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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For rhe himself is our peace, swho has made us both one and has broken down tin his flesh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15 by abolishing the law of commandments expressed in uordinances, that he might create in himself one vnew man in place of the two, so making peace, 16 and might wreconcile us both to God in one body through the cross, thereby killing the hostility. 17 And he came and x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yfar off and peace to those who were znear. 18 For athrough him we both have baccess in cone Spirit to the Father.

r Ps. 72:7; Mic. 5:5; Zech. 9:10; [Col. 3:15]; See Luke 2:14

s See Gal. 3:28

t Col. 1:21, 22; [Rom. 7:4]

u Col. 2:14, 20

v See Rom. 6:4

w Col. 1:20–22; [1 Cor. 12:13]

x Isa. 57:19

y ver. 13

z Deut. 4:7; Ps. 148:14

a [John 14:6]

b ch. 3:12; [John 10:7, 9]; See Rom. 5:2

c ch. 4:4; 1 Cor. 12:13; [John 4: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14–18.

 

앞서 13절에서 이야기한 내용,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줬다’라는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오늘의 본문이다. 13절에서 너희가 이제 14절부터 우리로 바뀐다. 그리고 계속해서 17절에 너희, 18절에 우리로 표현된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To say Christ—that is to speak of peace. To speak of peace—that is to speak of Chris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

 

14절) 

중간에 막힌 담, 분리하는 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 뜰,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다. 구약의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 지성소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고 대제사장의 경우라도 죄를 지으면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 상징적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들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스스로 화평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직적인 화평(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과 수평적인 화평(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수평적인 화평은 단지 적대감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14, 15, 17절에 화평(에이레네)가 4번 등장한다. 본문속에서 화평은 연합, 나뉨과 적대감을 없애는 것, 접근과 화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는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고 그리스도는 화평을 선포하셨다. 바울은 가능한한 그리스도와 화평을 연결시킨다. 그는 화평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고 그것의 유용성을 선포하시고 그분안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바울신학의 여러 중요 주제들은 화평과 관련되어 있다. 

  •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다. 

  • 평화는 종말론적인 보상이다. 

  • 평화는 구원과 동등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 그 왕국은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 화평은 인간 관계의 목표이다. 

  • 화평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초이다. 

  • 성령의 열매는 화평이다. 

  • 평강은 우리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지킨다.

 

화평은 단순히 적대감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과 하나님과의 삶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사용의 배경이 되는 것이 구약에 사용된 샬롬의 의미이다. 이는 온전함, 육체적인 안녕, 풍요, 안전, 좋은 관계 그리고 고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윗은 심지어 그의 전쟁에서 샬롬을 묻는다. 샬롬은 단지 분쟁이 부재한 상태보다 더 긍정적이다. 그것은 그래야만하는 삶의 방식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양한 본문에서 샬롬은 공의, 정의, 구원과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 된다. 여호와는 화평이시다. 여호와는 평화의 언약을 그의 백성들과 맺고 평화를 가져올 것을 약속하신다. 평화는 미래에 대한 위대한 예언들에게 보여지는 바대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시다. 

본문 14-18절 속에서 평화는 뜻밖에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건설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나뉨과 적대감은 파괴되어야만 하고 연합과 평화는 확립되어야 한다. 화평과 화해는 수평적, 수직적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야 한다. 일차적인 초점은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수평적인 평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14절의 그 둘은 11-12절에서 언급된 두 부류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는 표현은 수직적인 차원을 묘사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적대감은 16절에 “그들의 적대감, 원수된 것을 죽이라”는 표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새로운 존재로 참가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양쪽 모두를 한 몸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십니다. 

17절에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는 그리스도의 선포는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전한 내용을 말하며 문자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구는 바울이 그 자신과 다른 선포자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로 보았는지를 보여준다.  

Peace dominates this section both explicitly (vv. 14, 15, 17 [twice]) and implicitly (unity, destruction of division and hostility, access, and reconciliation). Christ is our peace, makes peace, and proclaims peace. Paul seeks to connect Christ and peace as comprehensively as possible. He is the one who makes peace possible, who announces its availability, and in whom peace is enjoyed. This theology of peace is both a Christological and a soteriological statement.

The word for peace (eirene) occurs forty-three times in Paul’s letters, eight of which are in Ephesians (1:2; 2:14–17; 4:3; 6:15, 23). Peace is a central and fundamental component of Paul’s theology. Virtually every topic of doctrinal significance is brought into relation to peace. In addition to occurrences in greetings and blessings, note the following:

God is a God of peace (Rom. 15:33; 16:20; 1 Cor. 14:33; 2 Cor. 13:11; 1 Thess. 5:23).

Christ is the Lord of peace who gives peace (2 Thess. 3:16).

The gospel is a gospel of peace (Eph. 6:15).

The mindset of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Rom. 8:6),

Peace is an eschatological reward (Rom. 2:10),

Peace is equivalent to salvation and describes relation to God (Rom. 5:1),

The kingdom is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Rom. 14:17),

Peace is the goal for human relations (Rom. 14:19; Eph. 4:3; 2 Tim. 2:22).

Peace is the foundation for problem solving (1 Cor. 7:15; 14:33).

The fruit of the Spirit is peace (Gal. 5:17).

Peace guards our hearts (Phil. 4:7) and rules in them (Col. 3:15).

With such varied use it is not surprising that Paul summarizes the gospel by saying, “He [Christ] is our peace.” Peace is not merely the cessation of hostility; it is a comprehensive term for salvation and life with God. The background to this use is the Old Testament concept of shalom, which covers wholeness, physical well-being, prosperity, security, good relations, and integrity.23 David even asks about the shalom of his war (2 Sam. 11:7; niv, “how the war was going”)! Shalom is much more positive than merely the absence of conflict. It refers to the way life should be and is a gift of God that is received only in his presence. In various texts shalom is equated with righteousness, justice, salvation, and the reign of God.24 Yahweh is peace (Judg. 6:24), makes a covenant of peace with his people, and promises one who will bring peace.25 Peace is what God wills for his people, as can be seen in the great prophecies about the future.26

In 2:14–18 peace is unexpectedly both a destructive and a constructive act. Division and hostility had to be destroyed, and unity and peace established. Peace and reconciliation (v. 16) take place on both horizontal and vertical levels. Most of the focus initially is placed on the horizontal peace established between Jews and Gentiles. “The two” (v. 14) refers to the two parties mentioned in verses 11–12, the Jews and the Gentiles,27 and the mention of the law (v. 15) and of Gentiles being included with God’s people (v. 19) is further confirmation. In Christ, Jews and Gentiles are made into one new being.

At the same time, “he himself is our peace” describes the vertical dimension. We have peace with God (Rom. 5:1). Hostility between humanity and God is at least implied here and may be explicit in 2:16 with the words “put to death their hostility”28 (if this does not refer again to the hostility between Jews and Gentiles; see Rom. 5:8–10). Christ not only joins Jews and Gentiles into a new being, but he ushers both of them in one body into God’s presence.

Christ’s preaching of “peace to you who were far away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 (v. 17) refers to the preaching done by the apostles and missionaries to Gentiles and Jews respectively, not literal preaching by Jesus. But this phrase does show how much Paul viewed himself and other proclaimers as representatives of Christ. “Preached peace” is adopted from Isaiah 52:7 (cf. also Zech. 9:10).29

23 As examples, see Genesis 37:14 (niv, “well”); Psalm 38:3 (niv, “health”); 73:3 (niv, “prosperity”); Leviticus 26:6; Judges 4:17 (niv, “friendly relations”); Zechariah 8:16 (niv, “sound” judgment). For good discussions of peace see Ulrich Mauser, The Gospel of Peac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2); Perry B. Yoder, Shalom: The Bible’s Word for Salvation, Justice, and Peace (Newton, Kans.: Faith and Life, 198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4 See Leviticus 26:3–23; Psalm 34:14; 37:37–40; 85:10; 119:165; Isaiah 32:16–17; 52:7 (to which allusion is made in Eph. 2:17).

25 See Numbers 6:26; 25:12; Isaiah 54:10; Ezekiel 34:25; 37:26; Malachi 2:5; for the promise of one who will bring peace, see Isaiah 9:1–7; 11:1–9; Micah 5:2–5; Zechariah 9:9–10.

26 Such as Isaiah 2:2–4; 11:1–9; Jeremiah 29:11 (niv, “prosper”).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peace in the New Testament is no less important. Not surprisingly, the first word of the risen Christ to his disciples in the Gospel of John is “peace.”

27 That the neuter is used for “the two” (rather than the masculine as in 2:16 and 18) is no proof that reference was originally to two parts of the cosmos (contra Lincoln, Ephesians, 128–29). The neuter and the mixing of genders often occur in reference to people (note, e.g., John 1:11; 6:39–40; 1 Cor. 1:27–28).

28 Literally, “having killed the hostility in himself.” The phrase means that the killing takes place in his own being, not that the hostility is his.

29 Koshi Usami, Somatic Comprehension of Unity: The Church in Ephesus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3), 53–55, suggests that Paul intentionally avoided the pronoun “we” in verse 17, in order not to express an attitude of superior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131.

 

본문에서 막힌 담, 나누는 벽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1. 육체

  2. 영지주의 본문에서 언급된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적 장벽

  3. 율법

  4.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

  5.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을 나누는 성전의 장벽(행 21:28-29)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에는 요세프스와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라틴어와 헬라어로 이 벽을 넘어가면 죽음을 당한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행 21:28-29에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갔다라고 고소한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단지 물리적인 성전의 장벽만을 의미하는 것은 너무 좁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5절) 법조문과 율법의 역할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으로 대변되는 옛 언약을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새언약으로 대치하셨다.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세 율법은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장벽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새 언약의 신자들이 모세의 율법하에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법아래에 있다라는 것이다. 

신약의 바울서신에 이 화평(에이레네)라는 단어가 43번 등장하는데 이 에베소서에 8번이 사용된다. 이처럼 화평(평안, 평강)은 바울 신학의 중심적, 기초적인 구성요소이다. 

Christ sets aside the old covenant with its Mosaic law and replaces it with a new covenant for all believers. Consequently, the Mosaic law cannot serve as a barrier between Jewish and Gentile believers. Although new covenant believers are not under the Mosaic law, they are under “Christ’s law” (1 Cor 9:21; cf. Matt 5:17; Rom 3:31; Gal 6:2).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3.

 

본문에서 율법을 폐하셨다라는 표현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이나 도덕적인 지침을 파괴했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폐한 것은 바로 이방인을 제외시키는 규정으로서의 일련의 율법을 폐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애써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거나 제사, 음식법을 강요함으로 그들이 유대인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바울은 이러한 것을 폐한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안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벽 철폐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이루어졌다. 11절에서 ‘육체로는’이 문제의 핵심이었는데 이제 14절에서 ‘자기의 육체로’이것을 허셨다. 이는 바로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 적대감을 없애셨다. 갈 3:13절은 이렇게 말한다. 

(갈 3:13, 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스스로 제사장으로서 또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14-16절에서 화목하게 함은 파괴적이며 건설적인 행동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이 둘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4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자기 육체로’, ‘자기 안에서’, ‘한 몸으로’, ‘십자가로

이처럼 그리스도는 적대감을 제하시고 파괴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다. 이는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됨, 연합은 이 서신의 주요 주제이다. 14-18절에서 4번의 확언이 이루어진다. 

  1. 둘로 하나를 만듬(14절)

  2.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음(15절)

  3. 이 한 몸안에서 그들 둘을 화해시킴(16절)

  4.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음(18절)

 

화목, 화해는 ‘아포카탈라쏘’라는 단어이다. 신약에서 각각의 화해에 관한 단락의 초점은 서로 다르다. 롬 5:10-11에서는 하나님과 죄인간의 화해에 초점을 맞춘다. 고전 5:18-21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우리(세상)를 화목케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다. 골 1:20-21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화목케하신다. 엡 2:16에서는 두가지의 화해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화해이다. 하나님은 화목케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화목케되어지는 존재들이다.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가 화목케하신다. 이 일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다. 십자가는 사람들과 그분 자신과 화목케하기위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노하심에도 그분은 사랑하시고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이 화목의 결과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나아감의 의미는 왕께 나아감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다. 

Reconciliation. This passage is one of the few that discuss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which focuses on the restoration of broken relations. In the New Testament this language appears only in Paul’s letters, and then only infrequently.46 The verb to “reconcile” (apokatallasso) does not occur prior to Paul’s use, and in the New Testament appears elsewhere only in Colossians 1:20 and 22.47 In each reconciliation passage the focus is different. Romans 5:10–11 focuses on reconciliation between God and sinners who are enemies. In 2 Corinthians 5:18–21 God reconciles us/the world to himself and gives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Colossians 1:20–21 God reconciles to himself all things on earth and in heaven. In Ephesians 2:16 a double reconciliation occurs—that between God and humanity and that between Jews and Gentiles.

In New Testament texts, God is always the one who does the reconciling. Human beings are reconciled; God (or Christ) reconciles. The initiative always lies with God. The cross is God’s act to reconcile people to himself, not an act by which he is reconciled. Even when people are hostile to God and God is angry, he loves and works to restore relations.

46 See Romans 5:10–11; 11:15; 2 Corinthians 5:18–21; Ephesians 2:16; Colossians 1:20–22. Still, Ralph Martin considers it the center of Paul’s theology. See “Center of Paul’s Theology,”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eds. Gerald F. Hawthorne and Ralph P. Martin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1993), 92–95; see also his Reconciliation: A Study of Paul’s Theology (Atlanta: John Knox, 1981); Peter Stuhlmacher, “Jesus as Reconciler, Reflections on the Problem of Portraying Jesus Within the Framework of a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conciliation, Law, and Righteousness, 1–15.

47 Paul may have coined the word; other Pauline texts use the verb katallasso and the noun katallag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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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I want you to know yhow great a wstruggle I have for you and for those at Laodicea and for all who have not seen me face to face, that ztheir hearts may be encouraged, being aknit together in love, to reach all the riches of full assurance of understanding and the knowledge of bGod’s mystery, which is Christ, cin whom are hidden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
yPhil. 1:30
w[See ch. 1:29 above]
zch. 4:8; Eph. 6:22
a[ch. 3:14]
bSee ch. 1:27
cIsa. 11:2; 45:3; 1 Cor. 1:24, 30; 2:6, 7; [Luke 11:49; Eph. 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2.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여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무리들을 위해 애썼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한데 골로새에 있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한 그의 사역의 영적인 목적을 2절에서 설명한다. 
Paul’s Labor for Colosse (2:1–3)*  Paul concludes this section on a more personal note: he not only serves the church of Christ (1:24) but “struggles” (in cooperation with God; 1:29) for the congregations at Colosse and Laodicea. Paul’s intention is exactly the same as before: to clarify that the purpose of his ministry is to make known to every Gentile, including those at Colosse,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compare 1:27). He does elaborate on the spiritual purpose of his ministry for them: that they may be encouraged in heart and united in loveand may have complete understanding … and know the mystery of God, namely, Christ.7
*2:2O’Brien prefers to understand the word translated “encouraged” (parakaleō)by the NIV as “strengthen” (1982:92–93), thereby stressing the intended result of Paul’s ministry.
The ending of verse 2 was corrupted during scribal transmission. The exact grammatical relationship between Godand Christremains unclear. Some textual variants, for example, extend the ending to view Christ as God, so that the mystery of Goddisclosed is that Christ is God. Others expand the name Christ into a christological confession. The NIV accepts the critical reading and rightly translates “Christ” as epexegetical, identifying Christ as the sum total of God’s mystery.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1.


2절) 바울은 그들로 1) 마음에 위안을 받고(encouragement), 2) 사랑안에서 연합하여(unity), 3)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한다(understanding and knowledge). 
이 세가지는 그가 사도로서 강조하는 세가지 사역의 목표이다. 
Paul lists three goals of his apostolic contending. (1) encouraged in heart.The heart was considered to be the center of one’s will and reasoning and not merely that of one’s emotions. (2) united in love.Love is both a unifying force (3:14) and an atmosphere in which one lives. (3) complete understanding.This experience will lead them to grasp with full assurance God’s larger purpose for the world in Chris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0.

유대 전통에서 마음은 인간의 감정보다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인생의 어려운 결정들이 신자의 마음에서 내려지고 강화되고 하나님의 비밀로 성숙하게 된다. 바울의 복음 사역은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거짓 가르침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이루어진다. 
본문의 연합하여라는 단어는 ‘심비바조’라 문자적으로 ‘knit together’로 털실로 짜다, 접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마음을 강하게 한 후에 따르는 자연적인 행동이다. 그는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서로 상호적인 사랑으로 접합되고 하나되기를 그의 사역을 통해서 바라고 있는 것이다. 
  • In Paul’s Jewish psychology the heartsymbolizes human volition rather than human emotion; the hard decisions of an embattled life are made by the believer’s heart, fortified and matured by the mystery of God.Paul’s gospel ministry strengthens the Colossians against false teaching so that they are able to make decisions that please God. The word translated “united” (symbibazō)means literally to be “knit together” and refers to an action that naturally follows after (if not also from) a fortified heart.That is, the purpose of Paul’s ministry (presumably his proclamation of the gospel, and his pastoral admonishment and instruction; 1:28) is corporate: that the congregation weld well together in mutual love.
  • The truth of one’s message is discerned in a very practical way, then—by whether or not a loving community is formed. False teaching or even a wrong emphasis often creates factions, with the result that the gospel’s ministry is undermined. A Christian witness to God’s grace is too difficult to maintain in a graceless society without the loving support and firm resolve provided by a people. Paul’s use of the body metaphor for the church (compare 1:18; 1 Cor 12; Eph 4) implies this same lesson.
  • The NIV links the next couplet, understandingand knowledge,with the first couplet, encouragementand unity,as Paul’s overarching purpose for the Gentile mission. But rather than taking these couplets as describing the congregations that resulted from Paul’s campaigns, it seems best to understand them as describing the evangelistic campaigns themselves. Harris, for example, interprets the two couplets as comprising the specific objectives of Paul’s ministry (1991:81) and perhaps even of this letter to them. If anything, Paul’s earlier petition for “knowledge and understanding” (1:9–10) seems to indicate that the congregation will be spiritually healthy only if they know the gospel that Epaphras first preached to them. That is, the qualities of the productive minister are reproduced in his congregations.
  • In this light, the genitives used by Paul in this passage to modify understanding(“complete”) and knowledge(“the mystery of God”; compare 1:27) are particularly important. In the first case, completetranslates plērophoria(literally, “full accomplishment”), another in the family of plērōwords that Paul has already used (see 1:9 and 1:25) for his aim to teach the congregation a fuller, more complete understanding of the gospel: to fill in what spiritual competencies they lack. In the second case, the phrase mystery of Godsupplies the core content of the complete gospel—namely, Christ.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1.

3절)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앞선 비밀이라는 단어를 본 절에서는 감추어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과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바로 바울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바울은 성경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감추어진 비밀을 주해를 통해서 캐냈다. 선교사로서 바울이 선포한 믿음은 기독론적 단신론으로, 놀라운 우리의 믿음의 보고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묻혔고 또한 캐냈다. 
영적 성숙함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의 결과이다. 본서에는 지혜, 지식, 앎에 대한 특징적인 강조가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선포와 연관되는데 이는 골로새 교회의 대적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 틀림없다. 
Clearly, verse 3 is parallel to verse 2 in thought. The idea contained in the phrase full riches of complete understandingis virtually repeated in the following phrase,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so that the idea of mysteryfinds a parallel in the word hidden.Significantly, sandwiched between these two parallel phrases is their focal point: Christ, in whomall these mysterious riches and hidden treasures of God’s mystery are disclosed by the preaching of Paul’s gospel. Remember that for Paul the biblical Jew, the mysteries of God’s treasured salvation lie hidden within Scripture and are mined by exegesis; and for Paul the Christian missionary, the proclaimed faith is a christological monotheism, and so the wonderful riches of our faith are both deposited and drawn through Christ.
Simply put, spiritual maturity results from knowing Christ. The distinctive emphasis in this letter on wisdom(1:9, 28; 2:3, 23; 3:16; 4:5), knowledge(1:9–10, 27; 2:2–3; 3:10; 4:7–9) and knowing (1:6; 2:1; 3:24; 4:1, 6, 8), especially linked to Paul’s proclamation of Christ, is no doubt made with Paul’s Colossian opponents in mind. They too are concerned with ideas, but their “philosophy” is not centered by the teaching of and about Christ (2:8) and therefore is “hollow and deceptive,” incapable of forming the spiritual life of the Christian congregation (2:6–7).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1.


"그리스도 안에서” 이는 골로새서의 중심 주제이다. 




이제 4절부터 15절까지의 본문은 그리스도 없는 신학,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변론이다. 바울은 앞서 1:12-23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복음의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1:24-2:3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권고하고 가르칠 권한이 있음을 변호했다. 이러한 토대를 세우고 나서 이제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변론한다. 
거짓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그는 특정 집단안에 현존하는 신학적인 잘못을 확인하고 신앙과 삶에 그들의 부정적인 영향을 이야기한다. 바울에게 나쁜 생각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또한 그분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는 그의 복음 사역의 기초가 되는 확신에 비추어 이러한 잘못에 반대하며 일반적으로 편지의 서두에 소개한다. 이것이 바울의 편지 양식이다. 그것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중요성과 함께 문제를 명확히 하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독자 자신의 이해의 빛안에서 올바른 반응을 분명히 표현한다. 
To this point in the main body of his letter, Paul has reminded his readers of the essential ingredients of the gospel (1:12–23) they first heard from Epaphras (1:6–7), and has defended his authority to admonish and teach his readers in its light (1:24–2:3). Having laid this foundation, the apostle is now ready to attend to the situation that has occasioned his correspondence—the false teaching that threatens the faith of the Colossian believers.
Paul’s response to false teaching typically contains two parts. First, he identifies the theological errors present in a particular congregation and draws out their negative implications for faith and life. For Paul, the problem with bad ideas is that they result in distorted notions of Christ and what it means to follow him. Second, he argues against these errors in light of the foundational convictions of his gospel ministry, usually introduced at the outset of a letter. This, then, is the fabric of Paul’s letter-writing: to clarify a problem along with its spiritual and moral consequences and to articulate the proper response to it in light of the readers’ own understanding of the “word of truth.”
Following this pattern, Colossians contains two sharp discussions. The first discussion is theological (2:4–23): Paul challenges the legitimacy of the theological convictions that underlie the competing understanding of Christian faith in Colosse. The second discussion is mainly ethical (3:1–4:1): Paul draws upon moral tradition (paraenesis)to describe the character of Christian life that is now imperiled by the false teaching.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4.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앎과 행실이 함께 가야 한다. 실제적인 행함,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앎은 열매가 없는 무용한 신앙, 메마른 신앙이 되기 쉽다. 성경적인 신앙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뿌리 내려 매우 견고하고 또한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경험을 희생해가면서 우아하고 강력한 사상을 모으는 것을 우선으로 할때 쉽게 우상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삶을 변혁시키는 관계를 주님으로 대체한다. 
In our day, as in the ancient world, people often measure the value of what others say by how well they say it. Even within the church we put great stress on a person’s academic credentials, as if a Ph.D. granted one a corner on heavenly wisdom. The result is that we learn to value elegant systems of church dogma that are held together by sophisticated and learned arguments. In the life of many congregations, faith has become so intellectualized that its relational, experiential dimension has been bleached out. Certainly it is important to think through carefully what one believes and why. Yet many of my students come to university with strongly held convictions about Christ but without the experience of a vital relationship with him. Knowing what to believe has replaced knowing whomto believe.
In the pastorate and in academia, I have often found that when faith consists only of ideas, without practical experience of their truthfulness and usefulness, it is easily shattered when it comes up against competing ideas. Biblical faith is very concrete, rooted in the teachings and work of a person, Jesus of Nazareth, and embodied in personal and social relationships. Thus, when one’s understanding of Christian faith centers on a collection of elegant, even powerful ideas at the expense of an experience of God’s love, it quickly becomes an idolatry: the idea of God replaces a life-transforming relationship with the Lord.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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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know that cChrist, being raised from the dead, will never die again; ddeath no longer has dominion over him. 10 For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e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11 So you also must consider yourselves fdead to sin and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6:9–11.

계속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매우 중요하다. 

9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 그리스도는 결코 다시 죽지 않을 것을 우리는 안다. 죽음이 더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한다.
본문은 다른 부활의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의 본질적인 다름을 명백히 증거한다. 나사로도 부활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다시 죽음을 맛 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르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깨드리신 것이다. 장기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죄의 마지막 움직임인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장군'이다. 게임은 끝났다. 죄는 이제 영원히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이제 사셔서 하나님과 함께 깨지지 않는 교제가운데 계신 승리자이시다.
많은 고대의 교회들안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하는 그림이나 조각들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는 복음이 아니다. 교회는 죽음과 무덤을 이기신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를 새롭게 해야만 한다. 그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를 기쁜 소식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 Paul now appealed to a point of common knowledge among God’s people.24 Having been raised from the dead, Christ cannot die again. His resurrection was unlike that of Lazarus, who had to meet death once again.25 But Christ’s resurrection broke forever the tyranny of death. That cruel master can no longer exercise any power over him. The cross was sin’s final move; the resurrection was God’s checkmate. The game is over. Sin is forever in defeat. Christ the victor died to sin “once for all”26 and lives now in unbroken fellowship with God.27
Many of the ancient cathedrals in the old world portray in their statuary a dead or dying Christ. But Christ crucified (if no more were said) is not the gospel. The church needs a renewed awareness of Christ as victorious over death and the grave. It is the resurrection that makes the news good news. Rising triumphant over Satan’s ultimate show of force, Jesus Christ is forever crowned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Join the triumphal parade! Celebrate the defeat of Satan, that rebel whose fate is now forever sealed.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52.

바울은 3, 6, 9절에 걸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알고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0절) 왜냐하면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었음이나 그가 살으심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으심이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실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에 한번도 굴복한 적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모양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죄의 세력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에 대해서 죽으셔야만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10절) 그리고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6절) 그러므로 믿는 자들 또한 죄에 대하여 죽었다.(2절)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창 3:15절의 내용처럼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사건으로 그분이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심으로 승리하셨다.
- he died to sin. Although Christ was sinless and never succumbed to sin’s power (2 Cor 5:21; Heb 4:15), his full identification with human beings in the incarnation meant that sin’s power affected him. He therefore had to “die” to it. This provides a crucial step in the logic of this section: Christ died to sin (v. 10), and believers died with Christ (v. 6); therefore, believers died to sin (v. 2).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302.

아담의 죄는 세상으로 죽음을 가져왔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정복했고 그분의 부활은 죽음을 정복했다.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을수 있는가를 알려주고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이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정복하셨기에 죄의 몸이 없어지거나 무효화됩니다. 그리고 좌와 죽음이 정복되었기에 삶은 새로운 의미를 작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살으심으로 그가 하나님에 대해 산다라고 첨부합니다. 더이상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있지 안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한 삶에 영원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지구상에 있는동안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분은 이 세상의 짐 아래 성육신의 삶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헨드릭슨이 말했듯이 예수님은 그분의 부활 이후에 그분이 그가 이 세상에 오기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삶으로 돌아가셨습니다.
- The logic goes back to 5:12–21. Adam’s sin brought death into the world, so Christ’s death conquered sin and his resurrection conquered death. This tells us how we can die to sin (v. 2) and like Christ be raised to a new life (v. 4). Christ has conquered sin once for all on our behalf, and therefore the body of sin has been done away with or nullified (v. 6). And because sin and death have been conquered, life has new meaning. So Paul adds,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better “for God”). No longer under the dominion of sin and death, Christ can devote eternity to living for God. Not that he failed to do so while on earth, but now he is unencumbered by the strictures of his incarnate life under the burden of this world. As Hendriksen puts it (1981:200), Jesus after his resurrection returned to the life he had with the father before he came into this world.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55–156.

11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본받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죄에 대한 초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는 생각은 신자들이 병에 걸린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선택하는 것은 영적으로 시체와 교제하기 위해서 무덤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죽음은 신자의 세계관 전체가 급진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합니다.
The very idea of responding positively to sin’s invitation should strike the believer as morbid. For the Christian to choose to sin is the spiritual equivalent of digging up a corpse for fellowship. A genuine death to sin means that the entire perspective of the believer has been radically altered.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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