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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he Lord kvisited Sarah as he had said, and the Lord did to Sarah las he had promised. And Sarah mconceived and bore Abraham a son in his old age nat the time of which God had spoken to him. Abraham called the name of his son who was born to him, whom Sarah bore him, oIsaac.1 And Abraham pcircumcised his son Isaac when he was eight days old, qas God had commanded him. rAbraham was a hundred years old when his son Isaac was born to him. And Sarah said, s“God has made laughter for me; everyone who hears will laugh over me.” And she said, “Who would have said to Abraham that Sarah would nurse children? tYet I have borne him a son in his old age.”

k 1 Sam. 2:21

l ch. 17:19; 18:10, 14

m Heb. 11:11; [Gal. 4:22]

n ch. 17:21

o ch. 17:19

1 Isaac means he laughs

p Acts 7:8

q ch. 17:10, 12

r ch. 17:1, 17; Rom. 4:19

s [Isa. 54:1; Gal. 4:27]

t ch. 18:11,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21:1–7.

 

 

1-2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방문하셨고(돌보셨다)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바로 노년의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절에서 ‘사라를 돌보셨고’라는 표현은 NIV에서는 ‘사라에게 은혜를 베푸셨고'라고, ESV 에서는 ‘사라를 방문하셨고’라고 표현했다. 본문의 ‘파카드’라는 단어는 ‘방문하다, 보다, 명령하다, 약속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군대 혹은 세금 징수를 위해 계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군대에서는 점호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긍정적인 의미로는 돌보다, 은혜를 입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부정적인 의미로는  처벌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오심으로 그녀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진것으로 볼 수 있다. 

 

9. In contrast to the use of פָּקַד עַל in judgment contexts, the object of God’s favor or concern is indicated by אֶת (Gen 21:1; Exod 4:31; Ruth 1:6; 1 Sam 2:21), a pronominal acc. (Gen 50:24, 25; Exod 3:16; 13:19; Jer 29:10), or a pronominal suff. (Jer 15:15; Zeph 2:7), or it is left unmarked (Ps 65:9 [10]; 80:14 [15]; Zech 11:16). The positive sense, however, is never construed with the prep. עַל. Thus, while פָּקַד occurs with negative connotations without עַל, the collocation פָּקַד עַל never appears with a positive meaning. This leaves room for ambiguity when פָּקַד occurs without עַל. For instance, the nature of the Lord’s “dealing with” Zedekiah in Jer 32:5 is not clear. While some take it as an indication of divine punishment, it is more likely a promise of divine favor (see C. T. Begg, “Yahweh’s ‘Visitation’ of Zedekiah [Jer 32, 5],” ETL 63, 1987, 113–17). The same ambiguity is present in Isa 24:22.

acc. accusative(s)

suff. suffix

ETL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66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사무엘상 2:21, NKRV)

 

Visited translates a Hebrew term that usually has the sense of coming and acting, either in blessing or in judgment, when it is used with the Lord as subject. It is used here in a positive and beneficial sense. For a similar context regarding the birth of Samuel, see 1 Sam 2:21. See also Exo 4:31; Ruth 1:6; Luke 1:68. It is also used in Gen 50:24, in which Joseph promises that God will visit his brothers to rescue them. For the translation of this term, tev says “The Lord blessed Sarah,” neb/reb “The Lord showed favour.…” gecl has “the Lord did not forget Sarah.” In some languages this thought is expressed figuratively; for example, “The Lord showed Sarah his good heart,” “The Lord’s liver was good to Sarah.”

tev Today’s English Version

neb/reb Agreement, NEB and REB

gecl German common language version

 William David Reyburn and Euan McG. Fry, A Handbook on Genesi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8), 460.

Yahweh’s visiting a woman who subsequently gives birth finds later parallels in the stories about Hannah (1 Sam. 2:21) and Elizabeth (Luke 1:68). Although pāqaḏ may be used of a husband who visits his wife for sexual purposes (Judg. 15:1), it is unlikely that this is the implication of Gen. 21:1, or that we have here the torso of a myth about Isaac’s divine paternity. Rather, as evidenced by 1 Sam. 2:21, we have here an instance where visit takes on the connotation of Yahweh mercifully delivering one from an apparently hopeless situation, that is, infertility.5

5 The verb pāqaḏ refers to God’s gracious visitation to an individual or individuals, bringing them deliverance from various types of crises, also in Exod. 4:31; Ruth 1:6; 1 Sam. 2:21; Ps. 106:4. The meanings for the Hebrew verb vary from “count” to “muster.” Its Akkadian cognate, paqādu, suggests that its basic meaning is “hand over, deliver, assign,” and so by extension “to turn one’s thoughts/attention to” (as here in v. 1).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72–73.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두번에 걸쳐서 이삭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17:15-21; 19:10-15)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삭의 탄생 예고 이후에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아비멜렉 사건의 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예언은 길게 여러번 기록했지만 실제로 이삭의 출생의 기록은 그렇게 자세하지 않다. 도리어 독자들의 관심을 소돔과 고모라, 아비멜렉에게 집중시키고 이삭의 출생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로 1-2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되었다’라는 표현이 3번이나 반복된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대 그게 뭐 특별하냐는 듯이 퉁명스럽게 이삭의 출생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이후의 이스마엘을 내쫓는 사건을 통해서 저자는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을 애둘러 비난하고 있다. 때가 차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질것인데 이것을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방법을 사용했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약속의 내용은 17:16, 19, 21의 내용이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창세기 17:21, NKRV)

그리고 실제로 약속하신 때에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으셨고 그에 맞추어 그녀의 태를 여신 것이다. 앞서 20장에서 아비멜렉을 막으신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이다. 

 

본문에서 1절과 33절에서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3절) 아브라함이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다. 이삭의 이름의 의미는 ‘웃음’이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믿지 못하여 비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웃음을 비웃으시며 그들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진정한 기쁨, 웃음을 허락하셨다. 

Isaac means “he laughs.” The motif of laughter occurs in a number of passages associated with the birth of Isaac. In v. 17 and 18:12–15, Abraham and Sarah, respectively, laugh out of unbelief that a son will be born to them, but there may be an element of incredulous joy in these instances as well. The joy of giving birth to Isaac causes Sarah to laugh (21:6). Cf. Ishmael’s laughter (21:9).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him. Echoing what has been said in 17:7, this verse clarifies that the eternal covenant will be “established” with Isaac, but not Ishmael (see vv. 20–21). Here an important distinction is drawn between those with whom the covenant is “established,” and those who may receive particular benefits of the covenant. While Ishmael and the other male members of Abraham’s household are circumcised, the continuation of the covenant is linked to a unique line of Abraham’s descendants that continues through Isaac (see Introduction: History of Salvation Summary; cf. chart). This line eventually leads to Jesus Christ, through whom God’s blessing is mediated in a saving way to other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80.

 

4절)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난지 8일만에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할례를 행했다. 할례는 정화와 거룩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이 할례를 받으셨다.(17:23) 

Circumcision represents purification and holiness, anticipating the purity of Christ (Luke 2:21; 3:22; Col. 2:11; see Gen. 17:1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85.

 

이삭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출생이 예언된 약속의 아이였다. 태어나기 전 이름까지 지어주셨다.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받았지만 이삭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출생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5-7절) 아들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였다. 사라가 이르기를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또한 누가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일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아브라함 노년에 내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고백한다.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25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중간에 이 약속을 믿지 못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사라는 폐경이 지난지 오래되었고 아브라함도 늙은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이삭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때는 바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그 때에 시작된 것이다. 인간적인 불가능을 다들 알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찾아오셔서 돌보심으로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서 진정한 웃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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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rOne Sabbath he was going through the grainfields, and as they made their way, his disciples sbegan to pluck heads of grain. 24 And the Pharisees were saying to him, “Look, twhy are they doing uwhat is not lawful on the Sabbath?” 25 And he said to them, v“Have you never read wwhat David did, when he was in need and was hungry, he and those who were with him: 26 how he entered the house of God, in the time of4 xAbiathar the high priest, and ate ythe bread of the Presence, which it is not lawful for any but the priests to eat, and also gave it to those who were with him?” 27 And he said to them, z“The Sabbath was made for man, anot man for the Sabbath. 28 So b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2:23–28.

23-24절)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랐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예수님께 지적한다. 배고플때 손으로 타인의 밭에서 곡식을 따먹는 것을 허락되었지만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볼때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이 5-6월에 익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 10개월 여전인 3-4월 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 Deuteronomy 23:25 implies that, in the case of hunger, it was permissible to eat heads of grain from any field one might pass by. Work, however, was not permitted on the Sabbath (Ex. 34:21). Pharisaic interpretation sought to guard against work on the Sabbath by prohibiting even the minimal “work” involved in thus satisfying one’s hunger.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897.

25-26절) 율법을 존중하고 지킬 필요가 있지만 비상시에, 절박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음을 말한다. 에수님은 삼상 21장 1-6절을 통해서 다윗과 그 일행들이 먹을 것이 없어 하나님의 전에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본문은 대제사장 아비아달 때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삼상 21:1을 보면 아히멜렉이 대제사장이었고 아비아달은 그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왜 본문에서 아비아달 때라고 말하는가? 첫번째로 아비아들이 구약에서 다윗의 통치시기에 가장 저명한 대제사장이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삼상 22장의 사울의 명령에 의해서 도엑에 의해서 제사장들이 학살될때 살아남은 유일한 제사장으로 삼상에서 가장 유명한 대제사장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Abba-Abiathar(아비아달의 아버지)에서 아바가 빠졌다는 것이다. 
- Jesus initially emphasizes that the restrictive Pharisaic interpretation of the law does not take into account the situation of need in which David and his men found themselves (1 Sam. 21:1–6). David ate the bread of the Presence, so it follows that, at least in the case of need, actions are allowed on a Sabbath that otherwise might not be permitted. in the time of Abiathar the high priest. The incident with David actually occurred when Ahimelech, not his son Abiathar, was high priest (1 Sam. 21:1). “In the time of Abiathar” could mean: (1) “In the time of Abiathar, who later became high priest” (naming Abiathar because he was a more prominent person in the OT narrative, remaining high priest for many years of David’s reign); (2) “In [the Scripture section of] Abiathar, the high priest” (taking Gk. epi plus the genitive to indicate a location in Scripture, as in Mark 12:26). Abiathar, the only son of Ahimelech to survive the slaughter by Doeg (1 Samuel 22), is the best-known high priest in this larger section of 1 Samuel.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897.
- Another explanation, building upon the fact that the Aramaic word abba means father (cf. Mark 14:36), is that the original had Abba-Abiathar (i.e., “father of Abiathar,” who was in fact Ahimelech). Abba was then accidentally omitted by an early copyist because its first two letters are the same as the first two of Abiathar. The last is perhaps the best explanation, though it apparently assumes an original Aramaic text. No explanation is completely satisfactory. The implied comparison between David and Jesus suggests that Jesus possessed authority similar to that of David and that in some sense he was David’s successor. The idea is developed further in 11:10.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66.

예수님은 인간의 필요가 예식법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27-28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밝히신다. 이는 만약 안식일이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인자가 모든 사람들의 주인이라면 인자는 마땅히 안식일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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