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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oncerning a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bbeing gathered together to him, we ask you, brothers,1 not to be quickly shaken in mind or calarmed, either dby a spirit or a espoken word, or ea letter seeming to be from us, to the effect that fthe day of the Lord has come.
a See 1 Thess. 2:19
b [Matt. 24:31; 1 Thess. 4:15–17]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3, 15
c Matt. 24:6; Mark 13:7
d [1 John 4:1]
e ver. 15; [1 Thess. 5:2]
e ver. 15; [1 Thess. 5:2]
f See 1 Cor. 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2:1–2.
 
본문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장 혼란스럽게 했던 주의 재림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마 24장으로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다양한 사건들을 다룬다면 본 장에서는 그 초점을 좁혀서 재림 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활동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절) 그는 데로니가 교인들을 '형제들아 (아델포)' 라는 정 깊은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한 호칭은 데살로니가전후서 두 서신에서만 무려 20회나 견된다(살전 1:4; 2:1.9.14.17 ; 3:7; 4:1.13 ; 5:1.4.12.14, 25 ; 살후 1:3; 2:1,13,15; 3:1.6.13). 이러한 칭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 사이의 적 유대감을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하여 책망는 말을 하든, 격려하는 , 요청하는 을 하든 바울은 들에게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 않고 주님 안에 대등 제애로써 말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 '아델포이' 는 표현을 연이어 쓰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우리가 ~ 구하는 것은’은 ‘에로토멘’으로 ‘요청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로타오’의 직설법 현재 표현이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내세워 명령형의 표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도리어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다.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강림하심’에 해당하는 ‘파루시아’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황제 등의 통치자가 지방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황제의 방문을 받은 주민들은 그의 방문을 환호하면서 모여들어 축하 행렬을 베풀었다. 이 독특한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 24번 사용되었는데 그중 17회가 주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마 24:27; 고전 15:23; 살전 2:19; 4:15; 약 5:7), 17회중 7회가 살전, 후에 집중되어 있다.(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2:8,9) 그만큼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이땅에 강림하실 때에 천사들은 택함 받은 성도들을 그 앞에 모을 것이다. 본문에서 ‘모임’에 해당하는 ‘에피쉬나고게스’의 원형 ‘에피쉬나고게’는 신약에 2번 사용되는데 본절에서는 함께 모이는 행위의 의미로 또한번은 히 10:25에서 예배를 위해 신자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나중에, 위에, 추가로’의 ‘에피’라는 접두어와 ‘회당, 집회소’라는 의미의 ‘시나고게’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회당에 함께 모인 모임을 의미하는것이다. 마 24:31에 이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는 재림의 날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순식간에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1
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처럼 당시 성도들은 주의 강림과 그 앞에 모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Paul discusses Christ’s coming (Gk. parousia), his return in glory at the end of the age to save the elect and punish the wicked, and our being gathered together (Gk. episynagōgē) to him (see Matt. 24:31 with the related verb episynagō; cf. also 1 Thess. 4:16–17). The idea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already come (2 Thess. 2:2) may have made the Thessalonians fear that Jesus’ coming and the gathering of his people to him were no longer legitimate or realistic expectatio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7.
 
2절) 본절은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혹되었는지를 다루는데 영이나 말, 위조된 편지를 통해서 주의 날이 이미 임했다는 이야기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 세가지를 표현하면서 바울은 ‘메데, ~하지 말라’라는 부정어와 ‘디아,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를 통해서 미혹의 근원지를 밝힌다.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토스’, ‘프뉴마’는 성령이든 악령이든 인간의 지정의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살전 5:23). 본문에서 ‘프뉴마, 영’의 역할은 다가올 일을 예언하는 영으로 묘사되었는데, 예언 가운데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으로 말미암은 경우도 종종있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이 받았다고 하는 ‘영’을 빌어서 주의 날을 예언했을 것이다. 
'말'에 해당하는 ‘로구’는 ‘로고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고 본문에서는 소통을 의미하는 메시지를 의미한다. 당시 여러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이나 바울에게 직접 들었다라는 거짓말로 교인들에게 여러 말들을 전했던 것이다.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는 의도적으로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이 위조된 편지를 보낸 것일 수도 있고 누가 써는지 모르는 편지를 마치 바울이 쓴 편지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이 이미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메시지를 직접 쓴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바울의 이름을 도용해서 거짓된 주의 날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고 사람들은 이것이 바울의 일행이 이야기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더욱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흔들리고 두려워한 이유는 본문의 ‘이르렀다’로 번역된 ‘에네스테겐’은 현재 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하는 ‘에니스테미’의 완료형으로 이미 도래했다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해진 잘못된 정보는 바로 주의 날이 이미 도래했기에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의미없다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들을 요동하고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The Thessalonians were shaken into mindless panic and were alarmed or frightened by the false claim that the day of the Lord had already come. Though the source of the confusion was unknown to Paul, he suggests a number of possibilities: a spirit. An alleged prophetic word. a spoken word. A word of teaching or a sermon. a letter seeming to be from us. Paul seems to have suspected that a letter forged in his name was circulating (3:17). the day of the Lord. See notes on Amos 5:18–20; 1 Thess. 5:2–3. Although some believe that the Thessalonians were thinking in terms of a complex of events that would lead to the second coming, Paul seems to assume here, as elsewhere (1 Cor. 1:8; Phil. 1:10; 1 Thess. 5:1–4; 2 Thess. 1:7–10), that the arrival of the day of the Lord and the second coming occur at the same time, as aspects of a single event. has come. The Thessalonians have fallen victim to the implausible notion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come, presumably because some source they regard as authoritative has claimed this. There is no reason to think that the idea was part of a developed heres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7.
 
주의 날, 주님의 심판의 날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핵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부활로 이미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당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었다고 가르친 것과 같다. 이미 그 나라가 임했기에 지금 너희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의미 없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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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mp Under a Basket
21 wAnd he said to them, x“Is a lamp brought in to be put under a basket, or under a bed, and not on a stand? 22 yFor nothing is hidden except to be made manifest; nor is anything secret except to come to light. 23 z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24 And he said to them, “Pay attention to what you hear: a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and still more will be added to you. 25 bFor to the one who has, more will be given, and from the one who has not, even what he has will be taken away.”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4:21–25.

병행구절 (마 5:15; 눅 8:16-18)

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가 그릇이나 침상 밑에 두기 위함이냐 아니면 등경위에 두기 위함이냐? 
원래 원어상에는 “The lamp does not come.”라고 표현되어 있다. 등불이 어떻게 온다는 것인가? 본문에서 등불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기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표현한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 임한 것이다. 
- The claim of the preceding paragraph can be seen in the Greek text, a literal translation of which is, “The lamp does not come.” How can a lamp30 “come”? Some have tried to explain Mark’s term as a Semitism, but the best explanation is that the lamp represents either Jesus31 as well as the parables with which he taught or the kingdom of God that drew near with his coming. Jesus and the kingdom did not come to be hidden but to be revealed to all. Such revelation, however, could not be made fully until after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30 Ancient lamps consisted of a bowl filled with olive oil and having a spout in which a wick was laid. The KJV translation “candle” is an anachronism because candles were not invented until the Middle Ages.
31 The presence of the definite article before the word “lamp” supports this interpretation.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84.

22절)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새번역) 
결국 등불은 잠시동안 숨겨졌고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후의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밝히 드러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화때까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 The statement seems to contradict v. 21 by indicating that a lamp may be hidden temporarily. Jesus and the kingdom were in fact concealed temporarily. Jesus was fully revealed following his resurrection, but the kingdom will not be fully realized until the consummation. This verse informs the “messianic secret,” indicating that Jesus intended a definite limit on it.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84.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숨기신 것이 무엇인가? 마가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숨기셨다고 말한다. 비유에 대한 두가지 긴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이나 하나님 나라 혹은 그분의 메시지를 스스로 숨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 2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숨기는 이유는 이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 The speaker in this case is Jesus, and the question is, What has he hidden? In the Gospel of Mark the only thing that Jesus has hidden is his teaching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he has hidden it in parables. These verses then are actually a collection of sayings about parables. They affirm two things that stand together in considerable tension. The first is that Jesus has not come to hide himself (Schweizer 1970:98), the kingdom of God (Anderson 1976:136) or even his message (Gundry 1993:212). Second, 4:22 paradoxically affirms that the purpose of hiding something is to reveal it. And after these two assertions we encounter once again the command to pay attention.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95.

23-24절) 23절은 앞선 9절과 유사하다.  너희가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고 더 받을 것이다.(마 7:2; 눅 6:38)  
- If the hearer embraces Jesus’ message of the kingdom in a rich and profound way, then still more will be added to you—that is, God will take up residence in that heart and give increased understanding and blessing, both in this age and in the age to com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00.

25절)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본문은 물질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앞서 계속 강조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앎을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 은혜와 하나님의 복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 This verse is both a promise and a warning about understanding the parables. Whoever acquires some understanding and wants more will receive more. Proper understanding will lead to accepting Jesus and entering the kingdom and to more and more blessings from God. Those who have no interest in parables and the kingdom about which they teach will soon find themselves further from it than before they ever heard about it.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84.

- Parables are the language of faith. What is distinctive about faith, from Mark’s perspective, is indicated in the parable of the soils. Faith is welcoming the word, receiving it with joy, letting it take root, and above all else persevering in the face of adversity. It is not something that originates in us. Like Paul in Romans 10:17, Mark thinks of faith as originating with the Word of God. Insofar as faith involves hearing and acting, the parables are a way of communicating that is particularly suited to what Mark wants to communicate. Faith involves both hearing and acting, and Jesus’ parables are figures of speech that provoke a response. One kind of response leads to judgment, while another kind leads to more faith.
We might also think of parables in terms of the distinction that is sometimes drawn between objective and subjective faith. Objective faith refers to what we believe. The Apostles’ Cre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the Barmen Declaration are examples of objective faith. Subjective faith, on the other hand, refers to how we believe; it is a matter of the affections and encompasses the elements of trust, personal commitment, perseverance and loyalty that we have in mind when we say that someone is a faithful person.
In the last 150 years a number of theological systems have been built upon either the objective or subjective aspect of faith. As Mark presents them, however, the parables of Jesus are a medium for faith in which the objective and subjective elements are treated as an indivisible whole. There is something objective that Jesus wants to talk about: the word or, more precisely, the word about the kingdom of God. But the people who hear the parables cannot understand what is being said unless they exercise the subjective elements of faith. From this point forward in the Gospel, Jesus does not put his teaching out so that it can be understood objectively. The word about the rule of God is not a matter for idle curiosity. To understand the gospel people must respond by welcoming, acting and persevering.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97–98.

오늘 본문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등불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데 이것은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앞서 씨뿌리는 비유와 연결된다. 말씀을 듣고 이를 받아들여 뿌리가 내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이에 순종해서 행해야 한다. 이 과정은 즉석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오랜 인내와 노력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믿음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들음을 통해서, 그리고 들은 그 말씀을 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이처럼 이를 행하는 사람은 더 큰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며 반대로 듣지 않는자는 점점더 믿음의 자리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예수님께서 많은 비유를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두 부류로 나뉘어 지는데 inside and outside로 나뉘어지게 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나라의 가치관 안에 있는 자들은 더욱더 그분을 알기 위해서 나아온다. 제자들은 주님께 나아와 비유의 의미를 묻고 주님은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신다. 우리 또한 더 깊은 깨달음 가운데 나아가기 위해서 주님앞에 나아와 물어야 한다. 이 성경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면 나를 둘러싼 상황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을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친히 가르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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