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4 e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them. 15 f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weep with those who weep. 16 g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hDo not be haughty, but associate with the lowly.8iNever be wise in your own sight. 17 jRepay no one evil for evil, but kgive thought to do what is honorable in the sight of all. 18 If possible, so far as it depends on you, llive peaceably with all. 19 Beloved, mnever avenge yourselves, but leave it9to the wrath of God, for it is written, n“Vengeance is mine, I will repay, says the Lord.” 20 To the contrary, o“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something to drink; for by so doing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 21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eSee Matt. 5:44; 1 Pet. 3:9
f1 Cor. 12:26; [Job 30:25; Heb. 13:3]
gch. 15:5; 2 Cor. 13:11; Phil. 2:2; 4:2; 1 Pet. 3:8
hver. 3; Ps. 131:1; Jer. 45:5
8Or give yourselves to humble tasks
ich. 11:25; Prov. 3:7
jProv. 20:22; Matt. 5:39; [ch. 14:19]
k2 Cor. 8:21; [ch. 14:16]
lSee Mark 9:50
mProv. 20:22; Matt. 5:39; [ch. 14:19]
9Greek give place
nHeb. 10:30; Cited from Deut. 32:35; [Ps. 94:1; 1 Thess. 4:6]
oCited from Prov. 25:21, 22; [Ex. 23:4, 5; 2 Kgs. 6:22; Luke 6:2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12:14–21.
앞서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책임에 대해서 다루고 나서 바울은 외부인들과의 관계로 관심을 돌린다. 먼저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이다.
14-16절) 본문에서는 3가지의 긍정적 권고와 3가지의 부정적 권고를 하고 있다.
긍정적 권고 | 부정적 권고 | |
14절 |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 저주하지 말라 |
15절 |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라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16절 |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라 |
바울은 본문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한다.(마 5:44, 눅 6:27-28) 이처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눅 23:34, 행 7:60) 본문이 말하는 축복은 먼저는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딤전 2:2의 내용처럼 도고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대적자, 원수들을 사랑할때 이는 그들이 회심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벧전 2:12, 개정)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5절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본문은 14절과 관계가 있는데 당시의 우는 것의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박해때문이었다.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는 이처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 뿐만 아니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벧전 2:12, 개정)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절) 본문의 harmony는 헬라어로 ‘프로네오’로 이는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빌 2:2, 개정)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하지만 이 하나됨이 기계적으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태도에 있어서 연합으로의 부름인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안에서 모두를 향해서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 인종족, 경제적 상태에 관계없이 말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고 그 어떤 은사도 상대방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지혜롭게 생각하기를 배웠을 때 이 변화된 마음은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하나됨을 이루어 낼 것이다.
- Harmonyliterally means “think the same thing” and occurs also in Philippians 2:2, “being like-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ne in spirit and purpose.” This is certainly not demanding that everyone think the same things, but it is calling for a unity of heart and attitude. Also, Paul is thinking more relationally than doctrinally, although it would certainly apply to the “sound doctrine” of the pastorals (1 Tim 1:10; 6:3; 2 Tim 1:13; 4:3; Tit 1:9; 2:1). As Moo rightly asserts (1996:782), this is not so much “think the same thing amongone another” as “think the same thing towardone another.” In other words, we should maintain the same attitude toward all, whatever their social, racial or economic status (see below). We all have different gifts in the church (vv. 3–8), but no gift should gain over any other. When our minds have been renewed (12:2) and we have learned to think soberly (12:3), that transformed mindset will produce true harmony with one another.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6.
자만심이야말로 교회의 하나됨과 낮은 자들을 돌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다.
17-18절)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세상의 일반 법칙이다. 그런데 성경은 악을 악으로가 아니라 선을 도모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화목할 것을 명령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선한 관계를 도모하고 유지하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모든 사람들과 화목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본문은 ‘할 수 있거든’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나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른 이들이 화평이 아니라 분쟁과 다툼을 원해도 우리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 It is natural that, in light of the encouragement to do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everybody,Paul would then extol us to live at peace with everyone(v. 18). Here again (cf. vv. 14, 17) we have a reflection of Jesus’ teaching, especially Mark 9:50, “be at peace with each other,” but also Matthew 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so Dunn 1988b; Fitzmyer 1993b; Moo 1996). The necessity of establishing peaceful relations with others is a frequent biblical theme (Ps 34:14; Rom 14:19; 2 Cor 13:11; 1 Thess 5:13; Heb 12:14). However, Paul realizes that we do not always control the situation and so prefaces his command with, 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All we can do is pursue peace; if the other does not wish peace but prefers conflict, there is nothing we can do. This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8.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 보복을 멈추고 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보복의 문제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속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이는 도피성 제도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도피성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피의 보수자, 친족의 보복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내에 설치한 도피처이다. 접근의 용이성을 위해서 전체 이스라엘에 6개를 설치하면서 하룻길안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신(19:3) 구약에서는 이처럼 보복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이 모든 보복을 하나님께 맡길 것을 명령받고 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고난을 위해서 보복의 정의를 행하고 계시다.
- Verse 19 sums up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ut not cursing others (v. 14) or retaliating (v. 17): Do not take revenge, my friends(literally “beloved”). As stated earlier, the desire to get even is normal when we are wronged. In fact, Cranfield (1979:646) says Paul inserts “beloved” because “he was enjoining something very hard even for Christians.” The problem of vengeance was so acute in the ancient world that Israel established cities of refuge (Ex 21:12–14; Num 35:6–34; Deut 4:41–43; Josh 20:1–9) as places of asylum for those who had accidentally killed someone, to protect them from retaliation. The Torah stipulated that a murderer was to be executed by an “avenger of blood” (Num 35:19–21; Deut 19:12), a family member of the victim chosen to execute the guilty party. In accidental death, the perpetrator needed to be protected from this “avenger.” In fact, such cities were evenly distributed in Israel for easy access (not more than a day’s journey from anywhere, Deut 19:3). But things are different now because of the advent of Christ. Instead of vengeance, we must leave room for God’s wrath*(literally, “give place to wrath,” certainly God’s in this context). The wrath of God has been discussed in 1:18; 2:5, 8; 3:5; 5:9; and 9:22; in most passages it refers to the last judgment, but here it is the ongoing justice of God bringing retribution for the suffering of his people. Once again, the already-not yet tension of the book is operative. God will choose the appropriate time for wrathto take place, whether now, later or at the final judgment.
- *12:19Schreiner (1998:673) gives the options for the interpretation of wrath.It could be (1) the believer’s own wrath, but that is negated here and in Eph 4:26–27; (2) the wrath of our enemies, but that is unlikely in this context of divine vengeance; (3) the wrath of the state, but that is the subject of the next section rather than this one; (4) the wrath of God, which is by far the most likely here.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8–339.
원수 갚는 것을 맡기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시록이나 시편의 기자가 했던 것과 같은 저주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악을 그냥 두시지 않는 분이시기에 그분이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이 일을 해결해주실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복의 기도, 저주의 기도는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인간의 성정으로 그런 아픔과 고통을 마땅히 토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상처와 아픔마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께서 정의를 행하실 것을 믿고 의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용서받를 자격이 없는 자를 용서하고 우리로 하여금 비통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나오게 할 수 있다.
- We must free ourselves from bitterness and find the strength to forgive those who do not deserve forgiveness. Only God has the right to avenge wrongs, and only he can do it perfectly. This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quandaries a believer faces. The person deserves judgment, but to “repay … evil for evil” (v. 17) will render us no better than the one who so deeply hurt us. The answer is right here—leave the vengeance to God. The means by which we can do this is called the imprecatory prayer or prayer for vengeance such as is exemplified in Revelation 6:10, “How long, Sovereign Lord … until you … avenge our blood” (see also the imprecatory psalms—Ps 12; 35; 52; 57–59; 69; 70; 83; 109; 137; 140). These psalms are not the product of an ethics that has long since been shown sub-Christian. Actually, they put into practice the injunction here by asking God to do what he has promised here—avenge and repay the hurt. However, it is important to realize that this prayer is not an end in itself but a means to a larger end, namely, leaving the hurt and the justice with God. This then will allow us to forgive those who do not deserve it and to free ourselves from a life of bitterness.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9.
20절)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를 통해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본문의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놓는다는 말은 우리의 친절과 선행을 통해서 그들의 죄의 심각성이 더욱 깊어지고 더 큰 심판이 임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들의 선행을 통해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먼저 원하고 있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준다는 것은 바로 선한 행동의 아주 구체적인 표현이다. 본문의 숯불은 크게 잠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러움과 선한 행실로 인해 야기되는 뉘우침이라는 해석과 박해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는 견해로 나뉜다.
- 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something to drink.As Cranfield notes (1979:648), food and drink stand for good works of every kind. Rather than returning evil for evil, we are to show love for our enemies concretely via acts of kindness. When we do this, it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Scholars are divided on whether the coals of firehere and in Proverbs refer to shame and remorse caused by the good deeds (Augustine; Godet 1969; Cranfield 1979; Käsemann 1980; Moo 1996) or to the judgment of God coming down on the oppressors as a result (Chrysostom; Stendahl 1962:343–55; Piper 1979:115–19; Schreiner 1998). In actuality, this is not an either-or. Both options fit the biblical imagery as well as the context. Fire is a frequent image of judgment in Scripture (e.g., Ps 140:10; Is 1:31; Heb 10:27), and good deeds as causing “burning pangs of shame” (so Fitzmyer 1993b; Moo 1996) among the oppressors fits well with the immediate context. The problem is that the one (shame) is favored by context, the other (judgment) by the imagery. Critics are doubtful regarding the judgment interpretation because it could lead people to do good for a negative purpose (to bring judgment on their enemies), while others doubt the shame interpretation as not fitting the “fire” metaphor. Actually, the two work well together (another example of double meaning) and may well supply the missing aspect in 1 Peter 2:12 (see on vv. 9, 14 above), in which oppressors view the good deeds and “glorify God on the day he visits us.” Paul here would be telling us that the good deeds cause the oppressors to feel shame for their slander and bring them under conviction (Rom 12), leading many to be converted (1 Pet 2); but those who refuse to respond with repentance will then come under divine judgment (Rom 12). Augustine says it well: “The evil man who is overcome by good is set free, not from an exterior, foreign evil but from an interior, personal one, by which he is more grievously and ruinously laid waste than he would be by the inhumanity of any enemy from without” (Bray 1998:323).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40.
21절) 위의 모든 내용을 하나로 정리하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명령한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이 일을 이루실때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주님이 이미 보여주신 그 본을 따라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묵상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롬 13: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 (0) | 2018.07.19 |
---|---|
롬 13:1-7 그리스도인과 세상 권세 (0) | 2018.07.18 |
롬 12:9-13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 (0) | 2018.07.13 |
롬 12:3-8 다양성 속의 연합 (0) | 2018.07.12 |
롬 12:1-2 마음을 새롭게 함 (0) | 2018.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