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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en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a delight to the eyes, and that the tree was to be desired to make one wise,2 she took of its fruit xand ate, and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yand he ate. zThen the eyes of both were opened, a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loincloths.

2 Or to give insight

x 1 Tim. 2:14

y ver. 12, 17; Hos. 6:7

z ver. 5

a ch. 2:2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6–7.

 

 

6절) 뱀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여자가 선악과를 바라보게 되었을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뱀의 유혹이 있기전에는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한 갈망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선악과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시작된 갈망은 우리를 삼킨다. 결국 여자는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고 자신과 함께 하던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2장 9절을 보면 동산의 다른 모든 나무들의 열매도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였다. 하지만 뱀은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열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 것이다. 그 나무는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먹음직했다. 그런데 온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기초해야 하는데 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반역의 결과였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었다. 뱀이 유혹을 했을때 아담이 함께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뱀은 이러한 유혹에 여인이 더욱 약하다는 것을 같파했고, 또한 여인에게 남성이 약한 것을 알았다. 아내의 요구를 아담은 거절하지 못했다. 분명히 그것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 열매를 먹은 것이고 이것은 2장 15절에서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하나님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본문에 지혜롭게라는 단어는 ‘사칼’로 바라보다, 이해하다, 파악하다라는 의미이다 

3. The theological use includes the giving of insight by God (1 Chron 22:12; 28:19; Dan 1:17; 9:22; cf. Prov 19:14), whose good Spirit instructs the people (Neh 9:20); so the faithful are to do, given their experience of God’s grace (Ps 32:8). In Gen 3:6, the way humans acquire wisdom becomes the issue, not acknowledging the one who gives wisdom. The people of God are to consider carefully God’s deeds (Ps 64:9 [10]; 106:7; Isa 41:20) and God’s ways (Neh 8:13; Ps 101:2; 119:99), wherein their lives can prosper (1 Kgs 2:3). God’s presence and action in the lives of the obedient can issue in good success (Josh 1:7–8; 1 Sam 18:14, 30), but a lack of success can befall those who do not attend to the Lord (Jer 10:21), who observes the house of the wicked (Prov 21:12). The move to action can be seen in the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poor (Ps 41:1 [2]). Insight is characteristic of the coming Messiah (Jer 23:5; cf. Jer 3:15); God will make the way of the suffering servant prosper (Isa 52:13). The wise will participate in the resurrection (Dan 12:3).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243.

 

하와는 돕는 배필이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함께 옆에 있어주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인데 옆에 있어서 도와야할 아내가 남편을 타락으로 이끈 것이다. 아담의 이 죄는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모든 죄와 고통, 육적 영적 죽음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먹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 충동은 선악과가 단순히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와의 관심사가 지혜였다는 것은 창세기 3:6과 창세기 2:9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창 2:9 וְט֣וֹב לְמַאֲכָ֑ל 가)נֶחְמָֽד לְמַרְאֶ֖ה 나)וַיַּצְמַ֞ח יְהוָ֤ה אֱלֹהִים֙ מִן־הָ֣אֲדָמָ֔ה כָּל־עֵץ

와야츠마 야웨 엘로힘 민–하아다마 콜–에츠 네흐마드 레말에 베토브 레마아칼 창 3:6 וְנֶחְמָ֤ד הָעֵץ֙ לְהַשְׂכִּ֔יל 다)תַֽאֲוָה־ה֣וּא לָעֵינֵ֗יִם 나)טוֹב֩ הָעֵ֨ץ לְמַאֲכָ֜ל וְכִ֧י 가)כִּ֣י

키 토브 하에츠 레마아칼 베 키 하아와–후 라에이나임 베테흐마드 하에츠 레하스킬

창세기 2:9과 창세기 3:6을 비교해 보면, 선악과는 다른 과일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 먹기에 좋고 나) 보기에(2:9) 또는 눈에(3:6) 탐스러운 과일이었다. 창세기 3:6의 선악과는 창세기 2:9과 다른 독특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라는 점이었다. 이 지혜(레하시킬, להַשְׂכִּ֔יל)는 창세기 3:1에서 뱀을 가장 지혜롭다(아룸, עָרוּם)고 밝혔던 것과 관련 있다. 사탄은 부정적인 지혜로 하나님을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하는 자로 말하였다.23) 하와는 사탄의 말을 믿고 선악과가 엘로힘처럼 지혜롭게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열매를 따먹는다. 아담과 하와가 벗었다(아루밈, עֲרוּמִּם)는 것을 깨달은 것은 곧 뱀처럼 간교한(아룸, עָרוּם)자신을 깨달은 것일 수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각한 관계 훼손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이어서 곁에 있던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한다. 학자들 중에는 전치사 임(עִם, 함께)이 장소나 공간적인 개념보다는 관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담이 유혹의 순간 하와와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뱀이 하와에게 말할 때 한결같이 2인칭 남성 복수를 사용했던 것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24)

23) 사무엘하 14:17은 천사들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24) John L. Harris, “An Exposition of Genesis 2:4–11:32,”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43–4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27–128.

 

 

7절) 본절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앞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선악과의 결과가 성적인 수치심의 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이다. 선악과를 따먹기전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일때는 목욕탕에 가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자라게 되면 2차 성징을 경험하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가 이들의 2차성징은 촉발한 것일까? 그래서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부끄러움과 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것일까? 선악과는 결국 아담과 하와가 간직했던 순수성을 상실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 이 나무잎으로 만든 옷은 이후의 가족옷과 비교가 된다.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파카하’로 눈이 열려 무언가를 파악하다. 인식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4. One of the promissory statements made by the serpent to Eve was: “Your eyes will be opened,” to which he append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Gen 3:5). Whether or not the second part is sequential or explicative to the first is difficult to decide. That is, does the second half of the verse offer a second, distinct promise, or does it expand on and explain the first half of the verse?

In one sense what the serpent promised came true, for verse 7 reads, “Then the eyes of both of them were opened.” However, the remainder of the verse does not go on to say, “and they became like God.” Rather, it states, “and they realized they were naked.” That is hardly what they were bargaining for in having their eyes opened and becoming like God. How different is this couple who had their eyes opened from another couple who also had their eyes opened as they walked from Jerusalem to Emmaus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Luke 24:31)!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666.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호세아는 말한다. 

(호 6:7, 개정)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언약의 보편적인 구조는 서론-규정-저주의 형식이다. 2장에서는 인간을 창조하고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서 발원한 4개의 강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규정은 이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것이며 또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것이었다. 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언약을 받았던 아담은 이를 어김으로 저주의 대상자가 되었다. 

 

창세기 3:7은 창세기 3:5의 표현을 사용하여 뱀의 말처럼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렸다고 또는 밝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창세기 3:5에서 뱀이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했었는데 반해 창세기 3:7에서 아담과 하와는 벗었음을 알게 된다. 벗었음(아롬, עָרוֹם)의 자음과 소리는 사탄의 간교함(아룸, עָרוּם)의 자음과 소리와 비슷하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벗었음과 사탄의 간교함과 연결시키고 있다. 즉 창세기 3:6에서 하와는 선악과가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 줄줄 알았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벗었음을 깨닫는 사탄의 간교함을 얻게 되었다.

벗었음을 깨달음(간교함) → 관계성 왜곡

벗었음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에게 관계성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것을 깨닫고 난 후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실제로 일어난 결과는 창조 때에 하나님이 세운 관계성과 관련된 진실의 왜곡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엘로힘처럼 된다는 것을 알고 사람에게 따먹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뱀이 하나님을 인간에게 진실을 감추고 그 능력과 역할을 제한하려 하는 분으로 묘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과 관련된 진리를 왜곡했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도 사탄처럼 그 관계성을 왜곡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창세기 2:25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벌거벗은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순박함도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친밀감과 하나됨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들은 벗은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벗은 몸을 가려 그 수치심을 없애려 할 정도로 관계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26) 그들의 벗음은 서로가 상대방에게 지적해 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뱀이 진실을 왜곡했던 것처럼 스스로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되어 부부의 관계성과 관련된 진실을 왜곡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됨을 상실했고, 벗었음에 대한 자기 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했다. 결국 아담은 선악과 따먹은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시킴으로 둘 사이의 나누어짐과 왜곡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26) John H. Hewett, “Genesis 2:4b–3:31; 4:2–16; 9:20–27; 19:30–38,” Review and Expositor 86 (1989): 237–24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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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The Lord God took the man k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keep it. 16 And the Lord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You may surely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17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lyou shall not eat, for in the day that you eat4 of it you mshall surely die.”

k ver. 8

l ch. 3:1–3, 11, 17

4 Or when you eat

m Rom. 6:23; James 1: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15–17.

 

 

15절) 앞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지으셨다. 거대한 왕의 정원인 에덴은 하나님의 성소를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본문에 경작하다라는 단어는 ‘아바드’(5; 3:23; 4:2, 12; 잠 12:11; 28:19)는 돌보다,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지키다라는 단어는 ‘샤마르’로 보호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명령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주어진 명령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일(노동, work)은 타락 이후의 죄의 결과로 주어진 노역(drudgery)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에덴에서 했던 일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다. 나중에 이 두 히브리어 단어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일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민 3:7-8; 18:7) 인간의 역할은 정원지기 일뿐만 아니라 수호자이다. 제사장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의 일부로서 동산의 신성함을 유지해야 한다. 

The overall picture of Eden presented in the preceding verses suggests that the park-like garden is part of a divine sanctuary. The man is put in the garden to work it and keep it. The term “work” (Hb. ‘abad; cf. v. 5; 3:23; 4:2, 12; Prov. 12:11; 28:19) denotes preparing and tending, and “keep” (Hb. shamar) adds to that idea. Since this command comes before Adam sinned, work did not come as a result of sin, nor is it something to be avoided. Productive work is part of God’s good purpose for man in creation. Later, the same two verbs are used together of the work undertaken by the priests and Levites in the tabernacle (“minister” or “serve” [Hb. ‘abad] and “guard” [Hb. shamar]; e.g., Num. 3:7–8; 18:7). The man’s role is to be not only a gardener but also a guardian. As a priest, he is to maintain the sanctity of the garden as part of a temple complex.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3.

오경에서 동사 ‘아바드’(עָבַד)는 성막에서 ‘섬긴다’는 뜻으로 종종 사용되고 ‘사말’(שָׁמַר)은 성막을 ‘지킨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창세기 2:15의 ‘아바드’(לְעָבְדָ֖הּ)와 ‘사말’(לְשָׁמְרָ֖הּ)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여 아담의 사역은 에덴 동산에서 섬기고 에덴 동산을 지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창세기 2:15의 아담의 역할 중에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사역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것이 있다.34)

34) William Dumbrell, “Genesis 2:1–3: Biblical Theology of Creation Covenant,” ERT 25(2001): 225–226. 4QFlorilegium에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에덴 동산을 ‘מקדשׁ אדם’(미크다 쉬아담 temple of Adam)이라고 부른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98.

 

‘아바드’라는 단어는 장소가 목적어일때 농사일을 가리키고, 인격적인 대상(하나님, 바알, 애굽)들이 목적이일 때는 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물론 예외가 있다.) 동사 ‘샤마르’는 종교적인 명령들과 의무를 준수할 책임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공간을 수호할 책임과 관련되서 사용된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스러운 공간, 성소를 꾸미고 보호하는 것은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지속적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16-17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명령을 내리신다. 그것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먹게 되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 선악과는 무엇일까? 1) 성적인 자각, 2) 도덕적인 분별력, 3) 도덕적인 책임, 4) 도덕적인 경험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불순종을 통해서 선과 악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여호와를 경외함을 통해 인간은 지혜를 얻는다. 반면에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죄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는 표현은 ‘네가 먹게 된다면’의 의미이다. 이렇게 선악과를 먹는 다면 반드시 죽을 것을 말씀하신다. 본문에서의 죽음은 신체적인 죽음인가, 영적인 죽음인가? 아니면 둘 다를 의미하는가? 이후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죽음은 둘 다를 의미한다. 물론 먹자 마자 바로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심판을 받았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가고 나서 즉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네가’는 단수이다. 이 표현은 바울이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기초를 제공해준다.(고전 15:22; 롬 5:12-19) 하지만 이후 창 3:1-5에서 ‘너희’는 복수이다. 이 단락에서 여자의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다. 

 

타락 이전에 아담은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켰다. 하지만 타락 이후에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 밖의 땅을 경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천사들을 통해서 지키게 하셨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이 표현은 엄청난 확신이 있을 때 사용된다. 렘 26장에서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성전이 장차 파괴될 결과에 대해서 신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에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회개는 커녕 예레미야를 향한 강한 적개심에 불타서 그에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26:8)라고 선언한다. 이후 11절에서 8절의 선언이후 예레미야의 죽음이 합당하다라고 말한다. 창 2장 17절을 풀어서 쓰면 “네가 그것을 먹을 때에 너는 사형 선교를 받게 될 것이며, 따라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More important, the verbal combination that describes the penalty (“you will surely die”) needs clarification. The profile of this combination of verb forms (infinitive absolute coupled with finite verb of the same root) using the root “to die” can be established with a good deal of confidence. In Jeremiah 26, the prophet delivers a scathing message to the people of Judah to the effect that the temple will be destroyed (26:4–6). The response of the people and priests is not repentance but antagonism toward Jeremiah as they seize him and pass sentence: “You must die!” (26:8). The explanation is given a few verses later, “This man should be sentenced to death because he has prophesied against this city” (26:11).

Jeremiah 26:8 uses the same phrase as we have in Genesis 2:17, but it is Jeremiah 26:11 that shows us exactly what the people mean by using that phrase in verse 8. When they say, “You will surely die,” they are talking about the eventual outcome of the behavior. The sentence will be passed, the doom will be fixed. This phrase is also used in the historical literature to pass sentence on offenders of various kinds (Gen. 20:7; Num. 26:65; 1 Sam. 14:39, 44; 1 Kings 2:37, 42). The resulting paraphrase of Genesis 2:17 then is: “When you eat of it, you will be sentenced to death and therefore doomed to die.” Consequently, death will be a certainty.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4–175.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그 사람에게 맡기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당시의 일은 고역이 아니었다. 에덴의 모든 피조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이를 가꾸고 보호하는 임무였다. 그리고 에덴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유일하게 선악과를 제외하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임을 선언하셨다. 이 죽음에 대한 선언은 ‘죽을지도 몰라’라는 가정이 아니라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사탄은 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심을 품게하고 약화시킴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게 만든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신들이 창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이 동산을 맡은 자임을 상기시켜주는 도구였다. 그런데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고하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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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 Lord God planted a fgarden in Eden, in the east,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And 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made to spring up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gThe tree of life was in the midst of the garden, h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 A river flowed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there it divided and became four rivers. 11 The name of the first is the Pishon. It is the one that flowed around the whole land of i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bdellium and onyx stone are there. 13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the Gihon. It is the one that flowed around the whole land of Cush. 14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the jTigris, which flows east of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the Euphrates.

f ver. 15; ch. 13:10; Isa. 51:3; Ezek. 28:13; 31:8; Joel 2:3

g ch. 3:22; Rev. 2:7; 22:2, 14

h ver. 17

i ch. 10:7, 29; 25:18; 1 Sam. 15:7

j Dan. 10: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8–14.

 

에덴의 의미는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이다. 

OT 1. גַּן עֵדֶן, garden of Eden, specifies the garden in Gen 2–3. In 2:8 the garden is located in Eden (בְּעֵדֶן also in Ezek 28:13, where it is further specified as the garden of God (גַּן; #1703), but in Gen 2:10 the river of the garden flows from Eden (מֵעֵדֶן). The difference in the use of the prepositions (בְּ = in and מִן = from) may indicate that Eden refers to the general location or region in which the garden was situated. There has been much speculation on the location of the garden of Eden (ISBE 2:16–17), but the meaning (quality) is of greater importance. Eden may be related to the Hebrew vb. עָדַן and nom. עֵדֶן (luxuriate, delight), as in the LXX. Humankind was placed by God in the garden of Eden to take care of it (Gen 2:15). After the episode described in Gen 3, the man is banished and has to work the soil (3:23). Paradise is lost (Milton), guarded by the cherubim on the east side of Eden (v. 24). The term is also used metaphorically in Ezek 36:35 and Joel 2:3. Ezekiel promises that the wasted land will be like the garden of Eden. Joel has it in the reverse meaning when describing the Day of the Lord.

2. Ezek 31:9 (cf. “in the garden of God,” גַּן), 16, 18 all have “the trees of Eden” (עֲצֵי־עֵדֶן) in the chapter comparing Egypt to a garden (גַּן).

3. Eden is mostly used in relation to the garden, but Eden alone is used in Gen 2:8, 10 (גַּן). Cain sojourned in a land east of Eden (4:16).

4. Eden is identified with the garden of God (Ezek 28:13) or stands in parallelism to the garden of Yahweh (Isa 51:3), the last describing the future restoration of Zion when the deserts will be like Eden.

ISB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G. W. Bromiley, 4 vols., Grand Rapids, 1979–19882

LXX Septuagint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555.

 

창세기 2:8–17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세기 2:8–9, 2:10–17. 이 두 부분에는 세 가지 주제가 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에덴 동산(8절)

    b.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다(8절)

        c. 과일 나무:생명 나무와 선악과(9절)

a’ 에덴 동산의 위치(10–14절)

    b’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다(15절)

        c’ 과일 나무:선악과(16–17절)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8.

 

8-9절) 하나님께서 동쪽에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본문의 에덴은 앞서 본것처럼 즐거움, 기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곳의 지명일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셨다. 본문에서 동산이라고 번역된 ‘간’은 왕실 정원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해서 70인 역에서는 헬라어 ‘파라데이소스’로 번역하였다. 말하자면 에덴 낙원인 셈이다. 수메르어 ‘에딘’은 대초원 지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아람어에서는 ‘풍부하게 하다, 부요하게 하다’라는 의미와 연관된다고도 주장된다. 이처럼 에덴 동산은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다. 특히 이후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물공급이 풍부한 곳으로 그 정원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자라났고 동산 중앙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을 맡기셨는데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하셨다. 실낙원을 한 셈이다. 이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다. 우리의 범죄로 이 천국을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우리가 소망해야할 원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요 5:24) 그리고 제한되었던 생명나무로의 접근이 허락될 것이다.(계 22:2)

 

고대 이집트에도 파라다이스에 대한 전통이 있었다. 태양신 레가 떠오르는 곳에 이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 사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는 태양신 레가 항해하는 강이 있고, 무화과 나무와 2m까지 자라는 보리가 있다. 그리고 키가 4.5m나 되는 영혼이 그 보리를 수확한다.13)

고대 수메르 지역에도 파라다이스 전통이 있었다.14) 물의 신 엔키(Enki)와 땅의 신 닌훌삭(Ninhursag) 신화에 따르면, 딜문(Dilmun)은 순결하고 깨끗하고 밝은 땅이며, 그곳에는 질병도 죽음도 없다. 딜문에는 달콤한 물이 흘렀고 각종 채소와 과일이 풍성하였다. 엔키와 닌훌삭 신화는 딜문에 8가지 식물이 자라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엔키가 닌훌삭을 잉태하게 하여 딸(Ninmu)을 낳고, 그 딸과 동침하여 손녀(Ninkurra)를 낳고, 그 손녀와 동침하여 증손녀(Uttu)를 낳는다. 엔키가 증손녀인 우투와 동침하려 할 때 닌훌삭이 우투에게 조언하기를 엔키에게 오이와 사과와 포도를 요구하고 이를 주면 동침하고 주지 않으면 동침하지 말라고 한다. 엔키는 우투의 요청을 받아 들여 이것들을 구해 준다. 마침내 둘이 동침할 때 배출된 정액을 취하여 닌훌삭은 8개의 식물을 만들어낸다. 엔키는 이 8개의 식물을 뽑아 먹다가 아내 닌훌삭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15) 이처럼 이 신화의 기본적인 배경은 땅의 신과 물의 신의 갈등이다. 고대 근동의 파라다이스 전통은 에덴 동산과 유사점도 있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집트와 수메르 신화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고대 근동의 파라다이스는 신들의 거주지이거나 사후 영혼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이며, 실제 거주자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13) ANET, 33. 에덴 동산을 파라다이스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70인역이다. 파라다이스는 페르시 아에서 기원한 용어로서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헬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 정원을 나타내는 표 현으로 사용되었다. J. N. Bremmer, “Paradise in the Septuagint,” Paradise Interpreted: Representations of Biblical Paradise in Judaism and Christinity, ed. Gerard P. Luttikhuizen (Leiden: Brill, 1999), 1–20.

14) 고대 가나안의 바알 서사시에는 가나안 만신전의 수장인 엘 신의 거주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 사하고 있다(ANET 152).

“Towards El of the Source of the Floods, In the midst of the headwaters of the Two Oceans.”

엘 신의 거주지가두강 또는두 바다의 근원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15) ANET 37–4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9–90.

 

8절 본문의 에덴 앞에는 전치사 ‘베’가 쓰였는데 이 전치사는 이 본문을 두가지로 해석 가능하게 하다. 첫째로는 에덴과 동산을 동일시 할 수 있고 둘째로는 에덴은 광범위한 지역이고 동산을 그 지역 안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보는 견해가 가능하다. 개역 개정의 해석은 후자를 지지한다. 또한 그 에덴 동산의 위치를 ‘동방의’(in the east)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방은 어디를 기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동방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지역을 기점으로 그 동쪽으로 이해되어 왔다. 아래의 지도를 보라. 

 

9절 본문에는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위치해 있었다라고 말한다. 생명나무를 영원불멸성을 항구적으로 보장해주는 나무로 볼 것인지 생명을 연장해 주는 나무로 보아야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의 본문을 보면 도리어 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말라는 금지명령은 없었다. 말하자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한번 먹었는데 그것이 영생의 효력이 있었다면 이후의 죽음의 사건은 설명이 안된다. 후자로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에덴동산을 쫓겨나서 먹지 못했기에 이제 죽음이 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언에서 이 나무를 네 차례 언급하는데 주된 관심사는 바로 생명의 연장이다.(잠 3:16-18, 13:2, 15: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나무를 영원불멸의 나무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젊음의 나무로 보았다고 볼 수 있다. 

We should view the tree of life as having fruit that extends life rather than instantly grants immortality. The tree was not forbidden to Adam and Eve, and there is no reason to argue (either here or in 3:22) that they did not eat from it. But when they were cast from the garden, they were forbidden access to the tree.

We must understand the statement in 3:22 that they might “live forever” in light of two caveats. (1) If the fruit effectively extended life, then regular access to the tree could extend life indefinitely, thus eventuating in virtual immortality. That is different from thinking that one bite of the fruit would bring instant immortality. (2) Careful study of the term that the niv translates “forever” has demonstrated that it is not an abstract term, suggesting infinity or eternity per se, but characterizes something as being open-ended, with no anticipated ending built in.28 It is better translated “perpetual life,” suggesting that the fruit constantly counteracts any aging.

Extension of life is the issue in the four references to this tree in Proverbs. In 3:16–18, the tree is parallel to “long life” as one of the benefits wisdom has to offer. In 13:12 and 15:4, it stands in contrast to behavior that would demoralize and thereby take its toll on a person. We conclude, therefore, that the Israelites viewed the tree of life as a tree of youth rather than as a tree of immortality.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8 A. Tomasino, “עוֹלָם NIDOTTE, 3:345–51.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0.

 

본문의 선악과는 메리즘적인 표현이다. 메리즘은 두개의 서로 상반된 개념을 하나로 연결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표현법으로 선악, 천지, 유대인과 헬라인을 예로 들 수 있다. 본문의 선악은 선악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지식 전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용법은 함께 사용되는 동사들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1) ‘말하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때 ‘선악’은 말하는 사람이 심판을 내리거나 결정해야 한다. 

2) ‘듣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 그 단어는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에 귀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3) ‘안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거나 그 동사의 동의어가 선과 악 앞에 전치사들을 동반하여 사용될 경우에 그 단어는 인간의 분별력을 가리킨다. 

4)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두 본문 외에 전치사 없이 ‘안다’라는 동사와 결합되어 사용된 유일한 본문이 신 1:39이다. 이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거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에 이르지 못한 존재들이다. 

일반적으로 ‘안다’라는 동사가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그 동사가 ‘선악’이라는 메리즘 용법에서는 그런 의미를 띄지 않는다. 

본문에서 선악을 아는 것은 ‘분별하는, 구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특징이지(3:22) 아이들이나(신 1:39, 사 7:15-16), 노인들이나(삼하 19:35), 경험이 미숙한 사람들(왕상 3:9)의 특징은 아니다. 

Understanding the second tree depends heavily on our ability to identify the meaning of the phrase “knowledge of good and evil.” Note first that “good and evil” is consistently used as a merism and therefore indicates a whole range of knowledge, not knowledge of two isolated things (“good” and “evil”). Yet as a merism, it should not be thought of as referring to all knowledge. Instead, it applies to the range within a specific category of knowledge (“good and evil”). Like words, rhetorical devices such as merism can be understood only as we explore their usage. In the Old Testament we will find the usage falling into categories differentiated by the associated verbs.

1.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speak” (e.g., Gen. 24:50; 31:24, 29), “good and evil” suggest that the speaker pass judgment or issue a decision (or not, when negated).

2.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hear” (e.g., 2 Sam. 14:17), it means to listen with discernment to the details of a case so as to judge the legitimacy of a claim.

3.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know” or its synonyms coupled with prepositions before good and evil (2 Sam. 19:35; 1 Kings 3:9; Isa. 7:15–16), it refers to a human capability to be discriminating. This capability is lacking in children and in the elderly Barzillai. The statements do not suggest that the subjects do not know anything or that they are morally destitute, only that their ability to discern what is in their best interests is lacking.

4. Besides the two passages in Genesis 2–3, the only other passage that uses the merism without prepositions and collocated with the verb “to know” is Deuteronomy 1:39. Here, as in category 3, the reference is to children before they have reached the age where they can make decisions for themselves or live independently.

Those interpreters who point to the use of the verb “to know” as referring to sexual intercourse will find no help here, because the verb does not mean that when connected to the merism “good and evil”; such a meaning is, additionally, inappropriate to the context of 3:22. Those who contend, on the basis of 3:22, that the phrase should be understood as omniscience or universal knowledge will have trouble finding that meaning in the passages listed above. Those who think that moral judgment is involved likewise have difficulty with the occurrences cited above, in that none of them can easily be attached clearly or exclusively to the realm of morality. The context also works against this in that it is difficult to hold people responsible for moral choices if they have been given no moral judgment. The common denominator of these references is “discerning or discriminating wisdom.”

Knowing good and evil is characteristic of God (3:22) but not of children (Deut. 1:39; Isa. 7:15–16), the elderly (2 Sam. 19:35), or the inexperienced (1 Kings 3:9). It is something that people are inclined to desire and can use to gain wisdom (see Gen. 3:6). Even though Adam and Eve lacked this knowledge, they could still be held responsible for obedience; and when people gain the knowledge by eating the fruit, they can legitimately be described as being like God. The only potential problem comes when we wonder why God would have forbidden Adam and Eve to eat of a fruit that bestowed such positive qualities. We will probe this question in chapter 3.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0–172.

 

10-14절) 본문은 에덴을 기점으로 흘러나온 네 근원의 강의 이름을 소개한다. 

첫째 강은 비손 강인데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흘렀는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었다. 둘째 강은 기혼강인데 구스 온 땅을 흘렀고, 셋째 강은 힛데겔(티그리스) 강으로 앗수르 동쪽을 흘렀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 강이었다. 

힛데겔과 유브라데 강의 경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주변을 흐르는 강으로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처음 두 강, 비손과 기혼 강의 위치는 열려져있지 않다. 금과 호마노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는 많은 천연 자원(보석)이 풍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귀금속은 이후에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창세기 2:14에 있는 셋째와 넷째 강은 일반적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다. 두 강은 현재 이라크와 이란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첫째 강 비손과 둘째 강 기혼의 위치는 미스테리에 속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들을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강들에서 찾거나, 메소포타미아 밖에 있는 나일강이나 인더스 강과 동일시 하거나, 또는 페르시아 만이나 홍해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과거에 말라버린 사우디 아라비아의 강들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19)

위치와 관련하여 아담과 가인의 이동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할 때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났다(창 3:23–24). 그리고 가인도 역시 아벨을 죽인 후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주하였다(창 4:16).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에 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은 최소한 아담과 가인이 정착한 메소포타미아 지역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에덴을 동편이라고 칭하는 화자가 위치한 곳은 어디일까? 가나안, 지중해, 아니면 이집트?

창세기 2:11–14에 언급된 네 강들의 기록 순서를 보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잘 알려진 셋째 강과 넷째 강이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고, 대신에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비손과 기혼 강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강들인데 먼저 언급된 비손과 기혼 강은 이 두 강과 비교할 때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손강이 있는 하윌라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기혼 강이 있는 구스는 구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에티오피아를 지칭한다(창 10:6–7, 대상 1:9).20) 그렇다면 에덴은 이들 네 강의 중간 부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 그 경계선은 유프라테스와 나일 강이다(창 15:18). 쥬빌리에서 에덴 동산은 가나안 땅이다.21) 이에 더해 창세기의 저자는 유브라데와 힛데겔에 대해서는 가볍게 지나가는 반면에 비손 강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곳에서 생산되는 금은 정금이고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생산되고 있다고 밝힌다. 이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이들 강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돕기 위해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가 비손 강이 흐르는 하윌라 지역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에덴 동산은 동방에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저자는 에덴 동산으로 알려진 곳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아 홍수를 통해 지구 전체가 대격변을 겪었음을 감안한다면, 에덴 동산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19) John Walton, Genesis, 169. 왈턴(Walton)은 기원전 3500–2000 B.C. 에 말라버린 한 강을 비 손 강으로 여긴다. 이 강은 쿠웨이트의 페르시아만에서 메디나로 이어지는 히자즈(Hijaz)산맥을 흐른 강으로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인접해 있다.

20) John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98–99. U. Cassuto, Genesis, 115–121.

21) G. E. Aalders, Genesis, EBCOT (Grand Rapids: Zondervan, 1981), 86–9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90–92.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천체와 지구, 동물과 식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 교과서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고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이 내용이 에덴의 위치를 결정짓는 현대의 지리학 교과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살만에셀 3세(주전 9세기)의 기록을 보면 그가 ‘티그리스 강의 근원’에 있는 그 샘이 솟아나는 벼랑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고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실재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교제하는 장소였다. 구약의 성소가 바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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