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man began to multiply on the face of the land and daughters were born to them, 2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an were attractive. And they took as their wives any they chose. 3 Then the Lord said, z“My Spirit shall not abide in1 man forever, afor he is flesh: his days shall be 120 years.” 4 The Nephilim2 were o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also afterward, when the sons of God came in 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ore children to them. These were the mighty men who were of old, the men of renown.
z 1 Pet. 3:19, 20; [Neh. 9:30; Gal. 5:16, 17]
1 Or My Spirit shall not contend with
a Ps. 78:39
2 Or giant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1–4.
네피림(Nephilim)
1절) 본문에서 사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담’이다. 앞서 5장 1-3절에서도 아담이라는 단어를 일반명사로서의 남자와 여자를 포함한 사람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고유명사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남자인 아담을 나타내기도 한다. 본문 1절에서 사용된 아담도 아담 자신을 포함한 남자와 여자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이다. 앞서 5장에서는 아들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6장에서는 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창세기 6장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노아 홍수의 원인이고(6:1–8), 둘째는 홍수에 앞서 노아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다(6:9–22). 창세기 6:1–8의 내용은 창세기 5장에서 시작된 톨레도트의 결론 부분이다. 창세기 6:1–8과 창세기 5장은 같거나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어의론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1)
한글 성경이 사람으로 번역한 창세기 6:1의 아담은 누구인가? 창세기 6:1의 아담은 최소한 창세기 5:1–3의 아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5:1–3의 아담은 창세기 5:1과 3의 경우처럼 아담 자신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는 일반 명사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6:1의 아담도 아담 자신을 포함한 일반 명사이다.
창 6:1 וַיְֽהִי֨ כִּֽי־הֵחֵ֣ל הָֽאָדָ֔ם לָרֹ֭ב עַל־פְּנֵ֣י הָֽאֲדָמָ֑ה וּבָנ֖וֹת יֻלְּד֥וּ לָהֶֽם
와여히 키–헤헬 하아담 라로브 알–페네 하아다마 우바노트 울레두 라헴
그 이유는 6:1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우바노트 울레두 라헴’(וּבָנ֖וֹת ילֻּדוּ֥ לָהֶֽם)이 란 표현에서 ‘라헴’(לָהֶֽם)의 ‘헴’은 대명사 접미사 3인칭 남성 복수이며 앞에 있는 ‘하아담’(הָאָדָ֔מ)을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5:2의 ‘아담’(אָדָ֔מ)이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인 것처럼 창세기 6:1의 아담도 보편 인간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5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복을 준 것을 언급한 후 5:3에서 아담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6:1은 아담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창세기 5:3 이하에서는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아들들과 딸들의 출생을 언급하면서 아들들에 포커스를 맞추는 반면에 창세기 6:1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딸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2)
1) Kenneth A. Mathews, Genesis, 321. Willem A. VanGemeren, “The Sons of God in Genesis 6:1–4,”
2) Claus Westermann, Genesis 1–11, 369–370. “It describes mostly an action that takes its beginning in an event or process that is continuously and constantly going on.”Gordon Wenham, Genesis 1–15, 139. Victor P. Hamilton, Genesis Chapters 1–17, 262. 43–2 (1981): 325–327.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08–209.
본문의 번성하다라는 표현은 앞서 창 1:28의 문화명령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당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번성해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죄악도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베네 엘로힘’으로 표현된 '엘로힘의 아들들’은 본문의 엘로힘을 장엄의 복수로 볼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진다.
- 유대인들의 외경 에녹 1서 6:1-2의 내용을 보면 창세기 6장 1-2절의 내용을 타락한 천사들로 보고 있다.
61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children of men had multiplied that in those days were born unto them beautiful and comely daughters. 2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the heaven, saw and lusted after them, and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us wives from among the children of men and beget us children.’
Robert Henry Charles, ed., Pseudepigrapha of the Old Testament, vol. 2 (Oxford: Clarendon Press, 1913), 191.
일반적으로 두번째 견해를 따르지만 앞서 창 3:5에서 엘로힘이 천사들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창 3장 15절의 뱀이 타락한 천사라면 이 뱀의 후손을 엘로힘의 후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본문의 2절과 3장 6절은 타락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saw … attractive(good) … took)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된 것들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역과 불순종으로 사용되면 결국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 하와가 보기에 좋았던 것이 하나님께 악했던 것처럼, 엘로힘의 아들들이 자기 눈에 보기에 좋았던 것들이(2절)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악했다.(5절) 에덴 사건 이후의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들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다.
- 첫째 주장: 엘로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
첫째 주장은 엘로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인간의 딸이며, 천사와 인간의 딸이 결혼하여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이다.5) 이 주장은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대인들의 외경 에녹 1서 6–11에 나올 뿐만 아니라 초대 교부들 중에서도 찾을 수 있다.6) 이 주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욥기 1:6과 38: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엘로힘의 아들들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사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다.7)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 38:7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욥기 1:6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번역하고 있다.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이 표현을 천사들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욥기 38:7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의 일을 두고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기뻐하며 노래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엘로힘의 아들들은 인간이 아니라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다른 근거는 유다서 1:6–7이 이 사건을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이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간 부패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마치 천사들과 인간의 성적인 관계를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천사와 인간의 결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문자적인 해석이고, 창세기 6:2에서 둘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서로 대조를 이루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신화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8) 고대 근동의 창조와 홍수 기사들은 신들간의 전쟁을 비롯한 신화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반면에 구약 성경의 창조 및 홍수 기사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였고, 하나님이 홍수를 보냈다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신들의 개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구약 성경이 창세기 6:1에서 홍수로 인한 인류 멸망을 이유로 신화적인 내용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심지어 아트라하시스와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고대 근동의 홍수 설화에서 홍수의 원인은 신적인 존재들과 인간의 성적인 타락이 아니다. 고대 근동의 전통에서 홍수의 원인은 항상 인간이 너무 시끄럽게 함으로 신들을 괴롭게 하였다는 것이다.9)
둘째, 엘로힘의 아들들(베네 엘로힘, בְנֵי־הָוֹאֱלֹהִים)이 천사들이라면 천사들의 죄악 때문에 왜 대홍수라는 끔찍한 징벌을 사람이 받아야 하는가? 창세기 6–8장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홍수의 책임이 천사들에게 있다는 말이 없다. 혹시 천사의 유혹을 사람들이 뿌리치지 못하고 응했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여자들인데 왜 남자들도 함께 책임을 지고 멸망 당해야 하는가? 여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당시 남성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 신약의 지지가 의문스럽다. 유다서 6–7절의 그 이웃 도시들도 천사들에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려고 시도했는가?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천사의 정체를 알고 성범죄를 범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단지 너무 잘생겨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천사인지 사람인지 구분 못하고 덤벼 들었나? 그리고 유다서 6절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려고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저버린 사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것은 에덴 사건과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7절의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에서 저희는 지시 대명사 ‘투토이스’(τούτοις)이며 “이들과 같은 모양으로”로 번역해야 적절하며, ‘이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유다서 1:4에서 거론된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10)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넷째, 마태복음 22:23–33에서 사두개인들이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한 사건을 두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천국에서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천사들처럼 산다고 했다. 이 말은 천사들처럼 결혼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의 성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창세기 6:2–4의 천사들과 인간의 결혼 가능성을 근원부터 흔들어 버린다.
다섯째,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보는 견해이다. 요세푸스와 필로가 이 견해를 가졌으며, 그 외에도 에녹 1서와 쥬빌리 그리고 바룩 2서에서도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여긴다.11) 둘째 전통은 정통 랍비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지 않고 지배자나 권력자들의 아들들로 생각했다. 탈굼이나 랍비 시대의 문헌들은 엘로힘의 아들들을 왕족으로 생각했다. 탈굼 온켈로스와 탈굼 슈도 조나단은 창세기 6:2과 6:4의 엘로힘의 아들들을 이렇게 생각했으며, 미드라쉬 랍바와 탈굼 네오피티는 사사들의 아들들이라고 했다. 심마쿠스도 창세기 6:2를 지배자들의 아들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필로는 엘로힘의 아들들을 천사로 여기면서도 다른 책에서는 이들을 훌륭하고 탁월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Q. Gen. 1.92).
둘째 주장: 엘로힘의 아들—셋의 경건한 후손들
둘째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경건한 후손들로, 그리고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의 딸로 생각하며, 이들의 결혼은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이기 때문에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줄리어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가 제창하여 A.D. 2–3세기 이후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해 자리잡게 되었으며,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을 거쳐 현재까지 지배적인 주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2) 이 주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경건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착안하였다. 예를 들면, 시편 2:7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메시아 왕을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한다.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표현한다. 신명기 14:1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라고 한다. 그리고 호세아 11:1과 이사야 43:6도 마찬가지이다.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사 43: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호세아 11:1에서는 출애굽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을 내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고, 이사야 43:6에서는 종말론적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베풀 것을 약속하며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주장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여기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을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이를 노아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도 적용 가능한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둘째,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 10명은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이었다. 이들의 가정 생활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아담과 노아 그리고 노아의 아들들은 모두 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한 소위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5–6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들 중에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창세기 6:1에서 “딸들이 사람에게 났다”는 말이나 6:2의 “사람의 딸들”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창세기 6:2의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딸들로 규정하고 한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셋째 주장: 엘로힘의 아들들—지배자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신의 아들이란 호칭은 권력과 힘을 가진 왕들이나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붙여졌다.13) 출애굽기 21:6; 22:8–9, 28; 시편 82:6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5장에 왕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클라인(M. Kline)이 제시하는 것처럼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후손들은 일종의 권력자였을 가능성이 있다.14) 가인과 라멕이 휘두른 폭력과 라멕이 복수의 아내를 취한 것과 그의 후손들이 금속과 악기와 목축을 하게 되는 것이 당대의 권력자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리고 창세기 4:17에서 가인이 성을 건축한 것은 가인의 의도와 목적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가인이 건축한 것은 전원 주택 한 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벽을 갖춘 작은 도시를 건축하였고, 그 도시의 이름에 자식의 이름을 붙였다. 가인이 그 도시의 소유자라는 말이고, 이는 가인을 일종의 왕이나 작은 영토의 지배자로 볼 수 있게 한다. 권력자들이 사람의 딸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딸들을 취하는 장면은 창세기 12:10–20; 20:1–11; 26:6–11에서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이 발단이긴 하였지만, 공교롭게도 이집트 왕이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하여 갔다. 엘로힘의 아들들은 가인의 후손들로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딸들을 마음대로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을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전통적인 견해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창세기 6:2의 엘로힘의 아들들을 문자적 해석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창세기 1–6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문의 배경을 고려할 때 엘로힘의 아들들은 뱀의 후손 또는 가인의 후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아담과 셋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5) 엘로힘의 아들들의 정체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창세기 6:2–4만 제한적으로 읽고 이해해서는 안되고 창세기 1–6장과 노아 홍수와 관련된 다른 성경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선 창세기 6:1–8의 구조부터 살펴보자. 창세기 6:1–8은 다음과 같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A. 아담 후손, 번성 6:1
B. 엘로힘의 아들들의 범죄 6:2
C. 여호와의 심판, 독백 6:3
B’. 엘로힘의 아들들의 범죄 6:4
C′. 여호와의 심판, 독백 6:5–7
A′. 아담 후손, 노아의 의 6:8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B와 B’은 범죄 사실을 기록하고 C와 C’는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결심을 기록하여 대구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B와 B’는 범죄 행위자를 엘로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한 반면에 C와 C’는 심판 대상을 각각 사람으로 표현한다. C와 C’의 여호와의 독백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을 여호와로만 표현하고 엘로힘이란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B와 B’의 범죄 행위자와 C와 C’의 심판 대상의 관계는 무엇일까? 동일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동일한 대상이 아니라면 6:2에서 사람의 딸들을 빼앗은 자들은 엘로힘의 아들들인데 이들 때문에 사람이 비난 받고 심판 받을 이유가 없다.
창세기 6:2과 4의 ‘엘로힘의 아들들’에서 엘로힘의 의미는 ‘엘로힘의 아들들’의 정체를 확인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엘’(אֵל)또는 ‘엘로아흐’(אֱלוֹהַּ)의 복수로서 신들 또는 천사들을 의미하지만, 장엄복수로 사용되었을 경우 하나님으로 해석된다. 창세기 6:2과 4절에서는 구문 자체의 모호함 때문에 단순 복수인지 장엄 복수인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16) 그러므로 엘로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엘로힘을 창세기 1–6장의 배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 1–6장에서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표현하는 장엄복수이지만, 천사들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바로 사탄이 하와에게 했던 창세기 3:5에서 천사들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כִּי יֹדֵ֣עַ אֱלֹהִ֔ים כִּ֗י בְּיוֹם֙ אֲכָלְכֶ֣ם מִמֶּ֔נּוּ וְנִפְקְח֖וּ עֵֽינֵיכֶ֑ם וִהְיִיתֶם֙ כֵּ֖אלֹהִ֔ים יֹדְעֵ֖י ט֥וֹב וָרָֽע׃
키 요데아 엘로힘 키 베욤 아칼켐 밈멘누 베니프케후 에이네이켐 비이템 케로힘 요드에이 토브 와 라아
창세기 3:5의 주석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첫 번째 ‘엘로힘’(אֱלֹהִ֔ים)은 동사 ‘요데아’(יֹדֵ֣עַ)가 단수이기 때문에 장엄복수로서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두 번째 엘로힘은 동사 ‘요데에’(יֹדְעֵ֖י)가 복수이기 때문에 장엄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 복수의 신들 또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에스겔 28:16은 이 천사들 중에 교만하여 타락한 천사인 사탄이 포함되어 있고, 창세기 3:15의 뱀이 바로 이 타락한 천사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창세기 3:15의 뱀의 후손을 엘로힘의 후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6:2과 6:4의 베네 엘로힘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창세기 3장의 엘로힘의 후손 또는 뱀의 후손에 대한 표현으로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둘 중의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엘로힘의 아들들의 행동을 살펴봐야 한다.
창세기 6:5의 엘로힘의 아들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이들의 행동이 창세기 3:6에서 타락한 천사의 유혹에 이끌려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창 3:6 וַתֵּרֶא הָאִשָּׁה כִּי טוֹב הָעֵץ 와테레 하이사 키 토브 하에츠
창 6:2 וַיִּרְאוּ בְנֵי־הָאֱלֹהִים אֶת־בְּנוֹת הָאָדָם כִּי טֹבֹת הֵנָּה 와일우 베네–하엘로힘 에–베노트 하아담 키 토보트 헤나
창 6:5 וַיַּרְא יְהוָה כִּי רַבָּה רָעַת הָאָדָם 와얄 야웨 키 랍바 라아트 하아담
창세기 3:6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며 했던 표현(וַתֵּרֶא … כִּי טוֹב הָעֵץ)과 동일하게 6:2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보기에 좋았더라’고(וַיִּרְאוּ … כִּי טֹבֹת הֵנָּה)한다. 하와가 보기에 좋았던 것이(טוֹב), 하나님께는 악(רָעַת)했던 것처럼, 엘로힘의 아들들이 자기 눈에 보기에 좋았던(טוֹב, 창 6:2) 것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악했다(רָעַת, 창 6:5). 에덴 사건 이후의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들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다. 창세기 6:2–4에서 엘로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을 임의로 빼앗아 여러 명의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1–6장에서 가인의 후손 라멕에게서만 볼 수 있다.17)
신약 성경의 유다서와 베드로전서 2:5는 창세기 6:1–4의 엘로힘의 아들들의 행위가 가인의 삶의 길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우선 유다서를 살펴보자.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서 1:19는 당시의 이단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분명히 노아 홍수 때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고 있다. 유다서 1:19은 창세기 6:3과 아주 흡사하다.
유 1:19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리고 유다서 1:15에서 “뭇사람을 심판하사”는 노아 홍수 심판를 가리키며, 그들의 죄목과 유사한 표현을 베드로전서 2:5의 노아와 관련된 말에서 볼 수 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을 받을 사람들에 대해 유다서 15(ἀσεβεῖς)와 베드로전서 2:5(ἀσεβῶν)은 공통적으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들이 동일한 행위를 한 자들이며, 이런 자들이 최소한 에녹 시대 때부터 노아 시대 때까지 존재하다가 노아 홍수를 통해 심판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유다서에서 에녹이 예언한 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베드로전서 2:5의 노아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과 동일하며 이들은 모두 창세기 6:1–4에 있는 엘로힘의 아들들이다. 그렇다면 유다서에서 말하는 “모든 경건치 않은 일”은 6:2의 “자기의 보기에 좋은 모든 자들”을 아내로 삼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강팍한 말”은 무엇일까? 혹시 자칭 ‘엘로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이들의 정체에 대해 유다서 1:11은 결정적인 말을 하고 있다.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그의 시대의 이단들을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라고 말한다. 유다가 이들을 에녹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과 비교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인의 길에 행한 자는 유다서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에녹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도 포함된다. 즉 유다서 1:11은 에녹과 노아 시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들이었고 뱀의 후손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5)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이쉬타 여신은 길가메쉬에게 청혼하지만 길가메쉬는 이를 거절한다. ANET 83–84. F. B. Huey, Jr. and John H. Walton, “Are the Sons of God in Genesis 6 Angels?,” The Genesis Debate, 184–209.
6) 에녹 1서 6:1–2 In those days, when the children of man had multiplied, it happened that there were born unto them handsome and beautiful daughters. And the angels, the children of heaven, saw them and desired them;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choose wives for ourselves from among the daughters of man and beget us children.” Irenaeus, Against Heresies 4.36.4. Augustine, City of God 15.23.
7) Cassuto, Genesis I, 292. Sarna, Genesis, 45.
8) 창세기 6:1–4을 고대 근동의 신화로 여기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Hermann Gunkel, Genesis, 56–57. David J. A. Clines, “The Significance of the Sons of God Episode (Genesis 6:1–4) in the Context of the Primeval History (Genesis 1–11),” JSOT 13 (1979): 33–46. David L. Petersen, “Genesis 6:1–4, YAHWEH and the Organization of the Cosmos,” JSOT 13 (1979): 47–64. Ronald S. Hendel, “Of Demigods and the Deluge: Toward an Interpretation of Genesis 6:1–4,” JBL 106–1 (1987): 13–26. Helge S. Kvanvig, “Gen 6,1–4 as an Antediluvian Event,” Scandinavian Journal of the Old Testament 16–1 (2002): 79–112.
9)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Creation, the Flood, Gilgamesh, and Oth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20.
10) 유다서 8절에서도 4절의 ‘가만히 들어온 자들’ 을 지시대명사 후토이(οὗτοι)를 사용하여 지시하 고 있다.
11) Josephus, Ant. 1:73; Philo, On the Giants 6; Q. Gen. 1:92; CD 2:18; 1 Enoch 6:2, 6; 106. 13–14; Jubilees 5:1; 10:1–6; 2 Baruch 56:12–15.
12) John H. Walton, Genesis, 291. Calvin, Genesis, 238. “It was, therefore, base ingratitude in the posterity of Seth, to mingle themselves with the children of Cain, and with other profane races; because they voluntarily deprived themselves of the inestimable grace of God.”
13) Stephen Hre Kio, “Revisiting the Sons of God in Genesis 6.1–4,” The Bible Translator 52–2 (2001): 234–239.
14)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1993), 112–114.
15) Meredith G. Kline, “Divine Kingship and Genesis 6:1–4,”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4–2 (1962): 187–204.
16)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철저한 직역을 선호한 Aquila는 ‘베네 엘로힘’(בני אלהים)을 ‘호이 휘오이 톤 데온’(οἱ υἱοὶ τῶν θεῶν)으로 번역하여, 엘로힘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들로 보 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헬라어 역본들은 엘로힘을 단수로 보았다. P. S. Alexander, “The Targumim and Early Exegesis of Sons of God in Genesis 6,” Journal of Jewish Studies 23–1 (1972): 60–71. Meredith Kline은 ‘베네 엘로힘’ 을 “sons of gods” 로 여긴다.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1993), 111–117.
17) Keil and Delitzsch, First Book of Moses, 13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11–221.
3절) 앞서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여인들을 취함으로 죄를 짓고 있는 이들에대한 하나님의 후회가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왜먀하면 그들이 육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본문에서 함께 하다라고 번역된 ‘야돈’이라는 단어는 ‘재판하다, 논쟁하다’(contend with)라는 의미와 ‘머무르다, 함께하다’(abide in)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ESV와 NIV는 이를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앞선 재판하다라는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의 신이 더이상 인간을 법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배려하여 가인을 죽인 자에게는 7배의 벌을 받게 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배려가 더이상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인 함께 하다라는 의미라면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더이상 인간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후에 그들은 육체다라는 표현은 그들이 타락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될 인간 육체의 나약함을 표현한 것이다. 엘로힘의 아들들처럼 사람도 차락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더이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창 6:3,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3,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Gn 6:3, NIV11) 『Then the LORD said, “My Spirit will not contend with* humans forever, for they are mortal**; their days wi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 *Or My spirit will not remain in / **Or corrupt』
- NIV성경은 ‘야돈’(יָד֨וֹן)의 원형을 ‘딘’(דִין, 재판하다)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NRS는 70인역처럼 ‘둔’(דוּן, 머무르다)을 원형으로 간주하고 번역 하였다.18) 둘 중에 어느 것이 정확한 의미인지 확증하기 어렵다. ‘딘’(דין)이 동사의 원형이라면, 그 의미는 하나님의 신이 더 이상 인간을 법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배려하여 가인을 죽인 자에게는 7배의 벌을 받게 된다고 하며 보복 금지 같은 하나님의 배려가 더 이상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둔’(דוּן)이 원형이라면,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에서 인간을 생령이 되게 하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핵심 요인이었던 하나님의 성령이 더 이상 인간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19) 창세기 1–6장의 배경에서 둘 다 가능한 해석이다. 하지만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의 영이 다시 물로 뒤 덮인 지구 위에 강림하는 것으로 보아 70인역 번역 전통을 따라 ‘머무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18)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33.
19) Sarna, Genesis, 46. 사르나는 나의 신을 창세기 2:7의 생령으로 생각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22–223.
하나님께서 그들의 날을 120년이 되게 하셨다. 이는 이제 인간의 수명을 120살이 되게 하셨다라는 의미와 동시에 본문의 120년을 앞으로 노아 홍수의 심판까지의 남은 시간으로 보기도 한다.
- 120년의 의미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이를 인간의 수명으로 여긴다. 창세기 5장에는 사람들이 평균 900살을 살며 장수한다. 그러나 마음에 항상 악한 일만 생각하는 인간의 수명을 하나님께서 치명적으로 단축시켰다고 이 견해는 주장한다. 이 견해의 약점은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이 수백 년씩 장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12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평균 900년을 살던 인간이 노아 홍수 이후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 들게 되었기 때문에 이 표현이 인간 수명과 관련 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두 번째 견해는 120년을 노아 홍수 심판까지 남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견해의 약점은 창세기 5:31에서 노아의 나이가 500살이었음을 밝힌 후 6:1–4의 메시지가 나왔기 때문에 노아의 나이 500+120은 620년이 되는데 반해 노아 홍수는 노아 나이 600살에 발생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6:1–4의 메시지가 반드시 노아 나이 500살에 주어졌다고 볼 필요는 없다. 창세기 6:5–7은 둘째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6:5–7은 6:3의 내용과 대비된다. 6:3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이 더 이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과 그들의 죄악에 대해 부정적이다. 6:5–7도 역시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창조한 것 자체를 후회한다. 6:3에서 인간의 날을 120년이라고 했는데, 6:7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땅에서 제거하되 짐승과 기는 것과 새들까지 모두 제거하겠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6:3의 120년은 홍수 때까지 남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24–225.
4절)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네피림은 엘로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존재들이다.
네피림,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구약에서 민 13:33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거인족을 가리킨다. 이 둘이 같은 대상이라면 이들은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며 민수기의 기록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이 네피림들을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면서,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였다. 히브리어에서 ‘네필림’은 ‘넘어진 사람들, 타락한 자들'을 의미하는데 70인 역에서 이를 헬라어로 ‘기간테스’(거인들)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민 13:33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70인역이 오역이라면 네피림을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거인으로 이해하는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네피림은 전쟁에 능한 용사들, 이땅에 포악함이 가득하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볼 수 있다.
- Nephilim. The meaning of this term is uncertain. It occurs elsewhere in the OT only in Num. 13:33, where it denotes a group living in Canaan. If both passages refer to the same people, then the Israelite spies (Num. 13:33) are expressing their fears of the Canaanites by likening them to the ancient men of renown. Although in Hebrew Nepilim means “fallen ones,” the earliest Greek translators rendered it gigantes, “giants.” This idea may have been mistakenly deduced from Num. 13:33; one must be cautious about reading it back into the present passage. The Nephilim were mighty men or warriors and, as such, may well have contributed to the violence that filled the earth (see Gen. 6: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1.
- A final subject for investigation is the identity and fate of the enigmatic Nephilim (Gen 6:4; Num 13:33). The term itself almost certainly means “fallen ones,” whether morally fallen in the general sense or fallen from (i.e., cast out of) heaven in a more specific sense. It has been plausibly proposed that the Nephilim were princes born into the royal houses of the “sons of God” (Gen 6:4) and that they were “the mighty tyrants who … esteemed their might to be their right” (Kline, 196). Certain Jewish exegetes have ingeniously assumed that the later Nephilim strain of Num 13:33 was preserved through the Flood in the persons of Noah’s daughters-in-law (cf. Kline, 197, n. 30). Others, positing a local or regional flood, have suggested that the Nephilim survived through migration (Van Broekhoven, 519).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678.
- 네피림은 일반적으로 동사 ‘나팔’(נפל)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떨어지다,’ ‘넘어지다’ 또는 ‘숙이다’이다. 이에 근거하여 타락한 자들, 즉 하늘에서 추방되어 땅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전통이 있었다.29)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후대의 신학적인 해석이지 창세기 자체에는 아주 생소한 내용이다. 창세기 6장 이전 배경에서 ‘나팔’(נפל)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창세기 4장의 가인 사건이다. 창세기 4:6에 의하면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을 때, 그는 얼굴을 떨어뜨렸다(나팔, נפל).30) 창세기 4:6–7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있는(나팔, נפל)모습을 지적하면서, 그가 선을 행하면 그의 얼굴을 들 수 있다(나사, נשׁא)고 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나팔’(נפל)과 반대되는 표현 ‘나사’(נשׁא)를 사용하여 가인의 선을 행하지 않음을, 또는 그의 악을 지적하였다. 가인은 하나님이 그와 그의 제물을 죄 때문에 받아 주지 않음으로 얼굴을 떨어뜨린 일종의 네피림이었다.
엘로힘의 아들들과 네피림은 냉소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31) 예를 들면, 함의 후손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 기이한 사냥꾼이라고 불렸고, 당대의 용사라고 불렸다.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무엘을 찾은 사울이 예언한 것을 두고 “사울도 선지자에 속하느냐”는 속담이 된 것처럼 이 표현도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29) Sarna, Genesis, 46.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36.
30) Victor P. Hamilton,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70. 해밀턴은 네피림을 능동 분사 ‘노페림’(נֹפֵלִים, the falling ones)으로 스스로 떨어뜨리는 자나 자연스럽게 떨어져서 죽은 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31)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S. Hamilton, MA: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1993), 116.32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3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28–229.
앞서 가인의 계보와 아담(셋)의 계보를 보았다. 이렇게 땅위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에덴을 확장했어야했지만 도리어 이 사람들의 많아짐은 죄악의 번성함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자(셋)의 후손으로 보던, 가인의 후손이나 지배자, 타락한 천사들로 보던 간에 이들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육신이 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또한 이들의 자손들이 네피림인데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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