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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if there is any encouragement in Christ, any comfort from flove, any gparticipation in the Spirit, any haffection and sympathy, icomplete my joy by being jof the same mind, having the same love, being in full accord and of one mind. Do nothing from kselfish ambition or lconceit, but in mhumility count others more significant than yourselves. Let each of you nlook not only to his own interests, but also to the interests of others.
f[Rom. 15:30; 2 Thess. 2:16]
g2 Cor. 13:14
hCol. 3:12
iJohn 3:29; 15:11
jSee Rom. 12:16
kch. 1:17
lGal. 5:26
m[Eph. 5:21]; See Rom. 12:10; Eph. 4:2
nSee Rom. 15: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1–4.


1-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으로 부터 오는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기쁨을 충만케 하라.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있거든’이라는 조건문을 사용하는데 이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런 성품, 특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심이라기 보다는 도리어 이런 특성(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들이 그들의 삶의 실재로 드러나도록 촉구하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절의 특성을 기반으로 이후 2-4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결국 이런 특성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때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한 성령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 간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같은 사랑가운데 마음을 하나로 모아가게 되는 것이다. 

본문 1절에 그리스도의 권면,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제가 모두 등장한다. 1절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되는데 이는 앞서 1:27-30절의 내용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도전받는 친구들을 독려하여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적인 관계에 어필하는 것인데 바울이 지금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So how does one entreat friends to get back on track? By appealing to relationships, both divine and human. It may not always work, but this is certainly the primary way. Paul begins by appealing to the encouragementor “comfort” that beingin (NIV united with) Christcan bring, as a direct response to their common experience of suffering for Christ in the preceding clause (1:29–30). But right at that point, before dictating a “then” clause, he adds three more "if“ clauses, whose studied accumulation is part of the rhetorical effect.*
*2:1The fourfold repetition of ifis almost certainly for rhetorical effect, in a situation where the letter will not be read privately but publicly. Although ifordinarily forms the protasis of a conditional sentence, in this case the protases do not so much express supposition as presupposition. Hence “if this be the case, as it certainly is.”
Paraklēsis(NIV encouragement) in the first clause is a thoroughly ambiguous word in Greek whose meaning ranges from “exhortation” through “encouragement” to “comfort.” Although the word in the next clause (paramythion) clearly and only means comfortor “solace,” the close tie of the first clause to the preceding sentence suggests that the encouragementintended leans equally toward “comfort.”
For a thorough and helpful discussion of the options and their ramifications for understanding the if-clauses—although I differ a bit with his conclusion and reason for it—see O’Brien 1991:167–76, who also includes data on the various scholars who take each option. Part of our difficulty here is probably related to the nature of dictation, in that what is written by way of dictation sometimes still carries the rhetorical effect of oral speech. In this kind of rhetoric, precision is a lesser concern than is the persuasive effect created by the accumulation of phrases. It is possible therefore (probable, I think) that the emphasis shifts as Paul warms up to his rhetoric.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84.

긍휼을 의미하는 단어는 ‘스플랑크나’로 창자,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비의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위로에 기초한 성령안에 하나됨은 복음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고 이는 바울의 기쁨을 가져 오게 될 것이다. 본문에 ‘프로네오’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같은 일을 마음에 놓는다, 한가지 일에 너의 마음을 놓음’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뜻을 합하여라고 표현된 단어는 ‘심사이코스’로 영을 함께 한다라는 의미로 3절의 본문에서는 영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Their unity in the Spirit, based on Christ’s comfort, will bring Paul’s joy over the advance of the gospel, already noted in 1:18, to full fruition. What is probably in view is his eschatological joy at their being together with him at the day of Christ (2:16).
The key word in the appeal, and indeed a key word in the letter, is the verb phroneō(see on 1:7), which is repeated in the first and third instances and has to do with the set of one’s mind, how one is overall disposed toward something (cf. Rom 8:5–7)—thus (literally) “set your minds on the same thing”/“setting your minds on the one thing.” This is the word that is picked up again in Philippians 2:5 (“have this same mindset, as Christ did”) and in 4:2, where he reproduces the identical language of this first phrase in urging Euodia and Syntyche to the same mindset. The second occurrence (third phrase) is accompanied by the adjective sympsychos(= “together in soul”), thus joining mind and soul together, while picking up the phrase “one soul” from 1:27.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86.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을 받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의 위로를 받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의 교제를 나누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비와 긍휼을 받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같은 마음을 품어서 나의 기쁨을 완성하시오…” 개역 성경은 이것을 되풀이 하여 “… 가 있거든”이라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 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있다면…” 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가 그런 것들을 가졌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3.

“긍휼과 자비”로 번역된 헬라어 ‘스플랑크나’는 위(胃)를 말하고, ‘오이크티르모이’는 내장을 말합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심, 자비심이 위 또는 내장에서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말이나 서양 언어들에서 심장을 사랑의 샘터로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참고로 인도네시아어에서는 간을 사랑의 샘터로 여깁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4.

2장 1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의 긴 문장입니다. 그 문장의 주절은 “나의 기쁨을 완성하시오”입니다(원문에는 2절 머리에 나오나, 개역 성경에는 우리말의 어순상 4절 끝에 위치합니다). 1절에서 빌립보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그리고 “긍휼과 자비”가 있음을 상기시키고는, 그러한 사람들이니 “나의 기쁨을 완성하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의 기쁨을 완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1절에서 언급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서 해야 할 4가지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4가지 해야 할 일을 “같은 생각을 갖는 것”, “같은 사랑을 베푸는 것,” “한 혼이 되는 것,” “한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하여 온전히 한 덩어리가 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지,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사실 첫째와 넷째는 아예 구분이 불가능하고, 셋째 역시 앞의 둘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이런 표현을 통해 결국 빌립보인들에게 “여러분 모두가 첫째도 한마음, 둘째도 한마음, 셋째도 한마음, 오로지 한마음을 품어 일심동체가 되시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4–75.

3-4절) 한 마음을 품은 우리들은 아무 일에든지 이기적인 야망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나아가 각각 그 자신의 유익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아보아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해야 한다. 
우리의 사람을 추동하는 중요한 동인중에 하나가 성공의 욕구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받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들이 모두에게 있는데 바울은 그러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구하는 삶,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돌보는 삶은 어쩌면 이 시대에서는 보기 희귀한, 이 시대 정신을 거스르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이다. 이런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결국 우리들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안에서 한 마음을 품어야만 가능하다. 

본문의 겸손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런데 이 겸손이라는 덕목은 당시 그레고 로만시대에는 하찮게 여겨지는, 노예 근성 정도로 여겨졌다. 우리가 온전한 겸손을 깨닫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지으신 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창조의 회복이 필요한데 이는 창조주 안에 피조물로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을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면서 그분의 영광을 소유한 존재이기에 진정한 겸손은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때에 가능하다. 
Humility is thus not to be confused with false modesty (“I’m no good”) or with “milquetoast,” that kind of abject servility that only repulses. Rather it has to do with a proper estimation of oneself, the stance of the creature before the Creator, utterly dependent and trusting. Here one is well aware both of one’s weaknesses and of one’s glory (we are in God’s image, after all) but makes neither too much nor too little of either. True humility is therefore not self-focused at all but rather, as further defined by Paul, considers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
As with humility, this last phrase does not mean that one should falsely consider others better.As Philippians 2:4 will clarify, we are so to consider others not in our estimation of them—which would only lead to the very vices Paul has just spoken against—but in our caring for them, putting them and their needs ahead of our own. Others in the community are not necessarily “better” than I am, but their needs and concerns “surpass” my own. After all, this is precisely how Christ’s humility expressed itself, as Paul narrates in verse 8. This is how he elsewhere describes those whose behavior is genuinely Christian; they do not seek their own good, but the good of others (1 Cor 10:24). Here is the sure cure for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not to mention “complaining or arguing” (Phil 2:14).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88–89.

그러고 나서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어 자신에게 기쁨을 선사해 주기 위해서 빌립보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3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이기심에 근거한 분파주의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는 허영심, 즉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생각하는 과대망상이나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헛된 생각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대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남들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셋째는 “각자 자신의 것들만 돌아보지 말고 남의 것들도 돌아볼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것들”은 자신의 이익, 장점, 주장 등을 두루 칭하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만 보면 교만해지거나 허영심에 빠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며,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것이야말로 공동체의 하나 됨을 죽이는 독소입니다. 남의 이익을 생각해 주고, 남의 관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남의 주장에도 귀 기울일 줄 알아야 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빌립보인들이 해야 할 4가지 일들을 앞에 언급한 바울은 이제 여기 그것을 저해하는 3가지 독소를 배격하고, 그것들 대신에 겸손과 남을 고려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 행동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공동체의 삶을 꾸려 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교회의 하나 됨을 가져와서 내적으로는 화평과 기쁨을 확보하고, 외적으로는 적대자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이 제시하는 행동 지침의 모든 요소가 우리에게 다 적합하지만, 특히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절실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사랑과 더불어 우리 기독교에서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 반대는 교만(hybris)인데, 성경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교만, 즉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창 3:5). 헬라적 휴머니즘의 전통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요 만물의 척도로 여기면서 인간의 자기 주장도 미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그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교만해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바로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분리되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갇혀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담겨 있는 아담의 타락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5–77.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4가지 해야할 일과 3가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시한다. 
해야할일 4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마음을 같이 하는것(같은 생각을 하는 것), 둘째로 같은 사랑을 가질 것, 셋째로 뜻을 합할 것(한 영혼이 될 것), 네번째로 한 마음이 되는 것을 제시한다. 
하지 말아야할 일 3가지는 첫째로 이기심에 근거한 분파주의에 따라 행동하지 말 것, 둘째로 허영심, 즉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생각하는 과대망상이나 그렇게 보이려는 태도를 보이지 말 것, 셋째로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요청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이들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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