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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 cthere is one God, and there is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1 Christ Jesus, d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which is ethe testimony given fat the proper time. gFor this I was appointed a preacher and an apostle (hI am telling the truth, I am not lying), ia teacher of the Gentiles in faith and truth.
c See Gal. 3:20
1 men and man render the same Greek word that is translated people in verses 1 and 4
d See Matt. 20:28
e See 1 Cor. 1:6
f ch. 6:15; Titus 1:3; [Gal. 4:4]
g ch. 1:11; Eph. 3:7, 8; 2 Tim. 1:11
h See Rom. 9:1
i See Acts 9: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2:4–7.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2:5–7.
 
본문 5-6절은 앞선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는 내용에 대한 기초를 제공한다. 
 
5절)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롬 3:29-30; 갈 3:20)
로마서 3:29–30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갈라디아서 3:20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세상의 여러 나라, 민족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긴다. 그래서 그 신들이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 구원자는 오직 한분이시다. 헬라 세계의 사람들은 ‘모든 민족은 제각기 자기 민족만을 특별히 돌보아 주는 민족 수호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헬라의 세계관,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메시아, 중보자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강력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선포한다.(행 4:12) 
사도행전 4:12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과정에서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의 성인들이나 인간 제사장, 사제의 중재자 역할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로마서 3:29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이 유일하신 하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요소를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둘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이심을, 세번째는 그 중보자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중보자’로 번역된 ‘메시테스’는 본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두 편을 연결하는 중재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래 평화의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 평화의 관계는 깨어져 버렸고 이제 더이상 인간은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보자이자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중보자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안드로포스 크리스토스 이에수스’ 여기서 안드로포스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앞선 ‘하나님과 사람’에서는 ‘안드로폰’ 복수형이라면 여기서는 단수형으로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는 인종이나 국적, 계층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본절에서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당시의 이단들 중에 에비온파와 같이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지 않고 영으로만 임하셨다는 주장, 가현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의 가르침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5 For. Verses 5–6 provide the theological basis for the preceding statement that God wants people to be saved. There is only one God, therefore this God seeks “all people” (v. 4; cf. Rom. 3:29–30; Gal. 3:20). Various people groups do not each have their own gods, though they may imagine they do; all must come to the one true God for salvation. This means that Jesus, God’s incarnate Son, Israel’s Messiah, is the one and only mediator, the only way to salvation (cf. Acts 4:12). Furthermore, this verse allows no place for intermediaries between people and Jesus, such as saints or human priest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6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한 분이신 사람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중요한 역할은 바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인종과 남녀 및 빈부 격차의 모든 차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문의 대속물은 ‘안틸뤼트론’으로 누군가를 돈을 주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10:45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셨고 이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이루셨다. 이는 구속, 대속물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되었다. 
 
위 막 10:45에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는 표현이 ‘뤼트론 안티 폴론’이다. 전치사 ‘안티’가 본래 ‘~를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함축하는데 여기에 ‘뤼트론’이 더해져서 ‘안틸뤼트론’이라는 단어가 파생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한’ 대속 죽음이었음을 의미한다. 
‘휘페르 판톤’,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이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대신한 죽음이었으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 대속물, 속전이었다.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증거라고 번역된 ‘토 마르튀리온’은 바로 앞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셔서 구원과 중보사역을 감당하셨다’라는 것이다. 바로 이 증거를 바울이 위임받은 것이다. ‘기약이’로 번역된 ‘’카이로이스’는 통상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시기, 지정된 시간, 좋은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καιρός -οῦ, ὁ; (kairos), 명사. 때, 시절, 기회. 히브리어 등가: עֵת (54), מוֹעֵד (10). 아람어 등가: זְמָן (1).
명사 용법
1. 시간 (무기한) — 종종 특정한 활동이나 특징으로 구별되는 무한한 시간.
엡 1:10 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πληρώματος τῶν καιρῶν,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살전 2:17 ἀπορφανισθέντες ἀφʼ ὑμῶν πρὸς καιρὸν ὥρας, προσώπῳ
살전 5:1 Περὶ δὲ τῶν χρόνων καὶ τῶν καιρῶν,
히 9:9 ἥτις παραβολὴ εἰς τὸν καιρὸν τὸν ἐνεστηκότα,
벧전 1:5 ἀποκαλυφθῆναι ἐν καιρῷ ἐσχάτῳ.
2. 행사 (이벤트) — 특정 사건의 시간 (혹은 기간) 관련 주제: 행사, 때.
요 7:6 Ὁ καιρὸς ὁ ἐμὸς
고후 6:2 Καιρῷ δεκτῷ
갈 6:9 καιρῷ γὰρ ἰδίῳ
딤전 2:6 τὸ μαρτύριον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벧전 5:6 ἵνα ὑμᾶς ὑψώσῃ ἐν καιρῷ,
3. 계절 (활동) — 일년중 어떤 분야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행위들로 특징지어진 기간. 관련 주제: 계절.
행 14:17 καὶ καιροὺς καρποφόρους,
4. 적절한 시간 —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거나 유리한 때. 관련 주제: 시간.
고후 6:2 ἰδοὺ νῦν καιρὸς εὐπρόσδεκτος,
엡 5:16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 ὅτι αἱ ἡμέραι πονηραί
골 4:5 τὸν καιρὸν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딤전 6:15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딛 1:3 ἐφανέρωσεν δὲ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명사. 명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위에서 보는 것처럼 카이로스는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정한 때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남자나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어린이나 노인을 무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중보 사역에서 예외가 없는 시기, 새로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완성된 후 열인 은혜의 시대이다. 
마가복음 1:15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본문에서의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2:6 Ransom (Gk. antilytron) refers to purchasing someone’s release and describes a common Pauline and NT understanding of Christ’s work as redemptive (cf. Gal. 1:4; 2:20; Eph. 5:2; and related NT concepts of “redemption” [Luke 1:68; 2:38; 24:21; Titus 2:14; Heb. 9:12; 1 Pet. 1:18] and “ransom” [Matt. 20:28 par.; cf. Rev. 5:9]). This language also reflects Jesus’ words, “the Son of Man came …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Gk. lytron] for many” (Mark 10:45). Since Jesus gave himself as this “ransom,” the idea of substitution (dying on behalf of sinners) is also includ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In v. 6a Paul’s argument concludes with a christological explanation of Christ’s act of mediation: “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people.” The form of the saying found here represents a retelling of the tradition of Jesus’ self-giving that in earliest form is found in Mark 10:45.56 Paul had already adapted this tradition, with various omissions and substitutions, so we cannot be sure how closely he draws on the Marcan logion at this point. Nevertheless, if we start with Mark 10:45 as a base, Paul’s adaptations are easily seen:
Mark 10:45—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Gal 1:4—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Gal 2:20—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Eph 5:2—and gave himself up for us
1 Tim 2:6—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people
Titus 2:14—who gave himself for us.
The key elements of the saying in each application are a verb denoting “giving,” the reflexive pronoun “himself” that lays emphasis on the voluntary self-offering, a preposition that conveys the effects of his offering to others, a recipient, and an indication of purpose (variously expressed). Paul’s usual preference to apply the work of Christ to “us” (Gal 1:4; Eph 5:2; Titus 2:14) is shifted to “all.”57 While this shift might be regarded as a clarification of the Marcan tradition’s “many,” we should rather think that Paul’s widening of the scope from his more typical “us” to “all” is determined by the universal thrust of the passage. His choice of the preposition “for” (hyper) instead of Mark’s “for” (anti) is normal, and his consistent use of the reflexive pronoun “himself” in place of the Semitic “his life” is an improvement in the Greek.58 Where the saying most resembles the Son of Man logion is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giving “as a ransom.”59 For this, Paul replaces Mark’s lytron with the rare compound antilytron.60 This shift may intensify the sense of substitution (already present in Mark 10:45), or render the idea into more suitable Greek; but the same sense of a ransom payment that secures release (of someone or something) is expressed.61
This portrayal of act of mediation contains several elements. First, the saying interprets Jesus’ death as a voluntary act of self-sacrifice. The common verb “to give” in some contexts expressed the idea of a martyr’s death,62 and came to be used to describe Jesus’ death as an act of sacrifice intentionally undertaken by him.63 As the statement is constructed here (active substantival participle referring to Jesus; cf. the divine passive in Rom 4:25), it portrays Jesus as the responsible actor. The reflexive pronoun “himself” makes Jesus the object of his own action, reinforcing the idea of selflessness.
Second, the prepositional phrase, “for all [people],” perhaps strengthened by the rare form of “ransom,” underlines two interrelated elements in the theology of Jesus’ self-offering: he died as both a representative and a substitute. The preposition (Titus 2:14) occurs frequently in Paul and throughout the NT to describe the effects of Jesus’ actions on others.64 In doing so, the sense of his solidarity with the intended recipient (“all,” “us”) is implicit; here following the phrase “the human Christ Jesus,” solidarity with the human race is emphasized. Just as important is the fact that in this demonstration of solidarity, Jesus not only represented humankind but also stood in its place as substitute for its benefit.65 And here the circle that began with universality has run its course through particularity to arrive again at universality: what Jesus has done he has done “for all people.”
Christology in this statement finds expression at a very human level. While nothing of the higher elements of Christology are necessarily sacrificed (for all that is implicit remains), the formulation establishes clearly the necessity of Christ’s complete participation in humanity in order to accomplish the work of mediation intrinsic to God’s universal salvation plan. As stressed elsewhere in Paul (Rom 5:12–21), it is this full participation in the human experience that makes representation and meaningful self-sacrifice possible, and it is as a human being (not as an object of belief) that Jesus is the mediator of salvation to all people.66 The very nature of Christ’s self-offering, as told and retold in the church’s growing tradition, verifies the universal scope of God’s salvation.
The closing phrase of v. 6 is problematic, as both the modern translations and the ancient variants demonstrate.67 The problem is caused largely by asyndeton, since (lit.) “the testimony (made, given) at the right time” is simply appended without connectors to indicate the relation to the preceding statement (vv. 5–6a). Without this information to aid us, we must rely on the two components of the phrase and the context to guide us. The way in which v. 7 links to it suggests its transitional function and also its meaning.
56 Cf. the relevant phrases: 1 Tim 2:6a—ὁ δοὺς ἑαυτὸν ἀντίλυτρον ὑπὲρ πάνῶεν; Mark 10:45—δοῦναι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λύτρον ἀντὶ πολλῶν.
57 Gk. πάντων = “all”; cf. πολλῶν = “many” in Mark 10:45.
58 Gk. ἑαυτόν replaces Mark’s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59 This is accomplished in Titus 2:14b with the verb λυτρόομαι (“to redeem, set free”).
60 Gk. ἀντίλυτρον; the term is rare (see BDAG, s.v. for occurrences; cf. Josephus, Antiquities 14.107 for the similar phrase employing the simplex form: λύτρον ἀντὶ πάντων = “ransom for all”). Paul’s preference seems to be for ἀπολύτρωσις (“redemption”; Rom 3:24; 8:23; 1 Cor 1:30; Eph 1:7, 14; 4:30; Col 1:14), which views the result of ransoming. See F. Büchsel, TDNT 4:340–56, 349; Spicq, TLNT 2:423–29 (423 n. 10). This is achieved.
61 The interpretation of the λύτρον word group in Christology has generated a great deal of discussion. For the question of substitution and the meaning of ἀντίλυτρον in 1 Tim 2:6a, see esp. Marshall, 432; Büchsel, TDNT 4:349; K. Kertelge, EDNT 2:366; D. Hill, Greek Words and Hebrew Mean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76–77; L.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32d ed. London: Tyndale, 1965), 51–52.
62 Gk. δίδωμι; 1 Macc 2:50; 6:44; Thucydides 2.43.2. See F. Büchsel, TDNT 2:166.
63 Titus 2:14; Mark 10:45 (Matt 20:28); Luke 22:19; Gal 1:4 (sometimes in compound form παραδίδωμι; Rom 4:25; 8:32; Gal 2:20; Eph 5:2). See N. Perrin, “The Use of (para-)didonai in Connection with the Passion of Jesus in the New Testament,” in E. Lohse (et al.), ed., Der Ruf Jesu an die Antwort der Gemeind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0), 204–212.
64 Gk. ὑπέρ; Rom 5:6, 7[2x], 8; 8:32; 14:15; 1 Cor 11:24; 2 Cor 5:15[3x], 21; Gal 2:20; 3:13; Eph 5:2, 25; Mark 14:24; Luke 22:19; John 10:11; Heb 2:9; 1 Pet 2:21; 3:18; etc. See further M. J. Harris, NIDNTT 3:1196–97; H. Riesenfeld, TDNT 8:507–516; R. E. Davies, “Christ in our Place: the Contribution of the Prepositions,” TynBul 21 (1970), 71–91.
65 On the combination of representation and substitution contained in ὑπέρ, see esp. Harris, NIDNTT 3:1197; N. Turner, Syntax (Edinburgh: T & T Clark, 1963 [vol 4 of J. H. Moulton, ed.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158, 171; M. Hengel, The Atonement (Philadelphia: Fortress, 1981), 52.
66 Cf. Johnson, 197.
67 The variants represent attempts to improve the situation: א places the connective καί (“and”) before “testimony” to make it a part of what Christ “gave”; more witnesses (D* F G, etc.) precede the statement with the relative pronoun, οὕ (“of which, to which”) and the verb ἐδόθη (“it was given”) to relate the statement to the preceding and clarify the meaning: “to which testimony was given at the appropriate time.”
lit. literally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83–185.
 
7절) 본문의 ‘내가’는 ‘에고’로 이는 1인칭 주격 대명사이다. 이는 강조 용법으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세움을 입은 것’이라는 표현은 ‘에데텐’인데 이는 세우다라는 의미른 가진 ‘티데미’의 부정과거 수동태 표현이다.이는 신적 수동태로 바울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강권적인 부르심,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가 된 것을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여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에베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유대주의적 이단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 강한 의심을 제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파하는 자는 ‘케뤽스’로 공개적으로 중요한 소식을 외치는 사람, 특별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길에 관하여 하나님으로부터온 소식을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의 동사형이 ‘케뤼쏘’로 ‘선포하다, 설교하다, 가르치다’이고 명사형이 ‘케리그마’로 ‘선포, 설교’이다.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자, 사도,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을 위하여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행 9:15; 22:15, 21; 26:17-18). 
‘스승’은 ‘디다스칼로스’이다. 이는 ‘디다스코’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르치심, 교훈이라는 의미의 명사는 ‘디다케’이다. 
 
The closing statement of this passage brings the whole of the prayer instructions and backing theology into the sphere of Paul’s apostolic calling. It has a polemical ring to it, especially in its insistence that Paul is telling the truth. This is not accidental, nor is it done just to lend authority to the teaching. As in the case of 1:11–16 (Titus 1:1–3; cf. 2 Tim 1:11–14), Paul’s explicit linking of his apostolate with the traditional gospel is calculated to substantiate and reinforce his own claim to be the authoritative apostle to the Gentiles. The would-be teachers of the Law already encountered in 1:3–8 had apparently challenged his position or his understanding of the gospel (which amounts to the same thing). In this passage, the instructions to pray for all people (and for government rulers) and possibly the view of God’s will and supporting theology he endorses here (stressing the humanity of Christ) were corrective in thrust. Paul calls for prayer for all people, and it only makes sense to see this within the context of Paul’s own mission to all people. The problem of a narrow prayer outlook was not an isolated matter, but rather part of the wide-ranging effect of the Law-centered opposition’s penetration into a Pauline church that undermined the apostle’s authority. Consequently, in 2:7 Paul attempts again to convince the church of the divine origin of his mission and gospel as the authoritative guide for faith and practice.
First, Paul establishes his authoritative link to the gospel for the Gentiles (i.e. 2:5–6a). With the same phrase that he uses in 2 Tim 1:11,72 and the same verb of appointment as 1 Tim 1:12 (1 Cor 12:28; 2 Cor 5:19), he underscores the fact that his appointment to ministry was God’s choice.73
Second, Paul defines the scope of his commission with three nouns that also occur in 2 Tim 2:11: herald, apostle, teacher.74 The first of these terms, “herald,” picks up language that Paul often used of the act and message of proclamation.75 However, the noun “herald” is infrequent in the NT (2 Tim 1:11; 2 Pet 2:5), owing perhaps to strong religious associations with the secular herald, but the sense of one who proclaims the message is clear.76
“Apostle,” Paul’s usual term of self-description (see 1:1), comes second in the list. With it he distinguishes his position on the basis of the divine origin of his ministry and appointment. Its placement after “herald” suggests that proclamation is uppermost in Paul’s mind, which is in keeping with the missiological interest of the entire passage.77
Between the second and third nouns, Paul inserts the emphatic affirmation of truthfulness: “I am telling the truth, I am not lying.” The statement bears a close resemblance to Rom 9:1.78 These statements along with shorter forms of the truth claim (2 Cor 12:6) and the denial of lying (2 Cor 11:31; Gal 1:20) occur in contexts where Paul’s claim to be the apostle to the Gentiles, or to authority, was being challenged. The emphasis on truthfulness may apply to the whole statement, or specifically to the preceding claim to be an apostle. But its placement just before the final more elaborate description, alongside the concern of the whole passage for the universal mission, suggests that the affirmation underlines the certainty of his specific responsibility to the Gentiles.79
The term “teacher” fills out the job description of the “apostle.” The task of teaching was integral to the Pauline ministry and churches, and was carried out both by him and others (3:2; 5:17; 2 Tim 4:2).80 The difference between teaching and preaching (cf. 5:17) was probably more a matter of audience or purpose than of the content communicated or the degree of authority invested in the communicator or message.81 Paul was known as the apostle of the Gentiles (Rom 11:13; Gal 2:7–8; cf. Acts 13:47), and in this context in which “the teaching” was in dispute and being compromised through the activity of false teachers, and in which the openness of the gospel to the Gentile world was in some sense being threatened, the description “teacher of the Gentiles” reminds the readers that Paul is the one who has received authority to preach and teach in the Gentile churches. This was not information needed by Timothy;82 but bearing in mind the public dimension of the letter commending the coworker to the Ephesian church, we should almost expect Paul as that church’s founding apostle to underscore his authority in all matters—an authority that extends to his delegate, Timothy.
72 Gk. εἰς ὃ ἐτέθην; see 1:12. Cf. Eph 3:7; 1 Tim 1:11 for similar expressions.
73 The first person pronoun, ἐγώ, is emphatic, and the passive voice of the verb implies divine agency.
74 Gk. κῆρυξ καὶ ἀπόστολος … διδάσκαλος; cf. 2 Tim 1:11: κῆρυξ καὶ ἀπόστολος καὶ διδάσκαλος.
75 For Gk. κηρύσσω (“preach”), see 1 Cor 9:27; Gal 2:2; 2 Tim 4:2; for the noun, κήρυγμα, see Rom 16:25; 1 Cor 11:21; 15:14.
76 Gk. κῆρυξ. In the Greek world, the term “herald” described a variety of messengers whose task was to proclaim a message. In service of the royal court, heralds carried out diplomatic missions under the protection of the country he represented and the deity. Political and religious functions overlapped; he pronounced at the time of sacrifices and other cultic activities. Qualities needed by the herald included a loud voice and faithfulness to the message to be communicated. Philosophers could be called heralds of the gods (for refs. and further discussion, G. Friedrich, TDNT 3:683–96; J. Roloff, Apostolat-Verkündigung-Kirche [Gütersloh: Mohn, 1965], 240–44; 251–52; idem, 124, nn. 79, 80; Spicq, 368–69; Mounce, 92; Dibelius and Conzelmann, 43, nn. 54, 55). Roloff, 124, points out that it is equivalent to “evangelist” (2 Tim 4:5; see also Marshall, 434; Mounce, 92).
77 Marshall, 434.
78 Gk. ἀλήθειαν λέγω οὐ ψεύδομαι cf. Rom 9:1: ἀλήθειαν λέγω ἐν Χριστῷ, οὐ ψεύδομαι. The view that this represents a later author’s attempt to recreate “Paul” for a later church (Roloff, 112; Trummer, Paulustradition, 120–23; Hanson, 70) depends solely on a late dating of this letter.
79 Marshall, 434; Fee, 67; Guthrie, 83; Roloff, 112.
80 Gk. διδάσκαλος; for Paul as teacher, see 1 Cor 4:17; Col 1:28; for others in this role, see Rom 12:7; Col 3:16; for the place of teaching in Pauline churches, see 1 Cor 12:28–29; Eph 4:11, 21; Col 2:7; 2 Thess 2:15. See also K. H. Rengstorf, TDNT 2:157–58.
81 J. H. McDonald, Kerygma and Didache: The articulation and structure of the earliest Christian messa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5, 135 n. 28; K. H. Rengstorf, TDNT 2:162; K. Wegenast, NIDNTT 3:771; Towner, Goal, 123.
82 Although Paul is identifying the unique nature of his authority in the Gentile mission, it is not necessarily the sort of “canonizing” that some attribute to a late “paulinist” (but see Roloff, 124; Wolter, Paulustradition, 77–78).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86–189.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셔서 중보자로 아들을 보내셨고 이를 위해 그분이 대속물이 되셨음을 전파하는 자로, 사도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지,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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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ting

Paul, aan apostle of Christ Jesus bby the will of God,

To the saints who are in Ephesus, and care faithful1 in Christ Jesus:

d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a See 2 Cor. 1:1

b See 1 Cor. 1:1

c Col. 1:2

1 Some manuscripts saints who are also faithful (omitting in Ephesus)

d See 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1–2.

 

1절)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자신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매우 강조했다. 자신의 사역에로의 부름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오직 신적인 부르심에 의하였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전 9:16-17, 개정)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위의 본문처럼 자신의 의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사도라는 표현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주님의 부활을 본 사람, 교회에서 선교 사역으로 보냄을 받은 자, 좀더 넓은 의미에서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도는 자신의 사도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더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른 어떤 서신에서보다 많이 등장한다. 그 관심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들을 향한 그의 사역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가 사도가 되기를 원하셔서 바울이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An apostle of Christ. Paul’s identification of himself as an apostle appointed by God is his customary way of beginning his letters. (Cf. the exact parallels in 2 Cor. 1:1; Col. 1:1; 2 Tim. 1:1.) Often Paul had to defend his legitimacy as an apostle, but here the tone is merely descriptive. The term apostle carried several connotations in the early church, all of which were true of Paul. It referred to someone who had seen the risen Christ (1 Cor. 9:1), to those sent out by the church with a missionary task, or more broadly to anyone who functioned as an agent or representative. This self-description emphasizes the authority with which Paul wrote. If he was an apostle because of the will of God, what he wrote must be seen as communication from God.

The will of God is an important theme in Ephesians, appearing more frequently here than in any other letter. The concern is not about Christians finding the will of God; rather, the emphasis is on God’s purpose with his actions for humanity. The point here is that Paul was an apostle because God wanted him to b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7.

 

어떤 이들은 이 서신이 회람서신으로 원문에는 에베소라는 명칭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도시에 가느냐에 따라서 그 부분에 그 도시의 이름을 넣어서 읽었다고 한다.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본문에서 성도라고 표현된 단어는 ‘하기오스’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이다. 본문의 의미는 특별히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로 지명받은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되어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The identification of the recipients as “saints” (lit., “the holy ones”) is Paul’s usual description of Christians. “Saints” is not a helpful translation, for this English word usually refers to extraordinarily pious people. Paul’s first intent was not that these people lived especially holy lives—he described the Corinthian Christians the same way (1 Cor. 1:2), and yet he had no illusions about the sanctity of their lives. Rather, his primary concern was to emphasize that just as he had been appointed by God to be an apostle, they too had been separated to God (separation is the key idea in the word “holy”). Paul’s addressees were holy because God had set them apart to be his people. The focus is entirely on God’s action and the reference is to God’s saving work.1

1 See 1 Corinthians 6:11, where “sanctified” is the verb form of the word “holy.” In the Old Testament both Israelites and angels were sometimes called “holy ones.” Such language was adapted to describe God’s people in the New Testamen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에베소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성도로서의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문화속에, 사회속에서 살아내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이것에 대한 답을 갖출 필요가 있다. 

This sense of “geography” is important.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fact that Christians live in two places at the same time? Paul’s readers lived both in the region of Ephesus and in Christ. What was the significance for this locale that they were in Christ and what was the significance for Christ that they were in this locale? Each Christian must personalize that question in deciding how to live. We can neither avoid the place where we live nor betray the Christ in whom we live. The rest of Ephesians does not focus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readers to their locale except in the most general way. Most of the attention will be on the significance of being in Christ for salvation and for life in the Christian community. Both are important, but in applying the text we need to extend the theology. We must also put into practice the significance of being in Christ for relations outside the Christian commun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42.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임하는 것이다. 

 

본문의 인사말을 서신의 전형을 모두 담고 있다.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사말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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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an apostle of Christ Jesus b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cour brother, 
To the dsaints and faithful brothers1in Christ at Colossae: 
e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See 2 Cor. 1:1
bSee 1 Cor. 1:1
cSee 1 Thess. 3:2
dEph. 1:1; See Phil. 1:1
1Or brothers and sisters. In New Testament usage, depending on the context, the plural Greek word adelphoi(translated “brothers”) may refer either to brothersor to brothers and sisters
e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Col 1:1–2.

1절) 저자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
바울은 하나님의 부름으로 다메섹에서 전격적으로 회심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으셨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모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자신을 택정하셨다라고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서신을 쓰면서 주로 자신을 사도라 칭했다. 이유는 여러가지로 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도일수 없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는 힘주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을 설명하며 자신이 사도임을 선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서신 모두에서 그를 사도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종, 갇힌 자, 종이라고 호칭했다. 
디모데는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를 함께 보냈다. 바울은 디모데를 그의 선교사역에 함께 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에게 마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로 고난에 함께 했다라고 칭찬한다. 이후에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서 옥에 갇히기도 했다.
  • Paul is called by God (Acts 9:15), and God empowers him. Paul understands that he was set apart by God from his mother’s womb to preach the gospel to the Gentiles (Rom 11:13; Gal 1:15–16; 2:7). His authority is not increased by the use of the title “apostle” (here) just as it is not reduced when he omits it (1 Thess 1:1; 2 Thess 1:1) or substitutes “servant” (Phil 1:1) or “prisoner” (Phlm 1). He is a “fellow servant” (Col 1:7; 4:7) who carries out a commission God gave him for them (vv. 24–25), not a domineering master over them. Timothy.Also co-sent 2 Corinthians, Philippians, 1-2 Thessalonians, and Philemon. Timothy was spoken well of by believers in Lystra and Iconium, and Paul took Timothy with him from there on his missionary journeys (Acts 16:1–3). Paul praises him as one who served with him like a son with a father (Phil 2:20–22). Later, Timothy was also imprisoned for the gospel (Heb 13:23).
  •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7.


2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한다. 너희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본절은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편지글의 가장 일반적인 인사말을 담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과 골로새의 성도라는 표현을 평행적으로 사용한다. 그리스도안에 신실한 신자들은 골로새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책임이 있다. 이 두 세계, 그리스도 안의 세계와 일반 세상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울은 골로새 교회안의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신앙은 금욕주의적으로 또한 영적인 신비주의로 흐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 단절되는 태도로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 Paul’s glad greeting of his readers as those who possess the prospect of being transformed in Christalso intends to draw them together into a community for Christian witness. Wright stresses the importance of the parallelism between in Christand “in Colosse” (unfortunately obscured in the NIV translation, at Colosse): those who are faithful believers in Christ are also responsible citizens in Colosse, and the two worlds must never be separated. Their public witness to Christ in the town of Colosse must always reflect their participation with him in the power of God’s salvation (1986:47). In drawing this parallelism, Paul has the Colossian conflict in mind, for this congregation of saints is struggling to connect their life in Christ with their life in Colosse. In fact, their religious observance tends toward moral asceticism and spiritual mysticism, which actually disconnect them from the world around them. Added to these tendencies, their interest in philosophical speculation has given rise to a variety of Christian devotion that is much too private and esoteric, and largely irrelevant to unbelievers in Colosse.
  • Because Paul is writing to a congregation that specializes in theological abstraction, his advice often takes on a similar cast. Colossians is difficult to preach and teach because it is the ideas of faith that are at stake, not the actions of faith. Yet we will find that Paul always holds the two together. All that he writes envisages the parallelism “in Christ” and “in Colosse,” which is the focal point of Christian life: those in Christwho are made holy and faithfulby divine grace must live “in Colosse” as public agents of divine grace.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Col 1:2.

본문의 수신자들에 대한 표현을 단순히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안에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표현할지 아니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로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한 형제들로 할지에 따라서 본문의 강도가 조금 달라진다. 단순히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안의 신실한 성도, 형제들이라고 해도 그 수신자들을 설명하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을 동격으로, 평행하게 같은 무게로 표현하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은,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이 복음은 그리스도안에서 모인 자들인 동시에 골로새에 흩어진 이들에게 완벽한 일치, 일관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In Christ와 In Colosse를 같은 무게로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쉽게 그리스도안으로 모여든다. 하지만 같은 무게로 우리는 골로새로, 세상으로 흩어져야만 한다. 우리의 선교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가운데 공평과 정의를 선포하고 이루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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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ting
Paul, aa servant1 of Christ Jesus, bcalled to be an apostle, cset apart for the gospel of God, which dhe promised beforehand ethrough his prophets in the holy Scriptures, concerning his Son, fwho was descended from David2 gaccording to the flesh and hwas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 iin power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through whom jwe have received grace and kapostleship lto bring about the obedience of faith for the sake of his name mamong all the nations, including you who are n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To all those in Rome who are loved by God and called to be saints:
o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Ro 1:1–7.

본문의 서론 격인 1:1-17절에 복음에 대한 표현이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로마서에 11번 등장하는데 이 짧은 본문에 8번에 걸쳐서 이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These opening and concluding statements have many similarities, not the least of which is the emphasis on the gospel. (Eight of the 11 occurrences in Romans of euangelion [“gospel”] and euangelizomai [“to evangelize”] are in these passages.)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6), 39.

Paul introduces himself by stating his divine call (v. 1), the message that he has been called to proclaim (vv. 2–4), and the specific task with which he is occupied (vv. 5–6). Finally comes the address in v. 7a, followed by the usual Pauline salutation in v. 7b. The length and theological orientation of this prescript are due mainly to the fact that Paul was introducing himself to a church that he had neither founded nor visited. He wanted to establish his credentials as an apostle with a worldwide commission to proclaim the good news of Jesus Christ. Whether this elaborate prescript had a polemical motive (as, e.g., Murray thinks) is not clear.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6), 40.

1절) 바울은 본 1절을 통해서 자신을 세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첫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고
세번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여러 복음서를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이 일의 주도권이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나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은 것도 마찬가지 이다.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우리들도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의 유명인들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성공한 것을 자랑하지만 우리들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자리와 지위마저도 하나님의 결정과 인도하심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Paul1 began his letter by identifying himself in three different ways.2 First, he was a “servant of Christ Jesus.” He belonged without reserve to the one who confronted him on the Damascus road. Although cultured Greeks would never refer to themselves in such a demeaning fashion, the Old Testament designation “servant of the Lord” was a title of honor given to Moses and other prominent leaders (Josh 14:7;   p 60  24:29). Then Paul said that he was “called to be an apostle.” God initiated the process. Paul did not choose the role for himself. And even before he was called, he had been “set apart”3 to serve in the interests of the gospel of God.4 All three statements reflect the subordinate role the apostle played. Not for a moment did he elevate himself above his assigned position as a servant of God, set apart and called to serve in the interests of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Christians in leadership positions must recognize the servant nature of their roles in the work of the kingdom. What the world calls success has led many gifted leaders gradually to assume a celebrity posture. But with pride, the original sin, comes spiritual disaster. It would be well for Christian leaders to begin each day acknowledging before God that they are his servants. And even that role is a result of God’s decision to call them into service.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59–60.

당시 로마는 85-90%의 노예들로 운영되던 사회였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야기되는 종이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표현이었다. 구약을 통해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되고 수많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고 불리우는 것을 무엇보다 큰 영예로 여겼다. 이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하나님으로 여기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야직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당시 종은 노예로 예속된 고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지위에 따라서 도리어 자유로운 신분일 때보다 더 높은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Paul typically begins with a statement of his office but here breaks the pattern by first emphasizing his Lord and Master, calling himself “a slave of Christ Jesus.” This should not be watered down to niv’s servant of Christ Jesus, for Paul is alluding to the fact of slavery in the Roman empire (it is estimated that 85 to 90 percent of the population of Rome and Italy were slaves or of slave origin; see Rupprecht 1993:881) as well as to the metaphor of slavery in the Old Testament. After the people of Israel were liberated from slavery in Egypt, it became common for them to call themselves “slaves of God” (Lev 25:55 [niv, “servants”) as a title of honor designating their new allegiance. Many of the leaders of Israel (Abraham, Moses, Joshua, David and Elijah) called themselves God’s slaves. Since Jesus has become both Lord and God, now Paul is the slave of Christ Jesus, with emphasis on the messianic office, i.e., Messiah Jesus. Paul is saying not only that he belongs to Christ but also that this is a privileged state. In the Roman world slaves were protected and even paid by their owner; they were members of the owner’s extended family and often had higher social status as slaves than they did after gaining their freedom. So Paul considers this a badge of honor, as should all believers.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칭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는 사도란 칭호가 바로 하나님 부름과 선택에 의하여 교회의 설립과 지도자로서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도는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부르신 12명으로 시작되고 이후에 바나바, 야고보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포함된다. 일반적인 조건은 주님과 함게 동역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Apostle is Paul’s more typical self-designation and has two basic meanings—a church representative or missionary (2 Cor 8:23; Phil 2:25), and one of those called or chosen by God to be founding agents and leaders of the churches. We know some of them, beginning with the Twelve (called apostles from the beginning, Mk 3:14) but probably including also Barnabas (Acts 14:4), James (1 Cor 15:7), and perhaps Andronicus and Junias (Rom 16:7). The normal criteria for that high office included walking with the Lord as well as seeing the risen Lord (Acts 1:21–22), but Paul was included on the basis of his having “seen” the Lord in the Damascus Road vision (1 Cor 9:1; 15:8). Paul was especially “chosen” to be God’s envoy to the Gentiles (Acts 9:15; 22:21), giving him authority (cf. Gal 1:1) that afforded this letter special weight as an official communication from God through Paul his chosen instrument.
바울이 택정함을 입었다는 표현은 구약의 예레미야를 떠오르게 한다. 로마서 전체에서 복음은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복음은 복음 자체로서의 메시지와 선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보내셔서 이루신 구원을 이루신 사건을 의미한다.
Finally, he has been set apart for the gospel. This is a further definition of what it means to be called, specifying that Christ has chosen him to take the gospel to the Gentiles. In Galatians 1:15 Paul says that he was “set apart … from my mother’s womb,” an allusion to the call of Jeremiah (Jer 1:5), and this may be alluded to here as well. Moo (1996:42–43) says that gospel here refers not only to the gospel message and its proclamation but also to the very events by which the gospel came to be, God sending his Son as the sacrifice that produced salvation. Thus by Jesus Christ and God should be seen as indicating origin; that is, this gospel came from God. Lohse (1995:127–40) notes that the gospel of God frames the letter (1:1–17; 15:14–21), which especially centers on the proclamation of justification in Christ. The gospel is central to Paul’s purpose in writing this letter.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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