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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gEpaphras, my hfellow prisoner in Christ Jesus, sends greetings to you, 24 and so do iMark, iAristarchus, jDemas, and jLuke, my fellow workers. 
25 k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r spirit. 
gSee Col. 1:7
hRom. 16:7
iSee Col. 4:10
iSee Col. 4:10
jSee Col. 4:14; 2 Tim. 4:10, 11
jSee Col. 4:14; 2 Tim. 4:10, 11
kSee Gal. 6: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몬 23–25.

23절)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의 친구중의 하나로 그 도시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한 인물이다(골 1:7; 4:12). 그는 지금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24절) 바울은 이어 동역자인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의 이름을 들면서 이들이 함께 문안 하고 있다. 
  • Mark, Aristarchus, Demas, and Lukeare also named in Col. 4:10, 14. For Mark, see Acts 12:12. For Aristarchus, see Acts 19:29. Luke is almost certainly the one who authored the Gospel of Luke as well as Acts (see also Col. 4:14; 2 Tim. 4:11). Luke was apparently with Paul throughout his two-year imprisonment in Caesarea and then in his two-year Roman imprisonment. Lamentably, Demas later followed worldly pursuits and deserted Paul (2 Tim. 4:10).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56.

25절) 바울은 마지막 인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라고 기도한다. 은혜는 이 서신의 괄호와 같다. 바울은 빌레몬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오니세모에게 끼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바울은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부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grace.Brackets this letter. Paul expects Philemon to extend the same grace to Onesimus that the “Lord Jesus Christ” extended to him (v. 3). your spirit.Plural; Paul expects the spirit of the whole church to be infused with divine graciousness.
  •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88.


  • Typically, Paul’s last word to his readers reminds them of the availability of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living within Christ’s lordship will enable his disciples, especially Philemon, to respond to the apostle’s advice (see commentary on Col 4:23). Martin adds that this prayer is a “liturgical grace that situates the letter in the house congregation at worship” (1991:145), reminding current readers that all Paul’s writings are for nurturing the worshiping community.
  • Paul often adds the phrase with your spiritto his benediction (compare Gal 6:18; Phil 4:23; also 2 Tim 4:22). Not just a fuller but equivalent expression of “with you,” this concluding phrase suggests the collaboration of Christ’s Spirit, who mediates his grace, with Philemon’s human spirit, which receives it and applies it to life (Wall 1979:128–44). Such an image lies at the very core of Paul’s participatory Christology: God’s salvation-creating grace transforms the believer who actively collaborates with Christ in the ongoing work of God.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25.


오네시모의 실수는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기회가 되었다. 일시적인 손실이 영원한 이득,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보게 된다. 우리는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구약의 요셉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이 그를 배신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겼을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하심의 섭리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한다.(창 45:7; 50:20)
(창 45:7, 개정)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50:20, 개정)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우리는 여기 오네시모의 이야기속에서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그의 도망이 선한 역사를 이루게 했는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여기서 신적 수동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15절) 바울은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 도망간 것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섭리, 그분의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굴곡을 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깨어진 삶과 관계를 회복시키실 수 있다. 당시의 문화속에서 오네시모는 죽어 마땅한 종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더 나은 다른 것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셨다. 주인을 통해 도망간 오네시모, 그는 바울을 만나 구원을 받고 다시 옛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진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제 더이상 그를 종이 아니라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요 동역자로 여길 것을 요청한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재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때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된다. 이 편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어두운 순간, 깊은 절망, 가장 두려운 불순종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의 일부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우리 개인의 영역만을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다. 
  • In the story of Onesimus we can see the mysterious providence of God at work. We will never know how Onesimus eventually met Paul after making good his escape. We can only know from the use of the passive voice, “he was separated from you” (v. 16), that Paul believed that God’s hand was in what had happened. The escapade turned out differently than any might have expected, in that Onesimus ultimately escaped into the arms of God’s grace. He could not escape God’s eye on him. We cannot straighten the lines of our crooked paths in life, but God can. God can take our worst intentions and turn them around for good, healing broken lives and broken relationships. In Onesimus’s culture, others could only see a slave, a useless slave, and worse a runaway slave. God saw more and purposed greater things for him.
  • Everything turns out differently from what was foreseen by either master or slave. God was using this escape to bring Onesimus to Paul.175Paul sends him back to his master as a brother who, he trusts, will send him forth as a coworker in the gospel. We usually can only see the traces of God’s hand in our lives in retrospect. The story behind the letter can help us see that even our darkest moments, deepest despair, and most dreadful disobedience can have some meaning in God’s purposes. We are all part of some great tapestry, but usually we can only make out the individual threads.
  • 175The “perhaps” in verse 15 reveals the input of human freedom in this process. God’s purposes are accomplished through the agency of humans. Paul could have spurned this runaway slave; instead, he “begot” him in the faith (v. 11; niv, “who became my son”). Philemon is free to balk at Paul’s request, but Paul trusts that God’s purposes for both will prevail.
  •  David E. Garland, Colossians and Philemo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8),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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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So if you consider me zyour partner, receive him as you would receive me. 18 If he has wronged you at all, or owes you anything, charge that to my account. 19 aI, Paul, write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to say nothing of your owing me even your own self. 20 Yes, brother, I want so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b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cConfident of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knowing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I say. 22 At the same time, prepare a guest room for me, for dI am hoping that ethrough your prayers fI will be graciously given to you. 
z2 Cor. 8:23
aSee 1 Cor. 16:21
bSee ver. 7
cSee 2 Cor. 2:3
dPhil. 1:25; 2:24
eSee 2 Cor. 1:11
f[Heb. 13: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Phm 17–22.

만약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참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들이고 바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면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구원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여 동지가 된 것입니다. 그들 모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교환(내어줌, 대속)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의 구원을 위해 오네시모에 대한 그의 권한을 교환 할 의무가 있다. 바울을 각각의 요구를 통해 빌레몬이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교환(내어줌)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도록 돕는다. 이는 그의 집의 종을 회중의 삶의 교제(코이노니아)안에서 동역자(코이노모스)로 환영하는 것(17), 다른 부채를 갚는(18-19), 다른 이에게 마음을 보여줌(20-21), 객을 위해 그의 집 안에 숙소를 마련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연되어야한다. 바울은 지금 빌레몬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그러한 일을 행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에 대한 빌레몬의 신앙을 시험하게 한 다는 것을 분명 인식한다. 심지어 그는 빌레몬이 자발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관대한 내려놓은 것은 그이 집 안에서 더 큰 교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은혜로 변화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다. 바울은 이 두 사람 모두의 후원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오네시모의 해방을 요구하면서 그는 빌레몬의 영애와 그의 교회 안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 The logic of Paul’s words is inescapable: If Philemon and Onesimus are indeed brothers in Christ and spiritual children of Paul, then they are also partnered with Christ to participate together in God’s salvation. Christ’s exchange for their common salvation obligates Philemon (and Paul too!) to exchange his right to Onesimus for his salvation (or manumission). Each demand Paul makes aids Philemon in understanding that Christ’s exchange for him must be concretely demonstrated by welcoming his slave home as an equal partner (koinōnos)in the koinōniaof the congregation’s life (v. 17); or by paying another’s debt (vv. 18–19); or by showing compassion (for a third time, splanchnais used) toward another (vv. 20–21); or by providing a room in his home to a guest (v. 22). Such are the requirements of being a new creature in Christ.
  • Paul surely recognizes that Onesimus constitutes a testing of Philemon’s faith in Christ, even as he knows that Philemon’s willingness to exchange personal rights for a generous response will not only produce greater koinōniain his household but also demonstrate publicly that he has been transformed by God’s salvation-creating grace. Paul is the patron of both men; thus, while he asks for Onesimus’s emancipation, he seeks to secure Philemon’s honor and standing within his church.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Phm 17.

17절)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가 나를 너의 동역자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기를 네가 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라고 요청한다. 
오네시모는 최근에 바울을 통해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바울과 빌레몬과 함께 같은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신자이고, 같은 약속들과 확신들을 가지고 있으며 함게 동역자인 것이다. 어떤 이는 선배된 자들이고 다른 이들은 초신자들이다. 
본문에서 영접하라라는 단어는 ‘프로스람바노’로 다른 사람의 집에 갈때 받는 개인적인 환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를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환대할 것을 빌레몬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전에 자신의 집에서 종이었던 사람을, 게다가 큰 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를 환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지금 이러한 요청을 통해서 우리에게 회심한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공개적인 실천,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다라는 것은 이처럼 사유화되고 구획화되어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우주적인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의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는 은혜로 변화되어 새로와졌다. 그들은 이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의 한 교제권 안에서 동역자가 되었다. 
  • Yet Paul demands that Philemon welcomeOnesimus as though hewere Philemon’s apostle and patron. The verb translated “welcome” (proslambanō)suggests the personal reception of one into another’s home—a hospitable “homecoming” (Harris 1991:272). There is nothing abstract about this substitution, since it presumes an actual encounter between two persons. Onesimus is a crisis that Philemon cannot avoid; his conversion cannot be acknowledged from afar. Philemon must deal with Onesimus in person, first recognizing and honoring him as Paul’s substitute, but then welcoming him as though he were a spiritual partner like Paul within the very household he once served as a slave.
  • Paul’s challenging request serves a practical end. He realizes that religious conversions, such as those experienced by both Philemon and Onesimus, have very public results; they are not events that just happen to one and are then privatized and compartmentalized so they do not intrude on one’s other activities. Conversion joins the believer with Christ in the cosmic salvation of God, whose grace transforms every aspect of human life. Philemon and Onesimus both must realize, as we all must, that in the crisis of a difficult reunion, we are sometimes forced to admit that how we relate to one another has changed with the changes that have taken place in us. For example, the changes that have taken place in our son, who is away from home at college, and in us, who experience a home without him, have changed forever the way we talk to and think about each other.
  • The previous arrangement between Onesimus and Philemon as slave and owner has been changed by their experience of grace. They are now partners (koinōnoi)in a koinōnia,where they share a new capacity to love one another as never before. The result of granting Paul’s request is envisaged by the coupling of the words partnerand welcomein characterizing the homecoming of Onesimus: he will be included as a member of the congregation, the equal of everyone in the house he once served as slave. Philemon is no longer his lord but a brother; they are partnered together with the Lord Jesus for their mutual salvation.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Phm 17.

18-19절)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잘못하였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내가 갚아주겠다라고 말한다. 나 바울은 이를 친필로 쓰는데 내가 그것을 갚을 것이다. 빌레몬 네가 나에게 빚진 것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본문을 보건데 오네시모는 분명히 주인인 빌레몬에게 재정적인 손실을 입혔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자신이 직접 갚겠다라고 그리고 그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 친필로 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이나 오네시모에게 아무것도 빚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빚지고 계시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심으로 구원하신 것처럼 바울도 재정적으로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빚도 지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모든 책임을 질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속에서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진 것은 무엇일까?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모두의 후원자, 영적인 아비였다. 말하자면 오네시모와 빌레몬 모두 바울에게 구원, 영적인 생명을 빚진 것이다. 본문 19절에서 이러한 빚진 것을 빌미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할 것을 강요한다기 보다는 겸손히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영적 신분의 변화가 사회적인 신분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복음은 그저 개인이 구원받고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이 나아가서 사회 구조를 개혁시키는 것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빚을 대신 갚아준다고 말하는 것의 핵심은 화해이며 이는 오네시모의 자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이러한 샬롬, 화해, 평화, 자유의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 The second demand Paul makes of Philemon is ironical. On the one hand, the reader supposes that Paul is offering to make good whatever financial or business loss Philemon has suffered as a result of Onesimus’s failure (whatever that might be). While Paul owes Philemon nothing, even as Christ owes us nothing, he involves himself in Onesimus’s affairs in order to pay his debt, whether financial or interpersonal, even as Christ (who knew no sin) took upon himself the sins of us all (so Rom 5:6–11). Paul’s involvement has a firm christological basis.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Phm 18.


20-21절) 형제여. 나로 주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어떤 이익을 얻게하고 내 마음이 주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바울, 나는 빌레몬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함으로 네게 썼다.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행할 것을 알고 있었다. 

빌레몬서에는 세번에 걸쳐서 마음(heart, 스플란크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앞서 7, 12절에 사용되고 다시 20절에 등장한다. 
  • In v. 7 Paul had rejoiced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Philemon]”, and in v. 12 he said, “I am … sending my very heart.” Now in v. 20 Paul picks up this language again, using the Greek splagchna(“heart”) for the third time, and commands Philemon to refresh my heart in Christ. What the Lord has already worked into Philemon’s life is now to become a reality in his relationship with Onesimus.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56.

본문의 기쁨이라는 단어는 ‘오니네미’라는 단어로 유익, 이득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워드플레이이다.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난 종이 이제 다시 돌아와 진정으로 주인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 benefit.Greek oninēmi, another play on the name Onesimus. in the Lord.Paul is interested not in how he might benefit materially but in how the work of the Lord benefits.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88.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과 오네시모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지 확했다. 동일한 의미에게 빌레몬이 다른 이들, 다른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위에서 기초할때 힘이 된다. 선을 행하고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에게 그를 격려하면서 잘 하고 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옳으니 더 힘내서 그 길을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리더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향해서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받을 것을 요청하면서, 지금 이 요청보더 더 나은 삶의 모습을 다른 성도들에게 보일 것을 확신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아름다운 은근한 압박이 된다. 

22절) 동시에 바울, 나를 위해서 방을 준비해달라. 왜냐하면 나는 너희 기도를 통해서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레몬에게 이러한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갈 수 없어 편지를 통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요청하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그들을 방문하여 함께 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여러 서신에서 어려 교회들을 혹은 개인을 방문하고 만나기를 소원했다. 이러한 요청은 주님의 재림시까지 그의 사도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의 방문은 하나님의 다스림의 능력과 진리가 임재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방문을 통해서 그들의 사역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능력을 부여했다. 바울의 이러한 방문 요청은 바로 그러한 맥락으로 사도로서 그들에게 은사를 나누기 위한 이유이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리스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도직이 현대의 교회에도 이어지느냐이다. 어떤 단체들은 이러한 사도직이 지금의 교회에도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는 이러한 사도성, 사도직이 종결되었다고 본다. 

빌 1:25; 2:24; 히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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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emon’s Love and Faith
gI thank my God always when I remember you in my prayers, because I hhear of your love and iof the faith that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for all the saints, and I pray that the sharing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for the full j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that is in us for the sake of Christ.1For I have derived much joy and kcomfort from your love, my brother,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l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gSee Rom. 1:8, 9
hCol. 1:4
iEph. 1:15
jPhil. 1:9; Col. 1:9
1Or for Christ’s service
k[2 Cor. 7:4, 13; Col. 4:11]
lver. 20; 2 Tim. 1:16; [Rom. 15:32; 2 Cor. 7: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몬 4–7.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요청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빌레몬에 대한 그의 감사를 정중하고 재치있게 표현하고(4-5절) 자신이 얼마나 그를 향해 기도하는지를 서술한다(6-7절).

일반적으로 바울의 편지에서 이러한 감사와 기원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바울과 그의 편지를 읽는 청자들과의 좋은 관계(라포)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이어지는 충고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감사의 문맥속에서 제시되는 종교적인 이상 혹은 도덕적인 선을 향해서 청중들이 감화되고 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번째 그러한 기원을 통해서 독자들의 영적 진보를 위협하는 영적인 위기에 대해서 알리기 위함이다. 
이처럼 바울 서신의 감사의 기능은 뒤따르는 편지 본문의 비판적 서론 역할을 한다. 특별한 목적과 뒤따르는 사도적 충고의 모디브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목표를 저해할 수 있는 위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이 그의 편지의 이 부분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가오는 본문의 충고를 구성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 Generally speaking, such expressions of thanksgiving and petition serve three purposes: (1) to establish good rapport between Paul and his first readers, so that they will respond positively to the advice that follows, (2) to set forth in the context of thanksgiving the religious ideals or moral virtues toward which the congregation should aspire, and (3) in the petitions offered, to introduce the spiritual crisis that threatens the readership’s spiritual advance. Paul’s epistolary thanksgiving functions, then, as a critical preface to what follows in the letter’s main body (see also commentary on Col 1:3–12). Not only are specific goals established and a motive given for following the apostolic advice, but the crisis that might undermine these goals is sometimes suggested. We should take particular care to explore the meaning of the special vocabulary that Paul uses in this part of his letters, since it will often form the basis for the advice that follows in the main body.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4.

4-5절) 바울은 항상 자신이 기도할때 빌레몬을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왜냐하면 주 예수와 모든 성도들을 향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바울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빌레몬의 소식을 듣고 있다고 현재시제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사랑과 믿음이 들려오기에 기도할 때 마다 그를 기억하고 그로 인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지표로 믿음과 사랑을 이야기했다.(골 1:4-5) 

5절의 본문은 분사절로 그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첫번째는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
두번째는 빌레몬의 믿음(그의 사랑이 아닌)이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타나낸다라고 보는 견해
세번째는 두개의 다른 전치사를 통해서 역전된 병행절(AB:B’A’)로 보는 견해로 이 경우에 "네 사랑에 대한 들음”은 “성도들에 대한”으로 “네가 가진 믿음”은 “주 예수를 향한”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세번째의 견해가 좋아 보인다. 

  • The Greek syntax of verse 5 is difficult and remains contested among commentators. Literally, the verse is a participial phrase that expresses the cause of Paul’s thanksgiving: “hearing of your love and the faith that you have for [pros]the Lord Jesus and for [eis]all the saints.” In untangling this verse’s grammatical knot, Harris (1991:249–50) discusses its three possible meanings: (1) Philemon’s loveand faithmay characterize his relationships with both the Lord Jesus and the saints (so NEB, JB, NASB); (2) Philemon’s faith(but not his love) may characterize his relationships with both Jesus and the saints (so RSV); or (3) the verse may be an inverted parallelism (AB:B’A’), keyed by the two different prepositions for for.In this case, the “hearing of your love” is parallel to “for [eis]all the saints” and “the faith that you have” is parallel to “for [pros]the Lord Jesus.” This third possibility is preferable (so Harris). Unfortunately, I think, the NIV obscures this parallelism by reversing its order. Paul actually mentions Philemon’s lovefor the saintsfirst and again last for emphasis, since his appeal to Philemon on behalf of Onesimus will require his love most of all.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4.

이런 성도가 있다면, 또한 이렇게 기도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쁠 것이다. 이 땅의 교회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 목회자들 또한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을 지향해야 한다. 바로 그 완전, 우리가 지향해야할 신앙의 지점이 바로 이렇게 항상 기도할 때 성도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고 또한 성도들은 그러한 감사가 있도록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에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데 자라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이 서로 더 깊이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러한 소식이야말로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도제목이 되는 것이다. 

6-7절) 바울은 먼저 그의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이어서 그의 사랑에 대해서 간구하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모든 선한 일을 빌레몬이 깨달음으로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기도했다. 나는 너의 사랑을로 인해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 너를 통해서 생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본문속에서 바울은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매우 중요한단어인데 정확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고대 세계에 이 코이노니아는 무언가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함께 나뉘어지는 인격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이 단어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 공동체는 믿음과 선교 사역의 실천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코이노니아이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상호 입증, 확인을 하게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코이노니아가 다른 신자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필수적이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빌레몬의 개인적 신앙이 오네시모를 비롯한 다른 신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영적인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말하자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품는 것이 빌레몬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O’Brien contends that Paul’s intercessory prayer for Philemon is that he may acquire sufficient faith and love from God to respond favorably to the request to reconcile himself with Onesimus (1983:279). Most commentators, however, link the opening clause that you may be active in sharing your faith with my prayers(v. 4) rather than with as I re- member you(v. 4) as O’Brien would have it (see Harris 1991:250–51). Paul’s prayer is not for Philemon’s character, for which Paul has just given thanks, but for the koinōniaor sharingof Philemon’s faith. In this case, Paul has in mind “the mutuality of Christian life which springs from a common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Wright 1986:175). He is mainly interested in the kind of fruit that God harvests in the relations between believers (see commentary on Col 1:5–12). Paul’s implied prayer, then, is that Philemon welcome Onesimus gladly as an equal koinōnos(translated “partner” in v. 17) in the faith.
  • We should not underestimate the strategic importance of Paul’s use of koinōniato focus this petition for Philemon. Unfortunately, koinōniais difficult to define with any precision (see Koch 1963:183–87; Wall 1992:1003–10; also Wright 1986:176; O’Brien 1983:279–81). In the ancient world, it defined a whole community of persons in which something is shared in common and as essential for life. In Paul’s handling of this word, the community is a koinōniain the sense of sharing a faith and missionary praxis. Wright adds that “Christians not only belong to one another but actually become mutually identified” (1986:176); that is, koinōniatakes place where believers recognize that other believers are essential for their well-being. Paul is therefore praying that Philemon’s personal faith in Christ be worked out in appreciation of the important roles that other believers, including Onesimus, have in his spiritual formation in Christ.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6.

그러므로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연합된 삶에 있어서 특별한 이해를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신자들을 회중으로 부르시고 각각에게 특별한 은사와 다른 신자들에게 사역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래서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성숙함을 누리게 된다. 이 파트너십의 의미는 회중의 코이노니아가 사람들이 서로를 동등하게 가치있고 중요하다고 보는데서 발견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파트너십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그와 함께 우리는 우리가 사역하고 사랑하고 서로를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로 보는데  필요한 자원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 생각하는 방식의 변혁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안에서 동등하게 삶과 신앙을 나누는 이들로 보기 시작할 때 오만과 편협을 종식된다. 
나아가 빌레몬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개인적 신앙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 신앙을 더 염두에 두고 있다. 빌레몬의 믿음의 즉각적인 겨로가는 코이노니아인데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코이노니아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알다라는 ‘에피그노시스’는 이론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앎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이 경험한 모든 선한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발견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Koinōnia,then, requires a particular understanding of the church’s corporate life. God calls each believer into a congregation and provides each with certain gifts and opportunities to minister to other believers, so that all may be brought to maturity together in Christ Jesus (1 Cor 12; Eph 4:1–16). This sense of partnership marks out a congregation’s koinōniaand is found where persons view one another as equals in worth and importance. It aims at partnership with Christ in God’s salvation, so that with him we are able to find those resources necessary to enable us to minister, to love, to view one another as important and valuable. Christianity is about a transformation of the way we see and think about other people. When we begin to view others as those with whom life and faith are shared equally in Christ, arrogance and bigotry are finished.
  • Further, in referring to Philemon’s faithPaul probably has in mind his public demonstration of Christian faith rather than his personal faith in Jesus Christ. While the immediate result of Philemon’s faith is koinōnia,the ripple effect is extraordinary: out of the experience of koinōniacomes a full understanding of every good thing we have in Christ.Critically, the word translated “understanding” (epignōsis)refers not to theoretical knowledge but to knowledge acquired by experience. Paul is speaking about every good thingPhilemon experiences while in Christ,where God’s grace is found.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6.

7절) 성도들의 마음, 본문에서 마음(hearts)는 ‘스플랑크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심장을 뜻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카르디아’인데 스플랑크논은 장기, 위나 창자를 뜻하는 말로 우리의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 깊은 애정, 친밀감, 연민, 사랑을 의미한다.(몬 7, 20절; 빌 2:1; 골 3:12; 시 7:9) 
  • 시 7:9  Denotes the innermost being of a person, the seat of one’s moral character (26:2; Jer 11:20; 17:10; 20:12). David is characteristically transparent as he asks God to examine him (see 139:23–24).
  •  D. A. Carson, ed.,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985. 

바울의 두번째 간구는 빌레몬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6절과 7절은 그로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한다. 이 사랑은 앞선 코이노니아로 확증된다. 마음은 내장이라는 의미이다.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연민, 사랑을 표현할때 이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눅 10:33이나 눅 15:20을 통해 그 의미를 옅볼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이웃을 보며 느낀 감정, 탕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동정심은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향해 끌려 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을 탕자의 아버지로, 오네시모를 탕자로 비유할 수도 있다. 여기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연민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받는 경험 모두이다. 그의 빌레몬을 향한 간구는 더 큰 사랑의 능력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민은 또한 그가 새롭게 한 성도들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믿음을 나누는 코이노니아의 증표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의 기도는 그의 서신의 본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그것은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문제로 위협받고 있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갈 것인지를 보여준다. 
  • Paul’s second petition is for Philemon’s love.Unfortunately, the NIV omits a connecting “for” (gar)that links verses 6 and 7 together: “… we have in Christ. Foryour love has given me …” The impression left by the NIV is that verses 5 and 7 rather than verses 6 and 7 are bound together as complementary notes of Paul’s thanksgiving for Philemon’s spirituality. Paul’s point, however, is to join verses 6 and 7 by a connecting “for” (gar),integrating them as a single petition (see Harris 1991:253). In this sense, verse 7 complements the central idea of verse 6, koinōnia,and reveals Paul’s incentive for prayer: the essential characteristic of and incentive for koinōniais love. Since Philemon’s capacity to love is confirmed, Paul remains confident that his prayer will be answered by Philemon’s positive response to his request. Yet in another more implicit sense verse 7 extends Paul’s petition for Philemon’s faith to include the prospect of a future demonstration of his previous love.
  • To further develop the connection of loveand koinōnia,Paul introduces another catchword into the petition—hearts (splanchna).Like koinōnia, splanchnais a difficult word to translate. Literally it refers to human entrails. According to Greek psychology, however, one’s splanchnaor “guts” is where the visceral feelings of compassion are produced; compassion is a “gut feeling.” The image created is that compassion is not a detached emotion; rather, it is an experience of lovers who are moved by and toward someone else. For example, Luke uses the verbal form of this same word in two of Jesus’ most beloved parables to illustrate true discipleship: how the good Samaritan is disposed toward the rejected, hurt man (Lk 10:33) and how the father is disposed toward his prodigal son (Lk 15:20). Each had compassion on and was moved toward the needy other. Compassion is not to pity someone but to be drawn toward another in order to love and care for that person. One might draw intriguing parallels between Onesimus and the prodigal son and between Philemon and the son’s father. The restoration of Philemon’s relationship with Onesimus—receiving his troubled slave back into his home (see commentary on verse 17)—requires from him the very same compassion that was required from the father to welcome his prodigal son back home.
  • For Paul, compassion is both the capacity to love and the experience of being loved. His prayer for Philemon is for a greater capacity to love; but such compassion is also the experience of those saintshe has refreshed.In this way, the compassionate heart is the mark of the koinōniaof shared faith. More important, Paul’s prayer introduces in a positive way what the main body of his letter develops: that the compassion and so koinōniaof the congregation are now threatened by the problem between Onesimus and Philemon. Given Paul’s twofold petition, then, the reader realizes that Philemon’s response to Paul’s appeal will largely determine whether the congregation’s witness to the gospel in Colosse will survive.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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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화해와 관계에 대한 서신이다. 오네시모의 이름은 ‘유용한’이라는 의미로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으로부터 무언가를 훔쳐 달아났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울은 빌레몬서를 골로새서와 함께 기록하여 오네시모를 통해서 서신을 전달하도록 하였다.(골 4:9) 바울은 빌레몬에게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안에서 한 가족으로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이전에는 무익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유익한 종이 되었다고 추정합니다. 바울은 또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모든 것을 갚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복음은 피조셰계의 회복을 가져온다. 이 회복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이 세상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악을 도말함으로 인간세상에 현재 가치들을 전복시킨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는 극복되어야 하고 극복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주인이신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이 먼저 몸소 종으로서의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다. 대한민국 사회는 위계질서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힘을 가진 자들이 약한 자들위에 군림하고, 나이가 깡패인 경우들이 많다.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아이들이나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다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도 영적인 위계가 존재하는데 그 가장 중요한 핵심은 모든 만유위에 주님만이 오직 주인이시고 우리 모두가 그분의 발 앞에 있다는 것이다.(골 1:15-20) 다른 어떤 권위나 위계도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는 안된다. 복음은 우리의 본성이 파당을 짓고 위계를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앞에서 동일하게 존중받야할 존재라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받을 존재들이다. 
  • In Colossians, Paul wrote that faith in the Lord Jesus Christ necessarily results in the transformation of human relationships, including those between slave and owner (Col 3:5–17; 3:22–4:1).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gospel yields this fruit because it is the trustworthy medium of God’s salvation-creating grace (Col 1:3–12). God’s grace abolishes evil, so there remains no social hierarchy of human value within the congregation that belongs to Christ. No social or economic class of believers is more important to God and to God’s people than any other (Col 3:11). No believer should exercise power over another for selfish reasons. As disciples of Christ, himself a servant of God, we are servants of all, placing the interests of the other over our own (Mk 10:42–45; Phil 2:1–11).
  • The spiritual hierarchy within the faith community is based on its confession that Jesus Christ alone is Lord over all things (Col 1:15–20); no other hierarchy is tolerated. The fruit of the gospel brings to an end our human tendency to arrange ourselves into classes, with certain people having power over other people. Simply put, Philemon illustrates the great theological truth that all believers have equal worth before God and all have equal access to God’s grace; our relationships with others should embody this truth.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저자, 저작 시기 및 장소
본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이견은 없다. 다만 이것이 본서의 기록안에서 바울이 감옥에 투옥중에 기록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로마 감옥(AD 60-62)인지 에베소의 감옥(AD 52-55)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제
빌레몬의 주제는 복음의 능력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 The theme of Philemon is the power of the gospel to transform lives (“formerly he was useless” but “now he is indeed useful,” v. 11) and to impact human relationships (receive him “no longer as a slave but more than a slave, as a beloved brother,” v. 16).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53.


문학적 특성
바울은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적인 방식을 따라서 본 서를 기록한다. 처음(4-9절)은 청중들과의 라포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것으로 시작해서, 사실에 대한 기록을 나열함으로 지성과 마음에 납득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11-19절) 이제 마지막으로는 청중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20-21절) 
  • Paul’s strategy follows that prescribed by Greek and Roman rhetoricians of the day: begin by building rapport and goodwill with an audience (vv. 4–10), then lay out the facts in a way that will convince the mind or intellect (vv. 11–19), and finally appeal to the emotions of the audience (vv. 20–21).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54.

당시 노예 제도에 대한 이해
당시 로마시대의 도시는 민간인이 1/3, 노예가 2/3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숫자로 보건데 사회를 유지하고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서 이 노예는 매우 필수적인 존재들이었다. 당시 노예들도 다양한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떤 노예들은 상당한 교육을 받고 전문적인 기술을 갖췄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국의 시민 전쟁 이전의 노예들과는 다르게 로마의 노예와 주인은 그 인종과 종교 혹은 교육등에 있어서 구분하기 어려웠다. 법적으로는 노예가 사유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때로 가난해진 자유인들이 생존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노예가 되거나 자녀들을 노예로 파는 경우가 있었다. 
노예들은 모든 로마 시민이 가지는 법적인 권한을 가질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노예들은 착취되거나 푸대접을 받았다. 주인의 성공이 곧 종들의 성공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노예들은 주인의 경제적인 자산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외치는 정도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예 제도는 당시 가진자들이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하는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또한 빌레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후원자 시스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서 추천서, 편지를 씀으로 그가 이전의 존재가 아님을 빌레몬에게 보증해주고 있다. 
북아메리카나 영국에서 시작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근대의 모든 자유 운동은 성경적 가치에 근거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종이나 자유자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영향력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하는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차별없이 모든 이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진리가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가? 주님이 이루신 이러한 하나됨을 제대로 이루어내고 있는가? 아니면 도리어 차별과 나뉨을 공고히 하고 있는가? 
  • To understand Philemon as an illustration of Paul’s central moral claim that faith in Christ abolishes enmity between people (Eph 2:11–22), we must first of all understand something of Paul’s social world.1Letters are not written in a vacuum but are shaped by the conventions and circumstances of the writer’s world. Paul’s letter to Philemon is certainly no exception to this rule of interpretation.
  • The Roman world of Paul’s day was a complex society of classes. The empire’s success and stability depended on maintaining proper relations between these social classes within many rural and urban cultures. The great majority of people belonged to the working class and lived a hand-to-mouth existence.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belonged to the few who owned the farms and ruled the civil bureaucracies and the military. Life was hard and short for those who belonged to the working class. Without a network of influence, most workers were powerless to determine their destiny; upward social mobility was an impossibility for many.
  • One of the most important groups of workers was the slaves, especially within the urban culture. In the cities ruled by Rome nearly one-third of the population was owned, and a second third consisted of former slaves (freedpersons). Everywhere one looked, there were slaves living relatively normal lives. The slave class consisted of a variety of ordinary persons who were conscripted to work a variety of ordinary jobs. Some of these tasks were considered important in maintaining the cultural order, and considerable education and skill were required. Unlike the slaves and slave owners of pre-Civil War America, slave and master in the Roman Empire were often indistinguishable in race or religion, education or work. And even though it was against the law for a slave to own property, the historical record clearly shows that the opposite was more often true: slaves did own property and had money. So free people sometimes took the risk of selling themselves into slavery in order to find important and meaningful work—perhaps as often as impoverished parents sold their children into slavery so that they would survive.
  • Clearly, the treatment and status of slaves varied. The essential negative consequence of belonging to the slave class was that slaves had no legal right to the basic human freedoms granted to every Roman citizen, freeborn and freed. As a result, slaves were more easily exploited and abused. Whatever hope a slave had for a successful future was solely determined by the success of another—the master. A powerful owner determined the destiny of the powerless slave. Even if slave and master were equal educationally and financially, they were never political and social equals. Slaves were typically viewed as economic investments, and the owner had legal right to spend his dividend as he wished.
  • Some philosophers, especially among the Stoics, had taken up the cause of slaves in the Roman world, and by Paul’s day certain reforms had been instituted to protect slaves from inhumane treatment. But no abolition movement existed, not even within the first-century church. The slaves formed a stable class of powerless people who generally served the interests of the powerful.
  • Another element of Paul’s hierarchical and authoritarian world that may be especially important for our reading of Philemon was the patronage system. Similar to the slave-owner relationship, the interdependence of patron and client was useful in binding together higher and lower social classes of the social order. By supplying a letter of recommendation or even money in exchange for the client’s loyalty and public expressions of honor, the patron would provide those on the lower end the opportunity to move up (Martin 1990:22–30). It may well be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Onesimus and Paul was rooted in this social convention. Paul’s letter to Philemon could be viewed as a patron’s favor for his new client, Onesimus, helping to gain him a restored status within Philemon’s household and even in the Christian congregation that met in Philemon’s home.
  • The earliest church was a part of this class-oriented world, and to a significant degree grew up in conflict with it. The memories of Jesus’ ministry to society’s least and last, coupled with Paul’s insistence that in partnership with Christ all social barriers that prevent loving relationships between believers are dismantled, helped to form an alternative community within which slaves no longer were “investments” but rather sisters and brothers, even equal partners in the Christian enterprise.
  • Not surprisingly, the abolitionist movement in both North America and England had Christian roots. Most liberation movements within modern society have roots in biblical Christianity, because it teaches that every person—whether slave or free, black or white, male or female, rich or poor, influential or powerless—has an equal need for and access to God’s saving grace and accepting love. God’s salvation is offered to every person through Christ without prejudice. This spiritual truth is now embodied in the church’s sociology: believers live together in common love and faith without prejudice in witness to God, whose love is poured out on every person equally. Philemon is today’s reminder that relationships that accord with the values of God’s reign represent an alternative to class structures and the enmity they naturally produce between people.
  • 1Notes: Introduction1Bartchy 1992b is the best available general introduction to the institution of Roman slavery. From a more detailed and scholarly perspective, the best of several recent books on ancient slavery—both as a feature of the New Testament’s social world and as a theological motif in Paul’s writings—is Martin 1990.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빌레몬서가 신약 성경에 포함된 것에 대해서 초대교회때부터 논란이 있었다. 이것이 바울의 사적인 편지에 해당하고 이 세상의 매우 사소한 문제를 다루기에 정경에 넣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빌레몬서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하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들을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제자훈련에 바울 서신을 활용하는 것을 통해서 이 책의 신적 영감을 인정했다. 빌레몬서는 이런 첫 독자들에 의해서 보존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독자들도 계속해서 같은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처럼 빌레몬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을 형성하는데 유익한 책이다. 
  • Quite apart from these historical considerations, which are often too speculative to be of much use, the canonicity of Philemon is in fact a theologicalmatter. Philemon continues to have authority in our lives because its content confirms and deepens our understanding of what it means to be God’s people and to do as God’s people ought. The ancient church recognized this book’s divine inspiration through their use of Philemon in nurturing a Pauline (and therefore apostolic) understanding of Christian discipleship. Philemon was preserved by its first readers and eventually included in the New Testament because its readers have continually recognized the same thing: that Philemon is useful for forming a life and faith that is truly Christian.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만약에 지금 21세기 한국적인 상황에서라면 어떤 내용의 빌레몬서가 필요했을까? 당시의 노예 제도라는 문화적인 상황속에서 교회가 복음안에서 하나됨이 필요했다면 지금의 21세기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적인 상황속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내용을 기록할 것인가? 
종합부동산세, 전세, 아파트 가격 담합, 교회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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