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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rothers, ujoin in imitating me, and keep your eyes on those who walk vaccording to the example you have in us. 18 For wmany, of whom I have often told you and now tell you xeven with tears, walk as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19 yTheir end is destruction, ztheir god is their belly, and athey glory in their shame, with bminds set on earthly things. 20 But c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dfrom it we eawait a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21 who will transform four lowly body gto be like his glorious body, hby the power that enables him even i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u[ch. 4:9]; See 1 Cor. 4:16
v1 Pet. 5:3
wSee 2 Cor. 11:13
x[Acts 20:31]
y2 Cor. 11:15; [2 Thess. 1:9; 2 Pet. 2:1, 3]
zSee Rom. 16:18
a[Hos. 4:7; 2 Cor. 11:12; Gal. 6:13; Jude 13]
bRom. 8:5; Col. 3:2
cSee Eph. 2:19
dActs 1:11
eSee 1 Cor. 1:7
f[1 Cor. 15:43–53]
g[ver. 10; Col. 3:4]; See Rom. 8:29
hSee Eph. 1:19
i1 Cor. 15:2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7–21.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는 우리의 본을 따라 걷는 그러한 자들을 눈여겨 보라.
바울은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회 있는대로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따라서, 그들을 모방하며 자라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본을 보이느냐, 우리들에게 어떤 멘토, 본받을 믿음의 선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Much Christian growth comes through imitation of other Christians (4:9; 1 Cor. 11:1; 2 Thess. 3:8–9; 1 Tim. 4:12, 15–16; 2 Tim. 3:10–11; Heb. 13:7; 1 Pet. 5:3).
바울이 자신의 양떼에게 자신을 모방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11:1에서 명백히 밝히는데, 우리의 본문 빌립보서 전체에서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 2:6–11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모범을 그립니다. 그런 뒤, 빌립보서 2:17에서 그 모범을 따라 바울 자신도 독자들의 믿음의 섬김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어떠한 자기희생으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고 있는가도 보여 주었습니다. 3장에서 는 자기가 유대인으로서의 특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손해로 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죽음과 같은 모습되는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3장 끝까지 그리스도를 모방함에 대해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바울 자신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권합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도 이미 그런 사람들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높이 천거했지만, 다시 한 번 말하는 까닭은, 그들 외에도 바울이 보여 준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본받아 살라는 당부를 독자들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43–144.
이렇게 자신을 따르라고 이야기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제시하는 삶의 모범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고 있다.
본절의 본받으라라고 말하는 이 주제는 본서 전체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1:30; 2:18에서 등장하는 데 바울은 그리스도와 자신의 모범을 모두 이것에 투영하고 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으로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바욿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가치있다라는 것 때문에 이전에 가치있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마침내 그의 죽음에 동참한 것처럼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도전한다. 바울이 본받을 것을 도전하는 부분에는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따르는 삶으로의 변혁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This language occurs in two kinds of contexts in Paul: suffering for the sake of Christ and the gospel, and behavior that conforms to the gospel.8In every case “imitation” of Paul means “as I imitate Christ” (expressly so in 1 Cor 11:1; cf. 1 Thess 1:6).
8See esp. 1 Cor 4:16, where the Corinthians are to be reminded of Paul’s “ways in the Lord.” The early believers in Christ did not live by “principles” or by “the Book,” but by the living example of those who taught by doing as well as by instruction. Thus the nature of Paul’s argument with the Thessalonians in 2 Thess 3:7–10. See the discussion in Fee, First Corinthians, 187–88.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64.
당시 빌립보라는 도시는 크지 않은 도시였고 이 도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더욱 주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도 우리 주위에 주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목하여 보는 것은 중요하다. 결국 우리가 무엇에 우리의 눈을 드리느냐, 무엇을 주목하느냐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 눈 여겨 보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게 된다.
18-19절)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번 이야기했고 이제 이야기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우상)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이들을 이러한 사람들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인 이들
-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위장)인 이들
- 그들의 영광이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는 이들
- 그들의 마음이 세상일에 있는 이들
이 19절의 묘사를 보건대, 그들은 철저한 유물론자들로서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며, 식욕이나 성욕 등을 자유분방하게 추구했던 에피퀴루스 학파의 추종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3:2부터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들로 염두에 두어 왔음을 생각할 때 여기 18–19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도 그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특히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는 부분이 로마서 9:1–5에서 그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표현하는 슬픔과 아픔과 잘 일치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당연히 믿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구원을 이방인들보다 먼저 얻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롬 1:1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사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두 마음(슬픔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신앙과 적대 행위에 대해서 말할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유대인이 맞다면, 그들은 예수가 신적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쳐부수고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자신들에게 자유와 정의와 풍요의 세상을 이루어 주지 못한 것을 꼬집는 자들입니다. 그러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율법(신 21:23)에 의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낙인찍혔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히 분개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등 원수 노릇을 한 것입니다(고전 1:22–23, 살전 2:14–16, 사도행전 여러 곳들).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배를 신으로 섬긴다고 욕하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철저한 정결의 법, 특히 음식 가림의 법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가리는 정결의 법에 몰두하는 것, 배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의 문제가 우상화의 수준에 이른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술 안 마시는 것과 담배 안 피우는 것을 기독교 윤리의 전부로 알고 그것들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경향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인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킴과는 관계가 멉니다. 그런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이었기에 레위기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몰두가 우상화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들의 부끄러운 것”이란 할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3:2에서 이미 할례를 남성 성기의 표피 한 조각을 떼어 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악평하였는데, 여기서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고대 헬라-로마 세계에서 유대인들의 할례는 놀림거리였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운동 경기를 할 때 옷을 벗었고 로마의 문화 자체가 목욕 문화였기에 할례는 쉽게 이방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 문화에 동화된 유대인들은 이미 난 할례 자국을 일부러 수술하여 없애려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로 그것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의 표징으로 보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됨의 표징으로 자랑하는 할례나, 자신들의 거룩성을 지켜 구원의 공동체가 되게 하리라고 본 정결의 법 등을 전혀 무가치한 것들로, 그들이 결국 멸망에 이를 때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것들은 이 아래 “땅 위의 것들”로서 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는 하늘의 것들(골 3:1–2)과 대조되는 것들입니다. 하늘의 초월에서 오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그의 구원을 덕 입어야 우리도 그 초월의 생명(신적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런 것은 외면, 핍박하고 대신 할례나 음식 가림 등 이 땅 위의 문제들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45–147.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로 부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본문 속에서는 앞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그들과 우리를 비교 대조한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들은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구원자이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당시 빌립보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그 시민권을 누렸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면 세금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로 이러한 권리를 자랑할 수 없었다.(3절, 행 16:37)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There is an explicit contrast here between “us,” Christians whose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those whose minds are “set on earthly things” (v. 19). There is also an implied contrast with the Roman citizenship that the Philippians enjoyed: they were grafted into an ancient Roman family line that is celebrated in a number of first-century inscriptions from the city, and they received a number of taxation privileges. As a mere earthly matter, they cannot put their confidence in Roman citizenship (cf. v. 3; see Acts 16:37), since they are citizens of heaven. we eagerly await.Christians anticipate Christ’s return and the bodily resurrection (Rom 8:23).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cf. compare, confer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1.
본문에 사용된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폴리테우마’라는 단어로 연방, 국가라는 의미로 본 절에서만 등장한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폴리스’로 도시,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폴리테우로마이’라는 동사가 살다, 생활하다, 시민으로서 생활하다라는 의미인데 행 23:1과 빌 1:27에 사용된다.
(빌 1:27, 개정)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The vb. πολιτεύομαιclearly has the general sense “to lead one’s life, conduct oneself” in Acts 23:1, which records Paul’s words to the Sanhedrin, “Brothers, up to this day I have lived my life with a clear conscience before God [πεπολίτευμαι V 4, p 96 τῷ θεῷ]” (NRSV; NIV, “I have fulfilled my duty to God in all good conscience to this day”). In the only other use of this vb., Phil 1:27, godly living is also in view: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ἀξίως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τοῦ Χριστοῦ πολιτεύεσθε]” (NIV, both 1984 and 2011 eds.). The TNIV, however, has a different rendering: “as citizens of heaven live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is expansive transl. reflects the view of many commentators that here πολιτεύομαιalludes to the civic duties of citizenship, suggesting: “You know the pride and responsibility attached to living in a Roman colony: remember that you have a higher allegiance calling you to faithful conduct” (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80).
Such an interpretation is tied to Phil 3:20, which contains the only NT occurrence of the noun πολίτευμα. The apostle had pointed out the ungodly way in which “the enemies of Christ,” whose mind is on “earthly things [τὰ ἐπίγεια],” conduct themselves (3:18–19, using the vb. περιπατέωG4344; see πατέωG4251). By contrast, he asserts, ἡμῶν τὸ πολίτευμα ἐν οὐρανοῖς ὑπάρχει. The KJV takes the noun here in a general sense, “our conversation [i.e.,conduct] is in heaven.” Most scholars view this rendering as inappropriate, though there is disagreement regarding its precise meaning. The transl. “citizenship” (so NIV, NRSV, etc.) indicates the status of the believers. M. Dibelius suggests “colony” (An die Thessalonicher I, II. An die Philipper, 2nd ed. [1925], 71). Others prefer “capital or native city, which keeps the citizens on its registers” (E. Stauffer, New Testament Theology[1955], 296–97). There is much to be said for the sense “commonwealth,” suggesting a dynamic nuance: “the state as a constitutive force regulating its citizens” (A. T.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Studies in the Role of the Heavenly Dimension in Paul’s Thought, with Special Reference to His Eschatology[1981], 99, 101).
In any case, R. P. Martin rightly states that “the background of the word, in this context, is the situation of the readers who live in a city which was a Roman military colony directly related to the capital city of Rome” (The Epistle of Paul to the Philippians[1959], 160–61). As Roman subjects, the Philippian Christians owed an allegiance to the far-off capital city of Rome. At the same time, they had “another king, one called Jesus” (Acts 17:7). Hence, on earth they are resident aliens who dwell temporarily in a foreign country; their true home is elsewhere (cf. Heb 11:13; 1 Pet 1:1; 2:11; Jas 1:1; Diogn.5.4–5, 9–10).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95–96.
And they are citizens of the heavenly commonwealth “already,” even as they await the consummation that is “not yet.”20Although Paul’s language will not quite allow the translation, “we are a colony of heaven” (Moffatt), the point of the imagery comes very close to that. Just as Philippi was a colony of Rome, whose citizens thereby exemplified the life of Rome in the province of Macedonia, so the citizens of the “heavenly commonwealth” were to function as a colony of heaven in that outpost of Rome. That this is Paul’s concern lies in the context. They are to imitate Paul in their “walk,” because (“for”) their true “commonwealth” is in heaven; as such they live God’s righteousness as an outpost of heaven in Philippi. And that life is cruciform in expression, which knows Christ in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by being “conformed” to his death on the cross. Thus this passage serves as the basis for the preceding appeals, as well as for those that follow (calling for “steadfastness” and “unity”).
20Cf. the anonymous Ep. Diog.5.9 (ἐπὶ γῆς διατρίβουσιν, ἀλλʼ ἐν οὐρανῷ πολιτεύονται, “[Christians] go about their business on earth, but they live as citizens of heaven”), which is almost certainly dependent on a combination of this text and 1:27 (which also serves as evidence that the verb in 1:27 and this noun were understood to reflect the same reality).
Moffatt James Moffatt, The New Testament: A New Translation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9.
21절)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 영광의 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그분의 몸은 육체적인 물질적인 속성을 지닐뿐만 아니라 영광스럽다. 부활하신 주님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다. 뿐만 아니라 신비하게 인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잠겨진 방을 통과하셨고 십자가 이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육체적인 존재로 계시기 보다는 40일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지셨으며 다시 나타나셨다.
his glorious body.Can be explained from the Gospels, especially Luke and John, which describe Jesus’ body as physicalbut also glorious and not limited by being material. The risen Lord could be touched (Luke 24:39; John 20:27), and he could eat (Luke 24:42–43). On the other hand, he was also mysteriously unrecognizable (Luke 24:16; John 20:15) and could pass into a locked room (John 20:26); rather than being a constant physical presence with the disciples as he was before the crucifixion, he appeared, disappeared, and reappeared over 40 days (Luke 24:31; John 21:14; Acts 1:3).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들로서 하늘나라의 식민지에 사는 것이며, 하늘에서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앞서 1:27에서 쓰인 헬라어 폴리테우에스타이(politeuesthai)와 함께 이곳에 쓰인 폴리테우마(politeuma, 시민권)는 빌립보가 야만세계에 박혀 있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이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교회)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의 시민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로마로부터 받은 사람들로서 주위의 야만세계 에토스와 그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에토스와 법을 따라 삶으로써 로마의 높은 문명을 야만세계에 과시합니다. 그렇듯이 교회도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땅의 에토스와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에토스와 법을 따라 사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높은 가치를 이 암흑의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장을 실존의 원칙으로 삼는 이 땅 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도리어 자기희생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치들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가치들을 사모하며 그것들을 실현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또 하늘에서 오시는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온 세상의 구원자(soter)로 선포했습니다. 빌립보의 시민들 가운데는 그것을 믿는 아우구스투스 직할 부대의 제대 군인들과 그들의 후예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진정한 구원자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들, 땅 위의 것들은 피조물적 제한성 때문에 구원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도 거짓 구원자이고, 자신들의 율법 지킴으로 구원받으려는 유대인들의 노력도 헛된 것입니다. 오로지 하늘의 초월에서 오시는 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질서를 세움으로써 이룬 평화(pax romana)는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초월에서 오신 신적 구원자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agape)만이 진정한 평화, 곧 구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의 죽음 후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로 높여지신 그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2:9–11)가 하늘로부터 오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천한 몸을 자기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양(symmorphon)으로 변형시킬(metaschematizein)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런 몸을 가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체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을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한(3:11)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얻을 완성된 구원을 우리가 자신이 본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 하나님의 영광으로 휩싸인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몸”이란 우리의 살덩어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의 비천한 몸, 즉 죄악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때 죄와 죽음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신적 생명(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러한 구원을 이루어 주실 터인데, 그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2:9–11에서 이미 본 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의 우편에 높여 만유를 다스리는 주권까지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위임받은 권세로(고전 15:25 참조) 우리의 비천한 몸에 눌어붙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깨뜨리고 우리로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고 자신의 부활의 생명을 갖게 할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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