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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Now x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So Abram went down to Egypt to sojourn there, for the famine was severe in the land. 11 When he was about to enter Egypt, he said to Sarai his wife, “I know that you are a woman beautiful in appearance, 12 and when the Egyptians see you,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Then they ywill kill me, but they will let you live. 13 Say you are my sister, that it may go well with me because of you, an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your sake.” 14 When Abram entered Egypt, the Egyptians saw that the woman was very beautiful. 15 And when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they praised her to Pharaoh. And the woman was taken into Pharaoh’s house. 16 And for her sake he dealt well with Abram; and he had sheep, oxen, male donkeys, male servants, female servants, female donkeys, and camels.

17 But the Lord zafflicted Pharaoh and his house with great plagues because of Sarai, Abram’s wife. 18 So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you have done to me? Why did you not tell me that she was your wife? 19 Why did you say, ‘She is my sister,’ so that I took her for my wife? Now then, here is your wife; take her, and go.” 20 And Pharaoh gave men orders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with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x ch. 26:1; 43:1

y See ch. 20:1–18; 26:6–11

z 1 Chr. 16:21; Ps. 105: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2:10–20.

 

 

10-13절) 앞서 아브람 일행은 벧엘을 지나 점점 남방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아브람이 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동하였다. 아마도 아브람이 애굽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 이유는 애굽, 이집트가 나일강 근처에 위치하여서 다른 지역이 가뭄으로 인해 기근이 심하게 드는 경우에도 음식이 풍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브람은 애굽에 이르렀을때 자신의 아내 사래에게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애굽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당신을 아내로 취하게 될지 모르니 자신을 나의 아내라 하지 말고 나의 누이라고 하여 내 목숨을 보존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12, 20, 26장)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명하신 곳으로 이동하는 아브람에게도 아내로 인한 우려와 걱정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아내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꾀를 내어 거짓말을 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지만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 수 많은 사건과 사고를 거쳐서 그의 신앙이 이루어지 것이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아내인 사래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래를 통해서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아브람은 사래를 위기에 처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큰 재앙)으로 아브람과 사래를 보호하셨다. 

 

우리는 왜 성경이 아브람의 윤리적인 잘못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저자는 이러한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독자 스스로 판단할 것읋 촉구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원 독자들은 이러한 아브람의 속임수를 통해서 무슨 유익이 있었을지를 알았기에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성경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처음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위협과 어려움, 심지어 아브람 자신의 도덕적 실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브람이 자신의 아내 사래를 이복 누이라고 말한 것은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창 20:12) 

Sarai is instructed to tell any man who confronts her that she is Abram’s sister. This is a half-truth, as 20:12 indicates (although “daughter of my father” could mean adopted daughter).

Scholars debate the proper understanding of Abram’s plan. Why does he think he may come out of this nightmare alive if he can only convince his hosts that the woman traveling with him is his sister? E. A. Speiser suggested that the Nuzi texts provided an answer or a source behind this strange practice.5 A marriage practice among the upper Hurrian classes, and one without counterpart in any other Near Eastern society, allowed a wife to be adopted by her husband as his sister; moreover, a woman given in marriage by her brother (as with Rebekah to Isaac by Laban) would legally become her husband’s sister. Since Abram spent part of his life at Haran (a major Hurrian city), Speiser assumed that it was while he was living in Haran that Abram was exposed to this custom.

5 E. A. Speiser, “The Wife-Sister Motif in the Patriarchal Narratives,” in Biblical and Other Studies, ed. A. Altman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1963), pp. 15–28; repr. in Oriental and Biblical Studies, pp. 62–82. See also Speiser, Genesis, pp. xl–xli, 91–94.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81.

 

당시 사래의 나이는 65세였다. 사래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을 의미한 것일까? 물론 나이가 들어도 소피아 로렌과 같이 아름다운 미모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본문의 아름다움에 지금 우리 시대의 가치와 문화적인 것을 투영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문화는 관능성과 성적 매력, 외모의 젊음을 아름다움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만 여기에 사용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창 41:2에서 훌륭한 암소를 묘사하는데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래가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했다고도 볼 수 있고 또한 그녀의 품위와 태도, 표정등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대의 사람들의 수명이 매우 길었기에 65세는 젊은 여성 취급을 받았을 수도 있다. 

 

14-16절) 아브람이 우려한대로 이들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바로의 신하들(바로의 왕자들)이 그녀를 보고 바로에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 이에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바로가 아브람을 후대하였다. 그래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남수 나귀들과 남녀 노비들과 낙타를 얻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창세기에 낙타가 언급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주전 1100년 무렵까지 낙타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길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서 이미 주전 3000년 경에 사람들이 낙타를 이용한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창세기에는 긴 여행을 할 때나 사막을 지날때 낙타가 언급되는데 이처럼 족장 시대에는 낙타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람의 부유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낙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camels. It is often stated that references to camels in Genesis are anachronistic because camels were not domesticated until the end of the second millennium BC. Archaeological evidence for the early domestication of camels is understandably limited given their use in desert regions. Even in Genesis they are usually mentioned in contexts involving long-distance travel close to deserts (e.g., 24:10–64; 31:17, 34; 37:25). Recent research, however, suggests that people used camels as early as the third millennium BC. Genesis tends to mention them at the very end of lists of possessions (30:43; 32:7), possibly suggesting that they were the least numerous of the animals the patriarchs owned.

e.g. for example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45–46.

 

Most of the commentary on this verse has focused on the mention of camels as among those animals that Pharaoh gave to Abram. If one accepts that (to the best of our knowledge) camels were not domesticated until much later in the 2nd millennium b.c., then we have here a clear anachronism. W. F. Albright has led the argument most forcibily in this direction.9 He observes the absence of references to camels in the Mari texts, the Amarna Letters, and the Ugaritic texts, all of which have much to say about nomadic peoples. In contrast to ch. 12, ch. 13, where Abram and Lot part company, makes no mention of camels, though flocks or herds are mentioned (13:5). Note, however, that in other events in Abram’s life camels are mentioned, especially in the story of the search for Isaac’s bride-to-be (Gen. 24), which has sixteen references to camels.

Others are not so skeptical about the reliability of the references to camels in Gen. 12.10 For example, a text from Alalakh (18th century b.c.) appears to refer to a domesticated camel.11

9 See, e.g.,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2nd ed. (Garden City, NY: Doubleday, 1957), pp. 164–65; idem, The Biblical Period from Abraham to Ezra (New York: Harper & Row, 1963), p. 7; idem,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 (repr.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78), pp. 62, 156. C. H. Gordon (The Pennsylvania Tradition of Semitics [Atlanta: Scholars, 1986], p. 53) remarks, “he [viz., Albright] abominated camels and adored donkeys. This had a subconscious effect on his pronouncements and publications concerning the patriarchal age. He ‘got rid’ of the camels by turning their very mention in the patriarchal narratives into anachronisms. His love of the donkey impelled him to stress the role of the Fathers as donkey caravaneers.”

10 See J. P. Free, “Abraham’s Camels,” JNES 3 (1944) 187–93; K. A. Kitchen, Ancient Orient and Old Testament (Chicago: Inter-Varsity, 1966), pp. 79–80.

11 See D. J. Wiseman, “Ration Lists from Alalakh VII,” JCS 13 (1959) 29, where text 269:59 reads 1 SA.GAL ANŠE.GAM.MAL, “one (measure of) fodder—camel.” In a following article, “Remarks on the Ration Lists from Alalakh VII,” A. Goetze remarks (p. 37), “This early occurrence of camels, missing in CAD, to be fed and, therefore domesticated, is worthy of special note.” W. G. Lambert (“The Domesticated Camel in the Second Millennium—Evidence from Alalakh and Ugarit,” BASOR 160 [1960] 42–43) objects to the interpretation of Wiseman and Goetze, and suggests that the ideogram in question means “stag,” not “camel.”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83–384.

 

 

17-20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네가 어째서 사래가 너의 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그녀를 너의 누이라고 해서 나로 하여금 그녀를 내 아내로 삼게 하였느냐라고 물었다. 이제 여기 너의 아내가 있으니 데리고 가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가 아브람에 관하여 그의 사람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아브람을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와 함께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사래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이자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다. 본문을 통해서는 바로가 어떻게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지 알았는지, 또한 어떤 재앙이 내렸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않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취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하셔서 그녀를 보내게 하셨다. 

 

이러한 죄는 고의, 태만(부주의), 무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자신의 행위가 악함을 알고도 죄를 짓는 행위라면 두번째 태만은 자신이 한 일이 나쁜일임은 알지만 고의로 행하지 않은 경우이다. 세번째 무지는 자기가 한 일이 나쁜일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바로의 죄는 세번째에 행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녀를 아내로 취할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심으로 잘못을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가 비상식적인 폭군이 아니라 매우 정상적인, 도덕적인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왕의 권력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왕상 21장 나봇의 포도원) 하지만 바로는 그를 죽이지 않고 도리어 조용히 떠나게 하였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바로는 아브람의 배후에 어떤 힘이,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알았고 이로 인해 아브람에게 아내를 데려가고 그의 소유와 함께 떠나 보낸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바로는 자신이 아브람에게 준 양과 소와 노비나 나귀, 낙타등을 도로 빼앗기 않았다. 

 

본문에 등장하는 기근-체류-포로됨-귀환의 사이클은 이후 출애굽(모세)때에 다시 반복된다. 또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귀환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출애굽의 귀환과의 차이점을 보자면 본문에서의 애굽은 압제자가 아니었다. 바로는 아브람에게 포악하게 굴지 않았다. 

 

결국 본문속에서 아브람의 계략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개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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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And Jesus elooked around and said to his disciples, f“How difficult it will be for those who have wealth to enter gthe kingdom of God!” 24 And the disciples hwere amazed at his words. But Jesus said to them again, i“Children, jhow difficult it is2 to enter gthe kingdom of God! 25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person to enter gthe kingdom of God.” 26 And they were exceedingly astonished, and said to him,3 “Then who can be saved?” 27 Jesus klooked at them and said, l“With man it is impossible, but not with God. For all things are possible with God.” 28 Peter began to say to him, “See, mwe have left everything and followed you.” 29 Jesus said, “Truly, I say to you, nthere is no one who has left house or brothers or sisters or mother or father or children or lands, for my sake and ofor the gospel, 30 who will not receive a hundredfold pnow in this time, houses and brothers and sist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qwith persecutions, and in rthe age to come eternal life. 31 But s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e See ch. 3:5
f [1 Cor. 1:26]; See Matt. 13:22
g See Matt. 12:28
h ver. 32
i ch. 2:5 (Gk.); [John 13:33; 21:5]
j Job 31:24; Ps. 49:6; 52:7; Prov. 11:28; 1 Tim. 6:17
2 Some manuscripts add for those who trust in riches
g [See ver. 23 above]
g [See ver. 23 above]
3 Some manuscripts to one another
k ver. 23
l ch. 14:36; Gen. 18:14; Job 42:2; Jer. 32:17, 27; Luke 1:37
m ch. 1:18, 20; Matt. 4:20, 22
n [Luke 14:26]
o See ch. 8:35
p [Matt. 6:33]
q 2 Cor. 12:10; 2 Thess. 1:4; 2 Tim. 3:11, 12; [John 15:20; Acts 14:22]
r Matt. 12:32; Eph. 1:21; [Luke 20:35]
s See Matt. 19:3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0:23–31.

앞서 한사람이 나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질문했는데 그는 이미 계명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주님께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를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슬퍼하며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에게 부족한 한가지가 바로 결정적인 것이었는데,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23절)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은 자기 만족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강화하기때문에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천국과 멀어지게 될 수 밖에 없다. 제자들이 이렇게 놀란 이유는 당시의 부에 대한 기준때문이었다. 당시는 부유함이 율법을 따르고 경건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주님의 메시지는 재자들에게도 혁명적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구약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부유함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또한 경건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졌다.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보호와 도움에 대한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경건과 가난을 좀처럼 연관시키지는 않았다. 시편에서는 가끔 의를 위해서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의존하는 것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마카비안 시기(142-63BC)를 지나면서 부자들은 종교세력과 함께 이방의 압제자들과 손을 잡았고 가난한 이들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당시에 매우 혁명적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하지만 본문속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자를, 부유함 자체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유함 자체는 가치 중립적인 것인데 이것이 유혹이 되고, 우리의 삶에 장애물이 되며, 우리의 생각이 나뉘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은 거짓 안전을 제공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The event became the occasion for a brief discourse. Jesus’ statement must be contrasted with the Jewish attitude toward riches. The dominant Jewish view was that riches were an indication of divine favor and a reward for piety (Job 1:10; 42:10; Ps 128:1–2; Isa 3:10). Although provision was made for the protection and assistance of the poor (Deut 15:7–11; Prov 22:22–23), rarely was poverty associated with piety. The Psalms sometimes picture the poor as the righteous who rely on God for aid (Pss 37:14, 16; 69:32–33; 86:1–2). The Psalms frequently portray God as the special help of the poor. Especially during the Maccabean period (142–63 b.c.), the rich became associated with the priestly aristocracy ready to compromise with foreign oppressors; the poor, with those who remained faithful to God (cf. T. Jud. 25:4; Pss. Sol. 10:6). The Qumran community apparently used “the poor” as a self-designation (1 QM 11:9, 13; 13:14; 1QH 5:13–22, in which “the poor” parallels those eager for righteousness; 1QpHab 12:3, 6, 10; 4QpPs 2:9–10; 3:10).
The teaching of Jesus was nonetheless revolutionary in its time and remains scandalous even today. However, Jesus did not condemn riches as evil in themselves. They are a temptation, a hindrance, a diversion. They provide false security that makes radical trust in God difficult.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63–164.

24-25절) 이에 그 말씀을 듣고 놀라는 제자들을 향해서 다시 말씀하신다. “애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단다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재물을 우상으로,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늘귀와 낙타의 비유는 과장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적으로 볼때 거대한 낙타가 매우 작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앞에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Anyone who trusts in riches (as an idolatrous replacement for God; Matt. 6:24)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his life disposition is diametrically opposed to submitting to God’s will. The hyperbole of a large camel having to fit through the small eye of a needle stresses that such a thing is humanly impossible (but see Mark 10:27). For other hyperboles in Jesus’ teaching, see Matt. 7:3–5; 23:24; on the “eye of a needle,” see note on Matt. 19:2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15.

본문의 낙타로 번역된 단어는 로프(rope)와 매우 유사하다. 헬라어로 한단어만이 차이가 난다.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작은 문의 이름이 바늘의 눈(Eye of the Needle)라고 불린다. 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와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작은 문을 대조함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극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All attempts to ease the harsh meaning of v. 25 must be resisted, e.g., the substitution of the Greek word meaning rope for the one meaning camel (there is only one letter difference in Greek) or the idea that the reference is to a small gate in Jerusalem called “Eye of the Needle” through which a camel could go only with great difficulty.
The mere existence of the word meaning rope is unattested until at least the fifth Christian century and perhaps until medieval times. Furthermore, to put a rope through the eye of a needle would be almost as difficult as to put a camel through it. No early evidence exists that there was a small gate called “Eye of the Needle.” The claim first appears in the ninth Christian century, long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Jerusalem of Jesus’ day. The contrast between the largest Palestinian animal and one of the smallest openings is clearly intended to indicate the impossibility of a rich person—or anyone else (v. 24)—entering the kingdom by doing something for himself or herself.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64.

26절) 이에 제자들이 놀라서 서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의미와 구원을 얻는 것은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27절) 의아해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영생을 얻는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구원을 얻는 것은 모두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모든 이들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이러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This verse probably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entire passage. Inheriting eternal life, entering the kingdom, and being saved are impossible for any human being, but not for God, who is good and desires the salvation of all. Therefore all must depend entirely upon God. Such absolute trust in God makes possible a life of faithful discipleship (v. 28).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65.

- The terms of salvation, however, have already been laid out in 10:15. To enter the kingdom of God one must receive it as a child. The rich man was willing to meet Jesus halfway. He used the word inherit, which is one way children receive things, but he was only partially willing to put himself in the position of a child. He did not want to give up the things he had accumulated as an adult.
The disciples, on the other hand, were not wealthy people, and they wished to hold on to their dreams of power and prestige despite what they had left behind. The picture that emerges from the events of 9:33–10:31 is one of people who are enmeshed in a web of values, relationships and structures from which they cannot extricate themselves. Left to themselves they would have been unable to let go of the things that prevented them from becoming children who could receive the kingdom on God’s terms. The hope for salvation does not lie in us. It comes from God, who is able to bring people to the point where they give these things up. The Bible presents God as the One who does impossible things—enabling Sarah to conceive when she was ninety, sending water gushing from a rock in the desert, and sustaining a widow with an inexhaustible supply of flour and oil. Perhaps helping adults become children should be added to the list.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198–199.

28절) 이에 베드로는 자신이, 또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부자가 아님을 항변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자신들의 직업과 가정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랐다. 물고기를 잡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가족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랐다. 한벌 옷 외에 다른 소유들을 주장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아갔다. 현대의 모든 사역자들, 본인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는 표현은 과장된 표현이다. 

29-30절) 이에 주님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함께 받고 내세, 올 세대에 영생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신다. 29절과 비교할때 30절에는 아버지가 생략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부재가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유일한 아버지되심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또한 마가의 본문에서는 박해를 겸하여 받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으셨고 당신의 제자들도 그렇게 받게될 것을 예견하신 것이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는 박해받는 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특별히 마가가 박해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ough v. 29 mentions leaving father to follow Christ, fathers are noticeably absent in the enumeration of relationships in v. 30. This absence suggests that God is the one “Father” of disciples. Some commentators have questioned whether Jesus included the word “persecutions” as part of the “reward” of discipleship, and they have suggested that it is the addition of the early church in light of its experiences. Jesus, however, could have foreseen the persecution of his followers. He himself was persecuted, and it was reasonable to expect that his disciples would be also. Significantly, both Matthew and Luke omit this reference to persecution. If this had been added by the early church, it most likely would have found its way into all three accounts. Persecution is a specially Markan emphasi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65.

31절) 이어 주님께서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병행구절인 마 20:16과 눅 13:30절은 이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 “나중된 자로서 먼저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있다”라는 것이다. 본문은 주목받지 못하고 이땅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순종하는 제자들(나중된 자)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된 자들인가 나중된 자들인가? 먼저된 자로서 이후까지 계속 먼저된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나중된 자로서 우리는 이땅의 삶에서 인정받을만한 결과를 내거나 만족할 만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을 천국의 보상을 믿기에 잘 참아내고 있는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제자도의 삶을 살아내고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천국의 소망, 영생, 구원에 대한 소망이다.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자에게 주님께서 보상하시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 교회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오래된 구조와 충돌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충돌의 과정에서 핍박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 교회는 가족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가족으로서 소유를 함께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하여 삶의 관계가 정렬된다. 
- The assurance Jesus offered is cast in the language of family, and it recalls the encounter between Jesus and his mother and brothers (3:31–35), where he introduced the idea of a new family composed of those who do the will of God. The material in 10:29–31 expands upon the idea of this new family. It is a whole community of people with their houses and lands who have made doing the will of God the basis of their lives. Those who leave behind loved ones and property for the sake of Jesus and the gospel become part of a new community in which persecution is a consequenc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old structures of life and this new one. This is as far as the Gospel of Mark goes in describing the church: it is a community of people who relate to each other as family, hold property as a family and order their mutual relationships around the values of the kingdom of God. In this new community, questions of priority, status, value and obligation find their shape in the life of the Son of Man who was delivered into the hands of people vested in structures of life that opposed the kingdom of God.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199.

To receive eternal life we must enter the kingdom of God as a child. That is no small matter. It is not a minor adjustment in our spiritual calculus of what we ought to do and how many minutes a day we ought to devote to it. Nor is it an occasion for sentimental thoughts about the spiritual child in each of us. Receiving the kingdom of God as a child means that we come face to face with the concept that the best thing in life is something we cannot earn. And if that is true, how are we to regard the things in life that we earn, like our homes, promotions or standing in the community. If the ultimate good is a gift and not a reward at all, then what value should we place on the prizes that we do win?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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