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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After these things kGod tested Abraham and said to hi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He said,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l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of which I shall tell you.” So Abraham rose early in the morning, saddled his donkey, and took two of his young men with him, and his son Isaac. And he cut the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arose and went to the place of which God had told him. On the third day Abraham lifted up his eyes and saw the place from afar. Then Abraham said to his young men, “Stay here with the donkey; I and the boy1 will go over there and worship and come again to you.” And Abraham took the wood of the burnt offering and mlaid it on Isaac his son. And he took in his hand the fire and the knife. So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And Isaac said to his father Abraham, “My father!” And he said, “Here I am, my son.” He said, “Behold, the fire and the wood, but where is the lamb for a burnt offering?” Abraham said, n“God will provide for himself the lamb for a burnt offering, my son.” So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k 1 Cor. 10:13; Heb. 11:17; James 1:12, 13; 1 Pet. 1:6, 7

l 2 Chr. 3:1

1 Or young man; also verse 12

m [John 19:17]

n [John 1:29, 36; 1 Pet. 1:19; Rev. 5: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22:1–8.

 

 

1-2절) 그 일들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일들 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깝게는 이삭을 낳고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것일 수도 있지만 길게 본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여 살아온 시간 전체일 수도 있다. 후자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정말로 자신을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의 시점에 부르심의 초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충분하게 하나님에 대한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쌓인 이후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이스마엘이 떠날 때 이삭이 2-3살 정도였는데 이제 장성한 청년이 되어있는 것이다. 적어도 1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 것과 마귀에게 유혹을 당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시지 않는다.(약 1:13) 하지만 때때로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지 시험하신다(출 15:25, 16:4).

2절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강조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표현한다. 이 시점이 이스마엘이 떠난 사건(21:8-21) 이후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강조가 더욱 아브라함의 순종의 의미를 부각시켜준다. 

이 하나님의 요구는 지금까지 허락된 모든 약속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The particular form of the verb “tested” makes this phrase a summary of the whole passage and clarifies the meaning of the events. The genuineness of Abraham’s obedience to God is tested. While it is not unknown for God to test individuals, testing must be clearly distinguished from tempting. God does not tempt anyone to do evil (see note on James 1:13); he does, however, test the commitment of people (e.g., Ex. 15:25; 16: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87.

 

The text clearly makes the point that what follows is a divine testing, not a demonic temptation. This particular verb, with God as the subject, does not occur again until Exod. 15:25 (and cf. Exod. 16:4; Deut. 8:2, 16; 33:8 for references to the same time period; also Deut. 13:4 [Eng. 3]; Judg. 2:22; 3:1, 4 for other divine testings). The wilderness period, after the departure from Egypt, is a testing experience. Will the Israelites take freedom with all the insecurities that freedom brings, or will they take incarceration and the guarantee of regular meals? That is the test. Whenever a human being is the subject of this verb and God is the object, the testing is negative, uncalled for, and out of place.16 Perhaps the closest parallel to Gen. 22:1–19 for the “divine testing” motif occurs in Exod. 20:20, right after the revelation of the Decalogue. In both instances the source of the test is hāʾĕlōhîm, some form of the verb nāsá is used (nissá/nassôṯ), and the aim of the testing is to evidence the fear of God (yerēʾ ʾĕlōhîm, Gen. 22:12; tihyeh yirʾāṯô, Exod. 20:20). The major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in Exod. 20:20 the people know well, via Moses, that through the revelation of his law God will test his people. How will his people respond to this God who has revealed himself in word and act? By contrast, the reader, but not Abraham, knows that what he is about to hear is a divine test.

16 See Exod. 17:2, 7; Num. 14:22; Deut. 6:16; Ps. 78:18, 41, 56; 95:9; 106:14. The exception is Ps. 26:2. In a few places nissâ carries the idea of “to have experience of, to practice, to be used to, be familiar with.” Cf. M. Greenberg, “nsh in Exod. 20:20 and the Purpose of the Sinaitic Theophany,” JBL 79 (1960) 273–76. Besides Exod. 20:20 cf. Deut. 28:56; 1 Sam. 17:39.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101.

 

특별히 본문 2절에서는 ‘나’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원하건대, 바라건대’라는 강조불변화사, 감탄사이다. 이 감탄사는 창세기에서 68번 사용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도중에 사용되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5번(창 13:14; 15:5; 22:2; 출 11:2; 사 7:3)인데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매우 어려운 일을 요구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세기 13:14, NKRV)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5, NKRV)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출애굽기 11:2, NKRV)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이사야 7:3, NKRV)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지금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헤아리고 계신 것이다. 

 

The divine command Take is followed by the particle -nāʾ, which is normally translated something like “please” or “I beg you.” It might seem strange to some modern readers for God to say to Abraham “Take, please, your son” or “Take, I beg you, your son.” For this reason some have assigned to -nāʾ here a strengthening function instead of the usual precative meaning.17 But I observed in my discussion of Gen. 13:14 that -nāʾ, which occurs more than sixty times in Genesis, is used only five times in the entire OT when God speaks to a person.18 Each time God asks the individual to do something staggering, something that defies rational explanation or understanding. Here then is an inkling at least that God is fully aware of the magnitude of his test for Abraham.19

17 See J. Hoftijzer, “David and the Tekoite woman,” VT 20 (1970) 440 n.2.

18 See Y. T. Radday, “The Spoils of Egypt,” ASTI 12 (1983) 136–37. We need to add Isa. 7:3 to Radday’s four examples (Gen. 13:14; 15:5; 22:2; Exod. 11:2).

19 See Crenshaw, Whirlpool of Torment, p. 14.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101.

 

본문에서 말하는 번제는 희생제물 모두를 온전히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원하셨을까? 고대 근동 사람들은 실제로 신에게 사람을 번제로 바침으로써 신이 주는 지속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문에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니싸’인데 일정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따라 테스트하는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훈련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굳세게 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신다. 즉 처음부터 인간 번제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이를 실행할 의도는 없으셨지만 지금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바로 이삭이었기에 이런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헌신과 순종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이삭을 죽이고자 했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돌려 받은 것이다. (히 11:17-19)

히브리서 11:17–19 (NKRV)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아들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자. 이삭은 아브라함의 삶의 의미이자 인생의 결정판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삶의 보람을 느꼈다. 하란에 있는 친척들을 떠나와 가나안에서 이곳 저곳 정처 없이 떠돌 사는 그의 나그네 인생에 대한 위안이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즉, 아브라함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노년에 얻은 이삭이었다. 뿐만 아니라 늙은 아브라함이 지팡이 삼아 의지하며 살던 아들이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늙은 아브라함에게 지팡이를 빼앗으려 신 것이다. 

 

3-4절)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종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준 곳으로 갔다. 여정을 떠난지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순종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 그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이에 순종한다.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정은 72km에 해당하는 거리로 꼬박 2-3일을 이동해야하는 거리였다. 성경에서는 제 삼일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된다.(31:22; 42:18; 출 3:18; 15:22; 19:11, 15, 16; 마 16:21; 고전 15:4) 이 일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3일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이는 그가 즉흥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3일의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라도 원했다면 결심을 번복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마 이 3일의 시간이 아브라함의 인생에 가장 잔인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우리는 이 상황속에서 사라의 반응을 상상해볼 수 있다. 성경은 이 사건속에서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을 사라에게 이야기했는지 안했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5-8절)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이삭과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올것이다.’라고 말하고나서 번제에 사용될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고 나아갔다. 이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갔다. 

 

아브라함은 혹시라도 종들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것을 말릴까봐 두 종을 산 밑에 두고 아들과 단 둘이서 선을 올라갔을 것이다. 이렇게 올라가는 중에 아브라함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 아마도 이삭은 전혀 상황을 모르고 아주 단순하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 자신이 번제에 쓸 장작을 지고 있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한손에는 불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오르는 중인데 정작 번제에 사용될 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대답을 한다. 과연 이 대답은 그저 둘러내는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올라가면 번제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을까? 아브라함이 부름받은지 약 4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40여년간 하나님을 따르며 그분의 약속을 받고, 수많은 일들을 겪어왔다. 이 과정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가신다면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가나안의 다른 신들처럼 무자비하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두려움 가운데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Isaac is curious, and he does not hesitate to raise a logical question: Where is a sheep for a burnt offering? Isaac’s question indicates that he knew what was involved in the act of worship (v. 5) in which he and his father were about to engage. Although the text has not expressly said that Isaac was informed that they were going to offer a burnt offering, the burnt offering was not only the oldest offering but the only offering mentioned in the patriarchal age (see Job 1:5). Abraham, yet some distance from his destination, can see the place (v. 4), but Isaac cannot see any sacrifice.

An honest question deserves an honest answer. Abraham does not turn on Isaac for speaking out of turn or for being presumptuous. Isaac’s question consists of six words (in Hebrew), and Abraham responds with an answer of six words. Isaac begins his question with Father. Abraham ends his answer with son. We have here the same phenomenon as in v. 1—special attention is drawn to the subject by placing it ahead of the verb: God himself will provide.…” There is no indication that Abraham replies hesitantly or misleadingly, but at least one writer detects ambiguity in Abraham’s “God will provide.” That answer can be reduced to either “I don’t know” or “it will come out right in the end.”48 There is possible ambiguity not only in Abraham’s first word to Isaac, “God will provide,” but in his last words in this verse: “God will provide … for a burnt offering, my son.” “My son” at the end of the quote may be understood as a vocative (the way Abraham wished Isaac to hear it) or in apposition to “a burnt offering”—“God will provide … for a burnt offering, i.e., you, my son” (the way Abraham would not want Isaac to hear it).49 Isaac makes no response to his father’s explanation. Such silence could be read as either satisfaction with Abraham’s projection or bewilderment.

48 See F. Landy, “Narrative Techniques,” p. 17. Westermann (Genesis, 2:359) describes Abraham’s response as throwing “the ball back into God’s court.”

49 See Sternberg,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p. 192; Crenshaw, Whirlpool of Torment, p. 23. The reading of “my son” in apposition to “burnt offering” has a long history and is not a discovery of modern exegetes. See Midrash Gen. Rabbah 56:4–5.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109–110.

 

본문은 아브라함의 삶속에 가장 큰 시험이다. 앞서 아브라함의 삶에 여러가지 시험이 있었다.(12, 13, 16, 20장)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그 일들 후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장 큰 시험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이스마엘을 잃었다. 이제 이삭을 잃으면 대가 끊기는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이 시험을 제대로 통과함으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제대로 얻게 된다. 본문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명령(22:2)은 그를 처음 부르시는 내용(12:1)을 떠오르게 한다. 둘다 명령형으로 시작되는데 12장 1절은 떠나가라, 22장 2절은 데려가라라고 말한다. 12장에서는 ‘너의 고향, 너의 친척, 너의 아버지 집’에서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계시고 22장에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또한 이 명령에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길을 떠나야하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할뿐 구체적인 목적지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으로 가라고 하실 뿐 구체적인 행선지를 밝히지 않으신다. 우리들은 뭔가 구체적인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한다. 나 자신도 일을 하는 것 자체는 힘든 일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큰 그림을 알지 못한채 기다리거나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못견뎌 한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실 때는 내가 익숙하고 잘하는 것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불편해하고 잘 하지 못하는 일들을 요구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만을 의지하고 내려 놓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의 연관성은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22:2)과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12:1)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 문구의 반복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이 문구는 이 두 곳을 제외하면 성경에서 다시는 사용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 문구를 시용하여 두 사건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12:1)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22:2)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동일한 비중의 심리적인 갈등을 유발하는 문구들로 여겨진다. 저자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여정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시작과 그들이 누리는 축복이 모두 하나님의 복과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함이다.(엑스포지멘터리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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