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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For jwhile we were still weak, at the right time kChrist died for the ungodly. 7 For one will scarcely die for a righteous person—though perhaps for a good person one would dare even to die— 8 but lGod shows his love for us in that m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9 Since, therefore, n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much more shall we be saved by him from othe wrath of God. 10 For if pwhile we were enemies qwe were reconciled to God by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now that we are reconciled, shall we be saved by rhis life. 11 More than that, we also rejoice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sreconciliatio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5:6–11.
본문 6-8절은 앞의 5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체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바로 희생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한글 성경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래 의미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로 그때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성경속에는 그 때에 대한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때는 역사의 흐름(청소)에 관해서 적절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쇠사슬을 끊을 능력이 없다는 의미에서 적절한 때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울수 없었습니다. 죄에 매여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있었기에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를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때인 것입니다.
- Christ died for the ungodly “at just the right time” (Goodspeed has “at the decisive moment”). Paul wrote to the Galatians that God sent his Son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Gal 4:4). Not only was it the right time in terms of the sweep of history but it was the right time in the sense that we were powerless to break the chains of sin.108 We were unable to help ourselves. Bound by sin and destined for an eternity apart from God, no amount of struggle could free us from condemnation. It was for us “the right time” for Christ’s atoning death.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36.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라는 대상, 즉 그들은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드려진 것이다. 경건치 않음, '아세베스'는 바른 종교적 믿음이나 실천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 Ungodly is a stronger term and refers to “living without regard to proper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 (Louw and Nida 1988:533). It appeared in a similar context in Romans 4:5 to describe those whom God “justifies,” the “wicked,” or ungodly. Here it is used to depict those for whom Christ died. The language of Christ “dying for” us is quite common (four times in 5:6–8; 14:15; Jn 11:50, 51; 1 Cor 15:3; 2 Cor 5:15) and connotes substitutionary atonement, describing Christ’s vicarious death “for” us or in place of us (see Harris 1978:1196–97, who states that hyper means both representation and substitution). Moreover, this sacrificial death of Christ occurred at just the right time, which could mean “at that very time when we were weak” (Käsemann 1980; Moo 1996) but more likely modifies “Christ died for the ungodly,” paralleling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in Galatians 4:4 and meaning the perfect time in history for God to carry out his plan of salvation (Barrett 1957; Cranfield 1975).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3.
7-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거의 없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확증하다라는 단어는 '시니스테미'라는 단어로 보여주다, to demonstrate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여간 여러운 일이 아니다. 혹 이런 일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우리들, 여전히 우리들이 죄인되었을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탕자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발적으로 나보다 우위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바로 이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윤리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구속 역사가 움직이는 목표를 결정합니다.
- Love is the voluntary placing of the welfare of others ahead of one’s own. It is action, not sentiment. Love is the mightiest force in the world. It is the ethical goal of human existence. God is love (1 John 4:16), and that determines the goal toward which all redemptive history moves.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37.
7절을 보면 의인보다는 선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은 더 높은 것처럼 말한다. 여기서 의인은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으로 도덕적으로 본받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나와 개인적인 관계는 없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나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대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은 이런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친구를, 자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그 사랑을 확증하는,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위해서 선물을 주거나, 꽃을 선물하거나 깜짝 이벤트를 하거나 서프라이징 이벤트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야 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의인이나 선인, 친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인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 This is especially seen in the fact that God not only loves us but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that is, has concretely “proven” this love in the greatest possible way (v. 8). This justly famous verse is the apex of biblical statements on divine love. Anyone who loves another person tries to give concrete proof of that love via certain actions, perhaps buying presents or flowers or surprising them with a romantic getaway. God proved the depths of his love in a way none of us would want to do, by giving his Son to die for us. Yet it is far more than that: he did so while we were still sinners, that is, when we were his enemies, godless sinners. This is the primary point Paul is making. Christ did not die for righteous people or for friends; he died for sinful human beings in all their degrading depravity, for those who “suppress the truth by their wickedness” (1:18) and do “not think it worthwhile to retain the knowledge of God” (1:28), who are “filled with every kind of wickedness, evil, greed and depravity” (1:29). Therefore we deserved to experience the wrath of God and eternal judgment, but Christ took our punishment upon himself and paid the penalty in our place, thereby procuring redemption on our behalf (3:21–26).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4.
9-11절)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고 더욱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더욱 지금 우리가 화목하게 된 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사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저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함을 주신 그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
화해는 개인적인 관계이다. 이는 하나님 편의 일방적인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한번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셨습니다. 그 용서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간결하고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이제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입니다.
- Reconciliation is a personal relationship; it cannot be a unilateral action on the part of God alone. He has provided forgiveness for all people through the once-for-all death of his Son. Only when that forgiveness is accepted by faith is the compact completed and reconciliation takes place. God’s part is finished; our part is a matter of individual decision.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38.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화목하게된 우리가 예수님의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또한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본문을 보면 유대의 문학적 표현으로 '무거운 것으로부터 가벼운 것으로', 더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나아가는 양태가 9, 10, 15, 17절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그로 말미암아', '그뿐 아니라'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칭하셨는데 그분의 진노로부터 무죄하다라고 선언을 받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인 것이다.
- Moreover, it is a present reality (now) and force in our lives. Paul’s point, however, is that since our justification is a fact, how much more (first in the Greek for emphasis) is it true that we ar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This uses a Jewish hermeneutical technique called “from the weightier to the lighter,” that is, from the more difficult to the less (Cranfield 1975; Moo 1996; Schreiner 1998; Dunn 1988a shows it is used four times—vv. 9, 10, 15, 17). Since God has done the more difficult, justified the ungodly, how much more can he achieve the easier, delivering those who have been declared innocent from his wrath.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4–135.
본문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소조'라는 단어로 마지막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 Saved in this context refers not to spiritual salvation but to being “delivered” from wrath, namely, God’s wrath at the last judgment (see 2:5, 8 on final wrath; 1:18; 3:5; 4:15; 9:22; 12:19 on present wrath). Moo (1996:310–11 n.) has a good summary, pointing out that Paul often uses this term “to depict the final deliverance of the Christian from the power of sin, the evils of this life, and especially judgment (e.g., 1 Cor. 3:15; 5:5; Phil. 2:12).” Paul pictures the Christian as having been saved, as looking forward to being saved, and even as in the process of being saved (cf. 2 Cor 2:15; 2 Thess 2:10).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5.
10절에서 칭의라는 법정적 용어에서 화목이라는 개인, 관계적인 언어로 전환된다. 화목은 칭의의 자연적 결과이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초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세우셨다. 본문에 사용된 화해, 화목이라는 표현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이것이 너무 개인적인 표현이기에 사용된 적이 업서었던 단어인데 바울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칭의를 통해 새워진 새로운 개인적인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여기에서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이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 화목함의 관계는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죄로 인한 불신자들의 적대감이고 또하나는 죄에 대한 그분의 심판으로 인한 하나님의 적대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결과로 이 두 적대감은 제거되었고 새로운 관계가 세워진 것이다. 이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것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분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된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 되는 것이다.
- The following verse (v. 10) repeats the argumen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Here the death of his Son has resulted in our being reconciled to him. Reconciliation is the natural result of justification. After God has declared us righteous on the basis of Christ’s sacrificial death, he establishes a new relationship with us. The language moves from the legal to the personal. Cranfield (1975:267) says reconciliation language was never used in the religious language of the Hellenistic world because it was too deeply personal, but Paul (Rom 5:10, 11; 11:15; 2 Cor 5:18–20) uses it to show the new personal relationship established by God’s justification. Here those who are God’s enemies have been both justified and reconciled …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That is the thrust of being reconciled, to bring enemies into proper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Note the two directions—hostility from the unbeliever due to sin and hostility from God due to his judgment on sin. But as a result of Christ’s death, that hostility has been removed from both sides, and a new relationship has ensued. So if this exceedingly difficult thing has taken place, how much easier it is for God to have saved us through his life. As in verse 9, saved must mean deliverance from his final wrath. But what does through his life connote? Most likely it refers to his resurrection as the means of reconciliation (cf. 4:25; 8:34).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re a single event in salvation history and together constitute the basis of our salvation (see on 4:25).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35.
11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우리가 깨닫고 이를 누릴때의 반응은 바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매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9-10) 우리에게 현재적인 화목함의 기쁨을 주신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미래의 소망과 현재의 구원을 동시에 가진다. 기쁨은 무엇인가? 이 기쁨은 바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은 바로 예배하는 것이다. 이 예배는 계속되는 우리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관계, 화목을 받게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어진 가장 결정적인 모델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경건하지 않은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분의 희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극명하게 선포되고 확증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므로 그분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화목된 상태이기에 더욱 우리는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9절과 10절을 잘 보면 그 문장구조가 유사하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그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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