); Peter Stuhlmacher, “Jesus as Reconciler, Reflections on the Problem of Portraying Jesus Within the Framework of a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conciliation, Law, and Righteousness, 1–15.

47 Paul may have coined the word; other Pauline texts use the verb katallasso and the noun katallag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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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jwhile we were still weak, at the right time kChrist died for the ungodly. For one will scarcely die for a righteous person—though perhaps for a good person one would dare even to die— but lGod shows his love for us in that m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Since, therefore, n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much more shall we be saved by him from othe wrath of God. 10 For if pwhile we were enemies qwe were reconciled to God by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now that we are reconciled, shall we be saved by rhis life. 11 More than that, we also rejoice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sreconciliatio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5:6–11.

본문 6-8절은 앞의 5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체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바로 희생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한글 성경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래 의미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로 그때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성경속에는 그 때에 대한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때는 역사의 흐름(청소)에 관해서 적절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쇠사슬을 끊을 능력이 없다는 의미에서 적절한 때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울수 없었습니다. 죄에 매여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있었기에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를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때인 것입니다.
- Christ died for the ungodly “at just the right time” (Goodspeed has “at the decisive moment”). Paul wrote to the Galatians that God sent his Son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Gal 4:4). Not only was it the right time in terms of the sweep of history but it was the right time in the sense that we were powerless to break the chains of sin.108 We were unable to help ourselves. Bound by sin and destined for an eternity apart from God, no amount of struggle could free us from condemnation. It was for us “the right time” for Christ’s atoning death.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36.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라는 대상, 즉 그들은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드려진 것이다. 경건치 않음, '아세베스'는 바른 종교적 믿음이나 실천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 Ungodly is a stronger term and refers to “living without regard to proper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 (Louw and Nida 1988:533). It appeared in a similar context in Romans 4:5 to describe those whom God “justifies,” the “wicked,” or ungodly. Here it is used to depict those for whom Christ died. The language of Christ “dying for” us is quite common (four times in 5:6–8; 14:15; Jn 11:50, 51; 1 Cor 15:3; 2 Cor 5:15) and connotes substitutionary atonement, describing Christ’s vicarious death “for” us or in place of us (see Harris 1978:1196–97, who states that hyper means both representation and substitution). Moreover, this sacrificial death of Christ occurred at just the right time, which could mean “at that very time when we were weak” (Käsemann 1980; Moo 1996) but more likely modifies “Christ died for the ungodly,” paralleling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in Galatians 4:4 and meaning the perfect time in history for God to carry out his plan of salvation (Barrett 1957; Cranfield 1975).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3.

7-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거의 없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확증하다라는 단어는 '시니스테미'라는 단어로 보여주다, to demonstrate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여간 여러운 일이 아니다. 혹 이런 일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우리들, 여전히 우리들이 죄인되었을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탕자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발적으로 나보다 우위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바로 이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윤리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구속 역사가 움직이는 목표를 결정합니다.
- Love is the voluntary placing of the welfare of others ahead of one’s own. It is action, not sentiment. Love is the mightiest force in the world. It is the ethical goal of human existence. God is love (1 John 4:16), and that determines the goal toward which all redemptive history moves.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37.

7절을 보면 의인보다는 선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은 더 높은 것처럼 말한다. 여기서 의인은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으로 도덕적으로 본받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나와 개인적인 관계는 없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나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대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은 이런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친구를, 자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그 사랑을 확증하는,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위해서 선물을 주거나, 꽃을 선물하거나 깜짝 이벤트를 하거나 서프라이징 이벤트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야 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의인이나 선인, 친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인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 This is especially seen in the fact that God not only loves us but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that is, has concretely “proven” this love in the greatest possible way (v. 8). This justly famous verse is the apex of biblical statements on divine love. Anyone who loves another person tries to give concrete proof of that love via certain actions, perhaps buying presents or flowers or surprising them with a romantic getaway. God proved the depths of his love in a way none of us would want to do, by giving his Son to die for us. Yet it is far more than that: he did so while we were still sinners, that is, when we were his enemies, godless sinners. This is the primary point Paul is making. Christ did not die for righteous people or for friends; he died for sinful human beings in all their degrading depravity, for those who “suppress the truth by their wickedness” (1:18) and do “not think it worthwhile to retain the knowledge of God” (1:28), who are “filled with every kind of wickedness, evil, greed and depravity” (1:29). Therefore we deserved to experience the wrath of God and eternal judgment, but Christ took our punishment upon himself and paid the penalty in our place, thereby procuring redemption on our behalf (3:21–26).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4.

9-11절)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고 더욱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더욱 지금 우리가 화목하게 된 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사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저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함을 주신 그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
화해는 개인적인 관계이다. 이는 하나님 편의 일방적인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한번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셨습니다. 그 용서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간결하고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이제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입니다.
Reconciliation is a personal relationship; it cannot be a unilateral action on the part of God alone. He has provided forgiveness for all people through the once-for-all death of his Son. Only when that forgiveness is accepted by faith is the compact completed and reconciliation takes place. God’s part is finished; our part is a matter of individual decision.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38.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화목하게된 우리가 예수님의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또한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본문을 보면 유대의 문학적 표현으로 '무거운 것으로부터 가벼운 것으로', 더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나아가는 양태가 9, 10, 15, 17절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그로 말미암아', '그뿐 아니라'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칭하셨는데 그분의 진노로부터 무죄하다라고 선언을 받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인 것이다.
- Moreover, it is a present reality (now) and force in our lives. Paul’s point, however, is that since our justification is a fact, how much more (first in the Greek for emphasis) is it true that we ar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This uses a Jewish hermeneutical technique called “from the weightier to the lighter,” that is, from the more difficult to the less (Cranfield 1975; Moo 1996; Schreiner 1998; Dunn 1988a shows it is used four times—vv. 9, 10, 15, 17). Since God has done the more difficult, justified the ungodly, how much more can he achieve the easier, delivering those who have been declared innocent from his wrath.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4–135.

본문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소조'라는 단어로 마지막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 Saved in this context refers not to spiritual salvation but to being “delivered” from wrath, namely, God’s wrath at the last judgment (see 2:5, 8 on final wrath; 1:18; 3:5; 4:15; 9:22; 12:19 on present wrath). Moo (1996:310–11 n.) has a good summary, pointing out that Paul often uses this term “to depict the final deliverance of the Christian from the power of sin, the evils of this life, and especially judgment (e.g., 1 Cor. 3:15; 5:5; Phil. 2:12).” Paul pictures the Christian as having been saved, as looking forward to being saved, and even as in the process of being saved (cf. 2 Cor 2:15; 2 Thess 2:10).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5.

10절에서 칭의라는 법정적 용어에서 화목이라는 개인, 관계적인 언어로 전환된다. 화목은 칭의의 자연적 결과이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초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세우셨다. 본문에 사용된 화해, 화목이라는 표현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이것이 너무 개인적인 표현이기에 사용된 적이 업서었던 단어인데 바울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칭의를 통해 새워진 새로운 개인적인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여기에서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이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 화목함의 관계는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죄로 인한 불신자들의 적대감이고 또하나는 죄에 대한 그분의 심판으로 인한 하나님의 적대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결과로 이 두 적대감은 제거되었고 새로운 관계가 세워진 것이다. 이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것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분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된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 되는 것이다.
- The following verse (v. 10) repeats the argumen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Here the death of his Son has resulted in our being reconciled to him. Reconciliation is the natural result of justification. After God has declared us righteous on the basis of Christ’s sacrificial death, he establishes a new relationship with us. The language moves from the legal to the personal. Cranfield (1975:267) says reconciliation language was never used in the religious language of the Hellenistic world because it was too deeply personal, but Paul (Rom 5:10, 11; 11:15; 2 Cor 5:18–20) uses it to show the new personal relationship established by God’s justification. Here those who are God’s enemies have been both justified and reconciled …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That is the thrust of being reconciled, to bring enemies into proper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Note the two directions—hostility from the unbeliever due to sin and hostility from God due to his judgment on sin. But as a result of Christ’s death, that hostility has been removed from both sides, and a new relationship has ensued. So if this exceedingly difficult thing has taken place, how much easier it is for God to have saved us through his life. As in verse 9, saved must mean deliverance from his final wrath. But what does through his life connote? Most likely it refers to his resurrection as the means of reconciliation (cf. 4:25; 8:34).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re a single event in salvation history and together constitute the basis of our salvation (see on 4:25).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5.

11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우리가 깨닫고 이를 누릴때의 반응은 바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매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9-10) 우리에게 현재적인 화목함의 기쁨을 주신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미래의 소망과 현재의 구원을 동시에 가진다. 기쁨은 무엇인가? 이 기쁨은 바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은 바로 예배하는 것이다. 이 예배는 계속되는 우리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관계, 화목을 받게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어진 가장 결정적인 모델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경건하지 않은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분의 희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극명하게 선포되고 확증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므로 그분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화목된 상태이기에 더욱 우리는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9절과 10절을 잘 보면 그 문장구조가 유사하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그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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