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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jPut to death therefore kwhat is earthly in you:2lsexual immorality, impurity, mpassion, evil desire, and covetousness, nwhich is idolatry. 6 oOn account of these the wrath of God is coming.37 pIn these you too once walked, when you were living in them. 8 But now qyou must put them all away: ranger, wrath, malice, sslander, and obscene talk from your mouth. 9 tDo not lie to one another, seeing that uyou have put off vthe old self4with its practices 10 and whave put on xthe new self, ywhich is being renewed in knowledge zafter the image of aits creator. 11 bHere there is not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5free; but Christ is call, and in all.
jRom. 8:13; [Gal. 5:24]
kRom. 6:13
2Greek therefore your members that are on the earth
lSee Eph. 5:3, 5
mRom. 1:26
n[Job 31:25, 26]
oSee Eph. 5:6
3Some manuscripts add upon the sons of disobedience
pSee Eph. 2:2, 11
qSee Eph. 4:22
rEph. 4:31
sSee Eph. 4:29
tLev. 19:11; See Eph. 4:25
uch. 2:11
vRom. 6:6; Eph. 4:22
4Greek man; also as supplied in verse 10
wEph. 4:24
xSee Rom. 6:4
ySee Rom. 12:2
zSee Rom. 8:29
a[Eph. 2:10]
b[Rom. 10:12]; See 1 Cor. 12:13; Gal. 5:6
5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likewise for Bondservantsin verse 22
cEph. 1: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3:5–11.
차가 오래되어서 고장나서 움직이지 않을 때 단지 겉에 페인트칠을 다시 한다고 해서 차가 작동하지 않는다. 녹슬어서 작동하지 않는 주요 부품들을 바꿔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고장난 옛 것을 제거하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를 위해서 죽고 벗어버려야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서 새사람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다.
- When someone restores an old car, it is not enough to simply paint over the rust. Even if the paint is of highest quality, the rust will soon reappear and if not quickly treated will destroy the car’s body. The rust must be removed and rusted parts replaced before the car is painted.
God’s grace is similar in that it enables us to get rid of “the old self” before restoring our capacity to live in accord with the Creator’s intentions. This is the logic of conversion; and that logic is envisioned by this passage, which casts its first ethical exhortation in negative terms: put to deathimmorality and rid yourselvesof it. Sin is where God’s grace begins its work by rescuing sinners from the “dominion of darkness” and its destructive ethos. And those who have died and risen with Christ to a new life (3:1–4) have already put to death those things that are opposed to that life (compare Rom 6:4–11). The moral imperative, then, is to become what one has already become in and with Christ. In negative terms, if vice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then vice must be crucified by those in him.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5.
5절) 땅에 있는 지체, 우리의 몸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죄악된 행동들을 제거할 수 있고 제거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말은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심각한 수단들을 동원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죄를 주의하고 기도해야할 것이고 나아가 자기 훈련이 따라야 한다.
본문의 음란함은 ‘포르네이아’로 결혼 관계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성적인 행위들을 의미한다.
- Put to death. Because believers have died with Christ (2:20; 3:3), they can get rid of sinful practices (Rom. 6:11; 8:13). The language of putting to death indicates that Christians have to take severe measures to conquer sin. Watchfulness and prayerfulness against it will be the first steps (see Matt. 26:41), with self-discipline following (Matt. 5:29–30). Sexual immorality(Gk. porneia) refers to every kind of sexual activity outside of marriage. Five of the items that Paul lists have to do with sexual purity, stressing the importance of bringing this area of life under the control and lordship of Christ. which is idolatry. Greed, sexual sin, and other vices can intrude into one’s relationship with God, taking his place as a focus of devot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8.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로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땅에 지체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이는 죄 안에 거하는 우리의 지체를 혹은 죄에 대해서 죽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에 있는 지체, 옛 것은 다시 새로와지거나 변혁될 수 없고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반드시 우리의 옛 삶의 흔적, 예를 들면 가치나 관습, 행위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도말시켜야 한다. 혹시 내안에 죽여야할 것들을 죽이지 않고 몰래 쌓아 놓고 있는 것들은 없는지??
- It means that they are to unite with the transforming divine power working within them. One is either dead insin (2:13) or dead tosin (Rom 6:11). The old nature is not renewed or reformed; it is “put to death.” Believers are to eradicate any persisting marks of the old life: its values, customs, and practices. These are summarized as “idolatry,” putting something else before God (e.g., sex, money, power) and wanting more and more of these things.
e.g. for examp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2.
- 바울은 이 ‘지체’라는 말을 마태복음 5:29–30; 18:8–9의 경우처럼 생생한 은유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 열거한 행위들은 외과의사의 눈에는 괴저에 걸린(gangrenous) 지체와 같아서, 사람의 온 몸을 오염시키기 전에 제거해야만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0–201.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죄는 유혹으로 마음에 떠오른 불법적인 성적 만족감(gratification)이 즉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때 시작된다.56)이 단계 뒤에 탐심(greed)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단어는 또 하나의 일반 용어로서 여기서는 억제할 수 없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망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좀 더 특정한 악한 정욕의 온상이다. 바울은 이러한 탐심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밝힌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우상숭배가 상당 부분 여기에 나열된 악덕의 배경이 되었지만, 그것은 다만 근본 요점에 대한 실례일 뿐이다. 그러한 모든 탐심은 인간의 관심과 헌신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두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길을 따르는 자들은 6절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실제로 죽음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롬 1:21이하, 32; 6:21).
56)AV의 ‘무절제한 정서’(inordinate affection)이란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애정’이란 말이 17세기에서처럼 내적 욕망 보다는 우정과 사랑 또는 우정과 사랑의 외적 표현을 언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NEB의 ‘더러운 열망’(foul cravings)이란 번역도 너무 강하고, 따라서 그 의미를 너무 좁게 제한시킨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1–202.
6절) 땅의 지체를 죽이지 않을때, 위의 죄악된 행위들을 여전히 유지할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다. 도리어 모든 악에 대한 참된 공의와 거룩, 그리고 선의 필연적인 반응이다.
- 사실상 파멸은 그 경고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결과로 주어질 것이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57)하나님이 그러한 행동들을 괜히 싫어하시고, 그래서 말하자면 기분 내키는 대로 벌주고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결코 악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다.58)오히려 그것은 온갖 종류의 부정과 착취, 그리고 모든 악에 대한 참된 성결과 공의, 그리고 선의 필연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진노는 죄 자체의 추잡하고 더러운 결과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한다(롬 1:18–32). 그러나 그 과정은 진노의 전부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까지 이어진다(롬 1:32; 2:1–16을 참조). ‘임하고 있다’는 말이 미래적 측면을 강조할지라도, 골로새서 3:6의 현재시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지니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두 측면을 표현한다. 계속해서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자신의 선택으로-어떤 가망이나 연민의 여지없이-완전히 말살시키고 있는 현상 자체가 미래에 겪을 지옥 공포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57)대다수의 사본에는 엡 5:6의 경우처럼 ‘불순종하는 아들들에게’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말을 붙이게 되면 7절에 나오는 ‘in them’과 ‘in these one’s(엔 호이스[en hois]와 엔 투토이스[toutois])가 각각 다른 선행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 말을 생략하여 이 둘 모두 6절의 ‘이것들 때문에’(디 하, di’ ha)를 받는 것으로 보는 것 보다 더 낫다(O’Brien, 173에 반대하여 Metzger, 624이하를 보라). 그렇다면 6–7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들 가운데(엔 호이스, en hois) 살 때에는 이런 식으로(엔 투토이스, en toutois) 살았다.’
58)‘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행위이다’로 번역한 JB 참조.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2–203.
7-8절) 전에 그 가운데 살때는 그 가운데 행했으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본문에 그 가운데서 행하다라는 단어는 ‘페리파테오’라는 단어로 걷다라는 의미를 갖지만 일반적으로 행하다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살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걸음으로 어디에 서있고 걸어가는지가 우리의 존재,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혐오감을 주는 죄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기보다 부지중에 알지 못하는 죄에 빠지기가 훨씬 쉽다. 3:8에 열거된 것은 또 하나의 추악한 악덕 목록이다. 분함(anger)은 미움이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끓어오르는 상태를 말하고, 노여움(rage)은 이러한 상태가 실제적으로 분노의 행동이나 말로 터져 나올 때 생겨난다. 악의(malice)는 헬라어로 단순히 ‘악’(evil)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한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비방(slander)은 그 악의를 실행에 옮긴 말을 의미하고(헬라어 블라스페미아[blasphēmia]는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말을 의미하지만,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욕설을 퍼붓는 말로도 확장된다), 부끄러운(더러운) 말(filthy language)은 불결한 생각이나, 모욕적인 의도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동시에 더럽히는 말을 가리킨다. 이 모든 것들을 너희 입술에서 벗어버려야 한다. 분노와 미움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항상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생각들이 말로 튀어나오기 전에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간혹 제안되는 것처럼, 그러한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건전한 태도’가 아니다. 정말로 건전한 태도는 자신의 분노나 좌절을 인정하고 직면하여 그것을 창의적이고 적절하게 다루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말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울분을 발산시키는 통로가 아니다. 말은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치유하기도 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야생식물처럼 미움의 말은 그 씨를 멀리 또 넓게 흐트러뜨려, 그것이 떨어지는 곳 마다 더 많은 분노를 싹트게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5–206.
9-11절) 서로 거짓말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 마다 거짓말의 유혹을 받는다. 왜냐하면 때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악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덜 거북한 관계를 위해서 거짓말의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지 않은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사람을 입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이 행동은 헬라어의 과거 분사의 형태로 기록되어있다. 이는 이미 이루어진 일로 반복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 바울은 여기서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 친숙한 세례의 표상을 통해 소속의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헬라어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다’는 말은 헬라어로 과거 분사로 되어 있어 반복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행동을 가리킨다). 옛 사람은 아담의 후예들과 결속되어 있다(롬 5:12–21과 6:1–7:6을 참조). 새 사람은 참된 인간이신 메시아 안으로 편입되어 그 분을 본받는 사람들과 결속되어 있다(다시 한 번 롬 5:12–21; 6:1–7:6을 참조). 그러므로 이러한 새 사람은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졌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그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1:15–20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창조의 목적은 구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면 구원은 새 창조로 이해된다. 바울이 1:9이하의 기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새로움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그 전에 필요한-지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지식에까지’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지식 안으로’(into)를 의미하며, 앞에서 언급한 새로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아마도 선과 악에 대한 지식도-(그 결과로)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천적 기독교의 토대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진리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진리가 토대이기 때문에 진리는 또한 전체 구조로도 입증된다. 바울이 권하고 있는 윤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안정과 통합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정당성이 입증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7–208.
11절) 거기에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심을 믿은 자들안에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만유시요 만유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헬라인 vs 유대인
할례파 vs 무할례파
야만인 vs 스구디아인
종 vs 자유인
바울은 지금 이러한 차별이 일상화 되어 있는 고대 사회속에 커다란 폭탄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바로 만유시기에 또한 모든 존재들안에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만유안에 계신다라는 고백은 앞선 골 1:15-20을 상기시킨다.
복음은 인종, 종족, 국가, 계급과 같은 모든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무너뜨려야만 한다.
- Here there is not Greek and Jew. There are no status distinctions among the new covenant people of God (cf. Gal. 3:28). No one has a special claim on God or is treated with less dignity than any other. Scythian. This was a people group located along the northern coast of the Black Sea. To the Greeks, the Scythians were a violent, uneducated, uncivilized, and altogether inferior people. In contrast to such discrimination and prejudice against other p 2299 races and cultures, Paul shows that Jesus, who is all, and in all, binds all Christians together in equality, irrespective of such differenc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8–2299.
골로새 교인들이 편입되어 있는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는(‘거기에는’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가족이라는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이 여기에서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할례를 받은 자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없다. 이러한 다채로운 인종과 선조의 종교, 계급과 계층의 구별은 3:8에 열거된 악덕들의 씨앗인 상호 의심과 불신이 조성되는 가장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고대 세계에서 이러한 구별은 매우 중요했다.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 후 헬라 문명의 보급으로 ‘헬라인’은 그리스 본토 출신은 물론이고, 이집트, 소아시아 또는 그 밖의 어떤 지역의 출신이든 자신을 문명 그룹의 멤버로 간주할 수 있었다. 이는 현대의 많은 지역에서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다소간 유사성이 있다. 헬라인은 옛 문화를 보존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유대인의 할례 민족주의를 무시했을 것이고, 유대인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민사상과 헬라 다신교의 얄팍함과 도덕적 타락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터라 헬라인을 경멸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유대인 남성의 신체적 표시에 의해 강조되었다. 즉, 할례는 이스라엘 내에서는 칭송받았지만, 그 적대자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야만인’(barbarians)은 헬라인이 자기 말을 사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경멸의 표현이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북쪽 지역 출신의 ‘스구디아인’은 미개인(savages)과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야만인의 극단적인 예였다. 물론 종과 자유인의 구별은 오늘날에도 (공식적으로 승인되든 안 되든) 흑인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여 인간관계와 자존감에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현대 세계와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 역시 편견과 의심, 교만이-자연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인 양-깊이 뿌리내린 정교한 네트워크의 세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이러한 구별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선언한다. ‘이 세상의 세력들’이 사실상 인류를 장악하고 있어서 인류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의제(agenda)로서 교회 앞에 내세운 바울의 반론은 이러한 장벽과 생활방식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뜻에 전혀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구별은 전혀 정상적인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 창조를 부인하는 태도이다. 물론 이 말은 (갈 3:28에 나오는 목록에서 남녀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차이 자체가 소멸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든 공동체든 간에 배경과 국적, 피부색, 언어, 사회적 지위 등의 차이로 인해 어떤 불이익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all)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이 말은 1:15–20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진술인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는 차별이 없다는 교훈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우주적 의미 안에서 찾는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것’(또는 ‘전체’[the totality])60)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분은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문명인이든 야만인이든, 고귀한 자든 비천한 자든) 인간 본성의 모든 범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바울의 꽉 찬 기독론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사이에 어떤 장벽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 교훈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 계시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시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이는 헬라어 엔 파신[en pasin]을 남성으로 보는 경우이다. 이 말을 중성으로 해석하면 앞의 것과 중복되는 느낌이 들므로 문맥상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사람을 어느 면에서 보든 그리스도를 본다. 나이 든 사람을 무시하면,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십대가 모욕을 당하면 그리스도가 모욕당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유색인(반대로 부자나 백인)이 경멸당하면, 그 경멸은 그리스도에게 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내에는 상호간의 환영과 존중이 있어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지녔던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이 새 사람(New Man)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신 새 사람(new humanity)을 왜곡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빌레몬서가 이러한 신학의 좋은 실례를 다시 한 번 제공해 줄 것이다.
60)한편으로는 좋은 사본 상의 증거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는 분명하지만 필사자가 생략하는 것이 더 쉬운 읽기이므로 헬라어 정관사 타(ta)를 붙이는 것이 더 낫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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