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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o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16 pwho, though he was in qthe form of God, did not count equality with God ra thing to be grasped,27 but semptied himself, by taking the form of a tservant,3ubeing born in the likeness of men. 8 And being found in human form, he humbled himself by vbecoming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weven death on a cross. 9 xTherefore yGod has z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a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10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bevery knee should bow, c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d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e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oRom. 15:3; See Matt. 11:29
1Or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pSee John 1:1
qSee 2 Cor. 4:4
rJohn 5:18; 10:33; [John 14:28]
2Or a thing to be held on to for advantage
s2 Cor. 8:9; 13:4; See Mark 9:12
tSee Isa. 42:1; Matt. 20:28
3Or slave(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uRom. 8:3; Gal. 4:4; See John 1:14
vHeb. 5:8; [Matt. 26:39; John 10:18; Rom. 5:19]
wHeb. 12:2
xJohn 10:17; [Isa. 52:13; 53:12; Heb. 2:9]
ySee Matt. 28:18
zActs 2:33
aEph. 1:21; Heb. 1:4; [Acts 5:41]
bIsa. 45:23; Rom. 14:11
c[Rev. 5:3, 13]; See Eph. 1:10
d[Rom. 10:9; 1 Cor. 12:3]
e[Rom. 14:9]; See John 13: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5–11.
5-11절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불리는 유명한 구절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섬김의 모범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 모범을 설명하면서 그분의 선재, 성육신, 죽음, 부활,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심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삶은 진정한 영적인 진보의 본을 보여준다. 그분은 높은 자리를 위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한 투쟁을 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이 구절이 바울의 저작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겸손과 사랑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며 본문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요약이 독특한 것이 아니고 같은 주제들이 신약 전체를 통해서 발견된다.
Christ’s Example of Humble Service.This passage is often referred to as the “hymn of Christ.” Paul depicts Christ’s example of service in a stirring poem that traces his preexistence, incarnation, death, resurrection, and ascension to the right hand of God. Paul wrote this magnificent theology to encourage the Philippians to consider other people’s interests first (see v. 4). Jesus is the paradigm of genuine spiritual progress: not a self-aggrandizing struggle for supremacy, but a deep love for God and neighbor shown in deeds of service. Verses 6–11 have some clear indications of poetic structure, leading some to believe that this is a pre-Pauline hymn adapted by Paul. It is just as likely, however, that Paul composed the hymn for this setting. In view of the myriad theological questions that arise in these verses, it is critical to keep two things in mind: (1) these verses were written not to spur Christians to theological debate but to encourage greater humility and love; and (2) the summary of Christ’s life and ministry found here is not unique: the same themes are evident throughout the N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먼저 이 찬송시를 헬라어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셔서/형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누릴/취하는 것(하르파그모스)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스스로를 비우셔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
인간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셨고
죽음,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예수 이름에 하늘의 존재들이나 땅 위의 존재들이나 땅 아래의
존재들이나 모두 무릎 꿇게 하셨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3–84.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본문에서 말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에 받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모범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이 가능하다. 본문속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를 모두 본보기로 제시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볼때는 후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이 좀더 우세해 보이지만 앞선 1-4절의 내용, 한마음과 사랑에 하나되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볼때 두가지 모두로 해석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 소유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연합하는 삶,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는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The believer’s mindneeds to reflect on the proper model, if life is p 2283 to be lived for God. There is some debate as to whether this mind-set is something Christians receive by virtue of being united to Christ(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or whether it is to be based on the model of Christ(ESV footnote: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The Gk. has no verb; either “is” or “was” has to be supplied.) In light of the consistent theme of behavior modeling in this letter (Jesus, Paul, Timothy, and Epaphroditus are all held out as examples), many interpreters have adopted the latter meaning. Both ideas are theologically true. In either case, the central theme of vv. 1–5 is the same—that the Philippian church would be of one mind (v. 2), united by love (v. 2) and humility (v. 3), and looking out for the interests of others (v. 4).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2–2283.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권면을 받고 있으며, 일치하게 하는 영, 즉 성령이 북돋우는 교제가 있으므로 성도들 간에 겸손과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상호 관계를 해야 합니다. 자기 이익, 자기 의견, 자기 주장보다 남의 이익, 의견과 주장에 귀 기울임으로써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교회 공동체의 삶을 이루어 감”입니다. 이제 바울은 2:5–11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그려냄으로써 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적 사랑을 더욱 북돋우려 합니다. 따라서 5절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었던 이 마음을 여러분들 안에 품으시오”,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서 여러분들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시오”.
두 번째 번역을 따르면,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2:6–1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찬송시는 그리스도를 윤리적 모범으로 제시하기보다 구원의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시를 여기 담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이루어진 구원을 받은 자들인 만큼 당연히 겸손과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첫 번째 번역을 따르면, 2:6–1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찬송시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희생적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어 그들도 이 시가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모범으로 제시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0–81.
모든 신학자들은 2:6–11 구절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라는 데 동의합니다. 또 다수의 학자들이 이 시가 원래 바울 이전의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선포인데 바울이 이곳에 인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꽤 많은 수의 소수 학자들은 바울이 이 시의 저자라고 믿습니다. 필자도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데, 그 주된 이유인즉 이 시에 바울만 쓰는 중요한 신학 언어인 “형상”(morphe/eikon: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함. 롬 8:29, 고전 15:45–49, 고후 3:18, 4:4–6 등)이 나오고, 어휘나 내용면에서도 이어 나오는 빌립보서 2–3장(특히 3:20–21)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가 바울이 지은 것이라면, 그가 전부터 지어 사용하여 오던 것을 여기 활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 비로소 지었는지는 따로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시의 깊은 내용과 정교한 형식을 볼 때 아마 전자가 옳은 견해일 것입니다. 바울이 원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선포하는 노래로 지은 것을 이곳에서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 해석하여 인용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이 시의 기원에 대한 토론은 초대 기독교의 신학 발전 과정을 추적하거나 바울 신학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는 중요할지 몰라도 빌립보서의 본문을 강해하는 데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2–83.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성육신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데우)로 계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말한다. 여기서 본체는 어떤 것의 모든 특징과 특성을 소유한, 어떤 것의 참되고 정확한 본성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본체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가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7절의 종의형체를 가지는 것과 직접적으로 대비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며 언제나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가지셨지만 그 특권을 끝까지 고수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를 취하시 않으시고 도리어 섬김의 자세를 가지셨다.
The Son of God is and always has been God. “Form” could also be a reference to Christ being the ultimate image of God, “the exact imprint of his nature” (Heb. 1:3). It might also refer to the fact that he is the visible expression of God’s invisible glory (Col. 1:15). Remarkably, Christ did not imagine that having “equality with God” (which he already possessed) should lead him to hold onto his privileges at all costs. It was not something to be grasped, to be kept and exploited for his own benefit or advantage. Instead, he had a mind-set of service. “Christ did not please himself” (Rom. 15:3). In humility, he counted the interests of others as more significant than his own (Phil. 2:3–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3.
이 그리스도의 찬송시를 해석할 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6절에 나오는 “하르파그모스”(harpagmos)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탈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본문 6절에서 그 말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상이한 뜻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첫째 “탈취할 것” (res rapienda),둘째 “탈취해서 얻은 것, 즉 노획물( 누릴 것)” (res rapta), 세째 “탈취하기”(raptus). 헬라어로 씌어진 고대 문서들에서 발견한 “하르파그모스”의 용례에도 이 3가지 뜻은 모두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의 정확한 내용과 바울 신학 전체의 규명을 위해서라도 이 시에서 그 말이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는가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첫 번째의 가능성을 따른다면 6절은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로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손만 내밀면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이 시는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 즉 종말의 아담으로 보고, 첫 아담과 모형론적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창 1:26–28), 그런 높은 위상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완전한 동등됨을 탈취하려고, 즉 하나님같이 되려고 과일을 취하였습니다 (창 3:5).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형상의 위치에서 굴러 떨어져 사단과 피조물 그리고 죄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첫 아담의 자손들로 그와 같이 스스로를 하나님같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허영과 교만(hybris)에 빠져 하나님같이 되려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과 같이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높은 위상에서 타락하여 비인간화합니다. 즉 사단과 피조물, 죄와 죽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리스도께서 종말(“오는 세상”)의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의 숙명을 극복한 것입니다. 아담과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인간과 같이 되고, 죽음의 세력에 대한 인간의 노예적 실존에 참여하였으며, 스스로를 낮추어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첫 아담이 자기를 높여 하나님같이 되려 했던 시도가 그를 인간 이하로 굴러 떨어지게 한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자기를 낮춤과 순종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높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이름(“퀴리오스 - 주”)과 만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 하나님과 동등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첫 아담적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찬송시가 바로 그 구원의 사건을 선포하며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아담 기독론(롬 5:12–21, 고전 15:20–22, 45–49 등)과 잘 조화를 이루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찬송시도 바울의 아담 기독론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선재 상태(즉 성육신하기 전 상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동등함을 갖지 못한 존재, 즉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였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해석을 배격하고 두 번째 해석을 취합니다. 둘째 해석을 따른다면, “하르파그모스”를 이미 취해 얻은 것(노획물)(res rapta)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선재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었지만 그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됨을 누릴 수 있는 노획물(booty)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해석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완전한 동등성을 천명하여 역사적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적 신론과 기독론에 부합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 위의 두 해석 중 어느 것이 옳은가 하고 오랫동안 논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하르파그모스”를 “탈취하기”(raptus)라는 행위 자체로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이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앞의 두 해석들은 6절의 시작하는 분사구를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으나”라는 양보구로 번역하나, 세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시었기에”라는 이유구로 번역합니다. 또한 앞의 두 해석들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하르파그모스” 의 목적어로 이해하는 데 반해, 이 셋째 해석은 다음과 같이 그것을 “하르파그모스”의 의미상 주어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기를 의미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첫째와 둘째 해석: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노획물로
여기지 않았다.”
- 셋째 해석: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기에
하나님과 동등됨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첫째 해석이 이 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종말의 아담으로 그려 첫 아담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셋째 해석은 이 시가 신성과 인간성의 대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적인 존재, 빈곤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성의 본질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채우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갈등을 일으키고 죽음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온전한 분이기에 남의 것을 취해 스스로를 채울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성의 본질은 자신의 “충만함”(pleroma)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 있습니다. 셋째 해석에 의하면, 이 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성의 표현을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형체이셨기에(곧 신성의 존재이셨기에), 하나님과 동등됨은(즉 신성은) (무엇을/남의 것을) 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 이 은혜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기 주장하여 서로의 것을 빼앗아 살려는 불가능한 게임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요한복음 1:1–18의 시와 근본적으로 비슷한 뜻을 가집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보다 자세히 본 뒤 이 해석들을 음미해 봅시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4–88.
7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기서 자기를 비워라는 표현이 많은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에 사용된 ‘케노오’라는 단어는 ‘비우다, 쏟아 내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지위와 특권을 버리다’라는 의미를 포함함다. 여기에서 ‘케노시스’ 이론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는 그리스도가 지상 사역기간동안 자신의 신적 속성을 일시적으로 포기하셨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던가 몇가지 신적 속성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왕으로 모든 특권을 소유한 분이지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할 평범한 유대인의 아기가 되시기 위해서 그 특권들을 버리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심으로 자기를 비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계셨던 능력의 자리에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권리가 있으셨지만 그분의 사랑은 죄 많은 인류를 위해서 그를 연약함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 것이다.(고후 8:9) 이 비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진정한 신성을 포기함으로가 아니라 인간이 되심으로 이루어졌다.
Made himself nothinghas occasioned much controversy. Greek kenoōcan mean “empty, pour out” or also (metaphorically) “give up status and privilege.” Does this mean that Christ temporarily relinquished his divine attributes during his earthly ministry? This theory of Christ’s kenosisor “self-emptying” is not in accord with the context of Philippians or with early Christian theology (see the article on The Person of Christ). Paul is not saying that Christ became less than God or “gave up” some divine attributes; he is not even commenting directly on the question of whether Jesus was fully omnipotent or omniscient during his time on earth. Nor is he saying that Christ ever gave up being “in the form of God.” Rather, Paul is stressing that Christ, who had all the privileges that were rightly his as king of the universe, gave them up to become an ordinary Jewish baby bound for the cross. Christ “made himself nothing” by taking the form of a servant, being born in the likeness of men(roughly equivalent phrases). While he had every right to stay comfortably where he was, in a position of power, his love drove him to a position of weakness for the sake of sinful mankind (cf. 2 Cor. 8:9,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 he became poor, so that you by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The “emptying” consisted of his becoming human, not of his giving up any part of his true deit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3.
이 단어를 전통적인 루터파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때 자신의 신성을 비워 버렸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하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는 신성을 비워 버린 순전히 한 인간이 되므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도 대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할 수도 없고 우리의 구원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대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요 1:14–18). 이와 같은 신약의 공통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본문의 “비웠다”는 동사를 후기 개신교 신학의 한 부류인 케노시스 기독론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신성의 존재가 인간과 같이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오심, 인간의 가난한 처지에 참여하심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가 신성의 충만함을 견지하면서 어떻게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왔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이 시의 의도가 아닙니다. 이 시는 다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운명에 동참했다는 것, 그것을 위해 그가 스스로를 비우셨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88–89.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심지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앞선 7절의 구체적인 구현이 8절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특권을 버리시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십자가형은 단순히 죄수를 처형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최고의 모욕이었고 경멸할 가치조차 없다는 로마의 공적인 선언에 해당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은 비하와 수치로 더 가중되었다. 이러한 십자가형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부께 대한 최고의 순종의 표현이다.
여기 “낮추셨다”의 헬라어는 ‘에타페이노센’입니다. 이것은 앞의 3절에서 언급한 “겸손”이라는 말과 3:21에 나오는 “낮은 몸”과 같이 “타페이노(tapeino-)” 어간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신 것입니다. 이미 3절의 권면을 받은 독자들은 이 절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도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낮추셔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의 극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시세로(Cicero)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한 죽음”이라 칭하고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죽음을 당한 것이고, 그러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90.
9절)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를 그 죽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이 이름이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인 여호와를 가리킬 것이다. 이 여호와라는 표현은 70인역에서 헬라어 ‘큐리오스’로 번역된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바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성육신 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지위와 권세(마 28:18, 행 2:33)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0-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문 전체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범은 그분의 낮아지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귀를 통해서 결국 낮아짐이 높아짐이 되는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높아지기 위해서 나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은 진심을 다해서 낮아지셨다. 겸손함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 힘을 바로 사랑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금 모든 이름위에 높여주심으로 모든 무릎을 그분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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