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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번째 만남. 섬김의 도를 실현하는 공동체

 

1. 공동체적 삶의 원리 : 섬김의 도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가장 중요한 특징을 들라면 무엇을 들고 싶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쉽지만, 그 사랑을 실생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결단과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일에만 성장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교인 수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고, 얼마나 가난한 자를 섬기느냐보다 사랑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1)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성경의 매우 중요한 원리는 3장 16절에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NKRV)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3:16 (NKRV)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복음 3:16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면, 요한일서 3:16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었으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혹 요한복음 3:16만 있고 요한일서 3:16은 없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있는듯한데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없는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믿고 외우면서 요한일서 3:16은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고 외우는 요한복음 3:16은 어쩌면 가짜일지 모릅니다. 

 

2) 섬김의 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된 사람들은 어떤 원리,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0:25–28 (NKRV)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본문 앞에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불러놓고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도’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건강한 권위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유익을 따라,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마구 임의로 리더십을 사용하고, 자기가 가진 권세를 마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경이로운 소문, 충진시의 시장, 태신건설

세상 공동체는 피라미드 구조로 갑과 을의 관계로 구성되어 피라미드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속에서는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위치한 약자들을 을의 을이 되어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반대, 거꾸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져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가장 많은 낮아져서 섬기신 분은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 교회는 세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구조입니다. 자신의 힘과 권위, 지식, 능력, 경험, 재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런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2. 서로 복종하는 삶

* 생각해볼 질문 : 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1) 겸손의 순종

베드로전서 5:5 (NKRV)

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 사도는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에서 나이가 많은 이들, 곧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에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공동체의 리더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권위는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받았기에 자동적으로 그러한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이것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한에서 그 권위는 작동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양극단을 보입니다. 한쪽 극단은 유교적인 전통과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목사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목사에게 도전하면 벌받는다라고 가르치고, 목사가 비상식적인 요구를 해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합니다. 목사의 가르침이나 요구가 문제가 있어 보일때는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여서 오해할 수 있으니 쉽게 판단하기 보다 겸손히 질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겸손히 질문해야 합니다. 다른 극단은 모두가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기에 목사나 성도나 아무 차이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교회지도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영적 성숙도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에 따라 그 권위가 다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소견이 옳은대로 큰소리를 내고 무조건 1인 1표를 주장하며 다수결을 따라가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이상적인 의사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충분히 소통한 결과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모아질 때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모든 사안이 그렇게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결정을 유보해야할 수도 있고, 충분히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한 후에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소수의 의견을 리더가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리더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고 결정 할 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은 여기에 함께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2) 서로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NKRV)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피차 복종하라’는 이 가르침 이후에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원리로 이 원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속에서 이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 남편과 부모, 주인이 아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아내와 자식들과 종들을 함부로 대했고, 이것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시대속에서 반문화(counter-culture)를 제시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처럼 남녀가 평등화된 사회에서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포기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취향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믿고 또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즐기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기에 서로에게 속박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정을 이루고 배우자에게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까? 이 공동체의 최고의 권위가 바로 주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우리는 그 권위 아래서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는 다른 대안 공동입니다. 섬김의 도, 서로 복종하는 길을 선택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의 방식이 그대로 작동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도 직분이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이 큰 소리를 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섬기는 사람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3. 용서와 용납

* 생각해 볼 질문 : 어떤 사람을 섬기고 사랑했지만 오히려 오해를 받고 거절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요한복음 13:34–35 (NKRV)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는 네 가지 원리, 희생하는 사랑, 진실한 사랑, 구체적인 사랑, 중심있는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공동체에서는 건강한 권위를 인정하고 리더는 희생하고 섬기며 결과적으로 서로 복종함으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 계명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서로’라는 말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서로라는 말이 옆집 사람들, 옆 자리 김 선생님, 마트의 이 사장님등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넓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이 본문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공동체를 향해서 이 말씀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먼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실 때 백 명, 천 명, 만 명을 사랑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주신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허락된 사람을 사랑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람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찾지만 마찬가지의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겪는것이 불편하기에 모든 사람, 모든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기로 합니다. 불특정 다수를 사랑한다고 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우리 주변의 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사랑해야 합니다. 

 

2) 공동체를 세우는 첫 번째 기둥 : 용서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정도 멀리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랍니다. 상대방의 약좀과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하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18:20-35에서 용서의 비유,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본문의 용서의 가르침은 마 18:20의 말씀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8:20 (NKRV)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베드로가 묻습니다. 형제가, 앞에 내용에 이어서 말한다면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몇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묻습니다. 일곱번이면 됩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일곱번에 일흔 번이라도 참아라라고 말씀하시고 일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6000데나리온, 한 달란트는 거의 20년 연봉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입니다. 그런데 그것인 일만 달란트이니까 20만년 연봉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1년 연봉을 5천만원이라고 계산하면 10조원에 해당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그렇기에 일만달란트를 왕에게 탕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면제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이 백 데나리온, 1-2천만원의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압제한 것에 대해서 왕이 분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배반한 것은 일만달란트에 해당하는 빚입니다. 그 빚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는 어렵습니다. 나에게 거짓말이나 가벼운 잘못을 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자존심을 깨뜨리고, 나의 인격을 무시하고, 나에게 물리적인 큰 피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용서하는것 뿐만 아니라 용서받는 것도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3) 공동체를 세우는 두번째 기둥 : 용납

골로새서 3:13 (NKRV)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탕감해주는 것, 우리에게 저지를 죄를 없애주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납은 우리와 다른 면, 상대방이 가진 부족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한 것처럼 용납하기 위해서는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님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 마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용납을 잘 하지 못합니다. 자기 스타일만을 고집하며 나와 다름을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우리의 그릇이 점점 커지면 나와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부부와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서로 너무 달라서 고통스럽습니다. 결혼전에는 매력을 느낀 부분이 이제 나를 힘들게 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람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름을 용납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 용납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 나의 기준과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고, 상처 받지 말고 용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와 용납이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용납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참아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4. 은사로 공동체 세우기

* 생각해볼 질문 : 정말 좋은 공동체를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공동체에는 어떤 특성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여 공동체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용납할 뿐만 아닐 자신의 은사를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전 12:3-13절은 공동체의 은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13 (NKRV)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3절은 공동체의 대 전제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는 다양성과 하나됨이 존재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잘 섬깁니다. 누구는 병고치는 은사를, 누구는 손대접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로 다른 은사를 모두 한 성령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룰 주신 목적은 바로 7절로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 성령으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음으로 한 공동체를 섬기고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신다면 공동체안에서 다양한 일을 섬겨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가지 섬김의 일들을 통해서 나도 잘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이 바로 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섬길 때 기쁠게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음식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그렇게 음식을 준비할려면 엄청나게 고민하고 시간도 들고 노력이 필요할텐데 그분은 너무 쉽게 그 음식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분들이 너무나 맛있다고 좋아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손대접, 섬김의 은사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누군가 자기와 이야기를 하면 자신 앞에서 울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공감하는 은사, 긍휼의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답을 주기위해서 노력하지만 그 분은 공감해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만져주는 것입니다. 

 

2) 꿈을 이루어가는 공동체

베드로전서 2:9 (NKRV)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공동체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변화된 자들, 곧 택함을 받은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감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자기 은사로 섬기고, 그래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누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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