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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qI charge you in the presence of God, who gives life to all things, and of Christ Jesus, rwho in his testimony before4 Pontius Pilate made pthe good confession, 14 to keep the commandment unstained and free from reproach until sthe appearing of our Lord Jesus Christ, 15 which he will display tat the proper time—he who is uthe blessed and only Sovereign, vthe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16 wwho alone has immortality, xwho dwells in yunapproachable light, zwhom no one has ever seen or can see. To him be honor and eternal dominion. Amen.
q See ch. 5:21
r [Matt. 27:11; John 18:37; Rev. 1:5; 3:14]
4 Or in the time of
p [See ver. 12 above]
s See 2 Thess. 2:8
t See ch. 2:6
u ch. 1:11
v See Rev. 17:14
w See ch. 1:17
x [Ps. 104:2]
y Job 37:23
z See John 1: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6:13–16.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6:13–16.
13절)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 여기서 ‘살게하신’으로 번역된 ‘조오눈토스’는 ‘생명을 유지하다, 목숨을 보존하다’라는 동사 ‘조오고네오’의 현재 능동태형이다. 이 표현은 ‘~이 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기노마이’와 ‘살다, 살아나다’라는 동사 ‘조오’의 합성어로 ‘생명을 가지게 하거나 두번째로 생명을 가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동시에 의미한다. 첫번째 창조와 두번째 창조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ζῳογονέω (zōogoneō), 동사. 생명을 유지하다, 목숨을 보존하다. 미래 능동태. ζῳογον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ἐζωογόνησα.
동사 용법
1. 살아있다† — 생명이 있거나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다; 때로는 그 생명을 보존한다는 뜻을 가진다. 관련 주제: 빠르게 하다.
눅 17:33|| ὃς δʼ ἂν ἀπολέσῃ ζῳογονήσει αὐτήν.
2. 살아 나게 하다† — 생명을 가지게 하거나 두번째로 생명을 가지게 하다.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ζῳοποιέω. 관련 주제: 생애; 빠르게 하다; 살다; 부활; 생명 나무.
딤전 6:13 τοῦ ζῳογονοῦντος τὰ πάντα
3. 살아 있게 하다.† — 생명을 가진 상태 혹은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되다. 때로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암시한다. 관련 주제: 빠르게 하다.
행 7:19 τὸ μὴ ζῳογονεῖσθαι.
칠십인역 참조 구절
• 출 1:17–18; 레 11:47; 삿 8:19; 삼상 2:6; 삼상 27:9; 삼상 27:11; 왕상 21:31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마 10:39
†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또한 ‘앞’으로 번역된 ‘에노피온’은 ‘~안에’란 의미의 전치사 ‘엔’과 ‘보다’라는 동사 ‘옵타노마이’의 합성어로 ‘보이는 곳에서, 눈 앞에서, 목전에’라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신전의식(in front of God)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런데 바울이 가장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은 바로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 16:22)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 이렇게 바울은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만물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바울은 앞선 디모데의 선한 증거(12절)을 예수님의 선한 증거와 결부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함으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며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을 담대하게 증거하셨다(마 17:1-2, 11-31; 막 15:1-20; 눅 23:1-7, 13-25; 요 18:28-19:16). 주님께서 죽음의 위협속에서 이러한 증거를 하신 것처럼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명령하는 바를 성실히 지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임을 나타내보여야 할 것을 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11-12절에서 말한바 있는 신앙의 명령들을 지켜야 할 것을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명령함으로써 그 명령이 사도적 권위를 지닌 매우 중요한, 엄숙한 명령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6:13 I charge you. Five other times in 1 Timothy, Paul tells Timothy to “charge” or “command” others (v. 17; 1:3; 4:11; 5:7 [“Give … instructions”], 21). But Timothy too is under divine command. Christ’s “good confession” is the basis for Timothy’s (v. 12).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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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76.
- 6:13 παραγγέλλω (see 1:3) means here “I charge,” i.e., “I command” or “I direct.” It is in the first person to express Paul’s authority as Christ’s apostle (cf. 1 Thes. 4:11; 2 Thes. 3:4, 6, 10, 12, especially vv. 6 and 12). Addition of σοι can be explained more satisfactorily than omission of it, since one expects the person charged to be indicated in the text (this variant reading correctly spells out what is implied in the text, and thus most ancient versions and modern English translations render the text accordingly, i.e., “I charge you”).
Paul uses ἐνώπιον, “in the presence of,” most often with reference to the members of the Godhead (see 2:3), here “God” and “Christ Jesus.” God is described as τοῦ ζῳογονοῦντος,** i.e., as “the one who gives life” (cf. 1 Sa. 2:6 LXX: “the Lord makes alive”), not as the one who preserves life, as in Lk. 17:33; Acts 7:19. He give life to “all things,” τὰ πάντα, used here of “humankind and everything else that possesses life” (BAGD s.v. 2b β; cf. Acts 17:25). Paul’s charge is, therefore, made in the presence of God the life-giver, with all the implications that that carries.
Christ is described as the one “who testified the good confession before Pontius Pilate.” ἐνώπιον governs this part of the sentence also, and so καί joins Christ to God as those in whose presence Paul’s makes his charge. For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see 1:1, 2. μαρτυρέω means here “bear witness” or “testify,” and the aorist participle refers to a particular occasion in the past.
That particular occasion is specified in the prepositional phrase ἐπὶ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ἐπί more likely means “before” here rather than “in the time of” (see BAGD s.v. I.1a δ; Kelly argues for the latter) since the former fits that actual historical occasion with its direct and personal dimension. Also, “before” would agree with Timothy’s situation, since he was obligated to carry out his charge “before” people. Πόντιος Πιλᾶτος was the Roman governor of Judea (a.d. 26–36) who ordered Jesus’ execution. He is thus repeatedly mentioned (49x) in the Passion accounts (Mt. 27:2–65; Mk. 15:1–44; Lk. 23:1–52; Jn. 18:29–19:38). Only here and in Lk. 3:1 is he designated by the nomen Πόντιος,** the “middle, gentile, or tribal name” of Pilate (BAGD).
Christ’s “good confession” was his affirmative answer to Pilate’s question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Mt. 27:11; Mk. 15:2; Lk. 23:3; Jn. 18:33–37). The significance of this confession was that it provided the basis for the coalition among Pilate, the religious leaders, and the crowd—and thus the grounds for Jesus’ crucifixion (see Jn. 19:12–16, especially v. 12; cf. Mt. 27:37; Mk. 15:26; Lk. 23:38; Jn. 19:19). Jesus’ royal claim had been rightly recognized by the religious leaders to be messianic (Lk. 23:2), but they rejected it. Paul charges Timothy before Jesus as the one who made this “good confession” and in so doing willingly gave up his life to death on the cross (cf. Heb. 12:2).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XX Septuagint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65–266.
14절) 앞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명령했다면 1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즉 이 세상 마지막때까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것을 권면한다. ‘나타나실’로 번역된 ‘에피파네이아스’는 ‘~위에’란 뜻의 전치사 ‘에피’와 ‘빛이 번쩍이다, 나타나다’라는 뜻의 동사 ‘파이노’의 합성어로 ‘빛이 번쩍이며 나타나듯이 영광스럽게 등장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파이노’의 명사형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빛과 함께 그분이 다시 오실 것임을 보여준다. 이 ‘에피파네이아스’는 주님의 재림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인 ‘파루시아’와 동일한 의미이다(딛 2:13; 딤후 1:10; 4:1, 8).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황제의 방문과 같이 분명하고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언제 정확하게 임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홀연히 다시 오실 것이다. 바울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장래에 반드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이 명령들을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즉 어떤 잘못이나 실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이 명령’, ‘텐 엔톨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가?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명령이나 또는 디모데가 세례를 받을 때에 서약한 의무등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타당한 견해는 11-12절의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거룩한 명령을 포함하여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수행해야할 사명과 책임들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하여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는 삶을 적극적으로 피하고 주께서 주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15절) 본절은 앞선 14절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표현이다. ‘기약이 이르면’으로 번역된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문자적으로 ‘자신의 때에(KJV, in his times)’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좋은 시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적당한 시간에’ 일어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이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의 힘에 의거해 독자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림 사건이 그리스도 자시의 능동적인 순종에 의해 이러우지지만(요 10:18) 동시에 이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보이시리니’로 번역된 ‘데익세이’가 3인칭 단수 직설법 미래 능동태란 점에서 잘 보여진다. 직설법 미래형이란 점에서 이는 미래 시점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보여주며 3인칭 단수 능동태란 점에서 이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며 능동적인 사역임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일으키실 사건이기에 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복되시고’라고 번역된 ‘마카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50회 사용된 표현으로 팔복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 계시는 분이시며 만물에 대한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다. 보
본문에 ‘주권자’로 번역된 ‘뒤나스테스’는 개역에서 ‘능하신 자’ㄹ 번역되었는데 행 8:27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를 설명하면서 ‘큰 권세가 있는’ 사람임을 지적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을 뿐 이것이 하나님께 적용된 예 역시 본문이 유일하다.
사도행전 8:27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하나님은 모든 왕들의 왕이시며, 모든 통치자들의 주이시다. 당시 이러한 선언은 온갖 이방신을 섬기던 다신론 사상에 빠져 있던 헬라 세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로마 황제를 신성시했던 당시 로마 사회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백은 헬라와 로마 세계에 도전이 되었고 충격적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심을 담대히 선포했고 이로 인하여 로마 제국은 교회를 핍박했다.
-0 6:15 in his own time. Creation (Gen 1:1) and the incarnation (Gal 4:4) occurred on God’s timetable. So will Christ’s return (v. 14).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76.
16절)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초월성을 찬양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하나님은 죽음과 소멸에서 완전히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시간이나 죽음, 소멸 등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분’, 즉 ‘불명의 하나님’이시다. ‘죽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아다나시안’은 부정 불변사 ‘아’와 ‘죽음’을 의미하는 ‘다나토스’의 합성어이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사후에 영혼으로 불멸하는 존재라고 주장했으나, 심슨은 ‘인간의 불멸은 불명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지 결코 그 자체의 속성은 아니다’라고 잘 지적했다. 본문에 오직(모노스)라는 표현은 이 속성이 인간과 공유하시는 속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비공유적 속성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요 5:25).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이는 시편 기자가 시 104:2에서 노래한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를 연상시킨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가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했던 것을 상기시킨다(겔 1:4). 어둠은 빛의 부재이다. 이는 하나님은 어둠에 속한 이들, 죄인된 이들이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가까이 가지 못할’로 번역되 ‘아프로시톤’은 부정 불변사 ‘아’와 ‘전진’을 의미하는 명사 ‘프로시토스’의 합성어로 하나님께 대한 어둠의 세력의 접근 불가능성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이는 하나님의 불가시성에 대한 표현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감히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는 분이시다. 구약의 모세나 이사야, 에스겔이 눈으로 보았다고 표현한 것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출 24:9-18; 사 6:1; 겔 1:28). 인간이 타락하기전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했다. 그분과 대화하고 동산을 거닐었었다. 하지만 범죄이후 인간은 실낙원하였으며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삶 속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셨다.
요한복음 1:18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가시적인 존재가 되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땅을 심판하시는 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보게 될 것이다.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원문에는 ‘돌릴지어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직역하면 ‘그에게 존귀 그리고 영원한 능력 아멘’이 된다. 도리어 동사가 없는 원문의 표현은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존귀와 영원한 능력 그 자체이시다라는 뉘앙스가 매우 강력하게 전달된다.
즉 불멸이시요 흑암의 세력이 가까이 갈 수 없고 인간의 이해와 사야에 갇히시지 않는 하나님께 우리는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 돌려진 찬양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이다.
- 6:16 God is also “he who alone possesses immortality, who dwells in unapproachable light.” ἔχων (see 1:12) means here “possess” in the sense of “have as one’s own.” Here μόνος (see v. 15) can best be rendered into English by “alone” (RSV, NASB, NIV), though “only” is acceptable (KJV; J. B. Phillips, NT in Modern English). In either case the clause states that “immortality” (ἀθανασία,** 1 Cor. 15:53, 54; here; cf. ἄφθαρτος, “immortal,” in 1:17, both used with apparently the same significance in parallel clauses in 1 Cor. 15:53–54 [Guthrie]) is intrinsically unique to God (cf. Ps. 36:9; Dn. 4:34; Jn. 5:26).
The second participial clause, φῶς οἰκῶν ἀπρόσιτον, is also governed by the definite article ὁ at the beginning of the verse. Thus both participles are substantival and describe God, and their descriptions are thereby closely linked together. φῶς, “light,” is used by nearly all the writers of the NT, often of God (whether directly or indirectly). From Eph. 5:8–9 we may deduce that “light” with reference to God in the Paulines means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cf. holiness and truth in 1 Jn. 1:5–7; cf. also 1 Pet. 2:9). Here it says that God “dwells” (οἰκῶν) in light: Light characterizes his very existence (cf. Ps. 104:2). That light is “unapproachable” (ἀπρόσιτον,** a biblical hapax used elsewhere; see BAGD).
It is said further that God is the one “whom no person has seen or can see,” which reinforces and further delineates the preceding clause. The absolute negative “no person” (οὐδεὶς ἀνθρώπων) states this truth from the point of view of actuality, as does Jn. 1:18 (cf. 1 Jn. 4:12). Not even Moses, with whom God spoke, saw God’s face (cf. Ex. 33:18–23). The relative pronoun ὅν, “whom,” has as its antecedent the two preceding substantival participles (ὁ ἔχων … οἰκῶν), i.e., God, not neuter φῶς. The second clause states the truth of the first from the point of view of ability. The key word δύναται, “can” or “is able,” is used here with the infinitive ἰδεῖν and with the conjunction οὐδέ to indicate what one is not able to do, i.e., to see God. Paul is reflecting the OT truth that God is so holy that sinful mankind cannot see God and live (cf. LXX Ex. 33:20: “You cannot see [οὐ δυνήσῃ ἰδεῖν] my face, for no one can see me and live”).
Paul does not make explicit here what he and others make explicit elsewhere when these elements are used. But certain connections seem to be intended by Paul’s choosing to emphasize just these aspects of God’s attributes in relation to his being the one who brings about “the appearing of our Lord Jesus Christ.” When this great and majestic God brings about the appearance of Christ, who has already brought life and immortality to light (2 Tim. 1:10), Christ will enable Timothy to lay hold of eternal life (v. 12) and put on its attendant immortality (1 Cor. 15:51–57). That appearing will display “the glory of our great God and Savior, Christ Jesus” (Tit. 2:13). Our transformation, in which we shall become “like him” (1 Jn. 3:2; Phil. 3:20, 21), shall come about “because we shall see him as he is” (1 Jn. 3:2). The wonder and the glory of that appearing is that in it the transcendent God manifests himself in Christ and by that act makes himself available to us and bestows on us what we could never have and be apart from Christ. Thus we are to put on immortality, a characteristic that is God’s alone, and to see him in Christ and be transformed (rather than destroyed) by that sight.
It is no wonder that Paul ends this marvelous and awesome description of God with words of praise: “To him be honor and eternal dominion.” The relative pronoun ᾧ has as its antecedent the person in view in all the nominatives in vv. 15–16, i.e., God (the Father). For a consideration of what form of the verb is to be understood here, see the discussion and literature cited at 1:17.
This concluding doxology uses terms that correlate in inverse order with what has just been said about God and thus praises him in accordance with his character: “Honor” corresponds to the description of God as “he who alone has immortality and dwells in light,” and the “eternal power” is that of the only Sovereign King and Lord. By τιμή, “honor,” Paul prayerfully desires the reverence and respect that is due God (see 1:17; this word is used in praise to God and Christ in the NT in 1 Tim. 1:17; Heb. 2:9; 1 Pet. 1:7; 2 Pet. 1:17; Rev. 4:9, 11; 5:12, 13; 7:12; 21:26). κράτος (always used of God in the NT; in doxologies in 1 Pet. 4:11; 5:11; Jude 25; Rev. 1:6; 5:13; with τιμή only here and in Rev. 5:13) means generally “power” or “might” and also has the nuance “rule, sovereignty, or dominion” when referring to the ruling might of a great king (BAGD s.v. 1, 4; see also W. Michaelis, TDNT III, 905ff.). This power is αἰώνιον, “eternal.”
The doxology ends with ἀμήν, “Amen,” as do most NT doxologies (see 1:17). It is the writer’s confirmation (“so let it be”) of that which he has just written about God. Paul may also be seeking to draw out this response from his readers.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KJV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LXX Septuagint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6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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