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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인문주의에서 답을 찾다(배덕만-대장간)


이 책은 지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한 기독교 역사학회에서 배덕만 교수가 진행한 기조 강의의 내용이다. 
먼저 그 주제가 ‘헬조선과 개독교 시대에 읽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역사’인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 사회의 현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시금 500년전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 부흥을 다시금 맞이할 수 있을까 라는 바램을 담은 책이다. 

헬조선은 '지옥(hell)같은 조선’이라는 의미인데 한국의 청년들이 우리 나라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이것과 아울러서 3포, 5포, 7포, N포 세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미래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 최근의 땅콩 회항이나 갑질 논란속에서 보듯이 흙수저, 금수저 논란등이 이 시대를 부르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개독교라는 호칭을 얻었는데 이는 이 땅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이 시대 지탄의 대상이 되고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현실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양심이 되고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돈과 섹스와 권력의 문제에 얽혀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 속에서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으로 한국 교회안에 팽배한 혼합주의, 현실과의 타협, 신학의 실종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적 영성의 회복, 종교 본연의 초월적 가치 추구,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한국 교회의 생태계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배경이 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도와 라틴어 텍스트를 복원하는 운동이었는데 고전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된 인간의 위치를 회복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고전 연구는 인쇄술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인문주의운동의 선구자로 에라스무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고전어를 공부하여 고대 문헌을 교정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성경과 고전, 교부들의 작품을 발굴해서 편집, 주석하는데 생을 바쳤다. 에라스무스는 이런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오류를 바로잡고 본래의 순수한 진리를 복원하여 자기 시대의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65) 이러한 일환으로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고 새로운 라틴어 번역을 소개했으며 ‘불가타’의 오역을 지적했다. 또한 시대를 풍자한 ‘우신예찬’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했던 루터와는 달리 인간의 창조성과 존엄성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67)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신약성경을 출판했던 일차적 이유를 “시골 사람이 쟁기 끝에서, 방직하는 사람들이 베틀에서, 여행하는 사람이 자기의 여행 중에 성경을 노래하는 것을, 심지어 여자들도 성경 본문을 읽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식과 믿음, 자유와 경건, 개인과 교회가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세상이 이성과 교육을 통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믿음은 카톨릭과 종교개혁의 진영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고전어, 성경, 그리고 교부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차이점으로는 인문주의자들은 교리에 관심이 적었던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참다운 교리를 확립하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순수한 신앙과 도덕적 실천에서 찾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것보다 성경에 근거한 참다운 교리를 우선시 했다. 또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훨씬 더 낙관적, 긍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루어와 에라스무스 사이에서 한사람을 선택해야 했을때 그들은 에라스무스 대신 루터를 선택했다.(74-6)

교회는 인간에 대한 인문주의적 가치에 주목하며, 이 지옥같은 현실을 향해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라고, 인간을 상품이 아니라 생명체, 인격체로 존중하라고 선언해야 한다. 성경이 인간의 죄성과 한계를 언급한다고 해서 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성경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균형있게 조명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강력히 선포하기 때문이다. 

‘개독교’ 현상은 중세 말의 타락한 가톨릭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죽음의 공포를 토대로 연옥교리와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 했고, 교황이 황제와 세속의 권력을 다투며, 교회가 종교적 목적을 앞세워 십자군을 동원했다. 재정적 탐욕에 의해 성직이 매매되며, 성직자들에 의해 사생아들이 무수히 양산되었고, 재물-치유-출산을 목적으로 뮤물과 성지순례가 성행했다. 이를 위해 신학자들이 성경과 무관한 교리를 만들고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야말로 성경과 상관없는 종교가 된 것이다. 500여년전의 카톨릭 시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 해법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교리와 관행 위에 성경을 두는 것이다. 성경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이교적 세속적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안에서 주인 행세 하는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진지하고 정직한, 그리고 철저한 연구와 묵상을 수행하고 이를 가르쳐야 한다. 

저자는 기독교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그리고 이시대 한국교회를 연관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헬조선, 개독교라는 단어를 극복할 것을 이시대 교회에 요청하고 있다. 앞서 1-4부는 5부를 선포하기 위한 서론이라고 여겨진다. 5부의 각 주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장. ‘헬조선’을 향해 인간의 가치를 선포하라
2장. 근원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라
3장. 단절된 세상과 소통하라
4장. 신학자여,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발언하라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는 이 내용을 역사 신학회의 기조 연설로 준비했기에 마지막 부분에 신학자들을 향해서 저항하는 지식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학문을 하는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역자, 목회자들을 향해 요청되는 메시지일 것이다. 

저자는 이책의 말미 5부 4장 “신학자여,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발언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문주의자들은 대학과 교회를 지배하던 스콜라주의를 당당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교회의 전통이란 미명하에 성경적 진리를 억압, 왜곡하던 당대의 교회를 향해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과 초대교회를 토대로, 성직자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용감하게 지적하며 저항했다. 이를 위해 대학의 강단이나 교회의 고위직에 연연하지 않고, 당시에 빠르게 발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쇄소를 중심으로 학문과 지성을 통해 시대와 싸웠다. (중략) 그야말로, 인문주의자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비판적 지식인, 행동하는 지성, 저항하는 인텔리겐치아였던 것이다. 반면, 현재 한국의 신학자들은 철저하게 교권에 종속되어 있다. 교파와 신학의 차이를 떠나, 대부분의 교단신학교는 교단의 통제 아래 놓여 있으며, 학문의 자유나 교수의 신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교단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일체의 비판적 성찰이 불가능하며 신학적 실험도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신학자들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지면서 다수의 신진 학자들이 신학교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다양한 명목의 비정규직 신분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학교 내의 갑을 관계도 극복하기 어렵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며 한국교회를 위해서 외친 저자의 외침은 이시대 신학자들과 사역자들을 향한 사자후처럼 들린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린 시대에,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를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상식이 기적이 되어 버린 교회’속에서, 개독교라는 비판을 달게 받으며 우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을 외치고 이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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