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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But you bare not in darkness, brothers, for that day to surprise you like a thief. 5 For you are all cchildren2 of light, children of the day. We are not of the night or of the darkness. 6 So then dlet us not sleep, as others do, but let us ekeep awake and fbe sober. 7 For those who sleep, sleep at night, and those who get drunk, gare drunk at night. 8 But since we belong to the day, let us be sober, hhaving put on the breastplate of ifaith and love, and for a helmet the hope of salvation. 9 For God has not destined us for jwrath, but kto obtain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10 lwho died for us so that whether we are awake or asleep we might live with him. 11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one another up, just as you are doing.
b 1 John 2:8
c See Luke 16:8
2 Or sons; twice in this verse
d [Mark 13:36]; See Rom. 13:11–13
e See Matt. 24:42
f See 1 Pet. 1:13
g [Acts 2:15; 2 Pet. 2:13]
h Isa. 59:17; Eph. 6:14, 17
i [Eph. 6:23]
j See ch. 1:10
k 2 Thess. 2:13, 14; [Heb. 10:39]
l Rom. 14:9; [2 Tim. 2: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4–11.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4–11.
앞서 1-3절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 그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평안과 안전을 외치지만 결코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4-5절에서 형제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다르다.
4절) 본문의 ‘형제들아’는 ‘아델포스’로 실제로 남성형 복수 명사의 형대로 사용되지만 여러 번역본에서 ‘brothers and sisters’로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남성 성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앞선 1-3절에 등장하는 그들, 평안과 안전을 외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갑작스런 심판이 도둑같이 임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어둠에 속하지 않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어둠과 빛, 밤과 낮을 대비시키는 것은 묵시문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여러 특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어둠’은 ‘스코토스’로 ‘어둠(빛의 부재), 죄악’을 의미한다. 이처럼 어둠에 속했다라는 것은 죄가운데 거한다는 것으로 불순종과 자기중심성을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반대로 어둠에 있지 않음의 상태는 이후 5절이 말하는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주의 날(2절)이 도둑같이 임하겠지만 어둠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
- σκότος -ους, ὁ; (skotos), 명사. 흑암, 어둠. 히브리어 등가: חֹ֫שֶׁךְ (61). 아람어 등가: חֲשׁוֹךְ (1).
명사 용법
1. 어둠 — 빛 또는 조명의 부재. 관련 주제: 어둠; 어둠; 어둠; 무두질.
마 6:23 τὸ σκότος
막 15:33|| Καὶ γενομένης ὥρας ἕκτης σκότος ἐγένετο ἐφʼ
고후 4:6 Ἐκ σκότους
엡 5:8 ἦτε γάρ ποτε σκότος,
유 13 ὁ ζόφος τοῦ σκότους
2. 악의 영역 ⇔ 어둠 — 악, 죄악됨,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무지가 지배하는 영역. 빛이 없는 곳으로 이해된다.
엡 5:11 ἀκάρποις τοῦ σκότους, μᾶλλον
엡 6:12 τοῦ σκότους τούτου,
살전 5:4 ὑμεῖς δέ, ἀδελφοί, οὐκ ἐστὲ ἐν σκότει,
벧전 2:9 ὅπως τὰς ἀρετὰς ἐξαγγείλητε τοῦ ἐκ σκότους
요일 1:6 ἐν τῷ σκότει
3. 어둠 (근원)† — 어둠의(혹은 어둠을 초래하는) 원천으로 사용되는 모든 개체. 관련 주제: 어둠.
마 6:23 ἐν σοὶ σκότος ἐστίν,
눅 11:35 ἐν σοὶ σκότος ἐστίν.
요 3:19 μᾶλλον τὸ σκότος
여러 용어 명사 용법
1. 음침한 어둠.† — 빛이 없는 것으로 특징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 관련 주제: 어둠.
벧후 2:17 ὁ ζόφος τοῦ σκότους
유 13 ὁ ζόφος τοῦ σκότους
명사. 명사
|| || 눅 23:44 || 마 27:45
†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 The words οὐκ ἐστὲ ἐν σκότει (“you are not in darkness”) also take up the thought of the previous verse and imply a contrast between Paul’s readers and those who live ἐν σκότει (“in darkness”) outside their group. The phrase “in darkness” can have two possible senses here. (1) It may mean that those spoken of in the previous verse are distant from and even opposed to God. The use of language regarding light to symbolize God and darkness to symbolize alienation from and opposition to God goes back to the OT (cf. Job 22:9–11; Pss. 27:1; 74:20; 82:5; 112:4; Is. 2:5; 9:2; 60:19f.; Pr. 4:18f.). It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at Qumran (cf. 1QS 3:13–4:26; 1QM). Paul himself uses the imagery of light and darkness in a similar fashion on several occasions (cf. Rom. 13:12; 2 Cor. 4:6; 6:14; 11:14; Col. 1:12f.). (2) Paul may be using the phrase “in darkness” figuratively of ignorance (cf. Rom. 1:21; 2:19; 1 Cor. 4:5). This understanding would go well with the following result clause ἵνα ἡ ἡμέρα ὑμᾶς ὡς κλέπτης καταλάβῃ (“so that the day [of the Lord] does not overtake you as a thief”). Understood in this way v. 4 emphasizes that Christians differ from outsiders in that they are aware of the imminence of the day of the Lord, while the day will overtake those who are ignorant about its coming like a thief. On the other hand, the light and darkness antithesis of v. 5 suggests that Paul has in mind darkness as that which is alien and opposed to God. If we accept this interpretation the second possibility mentioned above is implicit in any case since those who live in the darkness of their pagan ways also live in ignorance of the coming day of judgmen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1.
5절)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5절 본문은 4절의 근거를 이야기한다. 형제들에게 심판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 문헌과 신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역에 속한 이들에 대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눅 16:8; 요 12:36; 골 1:13)
‘낮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사용한 독특한 표현으로 빛과 낮의 개념을 연결시키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의 아들’이라는 특정한 표현을 통해서 어떤 특별한 특성을 가진 이들이라는 의미를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낮, 빛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형제들을 빛, 낮의 아들-자녀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요 8:12, 9:5)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의 아들들로 낮체 속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다.
- The combination of “son of” used in a figurative sense with a descriptive or possessive genitive is a Hebraism (see BDF §162.6; Turner, Syntax, 207f.) reflective of a patriarchal society. It occurs regularly in the OT (e.g., 1 Sa. 2:12; Ps. 89:22; Is. 14:12; 19:11; 49:15; 61:5; 62:8—note that some of these are rendered very differently from the original Hebrew in modern English translations), and is also found in the NT (cf. Mk. 3:17; Mt. 9:15 [Greek]; Lk. 10:6; 16:8; Jn. 17:12; Eph. 2:2). The precise formulation “sons of light” (τοὺς υἱοὺς τοῦ φωτός) appears in Lk. 16:8 (cf. Jn. 12:36). But it is best known for its frequent usage in the Qumran documents, where the sons of light, that is,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who share in eschatological salvation available only in the community, are opposed by the sons of darkness, that is, anyone outside the community (cf. 1QS 1:9–10; 3:13, 24–25; 1QM 1:1, 3).
BDF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and rev. Robert W. Funk.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1.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2.
일반적으로 ‘낮’이라는 표현은 ‘헤메라’인데 이는 '날, 기간, 낮’의 의미를 지니는데 본문에서는 의와 선이 지배하는 영역, 특별히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들의 영역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빛’ 해당하는 ‘포스’도 하나님의 의로우심, 선하심, 지식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영역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빛과 낮의 아들들의 중요한 특성은 바로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의 상태이다. 따라서 빛이 존재하면 어둠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6-7절) 바울은 빛의 아들들에게 어둠의 아들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한다. 이는 잔다는 것은 도덕적,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여 방심하여 다가올 그날을 의식하고 준비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랑을 맞이하는 처녀들처럼 깨어서 맞이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본문에서 ‘자다’라고 표현된 ‘카테우도’는 ‘잠들다, 죽다, 깨있지 않다,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어 7절은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을 밤에 취하라고 말한다.
앞서 6절에서 깨어서 정신을 차리는 상태와 자고 취하는 상태가 대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의 차이이다.
8절) 다시금 바울은 낮에 속한 이들에게 갑옷을 취할 것을 명한다. 성도들은 낮에 속하여 어둠과 싸우는 전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사 59:17절의 비유를 사용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갑옷을 취하라고 말한다.
이사야 59:17
17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우리 그리스도인, 성도들은 주의 날에 영의 갑옷을 입고 영적 전투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설 것을 요구받는다.(롬 13:12; 고후 6:7; 엡 6:10-17)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명한다. 앞서 바울은 이미 1:3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야기한바있다.(고전 13:13)
데살로니가전서 1:3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 The imagery originates from Isa 59:17, which portrays God as a warrior wearing armor. Paul uses this military image to describe a variety of virtues with which Christians should arm themselves in their spiritual battle (cf. Rom 13:12; 2 Cor 6:7; Eph 6:10–17). The three virtues that he exhorts the Thessalonians to put on consist of the familiar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see note on 1:3).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6.
- θώραξ (“breastplate”) and περικεφαλαία (“helmet”) as a combination almost certainly go back to Is. 59:17, where God is said to “put on righteousness as a breastplate and a helmet of salvation.” This is probably why Paul does not add a third item of armor to his formulation even though he uses the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which would have fit more neatly with three items of armor (cf. Eph. 6:14–17, which develops the theme of Is. 59:17 more explicitly as other items of equipment are added to the original two; each item is then correlated with a particular Christian virtue or concept). Paul has only used Is. 59:17 as a point of departure, applying an image used exclusively of God in that text to himself and his readers. He does so by modifying the characteristics associated with the two pieces of armor to conform to the Christian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The original connection of salvation with the helmet of God in Is. 59:17 may have suggested to Paul the possibility of using the imagery of armor in this context in the first place.
The expression “hope of salvation”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in understanding Paul’s views regarding salvation at the time that he wrote the letter. He believed that salvation for the Christian still lay in the future when Christ would come from heaven for his people (cf. 1:3; 4:16f.; 5:9f.), and therefore it was the object of Christian hope in the present. This sense of expectancy is considerably diminished in some of the later letters of the Pauline corpus, for example in Ephesians, where salvation has already been achieved, and thus a strongly realized eschatology is present (see Eph. 2:1–10). The striking difference between the “hope of salvation” in 1 Thes. 5:8 (cf. Rom. 13:11) and the “realized” salvation of Ephesians 2 is one of the principal reasons why many scholars find the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a major difficulty.
Paul has introduced the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into the parenetic section of 1 Thessalonians to remind his readers of the need to maintain these Christian virtues. Maximum preparedness is required of the readers because the time of their salvation is potentially close at hand.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6.
9절) 원어는 ‘호티’라는 원인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것의 의미는 ‘왜냐하면’으로 이는 앞선 6-8절의 내용을 받고 있다. 특히 8절 하반절의 ‘구원의 소망의 투구’와 연결시키면 그 의미는 더욱 정확하다.
바울은 9절의 본문을 통해서 주의 날에 대한 두려움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 다시금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우리에게 심판, 진노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함임을 말씀하신다.
주의 날은 어둠의 자녀들에게는 심판, 진노로 임하지만 빛의 자녀들에게는 영생, 구원, 기쁨의 날이 될 것이다.
한글 번역에서는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세우심과 이르게하심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티테미’로 영어로는 ‘destine, appoint’로 번역한 것으로 ‘권위를 가지고 설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 The contrast in v. 9 between wrath and salvation is significant. The wrath of Go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thought of Paul and the Thessalonians, as 2:16 and especially 1:10 show (cf. Rom. 1:18; 2:5; 5:9). The idea derives from the OT, where the day of the Lord is presented as a time when the wrath of God will be manifested against all disobedience (Zp. 1:15; 2:2; Joel 1:15; Ob. 15). The reference to the wrath of God in v. 9 had a double function for the original readers. On the one hand it defined Christian identity negatively in terms of those not destined to wrath. On the other hand it served to comfort and reassure the readers of the letter that their efforts at vigilance and ethical propriety would not go unrewarded. God had appointed them “for obtaining salvation.” This phrase picks up σωτηρία (“salvation”) from the previous verse, where it specifies the content of Christian hope. Here it indicates that their hope will be realized because this is their divinely appointed destiny. Paul does not specify the content of salvation in v. 9 except negatively as the avoidance of divine wrath and later in v. 10 as continued existence with Christ beyond the day of judgmen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7.
10절) 9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는데 그 방법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빛의 자녀들은 깨어 있든지 자든지, 다른 말로 하면 살던지 죽던지 모두 주님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이는 주님의 재림때에 살아 있는 자들이나 죽었던 자들이 모두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The terms employed by Paul to make this point, γρηγορῶμεν (“we are awake”) and καθεύδωμεν (“we sleep”), are drawn from the more immediate context of 5:6f., but there they have a very different meaning than they do here. In vv. 6f. they are used antithetically to differentiate those who are Christians and therefore keep alert for the coming of their Lord from those who are outside the community and are therefore oblivious to the approach of God’s judgment. In v. 10 the distinction between those who are asleep and those who are awake does not pertain to preparedness for salvation. That Paul has reapplied the terminology of vv. 6f. to the problem discussed in 4:13–17 concerning “those who sleep” (κοιμᾶν in 4:13–17 is a synonym of καθεύδειν here) and “those who remain” (γρηγορῶμεν here corresponds to οἱ περιλειπόμενοι in 4:15–17) is confirmed by ἅμα σὺν αὐτῷ ζήσωμεν (“we shall live together with him”), which repeats the idea contained in the words σὺν κυρίῳ ἐσόμεθα (“we will be with the Lord”) in 4:17. By thus referring back to 4:13–17 Paul pulls the eschatological parenesis of the letter together and ends it on a powerful note of hope for future salvation for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in Christ based on his redemptive death (cf. Holtz, 182f.).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8–189.
11절) ‘그러므로’, ‘디오’, 빛의 자녀들은 깨어 있든지 자든지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기에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가는 것 같이 하라고 권면한다.
지금 재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삶의 일상이 깨어진 이들, 그런 불안함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해서 걱정하지 말고 지금 자신의 살던 일상을 그대로 살아갈 것을 명한다. 그 삶을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데살로니가 현상’이다. 데살로니가 성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상속에 도시속의 교회로 살아내야할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일상성을 유지하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6–8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환난 가운데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서 주를 볻받는 자가 되고 또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삶인 것이다.
- Paul concludes his parenesis regarding the parousia of Christ and the need for readiness by urging his readers to exhort and build up one another in faith. The conjunction διό is inferential, but v. 11 is certainly not a necessary or even obviously logical inference from what immediately precedes it. Paul’s thought appears to return to his earlier assertion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as a thief in the night, and therefore Christians must be constantly vigilant and behave as people belonging to God. It is from this that Paul’s inference springs.
παρακαλεῖτε ἀλλήλους (“exhort one another”) repeats the wording of the summary in 4:18, though here the emphasis of the verb is more on mutual exhortation or encouragement than on comfort as in 4:18. This interpretation is evinced by the words καὶ οἰκοδομεῖτε εἷς τὸν ἕνα (“and strengthen one another”), which clarifies and amplifies the exhortative connotation given to παρακαλεῖτε. Metaphorical use of οἰκοδομεῖν (“strengthen” or “build up”) can be traced back to the LXX, especially to Jeremiah, where the prophet promises that God will “build up” Israel (Je. 24:6; 31[38]:4; 33[40]:7; 42[49]:10) and even Israel’s neighbors if they call upon God (Je. 12:16). But Jeremiah also views his own role as one of rebuilding the community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evil nation (Je. 1:10). The idea of building up either the community or the individuals who form it is found frequently in 1 and 2 Corinthians, where both the verb and its cognate noun οἰκοδομή (“edification” or “instruction”) function to express this idea. In 2 Cor. 10:8; 12:19; and 13:10 Paul describes his own apostolic role as one of building up the Corinthians rather than tearing them down. The connection with the call of Jeremiah seems unmistakable (cf. Je. 1:10). But the apostle also speaks of the need for members of the community to build one another up (1 Cor. 8:1; 14:4, 17). Paul reveals the close relationship exhortation and building up or edification have in his mind in 1 Cor. 14:3, where he uses οἰκοδομή with παράκλησις (“exhortation” or “encouragement”), the cognate noun of παρακαλεῖν, to describe the function of prophecy within the life of the community (see O. Michel, TDNT V, 136–147 for a helpful treatment).
Paul’s particular concern in 1 Thes. 5:11 lies with the mutual responsibility of members of the community to aid one another in inculcating and carrying out the ethical demands of the faith and in communicating the theological concepts supporting those demands. In the context of this verse the most obvious theological structure undergirding the ethical requirements of the faith is the promise/threat of the parousia of Christ. Christ’s coming will be a glorious public manifestation of the Lord for his obedient followers, but the day of judgment for unbelievers and the disobedient. Thus the eschatological instruction of Paul served to encourage acceptable behavior among his converts with its promise/threat.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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