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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p“What profit is an idol

when its maker has shaped it,

a metal image, qa teacher of lies?

For its maker trusts in his own creation

when he makes rspeechless idols!

19  sWoe to him twho says to a wooden thing, Awake;

to a silent stone, Arise!

Can this teach?

Behold, it is overlaid with gold and silver,

and uthere is no breath at all in it.

20  But v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wlet all the earth keep silence before him.”

p Isa. 44:10

q Jer. 10:8, 14; Zech. 10:2

r Ps. 115:5; 1 Cor. 12:2

s ver. 6, 9, 12, 15

t See 1 Kgs. 18:26, 27

u Ps. 135:17; Jer. 10:14

v Ps. 11:4; Mic. 1:2

w [Zeph. 1:7; Zech. 2: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합 2:18–20.

 

마지막 화에 대한 경고에서는 앞선 4개의 구조와는 다르게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이 두번째 절에 등장한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아닌 다른것들을 섬기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생기가 없는, 인간이 부어 만든 것들을 신으로 여기며 섬기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무언가에 의존하고 도움과 보호를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사람들은 부, 중요한 사람들, 무력, 아름다움, 인간적인 재능들을 뿐만 아니라 악을 의지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형제나 친구들을 의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는 완전하지 않고 종국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To trust “is a concept of central theological importance in the Old Testament. It expresses that which is, or at least should be, central in people’s relationship with God.”70 Trust “almost always refers to a process at the foundation of existence. Whoever trusts, relies on something, and everything depends upon the reliability of the other; one seeks protection, and one stands or falls with that on which one relies.”71 God calls on his people to trust him at all times (Ps 62:8; cp. 115:9–11; Isa 26:3–4; 30:15). People are trusting folk, but choose the wrong things in which to place their trust—riches (Job 31:24; Prov 11:28); important people (Ps 146:3; cp. Jer 17:5–8); military fortifications (Deut 28:52; Jer 5:17); beauty (Ezek 16:15); in personal abilities (Prov 3:5; 28:26). One can even trust in evil (Isa 30:12). “The logic of biblical monotheism requires that all these things be used in the service of God and not set up as alternatives to him.”72

Trust is not confined to God in the biblical revelation. Spouses (Prov 31:11), brothers (Jer 9:4) and friends can be trusted (Mic 7:5), but only in relationship to an ultimate trust in God. This trust in God is not an illusory, spiritual emotion. It relates to life crises, especially national ones (Pss 22:4–5; 25:1–2; 28:7; 31:14–15; Isa 36–37; Jer 39:18). But even trust in Yahweh can be misplaced if it is only ritualistic and not connected to genuine obedience (Jer 7:3–15).73 Trust in God wipes away all fear (Pss 56:5, 12; 25:2; 21:8). “Israelite tradition recognizes and demands an absolute, exclusive devotion to Yahweh; this trust in Yahweh includes hope of salvation (Job 11:18) and faith in the God of the fathers (Ps 22:4f.).”74 Like Habakkuk, the prophets mocked the Babylonians for their worship of idols and the people of Judah for wanting to be like the Babylonians in their worship.75

70 R. W. L. Moberly, “בּטח,” NIDOTTE 1:644.

71 E. Gerstenberger, “בטח bṭḥ to trust,” TLOT 1:228.

72 Moberly, “בּטח,” 645. Note Gerstenberger’s statement (“בטח bṭḥ to trust,” 229) that the OT assumes “that one can successfully place confidence only in Yahweh, that no other entity can be an ultimate object of trust.”

73 See Gerstenberger, “בטח bṭḥ to trust,” 229.

74 Ibid., 230.

75 Isaiah and Jeremiah scorned the Babylonians for idolatry. Of course, these prophets turned the lessons to be learned to the people of Israel and Judah who should have known better. Isaiah described the foolishness of idolatry in much the same way as Habakkuk, describing the making of an idol by cutting down a tree, carving the wood and finally overlaying the wood with metal (Isa 44:9–20). Isa 46:1–7 described two Babylonian gods being carried into exile before the invasion of Cyrus the Persian. Bel and Nebo sat helpless before the invader. Isaiah’s message decried the foolishness of worshiping gods which have to be carried. Better to worship the God who can carry you! Jeremiah coined a word for the idols—they were hăbālîm, only breath. For Jeremiah, the idols lacked the power to do good or to do evil (Jer 10:5). They were nothing.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6–347.

 

우리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긴다. 그 우상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금이나 은, 나무나 돌에 새긴 형태이기도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 아름다움, 건강, 미래에 대한 안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우상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안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앞에 잠잠히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문제는 우리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줄 것을, 저 멀리 계신 하나님, 마치 지금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 침묵하고 계시는듯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영향을 주고, 즉각적으로 효과를 제공해줄것과 같은 것들을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어야 한다. 

 

18절) 우상 만드는 자가 그것을 만들었을때 그 우상, 또는 거짓 스승이라하는 금속으로 만든 우상은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가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만들었을때 그 자신이 만든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어서 만든 말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상숭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둘째 우상은 거짓만을 가르친다. (렘 10:5) 세번째 우상을 만드는 것은 그 예배자가 그 자신의 이미지로 신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들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신이 우리 자신의 모습에 제한되기 때문에 항상 작게 된다. 네번째 우상은 말하거나 인도함을 주지 못한다. 우상은 말하거나 듣거나 인도하거나 구원해주지 못한다. 

 

19절)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깨어라 혹은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보라 이것이 금과 은으로 덮여져있지만 그 안에는 생기가 없다. 이것들이 가르칠 수 있느냐? 

본문에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생명을 의미한다. 우상은 생명이 없는 존재이다. 생기는 우상이 인도하거나 계시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우상은 인간의 깊은 필요에 대해 답할 능력이 없다. 생기 없음은 우상을 창조자보다 약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진정한 하나님으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The last line is more emphatic than the NIV rendering reflects. “There is no breath in it at all” would more adequately reflect the sense. In this context, “breath” (rûaḥ) meant life. An idol was a lifeless form. Snaith pointed out the peculiar significance of rûaḥ. He saw three particular points of emphasis. It stood for power, life, and came from God in contrast to coming from man.78 Breath could refer to the idol’s inability to give guidance or revelation. It lacked the ability to answer to the deepest needs of human beings. Lack of breath made the idol weaker than its “creator,” for the true God had placed breath in man’s nostrils (Gen 2: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78 N. H. Snaith, The Distinctive Ideas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46), 183–203.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9.

 

20절) 여호와는 그분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침묵하고 생기없는 우상들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분은 무가치한 우상들에게 드려졌던 존경과 경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모든 이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모든 만물에 대한 그분의 주재권을 깨닫을 것을 깊이 생각하도록 침묵을 명령받는다. 

But the Lord. There is a tremendous contrast between silent, inanimate idols and the awesome living God who sits enthroned in heaven and rules over the earth. He is the One who deserves the honor and reverence bestowed on worthless idols (see Isa. 41:1; Zeph. 1:7; Zech. 2:13). Silence is commanded so that everyone will consider God’s awesome nature and realize his sovereignty over all creation (see Zeph. 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25.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성전을 의미한다. 하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그분 홀로 영광을 받으셨다. 그룹 천사들 위에서 좌정하셔서 다스리시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은 거룩한 침묵이다. 잠잠하라는 단어는 ‘쉿’하고 말하는 의성어적 표현이다. 이 구절은 신이 아닌 사람들과 하늘에서 인간의 필요와 인간의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사이의 대조를 그려낸다. 하박국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가 하늘의 하나님의 성전에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장의 마지막 구절인 20절에서는 마지막 화에 대한 적절한 결론이자 일련의 모든 화들에 대한 결론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서 그의 망루로 후퇴하고 하나님의 침묵에 초초한 선지자를 가리킨다. 이제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때에 그분의 입을 여실 것을 기꺼히 기다릴 것을 자신과 모든 세계를 향해 ‘쉿’하고 요청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좌정하시고 이후 하박국의 기도에 독자들이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함이 입증되었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행동과 그의 신학을 화해시킬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분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경외심 가득한 침묵속에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For Habakkuk, the “temple” probably meant not only the temple in Jerusalem but also the heavenly sanctuary (Mic 1:2). From the heavenly temple, the Lord ruled over heaven and earth and received the honor due him alone. The proper response to such a God who is enthroned above the Cherubim is awed silence. The word for “keep silence” is “an onomatopoeic interjection with a force much like the English ‘hush!’ (cf. Zeph 1:7).”79 The verse pictures the contrast between those who are no gods and the one who is in heaven ready to respond to human need and to human questions. Habakkuk himself knew from experience that he could take his questions to God’s temple in heaven.

The last verse of the chapter serves as a fitting conclusion to the final woe as well as a conclusion to the entire series of woes.80 Likewise, it points back to a prophet making demands of God, asking questions of God, and retreating to his watchtower to wait for God’s answers, impatient at God’s silence. Now the prophet hushes himself and all the world, willing to let God act in God’s time and willing to wait for God to open his mouth when God chooses. This final verse of the chapter points the reader to the holy God enthroned in his holy temple and prepares the reader for the prayer of Habakkuk in chap. 3.“Finally, God’s holiness was vindicated, and the prophet was able to reconcile his theology with God’s actions.”81 “Despite his apparent silence, he still remains with them; he has not lost control of their destiny. One should wait upon him in the awed silence that is often the most appropriate expression of true worship.”82

79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209.

80 Patterson sees v. 20 as “the chief lesson to be learned from the whole discussion. Verse 20 forms an inclusio with v. 4 that reveals the underlying thesis and its implication for the entire section: The Lord is a just and holy God who deals righteously with all people and is actively present in the flow of earth’s history; therefore, He is to be acknowledged as God by all” (ibid., 205).

81 Barber, Habakkuk and Zephaniah, 20.

82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28.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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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alms a Storm
35 nOn that day, when evening had come, he said to them, “Let us go across to the other side.” 36 And leaving the crowd, they took him with them in the boat, just as he was. And other boats were with him. 37 And a great windstorm arose, and the waves owere breaking into the boat, so that the boat was already filling. 38 But he was in the stern, asleep on the cushion. And they woke him and said to him, “Teacher,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 39 And he awoke and p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sea, “Peace! Be still!” And the wind ceased, and qthere was a great calm. 40 He said to them, “Why are you rso afraid? Have you still no faith?” 41 
And they were filled with great fear and said to one another, s“Who then is this, that even tthe wind and the sea obey him?”

n For ver. 35–41, see Matt. 8:18, 23–27; Luke 8:22–25; [John 6:16–21]
o [Acts 27:14]
p Ps. 104:7; [Luke 4:39]
q Job 38:11; Ps. 65:7; [ch. 6:51; Matt. 14:32]
r John 14:27
s [ch. 1:27]
t [Luke 5: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4:35–41.

35절) 날이 저물때에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을까? 목적지가 어디인지 본문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추축컨데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을 피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기를 원하셨을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사역의 지경을 확장하려고 건너편으로 가시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36절) 예수님은 앞서 배에 올라가셔서 무리들을 향해 가르치셨다.(4:1) 본문에서 보건데 예수님은 지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배를 그대로 이용해서 건너편으로 이동하신 것이다. 

37절)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수면이 지표면보다 낮은 상태로 산에 둘러싸여 있는데 강한 바람이 불면 풍랑이 매우 강해진다. 

38절) 배로 이동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고물(선미)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셨다. 그런데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풍랑으로 인해서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렇게 흔들리는 배 안에서 예수님이 잠드셨다는 것은 그분이 계속되는 일정과 무리들을 향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매우 피곤하셨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중에 어부들이 많았는데 배를 타는 것에 전문가인 제자들조차 두려워 떠는 상황에서 주님은 평안가운데 쉬고 계셨던 것이다. 
- Not a few have compared the sleeping of Jesus and Jonah. It is, however, a mere coincidence and in no way implies that the story is modeled upon that of Jonah or a passage in Psalms, such as 89:9; 106:9; or 107:23–25. Jesus’ sleeping does suggest confidence in God (cf. Ps 3:5; 4:8; Prov 3:24). Furthermore Jesus’ sleeping is one of many indications in Mark of his humanity. The disciples’ question strongly rebukes Jesus and is another example of Mark’s candor, which Matt 8:25 and Luke 8:24 tone down. Note Moffatt’s rendering: “Teacher, are we to drown, for all you care?” The verse contains the first of twelve times Jesus is addressed or described as “Teacher” (also 5:35; 9:17, 38; 10:17, 20, 35; 12:14, 19, 32; 13:1; 14:14). The similar term “Rabbi” is used in 9:5 (10:51, “Rabboni” in Greek, but not the NIV); 11:21; 14:45. The verb “to teach” is used with reference to Jesus fifteen times (see the references in the comments on 1:21). Obviously Mark emphasized that Jesus was an authoritative teacher. Even so, it is doubtful that “Teacher” should be treated as a Christological title in the same way that “Son of God” or “Son of Man” ar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87.

39절) 예수님께서 깨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말씀하신대로 바람이 그치고 매우 잠잠해졌다. 본문에 꾸짖다. 고요하라라는 단어는 앞서 1:25절에서 귀신을 쫓으실때 이미 사용하신 표현이다. 고요하라(be still)이라는 표현은 ‘페피모소’라는 헬라어로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 Jesus displays his divine power over nature. In the OT, God calms the waves (Job 12:15; Ps. 33:7) and the storm (Job 28:25; Ps. 107:25–30; Amos 4: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01.

40절)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지금 제자들의 반응을 볼때 예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평안과 안정감을 누린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제자들의 믿음 없음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빠지게 한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질때에야만 비로소 풍랑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1절)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면서 서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느가?”라고 물었다. 이는 이 이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에게는 온전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볼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전에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서 오는 경외라기 보다는 이러한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본문은 자연도 주님의 능력앞에 순종하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돌보신 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앞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가르침을 펼치시고, 문둥병을 고치시고, 죄사함의 권능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적자들과 변증하시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다양한 비유로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앞서 다른 이적과의 다른 점은 이 주님의 능력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앞서 2:12에서는 병고침의 이적 이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지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들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고 행한다고 할 지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직면하게 될때 우리의 믿음의 방향과 크기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 At this point in the development of the story none of Jesus’ followers understood who he was. They had seen his dynamic teaching (1:21–28), witnessed his power to heal the worst of diseases (1:40–45), heard him claim to be the Son of Man with power on earth to forgive sin (2:10), watched him confound his enemies (2:23–28), received authority to cast out unclean spirits (3:15) and learned his parables (4:1–34). Yet his claim to be the Son of Man must have been confusing since there is no reference in the Old Testament to the Son of Man appearing on earth. He is an eschatological figure who appears only at the end of history. Furthermore, nowhere in the Old Testament is the Son of Man ever associated with the Messiah or the Son of God. And as far as their new authority is concerned, it was a power the Twelve had yet to test. To expect the disciples to understand who Jesus was is stretching things a good deal.
What then did Jesus expect of them? His rebuke in 4:40 indicates that faith is the issue. But if their fear is not to be undervalued and if it is too early to expect them to perceive Jesus’ identity, then what does it mean to believe? Doubt, which is usually cast as the opposite of faith, is not part of this story, nor does it appear in the following accounts. In fact, in the miracle stories of 4:35–5:43 the opposite of faith is always fear. This is no small distinction. It is common to affirm, for instance, that faith is necessary in order to see or experience a miracle. That idea is consistent to some extent with the notion that doubt is the opposite of faith. In the account of Jesus’ calming the storm, however, the disciples were rescued by a miracle even though they lacked faith. If fear is the opposite of faith, how do we believe?
There is a new kind of tension in this pericope. The earlier miracles contained seeds of conflict that matured into intractable opposition. Here, however, there is a lot of tension, but neither the teachers of the law, the leaders of the synagogues nor the traditions of the people are anywhere in evidence. The tension in this event is between Jesus and his own followers. Their fear of death and his undisturbed sleep generate the conflict. Jesus slept unconcerned, while they bailed furiously in fear of their lives.
Unlike the earlier miracles, this one has two focal points. The first one is consistent with all the earlier accounts in that it demonstrates the power of the kingdom of God. When Jesus rebuked the sea and commanded the wind to be silent, he revealed a new aspect about the kingdom of God. He spoke to the storm as though it were a demonic power (Guelich 1989:267). As he had already demonstrated his authority over the demonic powers in people, here Jesus revealed his authority over the demonic or chaotic in nature.
That much is clear when he rebuked the wind. That rebuke is followed by a second one, and the abrupt words he spoke to his disciples signal two fundamental changes in the form of the miracle story. Instead of ending on a note of praise, as the healing of the paralytic did (2:12), this one ends in fear. The disciples were terrified, even more afraid after Jesus spoke to them than they had been during the storm. Terrified they asked: Who is this? Even the wind and the waves obey him! The account of this miracle does not have a conclusion that resolves all the points of tension. In fact, if we take the comment that Jesus accompanied them just as he was, in the boat (4:36) as an indication of the disciples’ settled view of Jesus, there is more confusion and less resolution at the end of the story than at its beginning.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101–102.

본문, 풍랑을 진압하시는 이 장면또한 비유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은 지금 이 두려움의 상황속에서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실 것에 대한 계획조차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신 이유가 많은 무리들을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좀더 명확히 보여주시고자하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 If the miracles are parables, we have an answer to the question of what Jesus expected of the people in the boat with him. It was on the basis of his word,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that they found themselves in this predicament. Jesus expected them to ask something like the question in 4:10. That is to say, he did not expect them to leap over their fear and confusion to confess him as Messiah and Son of God. He expected them to ask him what to do or how to pray or where they could turn. That was the kind of thing they did when they asked him what his parable meant, but fear had turned their faith into sarcasm. The question don’t you care if we drown? is not the stuff of faith—it is an accusation.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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