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칭적 구조
 대상 -- 처음 4개는 바닷가에서 무리에게
       - 나중 4개는 집에서     제자에게 

 

 주제 -- 사람에 대한 비유 1과 8.  
       - 심판에 대한 비유 2와 7.  
       - 쌍동이 비유-3,4와 5,6.   
 질문 --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에 제자들의 질문
         일곱번째와 여덟번째 사이에 예수의 질문
 
1. 씨뿌리는 자 비유 / 사람에 대한 비유
-열매맺는 것의 가치는 효과없는 것을 뛰어 넘는다. 원래적인 이 비유의 의도는 천국을 위해 수고하는 것에 비하여 보잘것 없는 결과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하여 천국의 본질을 변증한다. 복음에 소외된 곳은 없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거나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적다. 마치 헛수고처럼 보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결국 30, 60,100배의 결실을 얻는다.
- 제자들의 질문 / 왜 비유로 가르치는가
비유를 사용하는 큰 이유는 어려운 진리나 추상적인 것을 가장 흔히 접하는 환경을 이용하여 형상화하여 쉽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계께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며 저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대적자들이 메시야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된다. 빋는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 구분이 일어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 주심. 강조점이 씨뿌리를 자에서 말씀을 듣는 자로 옮겨진다. 말씀을 듣는 자의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다.
* 제자들의 질문
비유에 대하여,
해석에 대하여
 
2. 가라지 비유 / 심판에 대한 비유
이미와 아직 사이(already not yet)의 천국.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밭에 곡식이 자라고 있는 것이 시작이지만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지금의 천국도 마찬가지다. 곡식이 자라며 무르익어 추수때가 가까이 오고 결국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어 심판의 날의 천국이 완성되는 때가 온다. 그런데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간다. 곡식이 자라는 것처럼 가라지도 자라서 분명히 그 특성을 더욱 잘 드러낸다. 처음엔 구분이 안 되던 것이 추수때가 가까이 올 수록 눈에 보이게 구분이 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을 소유한 우리들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갈등이 있다. 그런데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알게 해 주는 이 비유는 새로운 힘과 지혜를 준다.
 
3. 겨자씨 비유 / 쌍둥이 비유
천국은 확장된다. 작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듯이 작고 보잘적 없는 무리로 인해 전세계에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스려지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적은 무리로 인해 지금의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현 56억 4천의 인구에서 1/10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이고, 2/10은 명명상의 그리스도인이다. 3/10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의 비그리스도인이라고 할때 복음의 확산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며 이루어질 것이다.
캠퍼스 복음화, 세계 복음화, 성경적 원리로 변혁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생각해 볼 때, 또한 작고 미미한 것으로 부터 출발한 천국의 확장되는 능력과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하게 된다. 천국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속되는 뜻으로 인해 이성과 계산을 뛰어넘어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천국은 확산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처럼 함께 있지만 그러나 자라고 있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
 
4. 누룩 비유 / 쌍둥이 비유
가라지 비유와 쌍둥이 비유로 적은 분량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를 완전히 부풀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산을 말한다. 단 누룩이 커지는 것보다 누룩이 밀가루를 완전히 부풀리는 누룩이 밀가루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천국의 누룩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느 의미가 첨가되어 있다.
가루 서말 : 40l  
 
==36절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앞의 4가지 천국비유가 무리들에게 객관적인 제시라면 집안에서 말씀하신 비유들은 제자들에게 주관적인 각자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5. 밭에 감추인 보화 / 쌍둥이 비유
천국의 가치에 대한 비유. 밭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사람의 비유로 천국의 가치를 나타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6. 좋은 진주 / 쌍둥이 비유
이것도 천국의 가치를 말하는 비유이다.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
천국은 참으로 모든 것보다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 가치를 안다면 많은 그리스도인의 순교자 컴플렉스, 헌신 컴플렉스는 없어질 것이다. 천국의 가치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되게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관적인 결단이 촉구된다.
 
7. 그물 비유 / 심판에 대한 비유
-가라지 비유와 대칭구조를 갖고 있다. 가라지 비유의 해석에서 사용된 ‘세상끝’, ‘천사들’, ‘풀무불’, ‘의인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등의 단어와 문장이 똑같이 사용.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천국의 백성은 아닌 것이다. 결국 가라지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땅이 도래하고 진행되는 천국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그물안에서 동일한 바다와 자연의 조건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그물 안에서 들려 올라갈 때의 심판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보여 준다. 지금 우리도 태양과 비를 의인이나 악인이나 동일하게 받고 있다.
심판은 말 그대로 심판이자 구원이다. 심판날 알곡은 곳간에 들어간다.
*예수님의 질문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러하오이다.
 
8.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깨달음을 바탕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임무를 말씀.
-서기관은 율법을 맡은 자로 백성에게 그것을 가르칠 임무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 서기관들은 율법주의자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율법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통하게 하는 천국에 대해 깨닫고 훈련받은 서기관인 것이다.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다. 예수는 이미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것, 그러나 본래의 뜻에서 떠나버린 것을 다시 새롭게 하셨다. 그것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 그리고 새로워진 것이다.
요일 2:7-8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계명이니 이 옛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다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결단이 요구되는 말씀이다.

'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년-토지공개념(레 25:8-12)  (2) 2012.09.11
장로(감독)의 자격(딤전 3:1-7)  (1) 2012.08.30
요일 5:20 하나님을 안다는 것  (0) 2012.08.29
728x90
The Temptation of Jesus
12 yThe Spirit immediately drove him out into the wilderness. 13 y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being ztempted by a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bthe angels were ministering to him. Jesus Begins His Ministry
14 c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dcame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15 
and saying, e“The time is fulfilled, and fthe kingdom of God is at hand;5 g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1:12–15.

12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 예수님의 시험 당하심에 있어서 궁극적인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사탄이 시험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시험의 자리, 광야로 나아가신 것은 성령에 의해서 였던 것이다. 본문의 몰아내다라는 단어는 ‘엑발로’라는 단어로 마가복음에서 18번 등장하는 단어로 귀신을 쫓아낼때 주로 사용하던 단어이다. 
- This time (contrast v. 10) the NIV translates the word meaning “at once” or “immediately” (euthys). Mark used the verb ekballō a total of seventeen times, most often about exorcisms so that something stronger than “sent … out” is needed, something like “drove … out” (RSV, NRSV, REB) or “impelled” (NASB). The idea is that of divine necessity, not that Jesus was reluctant to go. The “desert” was the place of John’s preaching (vv. 3–4); it was also the place of Jesus’ temptat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4.

13절) 광야에서의 40일, 하지만 마가는 이 광야에서의 시험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 The “forty days” recalls Moses on the mountain (Exod 24:18; 34:28), Elijah’s journey to the sacred mountain (1 Kgs 19:8), Jesus’ instruction of his disciples (Acts 1:3), and perhaps even Israel’s forty years in the wilderness (especially Deut 8:2). The word translated “tempted” also means tested, and that is probably the primary idea here. “Satan” is the anglicized form of the Greek transliteration of a Hebrew word meaning adversary.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4.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심. 
- Mark’s inclusion of wild animals in the temptation story is variously explained as an allusion to Jesus as the second Adam (Waetjen 1989:75–76) or to the persecution that Christians in Rome experienced during Nero’s reign (Best 1965:8–9). Such interpretations should be regarded cautiously. While they are not implausible in themselves, there is little, if anything, in the rest of this Gospel to support them. The presentation of Jesus as the second Adam is a prominent theme in Luke, but there is no explicit depiction of Jesus in these terms in Mark. Furthermore, the wild animals appear only in this passage. They are not mentioned in the apocalyptic discourse of Mark 13 at all, where the testing of Jesus’ disciples is a central theme. On balance, it is better to take this reference as an indication that Jesus was alone, a theme that comes to a climax during the crucifixion. Except for the presence of the angels and wild animals Jesus was alone in his temptation (Lane 1974:61). There was no human comfort or support, and in that loneliness he was tempted by Satan.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40.

요한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신 이후에 이제 공식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리시는 주님

14절) 요한이 잡힌 후, 본문은 신적 수동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주님의 잡히심을 떠올릴 수 있다. 
- Mark placed the beginning of Jesus’ ministry after the imprisonment of John, although he did not describe John’s imprisonment and death until 6:14–29. Actually the word Mark used (paradidomi) means to hand over and is used to refer to the betrayal and arrest of Jesus in 9:31; 10:33; 14:21, 41. Its use with reference to John suggests that his death foreshadowed that of Jesus. The use of the passive voice implies that what was done was in accordance with God’s purpose.1
1 This use is called the “divine passive.” It probably had its origin in the reluctance of the Jews to use the sacred name Yahweh. It was one of many substitutes for the divine nam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5–47.
이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심, 그 하나님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15절이다. 

15절)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본문의 때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마태의 경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해서 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성격을 강조한데 반하여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경을 강조한다. 마가의 표현은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왕의 다스림, 통치, 지배, 하나님의 주권을 암시한다. 
- The word translated “time” (kairos) means a favorable, opportune, or significant time as opposed to mere chronology. Here Mark referred to the time appointed by God for the fulfillment of his promises. The period of preparation, that of ancient Israel and John, was complete. The divinely appointed time had come. The prophecies were being fulfilled in Jesus.
The expression “kingdom of God” appears fourteen times in Mark (also 4:11, 26, 30; 9:1, 47; 10:14, 15, 23, 24, 25; 12:34; 14:25; 15:43). According to the Synoptic Gospels, it was the major subject of Jesus’ message. In first-century Judaism it described a future, earthly kingdom in which God through Israel would rule over the nations. With the possible exceptions of 14:25 and 15:43, however, in Mark it refers to a present, spiritual kingdom rather than a future, earthly one. Therefore the expression refers to the kingly rule, the reign, the dominion, the sovereignty of God in the hearts of people. “Realm” in the sense of sphere of influence might be a better translation, but it too is subject to misunderstanding. “Reign” probably is the best translation.
Jesus claimed that the kingdom, which to most Jews seemed far in the future, had drawn near with his appearance. On linguistic grounds either “is near” or “is at hand” (RSV, NASB) or “has come near” (NRSV) is a better translation than “has come” (cf. use in 14:42). One of the former alternatives is preferable on theological grounds as well. The reign of God began to take place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but it was not fully manifested then and will not be until Jesus returns. Therefore a present, mystical kingdom does not rule out the possibility of a future, earthly one. Mark, however, says little about that. Jesus, like John (cf. v. 4), preached repentance, but the distinctive element in his message was faith or commitment or trust. The necessity of faith is a major subject in Mark, underscoring the theological motivation of the writing. Note especially the commands to believe in 1:15; 5:36; 11:22, 24 and the rebuke of unbelief in 4:40; 6:6; 9:19. Note also how faith is commended in 2:5; 5:34; 9:23; 10:52; 11:23.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7.

- 하나님이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 때가 요한이 잡힌 후였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여전히 무고한 자가 잡히고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지금 하나님 나라가 이미와 아직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와 종말적인 의미를 우리는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이 바로 이미와 아직의 이중적 의미를 모두 보여준다.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임했지만 아직 임하지 않은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적인 버전과 사회적인 버전을 서로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다. 개인적 회심과 사회적 회심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 The kingdom of God expresses the hope for a world in which the powers of sin, death and darkness are replaced by peace, justice and the worship of the one true God. In essence, it is the hope that the rule of God would be restored over all of creation.
Yet here at the beginning of Jesus’ ministry we encounter a disturbing paradox. If, as Jesus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is near, how is it that John the Baptist, who appeared as the herald of Jesus’ message, was arrested and eventually put to death? According to Mark 1:14 it was not the forty days in the wilderness, but John’s arrest that marked the start of Jesus’ ministry. If the rule of God were about to be restored over creation, we would expect things to work out differently.
The Greek verb translated “is near” can mean either “has arrived” or “has almost arrived.” Since either translation is possible, we must look at the context for clues that point to Mark’s meaning. The first one is found in Jesus’ announcement that the time has come (or is fulfilled). The time that is fulfilled is the time of waiting, and this observation implies that the kingdom of God is actually here (Beasley-Murray 1986:73). If the kingdom were not here, the time of waiting would not be over.
On the other hand, John’s arrest is a precursor of Jesus’ death. That is to say, if the kingdom of God is really present, how is it possible that innocent people still suffer and die? This observation suggests that the kingdom is either not present or not completely present. If we take both statements seriously, that is, without allowing either one to negate the other, then we arrive at the conclusion that the kingdom of God has actually come into history, although we are still waiting for its complete realization (Schnackenburg 1971:141–42). As we look more closely in the following sections at Jesus’ ministry, we will try to figure out inductively what it means to affirm that the kingdom of God is actually, though not completely, here.
For this reason Jesus called people to repent and believe. John had called people to embrace the new thing God was doing. With Jesus, embracing this new thing becomes even more complex for he invites us to turn away from our expectations about how the rule of God comes. Believing the gospel means affirming what God does, particularly when our expectations are not met. There is a fundamental tension between the hopes that Jesus’ ministry generated and the course of events as they unfolded according to God’s will. The need for repentance did not disappear when John’s ministry came to an end. On the contrary, the call to repent and believe was essential to Jesus’ ministry.
Repenting and believing are as important for Jesus’ modern followers as they were for his first ones. Jesus’ gospel was not packaged into a personal version for those who seek inner peace and a social version for those who want to change the world. In Mark the personal and social dimensions of the gospel are inseparable. The kingdom of God addresses us personally, just as it addresses the structures of our life together. Picking and choosing the aspects of the gospel we like is a matter for repentance, just as embracing those aspects of the gospel that make us anxious is a matter for faith.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41–4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