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And the Lord God planted a fgarden in Eden, in the east,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 And 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made to spring up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gThe tree of life was in the midst of the garden, h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 A river flowed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there it divided and became four rivers. 11 The name of the first is the Pishon. It is the one that flowed around the whole land of i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bdellium and onyx stone are there. 13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the Gihon. It is the one that flowed around the whole land of Cush. 14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the jTigris, which flows east of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the Euphrates.
f ver. 15; ch. 13:10; Isa. 51:3; Ezek. 28:13; 31:8; Joel 2:3
g ch. 3:22; Rev. 2:7; 22:2, 14
h ver. 17
i ch. 10:7, 29; 25:18; 1 Sam. 15:7
j Dan. 10: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8–14.
에덴의 의미는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이다.
- OT 1. גַּן עֵדֶן, garden of Eden, specifies the garden in Gen 2–3. In 2:8 the garden is located in Eden (בְּעֵדֶן also in Ezek 28:13, where it is further specified as the garden of God (גַּן; #1703), but in Gen 2:10 the river of the garden flows from Eden (מֵעֵדֶן). The difference in the use of the prepositions (בְּ = in and מִן = from) may indicate that Eden refers to the general location or region in which the garden was situated. There has been much speculation on the location of the garden of Eden (ISBE 2:16–17), but the meaning (quality) is of greater importance. Eden may be related to the Hebrew vb. עָדַן and nom. עֵדֶן (luxuriate, delight), as in the LXX. Humankind was placed by God in the garden of Eden to take care of it (Gen 2:15). After the episode described in Gen 3, the man is banished and has to work the soil (3:23). Paradise is lost (Milton), guarded by the cherubim on the east side of Eden (v. 24). The term is also used metaphorically in Ezek 36:35 and Joel 2:3. Ezekiel promises that the wasted land will be like the garden of Eden. Joel has it in the reverse meaning when describing the Day of the Lord.
2. Ezek 31:9 (cf. “in the garden of God,” גַּן), 16, 18 all have “the trees of Eden” (עֲצֵי־עֵדֶן) in the chapter comparing Egypt to a garden (גַּן).
3. Eden is mostly used in relation to the garden, but Eden alone is used in Gen 2:8, 10 (גַּן). Cain sojourned in a land east of Eden (4:16).
4. Eden is identified with the garden of God (Ezek 28:13) or stands in parallelism to the garden of Yahweh (Isa 51:3), the last describing the future restoration of Zion when the deserts will be like Eden.
ISB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G. W. Bromiley, 4 vols., Grand Rapids, 1979–19882
LXX Septuagint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555.
창세기 2:8–17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세기 2:8–9, 2:10–17. 이 두 부분에는 세 가지 주제가 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에덴 동산(8절)
b.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다(8절)
c. 과일 나무:생명 나무와 선악과(9절)
a’ 에덴 동산의 위치(10–14절)
b’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다(15절)
c’ 과일 나무:선악과(16–17절)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8.
8-9절) 하나님께서 동쪽에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본문의 에덴은 앞서 본것처럼 즐거움, 기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곳의 지명일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셨다. 본문에서 동산이라고 번역된 ‘간’은 왕실 정원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해서 70인 역에서는 헬라어 ‘파라데이소스’로 번역하였다. 말하자면 에덴 낙원인 셈이다. 수메르어 ‘에딘’은 대초원 지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아람어에서는 ‘풍부하게 하다, 부요하게 하다’라는 의미와 연관된다고도 주장된다. 이처럼 에덴 동산은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다. 특히 이후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물공급이 풍부한 곳으로 그 정원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자라났고 동산 중앙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을 맡기셨는데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하셨다. 실낙원을 한 셈이다. 이 에덴은 천국의 모형이다. 우리의 범죄로 이 천국을 상실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우리가 소망해야할 원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요 5:24) 그리고 제한되었던 생명나무로의 접근이 허락될 것이다.(계 22:2)
- 고대 이집트에도 파라다이스에 대한 전통이 있었다. 태양신 레가 떠오르는 곳에 이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 사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는 태양신 레가 항해하는 강이 있고, 무화과 나무와 2m까지 자라는 보리가 있다. 그리고 키가 4.5m나 되는 영혼이 그 보리를 수확한다.13)
고대 수메르 지역에도 파라다이스 전통이 있었다.14) 물의 신 엔키(Enki)와 땅의 신 닌훌삭(Ninhursag) 신화에 따르면, 딜문(Dilmun)은 순결하고 깨끗하고 밝은 땅이며, 그곳에는 질병도 죽음도 없다. 딜문에는 달콤한 물이 흘렀고 각종 채소와 과일이 풍성하였다. 엔키와 닌훌삭 신화는 딜문에 8가지 식물이 자라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엔키가 닌훌삭을 잉태하게 하여 딸(Ninmu)을 낳고, 그 딸과 동침하여 손녀(Ninkurra)를 낳고, 그 손녀와 동침하여 증손녀(Uttu)를 낳는다. 엔키가 증손녀인 우투와 동침하려 할 때 닌훌삭이 우투에게 조언하기를 엔키에게 오이와 사과와 포도를 요구하고 이를 주면 동침하고 주지 않으면 동침하지 말라고 한다. 엔키는 우투의 요청을 받아 들여 이것들을 구해 준다. 마침내 둘이 동침할 때 배출된 정액을 취하여 닌훌삭은 8개의 식물을 만들어낸다. 엔키는 이 8개의 식물을 뽑아 먹다가 아내 닌훌삭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15) 이처럼 이 신화의 기본적인 배경은 땅의 신과 물의 신의 갈등이다. 고대 근동의 파라다이스 전통은 에덴 동산과 유사점도 있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집트와 수메르 신화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고대 근동의 파라다이스는 신들의 거주지이거나 사후 영혼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이며, 실제 거주자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13) ANET, 33. 에덴 동산을 파라다이스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70인역이다. 파라다이스는 페르시 아에서 기원한 용어로서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헬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 정원을 나타내는 표 현으로 사용되었다. J. N. Bremmer, “Paradise in the Septuagint,” Paradise Interpreted: Representations of Biblical Paradise in Judaism and Christinity, ed. Gerard P. Luttikhuizen (Leiden: Brill, 1999), 1–20.
14) 고대 가나안의 바알 서사시에는 가나안 만신전의 수장인 엘 신의 거주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 사하고 있다(ANET 152).
“Towards El of the Source of the Floods, In the midst of the headwaters of the Two Oceans.”
엘 신의 거주지가두강 또는두 바다의 근원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15) ANET 37–4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9–90.
8절 본문의 에덴 앞에는 전치사 ‘베’가 쓰였는데 이 전치사는 이 본문을 두가지로 해석 가능하게 하다. 첫째로는 에덴과 동산을 동일시 할 수 있고 둘째로는 에덴은 광범위한 지역이고 동산을 그 지역 안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보는 견해가 가능하다. 개역 개정의 해석은 후자를 지지한다. 또한 그 에덴 동산의 위치를 ‘동방의’(in the east)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방은 어디를 기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동방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지역을 기점으로 그 동쪽으로 이해되어 왔다. 아래의 지도를 보라.
9절 본문에는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위치해 있었다라고 말한다. 생명나무를 영원불멸성을 항구적으로 보장해주는 나무로 볼 것인지 생명을 연장해 주는 나무로 보아야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의 본문을 보면 도리어 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말라는 금지명령은 없었다. 말하자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한번 먹었는데 그것이 영생의 효력이 있었다면 이후의 죽음의 사건은 설명이 안된다. 후자로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에덴동산을 쫓겨나서 먹지 못했기에 이제 죽음이 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언에서 이 나무를 네 차례 언급하는데 주된 관심사는 바로 생명의 연장이다.(잠 3:16-18, 13:2, 15: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나무를 영원불멸의 나무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젊음의 나무로 보았다고 볼 수 있다.
- We should view the tree of life as having fruit that extends life rather than instantly grants immortality. The tree was not forbidden to Adam and Eve, and there is no reason to argue (either here or in 3:22) that they did not eat from it. But when they were cast from the garden, they were forbidden access to the tree.
We must understand the statement in 3:22 that they might “live forever” in light of two caveats. (1) If the fruit effectively extended life, then regular access to the tree could extend life indefinitely, thus eventuating in virtual immortality. That is different from thinking that one bite of the fruit would bring instant immortality. (2) Careful study of the term that the niv translates “forever” has demonstrated that it is not an abstract term, suggesting infinity or eternity per se, but characterizes something as being open-ended, with no anticipated ending built in.28 It is better translated “perpetual life,” suggesting that the fruit constantly counteracts any aging.
Extension of life is the issue in the four references to this tree in Proverbs. In 3:16–18, the tree is parallel to “long life” as one of the benefits wisdom has to offer. In 13:12 and 15:4, it stands in contrast to behavior that would demoralize and thereby take its toll on a person. We conclude, therefore, that the Israelites viewed the tree of life as a tree of youth rather than as a tree of immortality.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8 A. Tomasino, “עוֹלָם” NIDOTTE, 3:345–51.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0.
본문의 선악과는 메리즘적인 표현이다. 메리즘은 두개의 서로 상반된 개념을 하나로 연결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표현법으로 선악, 천지, 유대인과 헬라인을 예로 들 수 있다. 본문의 선악은 선악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지식 전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용법은 함께 사용되는 동사들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1) ‘말하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때 ‘선악’은 말하는 사람이 심판을 내리거나 결정해야 한다.
2) ‘듣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 그 단어는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에 귀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3) ‘안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거나 그 동사의 동의어가 선과 악 앞에 전치사들을 동반하여 사용될 경우에 그 단어는 인간의 분별력을 가리킨다.
4)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두 본문 외에 전치사 없이 ‘안다’라는 동사와 결합되어 사용된 유일한 본문이 신 1:39이다. 이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거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에 이르지 못한 존재들이다.
일반적으로 ‘안다’라는 동사가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그 동사가 ‘선악’이라는 메리즘 용법에서는 그런 의미를 띄지 않는다.
본문에서 선악을 아는 것은 ‘분별하는, 구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특징이지(3:22) 아이들이나(신 1:39, 사 7:15-16), 노인들이나(삼하 19:35), 경험이 미숙한 사람들(왕상 3:9)의 특징은 아니다.
- Understanding the second tree depends heavily on our ability to identify the meaning of the phrase “knowledge of good and evil.” Note first that “good and evil” is consistently used as a merism and therefore indicates a whole range of knowledge, not knowledge of two isolated things (“good” and “evil”). Yet as a merism, it should not be thought of as referring to all knowledge. Instead, it applies to the range within a specific category of knowledge (“good and evil”). Like words, rhetorical devices such as merism can be understood only as we explore their usage. In the Old Testament we will find the usage falling into categories differentiated by the associated verbs.
1.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speak” (e.g., Gen. 24:50; 31:24, 29), “good and evil” suggest that the speaker pass judgment or issue a decision (or not, when negated).
2.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hear” (e.g., 2 Sam. 14:17), it means to listen with discernment to the details of a case so as to judge the legitimacy of a claim.
3. When it is used with the verb “to know” or its synonyms coupled with prepositions before good and evil (2 Sam. 19:35; 1 Kings 3:9; Isa. 7:15–16), it refers to a human capability to be discriminating. This capability is lacking in children and in the elderly Barzillai. The statements do not suggest that the subjects do not know anything or that they are morally destitute, only that their ability to discern what is in their best interests is lacking.
4. Besides the two passages in Genesis 2–3, the only other passage that uses the merism without prepositions and collocated with the verb “to know” is Deuteronomy 1:39. Here, as in category 3, the reference is to children before they have reached the age where they can make decisions for themselves or live independently.
Those interpreters who point to the use of the verb “to know” as referring to sexual intercourse will find no help here, because the verb does not mean that when connected to the merism “good and evil”; such a meaning is, additionally, inappropriate to the context of 3:22. Those who contend, on the basis of 3:22, that the phrase should be understood as omniscience or universal knowledge will have trouble finding that meaning in the passages listed above. Those who think that moral judgment is involved likewise have difficulty with the occurrences cited above, in that none of them can easily be attached clearly or exclusively to the realm of morality. The context also works against this in that it is difficult to hold people responsible for moral choices if they have been given no moral judgment. The common denominator of these references is “discerning or discriminating wisdom.”
Knowing good and evil is characteristic of God (3:22) but not of children (Deut. 1:39; Isa. 7:15–16), the elderly (2 Sam. 19:35), or the inexperienced (1 Kings 3:9). It is something that people are inclined to desire and can use to gain wisdom (see Gen. 3:6). Even though Adam and Eve lacked this knowledge, they could still be held responsible for obedience; and when people gain the knowledge by eating the fruit, they can legitimately be described as being like God. The only potential problem comes when we wonder why God would have forbidden Adam and Eve to eat of a fruit that bestowed such positive qualities. We will probe this question in chapter 3.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70–172.
10-14절) 본문은 에덴을 기점으로 흘러나온 네 근원의 강의 이름을 소개한다.
첫째 강은 비손 강인데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흘렀는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었다. 둘째 강은 기혼강인데 구스 온 땅을 흘렀고, 셋째 강은 힛데겔(티그리스) 강으로 앗수르 동쪽을 흘렀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 강이었다.
힛데겔과 유브라데 강의 경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주변을 흐르는 강으로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처음 두 강, 비손과 기혼 강의 위치는 열려져있지 않다. 금과 호마노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는 많은 천연 자원(보석)이 풍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귀금속은 이후에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 창세기 2:14에 있는 셋째와 넷째 강은 일반적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다. 두 강은 현재 이라크와 이란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첫째 강 비손과 둘째 강 기혼의 위치는 미스테리에 속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들을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강들에서 찾거나, 메소포타미아 밖에 있는 나일강이나 인더스 강과 동일시 하거나, 또는 페르시아 만이나 홍해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과거에 말라버린 사우디 아라비아의 강들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19)
위치와 관련하여 아담과 가인의 이동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할 때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났다(창 3:23–24). 그리고 가인도 역시 아벨을 죽인 후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주하였다(창 4:16).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에 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은 최소한 아담과 가인이 정착한 메소포타미아 지역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에덴을 동편이라고 칭하는 화자가 위치한 곳은 어디일까? 가나안, 지중해, 아니면 이집트?
창세기 2:11–14에 언급된 네 강들의 기록 순서를 보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잘 알려진 셋째 강과 넷째 강이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고, 대신에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비손과 기혼 강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 힛데겔과 유브라데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강들인데 먼저 언급된 비손과 기혼 강은 이 두 강과 비교할 때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손강이 있는 하윌라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기혼 강이 있는 구스는 구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에티오피아를 지칭한다(창 10:6–7, 대상 1:9).20) 그렇다면 에덴은 이들 네 강의 중간 부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 그 경계선은 유프라테스와 나일 강이다(창 15:18). 쥬빌리에서 에덴 동산은 가나안 땅이다.21) 이에 더해 창세기의 저자는 유브라데와 힛데겔에 대해서는 가볍게 지나가는 반면에 비손 강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곳에서 생산되는 금은 정금이고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생산되고 있다고 밝힌다. 이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이들 강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돕기 위해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가 비손 강이 흐르는 하윌라 지역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에덴 동산은 동방에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저자는 에덴 동산으로 알려진 곳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아 홍수를 통해 지구 전체가 대격변을 겪었음을 감안한다면, 에덴 동산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19) John Walton, Genesis, 169. 왈턴(Walton)은 기원전 3500–2000 B.C. 에 말라버린 한 강을 비 손 강으로 여긴다. 이 강은 쿠웨이트의 페르시아만에서 메디나로 이어지는 히자즈(Hijaz)산맥을 흐른 강으로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인접해 있다.
20) John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98–99. U. Cassuto, Genesis, 115–121.
21) G. E. Aalders, Genesis, EBCOT (Grand Rapids: Zondervan, 1981), 86–9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90–92.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천체와 지구, 동물과 식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 교과서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고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이 내용이 에덴의 위치를 결정짓는 현대의 지리학 교과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살만에셀 3세(주전 9세기)의 기록을 보면 그가 ‘티그리스 강의 근원’에 있는 그 샘이 솟아나는 벼랑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고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실재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교제하는 장소였다. 구약의 성소가 바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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