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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Let a woman learn quietly owith all submissiveness. 12 pI do not permit a woman to teach or to exercise authority over a man; rather, she is to remain quiet. 13 qFor Adam was formed first, rthen Eve; 14 and Adam was not deceived, but sthe woman was deceived and became a transgressor. 15 Yet she will be saved through tchildbearing—if they continue in ufaith and love and holiness, with self-control.
o Titus 2:5
p [1 Cor. 14:34]
q Gen. 1:27; 2:8
r Gen. 2:18, 22
s Gen. 3:6, 13
t [Gal. 4:4]
u ch. 1: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2:11–15.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2:11–15.
9-10절에서 바울은 여성도들은 단정함과 선행으로 외면보다 내면을 가꿔야함을 권면했다. 이어 11-15절에서는 교회안의 남녀관계속에서 여성의 태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당시 로마시대의 법률로 ‘파트리아 포테스타스’(아버지의 권한)이라는 규정이 있었다. 자식의 운명이 아버지에게 맡겨져 있다는 내용으로 당시 매우 가부장적인 문화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도 시대적인 문맥속에서 읽어야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바울은 앞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언급한 바 있다(6절). 이것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특권 의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되었다는 사실 또한 함축한다. 남성과 여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평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일견 바울의 주장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절은 ‘공중 예배시 질서에 대한 교훈’이란 문맥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나 상황을 막론하고 자구적으로 그대로 적용되는 보편 원리가 아니다. 지금 바울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입각하여 공중 예배라는 프리즘을 통해 여성들이 지녀야 할 태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는 유사한 교훈이 기록된 고전 14:31-36을 참고하라. 한편 이와 같은 언급은 당시 본서 수신자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와 같은 오해들 곧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나머지 남자와의 기능론적 차이를 망각한 채 행동함으로 사람들의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사례가 있었을 것이란 점을 짐작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성적 차별의 철폐를 성적 차이의 철폐로까지 확장시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옥스포드 129)
11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네’는 ‘남자와 반대되는 성인 여성, 결혼한 여자, 최근에 결혼한 여자’, ‘여인, 아내, 신부’의 의미를 지닌다.
‘순종함으로’는 ‘휘포타게’인데 이는 ‘굴복, 복종’이라는 의미로 ‘~아래에, 부족한”을 의미하는 전치사 ‘hypo’와 ‘두다, 정해두다’라는 동사 ‘타쏘’의 합성어로 ‘휘포타쏘’는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라는 의미이다. 어떤 것 아래 위치하여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엔 파세 휘포타게’(with all submission)으로 사용되었다.
‘조용히’로 번역된 ‘헤쉬키아’는 소극적 차원에서 ‘침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적극적 차원에서 ‘평화와 안식’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바울은 공적 예배시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조용히 배울것을 요청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 교회안에 문제를 일으키고 시끄럽게 만드는 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절)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본절은 공예배시 여성도들이 취해야할 자세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이를 가정이나 일반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르치는 것’으로 번역된 ‘디다스칼레인’은 공예배시 여성도들이 공적으로 설교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동사 ‘디다스코’는 ‘가르치다, 지도하다라는 의미이고 명사인 ‘디다케’는 ‘가르침, 교훈’이라는 의미이다.
‘주관하는 것’으로 번역된 ‘아우덴테인’은 ‘주관하다, 권세를 휘두르다’라는 동사 ‘아우덴테오’의 현재 부정사형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공예배시 여자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과 여자가 교회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과연 이 금지 규정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먼저 이 바울의 명령은 여자들이 에베소나 고린도에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문화에 속한 여인들이 가르칠만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이는 이 시대 그 문화권에만 해당되는 제한된 명령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를 보편적인 창조 교리를 통해 설명하고 당시 에베소에 거명되는 거짓 교사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잘 교육받은 여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아내가 남편을 가르치거나 남편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만을 금지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하던 이 바울의 권고를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명령을 주신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교훈은 바울이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발생했을 법한 모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권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이 성령의 열광적인 은사에 사로잡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들고 어지럽게 만들었던 상황에 당면하여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했던 것과 같이 여기서도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알려지지않은 에베소 교회의 특정한 상황을 감안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브리스가(롬 16:3-5)와 유오디아 및 순두게(빌 4:2,3) 같은 여성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고 이들의 활약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던 바울은 일관성이 없는 매우 모순된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바울은 단지 어떤 의견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글을 쓴다(예컨대 살전 4:1; 살후3:6) 이 진술은 바울이 교회가 함께 모일 때의 관례에 대해 교회에 제시한 사도적 지침이라는 문맥 속에서 주어진다. 그 문맥에서 다음 두 가지는 금지된다 (1) 여자가 교회에서 님자에게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2)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것’에 대한 언급은 모인 교회라는 문맥 속에 있다) 여자가 다른 여자를 가르치는 것과 여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니며 다른 곳에서는 둘 다 권장된다(여자가 여자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딤 2:4를 참조하라 여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딤후 1:5를 참조하라) 또한 이 구절은 교회 밖의 리더십의 상황에서(예컨대 기업이나 정부) 여자의 역할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 사이에 있는 접속사(헬 ‘우데’)의 존재는 바울이 ‘권위 있는 가르침’ 이라는 한 가지 활동이 아닌 서로 다른 두 가지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가리킨다 ‘주관하는’ 이란 말은 신약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발견되는 헬라어 ‘아우텐테오’롤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신약 밖에 존재하는 이 단어의 80회가 넘는 예들은 그 의미가 (때때로 주장되는 것처럼 ‘권위를 빼앗다’나 ‘권위를 남용하다’ 등이 아니라) ,권위를 행사하다’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목사/장로/감독의 역할은 가르치고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구절에 따르면 여자들은 이런 직분으로 섬기는 일에서도 제외될 것이다(참조 딤전 3:2) 따라서 바울이 여자들에게 조용할 것을 요구할 때 그 말은 여지에게는 모밍 교회에서 가르치는 책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자들은 교회 모임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제로 말을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고전 11:5를 보라) 고전 14:34~35의 해설도 함께 보라
- 2:12 I do not permit. Paul self-consciously writes with the authority of an apostle (e.g., 1 Thess. 4:1; 2 Thess. 3:6), rather than simply offering an opinion. This statement is given in the context of Paul’s apostolic instructions to the church for the ordering of church practice when the church is assembled together. In that context, two things are prohibited: (1) Women are not permitted to publicly teach Scripture and/or Christian doctrine to men in church (the context implies these topics), and (2) women are not permitted to exercise authority over men in church. (The reference for both “teaching” and “exercise authority” here is within the context of the assembled church.) Women teaching other women, and women teaching children, are not in view here, and both are encouraged elsewhere (on women teaching women, cf. Titus 2:4; on women teaching children, cf. 2 Tim. 1:5). Nor does this passage have in view the role of women in leadership situations outside the church (e.g., business or government). The presence of the word or (Gk. oude) between “to teach” and “to exercise authority” indicates that two different activities are in view, not a single activity of “authoritative teaching.” “Exercise authority” represents Greek authenteō, found only here in the NT. Over 80 examples of this word exist outside the NT, however, clearly establishing that the meaning is “exercise authority” (not “usurp authority” or “abuse authority,” etc., as sometimes has been argued). Since the role of pastor/elder/overseer is rooted in the task of teaching and exercising authority over the church, this verse would also exclude women from serving in this office (cf. 1 Tim. 3:2). Thus when Paul calls for the women to be quiet, he means “quiet” with respect to the teaching responsibility that is limited in the assembled church. Paul elsewhere indicates that women do speak in other ways in the church assembly (see 1 Cor. 11:5). See also note on 1 Cor. 14:34–3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8.
13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이는’으로 번역된 ‘가르’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앞선 11-12절에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해서는 안되고 조용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음을 받고’로 번역된 ‘에플라스테’는 ‘만들다, 형성되다’라는 의미의 동사 ‘플라소’의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구약의 70인역에서 창 2:7과 창 2:19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을 지으셨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11:8–9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불가한 근거로 창조 원리를 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 아담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가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그를 잠재우시고 갈빗대를 하나 취하여 그의 돕는 배필로 여자, 하와를 창조하셨다.(창 2:18)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주관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 창조 원리에 근거하여 교회안에서 여자의 역할, 지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와’라는 표현은 신약에 2번 등장한다. 본절과 고후 11:3에 나오는데 이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여성의 조상이다.
- 하와(חוה, 하바). 아담의 아내. 성경 기록에 따르면 인류 여성의 조상이다.
어원
하와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발전되어 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론은 하와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하야의 오래된 형태로 제시한다. 70인역은 창세기 3:20을 "생명"을 의미하는ζωή(조에)로 번역하면서 이 관점을 취한다. 일부에서는 이 이름이 "뱀"을 의미하는 아람어 hiwya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해왔다. 페니키아의 (아마도 뱀일 수 있는) 신인 hwt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see Hamilton,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05–207).
엔키와 닌후르사그의 수메르 신화에서 엔키의 병은 닌후르사그에 의해 치료되는데, 닌후르사그는 여신 닌티("갈비뼈의 여인")이 그를 위해 태어나게 한다. 수메르어에서 닌티는 "생명을 주는 여인"을 의미한다. 하와와 닌티가 지닌 의미의 유사성은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 기록이 도출된 공통 출처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창세기에서의 하와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창 1:24–31) 아담의 갈비 뼈에서(2:21–22), 아담을 돕기에 적합한 사람인(2:18)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 다음 아담은 하와라는 이름을 처음에는 일반명사의 개념으로 불렀고(2:23), 이후에는 고유명사의 개념으로 불렀다(3:20). 뱀이 하와를 속여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후(3:1–7), 아담과 하와는 벌을 받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3:8-19). 하와에게 내려진 벌은 출산시 고통이 증가하는 것과 남편에게 더욱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3:16). 하와는 가인, 아벨, 셋을 낳았고(창 4장), 그 밖의 많은 아들과 딸도 낳았다(5:4).
창세기 외 다른 본문에서의 하와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하와를 세 번 사용하는데, 그 중에서 두 번에 걸쳐 뱀에서 속은 자로서의 하와의 역할을 강조한다.
1. 고린도후서 11:3에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하와에 비유하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가 그들을 잘못 이끌 수 있는 속임수에 걸리기 쉬움을 의미한다(고후 11:3).
2. 디모데전서 2:8-14에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에서의 성 역할에 대한 지침에서 하와를 언급한다(딤전 2:8-14).
3. 고린도전서 11:8-9에서 바울은 창조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하와를 언급한다.
바울이 하와를 죄인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딤전 2:14) 이후의 해석과 관련하여 창세기 기록의 내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창세기에서 아담, 하와, 뱀은 모두 죄인으로 처벌 받는다(창 3:14–19). 하와는 아담보다 더 많은 잘못이 있는 것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하와가 나중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담보다 열등하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이 동일한 논리를 사용하면 지구와 초목과 같은 창조의 다른 측면이 인간보다 우월할 것이다. 하와는 아담을 돕는 사람이자 동반자로 창조되었지만 아담과 관련하여 하와의 지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이다. 하와의 창조에 내재된 종속적인 역할을 본 사람들도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아담이 죄의 영향을 받은 후에 하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지적한다(Webb, Slaves, Women, and Homosexuals, 119).
현대 해석
아담이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창 3:20) 된 하와의 이름을 붙인 것은 "하와"라는 이름이 고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출산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근동에서 두드러졌던 다산 숭배에 비판하는 논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인 하와는 고통스러운 출산으로 저주를 받은 인간이며, 다산의 상징이기도 한 뱀과의 상호 작용은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이어진다(Wallace, Anchor Bible Dictionary, 677).
유일하게 기록된 하와의 담화는 그녀가 맏아들 가인을 출산한 후에 나타난다. 하와는 “내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득남하였다”라고 말한다(창 4:1 ESV). 이 문장("여호와의 도움으로")에 제시된 동역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부정한 삶에 대한 징조라고 여기기도 한다(Waltke, Genesis: A Commentary, 96). 하와의 맏아들이 두 번째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다산 숭배 신화를 비판하기 위한 하와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Nick Bott, “하와,”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 2:13 For introduces the biblical basis for the prohibition of v. 12. Paul indicates that the prohibition is based on two grounds, the first being the order of creation (Adam was formed first), and the second being the deception of Eve (v. 14). “Formed” (Gk. plassō) is the same term that the Septuagint uses in Gen. 2:7, 8, which evidently refers to creation (cf. 1 Cor. 11:8–9). Paul’s argument indicates that gender roles in the church are not simply the result of the fall but are rooted in creation and therefore apply to all cultures at all times. The meaning of this passage, however, is widely contested today. Some interpreters argue that the prohibition of 1 Tim. 2:12 does not apply today because: (1) the reason for Paul’s command was that women were teaching false doctrine in Ephesus; or (2) Paul said this because women in that culture were not educated enough to teach; or (3) this was a temporary command for that culture only. But Paul’s appeal to the creation of Adam and Eve argues against those explanations. In addition, the only false teachers named in connection with Ephesus are men (1:19–20; 2 Tim. 2:17–18; cf. Acts 20:30), and no historical evidence exists of women teaching false doctrine in first-century Ephesus. Moreover, ancient inscriptions and literature speak of a number of well-educated women in that area of Asia Minor at that time (cf. also Luke 8:1–3; 10:38–41; John 11:21–27; Acts 18:2–3, 11, 18–19, 26; 2 Tim. 4:19). Finally, some have claimed that this passage only prohibits a “wife” from teaching or exercising authority over her “husband,” since the Greek words gynē and anēr (translated “woman” and “man” in 1 Tim. 2:12) can also mean “wife” and “husband” in certain contexts. Given the immediate context of vv. 8–9, however, the most likely meaning of the Greek words gynē and anēr here in vv. 11–14 would seem to be “woman” and “man” (rather than “wife” and “husban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8.
14절) 앞서 창조의 원리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은 것이 첫번째 이유라면 이제 여자가 먼저 속임을 당해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글이나 영어 성경에서는 속다(deceived)라는 표현이 아담과 여자에게 동일하지만 헬라어 원어는 이 표현이 분명하게 다르다. 아담이 속은 것에서는 ‘아페테데’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속이다, 기만하다’라는 ‘아파타오’의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 표현이다. ‘여자가 속아’라는 표현에서는 ‘엑사파테데이사’는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에크’와 ‘아파타오’의 합성어인 ‘엑사파테오’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처럼 아담이 속은 것과 여자가 뱀에게 속은 것이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여자가 완전하게 속임을 당했고 그 책임이 여자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어 ‘죄에 빠졌음이라’라는 표현도 여자에게만 적용된다. 결과적으로 아담이 죄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바울은 이 선악과의 범죄가 여자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속은 것’, ‘속아’라는 두 표현은 모두 수동태인데 반하여 ‘빠졌음이라’(게고넨)은 능동태로 여자가 죄에 빠지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13절에서 창조의 순서를 다룸에 있어서는 ‘아담과 하와’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14절에서는 아담은 고유명사로, 여자는 보통명사를 쓰고 있다.
15절) 구원에 이르는 방법, 과정은 남자나 여자나 다르지 않다. ‘이신칭의’의 원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그 믿음이 드러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서, 남자나 여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에안 메노이신 엔 피스테이 카이 아가페 카이 하기아스모 메타 소프로쉬네스’, 먼저 ‘거하면’으로 번역된 ‘메이노신’은 ‘남아있다, 머물다, 거하다’라는 의미의 ‘메노’의 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특정 상태, 조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숙함이라는 표현은 ‘소포로쉬네’로 개인의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조절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지혜라는 의미로 ‘타당함, 자기 절제, 성숙함’의 의미이다. 과유불급이라는 표현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라는 것이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그것도 공예배시에 이를 적절하게 절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표현은 소테세타이’로 이는 ‘구원하다, 구하다’라는 의미의 ‘소조’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의 표현이다. ‘해산함으로’는 ‘디아 테스 테크노고니아’로 ‘테크노고니아’는 ‘아이, 자손’이라는 의미의 ‘테크논’과 ‘낳다, 아버지가 되다’라는 의미의 ‘겐나오’의 합성어이다. 인류의 비극은 최초의 여자인 하와의 범죄로 시작되었다. 앞서 14절이 이를 증명한다. 하여 15절은 이러한 비극의 탈출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길이다.(창 3:15)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그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믐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이다. 바로 그 역할이 여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본절이 강조한다. 본절은 여인들에게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그 자녀를 신앙안에서 양육함으로 믿음의 유산을 전수할 책임을 여인에게 말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이 여인들의 해산함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다.
- 2:15 This is a notoriously difficult-to-understand verse. Paul clearly does not believe people can be saved in the sense of earning justification through childbearing or any other means (e.g., Eph. 2:8–9). But the NT can also use the term “saved” (Gk. sōzō) in the sense of progressively coming to experience all the aspects of salvation. In that sense, “salvation” is ongoing (see note on Phil. 2:12–13). A similar view is that “saved” can be understood as referring especially to the endurance and perseverance in faith that is necessary for eternal salvation (cf. Matt. 10:22; 24:13; etc.). People are saved as they persevere (continue) in the faith to carry out the Lord’s calling in their life, one example being the unique role of women in childbearing. (The change from singular she to plural they is a literal rendering of the Gk. tex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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