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Wisdom from Above

13 Who is wise and understanding among you? mBy his good conduct let him show his works nin the meekness of wisdom. 14 But if you have bitter o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in your hearts, do not boast and be false to the truth. 15 This is not pthe wisdom that comes down from above, but is earthly, unspiritual, qdemonic. 16 For where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exist, there will be disorder and every vile practice. 17 But rthe wisdom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speaceable, gentle, open to reason, t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uimpartial and vsincere. 18 And wa harvest of righteousness xis sown in peace by those who make peace.

m ch. 2:18

n ch. 1:21

o ver. 16; Acts 5:17; Rom. 2:8; 2 Cor. 12:20; Gal. 5:20; Phil. 1:17; 2:3; [Rom. 13:13]

p ch. 1:17

q [1 Kgs. 22:22; 2 Thess. 2:9, 10; 1 Tim. 4:1; Rev. 2:24]

r [1 Cor. 2:6, 7]

s Heb. 12:11

t [Luke 6:36]

u ch. 2:4 (Gk.)

v Rom. 12:9

w Prov. 11:18; Isa. 32:17; Hos. 10:12; Amos 6:12; Phil. 1:11

x Matt. 5:9; Gal. 6:7, 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3:13–18.

 

13절)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 안에서 그의 행함을 보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지혜는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헬라 세계에서는 온유함을 약한 것으로 여겼다. 헬라어 ‘프라우테스’로 표현되는 온유함은 기독교 안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온유함은 비겁함이나 소극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높이려는 태도로부터 자유롭다. 

 

야고보는 본문을 도전적인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렇다면 참된 지혜가 드러나는 행함을 통해서 너희의 지혜를 보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성도들, 좀더 나아가서 이해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참된 지혜는 참된 믿음처럼 행함을 통해서 드러나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지혜가 온유함으라는 덕목을 통해서 행함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4-16절) 앞서 지혜의 온유함으로 드러나는 행실과는 다르게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개인적인 야망)이 있는 자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자랑을 일삼는다. 이처럼 온유는 독한 시기와 다툼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땅 위의 것으로 그 특성은 정욕의 것이요 마귀적이고 이러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행실이 있다. 

물론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34:14, 신 4:24, 약 4:5)이시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질투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 대해서 충선된 헌신과 그분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반면에 독한 시기와 다툼을 지닌 이들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한다. 이처럼 다툼(selfish ambition)은 개인적인 권력과 특권을 얻기 위해 공동체를 나누려는 분열적인 태도를 말한다. 

Bitter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are the antithesis of true wisdom as characterized by “meekness” (v. 13). They are also far different from the righteous character of a “jealous God” (Ex. 20:5; 34:14; Deut. 4:24; see James 4:5), who appropriately yearns for his own honor and the loyal devotion of his people, while the envious yearn for what does not belong to them. “Selfish ambition” is a divisive willingness to split the group in order to achieve personal power and prestige (it is translated “rivalry” in Gal. 5:20; Phil. 1:17; 2: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6.

 

selfish ambition. Translates a Greek word that Aristotle used to describe the political factions that were convulsing Athens in his day (Politics 5.3.1302b; cf. Rom 2:8; 2 Cor 12:20; Gal 5:20; Phil 1:17; 2:3). do not boast about it. Do not brag about having wisdom when you are filled with selfishness. the truth. The “truth” of Christianity is something we must not simply understand but live (5:19; 1 John 1:6; 2 John 4) and obey (Gal 5:7; 1 Pet 1:22). When believers do not live in accordance with the gospel they profess, they in effect deny that truth (2 Pet 2:2).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1.

 

독한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의 특성은 점진적으로 더욱 악화된다. 이는 위의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영에 속한 것이 아닌) 나아가 악마에게 속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만이 있을 뿐이다. 이 혼란이라는 단어는 ‘아카타스타시아’로 교회 안에서의 혼란한 싸움의 광란을 의미힌다. 이와 연관된 형용사 ‘아카타타토스’는 정함이 없는(1:8), 쉬지 아니하는(3:8)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14절)  온유의 반대는 독한 시기(bitter jealousy)와 경쟁심(selfish ambition, 개역개정에는 다툼으로 번역-역자 주)이다. 물론 시기(젤로스, zēlos)가 늘 나쁜 것은 아니다. 비느하스(Phinehas)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zeal)으로 인해 찬사를 받았고(민 25:11–13), 예수 자신도 비슷한 열심에 사로잡힌 적이 계셨다(요 2:17).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참되고 순수한 열정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냉혹하고 폭력적인 광신(fanaticism)과 혼동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바울이 자주 책망하고 있고(롬 13:13; 고후 12:20; 갈 5:20), 야고보가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시기’(zealousy) 또는 ‘열심’(zeal)이다. 그러한 열정은 흔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와 비판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른바 ‘시기심’이라고 부르는 용어에 가깝다. ‘경쟁심’(selfish ambition)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리테이아(eritheia)는 비교적 드물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바울이 젤로스(열심)와 밀접하게 연관해서 세 번 사용하는 유사한 단어 에리스(다툼, eris)와 혼동되기 쉽다. 그러나 두 단어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에리테이아는 신약성경 이전의 문헌에는 단 한번(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당파를 일삼는 탐욕스런 정치인의 이기적인 야심, 편협한 당파적 열심을 의미한다. 바로 이 의미가 야고보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다. 자신의 지혜와 이해력을 자랑하는 사람들 중에 참된 지혜로부터 나온 온유와는 정반대로 시기와 독한 경쟁심(partisanship)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8.

 

  • 15절)  약간 풍자적인 방식으로 야고보는 이제 시기하고 경쟁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위로부터 내려 온 지혜와 대조시킨다. ‘위로부터 내려온’이란 표현은 1:17에서 신적 기원을 가리키기 위해 야고보가 이미 한번 사용한 바 있다. 참된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여호와는 지혜를 주신다(잠 2:6).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하나님께 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약 1:5). 그러나 이기심과 시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지혜’의 본질과 기원은 이와는 꽤 다르다. 야고보는 그것을 세 가지 형용사로 서술하는데, 그 의미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의 특성과 정확하게 대조된다.

  • 첫째, 이 지혜는 하늘의(heavenly) 것이 아니라, 땅 위의(earthly) 것이다. 땅위의 것(에피게이오스, epigeios)이란 말은 전반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요 3:12 참조), 일시적이고 연약하고 불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린도전서 15:40에 나오는 ‘땅에 속한’ 몸과 ‘하늘에 속한’ 몸의 대조 참조; 고후 5:1도 참조). 이 단어가 경멸적인 투로 사용된 예는 빌립보서 3:19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한다.

  • 둘째, 이 지혜는 영적인 (spiritual) 것이 아니라, 정욕적인(unspiritual) 것이다. ‘정욕의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쉬키코스(psychikos)는 명사 프쉬케(혼, psychē)로부터 파생된 형용사로, 신약성경에서는 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부분과 관계있다(Knowling). 신약성경의 모든 용례를 보면 그 단어는 ‘영적인’ 것과 분명하게 대조된다(고전 2:14; 15:44, 46; 유 19). 셋째, 이 잘못된 지혜는 귀신의 것(다이모니오데스, daimoniōdēs.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귀신에 속한’이란 의미를 지닌다)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아마도 그 지혜가 본성상 악마적이거나 기원상 악마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더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면, 선행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지혜는 ‘세상과 육과 귀신’의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각각의 특성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와 정반대이다. 즉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의 특성은 본성상(in nature) 하늘의 것이고, 본질상(in essence) 영적인 것이며, 기원상(in origin) 신적인(하나님의) 것이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9–200.

 

17-18절) 혼란과 악한 일과 반대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본절의 7개의 형용사들은 지혜가 무엇인가 보다는 지혜가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혜에 대한 명제적 진술이라기 보다는 지혜가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갈 5:22-23의 ‘성령의 열매’를 연상케 한다.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가 지혜의 열매인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첫번째 특성은 바로 성결함, ‘하그노스’로 순수한, 잘못이 없는 상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의의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화평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화평을 심는 삶을 바로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툼과 시기를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결함과 화평함을 좇아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 17절)  지혜의 첫 번째 속성은 성결(purity)인데,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성결한(하노스, hanos)이란 말은 더렵혀지지 않는 처녀 신부의 순결과 같이(고후 11:2 참조)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얼룩이나 흠하고도 거리가 먼 지혜가 악한 일(16절)을 초래할리 만무하다. 야고보는 이어서 열거되는 형용사들을 청각적 효과에 따라 배열하였다. 처음에 나오는 네 개의 형용사(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이 가득하고)는 모두 헬라어로 ‘에’(e) 소리로 시작하여-에이리니케(ēirenikē), 에피에이케스(epieikēs), 유페이테스(eupeithēs), 엘레우스(eleous)-두운을 형성한다. 또한 마지막에 나오는 두 단어도 ‘아’(a) 소리로 두운을 형성할 뿐 아니라, 거의 운율상의 유사성도 가진다.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 아뉘포크리토스(anypokritos)(아가톤〈agathōn〉 도 참조).

  • 그 목록이 화평한(peaceable)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데, 그 이유는 야고보가 전후문맥에서 경쟁과 논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혜가 거짓으로 판명된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기 때문이다(3:14, 4:1–2). 또한 구약성경에 의하면, 지혜는 평화를 가져오고(잠 3:17), 바울도 ‘화평’(peace)을 성령의 열매로 열거한다. 지혜는 왜 평화적(peaceable)인가? 그것이 또한 관용하고 양순하기 때문이다. 관용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에피에이케스(epieikēs)는 친절하고, 기꺼이 양보하며, ‘남을 엄격하게 대하지 않는 것’(호르트)을 말한다. 지혜에 의해 동기 부여되고 힘을 얻은 성도가 그러한 관용적인 태도로 무장한다면, 친히 ‘온유와 관용’(고후 10:1)으로 살아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양순한(유페이테스, eupeithēs) 사람은 문자적으로는 ‘설득하기 쉬운’ 사람을 말하지만, 약하고, 잘 속아 넘어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결코 바꿀 수 없는 원칙의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지혜는 또한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야고보는 2:8–13에서 직접 ‘긍휼’의 정의를 내려주는데, 그것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이웃사랑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긍휼을 선한 열매와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이 놀랍지 않다. 선한 열매는 긍휼의 행위로서 참된 믿음처럼, 참된 지혜가 가져와야만 하는 그러한 ‘열매’를 말한다.

  • 그 다음에 나오는 지혜의 속성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는 정의내리기가 어려운 단어이다. 그 단어는 편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공평한’(NIV; 참조 KJV, GNB)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솔직한’(NEB), ‘확실한’(RSV) 또는 ‘흔들림이 없는(NASB)’, ‘단순한’, ‘의심이나 나뉨이 없는’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 1:6에서(아마도 2:4에서도) 이 단어와 유사한 디아크리노(diakrinō, 본문에 나오는 단어와 연관)가 사용된 것을 볼 때, 마지막에 언급한 두 의미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야고보가 ‘나뉘지 않은’, ‘두 마음이 아닌’의 태도를 얼마나 강조했는지 앞에서 이미 살펴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 야고보는 기독교와 사람에 대한 차별성이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점(2:1–4)을 강조하고, 그 문맥에서도 여기처럼 긍휼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처음에 언급한 의미, 즉 ‘공평한’(impartial)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15 마지막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거짓이 없다(without insincerity). 이는 어떤 허세나 가식이 없이 진실한 것을 말한다. 지능과 영리함을 높이고자 하는 현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야고보가 여기에서 열거한 가치(덕목)들이 참으로 귀하고 영원한 것임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NASB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3.

  • 15 부사형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ōs)가 또한 스불론의 유언 7:2에서 긍휼을 베푸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 문맥에서는 ‘차별 없이’란 번역이 지지를 받는다(Charlesworth, 806 참조).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02–204.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여러 특성중에 화평을 강조하고 있다. 이유는 당시의 교회안에 일어나고 있는 다툼과 분쟁(3:16, 4:1-2)으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평이 너무나 요청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