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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But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ose who are asleep, gthat you may not grieve as others do hwho have no hope. 14 For isince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through Jesus, God will bring with him j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5 For this we declare to you kby a word from the Lord,4 that l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until mthe coming of the Lord, will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6 For nthe Lord himself will descend ofrom heaven pwith a cry of command, with the voice of qan archangel, and r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of God. And s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17 Then 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will be tcaught up together with them u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vwe will always be with the Lord. 18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
g [Lev. 19:28; Deut. 14:1; 2 Sam. 12:20–23; Mark 5:39]
h Eph. 2:12
i 1 Cor. 15:13; [2 Cor. 4:14; Rev. 1:18]
j 1 Cor. 15:18
k See 1 Kgs. 13:17
4 Or by the word of the Lord
l 1 Cor. 15:51
m See ch. 2:19
n See Matt. 16:27
o 2 Thess. 1:7
p [Joel 2:11]
q Jude 9
r Matt. 24:31; 1 Cor. 15:52
s 1 Cor. 15:23; [2 Thess. 2:1; Rev. 14:13]
t See 2 Cor. 12:2
u [Dan. 7:13; Acts 1:9; Rev. 11:12]
v See John 12:2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4:13–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1)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1) 또는 자는 자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4:13–18.
 
바울은 앞서 1-12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한 성도의 삶의 태도를 말했다. 이제 13-18절은 주의 강림과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다룬다. 본서에서 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이미 죽은 성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논란과 임박한 재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상생활을 소홀히 하는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짧게 이러한 주제를 언급했었다.(1:3, 10; 2:12, 19; 3:13)
 
13절)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의 문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바울이 이런 가르침을 전할 새가 없이 급하게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에 대해서 소망없는 이들과 같이 슬퍼했다.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망없이 슬퍼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다. 당시 고대 그리스의 시인 데오크리투스는 당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리스-로마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절망감을 ‘희망은 산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자는 희망이 없다’라고 묘사했다. 
no hope. The ancient Greek poet Theocritus concisely captures the widespread sense of hopelessness in the Greco-Roman world concerning life after death: “Hopes are for the living; the dead have no hope” (Idyll 4.42).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
 
‘자는 자들’에 해당하는 표현은 ‘톤 코이모메논’인데 이는 ‘잠을 자다’라는 의미의 ‘코이마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 표현은 신약에 19번 등장하는데 원래 의미인 '잠을 자다'라는 의미로는 5번, ‘죽다'라는 비유적 의미로는 14번이나 사용되었다. 실제 히브리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은 것을 흔히 잠자는 것으로 묘사했다.(창 47:30; 신 31:16; 왕상 2:10)
 
본문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너희가 알기를 우리가 원한다’라는 표현을 강조하기 위한 이중 부정의 표현이다. 
 
‘소망 없는 다른 이’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지 않은 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엘피스’ 즉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과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의 삶은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소망이 없는 이들에게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4절) ‘우리가 믿을진대’라는 표현은 ‘에이 가르 피스튜오멘’이다. 이는 조건 접속사 ‘에이(if)’와 ‘피스튜오’의 직설법 동사’피스튜오멘’으로 ‘만약에 믿는다면’이란 의미가 아니라 ‘실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그렇다면’이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부활, 그분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연합한 성도들역시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고전 15:22)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더이상 죽음은 주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코어, 핵심이다. 주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여타 다른 죄있는 인간과 다를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 구속주임을 나타내셨고 이로 인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되셨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는 한글 표현은 오역에 가깝다. ‘안에서’라고 번역된 ‘디아’라는 전치사는 ‘~통하여, ~때문에, ~로 말미암아’의 의미를 지닌다. 한글 성경은 이를 ‘안에서’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을’ 혹은 ‘자는 자들을 예수를 통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전자의 의미로 번역한다면 ‘예수를 통하여, 예수를 말미암아 죽은 자들’은 순교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 ‘죽은 자들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데리고 오시리라’오 번역된 ‘악세이’는 원형인 ‘아고’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인도하다, 붙잡아 함께 인도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하늘에서부터 성도들을 데리고 땅으로 오신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 ‘악세이’가 가정법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직설법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장차 이 일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분의 오심, ‘파루시아’의 때에 주님과 함께 죽은 자들이 함께 온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15절) 바울은 이 부활과 재림에 대한 교훈이 자신의 사색이나 유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이를 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주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중에 본절과 같은 내용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이 기간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해들은 것일 수 있다. 또한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은 말씀을 근거로 이 본절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행 16:6; 18:9; 22:18; 고전 7:10, 40) 
 
‘강림’은 ‘파루시안’으로 이 원형 ‘파루시아’는 왕이나 황제가 지방의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를 위해서 환영행사가 있었고 황제가 내리는 상에 대한 시상식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파루시아는 그 도시에 큰 영광이요 기쁨이 되었다.(2:19; 3:13)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는 바울과 그의 일행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비롯한 당시 살고 있던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앞서다’의 의미로 번역된 ‘프다소멘’은 원형인 ‘프다노’인데 앞서 2:16에서 ‘임하다, 도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었는데 본절에서는 ‘앞서다, 앞지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5절에서 바울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주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은 보지 못하고 산자들만 재림을 맞이 할 것이라고 혹은 재림시의 순서를 강조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부활 순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산자나 죽은 자나 예수의 재림시에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앙, 소망없는 자들을 향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Lord’s word. The second reason for hope is grounded in Jesus’ words, which may refer to a saying of Jesus not recorded in the Gospels (John 21:25), a paraphrase of Jesus’ end-time teaching (Matt 24; Mark 13), a general summary of Jesus’ teaching, or a teaching revealed to Paul on the Damascus road or elsewhere. Paul is giving not merely his opinion but an authoritative teaching of the Lord Jesus himself. Jesus’ words emphasize that living believers “will certainly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All believers—the deceased-but-now-resurrected ones (1 Thess 4:14, 16) and the living-but-now-transformed ones (1 Cor 15:51–52)—will share equally in the glorious “coming of the Lord.” Paul employs yet again (1 Thess 2:19; 3:13) a term (Greek parousia) commonly used to describe the coming of an emperor, general or other dignitary into a city with great pomp and celebration (see v. 17 and note).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2156.
 
16절) 본절은 ‘호티’(for)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는데 이는 15절의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와 연결되는 단락으로 첫번째가 15절 하반절이고 이것이 두번째 단락이다. 
원문은 ‘호티 아우토스 호 퀴리오스’로 친히라는 ‘아우토스’는 ‘큐리오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주께서 친히’이다. 한글 번역은 이를 분리시켜 번역했다. 즉 재림의 날에 이 땅에 오시는 분은 천사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신 것이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호령’으로 번역된 ‘켈류스마티’의 원형 ‘켈류스마’는 ‘외침, 명령, 호령’의 의미로 권위있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사냥꾼이 사냥개에게 내리는 명령, 선장이 노잡이에게 내리는 명령,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의미한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장의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아르캉겔루’는 ‘천사장의 음성’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르캉겔루의 원형 ‘아르캉겔로스’는 ‘우두머리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르코’와 ‘천사’를 의미하는 ‘앙겔로스’의 합성어로 ‘우두머리 천사’를 뜻한다. 그런데 이 표현에만 관사가 없다. 유대 전통에는 원래 천사장이 일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가엘,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사리엘, 가브리엘, 레미엘 등이다. 이중에 신약에 언급된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뿐이다. 
‘하나님의 나팔’에 해당하는 ‘살핑기 데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팔을 부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나팔’이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릴 때(출 19:13, 16, 19), 새로운 해가 시작됨을 알릴 때(레 23:24), 앗수르와 애굽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성산에 돌아옴을 알릴 때)사 27:13),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릴 때(욜 2:1) 나팔을 불었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재림으로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서 백성을 모으시기 위해서 나팔을 사용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는 ‘카타베세타이 아프 우라누’이다. ‘우라누’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기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처소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하늘로부터, 그 자리로부터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강림하다로 번역된 ‘카나베세타이’는 앞서 등장하느 ‘파루시아’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시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미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한 것이다. 
‘일어나고’로 번역된 ‘아나스테손타이’의 원형 ‘아니스테미’는 흔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막 9:31; 눅 18:33; 요 11:23; 행 13:34) 이때 죽은 자는 죽은, 부패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전 15:42-44, 52-54) 이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능력이다.
 
17절) 죽은 자의 부활이후에 산자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휴거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끌어올려’로 번역된 ‘하르파게소메다’는 ‘하르파조’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형이다. ‘하르파조’는 어떤 것을 갑자기 잡아 채는 것, 강탈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마 11:12; 요 6:15; 10:12; 행 8:39; 고후 12:2) 여기에는 돌연성과 강제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즉 당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사도바울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고후 12:2, 4) 
 
ἁρπάζω (harpazō), 동사. 끌고가다, 빼앗다. 미래 능동태. ἅρπα; 부정과거 능동태. ἥρπασα; 완료 능동태. ἥρπακα; 부정과거 능동태. ἡρπάγην; 완료 중간태. ἥρπαγμαι. 히브리어 등가: גזל (13), טרף (3).
동사 용법
1. 약탈하다 — 물건을 훔치거나 전리품으로 취하다, 자주 전쟁의 일환으로. 관련 주제: 도둑질; 부정한 이득; 약탈; 약탈자; 약탈자 무리; 망쳐놓다; 침입자.
마 12:29|| καὶ τὰ σκεύη αὐτοῦ ἁρπάσαι,
2. 뺏으려하다 — 재빠르고 강하게 움켜쥐다; 종종 빼앗기 위해. 관련 주제: 파악하다.
요 6:15 ὅτι μέλλουσιν ἔρχεσθαι καὶ ἁρπάζειν αὐτὸν ἵνα
요 10:28 καὶ οὐχ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행 8:39 πνεῦμα κυρίου ἥρπασεν τὸν
고후 12:2 ἁρπαγέντα τὸν τοιοῦτον ἕως τρίτου οὐρανοῦ.
유 23 ἐκ πυρὸς ἁρπάζοντες,
3. 강도 짓을 하다 — 어떤 것을 강제로 또는 주인의 합의 없이 빼앗다;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에 대하여. 관련 주제: 도둑; 강도질.
마 13:19|| καὶ ἁρπάζει τὸ ἐσπαρμένον ἐν τῇ καρδίᾳ
4.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빼낸 (상태) — 급하거나 간절하게 잡아 채다; 자주 건져 내기 위해. 관련 주제: 파악하다.
고후 12:4 ὅτι ἡρπάγη εἰς τὸν παράδεισον
살전 4:17 σὺν αὐτοῖ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계 12:5 καὶ ἡρπάσθη τὸ τέκνον αὐτῆς πρὸς τὸν
5. 주장하다 ⇔ 빼앗다 — 주장하다, 어떤 것을 거칠고 강하게 움켜 쥐는 것으로 이해하여.
마 11:12|| καὶ βιασταὶ ἁρπάζουσιν αὐτήν.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7절) ‘끌어 올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파르조’는 ‘갑자기 귀거나 잡다, 낚아채다, 데려가다’의 의미로 강제로 갑자가 위로 들어 올린다는 의미이다.(요 6:15, 행 8:39)
 
 
 caught up. The only explicit reference in the Bible to the “rapture” (from the Latin translation of the Greek verb used here). Paul envisions the church being “raptured,” joined to Christ at his return. together with them. Paul’s concern is not to predict but to pastor, as he stresses (the word order in Greek is emphatic) yet again that both living and deceased believers in Thessalonica will participate equally in Christ’s glorious return. meet. Greek apantēsis; refers to a delegation party meeting an arriving dignitary outside of town to bestow honor on that visitor by escorting him back to their city. This practice of sending a delegation party to meet and escort an important visitor on the final leg of their journey is found in the only two other NT occurrences of this Greek term (Matt 25:6; Acts 28:15). Paul’s word choice, therefore, implies that the church, once it has been “raptured” to Christ in the air, escorts him to earth.
NT New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6.
 
성도들이 휴거되어 끌어 올려질 곳은 ‘구름 속’이다. 이는 성도들이 물방울이 응결된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월적 실재에 대한 비유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휴거되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영광의 충만함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이 영광으로 충만한 이유는 바로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휴거된 성도들이 주를 영접하게 되는 장소는 ‘공중’이다. 이는 ‘아에르’로 지구상의 대기권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 표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이 권세를 잡고 있는 곳이다.(엡 2:2) 그렇다면 재림의 날에는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여 그 힘을 잃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주께서 휴거된 성도들은 마귀의 본거지에서 만나기로 하셨다는 의미로 악한 세력을 향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영접하다’라는 표현은 ‘아판테시스’인데 이는  한 도시의 주민들이 귀빈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며 인사하고 영접하러 나온 뒤 그 도시까지 동행하는, 에스코트하는 의미로 대단히 중요한 고위 관리에 대한 주민들의 환영 연회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이다.(마 25:6, 행 18:15) 이 말은 성도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이동하는 방향은 그리스도의 이동방향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은 아래 방향으로 땅을 향해 움직인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 25장에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처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되었다.(마 25:6) 이는 휴거된 성도들이 주님과의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를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휴거되어 주를 영접한 성도들이 누리게될 축복은 바로 주와 함께 함이다. 마 28:20의 약속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된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주를 보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성도에게 죽음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재림까지의 시간이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영원과 비교하여 본다면 이는 경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16–17 cry of command … voice of an archangel … trumpet of God. The three noises summon the dead to wake from their slumber. The only “archangel” identified in the Bible is Michael (Jude 9). Trumpets in the OT proclaimed the Lord’s presence (Ex. 19:16; 1 Chron. 16:6; Ps. 47:5; Joel 2:1; Zech. 9:14); in Jewish tradition, the “trumpet” was associated with battle, the day of the Lord, and the resurrection (cf. 1 Cor. 15:52). first … Then. Dead Christians rise from their graves to the realm of the living, and then the living and the dead together are caught up from the earth into the air to   p 2310  meet Christ. The Greek for “caught up” (harpazō, “to grab or seize suddenly, to snatch, take away”) gives a sense of being forcibly and suddenly lifted upward (see John 6:15; Acts 8:39). together with. The dead Christians would suffer no disadvantage (cf. “we who are alive … will not precede,” 1 Thess. 4:15). clouds. Probably not earthly rain clouds but the clouds of glory that surround the presence of God (cf. Ex. 13:21; 33:9–10; 40:38; Num. 12:5; 1 Kings 8:10–11; Ps. 97:2; Dan. 7:13; Matt. 17:5; Mark 13:26; Acts 1:9; Rev. 14:14). to meet. The Greek term apantēsis is often used of an important dignitary’s reception by the inhabitants of a city, who come out to greet and welcome their honored guest with fanfare and celebration, then accompany him into the city (cf. Matt. 25:6; Acts 28:15; a related term hypantēsis is used in Matt. 25:1; John 12:13). It may indicate that the subsequent movement of the saints after meeting Christ “in the air” conforms to Christ’s direction, thus in a downward motion toward the earth. However, some interpreters caution that the vivid symbolism of apocalyptic language must be kept in mind to avoid over-interpretation of the apocalyptic details. in the air. The sk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9–2310.
 
18절) 바울이 주의 강림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야기한 이유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의 ‘이러한 말’은 앞선 13-17절을 말한다. 
본문의 위로하다라는 단어는 ‘파라칼레오’로 1절에서 ‘권면하다’와 동일하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이들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죽은 성도들에 대한 재림에 대한 믿음, 확신이 없음으로 죽은 자들로 인해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새로운 몸으로 부활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이 사실을 서로 말하여 권면하라는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이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필요하다. 이 여정을 위해서는 지도와 안내자와 이에 대한 확신과 동행하는 동지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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