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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fore, my brothers,1whom I love and jlong for, kmy joy and lcrown, mstand firm thus in the Lord, my beloved. 
I entreat Euodia and I entreat Syntyche to nagree in the Lord. Yes, I ask you also, true companion,2help these women, who have labored3side by side with me in the gospel together with Clement and the rest of my fellow workers, owhose names are in the book of life. 
p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reasonableness4be known to everyone. qThe Lord is at hand; r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s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t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And uthe peace of God, v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whatever is jus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commendable, if there is any excellence, if there is anything worthy of praise, think about these things. What you have learned5and wreceived and heard and seen xin me—practice these things, and y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1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8, 21
jSee ch. 1:8
kch. 1:4; 2:16; See 2 Cor. 1:14
lProv. 16:31; 17:6
mch. 1:27
nch. 2:2
2Or loyal Syzygus; Greek true yokefellow
3Or strived(see 1:27)
oSee Luke 10:20
pch. 3:1
4Or gentleness
qSee James 5:8
rSee Matt. 6:25
s[Prov. 16:3]
tSee Rom. 1:8
u[ver. 9; Isa. 26:3; Col. 3:15]; See John 14:27
v[Eph. 3:19]
5Or these things9which things you have also learned
w1 Thess. 4:1
x[ch. 3:17]
y[ver. 7]; See Rom. 15:3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4:1–9.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따라서 주안에 견고히 서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빌립보 성도들이 그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칭찬의 표현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주안에서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올림픽 경기에서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의미하는데 최후의 심판때에 하나님께서 경주를 마친 이들에게 상을 주실 것을 바라면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3:13-14)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면류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이러한 수고로 영적인 보상, 면류관을 받을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교회 자체가 면류관이요 보상이었다. 

우리의 본문 빌립보서 4:1과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상의 이해를 더욱 뒷받침 해줍니다. 바울은 최후의 심판 때 그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그러한 훌륭한 교회들을 건설하였다 하여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그러한 훌륭한 교회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교회들이 건설되었음이 드러나는 것을 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훌륭한 교회들은 바울로 하여금 최후의 심판 때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을 얻게 할 근거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바울의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최후의 심판 때 면류관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시상대에 불려 올라갈 때 그들이 자신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말미암아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집의 일부로 찬란히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저 만족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구원에서 “은혜로만(믿음으로만)”(sola gratia/sola fide)의 원칙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자는 주(만)을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렘 9:22–23, cf. 롬 5:11, 갈 6:14, 빌 3:3)고 하며 일체의 인간적 자랑을 배격했던 바울의 사상에 더 잘 조화됩니다. 하여간, 복음을 무료로 선포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상”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9:18과,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에 널리 유포된 ‘상급 신학’을 경계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종말에 완성될 구원에 덧붙여 주어질 하늘의 “상급”을 강조함으로써 은혜의 복음을 공로 신학으로 왜곡하지 않는가 살펴야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0–161.

주안에 굳게 서라는 권면은 1:27절의 반복인데 1:27-30과 3:2-4:3은 매우 밀접한 병행을,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한다. 그리고 순두게를 권한다.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여인은 빌립보 교회안에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여자들로 보인다. 앞서 1:27; 2:2에 말한 것처럼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안에 의견이 갈라지고 분쟁이 생기는 이유는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성령께서 한 마음을 갖게 하시는데 어떤 이유로 각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력히 주장할때 서로를 품고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판할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주안에 있는 것이다. 

3절) 나는 또한 당신, 나와 멍에를 같이 맨 당신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두 여자들을 도우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외의 나의 사역자들과 함께 나의 곁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애쓴 사람들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명의 한 사람, 멍에를 같이한 동료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울 것을 요청합니다. 이 무명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성도들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개역 개정의 번역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 자는 본문의 멍에를 같이 한 자라는 ‘시지고스’가 고유명사로 이름일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

(빌 4:3, 개정)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새번역)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힘쓰다라는 표현 ‘시나트레오’는 1:27절의 표현의 반복으로 운동경기에서 한팀이 되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4-9절) 바울은 지금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분쟁으로 기쁨을 잃고 근심에 빠져있는 교회를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서 기쁨을, 평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4-9절의 격려를 쓰고 있다. 4-7절에서는 근심을 없애 평강을 얻는 비결을, 8-9절은 분쟁을 없애 평강을 얻는 비결을 가르치고 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은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의존하는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의 깊은 만족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래서 이는 고난의 순간에도 언제나 유효하다. 
Rejoice. The joy that Paul calls for is not a happiness that depends on circumstances but a deep contentment that is in the Lord, based on trust in the sovereign, living God, and that therefore is available always, even in difficult tim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독자들이 얼마나 힘이 빠져 있었으면 바울이 “기뻐하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하겠습니까? 그리고 바울 자신이 지금 이런 권면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까? 그는 지금 어쩌면 사형 언도로 끝날지도 모를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운명과 교회들의 앞날에 대해서 근심하는 사람 아닙니까? 특히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의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으며 내분에까지 휩쓸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이 정황을 생각하면 여기 되풀이 하여 “기뻐하라”고 하는 권면은 바울이 독자들에게만 주는 권면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주는 권면인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나오는 모든 권면들도 바울이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9절이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신앙은 이성과 반비례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이성과 대항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라고 외치는 별도의 요소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 이하에서 바울은 믿음의 의미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100세가 된 사라의 태가 다 죽은 것을 알았다(이성의 상황 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하여 신앙에 있는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쓰는 바울이나 그 편지를 받은 빌립보의 성도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기뻐할 근거가 없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과 독자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꺾고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서서 그의 권능과 사랑을 덕 입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외적의 핍박과 경제적 가난과 내분을 일으키며 압박해 와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단을 근본적으로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로서 역사를 주관하시므로, 모든 것이 결국 그의 선한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6–167.

4-7절) 본문에서 바울은 4개의 명령을 하고 있다.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속의 염려를 거둬가는 해독제이다. 
본문 7절에서 지키다라는 표현은 군사 용어로 간수가 옥중의 죄수를 감독하듯이, 로마 군대가 성을 방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6절에 네 개의 명령어들이 나옵니다. 첫째, “기뻐하라”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셋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넷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7절). 바울은 그런데 이 네 개의 명령어들 중간에 하나의 신앙 고백을 끼어 넣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5절). 가운데 낀 이 신앙고백은 독자들이 전후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기에, 그 주에 힘입어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신앙고백은 시간적인 뜻과 공간적인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주께서 곧 재림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고난들을 참고 기뻐하며, 곧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않고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에게도 관용하고, 세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도에 전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공간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높고 먼 하늘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계시며 이 고난의 세상에 나를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성령)으로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아니 내 안에 내주하셔서 나를 돕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까이 계시는 주의 권능과 사랑에 힘입어서 고난 속에서도 염려를 극복하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7–168.

7절에서 바울은 독자들이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확신 가운데, 그 주에 힘입어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을 관용하고, 염려를 떨쳐 버리고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키다”(phrouresei)는 동사는 군사 용어로서 마치 로마 군대가 빌립보를 감싸고 트라케의 야만인들로부터 방위하듯이,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을 옹위하여 외적으로부터 방위하듯이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의 로마의 군사도시로서의 역사적 그리고 지리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이 편지에서 군사적, 정치적 그림언어들을 많이 썼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여기 “지키다”도 그런 언어입니다. 여기 “마음과 생각”이란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의 샘터인 심장과 그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뜻합니다. 외적의 핍박이나 교회 내 형제의 험담이 우리의 심장에 자극을 주어 염려와 분노와 원한의 생각들을 낳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적 평강을 잃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바울이 권면하는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감정과 생각의 샘터인 심장을 강력히 옹위하여 그런 외부의 자극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평강을 깨는 생각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얼마나 오묘한가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것을 “우리의 모든 지각을 뛰어 넘는 것”, 곧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랍고도 신비스럽고 효력 있는 것이라고 수식하고 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0–171.

As with joy, peace for Paul is a fruit of the Spirit (Gal 5:22). It is especially associated with God and his relationship to his people. Here it is called “the peace of God”53because God is “the God of peace” (v. 9), the God who dwells in total shalom(wholeness, well-being) and who gives such shalomto his people. And it is the “peace of God” that “transcends54all understanding.”55This could mean “beyond all human comprehension,” which in one sense is certainly true. More likely Paul intends that God’s peace “totally transcends the merely human, unbelieving mind,” which is full of anxiety because it cannot think higher than itself.56Because the God to whom we pray and offer thanksgiving, whose ways are higher than ours, is also totally trustworthy, our prayer is accompanied by his peace. And that, not because he answers according to our wishes,57but because his peace totally transcends our merely human way of perceiving the world. Peace comes because prayer is an expression of trust, and God’s people do not need to have it all figured out in order to trust him!
Such peace will therefore “guard”58their “hearts and thoughts.” In the Hebrew view the heart is the center of one’s being, out of which flows all of life (e.g., Mark 7:21). God’s peace will do what instruction in “wisdom” urged the young to do: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Prov 4:23). In the present context “God’s peace” will be his “garrison” around their “hearts” so that they do not fall into “anxiety.” It will also guard their “thoughts.”59Since God’s peace surpasses merely human understanding in any case, it will protect the mind from those very thoughts that lead to fear and distress and that keep one from trusting prayer.
53Only here in Paul; but peace is regularly noted as coming from God (most Pauline salutations), which is what this genitive intends. Cf. “peace of Christ” in Col 3:15.
54Gk. ὑπερέχουσα; for this word see on 3:8 above (n. 19).
55Gk. πάντα νοῦν, the word for “mind,” which here takes on the associated sense of “understanding.”
56Cf. Lightfoot, Meyer, Vincent, Jones, Plummer, Müller, Collange, Martin, Hawthorne, Silva; contraCalvin, Alford, Kennedy, Hendriksen, Kent, O’Brien, many of whom base their view on the alleged parallel with Eph 3:19 (the parallel seems to exist far more in our minds than in the actual language of Paul; cf. Schenk). Michael and Beare are ambivalent.
57Cf. several (Meyer, Plummer, O’Brien) who note that God’s peace is not contingent on “answered prayer,” but on his character.
58Gk. φρουρήσει, used literally by Paul of the ethnarch Aretas in 2 Cor 11:32, who set a guard at the city gates, and figuratively of the Law in Gal 3:23, in the sense of “keep in custody” until “faith” should come. This is a military metaphor, where a garrison, such as the one always stationed in Philippi, “guards the Roman pax.”
59Gk. τὰ νοήματα, found only in Paul in the NT and elsewhere only in pejorative contexts (2 Cor 2:11; 3:14; 4:4; 10:5; 11:3). As over against the “mind” (νοῦς, found in the preceding phrase, “which exceeds every mind”), this word, as with most nouns ending in -μα, denotes the concrete expression or activity of the mind, hence “your thoughts.” Cf. J. Behm, TDNT, 4.960–61.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0–411.

In a post-Christian, post-modern world, which has generally lost its bearings because it has generally abandoned its God, such spirituality is very often the key to effective evangelism. In a world where fear is a much greater reality than joy, our privilege is to live out the gospel of true shalom, wholeness in every sense of that word, and to point others to its source. We can do that because “the Lord is near” in this first sense, by the Spirit who turns our present circumstances into joy and peace, and who prompts our prayer and thanksgiving. And we should be at that task with greater concern than many of us are, because “the Lord is near” in the eschatological sense as well.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2–413.

8-9절)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겅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상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무슨 미덕, 탁월함이 있으면 그리고 무슨 찬양할 만한 것이 있으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행하라.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빌 4:8, 새번역) 『마지막으로, ④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 ④그, '형제들이여'』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무슨 덕목이 있으면 그리고 무슨 찬양할 만 한 것이 있으면, 그런 것들을 생각하시오”(개역 성경의 “무엇에든지”는 옳지 않음). 이 권면은 얼핏 보면 감옥에 갇혀 사형 판결이 날지도 모를 재판을 기다리며 교회들을 걱정하고 있는 바울에게나, 핍박과 내분에 휩싸여 있는 빌립보의 교회에게나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충고인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것은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겨야 할 권면입니다.
인간은 그 머리 속을 무슨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그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하루 종일 돈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수전노(守錢奴)가 됩니다. 하루 종일 성적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자기의 머리를 채우는 사람은 성적 노예가 됩니다. 하루 종일 적대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씩씩대며 사는 사람은 아주 불행하고 호전적인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고상한 가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핍박자에 대한 원한으로 불타거나, 교회 내 반대파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며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저열한 인격체가 되어 내적 평강을 얻을 수 없고, 공동체의 삶에서도 평강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예를 든 고상한 가치들과 덕목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들의 머리를 채우라고 권합니다. 심지어 적대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면들만 생각하여 분노와 복수심으로 치를 떨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참됨이나 의로움이나 사랑할 만한 것이나 무슨 덕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고상한 가치들에 생각을 집중시키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1–174.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평강을 빌고 있다.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구 염려하지 않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과 찬양받을 것들을 생각하고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자신이 요청하고 설교한대로 살아간 진실한 사역자였다.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의 지배를 받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감옥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감옥 밖에서도 속박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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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own and the Temple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10 “Take from the exiles xHeldai, Tobijah, and yJedaiah, who have arrived from Babylon, and go the same day to the house of Josiah, the son of zZephaniah. 11 Take from them silver and gold, and make a crown, aand set it on the head of bJoshua, the son of Jehozadak, the high priest. 12 And say to him, ‘Thus says the Lord of hosts, “Behold, the man whose name is cthe Branch: for he shall branch out from his place, and dhe shall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13 dIt is he who shall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eand shall bear royal honor, and shall sit and rule on his throne. And there* shall be a fpriest on his throne, gand the counsel of peace shall be between them both.” ’ 14 And the crown shall be in the temple of the Lord as ha reminder to iHelem,2 jTobijah, jJedaiah, and Hen jthe son of Zephaniah.
15 k“And those who are far off shall come and lhelp to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mAnd you shall know that the Lord of hosts has sent me to you. nAnd this shall come to pass, if you will diligently obey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6:9–15.

본문과 앞선 8가지 환상의 관계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가 하면 앞서 병거가 북쪽(바벨론)으로 가서 사로잡힌자중에 3명(헬대, 도비야, 여다야)이 돌아왔기에 하나님의 영의 성공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환상과 7장 이후의 신탁이 스가랴가 본 밤의 환상과 거의 2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다고 보기에 본 장이 앞선 환상과 후반부의 신탁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 However, the themes in the eighth vision differ significantly enough from 6:9–15 that it becomes difficult to posit a direct connection between the two halves of chap. 6. Therefore, 6:9–15 was probably written at a later time in Zechariah’s ministry. Yet, moving beyond chap. 6, the oracles beginning in 7:1 date almost two years after Zechariah’s night visions. Thus, one can hardly assign 6:9–15 to these latter oracles. So, the oracle focusing on Joshua’s crown cannot be tied too closely to either the preceding or following sections of the book of Zechariah. Instead, the section on Joshua’s crown serves as a structural hinge for Zechariah, linking two major sections of the book.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6.

9-10절) 본문은 친숙한 패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로 시작된다.(4:8; 7:4; 8:1, 18) 또한 다른 내용과 다르게 환상을 해석하는 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절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 여다야가 누구 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성경에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일인인지 아니면 조상의 이름을 다시 후대가 사용하는 풍습에 따른 이름인지 확실하지 않다.  
Zechariah likely mentioned these exiles in v. 10 because of their importance. If the nouns do serve as proper names, the identity of Heldai, Tobijah, and Jedaiah remains a mystery. Even though the same names appear elsewhere in the Hebrew Bible, most of the other occurrences cannot refer to the figures in v. 10.
The only other Heldai in the Old Testament is in a list of David’s warriors (1 Chr 27:15).
Tobijah represents a relatively common yet important name in the era. Ezra 2:60 mentions a Tobijah, but Ezra also indicates that since Tobijah could not trace his genealogy, he could not serve as a priest (2:59, 62). The Tobijahs in Ezra 2 and Zech 6 are probably different individuals.5 Another Tobijah appears in Neh 2:10, 19.6
Significantly, an influential family descended from one named Tobijah who lived during the Hasmonean period.7 A rock hewn cave in the Transjordan region preserved Aramaic inscriptions bearing the name Tobijah. Mazar dates these inscriptions to the era of Zechariah the prophet and identifies this Tobijah as the one in Zech 6:10.8 However, Frank Cross challenges Mazar’s dating of the Aramaic inscription and its identification with Tobijah in v. 10.9
Likewise, the name Jedaiah occurs elsewhere in the Old Testament (Ezra 2:36; Neh 7:39; 11:10; 12:6–7, 19, 21; 1 Chr 9:10). While the Jedaiah in v. 10 may not be the same individual as mentioned in other passages, the practice of naming individuals after one of their male ancestors suggests that the figure mentioned in v. 10 may be related to the other Jedaiahs. Mazar concludes that the absence of lineage with the names of Tobijah and Jedaiah indicates that they belonged to such well known families that listing lineages was superfluous.10 Since Mazar’s understanding lacks evidence, it is basically an argument from silence.
Zechariah’s selection of truly renowned individuals to contribute to the restoration effort and to witness the solemn ceremony underscores the political and religious importance of the prophet’s action.11 The involvement of such conspicuous people must have exerted great influence over the community and left a lasting impression.

5 Meyers and Meyers, Zechariah 1–8, 341; see J. Bright, A History of Israel, 3r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81), 382–85.
6 One of the Lachish letters also mentions a Tobijah (letter 3, line 19), but nothing more is known of his identity.
7 B. Porten, Archives from Elephantin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117.
8 B. Mazar, “The ‘Tobiads’,” IEJ 7 (1957): 137–41.
9 F. M. Cross, Jr., “The Development of the Jewish Scripts,” in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ed. G. E. Wright, reprint ed.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79), 195, n. 75.
10 Mazar, “Tobiads,” 229.
11 Meyers and Meyers, Zechariah 1–8, 34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6–197.

도비야, 여다야, 요시아 이 세사람의 이름의 공통점은 그들의 이름중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야”라는 접미어가 사용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이 상징하는 의미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너무 성급하게 이를 일반화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포로기 이후에 백성들 사이에 이러한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표현으로 자신들의 이름에 이러한 고백을 담았다라고 볼 수 있다. 
Three out of four of the personal names listed in v. 10—Tobijah, Jedaiah, and Josiah—contain the theophoric element Yah in their name, an abbreviation for Yahweh. This theophoric component in these proper names suggests a measure of genuine faith in the Lord among the general populace of those returning from Babylon. One must use caution not to attribute too much significance to these theophoric elements when seeking to discern more information about a specific individual, however. While the divine elements indicated faith in the Lord among the community at large, the names do not prove that the individual men themselves evidenced exemplary measures of faith.13 The fact that these individuals returned to the land of promise offers the best indication of their faith in the Lord and their confidence in the covenant that their God had made with their forefathers and with them.
13 Contra M. F. Unger, Commentary on Zechariah (Grand Rapids: Zondervan, 1962), 110–1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8.

모세가 애굽으로부터 가져온 금과 은을 성막 건설을 위하여 받은 것처럼, 스가랴도 이처럼 모세의 역할을 감당해 새로운 성전 건설을 위하여 금과 은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Tollington notes parallels between the return from the Babylonian exile and Israel’s departure from Egypt during the exodus.23 Moses accepted offerings of silver and gold that the Israelites received as plunder from their Egyptian captors for use in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Exod 25:1–3; 30:11–16; Num 7). Likewise, Zechariah accepted offerings for the construction of the new temple. In this way, God identifies Zechariah with none other than Moses. Zechariah’s dual roles parallel the multiple roles or offices held by Samuel (1 Sam 9:1–10:16), Zadok (1 Kgs 1:38–40), and Jehoiada (2 Kgs 11:12).24
23 Tollington, Tradition and Innovation, 123.
24 Sweeney, Twelve Prophets, 63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99.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서 그들을 만나야했다. 스바냐는 옛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한 부제사장이었고(왕하 25:18) 동시에 성전 감독 책임을 맡은 제사장이었다.(렘 29:25, 29; 21:1; 37:3) 그렇다면 요시아는 유명한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스바냐는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자였고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었다. 스가랴는 지금 이 두부류의 통합을 주도하며 성전재건을 힘쓰고 있는 것이다. 

11절) 앞서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들에게 은과 금을 받아서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웠다. 본문의 면류관이 복수로 사용된 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두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여호수아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는 14절에 여호와의 전안에 두었다는 의견도 있고, 구약에 이렇게 복수로 사용된 명사에 단수 동사가 사용된 경우도 있기도 하다. 또한 장엄의 복수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Mitchell, following a long line of critical reinterpretations of Zech 6, concludes that the text originally read “Zerubbabel” where “Joshua” now stands in v. 11.35 This critical reconstruction argues that after Zerubbabel died, his influence waned to such an extent that a zealous scribe replaced his name with “Joshua” in order to enhance the latter’s social standing. Mitchell’s view runs counter to the historical assessment of Zerubbabel’s prominence, not to mention the highly conservative scribal attitudes toward revising the sacred text.
The crowning of Joshua in v. 11 does not represent his investiture as a high priest since he had already been serving in that office.36 Placing a crown upon Joshua conferred honor on him for the pivotal role he played in the inauguration of worship during the restoration.37 While Zech 4:6–10 stresses the heightened role Zerubbabel had in the postexilic community, the crowning of Joshua also emphasized the momentous role the high priest had played in fulfilling the Lord’s promises to his people. Beyond the honor accorded to Joshua, the crowning served as a sign of God’s resolve to fulfill his promise to send a future leader to his people. Hence, Joshua’s crowning prefigured the elevated status of the coming “Branch” who would usher in the Lord’s eschatological kingdom.38

35 Mitchell, Zechariah, 185–86.
36 Floyd, Minor Prophets, 407.
37 Petitjean mentions the possibility that the crowning of Joshua might signal a political break between Joshua and Zerubbabel (Proto-Zacharie, 282–86). The further implication, that the crowning ceremony represents an attempt to mend a rift between the prophetic office represented by Zechariah and the priestly one Joshua fills, proves baseless (see Cohen, Twelve Prophets, 293).
38 Tollington, Tradition and Innovation, 168; see W. H. Rose, Zemah and Zerubbabel: Messianic Expectations in the Early Postexilic Period, JSOTSup 30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15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0–201.
또한 원래 성전건축의 임무는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것인데(슥 4:8-10) 면류관은 여호수아에게 씌어주고 있다. 

12절)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싹(the Branch)가 누구이냐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가 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스룹바벨을 이야기하고(슥 4:8-10) 나아가 앞선 여호수아라고 보기도 한다(슥 4:14). 또한 장래에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는 메시야를 상징한다고도 본다.(사 11:1) / 그런데 본문의 흐름상 스룹바벨이 아닌 여호수아가 순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대신하고 있다. 스룹바벨은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학 2:20-23) 성전이 왕선되기전 역사의 무대에서 갑자기 물러간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일을 완성할 자로 스룹바벨이 아닌 다른 싹이 날것을 예고하신다. 스룹바벨의 이름의 의미가 ‘바벨론의 순’인것과는 달리 ‘자기 속에서 돋아나는 순’이 언급되는데 이 ‘유다의 싹’은 이후에 나타날 것이기에 그의 대리자로 상징적으로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라는 것이다. 
Verse 12 prophesies that the “Branch” will come and rebuild the temple (cf. 3:8).40 From at least the time of the Jewish Targums, Zechariah’s “Branch” has been interpreted as a messianic appellation, even though the passage initially addresses Zerubbabel. Since 4:9–10 explicitly states that Zerubbabel will begin and complete the temple of the restoration era, the prophet appears to envision a much broader application than Zerubbabel’s labors alone could fulfill.
The temple serves as a place where the Lord meets his people to atone for their sins. Providing the possible background to v. 12, Isaiah associates the ministry of the Lord’s “Branch” with the fruitfulness of the land, survivors of a calamity (probably the exile), and cleansing from sin: “In that day the Branch of the Lord will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land will be the pride and glory of the survivors in Israel.… The Lord wi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women of Zion; he will cleanse the bloodstains from Jerusalem” (Isa 4:2, 4).
Jeremiah 23:5–6 also echoes the Isaianic theme of the Lord’s Branch:
“The days are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raise up to David a righteous Branch,
a King who will reign wisely
and do what is just and right in the land.
In his days Judah will be saved
and Israel will live in safety.
This is the name by which he will be called:
The Lord Our Righteousness” (cf. 33:15–16).
The various passages from Isaiah and Jeremiah merge both royal and priestly offices into the messianism of the Branch.41 In Zech 3 the Branch’s priestly service receives emphasis. Nonetheless, while giving significant prominence to priestly matters (6:11, 13–15), chap. 6 also underscores the royal responsibilities. Baldwin summarizes the point of the passage: “His [Zechariah’s] hearers had been prepared for the Branch to fulfill priestly and kingly functions and therefore would realize that both Joshua and Zerubbabel contributed to the work of the coming Branch, while neither alone adequately represented him.”42
Consequently, no contemporary of Zechariah could fully satisfy the sweeping prophecies about the Branch’s ministry. On the one hand, the phrase in context does speak of the ministry of Zerubbabel and Joshua. Consequently, it is wrong for Unger to view this text as though it were exclusively messianic, with no application in Zechariah’s time.43 However, in light of the broader messianic application of the Branch concept, it would seem reasonable to claim that the imagery ultimately points to the person of Christ. A typological understanding fits both the immediate and broader canonical contexts well.

40 The NIV rendering, “Here is the man,” should read more literally, “Behold the man” (הִנֵּה־אִישׁ), and Pilate’s similar statement in John 19:5 is an allusion, albeit unwitting.
41 See Rose, Zemah and Zerubbabel; and Rose, “Messianic Expectations in the Early Post-Exilic Period,” TynBul 49 (1998): 373–76.
42 Baldwin, Zechariah, 135. See also Joyce G. Baldwin, “S\emah\ as a Technical Term in the Prophets,” VT 14 (1964): 93–97.
43 Unger, Zechariah, 11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1–202.

13절)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또한 제사장이 그 옆에 서서 함께 평화롭게 의논하며 일할 것이다. 본문은 왕과 제사장이 함께 평화롭게 통치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앞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함께 기름부음 받은 자(4:14)로 왕권과 제사장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는 메시야로 연결시키는것이 합당하다. 
- Moreover, v. 13 begins with the emphatic pronoun “he,” indicating that the Branch, not Joshua or Zerubbabel, will ultimately rebuild the temple. The preceding visions lay great emphasis on the role Zerubbabel played in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Verse 13 dramatically begins by pointing to another figure whose significance would surpass even that of Zerubbabel.
Some suggest that this verse, as well as chap. 3, introduces a diarchy into the political situation in ancient Judah.53 Verse 13 appears to address Joshua the high priest, but it also includes royal motifs not associated with the priesthood. To lessen this tension, several commentators suggest that v. 13 speaks to Joshua and Zerubbabel together. This interpretation yields the following:
And he (Zerubbabel) shall build the temple,
and he (Joshua) shall put on splendor,
and he (Zerubbabel) shall sit and rule upon his throne;
and he (Joshua) shall be priest upon his throne;
and a counsel of peace shall be between them.54
This innovative approach attempts to solve a pressing problem in the passage: How can a priest and king both sit on the throne? One must take liberties with the text to defend the notion of a diarchy, a concept that neither biblical nor historical sources support. Further, v. 13 does not give any basis for concluding that both Joshua and Zerubbabel are present, with Zechariah addressing each sequentially in v. 13. While the Old Testament does not merge the offices of priest and king, with the exception of Melchizedek (Gen 14:18–20; Ps 110:4), the coalescence of both becomes a prominent theme in the New Testament, fulfilled in the Messiah, Jesus Christ (Heb 4:14–16; 7; 8:1; cf. Rev 20:4–6).

53 Tollington, Tradition and Innovation, 175; Conrad, Zechariah, 126. Tollington adds that the diarchic ruler served a short-term objective, enabling the people to cohere as a community and to ready themselves for a new age when the Branch would take the reins of the Lord’s kingdom. Rose offers compelling arguments against the diarchy view (Zemah and Zerubbabel, 169–70). Rose’s more important arguments include the absence of evidence supporting an equal position of authority for the royal figure and priest, the lack of mention of either Zerubbabel or Joshua in Ezra 6, and the lack of reference to the high priest in the covenant renewal ceremony in Neh 10.
54 P. R. Ackroyd, Zechariah (London: Nelson, 1962), 64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3–204.
 
14절) 면류관은 왕권을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 이 면류관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14절에 등장하는 이름 헬렘, 도비야,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은 10절에 등장하는 이름과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헬렘을 헬대로, 헨을 요시아로 다르게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15절) 결국 먼데 있는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고 스가랴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임을 알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때 이와같은 회복이 이루어 질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먼데 있는 사람들은 바벨론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들도 포함된다. 결국 신명기, 구약에서 말하는 언약의 순종을 통해서 회복이 일어날 것을 말한다. 
The ending of v. 15, “if you diligently obey the Lord your God,” appears to quote Deut 28:1, the influential Deuteronomic chapter outlining the blessings and curses awaiting Israelites who choose either to obey or to disobey the Lord. Using emphatic language, Zechariah evokes the memory of everything Deut 28 represents. The passage also echoes the eschatological theme of Hag 2:7 (see also Mic 4:1–2). Further, the prophet’s words recall the new covenant in Jer 31:33–34 where the people of God obey their Lord from their hearts.
Thus ends Zechariah’s initial prophecies, which began in 1:7, concerning the restoration of worship in the rebuilt temple. Sweeney observes that Zech 6:1–15 “concludes the prophet’s vision reports in 1:7–6:15 by pointing to the crowning of the Branch and the building of the Temple as signs of the ultimate restoration of Zion.”63 For millennia, biblical writers and theologians alike have understood the central role Zion will enjoy as the seat of God’s eschatological reign.

63 Sweeney, Twelve Prophets, 623. See M. J. Boda, “Oil, Crowns and Thrones: Prophet, Priest and King in Zechariah 1:7–6:15,” Journal of Hebrew Scriptures 3 (2001), journal on-line (accessed 29 November 2005; available from http://purl.org/jhs; Internet). Boda discusses the purpose of Zech 1–6, with special attention to the question of Zechariah’s agenda in correcting leadership problems in his day and looking forward to the coming Messiah. Boda views Zech 1–6 as an indictment of the priestly tradition, assuring the readers that the Branch will correct priestly excesses.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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