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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yDo not quench the Spirit. 20 Do not despise zprophecies, 21 but atest everything; hold fast what is good. 22 Abstain from every form of evil.
y [1 Cor. 14:30; Eph. 4:30; 1 Tim. 4:14; 2 Tim. 1:6]
z See 1 Cor. 11:4
a 1 John 4:1; [Job 34:4]; See Eph. 5: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19–22.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19–22.
 
 
19-22절을 통해서 바울은 5가지의 명령을 하고 있다. 이중 두가지는 금지 명령이고 세가지는 정언명령이다. 
5:19–22 Paul structures the five commands into two parts: two negative commands warn against cynically rejecting Spirit-inspired prophecy (vv. 19–20), and three positive commands warn against gullibly accepting prophecy (vv. 21–22). Paul may be anticipating the problem that he later must address: an untested prophecy claiming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come” (2 Thess 2:2). test. Paul does not here give criteria for testing prophecy, but elsewhere he provides the general standard that it should be for “the common good” (1 Cor 12:7) and should build up the church (1 Cor 14:3–5). Prophecy must also agree with apostolic teaching (2 Thess 2:2; 1 John 4:1–6) as it has been recorded in the Bible.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7.
 
19절)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성령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신다.(고전 12:3) 이 성령은 어떤 능력, 에너지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탄식하시고 위로하시는 인격적인 영이시다. 본문에서 ‘소멸하다’라는 단어는 ‘스벤뉘테’로 원형은 ‘스벤튀미’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불을 끄다’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서 성령은 불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성령은 불과 같은 속성을 통해서 인간 내면의 죄악을 불태우고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도록 뜨거운 마음을 주신다. 그런데 성령을 꺼버린다는 것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억제한다라는 의미로 성령의 이끄심과 인도하심대로 살아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σβέννυμι (sbennymi), 동사. (불을) 끄다, 소멸시키다. 미래 능동태. σβέσσω; 부정과거 능동태. ἔσβεσα; 부정과거 능동태. ἐσβέσθην; 완료 중간태. ἔσβεσμαι. 히브리어 등가: כבה (10).
동사 용법
1. 끝내다 — 꺼지거나 소멸되다.
마 25:8 ὅτι αἱ λαμπάδες ἡμῶν σβέννυνται.
막 9:48 οὐ σβέννυται.
2. 불을 끄다 — 불이나 화염을 끄다. 의미상 반의어: 켜다 (불). 관련 주제: 끄다.
마 12:20 τυφόμενον οὐ σβέσει, ἕως
막 9:44 πῦρ οὐ σβέννυται
막 9:46 πῦρ οὐ σβέννυται
엡 6:16 πονηροῦ πεπυρωμένα σβέσαι·
히 11:34 ἔσβεσαν δύναμιν πυρός,
3. 끄다 ⇔ 냉각하다 — 억누르다, 불이나 불꽃을 꺼버린다는 의미로. 관련 주제: 끄다.
살전 5:19 τὸ πνεῦμα μὴ σβέννυτε,
칠십인역 참조 구절
레 6:12; 삼하 14:7; 삼하 21:17; 잠 10:7; 잠 13:9; 아 8:7; 욥 4:10; 욥 21:17; 사 42:3; 사 66:24; 3마카 6:34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완료 중간태. 완료 중간태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성령의 불을 꺼뜨리는 삶은 성령의 역사와 지배를 거부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 성령을 소멸하는 방식은 20절절에서 구체화된다. 
 
20절)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예언으로 번역된 ‘프로페테이아스’의 원형 ‘프로페테이아’는 히브리어 ‘네부아’와 같은 단어이다. 히브리어 ‘네부아’는 ‘나바’에서 유래했는데 ‘나바’는 ‘거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대신해서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에 ‘예언자’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나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대신해서 말하는 자, 그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렘 20:9) 여기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에 발생할 일을 앞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문에 ‘멸시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엑수데네이테’의 원형 ‘엑수데네오’는 ‘~로부터’의 의미인 ‘에크’와 ‘아무것도 아닌’ 이란 뜻의 형용사 ‘우데이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다’라는 의미로 ‘업신여기다, 몹시 얕보다, 무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마디로 본문은 예언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여겨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라는 의미아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언을 너무 중시 여겼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예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신다. 그런데 이를 멸시하는 행위는 성령의 활동을 멸시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언을 멸시한다는 것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일 것이다. 
 
21절)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범사에 헤아려(판타 데 도키마제테) 직역하면 ‘모든 것을 시험하여 입증하라’라는 의미이다. 21절은 두개의 명령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앞서 20절과 연결시킨다면 예언을 받아들일 때에도 반드시 헤아려 보고 좋은 것을 취하라는 의미이다. 
‘판타’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문맥속에서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헤아리다’라는 의미로 쓰인 ‘도키마제테’의 원형 ‘도키마조’는 원래 금이나 은을 용광로에 넣어 그 진위를 확인해 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시험하다. 검증하다. 입증하다’라는 의미이다.(롬 14:22; 고전 3:13; 고후 8:8; 벧전 1:7) 본문에서는 현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언의 은사를 받아 말하는 자들의 내용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악한 영에게서 온것인지(요일 4:1)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좇아서 온 것인지 분별하라는 명령이다. 영적 은사나, 예언을 판단함에 있어서 ‘도키마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준, 시금석이 필요한데 이는 첫째 예수를 주로 시인하느냐(고전 12:3),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시인하느냐하는 것이다. 당시 가현설(예수 그리스도가 육체가 아닌 영으로만 임했다는 주장)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구약에서도 모세는 거짓 선지자의 예언과 참 선지자의 예언을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예언했다 할지라도 그 예언이 실현되지 않으면 이는 거짓 선지자가 방자히 말한 것이다.(신 18:22) 둘째 예언이나 이적이 말 그대로 성취된다 할지라도 그 예언한 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자라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신 13:1-5) 
 
좋은 것을 취하고, 이를 직역하면 ‘좋은 것을 굳게 붙잡아라’라는 의미이다. 취하다라는 표현은 ‘카테케테’로 이것의 원형 ‘카테코’는 강조의 의미의 접두어인 ‘카타’와 ‘가지다, 차지하다’라는 의미의 ‘에코’의 합성어로 확고하게 붙들고 견고히 지킨다라는 의미이다.)고전 15:2; 히 10:23) 여기에서 좋은 것은 ‘칼로스’로 이는 ‘좋은, 아름다운,  착한, 더 나은, 어울리는’의 의미이다. 문맥속에서 본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확인된 영적 은사나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좋은 것으로 판별되었다면 이를 확실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22절)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앞서 헤라려서 좋은 것은 취하여야하지만 반대로 헤아려서 악한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취해서는 안되고 버려야만 한다. ‘아포’는 ‘~로부터’를 의미하는 분리와 구별의 전치사이다. ‘버리라’로 번역된 ‘아페케스테’의 원형 ‘아페코’는 ‘멀다, 삼가다, 끊다’의 의미로 본문을 직역하자면 ‘모든 형태의 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삼가라’이다. 
‘악’에 해당하는 ‘포네루’의 원형은 ‘포네로스’로 파괴적이고 사악하고 나쁜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문맥속에서 악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것, 즉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악한 죄는 전파력이 강하다. 따라서 악의  작은 부분을 허용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삶, 공동체안에 들어와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게 되고 심각해지면 그것에서 자유롭게 되기 어렵게 만든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잘못 받아들인 거짓 예언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우리의 삶을 오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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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r One Another’s Burdens
Brothers,1 oif anyone is caught in any transgression, pyou who are spiritual should restore him in qa spirit of gentleness. Keep watch on yourself, lest you too be tempted. rBear one another’s burdens, and sso fulfill tthe law of Christ. For uif anyone thinks he is something, vwhen he is nothing, he deceives himself. But let each one wtest his own work, and then his reason to boast will be in himself alone and not in his neighbor.
For xeach will have to bear his own loa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6:1–5.

1절) 신령한 너희는, 본문에서 말하는 신령한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번째는 갈라디아 교회안의 영지주의자들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두번째는 비꼬는 형태로 ‘신령한 자들’이라고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앞서 말한대로 교만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질투하는 자들에게 비꼬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세번째는 긍정적인 의미로 말그대로 신령한, 성숙한 이들로 영적 어린아기가 아니라 장성하여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줄 아는 이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교파는 성도들을 추구자, 구원받은 자, 성화된 자(the seeker, the saved, the sanctified)로 구분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교회안에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은 성령의 열매의 지도하에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교회안에 연약한 자들이나 범죄한 자들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이들을 회복시키고 화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 Paul addressed his advice to “those who are spiritual,” the pneumatikoi. Again, there has been much scholarly debate about who these “spirituals” were. W. Schmithals, among others, has argued on the basis of this word that Paul was addressing here an incipient party of Gnostics whose disruptive activities among the Galatians had occasioned Paul’s letter in the first place.115 Although later Gnostics did use the word pneumatikoi as a term of self-designation,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Paul was here addressing such a self-conscious heretical group. Another, more plausible interpretation has been set forth by those who detect a note of irony and sarcasm in Paul’s use of this term in the Galatian context. Given the picture that has already emerged of a group of fractious Christians consumed by arrogance, conceit, and selfish ambition, we can well imagine that a group of “Holy Joes” and “Pious Pollys” had formed themselves into a cadre of moral watchdogs and were self-righteously lording it over their less “advanced” brothers and sisters. If we accept this interpretation, then Paul would, in effect, have been saying: “Listen to me, those of you who think you’re so ‘spiritual.’ You talk as though you’ve swallowed the Holy Ghost, feathers and all! If you’re so ‘spiritual,’ then demonstrate your spirituality by acting responsibly and lovingly with your fallen brothers and sisters.”116
It seems best, however, to understand the “spirituals” in the same kind of positive sense Paul used it in 1 Cor 2:15–3:4. There the apostle contrasted the “spiritual” believers at Corinth with those who were sarkikoi, “fleshly,” worldly minded, that is, those who had to be fed on milk instead of meat because they were spiritually immature. They were, so to say, baby Christians more concerned with status and self-gratification than with the mind of Christ or service toward others.117
In Gal 6:1, then, “those who are spiritual” are identical with those Christians who walk in the Spirit, are led by the Spirit, and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Some early Methodist church registers contained three columns for listing those persons who attended services of worship: the seekers, the saved, and the sanctified. Paul was not here dividing the body of Christ into a two- or three-tiered society. However, he was acknowledging the fact that believers can and do sin and fall. While all sin is detestable before God and should be resisted as the plague, certain transgressions are especially hurtful to the fellowship of the church and must be dealt with according to the canons of Christian discipline. Those who are spiritually minded, that is, those whose lives give evidence of the fruit of the Spirit, have a special responsibility to take the initiative in seeking restoration and reconciliation with those who have been caught in such an error.

115 See W. Schmithals, Paul and the Gnostics (Nashville: Abingdon, 1972), 46–51. E. Pagels indicates how later Gnostics actually interpreted Gal 6:1: “Paul directs the pneumatics specifically to restore the psychics who are caught in sin and need (6:1–2). In doing this ‘fulfill the law of Christ,’ the only law the pneumatics recognized, the ‘law of love’ (5:14)” (Gnostic Paul [Philadelphia: Fortress, 1975], 111).
116 The ironic interpretation has been favored by H. Schlier, Der Breif an der Galater, KEK 7, 10th ed.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899), 270, and R. A. Cole, The Epistle of Paul to the Galatians, TNTC (Grand Rapids: Eerdmans, 1965), 172.
117 See C. H. Talbert, Reading Corinthians (New York: Crossroad, 1989), 4–11. See also B. Pearson, The Pneumatikos-Psychikos Terminology in 1 Corinthians (Missoula: Scholars Press, 1973).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409–410.

본문에서 바로잡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카타르티조’라는 단어로 문자적으로 질서를 세우다,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다라는 의미이다. 마 4:21; 막 1:19에서 그물을 깁는데 사용된 단어이다. 또한 의학적인 단어로 ‘부러지거나 어긋난 뼈를 맞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고전 1:10에서 바울은 윤리적 문제, 분쟁속에서 화합할 것을 요구하는데 사용하였다. 
- But how is this to be done? The lapsed brother or sister should be “restored gently.” The word for “restore” is katartizō, literally “to put in order,” “to restore to its former condition.”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cf. Matt 4:21; Mark 1:19) this same word is used for the mending or overhauling of fishnets. It was also a part of the medical vocabulary of ancient Greece, where it meant “to set a fractured or dislocated bone.” In 1 Cor 1:10 Paul used the same word in an ethical sense exhorting the strife-torn Corinthian believers to put aside their dissensions so that they may be “restored” to unity in thought and purpose.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411.

본문은 마 18장에서 형제의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떠오르게 한다. 처음에는 1:1로, 나아가 두세사람이 증참하고 이도 듣지 않으면 교회의 이름으로 말하고 마지막에는 출교시키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예방적인 차원의 조치라고 볼 수 있다. 교회안에서 이러한 범죄한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사후 조치도 필요하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미연에 이러한 일들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이러한 일을 처리하는데 중요한 원리는 바로 온유한 심령이다. 이는 그저 눈감아주는 것도 아니며 원칙만을 내세우며 재단하는 방식도 아니다. 이러한 화해의 프로세스는 반드시 민감함과 심사숙고하는 이해심을 가지고 접근해야만 한다. 

2-3절) 짐(burden)은 ‘바로스’로 문자적으로 무거운 무게 혹은 돌로 어떤 이에게 먼거리를 옮기게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20:12) 
- 짐의 실제 : 유혹, 시험의 짐도 있고 도덕적 실수의 결과로 요구되는 짐이 있다. 육체적 질병, 정서적 장애, 가족들의 위기, 실업, 사탄의 압제등이 있을 수 있다. 죄로 인해 창조의 실제가 파괴되었기에 신자들도 울부짖는다. 
 - 자만의 신화(The myth of self-sufficiency) 
- 상호관계의 명령(The imperative of mutuality)
-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삶(Living by the law of Christ)

4절) 살피다는 ‘도키마조’라는 단어로 뜨거운 불로 금의 순도를 결정하기 위해서 테스트 하는 것을 말한다. 
- The word for “test” is dokimazō, which is the word used for the fiery testing of gold so as to determine its purity. This verse has important implications for Christian spirituality, and we do well to heed its message in our own individual lives.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417.

자기를 돌아보는 것과 자기반성은 다르다. 
- First, there is a great difference between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The former can easily devolve into a kind of narcissistic, spiritual navel-gazing that has more in common with types of Eastern mysticism than with classic models of the devotional life in historic Christianity. True self-examination is not merely taking one’s spiritual pulse beat on a regular basis but rather submitting one’s thoughts, attitudes, and actions to the will of God and the mind of Christ revealed in Holy Scripture. To “test” or “prove” something presupposes that there is some external standard or criterion by which the quality or purity of the object under scrutiny can be measured with accuracy. No higher or better standard can be found for this important exercise than the law of Christ Paul had just extolled. This does not mean, of course, that we should not seek the assistance of fellow believers in the process of self-examination. An important part of bearing one another’s burdens is to offer spiritual guidance and friendship to one another, holding each other accountable to the high calling of God in our lives.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417.

자기 반성은 크리스찬의 삶에서 서로 경쟁하며 자랑하는 것과 관계 있다. 고린도 교회안에서 영적인 은사가 발현되었는데 이것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처럼 영적 은사를 가지지 못한 자들과 비교하고 평가하였다. 그런 자들을 향해서 각각 자기 자신을 시험하라고 바울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우리에게 제시된 성령의 은사라는 기준속에서 자신을 평가할때 이전보다 더욱 온유해졌는지? 더욱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더 사랑하며 오래참고 있는지를 시험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직하게 자신을 살필때 경쟁이 아니라 자기 고백을, 자만이 아니라 겸손을 낳게 될 것이다. 

5절) 본문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것을 요청한다. 이는 2절에서 서로의 짐을 지라고 요청하는 것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각의 구절에 사용된 동사를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절에서의 짐은 혼자 지기에는 무거운 짐으로 이를 함께 질 것을 요청 한 것이고 본문 5절에서의 짐은 ‘포션’으로 선박에 싣는 짐, 병사의 배낭, 나그네의 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땅히 스스로 감당해야할 무게의 짐을 말한다. 우리의 인생속에서 홀로 질 수 없어서 반드시 함께 나누어 져야하는 짐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져 줄 수 없는, 홀로 감당해야할 무게의 짐이 있다. 
- On first blush it seems that Paul had flatly contradicted himself within the space of three short verses. In 6:2 he instructed the Galatians to “carry each other’s burdens.” Now in 6:5 he said that each one “should carry his own load.” This apparent discrepancy is easily resolved when we realize that Paul was using two different words to refer to two disparate situations. The word translated “burdens” in v. 2 (barē) refers, as we have seen, to a heavy load, an oppressive weight, which one is expected to carry for a long distance. But the word for “load” in v. 5 is phortion, which is used elsewhere to refer to a ship’s cargo (cf. Acts 27:10), a soldier’s knapsack, or a pilgrim’s backpack.129 J. Stott correctly delineates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loads” in Gal 6: “So we are to bear one another’s ‘burdens’ which are too heavy for a man to bear alone, but there is one burden which we cannot share—indeed do not need to because it is a pack light enough for every man to carry himself—and that is our responsibility to God on the day of judgment. On that day you cannot carry my pack and I cannot carry yours.”130
On several occasions throughout this commentary we have had occasion to note that Galatians, while not laden with apocalyptic imagery or extensive discourses on last things, nonetheless presupposes a strong eschatological orientation. Here in v. 5 Paul placed the verb in the future tense (bastasei) to indicate that he was thinking not merely of an individual’s carrying his own weight or bearing his own responsibility here in this life but more particularly the future reckoning that every Christian must make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129 Moffatt translates this verse, “Everyone will have to bear his own load of responsibility.” Burton correctly notes that no sharp distinction can be drawn between these two words as such (Galatians, 334). However, the context in Gal 6 clearly shows that Paul had two distinct meanings in mind.
130 Stott, Only One Way, 159–60. Cole has suggested that Paul may be here taking one final glance toward the Judaizers, reminding them that they should be less concerned with “counting scalps” than with their own standing before God on the coming day of judgment (Galatians, 175).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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