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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understand this, that yin the last days there will come times of difficulty. For people will be zlovers of self, alovers of money, bproud, barrogant, abusive, bdisobedient to their parents, ungrateful, unholy, cheartless, unappeasable, slanderous, without self-control, brutal, dnot loving good, treacherous, reckless, eswollen with conceit, flovers of pleasure rather than lovers of God, having the appearance of godliness, but gdenying its power. hAvoid such people.
y See 1 Tim. 4:1
z [Phil. 2:21]
a Luke 16:14; [1 Tim. 6:10]
b Rom. 1:30
b Rom. 1:30
b Rom. 1:30
c Rom. 1:31
d [Titus 1:8]
e 1 Tim. 3:6; 6:4
f Phil. 3:19
g See 1 Tim. 5:8
h 1 Tim. 6:20; [Titus 1: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3:1–5.
 
3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3:1–5.
 
딤후 3장은 디모데후서 본론의 후반부로 오늘의 본문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19가지 항목으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러한 말세의 징조는 교회안의 배교자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건을 모방하고 그 겉모습은 있지만 실제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자들로, 겉모습만이 그리스도인인 자들로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리에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다. 
 
본론부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6~2:26에서 복음 사역자가 갖추어야할 자세와 덕목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이제 후반부에 해당하는 3:1-4:8에서는 말세의 타락상 및 이단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상황을 초월한 복음 전파의 절대 명령이 주어진다. 
 
1절) 새로운 내용이 전환되는 본절에서 바울은 ‘네가 이것을 알라’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알라’로 번역된 ‘기노스케’는 ‘기노스코’의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디모데가 계속해서 알아야할 내용은 바로 이어 나오는 말세의 징조에 대한 내용이다. 
‘말세에’로 번역된 ‘엔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는 문자적으로 ‘마지막 날들에(in the last days)’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메시야가 도래하기 바로 직전의 시기를 가리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창 49:1; 민 24:14; 사 2:2; 렘 23:20; 겔 38:16; 단 2:28; 10:14; 호 3:5; 미 4:1).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달라지는데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때를 말세라고 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모든 시기를 말세라고 하기도 한다. ‘때가 이르러’에서는 미래시제가, 5절에서 ‘돌아서라’는 현제 시제가 쓰인 것을 볼 때 말세는 광의적 의미로 현재와 미래가 함께 포함되는 시간을 의미한다. 즉 주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시기를 의미한다. 바울은 말세의 시기를 ‘고통하는 때’, ‘카이로이 칼레포이’라고 규정한다. ‘고통하는’으로 번역된 ‘칼레포이’는 신약에 2번 사용되는데 본문과 마 8:28에서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두 사람의 사나운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이처럼 말세의 고통이 너무 심각해서 다른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맹렬함, 다루기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3:1 Paul indicates with δέ a contrast with what he has just written. There the emphasis was on possible recovery of those in opposition; here, in contrast, is a fuller statement of the difficulties of the age. In speaking of that hoped for recovery, Paul does not want Timothy to be naive about the difficulty that “the spirit of the age” presents to his ministry. Thus he commands Timothy to “know,” i.e., “understand” (γίνωσκε, present active imperative) “this” (τοῦτο). What “this” represents, i.e., what Timothy is to know, is spelled out in the ὅτι clause (cf. Robertson, Grammar, 699).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last days,” is used here as elsewhere in the NT (Acts 2:17; Jas. 5:3; 2 Pet. 3:3; cf. Heb. 1:2; cf. further ἐν ὑστέροις καιροίς in 1 Tim. 4:1 and the discussion there) to refer to the time of the Messiah, that last period of days before the final messianic action takes place. The concept and language are taken over from the OT (cf. Acts 2:17, quoting Joel 3:1; cf. further Is. 2:2). Here, as in 1 Jn. 2:18, where ἐσχάτη ὥρα is used, the phrase does not designate some yet-to-come period of days. Rather, Paul is reminding Timothy that the Christian community is living in the “last days,” and, because that is true, he must come to grips with what characterizes those “days.”
When the “last days” are present, “difficult times” (καιροὶ χαλεποί) “will be present” (ἐνστήσονται, future middle indicative of ἐνίστημι,** Rom. 8:38; 1 Cor. 3:22; 7:26; Gal. 1:4; 2 Thes. 2:2; Heb. 9:9; cf. A. Oepke, TDNT II, 544). The future tense here expresses certainty. Pl. καιροί, “times,” is used here of a period of time as in 1 Tim. 4:1. That period of time is χαλεποί** (Mt. 8:28), “hard,” “difficult,” says Paul, because of the evil characteristics of mankind in those “tim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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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28–429.
 
2절) 본절은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포함되어있다. 이는 2-5절 내용 모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게 되는 이유에 대한 진술임을 보여준다. 이 19가지 항목은 당시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덕적, 영적 타락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21세기 지금에도 적용되는데 하등 문제가 없다. 
이 목록의 첫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며’이다. 이는 ‘필라우토이’로 이는 원형인 ‘필라우토스’는 ‘사랑’을 의미하는 명사 ‘필로스’와 ‘자기’를 의미하는 인칭 대명사 ‘아우토스’의 합성어로 신약에서 여기서만 사용된다. 이는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유익을 중요하게 여기는’이라는 의미로 ‘자기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 죄는 바로 자기중심성이다. 
 
두번째 말세에 사는 이들은 돈을 사랑한다. ‘필라르귀로이’의 원형은 ‘필라르귀로스’로 ‘사랑’을 뜻하는 명사 ‘필로스’와 ‘은 혹은 돈’을 의미하는 명사 ‘아르귀로스’의 합성어로 본문과 눅 16:14에서만 사용된 표현이다. 눅 16장에서는 탐욕스러운 바리새인를 나타낸다. 
돈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위해서 재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생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때 큰 불행을 초래한다. 결국 돈이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딤전 6:10). 
 
‘자랑하며’로 번역된 ‘알라조네스’는 본문과 롬 1:30에서 사용된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허풍쟁이, 자랑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자기 도취적이고 스스로 잘난체하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교만하며’로 번역된 ‘휘페레파토이’의 원형 ‘휘페레파노스’는 ‘~위에, ~을 넘어서는’을 의미하는 전치사 ‘휘페르’와 ‘빛을 내다, 나타나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노’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 위압적인 자부심을 부당한 중요성을 가지거나 보여주는’이라는 의미이다. 
 
‘비방하며’ ‘블라스페모이’는 딤전 1:13에서 바울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했다. 문자적으로 ‘신성 모독’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자신들의 이웃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모욕하는 것을 가리킨다.  
 
‘부모를 거역하며’, ‘아페이데이스’의 원형 ‘아페이데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믿다, 순종하다, 의뢰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페이도’의 합성어로 ‘믿지 않는, 순종하지 않는’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감사하지 아니하며’, ‘아카리스토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용서하다, 탕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리조마이’의 합성어로 ‘베풀지 않는,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의 의미이다. 마땅히 감사해야할 대상에게 감사하지 않는 행위는 은혜를 모르는 것이고 부도덕한 모습의 전형이다. 
 
‘거룩하지 아니하며’, ‘아노시오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거룩하다, 의롭다’란 의미의 형용사 ‘호시오스’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거룩, 그분의 주권과 영광을 무시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3절) ‘무정하며’, ‘아스토르고스’는 부정사 ‘아’와 ‘애정을 가지고 소중히 하다’라는 동사 ‘스테르고’의 합성어로 ‘동물들의 어미와 새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본능적인 애정’이 결여된 모습으로 말세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마땅한 사랑마저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아스폰도스’는 부정사 ‘아’와 ‘봉헌하다, 제주를 바치다’라는 동사 ‘스펜도’의 합성어로 협약시 항상 수반되는 술을 바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협약에 의해 원만하게 풀려나가지 않게됨으로 인해 앙심을 품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어떠한 평화 상태도 인정하지 않는 적개심, 앙심이 깊고 화해하기 어려운 상태’를 의미한다. 
 
‘모함하며’, ‘디아볼로스’는 ‘~사이에’를 의미하는 ‘디아’와 ‘던지다, 두다’라는 의미의 동사 ‘발로’의 합성어로 사이에 무언가를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들 사이에 비방을 통해서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는 존재이다. 첫 범죄인 선악과 사건에서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마귀가 던져놓은 의심으로 첫번째 아담이 타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함은 가장 마귀적인 것이다. 
 
‘절제하지 못하며’, ‘아크라테스’는 부정사 ‘아’와 ‘절제’를 의미하는 명사 ‘크라토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감정이나 원초적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마음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는’의 의미이다. 
 
‘사나우며’, ‘아네메로스’는 부정사 ‘안’과 ‘절름발이’란 의미의 명사 ‘헤메로스’의 합성어로 ‘절름발이가 아닌’이란 의미로 날렵하고 거친, 야수적인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아필라가도스’는 부정사 ‘아’와 ‘선을 좋아하며’로 번역된 ‘필라가도스’의 합성어로 단순히 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을 미워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필라가도스’는 '친구’를 의미하는 ‘필로스’와 ‘선한, 착한’을 의미하는 형용사 ‘가도스’의 합성어이다.  선의 부재, 무관심은 필연적으로 악을 의미한다. 
 
4절) ‘배반하며’, ‘프로도테스’는 ‘반역자, 배신자’를 의미하는 표현인데 개역한글은 이것을 ‘배반하여 팔며’로 번역했다. 이는 눅 6:16이나 행 7:52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파는 모습에서 사용된 것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충성을 저바리고 스승이나 친구를 배신하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다. 
 
 
‘조급하며’로 번역된 ‘프로페데스’는 ‘앞에’라는 의미의 접두어 ‘프로’와 ‘떨어지다’라는 의미의 동사 ‘핍토’의 합성어로 ‘앞에서 꼬꾸라지는, 경솔한, 조급한’을 의미한다. 
 
‘자만하며’, ‘테튀포메노이’는 딤전 3:6에서 감독의 자격을 거론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자기 사랑에 도취된 이기적인 상태를 지칭한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말세의 타락은 잘못된 방향성, 잘못된 자기 사랑때문이다. 말세의 징조의 목록을 처음 시작하면서 자기 사랑과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쾌락을 사랑하는 것으로 마친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함으로 인해서 타락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거스리는 이에 대해 ‘그 잘못 지향된 사랑은 모든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며 외적으로 드러나는 악덕은 그러한 사람의 자연적인 소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필레도노스’는 ‘친구’를 의미하는 ‘필로스’와 ‘기쁨, 쾌락’을 의미하는 ‘에도네’의 합성어이다. 이어지는 ‘필로데오스’는 ‘필로스’와 ‘하나님, 신’을 의미하는 ‘데오스’의 합성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이라는 의미이다. 한글 번역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뉘앙스가 들어있지만 도리어 쾌락에 빠진 이들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영원의 방향을 결정한다. 쾌락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3:2–4 γάρ indicates that the list that follows supplies the reason for the “last days” being regarded as “difficult times”: The evil characteristics of people living in these days make them difficult. Again the verb is in the future, “will be” (ἔσονται), because Paul is describing what will be true from the apostolic age on, not just what is true for Timothy’s time. Here again the future tense is as much that of certainty as of futurity (cf. the future in that sense in vv. 9 and 13). οἱ ἄνθρωποι is used in its general sense of “human beings,” “people,” as it was in 1 Timothy (e.g., 2:1, 4, 5; 4:10).
The list consists of eighteen items in vv. 2–4, with a nineteenth added in v. 5. Five of the eighteen terms occur in the NT only here (φίλαυτοι,** ἀκρατεῖς,** ἀνήμεροι,** ἀφιλάγαθοι,** which has not been found elsewhere in ancient literature, and φιλήδονοι**), two occur elsewhere in the NT only in the PE (ἀνόσιοι** in 1 Tim. 1:9, τετυφωμένοι** in 1 Tim. 3:6; 6:4), and three others are found in the NT only here and in Rom. 1:29–31 (ἀλαζόνες** in v. 30, ἄστοργοι** and ἄσπονδοι** in v. 31). Four are shared with Luke-Acts (φιλάργυροι** in Lk. 16:14; ἀχάριστοι** in Lk. 6:35; προδόται** in Lk. 6:16; Acts 7:52; cf. Mt. 24:10; προπετεῖς** in Acts 19:36) and four occur several other times in the NT, two of them in Rom. 1:29–31 (ὑπερήφανοι 4x, including Rom. 1:30; βλάσφημοι 4x; ἀπειθεῖς 5x, including Rom. 1:30; Tit. 1:16; 3:3; διάβολοι 37x).
This lengthy list of items is presented naturally and conveniently without any connecting terms (cf. BDF §460.2). Furthermore, this asyndeton most likely “suggests that the same persons are not characterized by all of the evils itemized” (Smith-Beekman, Analysis). Like the list in Romans 1:29–31, this list reflects the evils of a pagan society. “At the same time Paul is indicting the false teachers, both by characterizing their existence as in keeping with these evils and by implying that they themselves fit many of the items in the list …” (Fee).
The list has a somewhat chiastic arrangement: It begins and ends with terms expressing similar concepts and has within this framework other matched groupings of terms working from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list:
φίλαυτοι
φιλάργυροι
ἀλαζόνες
ὑπερήφανοι
βλάσφημοι
γονεῦσιν ἀπειθεῖς
ἀχάριστοι
ἀνόσιοι
ἄστοργοι
ἄσπονδοι
διάβολοι
ἀκρατεῖς
ἀνήμεροι
ἀφιλάγαθοι
προδόται
προπετεῖς
τετυφωμένοι
φιλήδονοι
μᾶλλον ἢ φιλόθεοι
The list begins and ends with words expressing a misdirection of “love.” This suggests that what is fundamentally wrong with these people is that their life is misdirected and that the other vices flow from this misdirection. φίλαυτοι** (a NT hapax in v. 2, but cf.μὴ αὐθάδη, “not selfwilled,” in Tit. 1:7), “lovers of self,” is put first, for when self rather than God (and others) is made the central focus of one’s life all else goes astray (cf. Rom. 1:25; Philo, Legum Allegoriae 1.49: φίλαυτος καὶ ἄθεος). To this self-centeredness is joined that these people are φιλάργυροι (in Lk. 16:14 a characteristic of the Pharisees), “lovers of money,” one of the basic traits of the false teachers (cf. 1 Tim. 6:5–10: φιλαργυρία** in v. 10; Tit. 1:11; warnings against this evil in 1 Tim. 3:3, 8; Tit. 1:7).
At the end of the list this misdirection of love is described in the revealing comparison φιλήδονοι μᾶλλον ἢ φιλόθεοι (v. 4b). μᾶλλον in the comparative construction μᾶλλον ἤ (“rather than”) is used here with the meaning “instead of” so that μᾶλλον ἤ “excludes from consideration” φιλόθεοι (BAGD s.v. μᾶλλον 3c; cf. 1 Tim. 1:4). The phrase thus reads “lovers of pleasure instead of lovers of God,” or, “lovers of pleasure and not lovers of God.” Thus φιλήδονοι** (a NT hapax but cf. ἡδονή** in Tit. 3:3; Lk. 8:14; Jas. 4:1, 3; 2 Pet. 2:13), “loving pleasure,” is the preoccupation of such people (cf. Rom. 1:31) and is said to be more important to them than “loving God.” φιλόθεοι** (another NT hapax), “lovers of God,” summarizes in one word what Jesus (citing the OT) said to be mankind’s highest duty (Mt. 22:37–38 par. Mk. 12:28–30/Lk. 10:27–28) and is the concept Paul uses elsewhere to describe those who know God (Rom. 8:28; 1 Cor. 2:9; 8:3; Eph. 6:24).
The next layer of terms, working from both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e list, focuses on pride and hostility toward others. Associated, therefore, with self-love is an attitude of arrogant pride and disdain for others. In the first two words of this layer, joined here as in Rom. 1:30, Paul describes these people as “boasters” (ἀλαζόνες, notice Pr. 21:24 LXX and the associated concepts there) and as “arrogant” or “haughty” (ὑπερήφανοι,** Lk. 1:51; Rom. 1:30; Jas. 4:6; 1 Pet. 5:5), i.e., as those who express their pride in both talk and attitude. Here again Paul mentions characteristics of the false teachers (cf. 1 Tim. 1:7; 6:4; see Trench, Synonyms, 98–102 on both words; Barclay, More NT Words, 85–89 on the second). The third word of this group, βλάσφημοι** (Acts 6:11; 1 Tim. 1:13; here; 2 Pet. 2:11), “evil speakers,” “slanderers,” is most likely used here of “abusive” speech against other people, just as the related verb and abstract noun are used elsewhere in the PE of an evil that Christians must avoid in their dealings with non-Christians (βλασφημέω in Tit. 3:2) and that is associated with the false teachers (βλασφημία in 1 Tim. 6:4).
The corresponding group of three words near the end of the list presents a similar perspective but in a nearly reverse or chiastic order. First, Paul speaks of προδόται, “betrayers” or “traitors.” The deeds of the “betrayer” destroy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s readily as the words of the “slanderer.” The preceding word in the list is ἀφιλάγαθοι, “those who do not love the good,” and that one is a “betrayer” may well be considered a result of, or at least be associated with, that dislike for good. After “betrayers” is προπετεῖς, “reckless,” those who stop at nothing to gain their ends (as Kelly puts it). The last of these three items dealing with human pride and attitude toward others is τετυφωμένοι, the only participle in the list, “being puffed up” and thus “conceited.” It also is mentioned as a characteristic of the false teachers (1 Tim. 6:4), and overseers are warned against it (1 Tim. 3:6).
The innermost part of the list, vv. 2c–3, consists of eight -privative words (one in a two-word phrase) surrounding the word διάβολοι. In each case the - negates some good quality, so that this group of words describes these people as not manifesting even the basic characteristics of human life that God’s common grace usually affords. γονεῦσιν ἀπειθεῖς, “disobedient to parents,” describes a behavior pattern that, when persistent and aggravated, is regarded in the OT as a clear sign that the person is rebellious (Dt. 21:18ff.). It may well be placed first in this group as the first step, or the most basic violation, in these violations of the natural order. Next is ἀχάριστοι, “ungrateful,” which after γονεῦσιν ἀπειθεῖς may have special reference to lack of appreciation for the care given by parents (cf. 1 Tim. 5:4). ἀνόσιοι is most likely used as in 1 Tim. 1:9 (see the comments there) of those who are “unholy” in the sense of “disrespectful,” there toward God and here toward other people (F. Hauck, TDNT V, 492). ἄστοργοι means “unloving” in the sense of without natural affection (see LSJM). στοργή is used of “love, affection,” “especially of parents and children” (LSJM). Thus ἄστοργοι probably also has special reference to parents and children. ἄσπονδοι indicates those who will not be reconciled, i.e., who are unforgiving (see Trench, Synonyms, 193f.; see the possible synonyms, both NT hapaxes, ἀσυνθέτους and ἀνελεήμονας on either side of ἄστοργοι in Rom. 1:31).
In the midst of these -privatives is διάβολοι, which in the pl. refers to humans who are “slanderers” (so in the PE 3x: 1 Tim. 3:11 [see the comments there]; Tit. 2:3). This use of the word after the reference in 2:26 to those who are trapped by ὁ διάβολος may imply that such captives become like their captor. διάβολοι may well mark a turning point from a group of words, the five preceding α-privatives, that speak of decay of family relationships, to three -privatives that, with διάβολοι, have a wider perspective. ἀκρατεῖς are those “without self-control” (cf. Tit. 1:8). ἀνήμεροι, literally “untamed,” designates those who are “brutal” or “fierce” (MM call attention to Epictetus 1.3.7, where those who forget their divine origin are likened to lions). The last of these three words is ἀφιλάγαθοι, which literally means “those not loving the good” (cf. the opposite, φιλάγαθον, in Tit. 1:8).
As noted above, the list goes on from this point in v. 4 with three terms depicting human pride and harmful dealings with others and then summarizes by saying that they love pleasure instead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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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Pastoral Epi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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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F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and rev. R. W. Funk from the 10th German ed. Chicago,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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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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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 parallel Gospel passages
LXX Septuag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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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Pastoral Epistles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PE Pastoral Epistles
MM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London, 1930.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29–432.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말세가 이르면 신앙의 모습은 더욱 교묘해진다. 경건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자 열매이다. ‘경건’에 해당하는 ‘유세베이아’는 ‘선한, 좋은’을 의미하는 ‘유’와 ‘경배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세보’의 합성어로 하나님께 선한 것으로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경배, 믿음의 표현이 경건이다. 경건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모양’으로 번역된 ‘모르포신’은 ‘윤곽, 외양’이란 의미로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를 지칭한다. 말세의 때가 되면 알맹이가 없는 가짜 경건이 범람하게 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알맹이, 본질이 중요하다. 이를 ‘경건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민’을 원형 ‘뒤나미스’로 ‘힘, 권능,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을 의미한다(고전 4:20; 롬 1:29-31) 경건은 외형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하다. 
 
‘네가 돌아서라’, ‘아포트레푸’는 ‘~로부터 멀리 떨어져’란 의미의 전치사 ‘아포’와 ‘회전’을 의미하는 명사 ‘트로페’의 합성어로 ‘~로부터 멀어지도록 자신을 돌이키다’라는 매우 강한 표현인 ‘아포트레포’의 현재 명령형이다. 여기서 현재 명령형이 사용된 것은 말세가 앞서 말한 대로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 돌아서라는 명령은 출교와 관련이 있다. 이는 앞서 2:24-26절에서 거역하는 자들을 회개케 하라는 말씀과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바울은 말세의 징조를 보이며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분리될 것, 출교를 명하고 있다. 
가능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대적자들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지만 당신의 사람들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이들에게서 돌아서는 것이 필요하다. 
 
3:5 Paul concludes the list with words that specify that these evil characteristics affect even those who claim to be religious and Christian, as it has so evidently the false teachers and their followers.
The present participle ἔχοντες, “having,” “holding,” indicates that such people possess this characteristic along with the characteristics he has just named. They possess the μόρφωσιν** (in Rom. 2:20 with a different sense), the “form” or “outward form,” of εὐσέβεια. εὐσέβεια is usually used in the PE* of the true religion, i.e., Christianity (so 1 Tim. 2:2; 3:16; 4:7, 8; 6:3, 6, 11; Tit. 1:1; of what the false teachers regard as a means of gain in 1 Tim. 6:5). The second half of this statement, which says that these people have denied “its (αὐτῆς) power,” shows that εὐσέβεια (the antecedent of αὐτῆς) is used here of Christianity. Thus Paul is saying that many, among whom are the false teachers, are professing to be Christians and engaging in a form of Christianity without knowing its reality.
With the disjunctive particle δέ, “but,” Paul sets a clear contrast between possessing an outward “form” of Christianity and possessing its “power.” He says, in fact, that they have denied its power. ἠρνημένοι (see 1 Tim. 5:8) is used in the sense of “denying, refusing, saying no to” the reality that they profess, τὴν … δύναμιν αὐτῆς (2 Pet. 2:1 uses the verb in a similar context). Paul has used δύναμις twice before in this letter with special force and significance, indeed as a central motif. In 1:7–8 he assures Timothy that all Christians have been given God’s Spirit, who endues the believer with his power, and asks Timothy to suffer for the gospel enabled by that power. In 1:9ff. Paul reminds Timothy that it is God in his power who saves us and gives us life. Here δύναμις is used of the power of God that is offered in the gospel, which those he describes have refused (cf. 1 Tim. 3:16). That they love pleasure instead of God (v. 4) signifies what is involved here: They have not embraced God, the source of power, but have made their own pleasure that which they seek and trust in.
καί connects the imperative clause that follows it with all that preceded in vv. 1–5 and thus also with the imperative in v. 1. Thus Paul simultaneously instructs Timothy to be knowledgeable about the difficulty of the last times, which results from the evil characteristics of people living in it, “and” exhorts him continually to “avoid” or “turn (himself) away from” (ἀποτρέπου,** a NT hapax, present middle imperative; cf. 1 Cor. 5:9–13) those who hold to an outward form of Christianity (the antecedent of τούτους). Thus Paul repeats the command given in figurative language in 2:21, now explicitly and directly applying it to Timothy’s relationships with specific individuals (cf. Rom. 16:17).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3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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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And rthe Lord’s servant5 must not be quarrelsome but skind to everyone, table to teach, patiently enduring evil, 25 correcting his opponents uwith gentleness. God vmay perhaps grant them repentance wleading to a knowledge of the truth, 26 and they may come to their senses and escape from xthe snare of the devil, after being captured by him to do his will.
r [1 Tim. 3:3]
5 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s 1 Thess. 2:7
t 1 Tim. 3:2
u Gal. 6:1; Titus 3:2; [1 Tim. 6:11; 1 Pet. 3:15]
v Dan. 4:27; Acts 8:22; See Acts 5:31
w See 1 Tim. 2:4
x 1 Tim. 3: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24–26.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24–26.
 
바울은 이제 앞서 23절에서 언급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통해서 일어나는 다툼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24절) ‘종’을 의미하는 단어는 헬라어 ‘둘로스’이다. 일반적으로 노예를 의미하는 이 단어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 특히 본인(롬 1:1; 갈 1:10; 딛 1:1)이나 디모데, 에바브라(골 4:2)를 지칭하며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모든 목회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의 종’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지하고 강조하는 의미이며 이는 주인이신 분을 본받는 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사 42장). 
본문에서 ‘마땅히’로 번역된 헬라어 ‘데이’는 영어의 ‘must’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본받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종으로서 본절에서 4가지를 명령하고 있다. 
첫째 주의 종은 다투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디모데가 사역하던 에베소 교회안에는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함으로 변론을 일 삼았고(딤전 1:4) 이로 인해 다툼을 일삼았다. ‘다투다’라는 헬라어 동사 ‘마코마이’는 ‘옥신각신하다, 말싸움하다’라는 의미의 표현이다. 
둘째 주의 종은 온유해야 한다. ‘온유하며’로 번역된 ‘에피온’은 ‘온순한, 친절한, 유순한’이라는 의미로 살전 2:7에 한번 더 사용된 표현이다. 이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가지거나 보이는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프라우테스’를 사용한다. 앞서서 말다툼 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말로 상냥하고 온순하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주의 종은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 이는 바울이 앞서 딤전 3:2에서 감독의 자격에서 언급했다. ‘디닥티콘’은 원형인 ‘디닥티코스’ 신약에 2번 등장하는데 본절과 딤후 2:24에 등장한다. 감독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당시 복음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이를 대적하는 이단의 세력들, 특히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나 영지주의자들에 맞서서 복음의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했다. 앞선 내용들이 도덕적인 성품, 자질이라면 이는 전문적인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주의 종은 잘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참으며’로 번역된 ‘아넥시카콘’은 ‘악하게’란 의미의 형용사 ‘카코스’과 ‘참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네코’(행 18:14)의 합성어로 ‘갖가지 악 곧 음해나 위해, 모욕과 고초를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ESV는 ‘patiently enduring evil’, NIV는 ’not resentful(분개하지 않는)’이라고 번역했다. 
 
 
2:24 Paul has said (v. 23) that foolish and ignorant arguments produce quarrels (μάχας). He now immediately joins (δέ) to that the forthright comment that “the Lord’s servant” himself must not be quarrelsome (μάχεσθαι). Paul then moves by contrast (ἀλλά) to three things that the Lord’s servant should be: “kind to all,” “able to teach,” and “patient when wronged.” Paul reverts to a more general and indirect way of speaking, referring to the “Lord’s servant,” which would include Timothy and others, rather than referring directly to Timothy as he has done in the previous two verses. He does this so that this instruction will benefit not only Timothy but also others who serve in that capacity (cf. 2:2, 14).
Here Paul applies the term δοῦλος, “slave,” to Timothy and others for the first time in the PE. The word bears the spiritual sense that it has when he applies it to himself in Tit. 1:1 (see the comments there) and to himself and his coworkers outside the PE (e.g., Rom. 1:1; 2 Cor. 4:5; Gal. 1:10; Phil. 1:1, of Timothy and himself; Col. 4:12). He also uses the word literally on several occasions. The word can be used in a spiritual sense of the exclusive nature of a person’s relationship to God (so in the LXX in the Psalms and elsewhere; see R. Tuente, NIDNTT III, 595). Paul connects the secular usage to the religious usage by designating the “free” Christian as “Christ’s slave” (see 1 Cor. 7:22) and thus uses the word of the members and leaders of the Christian community. “The distinctive thing about the concept of the doulos is the subordinate, obligatory and responsible nature of his service in his exclusive relation to his Lord” (Tuente, 596).
Here Paul uses δοῦλος of a leader in the Christian community, as the further descriptions of the task of the δοῦλος make evident (“able to teach,” “with gentleness correcting those who are in opposition”). Picking up on the last title of deity that he used, κυρίου from v. 22, he designates the leader as δοῦλος κυρίου. Since Paul nearly always uses δοῦλος with Χριστοῦ (Rom. 1:1; Gal. 1:10; Phil. 1:1; Col. 4:12; cf. Eph. 6:5; κυρίου in 1 Cor. 7:22; θεοῦ in Tit. 1:1) and since that last occurrence of κυρίου probably had Christ in mind (v. 22), it is most likely that the κύριος here is Christ. That which is distinctive of the Lord’s slave is that the Lord determines his conduct and activity.
δεῖ, the impersonal verb denoting compulsion of any kind, when used with the negative (οὐ here) conveys the idea that something should not happen (BAGD s.v. 6). The Lord’s servant must not μάχεσθαι** (Jn. 6:52; Acts 7:26; Jas. 4:1; except in Acts 7:26 of nonphysical fighting), “be quarrelsome” (cf. ἄμαχος, especially in 1 Tim. 3:3; Tit. 3:2).
With ἀλλά, “but,” Paul introduces his description of what the Lord’s servant must be. ἤπιον** (variant reading in 1 Thes. 2:7) signifies one who is “gentle” and “kind.” And that characteristic and attitude is to be extended πρὸς πάντας, “to all,” with πρός here in the sense of “toward” or “with” (BAGD s.v. III.4b; cf. Tit. 3:2). Although the Lord’s servant may not be able to be at peace with all (v. 22), he is still called on to be kind and gentle to all.
He must also be “able to teach” (διδακτικόν,** 1 Tim. 3:2), i.e., to communicate “the word of truth” (cf. v. 15) effectively even to those in opposition (with correction, repentance, and appropriation of the truth being the goal: see v. 25). Finally, he must be ἀνεξίκακον** (a NT hapax), a word that “denotes an attitude of patient forbearance towards those who are in opposition” (Guthrie; cf. 1 Pet. 2:23).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LXX Septuagint
NIDNTT C. Brown,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I–III. Grand Rapids, 1975–7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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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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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23–424.
 
25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바울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다툼을 일삼고 거역하는 이들에 대한 태도를 권면한다. 본문의 ‘거역하는 자’는 누구인가? ‘거역하는’에 해당하는 ‘안티디아티데메뉴스’는 ‘~의 반대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안티’와 ‘세우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아티데마이’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자신을 ~의 반대편에 세우다’라는 의미의 동사 ‘안티디아티데마이’의 현재 중간태 혹은 수동태이다. 중간태라면 ‘스스로 거역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이고, 수동태라면 ‘잘못 영향을 입은 자들’이란 의미이다. 어찌하던지 이들은 앞선 23절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하며 진리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을 의미한다. 결국 이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께 대항하며 반대의 자리에 서서 진리가 아닌 거짓을 전함으로 구원의 길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이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 다툼과 분쟁, 변론의 방식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훈계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훈계의 태도가 바로 온유함, ‘프라우테스’이다. 이는 ‘부드럽고 온화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된 힘, controlled power’를 지닌 이들의 부드럽지만 의연한 태도를 말한다. ‘훈계할지니’로 번역된 ‘파이듀온타’는 ‘훈련하다, 교육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듀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디모데가 이들을 지속적으로 훈계해야 함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훈계는 심판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교정, 교육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온유함으로 대하는 이유는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 거역하는 이들이 진리를 깨달음으로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함을’ 번역된 ‘메타노이안’은 단순히 감정상의 후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감정, 의지 곧 전인격적이고 근본적인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진리를 알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피그노신 알레데이아스’는 골 1:9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는 어구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진리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대적자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목회자 디모데의 태도로 회개를 받게 되거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은 마땅히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혹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작은 부분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시는 것이다. 
2:25 The first part of this verse indicates the task that this teacher is to be engaged in and the last part the outcome that is sought. In effect the first half parallels the positive virtues of the preceding verse and relates them to the action necessary. Thus the three characteristics just named, “gentle,” “able to teach,” and “forbearing,” correspond respectively to the three elements in the task to be performed—“in meekness,” “instructing,” and “those in opposition” (so Smith-Beekman, Analysis).
ἐν πραΰτητι denotes the manner in which instruction is to be given (see BAGD s.v. ἐν III.2 for examples of this usage). πραΰτης means “gentleness, humility, courtesy, considerateness, meekness” (BAGD; see Tit. 3:2; cf. Gal. 6:1). Its meaning may be further appreciated by its use in contrast to such opposites as roughness, bad temper, sudden anger, and brusqueness (see F. Hauck and S. Schulz, TDNT VI, 646 for references).
The specific task to be performed is παιδεύοντα (the verb in Pl.* 5x: 1 Cor. 11:32; 2 Cor. 6:9; 1 Tim. 1:20; Tit. 2:12), which has essentially two meanings: “instructing” and “practicing (some form of) discipline.” Here both nuances seem to be operative. The concern for “knowledge of the truth” (v. 25) and that “they may come to their senses” (v. 26) both imply instruction. That those being instructed are in opposition and that the foremost concern for them is repentance (v. 25) implies some form of correction. The best understanding of the term here would be, then, that of corrective instruction, or simply put, “correcting” (RSV, TEV, NIV). The combination of this participle and the preceding prepositional phrase is a concrete example of the general principle enunciated in Eph. 4:15 of “speaking the truth in love.”
Those to be corrected are τοὺς ἀντιδιατιθεμένους** (a NT hapax; cf. τοὺς ἀντιλέγοντας in Tit. 1:9), “those who are in opposition,” or “the opponents,” those who have begun to stand in opposition to the servants of the Lord and what they teach, either as false teachers themselves or as those influenced by false teachers. Here, as in 1 Tim. 1:20, Paul does not give up on the false teachers or their followers, but always hopes for and works for their restoration, as the following words demonstrate (cf. Tit. 1:13).
The hoped for outcome is: μήποτε δώῃ αὐτοῖς ὁ θεὸς μετάνοιαν εἰς ἐπίγνωσιν ἀληθείας, “if perhaps God may grant them repentance leading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μήποτε is used as an interrogative particle (BAGD s.v. 3bβ; cf. Lk. 3:15) with the idea of contingency (Robertson, Grammar, 988), “if perhaps,” “in the hope that.” Two things are said simultaneously in δώῃ αὐτοῖς ὁ θεὸς μετάνοιαν. The first is that “God (ὁ θεός) gives (δώῃ) repentance” (cf. Acts 5:31; 11:18 for other instances of διδόναι μετάνοιαν; cf. also 2 Cor. 7:9–10). It is he who changes the heart and turns a person around (cf. Tit. 3:5). The second is that in the case of the “opponents” all that Paul can say is that God “may” (subjunctive δώῃ expressing possibility but not certainty) give them repentance.
This possible outcome is described to give urgency and expectancy to the ministry that Paul has called for. The emphasis in this description is on God and his sovereign will, so that the ministry of “the Lord’s servant” and the outcome that is sought may be kept in that perspective (cf. 1 Cor. 3:6). μετάνοια (NT 22x, Pl.* 4x: Rom. 2:4; 2 Cor. 7:9, 10; here), “repentance,” is regarded in the NT as true acknowledgment of sin, sorrow for it, and turning from it (cf. 2 Cor. 7:9–10), in response to which God forgives sin (cf. Acts 5:31; Mk. 1:4; Lk. 3:3). Thus the correction seeks to produce a “change of mind” with regard to the erroneous ideas and deeds of the “opponents.”
Concomitant with that repentance is “knowledge of the truth” (εἰς ἐπίγνωσιν ἀληθείας), i.e., a turning from error “unto” (εἰς) knowledge of the truth. The phrase ἐπίγνωσιν ἀληθείας (see the comments on 1 Tim. 2:4) is found in the NT almost exclusively in the PE, though its component parts are found in Paul’s earlier letters with the same sense. In this phrase ἀληθείας represents “the content of Christianity as the absolute truth” (BAGD s.v. 2b). Therefore, the phrase as a whole indicates a person’s coming to know and acknowledge that truth.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24–425.
 
26절) 목회자인 디모데가 자신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언급한다. 그 훈계를 통해서 대적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로 깨어’로 번역된 ‘아나넵소신’은 ‘위로 향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아나’와 ‘정신차리다, 근신하다’라는 의미의 ‘네포’의 합성어로 ‘다시 정신이 맑아지다’라는 의미의 ‘아나네포’의 가정법이다. 이는 25절의 훈계가 그들의 정신을 맑게 해주어 ‘양심을 마비시키며 감각을 혼돈시키며 이성을 마비시켰던’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올무’로 번역된 ‘파기도스’는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사냥도구로 ‘거역하는 자들’이 마귀의 덫에 걸린 사냥감과 같이 불쌍한 상태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의 그들로 깨어의 영어 표현은 ’they may come to their sense’(ESV)이다. 깨어남은 바로 정신을 차리는 것, 다시 맑은 정신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사로잡힌 바 되어’로 번역된 ‘에조그레메노이’는 ‘야생동물을 생포하다’라는 의미의 ‘조그레오’의 현재 완료 수동형이다. 
한글 번역은 거역하는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이제 하나님께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역이다. 
디모데후서 2:26(새번역)
26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악마의 뜻을 좇았지만, 정신을 차려서 그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26 and that they will come to their senses and escape from the trap of the devil,i who has taken them captive to do his will.
i 1 Ti 3:7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1), 딤후 2:26.
말하자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사로잡힌 바 된 올무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위의 새번역의 번역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그 뜻을 좇던 그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 그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하는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이성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지만(롬 1:21; 1:22) 구원은 실재를 깨닫기 시작하는 능력을 가져다준다. 거짓 교사들이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역하는 자들은 타락의 영향속에 눈이 어두워져서 진리를 알지 못한다. 주의 종의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때 그들의 눈은 다시금 열려서, 정신을 차려서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2:26 Here Paul gives the ultimate explanation for the opposition of the “opponents”—they are held captive by the devil—and thus also what is needed from that perspective, which is release from the devil’s snare. In this way he moves back behind the human level (i.e., opposition) to the evil one and his hold on the life of those in opposition.
The devil’s grasp is broken when the opponents spiritually break out of the intoxicating effect of that snare and “come to their senses” (ἀνανήψωσιν,** a NT hapax, see the extrabiblical references in BAGD). παγίς,** “snare,” “trap” (used figuratively in Rom. 11:9; in 1 Tim. 3:7 “of the devil,” as here; 6:9; literal in Lk. 21:35), is used figuratively here of the intellectual allurement of error. The trap is one that the devil sets for others. In the NT singular ὁ διάβολος with the definite article (30 of 37x in the NT) is always used of one particular powerful and evil spiritual figure, as in the LXX (e.g., Jb. 2:1; Zc. 3:1f.; 1 Ch. 21:1; see further BAGD; 1 Tim. 3:6–7; elsewhere in this sense in Paul in Eph. 4:27; 6:11).
The participial clause that follows expands on this reason that the “opponents” are in the devil’s snare (ἐζωγρημένοι ὑπʼ αὐτοῦ) and on what that involves (εἰς τὸ ἐκείνου θέλημα). The perfect passive participle ἐζωγρημένοι (literally “being captured alive”) conveys the sense of “having been taken and held captive” and expresses the decisive hold that the devil has. (The verb ζωγρέω is used elsewhere in the NT only in Lk. 5:10; both here and there it is used figuratively in a spiritual sense of catching humans, albeit from opposite perspectives; for alternative suggestions on this verb and especially for αὐτοῦ and ἐκείνου see below.) ὑπό with genitive αὐτοῦ and a passive verb denotes the agent who has taken and held the opponents captive. Since the verb carries forward, and explicates, the previous imagery about the “trap” of the devil, αὐτοῦ most naturally refers to the devil, the nearest antecedent.
εἰς in the phrase εἰς τὸ ἐκείνου θέλημα points to the idea of purpose: The opponents were taken captive in order to do “the will of that one” (literally). τὸ θέλημα is used here in the objective sense of “what is willed, what one wishes to happen” and especially of “what one wishes to bring about by the activity of others” (BAGD s.v. 1cβ). ἐκείνου interchanges with αὐτοῦ here and thus bears the meaning “his” (see BAGD s.v. 1b and the references there) and refers, as αὐτοῦ did, to τοῦ διαβόλου.
ἐκείνου has, however, prompted other interpretations. ἐκεῖνος is most often used with the meaning “that” or “that one” to refer to a remote object. Some believe, therefore, that it refers to something other than the antecedent of αὐτοῦ, which is τοῦ διαβόλου. One view identifies the antecedent of ἐκείνου as God and set off the phrase from what precedes with a comma: “by him, to do his (that is, God’s) will” (RSV margin; so also in the margin of RV, ASV, and NASB; in the main text of Moffatt). Thus Bernard, Ellicott, Jeremias, and Weiss understand the phrase as giving the result for those who repent: They now do God’s will.
This view should probably be rejected for two reasons. First, ἐκεῖνος does not always refer to a remoter object; it is used elsewhere interchangeably with αὐτοῦ (see BAGD, Hanson). Second, this makes for a syntactically difficult reading, since ὁ θεός is quite some distance from ἐκείνου.
The second alternative understands αὐτοῦ as referring to “the Lord’s servant” (v. 24) and ἐκείνου as referring to God: “having been taken captive by the Lord’s servant to do God’s will” (so Bengel, Lock, and Falconer). Here again, ἐκεῖνος need not refer to a distant antecedent. And with this alternative the syntax is even more difficult in that it takes αὐτοῦ as referring to a very remote antecedent.
Hanson has added to these reasons for understanding both αὐτοῦ and ἐκείνου as referring to the devil with his documentation of use of ἐκεῖνος after αὐτός with virtually the same meaning. Furthermore, he suggests two reasons that Paul may have chosen to use ἐκείνου here (if it is not to be explained merely by a desire to avoid repeating αὐτοῦ in the same clause). One is the use of ἐκεῖνος for one that is well known (one of the uses mentioned in LSJM; Hanson suggests this may be the significance in Wisdom 1:16). The other, which is somewhat similar, is that ἐκείνου might be used to give a slight emphasis (which Hanson says “is probably the case in Thucydides 4.29.3”). Either of these factors would offer a further explanation for the admittedly different usage in this passage. At any rate, that ἐκεῖνος is found elsewhere referring to the nearest antecedent is adequate grounds for acknowledging that the understanding of its usage here that is more satisfactory syntactically may well be correct.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XX Septuagint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RV Revised Version
ASV American Standard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2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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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So mflee nyouthful passions and pursue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along with othose who call on the Lord pfrom a pure heart. 23 Have nothing to do with foolish, ignorant qcontroversies; you know that they breed quarrels.
m 1 Tim. 6:11
n [1 Tim. 4:12]
o Acts 7:59; 9:14
p 1 Tim. 1:5
q See 1 Tim. 6: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22–23.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22–23.
 
이어지는 말씀은 계속회서 하나님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앞서 깨끗한 준비된 그릇이 되라고 이야기했다면 이제 젊은 주의 종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설명한다. 
 
22절) 앞선 조언이 일반적인 것이라면 본절의 내용은 디모데 개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본절은 피해야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피하고’로 번역된 ‘퓨게’나 ‘따르라’로 번역된 ‘디오케’는 모두 ‘피하다’라는 의미의 ‘퓨고’와 ‘추적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디오코’의 현재 명령형으로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피하고 한면으로는 계속해서 따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먼저 디모데가 피해야할 것은 ‘청년의 정욕’이다. ‘네오테리카스 에피뒤미아스’에 정관사 ‘타스’가 선행한다. ‘네오테리카스’는 ‘청년의, 젊은’을 의미하는 ‘네오테리코스’의 여성 대격 형용사이다. 이는 ‘젊은, 새로운’을 의미하는 ‘네오스’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정욕’으로 번역된 ‘에피뒤미아스’는 ‘욕심, 정욕, 탐심, 갈망’을 의미하는 ‘에피뒤미아’의 여성 대격 명사이다. 이는 악한 갈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청년의 정욕이라는 표현앞에 정관사 ‘타스’가 있기에 이는 바로 청년의 그 정욕을 의미하는 것으로 젊은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성적 욕구를 포함하여 쾌락, 권력, 보편적 소유등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는 구절속에서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툼이나 변론이 이어지게 된다. 
이어서 디모데가 따라야할 것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인에 이를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따르는 것이다. 이는 앞서 딤전 6:11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디모데전서 6:11
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의’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넨’은 법정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공의’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진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삶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틴’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신뢰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믿음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 있어서 신실함, 정직성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며 동시에 이러한 신적 사랑에 대한 인간의 모방으로써 인간에 대한 자기 희생적 사랑을 나타낸다. 
딤전 6:11과 다르게 여기에는 화평, ‘에이레네’가 추가 되었다.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으로 ‘조화로운 관계와 분쟁이 없이 평정한 상태, 특히 전쟁이 없는 기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따라야할 것으로 제시하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모두 관계적인 특성들로 홀로,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추구해야만 하는 성품이다. 그래서 이것들을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추구하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믿음의 공동체,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젊은이, 청년의 중요한 특성은 무언가를 향한 욕망, 갈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되면 정욕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되면 비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욕망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이다. 
 
φεύγω (pheugō), 동사. 피하다, 달아나다. 부정과거 능동태. ἔφυγον; 완료 능동태. πέφευγα. 히브리어 등가: נוס (58), ברח 1 (12).
동사 용법
1. 도망가다 — 도망하려고 빠르게 멀리 움직이거나 달려 나가다. 관련 주제: 도망자; 도망.
막 14:50|| καὶ ἀφέντες αὐτὸν ἔφυγον πάντες.
요 10:5 φεύξονται ἀπʼ αὐτοῦ,
고전 10:14 Διόπερ, ἀγαπητοί μου, φεύγετε ἀπὸ τῆς εἰδωλολατρίας.
딤전 6:11 Σὺ δέ, ὦ ἄνθρωπε θεοῦ, ταῦτα φεῦγε·
약 4:7 ἀντίστητε δὲ τῷ διαβόλῳ, καὶ φεύξεται ἀφʼ
2. 도망치다 — 감금이나 위험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도망치다 관련 주제: 도망가다.
마 23:33 ὄφεις γεννήματα ἐχιδνῶν, πῶς φύγητε ἀπὸ τῆς
행 27:30 ναυτῶν ζητούντων φυγεῖν ἐκ τοῦ πλοίου
히 11:34 ἔφυγον στόματα μαχαίρης,
계 12:6 καὶ ἡ γυνὴ ἔφυγεν εἰς τὴν ἔρημον,
3. 사라지다 ⇔ 도망하다 — 존재하기를 멈추다;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는 의미로 (위험한 상황에서).
계 16:20 καὶ πᾶσα νῆσος ἔφυγεν,
계 20:11 οὗ ἀπὸ τοῦ προσώπου ἔφυγεν ἡ γῆ
4. 피하다 ⇔ 도망하다 — 일부러 피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 신속하게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로.
딤후 2:22 τὰς δὲ νεωτερικὰς ἐπιθυμίας φεῦγε,
5. 피하다 ⇔ 도망하다 — 피하다. 성공적으로 도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계 9:6 καὶ φεύγει ὁ θάνατος ἀπʼ αὐτῶν.
칠십인역 참조 구절
창 14:10; 창 39:12; 출 4:3; 출 14:5; 민 24:11; 신 28:7; 수 8:5; 삼하 19:9; 시 67:2; 집회 21:2; 4마카 8:19
동사. 동사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  || 마 26:56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διώκω (diōkō), 동사. 박해하다, 따라가다, 힘쓰다, 추구하다. 미래 능동태. διώξω; 부정과거 능동태. ἐδίωξα; 부정과거 능동태. ἐδιώχθην; 완료 중간태. δεδίωγμαι. 히브리어 등가: רדף (26).
동사 용법
1. 박해를 하다 —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고통받게 하다.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ἐκδιώκω. 관련 주제: 박해; 순교자; 초대교의 박해.
마 5:11|| καὶ διώξωσιν
행 9:4 Σαοὺλ Σαούλ, τί με διώκεις;
행 22:4 ὃς ταύτην τὴν ὁδὸν ἐδίωξα ἄχρι θανάτου,
롬 12:14 εὐλογεῖτε τοὺς διώκοντας,
갈 4:29 ὥσπερ τότε ὁ κατὰ σάρκα γεννηθεὶς ἐδίωκε
2. 박해받다 — 종교적인 신앙 때문에 조직적인 위해와 공격의 대상이 되다. 관련 주제: 박해; 순교자; 초대교의 박해.
마 5:10 οἱ δεδιωγμένοι ἕνεκεν δικαιοσύνης,
고후 4:9 διωκόμενοι ἀλλʼ οὐκ ἐγκαταλειπόμενοι,
갈 5:11 ἔτι διώκομαι;
갈 6:12 μὴ διώκωνται· οὐδὲ
딤후 3:12 Χριστῷ Ἰησοῦ διωχθήσονται·
3. 쫓아가다 —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뒤쫓다; 대단한 노력이나 대상을 향하여 크게 애쓰는 것과 관련있는 경우가 많다.
마 23:34|| καὶ διώξετε ἀπὸ πόλεως εἰς πόλιν· ὅπως
눅 17:23|| μὴ ἀπέλθητε μηδὲ διώξητε.
계 12:13 τὴν γῆν, ἐδίωξεν τὴν
4. 추구하다 (활동) — 활동을 수행하거나 참여하다.
롬 9:30 ἔθνη τὰ μὴ διώκοντα δικαιοσύνην
롬 12:13 τὴν φιλοξενίαν διώκοντες.
빌 3:12 διώκω δὲ εἰ καὶ καταλάβω, ἐφʼ ᾧ
살전 5:15 πάντοτε τὸ ἀγαθὸν διώκετε εἰς ἀλλήλους καὶ
딤전 6:11 δίωκε δὲ δικαιοσύνην, εὐσέβειαν, πίστιν, ἀγάπην, ὑπομονήν,
칠십인역 참조 구절
창 31:23; 레 26:17; 신 16:20; 에스드라 B 9:4; 시 7:2; 시 33:15; 잠 15:9; 호 6:3; 학 1:9; 사 5:11; 사 13:14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완료 중간태. 완료 중간태
||  || 눅 6:22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눅 11:49
||  || 마 24:26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2:22 δέ provides a simple connection to what precedes. It is difficult to ascertain whether any contrast is intended. NASB renders it with “now” as a transitional particle without any contrast intended (see BAGD s.v. 2). Similarly, a number of modern translations (NEB, NIV, TEV) do not translate δέ at all, which is idiomatically possible when a simple connection is desired (BAGD).
Paul commands Timothy to “flee from” (φεῦγε, Pl.* 4x), i.e., “avoid” or “shun.” Paul consistently uses the word in its imperative form to urge the Christian to avoid some particular form of sin (1 Cor. 6:18; 10:14; see 1 Tim. 6:11) and in the PE sets it in contrast with the command to “pursue” (δίωκε) various virtues. Here Timothy is urged to flee νεωτερικὰς ἐπιθυμίας. ἐπιθυμίας (see 1 Tim. 6:9), “desires,” is usually used in the NT of wrong desires, as is demanded here by the context. There has been much discussion of what Paul has in mind here with νεωτερικάς** (a NT hapax), “youthful.” The alternatives have included that this is a reiterated warning against the error of the false teachers, that Paul is speaking of the sensual sins of youth, and that he has in mind youthful sins of judgment and temperament. Some would find the answer in the contrast with the positive list that follows, so that the “desires” would be the opposites of the virtues commended.
V. 22 does not simply reiterate what precedes it but gives, rather, a wider perspective on what true sanctification means. It is added to forestall the false impression that avoiding fellowship with false teachers, essential as that is, is all there is to sanctification. As we have noted, Paul always uses “flee” (φεῦγε) in relation to particular sins, not sins in general. The specific relevance of “youthful” desires is found in the fact that Timothy is young (cf. 1 Tim. 4:12) and in the fact that the “desires” Paul has in mind may be especially problematic in Timothy’s situation. The positive list that follows appears to be too general to help in identifying these “desires.”
But it is possible that in what follows in vv. 23ff. Paul is making more specific what he has stated more generally in directing Timothy’s work as the Lord’s servant. His repetition of the warning about “speculations” (v. 23) may point to one of the besetting desires of youthfulness with which he is concerned. His words about not being quarrelsome, about being patient when wronged (v. 24), and about gentleness when correcting those in opposition (v. 25) may give us some idea of the contrary tendencies of youthfulness about which he is warning. In the final analysis we can only say that this is a possibility: Paul does not say explicitly what he means by “youthful desires.” Furthermore, the characteristics warned against in vv. 23ff. are not unique to youth, though they are perhaps more characteristic of youth. (W. Metzger, in “neôterikai epithymíai,” identifies the “youthful desires” with the tendency to turn from the traditional to the new and alluring.)
δέ joins to the need to flee youthful desires four positive virtues, indicating that the negative needs to be followed by the positive (cf. 1 Tim. 6:11). δίωκε is used in the NT either of persecution or, as here, in the sense of “pursue,” “follow zealously after” Christian virtues (cf. Rom. 12:13; 14:19; 1 Cor. 14:1; 1 Thes. 5:15; 1 Tim. 6:11; A. Oepke, TDNT II, 229f.). There are six Pauline virtue lists with more than three items (2 Cor. 6:6–7; Gal. 5:22–23; Col. 3:12–15; 1 Tim. 6:11; 2 Tim. 2:22; 3:10). Of the four virtues in this list “righteousness” is found in three of these lists, “faith” in four, “love” in all six, and “peace” in three. The list here thus shares three items with 1 Tim. 6:11 and three with Gal. 5:22–23, but in terms of the order and number of the virtues, the closest parallel is 1 Tim. 6:11.
δικαιοσύνη means generally “righteousness, uprightness.” This virtue, as all Christian virtues, is brought about by the transforming work of Christ (cf. Rom. 6:13–19; Eph. 4:24; Phil. 1:11), which is accomplished in Christians by the Holy Spirit (Rom. 14:17; cf. 8:3–4). Paul indicates later in this letter that all scripture is profitable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2 Tim. 3:17) and thereby sets up scripture as the standard of righteousness. δικαιοσύνη as human ethical action “is almost always used in the NT for the right conduct of man which follows the will of God and is pleasing to Him …” (G. Schrenk, TDNT II, 198).
πίστις, when used in a list of virtues, means either “faithfulness,” i.e., “reliability,” or “faith,” i.e., “trust” in God. Paul does occasionally use πίστις in the sense of “faithfulness” (Rom. 3:3; Tit. 2:10; perhaps 2 Thes. 1:4), and that has been suggested as the meaning in the list at Gal. 5:22, but these occurrences are infrequent among the total of twenty-two uses of the word. Elsewhere, especially where, as here, πίστις precedes “love” (1 Thes. 1:3; Tit. 2:2; Col. 1:4; 1 Cor. 13:13), the meaning “faith” is clear. In the list in 2 Pet. 1:5ff. πίστις picks up the preceding reference in v. 1, where “faith” is clearly meant. All this points to the meaning “faith” here.
ἀγάπη (see especially 1 Tim. 1:5; 4:12) means “love,” but here, as so often, the object of the love is not specified. Since Jesus’ love command involves both God and neighbor, it is possible that Paul intends both here. Where, however, he indicates or implies an object it is most often fellow human beings (cf. Rom. 12:9; 13:10; 14:15; 2 Cor. 8:7; Gal. 5:13; Eph. 1:15; 4:2; Col. 1:4; 2:2; 1 Thes. 3:12; 5:13; 2 Thes. 1:3; Phm. 5, 7), and this seems to be the main focus in 1 Corinthians 13, which is followed by words similar to those here, διώκετε τὴν ἀγάπην (1 Cor. 14:1). Thus if some specific object is intended here, and it need not be, it would probably be fellow humans.
εἰρήνη (see 1 Tim. 1:2) in the NT and Paul denotes tranquility, harmony, and stability. In particular, the peace brought by Christ enables Christians to live at peace and to continually pursue that which makes for peace with one another (Eph. 2:14–18; Rom. 14:19; 2 Cor. 13:11; Gal. 5:22; Eph. 4:3; Col. 3:15). This note dominates Paul’s letters and is most likely in view here.
The question arises whether μετὰ τῶν ἐπικαλουμένων τὸν κύριον ἐκ 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from a pure heart,” goes with the last item or with all four, and also whether “with” (μετά) is to be taken as “in association with” or as defining the extent to which the attitude is to be pursued. “In the context calling for withdrawal from evil, it seems likely that Paul would suggest that Timothy not attempt to maintain peaceful relationship with those who are impure” (Smith-Beekman, Analysis). Thus this phrase is most likely a qualification of the last item and an indication in particular of those with whom peace should be pursued (contra W. Foerster, TDNT II, 416f.).
τῶν ἐπικαλουμένων τὸν κύριον seems to be another echo of Joel 3:5 and an abbreviated form of what is found in v. 19 and in Acts 2:21; Rom. 10:13; and 1 Cor. 1:2 (cf. also Acts 9:14, 21; 22:16). Here, in contrast with v. 19, Paul returns to the verb found in the OT and usually in NT citations of the Joel text. Because κύριον is either explicitly (1 Cor. 1:2) or contextually (Rom. 10:13) related to Christ in the use of this phrase elsewhere in Paul, one should probably assume that it is so intended here, since clear indicators otherwise are not evident in this context. ἐκ 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 (the phrase elsewhere only in 1 Tim. 1:5 and in a variant reading in 1 Pet. 1:22), “out of a pure heart,” i.e., one cleansed from sin, seems to be added to designate those who call upon the Lord, i.e, confess the Lord, in reality and who have changed lives (v. 19), reiterating the idea of cleansing (v. 21).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NEB New English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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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9–422.
 
23절) 목회서신에서는 이러한 다툼과 변론에 대한 경고가 자주 등장한다(14, 16절 ; 딤전 1:4; 4:7; 6:4; 딛 3:9). 이는 당시 교회들이 이단과의 논쟁에 자주 휩싸였는데 이런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에 대한 목회적 지침을 주기위해서 이다. 
‘어리석고’로 번역된 ‘모라스’는 ‘둔한, 지각이 없는’이라는 의미이며 ‘무식한’으로 번역된 ‘아파이듀토스’는 부정사 ‘아’와 ‘훈련하다, 교육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듀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훈련되지 않은, 교육되지 않은’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신약에서 이곳에서 한번 사용된 표현이다. 그렇기에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지각이 없고 훈련되지 않은 질문이나 논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변론은 필연적으로 다툼이나 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울은 이러한 변론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버리라’로 번역된 ‘파라이테오마이’는 ‘거절하다, 거부하다, 사양하다, 양해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멀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을 버리지 않고 가까이 했을때 필연적으로 다툼이나 분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버려야하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항상 다툼을 일으키는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창조론 논쟁, 동성애 논쟁이 아닐까? 문자적인 성경해석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고 생각을 강요할 때 다툼이 일어나고 사람들을 귀를 닫게 된다. 특히 지도자라고 불리우는 목회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어설픈 지식 혹은 사색의 결과 만들어지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성경을 한 두 구절 읽고 묵상하고 개인적으로 적용하여 이를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제대로 공부하고 묵상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무지를 자랑으로 여기고 차별을 사랑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한 불의를 정의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2:23 In further contrast (δέ) to the call to Timothy to pursue virtues is this admonition to refuse speculations. Timothy is commanded παραιτοῦ (Pl.* and PE* 4x: 1 Tim. 4:7, which see; 5:11; Tit. 3:10; here; in the first and last passages with reference to things), “refuse, reject, avoid, have nothing to do with” speculations. ζήτησις** (cf. ἐκζήτησις** in 1 Tim. 1:4) has among its meanings “investigation” (Acts 25:20) and “discussion, debate” (Jn. 3:25; Acts 15:27). Neither of these positive meanings is intended here since the word is clearly marked as negative by the adjectives “foolish” and “ignorant.” That the word is used in 1 Tim. 6:4 in an essentially negative sense probably has inclined some to render it “controversies” (BAGD s.v. 2; RSV) or “speculations” (NASB, NEB), while its otherwise positive use may have inclined others to render it “arguments” (TEV, NIV), which lets the context and the qualifications indicate that here the word is used in a negative sense. In two of its three PE occurrences the activity is labeled “foolish” (μωράς, NT 14x, PE* 2x: Tit. 3:9) not only in the sense of “stupid” but also in the sense of “sinful and culpable” (G. Bertram, TDNT IV, 845). These arguments are further designated as ἀπαιδεύτους** (a NT hapax), i.e., “ignorant” in the sense of not informed. Perhaps the best explication of what Paul means by these two adjectives here is 1 Tim. 1:7: “They understand neither what they are saying nor the matters about which they make confident assertions.”
The ground for this admonition is identified in the concluding εἰδώς clause. The participle εἰδώς (in Paul cf. 1 Tim. 1:9; Tit. 3:11; 2 Tim. 2:23; 3:14; Phm. 21; plural εἰδότες in Rom. 5:3; 6:9; 1 Cor. 15:58; 2 Cor. 1:7; 4:14; 5:6, 11; Gal. 2:16; Eph. 6:8, 9; Phil. 1:16; Col. 3:24; 4:1; 1 Thes. 1:4) is used to indicate that one knows and often, as here, is followed by ὅτι (only 2 Tim. 3:14 and 1 Thes. 1:4 are possible exceptions) introducing the clause that identifies what one is supposed to know. γεννῶσιν, literally “they beget or bear,” is used figuratively in the sense of “breed” or “produce” with ζητήσεις understood as the subject. The “arguments” produce μάχας** (also in 2 Cor. 7:5; Tit. 3:9; Jas. 4:1, always plural and always used of nonphysical conflict; cf. BAGD), “quarrels.” Because these foolish arguments are unedifying and particularly because they beget quarrels Timothy is to avoid them.
Pl.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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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Pastoral Epi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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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EB New English Bible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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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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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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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Now in ia great house there are not only vessels of gold and silver but also of wood and clay, jsome for honorable use, some for dishonorable. 21 Therefore, kif anyone cleanses himself from what is dishonorable,4 he will be a vessel for honorable use, set apart as holy, useful to the master of the house, lready for every good work.
i See 1 Tim. 3:15
j Rom. 9:21
k [Prov. 25:4; Isa. 52:11]
4 Greek from these things
l ch. 3:17; Titus 3:1; [1 Tim. 5: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20–21.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20–21.
 
14-19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부끄러울 것이 없는 말씀의 사역자로 헌신을 당부하면서 이단의 가르침을 경계하는 내용을 기록한다. 이어지는 20-26절은 성결과 온유에 대한 권면이다. 
 
20절) 원문에는 역접을 의미하는 접속사 ‘데’가 있는데 이는 본절의 앞선 진술과 의미상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본절이 말하는 ‘큰 집’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작게는 하나님의 교회를, 크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이중에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다. 교회안에 사역을 하는 이들중에도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으로 비견될 만한 이들이 있다. 
‘귀히 쓰는’으로 번역된 ‘에이스 티멘’이나 ‘천히 쓰는’으로 번역된 ‘에이스 아티미안’은 롬 9:21-23에도 동일하게 사용된 표현이다. 
로마서 9:21–23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그렇다면 여기서 ‘귀히 쓰는 그릇’은 롬 9:23에서 말하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을 의미하는 것이고 ‘천히 쓰는 그릇’은 롬 9:22에서 말하는 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물론 앞서 17절에 등장한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속해 있다가 악성 종양과 같이 악영향을 미치고 출교당한 이들도 있지만 본 절에서 등장하는 큰 집에 있는 다양한 그릇의 비유를 구원과 멸망이라기 보다는 귀함과 천함이라는 은사와 역할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바꿀수 없는 절대적 차이, 즉 금, 은, 나무, 흙과 같은 재료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거싱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변화 가능한 상대적 차이, 즉 정결 여부에 따른 그릇의 사용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중에 이 절대적 차이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고민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왜 나는 금그릇이 아닌가? 왜 나는 나무 그릇, 질 그릇으로 만드셨는가라는 고민과 질문에 빠져서 자기 비하감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대적 차이에 주목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달란트를 얼마나 성실하게 잘 사용하였는지를 주목하시고 이를 물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금 그릇, 은그릇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 그릇으로 주인의 쓰기에 잘 준비되어 있느냐인 것이다. 
 
‘그릇’으로 번역된 ‘스큐오스’는 ‘그릇, 도구’라는 의미 이외에도 ‘몸, 여자, 아내’(벧전 3:7; 행 9:15; 살전 4:4)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릇의 용도는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다. 
 
‘귀하게’로 번역된 ‘티메’는 ‘값, 가격, 명예,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천하게’로 번역된 ‘아티미아’는 ‘티메’에 부정 접두어 ‘아’가 조합된 것으로 ‘수치, 불명예, 천하게’라는 의미이다. 
 
2:20 This verse states that in a large house there are various vessels, some εἰς τιμήν and some εἰς ἀτιμίαν. That some have gone astray from the truth (v. 18) provides the setting for referring to vessels εἰς ἀτιμίαν. Therefore, the large house is to be understood as the Christian community in its broadest sense, within which are false teachers, just as in the Korah situation (see above on v. 19). The analogy could represent society in general (Chrysostom), but that the imagery of the house has been used of the Christian community in 1 Tim. 3:15 favors that understanding here (Alford, Calvin).
Paul says ἐν μεγάλῃ οἰκίᾳ, “in a large house,” probably because only in a large house would one find the variety of vessels that he mentions here, especially those that are εἰς ἀτιμίαν. He may also refer to a large house because thereby he can point to the Christian community in the broadest sense and speak of some of its “members” (vessels) as εἰς ἀτιμίαν. Nowhere else does Paul speak of the church or its members in such terms: It is in this setting, not as a generalized definition of what the church is or ought to be, that Paul uses this imagery.
δέ, “now,” is a transitional particle. ἐν μεγάλῃ οἰκίᾳ, “in a large house,” is “a locational or situational orienter” that “marks the beginning of a figurative illustration” (Smith-Beekman, Analysis). The particles οὐκ … μόνον and ἀλλὰ καί distinguish two classes within the category of σκεύη that will be carried through with the μέν … δέ construction, which relates the distinguishing prepositional phrases εἰς τιμήν and εἰς ἀτιμίαν to the two classes respectively. σκεύη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vessel” (cf. C. Maurer, TDNT VII, 358–67, especially 364).
Paul has on an earlier occasion referred to three of the four materials that he mentions here—χρυσός, “gold,” ἄργυρος (NT 3x), “silver,” and ξύλον (NT 2x), “wood”—in this order (1 Cor. 3:12, with cognate form of the words and with other words). There as here the first two are distinguished from the third as representing different categories. The fourth term here, grouped with the third, is ὀστράκινος, “earthenware.”
The καί that introduces the μέν … δέ functions explicatively, “that is,” “namely,” indicating that the phrase that follows is intended to explain what went before it. The repeated relative pronoun is used here as a demonstrative pronoun with the meaning “some … others.” Some vessels are εἰς τιμήν, literally “for honor,” i.e., honored by the use to which they are put or the purpose that they have (cf. BAGD s.v. τιμή 2b; s.v. εἰς 4d). Likewise εἰς ἀτιμίαν, literally “for dishonor,” means that a given vessel is dishonored by the use to which it is put or the purpose that it has (cf. Rom. 9:21, where the same two prepositional phrases are used, again with σκεῦος).
Therefore, gold and silver vessels are esteemed as honorable because they are used for honorable functions. Similarly, wood and earthenware vessels are regarded as dishonorable because they are used for garbage or excrement and are sometimes thrown out with their contents. The implication is that there may indeed be vessels like the false teachers in the professing Christian community, but their activity indicates that they are dishonorable.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7–418.
 
21절) ‘깨끗하게’로 번역된 ‘엑카다레’는 ‘~로부터, ~의 밖으로’를 의미하는 분리 전치사 ‘에크’와 ‘깨끗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다리조’의 합성어이다. 이는 특별히 ‘제의적으로 부정한 것을 환경이나 존재하는 곳으로부터 제거하다’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고전 5:7에서 말하는 것처럼 묵은 누룩을 내버림으로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앞선 내용과 연결되서 보자면 불의한 행동을 한 이들을 출교시키고 자신을 자신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22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자기르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사용되는 그릇이 되는데 이 귀하게 쓰는 그릇의 세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첫째, 거룩하게 된다. ‘거룩하고’로 번역된 ‘헤기아스메논’은 ‘거룩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하기아조’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형이다. 수동형이 사용된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구별되는 삶이 필요하다. 이는 앞서 깨끗하게 하는 것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바로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된다. ‘쓰심에 합당하며’로 번역된 ‘유크레스톤’은 ‘잘, 좋은’을 의미하는 부사 ‘유’와 ‘이용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크리오마이’의 합성어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성도가 그의 주인이신 주님에 의해서 쓰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큰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느냐인 것이다. 운동 선수를 경기에 투입하기 위해서 잘 준비되어야 한다. 워밍업이 되어 있지 않으면 바로 투입할 수 없고 잘못하면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가 바로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상태인 것이다. 
셋째,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된다. ‘준비함이 되리라’로 번역된 ‘헤토이마스메논’은 본래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헤토이마조’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형이다. 이는 주인의 사용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방점은 ‘준비함’에 있다. 나는 이런 이런 선한 일에만 사용될꺼야 라는 태도는 옳지 않다. 은사와 재능에 따라, 또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선한 일들이 있다. 어떤 선한 일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또 다른 어떤 선한일은 전혀 주목받지 못한 일 일 수 있다. 이러할 때 내가 원하는 일만을 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이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집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주인이 사용하려고 꺼냈을때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되어진다. 
 
2:21 Inferential οὖν indicates that the statement it introduces is an inference drawn from the last phrase of v. 20: Since some vessels are for honor, one should “therefore” seek to be one of them. This inference is presented in a conditional sentence introduced by ἐάν, “if.” The condition is stated in general terms with the indefinite pronoun τις, “anyone” (on ἐάν τις see the comments on 1 Tim. 1:8). The condition to be met is specified in the words ἐκκαθάρῃ ἑαυτὸν ἀπὸ τούτων. The antecedent of plural τούτων is most likely the nearby plural relative pronoun phrase in v. 20b, ἃ … εἰς ἀτιμίαν, “some unto dishonor,” which, as has been seen, speaks by implication of the false teachers. (It is possible but not likely that the antecedent of τούτων is the more distant ἀδικίας. Against this is not only that another closer antecedent would be passed over but also that ἀδικίας is singular.) The condition is that one cleanse oneself from the defilement of fellowship with “these” and the effects of their teaching and actions (cf. 3 Jn. 10–11). ἐκκαθαίρω** is used similarly in 1 Cor. 5:7 (cf. the uncompounded verb with the reflexive pronoun in 2 Cor. 7:1 in the light of what precedes it). ἐκ in the compound verb adds a perfective idea, which in this combination means “cleanse thoroughly” (cf. Robertson, Grammar, 597). The reflexive pronoun ἑαυτόν, “himself,” is used because the action called for affects the subject.
In the conclusion, “he will be a vessel for honor,” Paul explicitly uses the language of the analogy in v. 20. This use of the neuter noun σκεῦος, “vessel,” sets the pattern for the use of the neuter gender in the three phrases that follow. Cleansing “from these” assures that one “will be” (future ἔσται) “a vessel for honor.” This conditional sentence underscores the second half of the inscription in v. 19 and applies it to Timothy’s situation. To be an honorable vessel one must depart from wickedness by departing from those who practice such (cf. 1 Cor. 5:11, 13; 2 Cor. 6:14–7:1).
The significance of the fulfillment of this condition is spelled out in the three phrases that follow. ἡγιασμένον (perfect passive participle)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sanctified” or “made holy” by having been cleansed from the defilement of sin and thus becoming one set apart for God and his service (see especially Eph. 5:26 where a similar [but not identical] sense of cleansing is conveyed by καθαρίζω, the uncompounded form of the verb used in the protasis of this verse). It thus reiterates the aspect of cleansing but in more personal spiritual terms.
εὔχρηστον** (2 Tim. 2:21; 4:11; Phm. 11) τῷ δεσπότῃ, “useful for the master,” specifies the significance of this cleansing in terms of the vessel’s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master of the house. It continues the image of the house with τῷ δεσπότῃ being the master of the house (cf. in the PE* 1 Tim. 6:1, 2; Tit. 2:9) and by analogy representing God (cf. Lk. 2:29; Acts 4:24; 2 Pet. 2:1; Jude 4; Rev. 6:10).
The end result is that the vessel “is prepared,” i.e., has been put in readiness (ἡτοιμασμένον, perfect passive participle). The task for which (εἰς) it has been put in readiness is πᾶν ἔργον ἀγαθόν, “every good work,” an apt phrase that fits the imagery of the house and also the application intended, the life of the Christian, especially that of the Christian minister. “Prepared for every good work” thus specifies how useful the vessel is to the master in that it is fit for every type of service. The phrase πᾶν ἔργον ἀγαθόν is used elsewhere by Paul some 7x (see 1 Tim. 5:10) of the wide range of good deeds that one is called to do as a Christian (cf. Eph. 2:10). Paul returns to this phrase in 2 Tim.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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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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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But cavoid dirreverent babble, for it will lead people into more and more ungodliness, 17 and their talk will spread like gangrene. Among them are eHymenaeus and Philetus, 18 who have swerved from the truth, fsaying that the resurrection has already happened. They are upsetting the faith of some. 19 But God’s firm foundation stands, bearing this seal: g“The Lord knows those who are his,” and, “Let everyone hwho names the name of the Lord depart from iniquity.”
c Titus 3:9
d 1 Tim. 6:20
e 1 Tim. 1:20
f [1 Cor. 15:12]
g Num. 16:5; Nah. 1:7; John 10:14, 27; [Luke 13:27]; See 1 Cor. 8:3
h Isa. 26: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16–19.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민 16:5
사 26:13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16–19.
 
14-15절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될 것을 당부하고나서 바울은 이어지는 16-18절을 통해서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16절) 망령되고 헛된 말로 번역된 ‘타스 데 베벨루스 케노포니아스’는 직역하면 ‘속된 허튼 소리’이다. 이는 당시 초대 교회 특히 디모데가 사역하던 에베소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혼란과 분쟁으로 이끌던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이다. 
‘망령되고’로 번역된 ‘베벨로스’는 신약에 5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어떤 것의 거룩한 특징을 침해하는 모습을 보이는’의 의미이다. 
 
'헛된 말’로 번역된 ‘케노포니아’는 ‘빈, 헛된’을 의미하는 ‘케노스’와 ‘소리, 음성’을 의미하는 ‘포네’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잡담, 쓸데없는 말’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목회서신인 딤전 6:20과 딤후 2:16에 두번 사용되었다.
 
‘버리라’로 번역된 ‘페리이스타소’는 ‘피하다, 도망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피리이스테니’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피하는 것이다. NIV와 ESV는 모두 이를 avoid로 번역했다. 이는 비겁한 회피가 아니라 무익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는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워서 피하지? 
디도서 3:9
9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경건하니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기 때문이다. 본 표현 앞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포함되어 있다. 즉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기 때문이다. 
‘경건하지 아니함’이라고 번역된 ‘아세베이아’는 부정접두어 ‘아’와 ‘경배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의미의 ‘세보’의 합성어이다. 이와 반대되는 표현이 ‘유세베이아’로 이는 ‘경건함, 독실함’을 의미한다. ‘나아가나니’로 번역된 ‘프로콥수신’은 ‘진보하다, 발전하다’라는 뜻을 가진 ‘프로콥토’의 미래형으로 거짓 교사들이 자신들 앞에 놓은 모든 장애물들을 헤치고 착착 진행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 더욱더 심각한 상태로 나아갈 것을 의미한다. 원래 이 단어는 진보와 발전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표현이지만 본절에서는 그렇지 않다. 경건하지 아니함의 발전의 종국은 멸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이나 잘못된 지식을 교정해야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건설적인 논쟁이나 비판이 아닌 경우 대부분은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이를 주장하는 이들이나 이를 듣는 이들이 경건하지 아니함가운데 나아가기 때문에 이를 피해야 한다. 
 
 
2:16 In addition (δέ) Timothy is also warned (just as he was to warn others, v. 14) to “avoid worldly empty chatter.” Paul gives two grounds for this warning, one introduced by γάρ in v. 16b, the other by καί in v. 17a: Those who fail to avoid such chatter become even more ungodly, and their erroneous message harms others like a bad disease (cf. Smith-Beekman, Analysis).
The warning itself is quite simple and to the point. περιΐστασο** (also in Jn. 11:41; Acts 25:7; Tit. 3:9) means in the middle, as here, “avoid” or “shun.” The present tense of the imperative characterizes the action as that which Timothy must constantly do. He is to avoid κενοφωνίας** (see 1 Tim. 6:20), “empty talk,” which Paul characterizes here as βεβήλους** (1 Tim. 1:9; 4:7; 6:20; Heb. 12:16), “profane” or “worldly” in the sense of “godless.” That Paul uses the same terms in 1 Tim. 6:20 probably indicates that he is dealing with the same false teaching here as there, where κενοφωνίας is a synonym for ματαιολογία in 1 Tim. 1:6. Thus his description of ματαιολογία in 1 Tim. 1:7 may indicate, in part at least, what he means by βεβήλους here (cf. also ματαιολόγος in Tit. 1:9 and the description there of the false teachers and their teaching).
The first reason (γάρ) for avoiding such talk is its dire effect on those who engage in it. Such people are referred to here with the third person plural verb προκόψουσιν, which could, admittedly, refer back to the talk itself, which was plural, so that the talk itself would be said to lead to further ungodliness. But the subject of this verb is the antecedent of αὐτῶν and ὧν in v. 17, which are specified by the names of two persons. Such people will “progress” or “advance” (προκόπτω,** Lk. 2:52; Rom. 13:12; Gal. 1:14; 2 Tim. 3:9, 13; all 3x in the PE of advance in what is bad), with the genitive following the verb indicating that in which they will progress, ἀσεβείας** (Rom. 1:18; 11:26; Tit. 2:12; Jude 15, 18), “ungodliness” or “impiety” in thought and action.
This construction is further qualified by the prepositional phrase ἐπὶ πλεῖον, which is placed first for emphasis and is best rendered “even more,” “even greater.” “ ‘They will arrive at an ever greater measure of godlessness’ = become more and more involved in godlessness” (BAGD s.v. πολύς II.2c). It may be that these people regarded themselves as “progressives” and that Paul picks up the verb from their usage, ironically indicating that their progress is in ungod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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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Pastoral Epi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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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2–413.
 
17절)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호스 강그라이나 노멘 헥세이’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쏟아내는 말이 마치 악성 종양과 같이 퍼져나간다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악성 종양’이라고 번역된 ‘강그라이나’는 고대 의학 서적이나 역사가 플루타크의 저술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신약 성경에서는 이곳에서만 한 번 언급된다. 이는 ‘갉아먹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그라오’에서 파생된 명사로 ‘살을 갉아먹는 악성 종기’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있는 세포들의 지엽적인 괴사(감염이나 피가 공급되지 않음으로 생기는) 혹은 암 덩어리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gangrene’로 원어 표현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고 NLT의 경어는 이를 cancer로 번역하였다. 마치 신체 조직을 괴사시키는 염증이나 폭발적으로 자라나서 결국 조직을 손상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 덩어리와 같이 심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퍼져나감’으로 번역된 ‘노멘 헥세이’에서 ‘노멘’은 문자적으로는 ‘목초지’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증가, 번식’을 의미하며 ‘헥세이’는 원래 ‘가지고 있다, 야기하다’를 의미하는 ‘에코’의 미래형이다. 악성 종양이 퍼져나간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따르는 이들이 종양이나 암덩어리가 확장되는 것처럼 완전히 멸망될 것이라는 것이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이단 사설로 거짓 가르침을 전함으로 악성 종양을 일으키는 이들로 바울은 교회 안의 특정 인물로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지목하고 있다. 후메내오는 딤전 1:20에 언급된 인물로 알렉산더와 더불어 사탄에게 내어준 바된 인물이다. 이미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한 것이다. 빌레도는 여기에 한번 언급된 이들인데 이들은 에베소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매우 강력하게 악행을 일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교를 당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악한 영향력을 미칠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던 이단 사설, 거짓 가르침은 18절에 나온다. 
 
2:17 The coordinating καί joins the first clause of this verse to the preceding clause as the second reason for avoiding “godless empty talk” (v. 16). This time Paul speaks of the effect on others of such talk, “implying,” under the image of a spreading disease, “that their teaching will feed upon, or eat away at, the life of the church” (Fee). Paul repeats λόγος and thereby sets “their” (αὐτῶν) “word,” what is said by those who engage in this empty talk, in contrast to the “word of truth” (v. 15). ἔχω (here future ἕξει) with νομήν, literally “have pasture,” was used figuratively in medical language of the “spreading” of an ulcer (see BAGD s.v. νομή 2 for extrabiblical parallels). The ulcer to which Paul compares this “word” is indicated by the conjunction ὡς, “as,” and is that of γάγγραινα** (a biblical hapax but a medical term since Hippocrates, fifth and fourth centuries b.c.), “gangrene,” i.e., decay of tissue in a part of the body where the blood supply is obstructed by injury, disease, etc., which continually spreads.
Having alluded to a group of false teachers by the use of “their,” Paul specifies two such teachers (whose teaching will be indicated in v. 18a): ὧν ἐστιν Ὑμέναιος καὶ Φίλητος. ὧν refers back to αὐτῶν and to the subject of προκόψουσιν. Ὑμέναιος,** Hymenaeus, is undoubtedly the man referred to in 1 Tim. 1:20 (see the comments there), whom Paul had already “delivered over to Satan.” Hymenaeus is still setting forth his false teaching and here is joined by Φίλητος,** Philetus, about whom nothing more is said in the NT.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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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3.
 
18절)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이단 사설의 핵심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지나갔지만 성도들의 부활은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성도의 부활이 지나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성도인 우리들도 마지막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그런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라고 가르쳤기에 이런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행 17:32이나 고전 15:12 등에서도 이들의 주장과 유사한 사상들이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17:32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고린도전서 15:12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종말의 날 일어나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로서 엄밀히 말하자면 바울의 복음 전파 당시 발생하기 시작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들은 플라(Platon)으로부터 계승된 헬라 철학의 이원론(dualism)에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영혼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영혼에게는 선의 지위를, 그리고 육체에게는 악의 지위를 선사하여 영혼을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사상은 ‘영혼의 자유를 위한 육체의 비하’로 귀결되었다. 이들에게 있어 육체의 비하는 결국 육체에 대한 과도한 금욕 또는 그 반대로 육체에 대한 과도한 방종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베소 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들은 주로 후자, 즉 쾌락주의에 속했던 자들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건치 아니함으로 점점 나아가는’(16절) 자들로서 '악성 종양’(17절)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즉 부활이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의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몸의 부활이 없으므로 이생에서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사상은 그릇되었다. ‘그릇되었도다’로 번역된 ‘에스토케산’의 원형 ‘아스토케오’는 부정 불변사 ‘아 ’와 ‘표적’을 뜻하는 명사 ‘스토코스’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본래 '과녁을 빗나가다, 벗어나다, 목표를 놓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딤전 1:6과 6:21에서도 사용되었다.
 
결국 그릇된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온전한 믿음을 무너뜨린다. ‘무너뜨리느니라’로 번역된 ‘아나트레푸신’은 ‘~위에, 위를 향하여’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나’와 ‘회전’이란 의미의 명사 ‘트로페’의 합성어로 ‘전복시키다, 뒤집어지게하다’라는 의미의 ‘아나트로포’의 현재형이다. 이는 장차 이루어질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이미 부활이 이루어졌다라고 믿는 잘못된 신앙은 전복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 몸의 부활에 대한 부정은 우리의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악성 종양과 같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매 순간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할 것을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인데 그 부활을 부정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활이 없기에 현재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낼 수 없고 살아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2:18 This verse continues the thought begun in the last part of v. 17. The two men named there have “gone astray from the truth.” Their error consists of “saying that the resurrection has already taken place.”
οἵτινες, “who,” is used here of two specific individuals and therefore takes the place of the simple relative pronoun (BAGD s.v. 3). ἠστόχησαν (see 1 Tim. 1:6) is used here with the meaning “deviate,” “depart from” and is followed by περὶ τὴν ἀλήθειαν, indicating that from which they have departed. περί with the accusative is used metaphorically here with the meaning “in respect to” (C. F. D. Moule, Idiom-Book, 62) or “concerning” (Robertson, Grammar, 620). The concept τὴν ἀλήθειαν was introduced in v. 15 with the phrase “the word of truth” and is utilized again to represent the absoluteness of the gospel (cf. Gal. 2:5), as it will be later in this letter (2:25; 3:7, 8; 4:4).
These two men have departed from the truth by “saying that the resurrection has already taken place.” The textual evidence favors the inclusion of τήν with ἀνάστασιν (see UBSGNT, TCGNT). Paul* uses ἀνάστασις of Jesus’ resurrection (Rom. 1:4; 6:5; Phil. 3:10) and otherwise, as here, of a future decisive occasion when humans are to be raised bodily from the dead (1 Cor. 15:12, 13, 21, 42). Hymenaeus and Philetus are “saying” (i.e., teaching; cf. λέγω in 1 Tim. 1:7) that this “resurrection” ἤδη γεγονέναι. γεγονέναι (second perfect active infinitive of γίνομαι), “to have taken place” (see BAGD s.v. I.3) is further emphasized by the addition of the adverb “already,” ἤδη.
Their teaching apparently related the resurrection only to the inner spiritual life. It was probably associated with a false asceticism and a low view of the material world, especially of the human body (cf. 1 Tim. 4:1ff.), and might have resulted from an incorrect handling of Paul’s words (cf. 2 Pet. 3:16) about Christians being presently raised with Christ (Rom. 6:1–11; Eph. 2:6; 5:14; Col. 2:12, 13; 3:1–4; cf. Irenaeus, Haer. 1.23.5; for other early church references see BAGD s.v. ἀνάστασις 2b). Already in 1 Corinthians 15 Paul wrote against a similar (but not identical) form of error about the resurrection of believers, saying that such teaching calls in question Christ’s own resurrection and is thus completely unacceptable.
The effect of such teaching is that “they upset the faith of some.” καί introduces this result (see BAGD s.v. καί I.1f; cf. 2 Cor. 11:9 for a similar usage of καί). ἀνατρέπουσιν** (literal in Jn. 2:15; figurative in Tit. 1:11) is used here figuratively of “overturning, upsetting, or destroying” the faith of some. Indefinite τινων, “of some,” indicates that some but not all of the Christians were affected in this way. Since τὴν πίστιν is “the faith of some,” it most likely refers to their personal belief rather than to the body of faith, although the latter was certainly affected if what “some” had believed about the resurrection had been overturned by this new and erroneous teaching.
This error can affect how one regards Jesus’ resurrection and its significance for one’s future standing and hope for eternity, and thus also how one thinks of the Christian’s present relationship to Christ and one’s perspective on the body and conduct in this life and attitude to material creation. Therefore, Paul regards it as striking at the heart of Christianity and thus as a departure from the truth.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UBSGNT K. Aland, M. Black, C. M. Martini, B. M. Metzger, and A. Wikgren, The Greek New Testament (United Bible Societies). 3rd ed. corrected, Stuttgart, 1983.
TCGNT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1971.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Haer. Adversus Haereses (Irenaeus)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3–414.
 
19절) 앞선 18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로부터 멀어진 이단자들이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라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려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바울은 이렇게 이단의 공격에 대해서 염려하며 경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을 교회의 견고함과 거룩함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로 번역된 ‘켄토이’는 일반적 역접을 의미하는 접속사 ‘데’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가지는 표현으로 결코 이단들이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함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처럼 이단의 공격이 거셀 것이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터는 더욱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 ‘견고한’으로 번역된 ‘스테레오스’는 본래 ‘굳은, 밀도가 강한’을 의미하는 형용사이며 ‘터’로 번역된 ‘데멜리오스’는 ‘기초, 터, 기초석’이란 의미이다. 이 견고한 터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터로 이는 ‘영원 전의 선택’ 혹은 ‘그리스도 자신’, ‘교회’라고 볼 수 있다. 하반절에서 바울은 ‘불의한 자들에게서 선택된 자기 백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이단 사설과 거짓 가르침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섰으니’로 번역된 ‘에스테켄’은 ‘두다, 세우다’라는 동사 ‘히스테미’의 현재 완료형으로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교회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시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한글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와 인침 사이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에는 하나님의 표시, 인이 찍혀 있다. 고대 건물에는 그 목적을 새겨 넣은 표시가 있었다. ‘인침’으로 번역된 ‘스프라기다’는 ‘확증하다’라는 의미로 롬 4:11, 고전 9:2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자신의 도장을 찍어 자신의 소유로 확증하셨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유월절 인방과 문설주에 염소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죽음의 신이 넘어가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로 인침을 받은 곳이기에 어떠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도 안전하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임을 인치는, 확증하는 두개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첫째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는 말씀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는 어구는 민 16:5의 인용이다.
민수기 16:5
5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사람을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고라와 그에 동조한 이들 및 그렇지 않은 이들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과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그에 동조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이 그 의미에 있어서 상통하는데서 인용된 것이다. ‘아신다’로 번역된 ‘에그노’는 본래 ‘알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스코’의 부정 과거형이다. 부정과거 시제는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기노스코’는 피상적 앎을 말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야다'와 같이 성적인 관계를 나타낼때도 사용된 표현으로 긴밀한 관계를 통한 인격적 지식을 나타낸다(창 4:1; 마 1:25). 하나님께서 친밀한 관계에서 인격적으로 아시는 당신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 다라는 의미이다. 
 
둘째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교회에서 새겨져 있다. 이는 민 16:26, 사 52:11의 인용이다. 
민수기 16:26
26모세가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매
이사야 52:11
11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초대교회의 관례를 따른 신앙고백이다.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거짓 교사들은 교회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불의를 행하고 거짓 가르침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면서 불의에서 떠나라고 명하고 있는 것이다. ‘떠날지어다’로 번역된 ‘아포스테토’는 ‘떠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피스테미’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불의와 철저하게 분리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당신의 교회위에 새겨져 있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해야 한다. 
 
2:19 Lest Timothy and the Christians in Ephesus be discouraged about the inroads of this false teaching and its effect on some and perhaps even begin to wonder if a massive falling away is to follow, Paul reminds them about the stability and permanence of God’s work. He bases this encouragement on two things: God’s electing knowledge of his own and the fact that such true believers will abstain from wickedness. In doing so he utilizes statements from Numbers 16 that he quotes and summarizes here as permanent principles on which the Christians can rely.
μέντοι functions here (as it usually does in the NT) as an adversative, “nevertheless,” to place the encouraging word that follows over against the discouraging report that precedes. Paul asserts metaphorically that the foundation laid by God in Ephesus and elsewhere stands—even though there are false teachers and some who heed their teaching. Some have suggested that Paul is referring to the gospel message under this imagery, and others that he is referring to the church. The latter is more likely since Paul has done so elsewhere (cf. 1 Tim. 3:15; 1 Cor. 3:10–12; Eph. 2:20–22), and this perspective is strengthened by his use of the house imagery in vv. 20–21.
θεμέλιος, “foundation,” is used of either the “foundation” of a building or the elementary beginnings of a thing (BAGD). The two thoughts are combined as the imagery is figuratively applied to the church as the building that God builds (so rather consistently in Paul:* Rom. 15:20; 1 Cor. 3:10–12; Eph. 2:20; the exception is 1 Tim. 6:19; cf. K. L. Schmidt, TDNT III, 63f.). The adj. στερεός** (also in Heb. 5:12, 14; 1 Pet. 5:9; cf. στερέωμα in Col. 2:5), “firm, solid,” is added to impress on Timothy the strength and permanence of this foundation, a note that the verb ἕστηκεν also takes up (cf. Is. 28:16). This foundation is “God’s” (τοῦ θεοῦ), indicating its builder and owner, just as the “house” was “God’s” (θεοῦ) in 1 Tim. 3:15. This in itself assures its stability and permanence, as Paul implies later in this verse. Now he says that God’s firm foundation “stands” (ἕστηκεν, perfect active indicative of ἵστημι, used here intransitively), i.e., “stands firm,” so that it cannot be overturned or destroyed (cf. 1 Cor. 10:12, where this verb is used in contrast to “fall”).
The participial construction that follows is used “with a very faint causal force, illustrating the former declaration” (Ellicott). σφραγίς (Pl.* 3x: Rom. 4:11; 1 Cor. 9:2; 13x in Revelation) is used here of the mark or impression made by a seal, i.e., the inscription, and here that latter sense appears by extension (cf. Ex. 28:36; see G. Fitzer, TDNT VII, 939–53, especially 948; R. Schippers, NIDNTT III, 497–501, especially 500). Seals were used to identify objects and particularly to indicate ownership. Here the seal is the guarantee for the preceding declaration. The particular inscription to which Paul is referring with ταύτης, “this,” is set forth in the statements that follow.
The first part of the inscription (singular σφραγίς) is the LXX of Nu. 16:5 with κύριος in place of ὁ θεός. Paul may have used κύριος because it reflects the Hebrew original (YHWH), which should guide our understanding of which person of the Godhead he has in view here, especially since he has referred to ὁ θεός in the preceding clause. He turns to Numbers 16 to give encouragement to Timothy and the Christians at Ephesus as they face false teachers and false teaching arising from their midst. As sad as the episode of Korah’s rebellion was, it did not devastate the congregation of Israel, and false teaching will not devastate the church at Ephesus. The statement quoted here affirms God’s ability to differentiate between true and false believers and becomes here the reason for believing that God’s foundation stands firm in the present situation.
The second part of the inscription is joined to the first by καί and is probably a generalized summary of the exhortation in Nu. 16:26 that uses language found elsewhere in the OT, which in this summary form serves as a broad principle. The Lord identified those who were his by calling them to separate from Korah and those who followed Korah. Abstaining from evil is thus an integral part of the inscription and the second half of one great truth. God knows and chooses his people, and they manifest that reality by abstaining from evil.
πᾶς ὁ ὀνομάζων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appears to be a slight modification of a phrase in the LXX of Joel 3:5 (πᾶς ὃς ἄν ἐπικαλέσηται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which is quoted in Peter’s sermon (Acts 2:21) and by Paul in Rom. 10:13. If this is so, the verb ἐπικαλέσηται has been changed to ὀνομάζων, either to reflect the change from what one should do (call upon) to what one has done (called upon by naming), or the verb may be an alternative Greek rendering of the underlying Hebrew verb (qarā’). Paul’s use of this phrase from Joel in Romans aids one’s understanding of the component parts of the phrase. In Romans 10 calling upon the Lord’s name is the expression of faith in the Lord (cf. vv. 11, 13 and especially v. 14). Therefore, here also to name the Lord’s name is an expression of faith in him. (The occurrence of κύριος here may have caused Paul [in anticipation] to use κύριος, reflective of the Hebrew in the first half of the inscription, in place of ὁ θεός found in the LXX so that the two halves would contain the same word.) πᾶς, “everyone,” makes the command absolute by addressing it to every person who names the name of the Lord.
The response that validates the claim to know the Lord that is made by naming his name (and that confirms the reality of being known by the Lord) is given in the command ἀποστήτω ἀπὸ ἀδικίας. The verb (second aorist active imperative of ἀφίστημι; see 1 Tim. 4:1)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keep away from,” “abstain,” “turn away from.” It is not the verb used in the LXX of Nu. 16:26, but it does appear in the response in Nu. 16:27. Paul’s attempt to summarize the principle involved in the passage as a whole (Nu. 16:26: “Depart now from the tents of these wicked men”) with “turn away from wickedness” may have influenced his choice of the verb.
ἀδικίας means for Paul, as indicated by his usage (cf. Rom. 1:18; 2:8; 2 Thes. 2:10, 12), that which is contrary to the truth, i.e., “unrighteousness” and “wickedness.” Hence the inscription commands not only a departure from immorality but also from the error that contradicts the truth and leads to such immorality. Therefore, the concrete application for the Christians in Ephesus is that they turn away from the errors of thought and practice of those who have gone astray from the truth (cf. v. 1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NIDNTT C. Brown,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I–III. Grand Rapids, 1975–78.
LXX Septuagint
LXX Septuagint
LXX Septuagint
LXX Septuagint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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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Remind them of these things, and ycharge them before God2 znot to quarrel about words, awhich does no good, but only ruins the hearers. 15 Do your best to present yourself to God as one approved,3 a worker bwho has no need to be ashamed, rightly handling the word of truth.
y 1 Tim. 5:21; 6:13
2 Some manuscripts the Lord
z 1 Tim. 6:4; [ver. 23]
a Titus 3:9
3 That is, one approved after being tested
b [Phil. 1:2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14–15.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14–15.
 
14-19절은 말씀을 맡은 사역자로서의 헌신을 당부하며 이단 사설을 떠날 것을 권면한다. 
 
14절) ‘기억하게 하여’라는 의미로 번역된 ‘휘포밈네스케’는 ‘~에 의하여,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의 전치사이나 여기서는 강조의 의미로 쓰인 접두어 ‘휘포’와 자체로 ‘생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밈네스코’의 합성어이다. 이는 ‘회상시키다, 상기시키다, 깨우치다’라는 동사 ‘휘포밈네스코’의 현재 명령형이다. 1-13절은 디모데가 생각하고 기억해야할 내용이라면 14-19절은 디모데 자신이 아니라 ‘그들’ 즉 다른 그리스도인들 2절 문맥속에서 보자면 충성된 사람들이 기억해야할 진술이다. 
그렇다면 기억해야할 ‘이 일’은 무엇인가? 이는 문맥상 좁게는 앞서 인용한 초대 교회 순교 찬양시인 11-13절이며 조금더 넓게는 앞선 1-13절의 내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디모데에게 기억하라고 명령한 그 내용을 이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억하게 하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복음 사역자로서의 자세를 기억할것을 명하는 것이다.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원문에는 ‘엄히 명하라’로 번역된 ‘디아마르튀로메노스’가 먼저 등장한다. 이는 앞서 딤전 5:21에 등장한 표현이다. 이는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 ‘디아’와 ‘증언하다, 선포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마르티로마이’의 합성어이다. 이 동사는 ‘순교자, 목격자, 증인’을 의미하는 ‘마르티스’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이는 순교자를 통하여 증언하다라는 의미로 매우 중요하고 중대한 사안에 관련하여 사실을 확인하여 엄숙하게 무언가를 주장한다라는 의미이다. 
 
디모데가 그의 충성된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숙하게 명해야만 하는 내용은 다름 아닌 ‘말다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다툼을 하지’로 번역된 ‘로고마케인’의 원형 ‘로고마케오’는 ‘말’이라는 의미의 ‘로고스’와 ‘싸우다’라는 동사 ‘마코마이’의 합성어로 말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딤전 6:4에서 이 단어의 명사형인 ‘로고마키아’가 ‘언쟁’으로 번역되었다. 
디모데전서 6:3–4
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앞서 딤전에서도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하였다. 당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 이들(딤전 1:4)이 많았고 이들은 교회안에서 변론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삼았다. 결국 이러한 논쟁, 말다툼은 아무런 유익을 낳지 못하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기에 이러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당부는 당시 초대교회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바울은 말다툼을 금해야 하는 이유로 두가지를 설명한다. 
첫번째는 유익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말다툼, 언쟁을 좋아하는 자는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가득하게 된다.(딤전 6:4) 
두번째는 그 말다툼을 듣는 자들을 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중의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마태복음 18:6–7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본문에서 ‘망하게’로 번역된 ‘카타스트로페’는 ‘뒤집어 엎다’(마 21:12; 막 11:15)라는 의미의 동사 ‘카타스트레포’의 명사형으로 ‘믿음의 전복’을 의미한다. 이 표현에서 ‘catastrophe’, ‘대 참사, 재앙’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누군가 옆에서 의미 없는 말다툼을 할 때 이로 인해서 믿음이 약한 이들은 믿음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와의 논쟁, 말다툼을 통해서 듣는 자를 살리는 유익이 있을때 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2:11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마땅히 해야할 논쟁을 피해서는 안되지만 의미없는 말다툼은 피해야 한다. 
 
2:14 The beginning of a new section is signaled by ταῦτα with the imperative ὑπομίμνῃσκε, “remind.” Paul is still addressing Timothy directly, but now initially in terms of others, the “them” understood. The “them” could be Christians in general, but that Timothy is to warn them about the impact of their words upon “those who hear” (τῶν ἀκουόντων) suggests that Paul has in mind the “faithful men” of v. 2. If this is the case, he has returned to what seemed to be an isolated instruction in v. 2, but which is now seen not to be such. V. 1 is developed primarily in vv. 3–13. Now v. 2 is touched on again, not only by this brief word of instruction, but also by the instructions about what a godly teacher should be (vv. 15–16, 21–26). At the same time the preceding words to Timothy, vv. 3–13, in addition to the ταῦτα of v. 2, are the very things that he is to remind them of (on ταῦτα see especially 1 Tim. 4:11; 6:2). ὑπομίμνῃσκε (Pl. also in Tit. 3:1)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call to mind,” “bring up” (cf. 3 Jn. 10). Timothy is commanded to bring to the minds of these men the very things that Paul has just brought to his mind.
The present tense of the participle διαμαρτυρόμενος following the present imperative ὑπομίμνῃσκε implies that the action of the participle is concurrent with that of the imperative. Because of the participle’s dependence on the imperative, the force of the imperative carries over so that the participle is in effect a second command. διαμαρτυρέω (Pl.* 4x: 1 Thes. 4:6; 1 Tim. 5:21; 2 Tim. 4:1; in PE with ἐνώπιον τοῦ θεοῦ) means here “charge” or “warn.” ἐνώπιον τοῦ θεοῦ, “before God,” means here “in God’s sight or presence” and is an expression used in assertions that call on God (cf. Gal. 1:20; 1 Tim. 5:21; 6:13; 2 Tim. 4:1; there is no essential difference in meaning in the variant reading ἐνώπιον τοῦ κυρίου; see TCGNT). The phrase reminds those charged that they are being called to accountability before God himself.
That which they are charged not to do is signified by μή with the infinitive λογομαχεῖν,** “to dispute about words” (a NT hapax that Robertson suggests was “coined by Paul from logomachia [1 Tim. 6:4]”; see NA26 for the variant reading λογομάχει). Paul is not referring to “hair splitting” (contra BAGD) but to the kind of serious dispute about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words relating to the Christian faith that results, as this passage indicates, in straying from the truth and saying that the resurrection has taken place (vv. 16–18; cf. the consequences of λογομαχία in 1 Tim. 6:4f.). One may also appropriately assume that this passage was written with the previous one about “words” in mind (1:13) and conclude that Paul is contrasting this conduct with what he commended there. Since Timothy has been retaining Paul’s words and passing them on (cf. 1:13; 2:2) and since the false teachers were disputing them (cf. vv. 17–18), Paul charges those who would be faithful not to dispute about these words. This correlation is borne out by Paul’s admonition of Timothy (as an example to those he warns) to handle accurately “the word of truth” (v. 15), i.e., the apostolic message.
They are not to dispute about words because there is no good result, literally, “for nothing useful” (ἐπʼ οὐδὲν χρήσιμον; χρήσιμον** is a NT hapax known since the sixth century b.c.; see MM) or, in more idiomatic English, “useful for nothing” or “it does no good” (TEV, NEB). And it is detrimental to the hearers. The outcome is the “ruin” or “destruction” (καταστγροφῇ,** also in a disputed reading in 2 Pet. 2:6, which see) “of the hearers.” Paul uses ἀκούω in a substantive participle construction twice in his letters to Timothy. In the other occurrence (1 Tim. 4:16) “the hearers” (τοὺς ἀκούοντας) are distinguished from Timothy, and it seems that here also Paul distinguishes between those who are called on to minister (cf. v. 2) and those to whom they minister, “the hearers.”
Pl. Paul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TCGNT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1971.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NA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26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MM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London, 1930.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NEB New English Bible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9–411.
 
15절) 앞선 14절은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그들, 충성된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고 당부한 내용이라면 본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직접적으로 주는 명령이다. 
먼저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라고 권면한다. ‘옳게 분별하며’로 번역된 ‘오르도토문타’는 ‘바르게, 옳게, 곧은’이라는 의미의 형용사 ‘오르도스’와 ‘절단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템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동사 ‘오르도토메오’의 완료 분사형으로 신약에서 이곳에서 한번 사용된 표현이다. ‘페리토메’는 ‘할례”라는 의미이다. 이는 표현대로 똑바로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밭고랑을 똑바로 경작하는 것’이나 ‘석공이 돌을 똑바로 자르는 것’또는 ‘낙타털로 만든 천을 똑바로 재단하는 것’과 연관된 표현으로 이해한다. 본절에서는 문맥상 거짓 교사들의 왜곡된 진리, 거짓 가르침과는 대조되는 태도로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올바로 전달해야함을 뜻하는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 진리의 말씀, 복음을 전하는 이가 제대로 깨닫는 것이다. 
 
ὀρθοτομέω (orthotomeō), 동사. 바른 길로 인도하다.
동사 용법
1. 바르게 분석하다 ⇔ 면밀히 살피다. — 해석하거나 분석하다(타당한 구분을 함으로). 어떤 것을 똑바로 자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딤후 2:15 ὀρθοτομοῦντα τὸν λόγον τῆς ἀληθείας.
칠십인역 참조 구절
잠 3:6; 잠 11:5
동사. 동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The adv. ὀρθῶς occurs 17×, e.g., of speaking “correctly” (i.e., saying the right things, Deut 5:28 et al., for Heb. יָטַב H3512 hiph., “to do well”), of playing a musical instrument “well” (1 Sam 16:17, also for יָטַב), of walking “in a straight manner” (i.e., behaving uprightly, Prov 14:2, for the noun יֹשֶׁר H3841, “uprightness”). The vb. ὀρθόω is found 7×, usually without special significance (e.g., Gen 37:7). Among compounds, the most freq. ones are κατορθόω (almost 30×, incl. 9× in Proverbs), which has several senses, and ἀνορθόω (16×; note that for this last vb. Muraoka considers new the senses “to establish firmly” [e.g., 2 Sam 7:13] and “to make stand erect” [e.g., Ps 145:14, LXX 144:14]). Special interest attaches to a compound previously unattested, ὀρθοτομέω, “to cut straight,” used twice with ὁδός in a fig. sense (Prov 3:6; 11:5; see below, NT 3).
NT 1 The adj. ὀρθός occurs only 2× in the NT, once lit. (“Stand upright on your feet,” Acts 14:10 NRSV) and once fig. (Heb 12:13; see below, sect. 6).   3권, 541쪽  The adv. ὀρθῶς is used 4×: of articulating speech in a normal way (Mark 7:35) and of saying things or making judgments that are correct (Luke 7:43; 10:28; 20:21). The vb. ὀρθόω does not occur at all, but ἀνορθόω is found 3×: of restoring David’s tent, i.e., his kingdom (Acts 15:16, citing Amos 9:11), and of straightening up the body or parts of the body (lit., Luke 13:13; fig., Heb 12:12); and the rare compound ἐπιδιορθόω is used in one passage with ref. to resolving congregational issues (Titus 1:5, poss. with the sense “to correct in addition to”; prior to the NT this vb. is attested only in one inscription but becomes more common among Christian writers). The nouns διόρθωσις and διόρθωμα (the latter referring to a resulting improvement) occur once each (respectively Heb 9:10 and Acts 24:2 [where many late mss. have κατόρθωμα]), as does ἐπανόρθωσις (2 Tim 3:16). Also occurring once each are the compounds ὀρθοποδέω and ὀρθοτομέω (Gal 2:14; 2 Tim 2:15). In a number of passages the use of the word group has ethical or theological significance, as follows.
2 Paul apparently coins a word when he says that Peter, Barnabas, and others οὐκ ὀρθοποδοῦσιν πρὸς τὴν ἀλήθειαν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lit., “are [i.e., were] not walking straight with regard to the truth of the gospel” (Gal 2:14a). Here the question turns on circumcision and Jewish dietary rules: intimidated by those who insisted that the Gentiles must be circumcised, Peter and those under his influence had withdrawn from table fellowship with Gentile Christians, thus compromising the integrity of the gospel of grace (see περιτέμνω G4362). Paul viewed such a decision as inconsistent behavior (see ὑποκρίνομαι G5693) that was both disingenuous and harmful (cf. his rebuke to Peter, 2:14b). The NIV is prob. correct in rendering, “they were not acting in line with the truth of the gospel,” though G. D. Kilpatrick, understanding πρός differently, suggests, “they were not on the right road toward the truth of the gospel” (“Gal 2:14 ὀρθοποδοῦσιν,” in Neutestamentliche Studien für Rudolf Bultmann, ed. W. Eltester [1954], 269–74; a sim. proposal had been made by C. H. Roberts, “A Note on Galatians 2:14,” JBL 40 [1939]: 55–56).
3 Timothy is told that he must make every effort (σπουδάζω G5079) to be an unashamed worker for God, and the specific task in view is ὀρθοτομοῦντα τὸν λόγον τῆς ἀληθείας, lit., “cutting straight the word of truth” (2 Tim 2:15). The second element of the compound ὀρθοτομέω derives from τομός, verbal adj. of τέμνω, “to cut, divide,” which can be used with ὁδός with the meaning “to make a road” (i.e., by clearing the terrain and thus marking the way, Thuc. 2.100.2) or “to advance” (Eurip. Phoen. 1: fig., of the sun cutting a path among the stars) or “to mark a way [of proceeding]” (Plato Leg. 810e: τετμημένην ὁδὸν τῆς νομοθεσίας πορεύεσθαι, “proceed on the path of legislation that has been marked out” [cf. also 803e]). This compound vb. occurs first in the LXX (only Prov 3:6 and 11:5, both with ὁδός: wisdom and righteousness cut straight paths), then here in 2 Timothy, and subsequently only in Christian writers that are dependent on the NT.
  3권, 542쪽  It is striking that in 2 Tim 2:15 the dir. obj. of the vb. is not ὁδός but λόγος G3364, so perhaps the imagery of building a road or advancing on a path should not be read into the passage. But the notion of “dividing” a message (so as to dispense to others? or to fit the pieces into a building?) has no bib. or extrabib. parallels. As MM (s.v.) implies, the component -τομέω can lose the imagery of “cutting” (cf. ἀντιτέμνω, “to provide a remedy” [Eurip. Alc. 972]; καινοτομέω, “to do [or begin or institute] something new” [Aristot. Pol. 1266a34–35]; note also, e.g., ἀπότομος, “having been cut off,” but also “severe” [Wis 6:5]). Whatever metaphor, if any, the writer may have had in mind, “directness” or “correctness” is clearly the basic concern. And although some have argued that right conduct is in view, the context strongly focuses on teaching (remind, warn, avoid godless chatter, 2 Tim 2:14, 16). Thus such renderings as “rightly explaining” (NRSV) and “correctly handles” (NIV), in contrast to the teaching of those who have “departed from the truth” (2:18), would seem to express the sense of the text most accurately.
4 The well-known statement on bib. inspiration in 2 Tim 3:16 describes Scripture a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ἐπανόρθωσιν] and training [παιδεία G4082] in righteousness.” The double compound vb. ἐπανορθόω, “to raise up again” (first attested in Thuc. 7.77.7: “the Athenians will restore the great power of their city”), came to be used in the sense “to revise” (e.g., of correcting or amending a last will, Isaeus Cleonymus [= Or. 1] 18), but when applied to a person, “to correct [for the purpose of improvement]” and thus more generally “to educate” (e.g., Isocr. Demon. [= Or. 1] 3). The noun ἐπανόρθωσις likewise can be used of moral betterment (with ἦθος G2456, “way of life,” Aristot. Eth. nic. 1165b18–19; cf. Epict. 3.21.15: παιδεία καὶ ἐπανόρθωσις τοῦ βίου, “education and improvement of life”).
Although a sharp semantic distinction between the nouns in 2 Tim 3:16 seems inadvisable, it is poss. that the term ἐλεγμός G1791 (“rebuking, reproof, conviction”; see ἐλέγχω G1794) prepares the way for ἐπανόρθωσις: “From conviction of sin there is a natural progression to the recovery of the sinner to a better life” (I. H. Marshall and P. H. Tow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Pastoral Epistles [1999], 795). Then the term παιδεία, modified by “in righteousness” (see δικαιοσύνη G1466), may bear the general sense of “education, training, instruction” (rather than the more specific “discipline”; see παιδεύω G4084), thus expressing a climactic summary of the functions of Scripture.
5 A profound theological thought is conveyed in Heb 9:10 by the phrase καιρὸς διορθώσεως, “time of restoration.” In the previous verses the author had been describing the tabernacle and its service under “the first covenant” (9:1), but his point was the temporary character of this system. Thus he ends the paragraph with these words: “This [the earthly tabernacle] is an illustration [παραβολή G4130] for the present time, indicating that the gifts and sacrifices being offered were not able to clear the conscience of the worshiper. They are only a matter   3권, 543쪽  of food and drink and various ceremonial washings—external regulations [δικαιώματα σαρκός] applying until the time of the new order [μέχρι καιροῦ διορθώσεως ἐπικείμενα]” (9:9–10; the NRSV renders the last clause, “imposed until the time comes to set things right”). The eschat. time in view is of course the same as “these last days” (1:2), the age of the new and better covenant (8:6–13). The people under the first covenant were unable to enjoy the fulfillment of the promise, “since God had planned something better for us so that only together with us would they be made perfect” (11:39–40; see διαθήκη G1347; τέλος G5465).
6 In Heb 12:12–13 the writer, after stressing the need and value of spiritual discipline, issues this exhortation: “Therefore, strengthen [ἀνορθώσατε] your feeble arms and weak knees. ‘Make level paths [τροχιὰς ὀρθάς] for your feet’ [citing Prov 4:26], so that the lame may not be disabled, but rather healed.” The purpose of these words, using the various parts of the body in a strikingly fig. way, is to urge a church that has become weary not to lose sight of the risen Lord and the goal toward which it is moving. And the “level” or “straight” paths refer to the direction set for the wandering people of God. Thus ὀρθός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a spiritual alignment that is appropriate for the eschat. character of the Christian community.
adv. adverbial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i.e. id est (that is)
et al. et alii (and others)
Heb. Hebrew
hiph. hiphil
i.e. id est (that is)
vb. verb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freq. frequent(ly)
incl. include(d)/including
vb. verb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LXX Septuagint
fig. figurative(ly)
NT New Testament
NT New Testament
adj. adjectival
NT New Testament
lit. literal(ly), literature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fig. figurative(ly)
sect. section
adv. adverbial
vb. verb
i.e. id est (that is)
lit. literal(ly), literature
fig. figurative(ly)
ref. reference
poss. possible, possibly
NT New Testament
vb. verb
mss. manuscript(s)
lit. literal(ly), literature
i.e. id est (that is)
cf. confer (compar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011 ed., unless othewisde indicated)
prob. probable, probably
ed. edited by
sim. similar(ly)
JBL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it. literal(ly), literature
adj. adjectival
i.e. id est (that is)
Thuc.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Eurip. Euripedes
fig. figurative(ly)
cf. confer (compare)
vb. verb
LXX Septuagint
NT New Testament
dir. obj. direct object
vb. verb
bib. biblical
extrabib. extrabiblical
MM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Illustrated from the Papyri and Other Non-Literary Sources (1930)
s.v. sub verbo (under the word)
cf. confer (compare)
Eurip. Euripedes
Aristot. Aristotle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011 ed., unless othewisde indicated)
bib. biblical
vb. verb
Thuc.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Or. Orientalia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Isocr. Isocrates
Or. Orientalia
Aristot. Aristotle
cf. confer (compare)
Epict. Epictetus, Dissertationes (Discourses)
poss. possible, possibly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eschat. eschatology, eschatological
fig. figurative(ly)
eschat. eschatology, eschatological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540–543.
 
 
이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 ‘인정된 자’로 번역된 ‘도키몬’은 ‘금속을 정련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도키마조’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이 도키마조라는 표현은 불을 통과한 금이 순금이 되는 것처럼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에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자’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시험하다(눅 14:19), 분변하다(눅 12:56), 연단하다(벧전 1:7), 증명하다(고후 5:5)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한글 번역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에서는 이 단어, 인정된 이라는 표현이 ‘하나님 앞에, 토 데오’라는 어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이라는 표현은 ‘아네파이스퀸논’으로 ‘부끄러운, 부정직한’을 의미하는 ‘아이스크로스’의 부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5 Paul urges Timothy to handle accurately “the word of truth” and thus be a positive example to those he is “charging” of a faithful person and good minister. Paul sets before him the goal of serving in such a way that God will approve of his labors. He urges him with the imperative σπούδασον (see Tit. 3:12), which has the nuances here of “being eager and zealous” and “making every effort.” Guthrie says that the word contains the notion of “persistent ‘zeal.’ ”
This imperative intensifies the command expressed by the infinitive clause that it governs, σεαυτὸν δόκιμον παραστῆσαι τῷ θεῷ, “to present yourself approved to God” (NASB) or “to present yourself to God as one approved” (RSV, NIV). The general meaning of “present” for παραστῆσαι “becomes almost equivalent to ‘make, render’ ” here (also in Eph. 5:27; Col. 1:22, 28; so BAGD s.v. 1c). The second person singular reflexive pronoun σεαυτόν, “yourself” (placed before the infinitive for emphasis), focuses this command directly on Timothy. He is to seek to present himself “to God” (τῷ θεῷ; cf. the preceding ἐνώπιον τοῦ θεοῦ) as one “approved” (δόκιμον) by the God who examines his life and conduct (for this concept cf. especially 2 Cor. 10:18; cf. also ἀδόκιμος in 2 Tim. 3:8; Tit. 1:16). Paul “lifts the whole question of attestation out of the hands of men and sets it in those of God. God alone decides this issue …” (W. Grundmann on 2 Cor. 10:18, TDNT II, 258).
Paul develops this concept in the striking phrase ἐργάτης ἀνεπαίσχυντον, literally, “a worker unashamed.” Paul (as did Jesus) applies ἐργάτης (Pl.* 4x) to Christian leaders (in a negative setting in 2 Cor. 11:13 and Phil. 3:2; in a positive setting here; and by analogy in 1 Tim. 5:18; cf. συνεργός in Rom. 16:21; 1 Thes. 3:2) because he regards the activity of the ministry as one of labor (cf. κοπιάω in Rom. 16:12; 1 Cor. 15:10; 16:16 [also with συνεργέω]; Phil. 2:16; 1 Thes. 5:12; 1 Tim. 4:10; and especially 5:17) and thus those involved in it as “workers” or “laborers.” ἀνεπαίσχυντον** (a NT hapax; cf. Paul’s use of ἐπαισχύνομαι, αἰσχύνομαι, and αἰσχύνη) means “unashamed” in the sense that he does not need to be ashamed of his work. The participle ὀρθοτομοῦντα qualifies ἐργάτης and together with the words that follow specifically describes how Timothy may be unashamed: by being a worker who handles accurately the word of truth (ὀρθοτομοῦντα τὸν λόγον τῆς ἀληθείας).
ὀρθοτομέω (found elsewhere independent of NT influence only in Pr. 3:6; 11:5 LXX) means literally “cut straight” or “cut right.” There is a growing consensus that the stress is on ὀρθο- (“right”) and not on τομέω (“cut”) on the analogy of the similarly formed word καινοτομέω (“make a new assertion, renew”; cf. Lock, MM, Dibelius-Conzelmann [examples in n. 5]; H. Köster, TDNT VIII, 112). The imagery of a worker working with his materials carries through what began with ἐργάτην.
The material that this worker is to handle correctly is “the word of truth” (τὸν λόγον τῆς ἀληθείας). Only when he handles it correctly will he be unashamed (ἀνεπαίσχυντον). The rendering given in several of the modern translations, using a combination of the verb “handle” and some adverb such as “accurately” (NASB), “rightly” (RSV), or “correctly” (NIV), for the compound verb ὀρθοτομοῦντα with the phrase “the word of truth” as the direct object captures this relationship quite well.
Although Paul has used λόγος before in this letter (see especially v. 9) and elsewhere in the PE and has used ἀλήθεια before in the PE* (1 Tim. 2:4, 7; 3:15; 4:3; 6:5; Tit. 1:1, 14), this is his first use of the two together in the PE and his first use of ἀλήθεια in 2 Timothy. In Col. 1:5 and Eph. 1:13 τὸ εὐαγγέλιον is used to identify “the word of truth” as “the gospel.” This fits the context here, where Paul has used “gospel” (τὸ εὐαγγέλιον) as the central concept (1:8, 10; 2:8). He has used the phrase “the word of God” (v. 9) and now refers to God’s word as “the word of truth.” “Truth” he uses in an absolute sense to contrast it with the error of the false teachers, the false teaching that contradicts and stands over against the word of God, the gospel. This contrast with falsehood marks his use of ἀλήθεια later in 2 Timothy (2:18, 25; 3:7, 8; 4:4) and elsewhere in the PE (e.g., 1 Tim. 6:5; Tit. 1:14; cf., e.g., Gal. 2:5, 14; 2 Thes. 2:10–12). The sense of the phrase here is probably best conveyed in the rendering “the message of the truth.” To handle this word correctly is to handle it in accord with its intention and to communicate properly its meaning (cf. 2 Cor. 2:17; 4:2).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XX Septuagint
MM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London, 1930.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PE Pastoral Epistles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11–412.
 
초대 교회 당시 수많은 거짓 교사들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 그 시대의 족보와 신화의 이야기를 일 삼았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일꾼은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게 전함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앞에 인정을 받을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신전의식(하나님앞에서)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누구의 인정을 구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진리를 옳게 분별하여 전하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 
- 성도는 우리 가족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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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The saying is qtrustworthy, for:
rIf we have died with him, we will also slive with him;
12  tif we endure, we will also reign with him;
uif we deny him, he also will deny us;
13  vif we are faithless, whe remains faithful—
for xhe cannot deny himself.
q See 1 Tim. 1:15
r [1 Thess. 5:10]; See Rom. 6:8
s Rev. 20:4
t [2 Thess. 1:4, 5]; See Rom. 8:17; Heb. 10:36; Rev. 20:4
u See Matt. 10:33
v See Rom. 3:3
w See 1 Cor. 1:9
x Num. 23:19; Titus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10–13.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11–13.
 
앞선 8-10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매임을 당해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는 자신을 본받을 것을 제시한다. 이제 11-13절을 통해서 바울은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매임가운데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영광에 참여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도 이 영광스러운 경주에 함께 동참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하면서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이 짧은 3절의 감격의 고백은 6소절의 평행 대구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찬양 시이다. 
 
Prologue 11a.미쁘다 이 말이여
 
    A 11b.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A’ 11c.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a. 참으면
    B’ 12b.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12c.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C’ 12d.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a.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D’ 13b. 주는 일향 미쁘시니
 
13c.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먼저 이 찬양시는 바울의 탄성이 기록된 서언 (Prologue) P로 시작된다. ‘미쁘다 이 말이여’란 바울의 탄성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향한 자신의 가르침이자 바울 자신의 신념이기도 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내하는 사역자의 축복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격의 토로이다. 원문으로 볼 때 정관사까지 포함하여 ‘피스토스 호 로고스’란 단 세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매우 간결하다. 그러나 이는 간결한 만큼 오히려 더 긴 여운을 남긴다. 먼저 ‘°이 말이여’로 번역되었으나 ‘그 말’로 직역되는 ‘호 로고스’는 문맥상 본절 하반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바울은 이후 자신의 찬양에 담긴 가르침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신실한 내용임을 찬양시의 서두에서 선언한 것이다. 나아가 동사까지 생략하여 표현한 이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의미, 신실함 그 자체임에 대한 필자의 경탄을 참으로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음도 느끼게 만든다. 왜냐하면 ‘로고스’ 특히 정관사까지 사용된 ‘호 로고스’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며 특히 우주의 창조와 통치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간 구원에 있어서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를 묘사하는 주요 용어의 하나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요 1:1,14). 따라서 P의 표현은 그리스도의 절대 신실하심을 강력히 시사하는 뉘앙스도 갖고 있다.
이어지는 A-A“ B-B' C-C’ D-D’는 모두 조건-결과를 나타내는 문장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즉 A,B,C,D는 모두 ‘~이라면(if)’이란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 ‘에이’ 가 사용된 조건절이며 A’,B’,C’,D’는 그 조건이 충족될 때 이루어질 일들을 나타내는 결과절이다. 그런데 이처럼 A-A' B-B’ C-C’ D-D’는 문장의 형식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지니나 각 부분의 시제는 각기 달라 독자들로 하여금 그 시제의 차이가 지니는 의미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이 2:11-13절 사이의 찬양시에서는 바로 이같은 평행 대구 구조 안에서의 각 소절의 동사 시제의 다양한 차이에 따른 섬세한 의미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 이해의 결정적 포인트이다.
먼저 A의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쉬나폐다노멘’은 과거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이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를 성도들은 모두 이미 주와 함께 단번에 완전히 죽은 자임을 나타낸다. 반면 A'의 ‘함께 살 것이요’에 해당하는 ‘쉬제 소멘’은 직설법 미래형이다. 헬라어에서 직설법 미래형은 비실재법인 가정법이나 희구법 흑은 명령법이 미래의 불확실한 일을 나타내는 것과 다르게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러한 실재법을 사용하여 성도가 미래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 확실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B의 ‘참다’에 해당하는 ‘휘포메노멘(imojjivoiiev)’은 현재 1인칭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역시 A.C.D와 마찬가지로 원문에 포함된 ‘우리가’란 주어를 번역하는 것이 뜻을 명확하게 할 뿐 아니라 운율을 살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A의 동사가 부정 과거형인 것과 달리 현재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 상태와 현재 진행적 상황 및 앞으로 지속될 일을 나타내는 데 두루 사용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바울 자신과 당시 에베소 성도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이 세상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감당하여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B’의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에 해당하는 ‘쉼바실류소멘’은 A'의 동사와 마찬가지로 미래형이다. 이는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 이에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미래가 반드시 임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영광된 미래가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이야말로 현재의 고난을 괴로워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는 원천적 힘이 된다.
C의 ‘우리가 주를 부인하다’에 해당하는 ‘아르네소메다’는 A의 동사가 부정 과거형이며, B의 동사가 현재형인 것과 달리 미래형이다. 이는 과거나 현재까지는 주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미래에 주를 부인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를 지닌다. A와 B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우리가 주와 함께 죽는 일이나 고난을 참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사단이 틈타서 우리로 하여금 주를 부인하게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조건절 C에 대응되는 결과절 C‘는 앞서 나온 결과절들인 A'나 B’와 비교한다면 상당한 강조형 문장이다. A'와 B’는 모두 ‘또한(KJV, also)’이란 의미의 부사 ‘카이’와 동사가 연결된 단 두 개의 단어로 되어 있었다. 반면 C’는 부사 ‘카이’와 ‘그 사람’, ‘그 분’이란 의미의 지시 대명사 ‘에케이노스’의 합성어인 ‘카케이노스’와 동사 ‘아르네세타이’, 그리고 ‘우리를’로 번역된 인칭 대명사 ‘헤마스’가 사용되고 있다. 즉 A’와 B’에 나오지 않은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명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의 주어인 ‘에케이노스’를 한글 개역 성경은 ‘주’라는 명사로 번역했으나 이는 격리되어 있는 대상을 나타내는 지시 대명사이므로 ‘그 분’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A와 A’ 그리고 B와 B’에서 ‘우리’와 ‘주’는 함께 죽고 함께 살며 또한 함께 왕 노릇할 대상으로 묘사되어 우리와 주 사이에는 강한 일체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C’에 와서는 ‘주’가 ‘그 분’이라는 제 삼자, 즉 ‘우리를’이란 목적어를 부인하는 저 멀리 있는 분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원문으로 볼 때 주를 부인하는 자가 주로부터 분리되어 그들이 주를 부인했던 것과 동일하게 부인당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됨이 훨씬 잘 드러난다.
D에서 바울은 우리가 미쁨이 없음을 고백한다. 이는 C에 나오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이란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C에서 바울은 인간은 누구나 주를 부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은 신실함이 없다는 D의 고백은 필연적이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미쁨이 없다’라는 ‘아피스투멘’이란 현재형 표현을 사용하여 비록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으나 실제 현실 생활 가운데는 단 한순간도 완전한 신실함이 없이 여전히 늘 계속하여 흔들리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D의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신실하지 못하여 주를 부인할 수 있는 인간, 또한 그럼으로 인하여 주로부터 부인당할 수 있는 안타까운 인간의 현실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은 ‘주는 일향 미쁘시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D’에서 완전히 해소된다. 원문으로 볼 때 D'도 C’와 마찬가지로 강조적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주는’으로 번역된 ‘에케이노스’란 주격 지시 대명사와 ‘미쁘시내’란 형용사 ‘피스토스’,그리고 ‘일향’으로 번역되었으나 실제로는 ‘머물러 있다’(요 3:36〉, ‘거하다’(눅 8:27)란 의미를 지닌 동사 '메노‘의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메네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계속 1인칭 복수형 동사가 사용되었으나 D‘에서만은 1인칭 단수 동사가 사용되어 미쁘신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심을 보여준다. 또한 이 주님을 ’에케이노스’란 주격 지시 대명사를 사용하여 표현함으로써 미쁘지 않은 인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작의 계속을 나타내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주님과 미쁘심은 언제나 분리가 절대 불가능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주께서 항상 미쁘시다는 이 사실은 인간이 미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신 성도의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결언(Epilogue) E에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느니라’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물론 D’에 나오는 ‘주는 일향 미쁘시니’에 대한 보완 설명이라 할 수 있다. D'에는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나오고 앞 문장과는 쉼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NIV는 E를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for he cannot disown himself)”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입장이 있다. 즉 표준 원문(Textus Receptus)에는 E에 이유의 접속사 ‘가르’가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P와 A-A'와 B-B'와 C-C‘와 D-D'를 나누는데 사용된 콜론(•) 부호를 사용하여 E를 D'와 분리시키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E는 내용상 D’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은 사실이나 형식상으로는 독립된 것이 된다. KJV가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최초 원본의 정확한 표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원문 구조 분석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내용 배열이 갖는 의미만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즉 E는 직접적으로는 D'와 관련을 가져 형편과 사정에 따라 쉽게 변하는 신실함이 결여된 인간과 달리 주께서 신실하신 것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본 단락 전체의 종결문으로서 앞서 P와 일종의 수미 쌍관 형태로 말미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내하는 자들이 받을 축복의 확실성을 재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며(A.A'), 고난을 참고 견디면 주와 함께 왕 노릇하고(B.B'), 주를 부인하면 주의 부인하심을 받고(C,C’), 인간은 신실성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신실하시다는(D.D’) 지금까지의 진술 전체가 우리 주님은 그 언제나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므로 결국 이런 진술 모두는 분명히 실현될 것임을 거듭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엑스포지멘터리 460-464)
 
11절) ‘미쁘다’로 번역된 ‘피스토스’는 일반적으로 ‘믿을만한, 신실한’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로 ‘이 말’이란 11-13절까지의 언급을 지칭한다. 이는 인내한 복음 사역자가 누릴 장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으로 바울 당시 초대 교회에서 널리 애송되던 순교자의 찬송시에서 인용한 표현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쉬나폐다노멘’은 본래 ‘함께 죽다’라는 뜻을 지닌 ‘쉬나포드네스코’의 부정 과거형으로 이미 죽은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러한 시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주와 함께 죽었어야 마땅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 ‘함께 살 것이요’로 번역된 ‘쉬제소멘’은 ‘함께 살다’라는 뜻을 지닌 ‘쉬자오’의 미래형이다. 이러한 시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이 보장될 것이란 점을 나타낸다.
본절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죄에 대해서 죽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중생 체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가운데서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부정에 대한 진술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촉구하는 진술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동참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될 것이다.
함께 죽다, 함께 살다라는 표현은 모두 한 구절안에서 함께 사용되고 있다. 
 
2:11a On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see 1 Tim. 1:15 (cf. 1 Tim. 3:1; 4:9; Tit. 3:8). This occurrence of these words is undoubtedly used as the others were, as a combination “quotation and affirmation” formula. ὁ λόγος signifies that the words are a “saying” and πιστός commends the saying.
But does this formula refer to what precedes or to what follows (see Knight, Faithful Sayings, 112–15)? Of those who think that it refers to something in the preceding verses (e.g., Ellicott, Fausset, Holtz, Ridderbos, Schlatter, H. von Soden, Weiss, and N. J. D. White), most also take the general viewpoint that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does not refer to a saying as such (e.g., Ridderbos). Many of these say that vv. 11ff., even if they are not what the formula refers to, are, in fact, a “saying” (e.g., Fausset, Holtz, and von Soden; White disagrees). Schlatter maintains that the formula always refers to a statement about salvation and thus that here it points to the soteriological statement that precedes it. But the use of the formula in 1 Tim. 3:1 has eliminated this necessity. Among the verses chosen by those who think that the formula refers to that which precedes are vv. 8 (e.g., Weiss, who also includes v. 9), 10 (Fausset), and vv. 4–11 (White).
Perhaps the most forceful objection offered to finding the λόγος in what follows the formula is that γάρ in v. 11 is out of place if the formula refers to vv. 11ff. (e.g., Ellicott and Weiss). This γάρ is understood as connecting vv. 11ff. to the preceding and therefore as a further demonstration that what precedes, not what follows, is the λόγος.
Among those who identify vv. 11ff. as the λόγος, some (Huther, Lenski, van Oosterzee, and Wohlenberg) take γάρ as “namely” and thus as emphasizing what follows in the saying. Most (Bernard, Easton, Gealy, Guthrie, Hendriksen, and Kelly), however, take γάρ as referring to what preceded the saying in the original hymn, of which only part is cited here. Fee, on the other hand, suggests that “the gar is probably explanatory—and thus intentional—but does not refer to ‘this is a true saying.’ Rather it goes back to all of the appeal in verses 1–10.” Understanding γάρ as “namely” is somewhat unnatural and not in accord with the usual usage of the word. The other two suggestions are more plausible and may not be mutually exclusive, if Spicq is correct in suggesting that Paul paraphrases the first part of the hymn in vv. 8–10, intermingling his own thoughts and words. The words about Christ in v. 8 might be part of the original hymn, and thus γάρ might have referred to them in the original hymn and might still refer to them in this paraphrased form now. The συν- verbs in vv. 11–12 imply some preceding antecedent in the original setting of the larger saying and an antecedent in the present context. That antecedent is undoubtedly Christ. Thus vv. 11b–13 fit well with what precedes in their present setting and may play a similar role to that which they played in their original setting. Therefore, γάρ does not present an obstacle to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referring to vv. 11bff.
Against referring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to what precedes is the personal note that characterizes vv. 8–10 (v. 8: “my gospel”; v. 9: “I suffer hardship”; v. 10: “I endure”), which reflects Paul’s situation as one in bonds. It is unlikely that Paul would use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of something so personal since the other sayings connected with the formula do not do so. A further objection to v. 8 is its position some verses removed from the formula. V. 10b, with its rich soteriological content, would be a candidate for the “saying” were it not that Paul expresses in it why he is willing to endure all things, a very personal framework.
With vv. 11b–13 we find a different situation. Instead of the first person singular we find first person plural verb forms, conveying a corporate rather than strictly personal sense, which lends itself to a “saying” (cf. Tit. 3:5ff.). Furthermore, the structure of vv. 11b–13 is so striking that almost all commentators identify it as a “hymn” or “saying.” The overall symmetry is found in four lines consisting of four conditional clauses. The structure of each protasis is the same: εἰ plus a first person plural verb. In the first two lines the verbs in both the protases and the apodoses are first person plural active, three of the four verbs have the prefix συν, and the apodoses consist of καί with the verb. In the last two lines the apodoses begin with κἀκεῖνος and ἐκεῖνος and the verbs are third person singular.
The content is as striking as the form. The correlation throughout is between “we” and “he” (Christ). In the first two lines this is manifested by the use of συν- in three of the four verb forms, a usage that speaks of the relationship of Christians (“we”) “with” (συν-) Christ. This correlation is carried on in the last two lines by the “we” of the protasis being correlated to or contrasted with the “he” (Christ) of the apodosis (using the emphatic word ἐκεῖνος). The first two protases speak in positive terms, commending a particular kind of relationship to Christ. The third and fourth speak in negative terms of another kind of relation to him. The verbs of the protases present a chronological movement from past to present to future and then back to a consciously chosen present. The first two lines speak of a favorable outcome based on the condition. The third speaks of an unfavorable outcome based on the condition, and the last, as I understand it, speaks of a response not based on the condition but in God himself, as the additional clause after the protasis and apodosis indicates.
Some regard all of vv. 11b–13 as composed by Paul for the occasion (e.g., Lenski, White), but usually all or most of the four lines as a “saying” originally composed in a different situation. Some regard v. 13b as an addition by the author of 2 Timothy (e.g., Hanson, Hendriksen, Lock, von Soden). Others regard only the first two lines as the cited “saying” (above all Easton). But a number of commentators regard all of vv. 11b–13 as the saying (e.g., Barrett, Bernard, and Guthrie). The statement now stands as a whole consisting of vv. 11b–13, and we will deal with it in its present form. The origin of the particular elements will be considered as the question of a possible origin for the saying as a whole arises.
The saying seems to be cited because its emphasis on “enduring” (v. 12: ὑπομένομεν) undergirds Paul’s statement about “enduring” (v. 10: ὑπομένω) and shows that endurance is a characteristic that marks the Christian’s life (see further Knight, Faithful Sayings, 115f.). This stress is, therefore, both the semantic and ideological link to its setting. Nonetheless, Paul cites the saying at a natural transition point, “if we died with him, we shall also live with him,” which is itself crucial to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endurance.
2:11b συναπεθάνομεν in the saying’s first line poses two interrelated questions, that of who is referred to with συν- (also of concern with the second and fourth verbs of the saying) and that of the significance of “dying with.” W. Grundmann states that the sense of συν- in Paul “is always ‘together with’ ” (TDNT VII, 782). It is agreed that this συν- has Christ in view. This is clearly implied by the relationship of the three συν- verbs, because only of Christ would Christians say that they have died, will live, and will reign “with” him. This understanding is strengthened by the identification of the one referred to in the συν- with the one in view in the emphatic ἐκεῖνος in the apodoses of the last two lines of the saying.
Given that consensus, we turn to the second question. Some understand συναπεθάνομεν to refer to dying with Christ in martyrdom and thus understand the saying as a song of martyrdom (e.g., Bernard, Bouma, perhaps Fee, Huther, and von Soden). Others understand it as referring to a spiritual union with Christ in his death. Considerations favor the latter. Contextual significance is the first and major consideration: This “death with” results in “life with” (συζήσομεν) Christ (the apodosis). Furthermore, the wording of Rom. 6:8 is nearly identical, but the ideas are developed further in that context. Death with Christ is death to sin (Rom. 6:11), even as Christ died to sin once (v. 10); it is the crucifixion of the old person, the destruction of the body of sin, and release from the bondage of sin in crucifixion with Christ (v. 6). It is in Christ’s death (v. 5) that Christians have died with him. And because they have been united with Christ (v. 5) they have died with him in his death, which brought about the inner death of the old person, release from bondage to sin (v. 6), and justification from sin. With this death comes the concomitant life. Gal. 2:20 (vv. 19–20 in Greek editions) expresses the same thought.
Other considerations that favor this view of συναπεθάνομεν over that which takes it as referring to martyrdom include, first, that dying with Christ is a strange way of referring to martyrdom. There is no example in the NT of such usage. Rather, the NT uniformly speaks of dying with Christ in reference to the spiritual death of Christians who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 [19]) and who have therefore died with Christ to sin (Rom. 6:3ff.; Col. 2:12). Also the past tense of the verb speaks against it referring to a martyrdom yet to take place. The chronological progression in the protases of the saying (past, present, future, present) would be shattered by a reference to a martyr’s death in the first protasis, and “enduring” would be taken as the result of a martyr’s death. But “enduring” appropriately comes as the result of spiritual death with Christ. Therefore, the “faithful saying” begins with the believer’s foundational spiritual experience and by means of the aorist presents it as an accomplished fact.
The apodosis presents a result that comes about on the basis of the fulfillment of the condition in the protasis. The future tense of συζήσομεν,* “we shall live with him” (the verb also in Rom. 6:8; 2 Cor. 7:3), signifies that this result comes after “dying with Christ.” But is this the immediate future from the perspective of a past spiritual death, i.e., this present life, or a more distant future, i.e., life with Christ after death, or both? Here again the context of Rom. 6:8 aids our understanding. There, on the basis of Christ’s present life “to God” (vv. 9–10), Paul concludes from συζήσομεν αὐτῷ that Christians should “consider [them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v. 11). Since this statement demands that Christians “consider” themselves “dead to sin” now, the parallelism within the statement means that they should also “consider” themselves “alive (ζῶντας) to God in Christ Jesus” in this present life. As Christ now lives to God, so they are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The life they are to live is a present “walk[ing] in newness of life” because they have been united to Christ in his death (v. 4). Thus they may not “still live” (ἔτι ζήσομεν) in sin (v. 2), because those who have been “united with Christ in the likeness of his death” certainly shall be also “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 (v. 5). They are now “alive from the dead” (v. 13).
It has been objected that future tense συζήσομεν in 2 Tim. 2:11b must refer exclusively to the future life after death (e.g., Huther, Wohlenberg) or the resurrection life (e.g., Ellicott, Weiss). If this argument were acknowledged as valid, it would apply with equal force to Rom. 6:8. But this would be to miss the whole thrust of Romans 6, which is concerned with the present effect of union with Christ in a Christian’s life. The introductory question of Rom. 6:2 makes that perspective plain: “How shall we who died to sin still live in it?” There also the future tense is used (ἔτι ζήσομεν), and it refers to life here and now, as ἔτι, “still,” makes clear. Rom. 6:8, as we have seen, says the same thing as 2 Tim. 2:11b: The one who has died with Christ will live with him—in the present. (Of course life with Christ goes on into the distant future as well: See especially 1 Tim. 4:8; Rom. 6:22; cf. R. Bultmann, TDNT II, 869.) Adverbial καί throws emphasis on συζήσομεν and highlights the fact that we are “also” united to Christ in his life just because we were united to him in his death.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0–404.
 
12절)  ‘참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휘포메노멘’은 ‘고난을 참다, 견디다’라는 뜻을 지닌 ‘휘포메노’의 현재형이다. 여기서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고난에 대한 인내와 견딤이 한순간이라도 포기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 곧 고난에 대한 인내와 견딤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주님께서도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고 하시며 동일한 사상을 교훈하신 바 있다.
바울은 여기서 주님께서 교훈하신 나중까지 견디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왕 노릇할 것 이란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로 번역된 ‘쉼바실류소멘’은 ‘함께 통치하다’라는 뜻을 지닌 ‘쉼바실류오’의 미래형으로 이와 같은 통치는 현재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바실레이아’는 ‘나라, 왕권, 왕위’를, ‘바실레우오’는 동사로 ‘왕으로 다스리다, 왕노릇하다’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함께’를 의미하는 전치사 ‘심’이 사용되어 ‘심바실레우오’로 ‘함께 다스리다, 함께 왕노릇하다’라는 표현이 만들어졌다. 혹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누리는 왕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고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의한 종말론적인 왕권의 수여라는 사상에 의해 보완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그것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을 보장하듯이, 우리가 지상에서 복음으로 인한 고난에 직면해 지속적으로 인내한다면 그것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만일 고난에 대한 인내가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임무라면 하나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는 그보다 훨씬 더 지속적인 그의 특권이 될 것이다(Guthrie).
 
2:12a ὑπομένω means generally “remain” or “stay behind.” Among its derived meanings, that of “endure” in trouble, affliction, or persecution is dominant in the NT and is seen here in the second line of the saying (cf. LSJM; BAGD; F. Hauck, TDNT IV, 581f.). The NT relates what is involved in enduring: Believers endure hatred by all for Christ’s sake (Mt. 10:22 par. Mk. 13:13; cf. Mt. 24:13), they persevere in tribulation (Rom. 12:12), they endure great sufferings (Heb. 10:32) and temptation (Jas. 1:12), and they patiently endure suffering for doing good (1 Pet. 2:20). This endurance is to continue throughout their lives, as the use of the present tense (in the four last-named passages) shows. Here also the present tense refers to continual enduring (cf. Hauck, 586: “In most of the NT passages ὑπομένειν refers to the stedfast endurance of the Christians under the difficulties and tests of the present evil age”). Since it is understood here that endurance is for Jesus’ sake (cf. Mt. 10:22 par. Mk. 13:13), it was not necessary for Paul to say so explicitly. This is particularly so because of the three συν- verbs in this context, especially the fourth: The one with whom Christians will reign is the one for whom they endure. The NT concept of endurance always has an expectant eschatological note (cf. Mt. 24:13; 10:22; Mk. 13:13; Heb. 12:2; Jas. 1:12), which is present here also in the outcome of endurance, reigning with Christ.
The future tense of συμβασιλεύσομεν refers to an end-time situation that comes after the responsibility of the present tense ὑπομένομεν has ceased, since this state of existence for Christians has ended. This understanding of συμβασιλεύσομεν** is illustrated by its only other NT occurrence, 1 Cor. 4:8, where Paul criticizes those who think and act as if they are already reigning with Christ. He wishes that it were so and then speaks of this present age as one in which “when we are persecuted, we endure” (4:12). The theme of reigning with Christ recurs elsewhere in Paul and the NT (e.g., Mt. 19:28; Lk. 22:29–30; 1 Cor. 6:2; Rev. 3:21; 20:4, 6; 22:5). Here it is presented as an encouragement for enduring, and, as in the first line of the saying adverbial καί, “also,” it lays emphasis on the future “reigning with Christ,” which, though it is so different from the present experience of enduring, is “also” a result of that enduring.
2:12b The saying turns in its third line from steadfast endurance to the contrary action of denial. And with that it turns from comfort and encouragement to stern warning. It also turns to a future tense presentation of an awesome future possibility, i.e., that the professing Christian will deny the one he claims to have died with and to now live with. The resultant reciprocal action in the apodosis, “he also will deny us,” makes it clear that the one denied is Christ, since ἐκεῖνος (here and in v. 13) after the συν- verbs, and in the context of the NT, signifies Christ.
ἀρνέομαι (Pl.* 6x, all in PE: here; 1 Tim. 5:8; Tit. 1:16; 2:12; 2 Tim. 2:13; 3:5) means basically “say no, deny,” and is used in the NT of denial of a person with whom there was some prior relationship (see H. Schlier, TDNT I, 409–71; Riesenfeld, “ἀρνεῖσθαι”). This is its significance in a saying of Jesus (Mt. 10:33; Lk. 12:9) that may be behind 2 Tim. 2:12b. The particularities involved in denial of Christ come to light in Peter’s denial (Mt. 26:69ff. par. Mk. 14:66ff./Lk. 22:54ff./Jn. 18:15ff.; cf. also Mt. 26:34f. par. Mk. 14:30f./Lk. 22:34/Jn. 13:38). Peter not only rejects the truth of the statements of the maid and others (Mt. 26:70 par. Mk. 14:68/Lk. 22:60), in particular he denies any knowledge of Jesus (Mt. 26:72, 74 par. Mk. 14:71/Lk. 22:56; cf. 22:61–62) and his relationship with Jesus (Mk. 14:69–70 par. Lk. 22:58/Jn. 18:26–27). The personal element in denial is also found in 2 Pet. 2:1 (“even denying the Master who bought them”; cf. Jude 4).
Denial of Christ manifests itself in various ways in the NT. It can consist in denying his name (Rev. 3:8) or faith in him (Rev. 2:13). It can thus take the form of forsaking or repudiating the Christian faith and its truths, particularly the truth concerning Jesus. In doing so one personally denies Christ (and the Father, cf. 1 Jn. 2:22–23). The denial can also manifest itself in the moral realm. Some may “profess to know God, but by their deeds deny him” (Tit. 1:16; cf. 1 Tim. 5:8).
The dire consequence of this denial is identified here in the form of a resultant reciprocal action (indicated by the κἀ, “also,” a contraction for καί when joined to ἐκεῖνος): “He also will deny us.” ἐκεῖνος (“that one” or “he”) implicitly refers to Christ (see above). The denial by Christ (ἀρνήσεται) is that future final evaluation which he will make to his Father (Mt. 10:33) in the presence of God’s angels (Lk. 12:9) when he returns in glory (cf. Lk. 9:26; Mk. 8:38; cf. also Mt. 7:23). The finality of his denial of those who have denied him will be as permanent and decisive as theirs has been of him, and will thus not be as in Peter’s case, where forgiveness was sought and received. For that situation something else must be said, and to that the saying turns with its fourth and last statement.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4–406.
 
13절)  ‘우리는 미쁨이 없을’로 번역된 ‘아피스투멘’은 부정 불변사 ‘아’와 ‘믿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피스테오’의 합성어인 ‘아피스테오’의 현재형이다. 본문에는 이 단어가 접속사 ‘에이’와 함께 사용되었는데 ‘에이 아피스투멘’은 직역하면 ‘만약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NASB If we are faithless)’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주는 일향 미쁘시니’에 해당하는 ‘에케이노스 피스토스 메네이’와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주는 일향 미쁘시니’를 직역하면 ‘그는 믿음을 지니고 계시다(NASR He remains faithful)’가 되는데,’만약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그는 믿음을 지니고 계시다’라는 번역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본절 의 ‘에이’는 가정이 아니라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지라도’란 양보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인간은 비록 믿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믿음을 지니고 계시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다. 그런데 그 현재형이 함축하고 있는 이면적 의미는 다소 다르다. 먼저 인간에 대하여 사용된 ‘우리는 미쁨이 없을’로 번역된 ‘아피스투멘’이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인간들은 현재 신실치 못한 경우가 많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일향’으로 번역된 ‘메네이’는 현재 시점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신실성의 영원하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절을 ‘우리 인간은 신실하지 못해서 그를 부인할지라도 주께서는 그의 약속에 대해 항상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본절은 ‘그의 본분에 대한 신실함은 그의 약속들 뿐 아니라 그의 경고들도 실행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Hendriksen).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끝까지 인정하면 그도 우리를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인정하실 것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다”라는 본절의 진술은 배교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말씀이요,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축복의 말씀인 셈이다.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원인이 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포함되어 있어 본문이 13절 상반절 곧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라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본문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부인할 때 우리를 부인하시고 우리가 당신을 인정할 때 인정하시는데 그러한 원칙이 변함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분 스스로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주님께 대해 ‘할 수 없다(우 뒤나타이)’라는 표현이 적용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술은 주님의 전능성이란 속성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은 전제적인 폭군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처럼 발휘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분의 전능은 선한 것에 집중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존재와 속성에 부합되는 것만을 행하신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존재와 속성에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일은 결코 행하실 수 없는 것이다. 전능하신 주님은 자비와 공의가 영원하시기 때문에 이미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그를 인정하면 우리를 인정하실 것이며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러한 원칙에서 스스로 벗어나신다면 그분은 결코 더 이상 ‘신실하신’ 분일 수 없다.
 
2:13a The saying returns to the present tense in the fourth line with ἀπιστοῦμεν in the protasis speaking of what Christians might do or be and with the apodosis indicating Christ’s response. This response is not a resultant reciprocal action, as in the third line, but finds its explanation in the nature of the one responding (ἀρνήσασθαι γὰρ ἑαυτὸν δύναται).
Does ἀπιστοῦμεν** (NT 6x: Lk. 24:11, 41; Acts 28:24; Rom. 3:3; 1 Pet. 2:7; variant reading in Mk. 16:11, 16) refer here to “unbelief” (so Alford, Bernard, Chrysostom, Ellicott, and Fausset) or to “unfaithfulness” (so Bouma, Guthrie, Hendriksen, Huther, Kelly, Kent, Lenski, Ridderbos, Weiss, N. J. D. White, and Wohlenberg)? The verb normally implies unbelief in the NT, and Ellicott concludes that there is not sufficient reason for departing from this regular meaning here. But it is more appropriate to say that in a slight majority of NT occurrences (4 of 6), i.e., in the non-Pauline texts, the word refers to unbelief, but also that the two Pauline occurrences can be interpreted either way. Furthermore, extrabiblical usage knows the meaning “disobey,” under which “unfaithfulness” is a subcategory, along with that of “unbelief” (see LSJM and BAGD for references). These considerations point to the necessity of finding the meaning in this context. The key is that ἀπιστοῦμεν is answered with πιστός in the apodosis just as ἀρνήσεται answers ἀρνησόμεθα in the preceding line. Obviously what is in view in πιστός is God’s faithfulness. Thus what is in view in ἀπιστοῦμεν, to which God’s faithfulness answers, is “unfaithfulness” (so also BAGD; R. Bultmann, TDNT VI, 205, 208). This does not mean that temporary unbelief or lack of trust is not also present in the moment of unfaithfulness, for indeed it is.
But our understanding of ἀπιστοῦμεν here must be bound up with our understanding of this last statement of the saying in its entirety. Might this protasis be giving another, and perhaps worse, expression of denial (v. 12b), or is it giving an expression of the frailty of the believer, which is less than a hardened and final denial? The key is one’s understanding of the apodosis, and so to that we must turn: Is Christ faithful to punish and repudiate because he cannot deny the justice and holiness of his being, or is he faithful to hold on to Christians because of his character of fidelity and the permanence of his promise?
ἐκεῖνος is Christ here as in v. 12b. It is he who “remains faithful.” Paul’s references to the faithfulness of God and Christ are strikingly uniform. This faithfulness is God’s fidelity to his promises, and those promises relate to the positive outcome of human salvation (cf. 1 Cor. 1:9). Paul does not mention God’s faithfulness as a basis for the certainty that the faithless will be punished, but as the basis for the assurance of the gospel promises (2 Cor. 1:18–20), for safety in temptation (1 Cor. 10:13), for protection from the evil one (2 Thes. 3:3), and for the sanctification and preservation of God’s people (1 Thes. 5:24; cf. also Heb. 10:23; 11:11; 1 Pet. 4:19; 1 Jn. 1:9 [note πιστός]; Rev. 1:5; 3:14; 19:11). This understanding is also suggested here by μένει, “he remains,” which with πιστός implies that Christ continues as the faithful one in his relationship to Christians. Though they change and become unfaithful (to him, understood), he does not change but has remained faithful (to them, understood). The Pauline and NT usage also suggests that Christ’s remaining faithful here also includes his continuing adherence to the divine promises to his people even in the midst of their unfaithfulness. This understanding of the apodosis entails that the protasis most likely refers to temporary unfaithfulness and not to unbelief.
This fourth line of the saying is demonstrated in Christ’s faithfulness to Peter even though Peter was so unfaithful that he denied Jesus (Jn. 21:15ff.; Lk. 22:31–32). While the apodoses in the first three lines of the saying result from the corresponding protases, here the apodosis is not the result but the opposite of the protasis. In the fourth statement in the saying, εἰ means “although,” not “if.”
2:13b Since the protasis does not, therefore, give the basis for the apodosis, a clause is added to give the reason (γάρ) for Christ’s fidelity. Here ἀρνήσασθαι means “to say no, to belie, or to be untrue” to his own being (cf. BAGD s.v. 4; Riesenfeld, “ἀρνεῖσθαι,” 208, 216; H. Schlier, TDNT I, 469, 471). Christ is faithful because of his own nature: He cannot (οὐ δύναται) be untrue to himself (ἑαυτόν). This reason is so necessary to the sense of the fourth line of the saying and to the saying as a whole that it must have been part of the original saying.
2:11b–13 The saying in these verses gives a helpful overview of key aspects of the professing believer’s life. The first two lines encouragingly state the glorious results that accrue from one’s identification with Christ, first in dying to oneself in union with Christ’s death and second in enduring and suffering for Christ throughout one’s life. The last two lines state the sad possibilities that an imperfect disciple faces in this life, denial and unfaithfulness. The saying sharply warns against denial, which can only expect denial in turn by Christ. But as a counterbalance comfort is offered to the disciple who is unfaithful by assuring him that Christ will remain faithful to him.
We can only offer a probable answer to the question of the origin of the saying. Since 2 Timothy was written from Rome, then it is possible that the church in Rome developed the first line by reflection on Romans 6 and by utilizing Rom. 6:8 in a contracted form. This is probable not only because of this link but also because the idea of dying with Christ is more fully developed in Romans 6 than anywhere else in the NT. Since Romans 6 relates death with Christ to baptism, it would be appropriate to conjecture that the saying was used in connection with confession of faith at the time of baptism. The third line seems to reflect Jesus’ words in Mt. 10:33 and Lk. 12:9, cast here into the mold of the other lines. No very close similarity exists between the second and fourth lines and other NT statements. Thus one can only say that two likely sources have had their impact on the saying, and that the other lines were added as necessary when converts were confessing their faith and receiving baptism.
Paul has quoted the saying as a whole so that its various truths might have their impact on Timothy as he has called on him to suffer and endure for Christ (v. 3). In the light of that call, the second line’s promise that those who endure will reign with Christ not only stands out in its relevance to Timothy’s situation but is also set in the context of these other truth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6–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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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nk over what I say, for the Lord will give you understanding in everything.
Remember Jesus Christ, hrisen from the dead, the ioffspring of David, jas preached in my gospel, kfor which I am suffering, lbound with chains as a criminal. But mthe word of God is not bound! 10 Therefore nI endure everything for the sake of the elect, that they also may obtain othe salvation that is in Christ Jesus with peternal glory
h 1 Cor. 15:20
i See Matt. 1:1
j See Rom. 2:16
k ch. 1:8, 12
l See Phil. 1:7
m [ch. 4:17]; See Phil. 1:13
n Eph. 3:13; Col. 1:24; [1 Cor. 13:7]
o 2 Cor. 1:6
p 1 Pet. 5: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6–10.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7–10.
 
7절)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1-2절은 복음 전수를 위해서 충선된 사람들에게 부탁할 것을 요청했고 충성된 복음 사역자의 자세를 군사, 경기자, 수고하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이제 바울인 이러한 자신의 교훈, 가르침을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물론 ‘호 레고, 내가 말하는 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전수한 복음 사역과 관련된 전반적인 메시지를 뜻하는 것이지만 좁게 앞선 1-6절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생각하라’로 번역된 ‘노에이’는 ‘알다, 깨닫다, 이해하다, 숙고하다, 검토하다’라는 뜻을 지닌 ‘노에오’의 현재 명령형으로 디모데가 이 교훈들을 ‘계속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검토하고 되뇌어야함’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무언가를 지적으로 파악하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그 내용을 깊이 숙고할 것을 요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파생된 명사가 ‘누스’로 이는 '마음, 영, 정신’으로 사용된다. 
 
디모데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왜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는가?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포함되어있다. ‘왜냐하면 주께서 범사에 디모데에게 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총명으로 번역된 ‘쉬네신’은 ‘이해력, 분별력’을 의미한다.  
헨드릭슨은 ‘단지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기록되어진 것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말씀된 것은 음미하여 터득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자들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 주심은 함께 역사한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생각할 때 주께서 총명을, 깨달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허락하실 것이다. 
 
Paul exhorts Timothy to make the effort to think and meditate on what Paul has written; as he does so, God will give him understanding in everything about which Paul has instructed him. The believer’s efforts and God’s empowering work together.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39.
 
2:7 Imperative νόει urges Timothy to “consider,” i.e., to contemplatively “think over” this series of analogies (represented by the relative pronoun ; see NA26 on the variant reading ) that Paul has just finished “saying” (λέγω, a graphic first person singular present tense verb). Paul urges such contemplation “because” (as the TEV appropriately renders γάρ) he is confident that “the Lord will give understanding” (cf. Mk. 4:11 par. Mt. 13:11/Lk. 8:10).
It is difficult to decide whether Christ or the Father is intended by ὁ κύριος. (“It is a mark of the exalted meaning of the term ‘the Lord’ as the early Christians used it that it is not always easy to see whether they meant Jesus or the Father” [Morris, NT Theology, 167].) The title was last used twice in 1:18 of both persons, but the last occurrence there referred to the Father. Since Paul speaks elsewhere of the Father giving understanding (Eph. 3:2–4), it is likely that he is referring to him here (cf. also Pr. 2:6 LXX: κύριος δίδωσιν σοφίαν, καὶ ἀπὸ προσώπου αὐτοῦ γνῶσις καὶ σύνεσις). Furthermore, there is no identification of ὁ κύριος here with the reference to Christ in the next verse.
The predictive future δώσει, “he will give,” is a promise that Paul gives to Timothy (σοι) in order to encourage the response that he has just urged on Timothy. This combination of a promise of divine enablement with an exhortation to responsible human activity recalls vv. 1 and 3. Paul urges reflection “because,” as he says, in that activity the Lord will give “insight” and “understanding” (σύνεσιν; cf. especially Col. 1:9; 2:2). He says that the Lord will do so ἐν πᾶσιν, “in everything,” i.e., in all the intended implications of the analogies in vv. 4–6 (ἐν πᾶσιν elsewhere in the PE in 1 Tim. 3:11; Tit. 2:9, 10b; 2 Tim. 4:5).
Paul has called on Timothy to suffer hardship and has placed before him three models for him to consider in that service: The soldier who pleases his commander and is not distracted from his service to him, the law-abiding athlete who gains the crown, and the hard-working farmer who receives his share of the crops. Together they speak of a vigorous and undivided service that is rewarded (cf. 1 Cor. 15:58).
NA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26 K. Aland and B. Aland, eds., Novum Testamentum Graece. 26th ed., Stuttgart, 1979.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LXX Septuagint
PE Pastoral Epistles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6.
 
8절) 1-7절에서 복음 전수에 노력할 것과 복음 사역자의 자세를 다루었다면 이제 13절까지에서는 사역자가 본받아야할 인내의 모범 및 복음 사역자가 장래에 누릴 영광을 말한다. 그 모범은 크게 두 종류인데 8절에서는 예수, 9-10절에서는 바울 자신을 예로 든다. 
 
원문 본절에서는 ‘기억하라’에 해당하는 ‘므네모뉴에’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는 ‘기억’을 의미하는 명사 ‘므네메’에서 파생하여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라는 의미의 ‘므네모뉴오’의 현재 명령형으로 디모데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억해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디모데가 기억해야할 것은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명령한다. 
복음의 핵심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다윗의 씨로 오셨고 그분이 우리의 죄의 대속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로마서 1:3–4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내용은 초대교히 당시 신앙 고백문에 해당한다. 
‘다윗의 씨’, ‘스페르마토스 다위드’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진술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적 혈통으로 다윗의 계보를 통해 나셨음을 나타낸다. 이는 구약에 약속된 예언의 성취이다. 
이사야 11:10
10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다시 살아나신’으로 번역된 ‘에게게르메논’은 ‘다시 살다, 부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게이로’의 현재 완료형이다. 현재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의 결과와 효력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살아계신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2–20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8 Paul urges Timothy always to “keep in mind” and “think about” (μνημόνευε, present imperative) Jesus Christ, the one raised from the dead, the descendant of David, who is both according to the Pauline gospel. This is one of the few places in the PE (1 Tim. 6:3, 14; Tit. 1:1; 2:13; 3:6) and the only place in 2 Timothy where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 occurs in this order. This may reflect Paul’s adoption of a phrase including the name as it was spoken in the Christian community, or it may be a stylistic variation. It seems most likely, however, that Paul intended to emphasize Jesus’ humanity by placing first the name given at his birth (see the comments on 1 Tim. 1:1), since it would be meaningful to Timothy in this context (so Lock).
Timothy is to remember Jesus—the one set apart as God’s anointed (Χριστόν)—as raised from the dead. Jesus’ suffering placed him among the dead but the resurrection brought him out from them (νεκρῶν here means “all the dead,” BAGD s.v. 2a with a list of occurrences; ἐκ [τῶν] νεκρῶν occurs 20x in Paul, 17x anarthrous and 16x with the verb ἐγείρω). The perfect participle ἐγηγερμένον lays stress on the fact that he is still risen (like the perfect verbs in 1 Cor. 15:4, 12–20; cf. Robertson). It is used syntactically as an adverbial participle in indirect discourse after the verb μνημόνευε: “Remember that Jesus Chr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cf. Robertson, Grammar, 1041). Where Paul uses “raised from the dead” (ἐγείρω with ἐκ νεκρῶν) and indicates the one who does the raising, it is God the Father (both when the verb is active, Rom. 4:24; 8:11; Eph. 1:20; Col. 2:12; 1 Thes. 1:10, and when it is passive, Rom. 6:4). This consistent practice implies that the one who raises is God the Father here also. Timothy is to remember that Jesus is raised from death itself, and that triumph is to encourage him when he contemplates suffering hardship for Christ.
ἐκ σπέρματος Δαυίδ, literally “out of the seed of David,” occurs in the NT only here and in Rom. 1:3 and Jn. 7:42. In both Pauline occurrences it appears in connection with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as an essential aspect of Paul’s gospel. That the Messiah is a “descendant of David” (idiomatically rendered) is also conveyed in all four Gospels, Acts, and Revelation (Mt. 1:1; 2:5ff.; 22:41–45 par. Mk. 12:35–37/Lk. 20:41–44; Acts 2:25–36; 13:23; Rev. 22:16) and is based on the God’s promise in the OT (e.g., 2 Sa. 7:12ff.; Ps. 89:3f.; Je. 23:5). “Descendant of David” indicates Jesus’ physical lineage (Rom. 1:3) and connects him to the promise that David’s descendant would reign forever (again 2 Sa. 7:12ff.). As the promised messianic king of David’s line, he suffered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cf. Lk. 24:26, 46). In fact, he entered into his glory and reign through such suffering (cf. again Lk. 24:26 and 2 Tim. 2:12).
The Davidic Messiah who suffered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is the very essence of Paul’s gospel. Genitive μου in κατὰ 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 (“according to my gospel,” elsewhere in Paul in Rom. 2:16; 16:25) indicates who it is that tells this good news (cf. 1:11). Thus the phrase speaks of the good news that Paul proclaims (cf. BAGD s.v. 2b β; 2 Cor. 4:3; 1 Thes. 1:5; 2 Thes. 2:14). On εὐαγγέλιον see the comments on 1 Tim. 1:11 (the other PE* occurrences are in 2 Tim. 1:8, 10; on Paul’s references to Jesus’ earthly life in his preaching see Lategan, Die Aardse Jesus).
PE Pastoral Epistles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7–398.
 
9절)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것을 제시한 바울은 이어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은 자신을 기억할 것을 제시한다. 주님께서 복음대로 죽으신 것처럼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죄인처럼 매이는 고난을 당했다. 
‘죄인’으로 번역된 ‘카쿠르고스’는 ‘악’을 뜻하는 명사 ‘카콘’과 ‘행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이레고’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직역하자만 ‘행악자’의 의미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사용된 표현이다(눅 23:32, 33, 39). ‘매이는 데’로 번역된 ‘데스몬’은 문자적으로 ‘족쇄, 사슬’을 의미하는 ‘데스모스’의 복수형이다. 여기서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바울이 여러차례 수감생활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사도로서의 영광스러움과 고난의 상태를 극적으로 대소시킨다. 이렇게 바울 자신은 매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 여기서 ‘매이다’로 번역된 ‘데데타이’는 ‘묶다’라는 의미의 동사 ‘데오’의 현재 완료 수동태 동사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훼방하는 자들에 의해 감옥에 갇힐 수는 있어도 복음 자체는 결코 갇히지 않음을, 그 어던 것으로도 묶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2:9 The significance of ἐν ᾧ in the first clause of this verse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antecedent of the relative pronoun is most likely εὐαγγέλιον, not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 ἐν has been understood in various ways, e.g., “in whose service” (NEB), or in a causal sense, “for which” (RSV, NASB, NIV). The latter commends itself through comparison with 1:12, where a similar transition is presented in the flow of argument (Ridderbos).
κακοπαθῶ** (also in 4:5; Jas. 5:13) means generally “suffer evil.” What evil Paul suffers is related in what follows. μέχρι, “until,” is used here of degree or measure, “even to the point of” (BAGD s.v. 1c; cf. Phil. 2:8; Heb. 12:4). Paul is suffering even to the point of δεσμῶν (Pl.* 8x), literally “bonds, chains,” but more likely simply “imprisonment,” as the word was often used (cf. BAGD s.v. 1), including the other Pauline occurrences (Phil. 1:7, 13, 14, 17; Col. 4:18; Phm. 10, 13). Paul’s suffering is imprisonment “like a criminal” (κακοῦργος**), like one who has committed “gross misdeeds and serious crimes” (BAGD; see Lk. 23:32–33, 39).
In contrast (ἀλλά) to his imprisonment, Paul vigorously asserts that “the word of God is not imprisoned.” He wants to make clear that his suffering and imprisonment does not hinder the gospel’s progress (cf. Phil. 1:12ff.). ὁ λόγος τοῦ θεοῦ (Pl.* 10x: Rom. 9:6; 1 Cor. 14:36; 2 Cor. 2:17; 4:2; Phil. 1:14 [variant reading]; Col. 1:25; 1 Thes. 2:13; 1 Tim. 4:5; Tit. 2:5), “the word of God,” is used by Paul to designate the message and teachings from God, sometimes with more emphasis on the central gospel content as here (and, e.g., 2 Cor. 2:17; 4:2; Phil. 1:14) and sometimes to refer to any particular truth that has been communicated (as in 1 Cor. 14:36; 1 Tim. 4:5; G. Kittel, TDNT IV, 115f. seems to recognize only the former).
οὐ δέδεται is a play on words, with δέδεται used figuratively with the negative to contrast with δεσμῶν. The importance of the statement is heightened by the perfect tense, which says, in effect, that God’s word has not been and is not now “bound” or “imprisoned” (Ellicott). Paul will go on to say (v. 10) how his imprisonment has been used by God to bring God’s message to those he has chosen and thus how it is worthwhile (cf. Phil. 1:12ff.: Paul’s imprisonment has turned out “for the greater progress of the gospel”).
NEB New English Bibl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8.
 
10절) ‘택함받은 자들을 위하여’로 번역된 ‘디아 투스 에클렉투스’에서 ‘디아’는 ‘~를 통하여, ~로 말미암아, ~때문에’라는 의미의 전치사이고 ‘에클렉투스’는 ‘샌택된, 뽑힌’을 의미하는 ‘에클렉토스’의 형용사형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통해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모든 것을 참는 이유가 바로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은 자들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이 선택과 예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데 바울은 딤후 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디모데후서 1:9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울은 이 부르심, 선택은 행위가 아니라 영원전부터 주신 은혜임을 고백한다. 이 택하심은 결국 인내를 통해 복음을 전함으로 성취된다. 바울은 자신은 구원받았으나 아직 밎지 않고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죄인과 같이 매이는 고난까지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구원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라고 분명하게 그 범위와 영역을 제시한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능력이다. 
 
ἐκλεκτός -οῦ, ὁ; (eklektos), 형용사., 명사. 선택된, 뽑힌. 히브리어 등가: בָּחִיר (10), בָּחוּר (5), ברר 1 (5).
형용사 용법
1. 선택된 (선택된) —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들) 보다 우선적으로 (누군가에게) 선택된. 관련 주제: 선출하다; 예정론; 선호하다; 선거.
딤전 5:21 καὶ τῶν ἐκλεκτῶν ἀγγέλων,
벧전 1:1 ἐκλεκτοῖς παρεπιδήμοις διασπορᾶς Πόντου, Γαλατίας, Καππαδοκίας, Ἀσίας,
벧전 2:4 θεῷ ἐκλεκτὸν ἔντιμον
요이 1 Ὁ πρεσβύτερος ἐκλεκτῇ κυρίᾳ καὶ τοῖς τέκνοις
요이 13 σου τῆς ἐκλεκτῆς.
명사 용법
1. 선택된 자 (하나님에게) — 특정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ἐκλογή.
마 24:24|| καὶ τοὺς ἐκλεκτούς·
막 13:20|| διὰ τοὺς ἐκλεκτοὺς οὓς ἐξελέξατο
골 3:12 Ἐνδύσασθε οὖν ὡς ἐκλεκτοὶ τοῦ θεοῦ, ἅγιοι
딤후 2:10 διὰ τοῦτο πάντα ὑπομένω διὰ τοὺς ἐκλεκτούς,
딛 1:1 κατὰ πίστιν ἐκλεκτῶν θεοῦ
칠십인역 참조 구절
삼하 21:6; 대상 16:13; 시 17:27; 시 88:4; 시 104:6; 시 104:43; 사 28:16; 사 43:20; 사 65:9; 사 65:15; 사 65:23
형용사. 형용사
명사. 명사
||  || 막 13:22
||  || 마 24:22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바울은 자신이 매임가운데 있으면서도 구원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한 순간부터 시작하여 영원까지 이어진다. 구원은 은혜로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통해서 시작되고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지속되며 그것의 완성은 마지막 날 ‘영원한 영광’을 얻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영원한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궁극적 목표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았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자로서 매이지 않는 능력의 복음을 전하면서 소망할 것은 영원한 영광과 함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구원의 영광스러움을 아는 자만이 고난의 무게를 이길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10 διὰ τοῦτο (see 1 Tim. 1:16), “for this reason” or “therefore,” is tied syntactically to the following prepositional phrase with διά and to the ἵνα clause, which together supply the reason appealed to by this phrase. Therefore, it is for this reason (cf. BAGD s.v. διά B.II.1), i.e., the salvation of the elect, that Paul endures all things. With this statement Paul shifts from the (συγ)κακοπαθέω verb forms (1:8; 2:3, 9) to ὑπομένω, which is also used in v. 12 in the “faithful saying.” ὑπομένω means generally “remain,” with the predominant note being that one remains instead of fleeing so that one “endures” in trouble, affliction, and persecution ( BAGD s.v. 2; Pl.* 4x). Once Paul specifies what it is that one must endure (Rom. 12:12), but otherwise he uses absolute πάντα, “all things,” “everything” (here and in 1 Cor. 13:7), or gives no specification at all (as in v. 12).
Paul’s endurance is purposeful. He endures “all things” διὰ τοὺς ἐκλεκτού ς, “for the sake of the elect.” ἐκλεκτός (NT 22x, Pl.* 6x, 5x of humans, once of angels [1 Tim. 5:21]) refers generally to one who is or those who are “chosen.” When Paul uses the word of humans, he usually places it in the descriptive phrase ἐκλεκτοὶ θεοῦ (here; Rom. 8:33; Col. 3:12; Tit. 1:1; in Rom. 16:13 he adds ἐν κυρίῳ); θεοῦ indicates the one who chooses (cf. the consistent Pauline usage of θεός as the subject, stated or clearly implied, of the cognate verb ἐκλέγομαι, 1 Cor. 1:27, 28; Eph. 1:4). The word thus represents “those whom God has chosen fr[om] the generality of mankind and drawn to himself” (BAGD s.v. 1b).
The elect are chosen “to obtain the salvation that is in Christ Jesus” (cf. Acts 13:48; see Hendriksen on this election). Paul believes that God has chosen from the generality of mankind some whom he will draw to himself; therefore, he is willing to give himself to be the instrument through whom they hear the gospel, are so drawn to God, and obtain salvation (cf. Acts 18:9–10). He can bear up under whatever difficulties because those whom God has chosen will respond and obtain salvation.
The ἵνα clause gives the particular purpose in view for those who are chosen. αὐτοί, “they,” is used for emphasis and refers back to τοὺς ἐκλεκτούς. Adverbial καί (“also”) puts emphasis on the αὐτοί. The meaning of καὶ αὐτοί, “they also,” is in effect, therefore, “they as well as I” (Robertson; καὶ αὐτοί appears 40x in the NT, 7x in Paul, of which Rom. 11:31 is the only other place where αὐτοί represents the third person plural). τύχωσιν (NT 12x, Pl. 4x) means here “attain” or “obtain” with the genitive of the thing obtained (with this construction and general nuance in Lk. 20:35; Acts 24:2; 26:22; 27:3; Heb. 8:6; 11:35).
Paul is willing to endure all things so that “they” may obtain σωτηρία (NT 45x, Pl. 18x, PE*2x, here and 3:15). σωτηρία with the meaning “salvation” is found in the NT only in connection with Christ as Savior (BAGD s.v. 2), as here, “the salvation that is in Christ Jesus” (cf. 3:15; Rom. 1:16; 10:10). The “elect” must obtain salvation, and that salvation is in Christ. Thus here as elsewhere in Paul we find election in Christ (e.g., 1:10; Eph. 1:4ff.) and salvation in Christ.
σωτηρία here seems to be the present spiritual deliverance that has come into the life of the one who has obtained it by hearing the gospel and coming to faith in Christ. That it exists in the present is evidenced by the fact that a person may obtain it here and now—through Paul’s efforts, by the apparent distinction between salvation and later “eternal glory,” and by the description of σωτηρία as a present possession by the phrase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in its only other occurrence in 2 Timothy (3:15; cf. Rom. 1:16). Of course for Paul the concept of σωτηρία as a whole includes both present and future aspects, so that in another setting he can speak of it from its future aspect by saying that “now salvation is nearer to us than when we first believed” (Rom. 13:11).
μετὰ δόξης αἰωνίου, “with eternal glory,” refers to the glory and splendor of the next life. Since δόξα (see the comments on 1 Tim. 1:11; 3:16) is used normally in the NT of God’s glory, majesty, and sublimity, it is natural that it also be used of the future eternal state (αἰωνίου) and realm of existence in which his splendor is everywhere and immediately present and, as here, of that in which the redeemed participate in a marvelous and endless way as they behold his splendor in a full and direct way (cf. 1 Jn. 3:2; Rom. 5:2; 1 Cor. 2:8; 2 Cor. 3:18; Eph. 1:17; Phil. 3:21; Col. 3:4; 2 Thes. 1:9; 2:14; Tit. 2:13). In 1 Pet. 5:10 (the only other NT occurrence of δόξης αἰωνίου; cf. 2 Cor. 4:17: αἰώνιον βάρος δόξης) the “eternal glory” is said to be God’s (“his,” αὐτοῦ).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Pl. Paul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8–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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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soldier dgets entangled in civilian pursuits, since his aim is to please the one who enlisted him. eAn athlete is not fcrowned unless he competes according to the rules. It is gthe hard-working farmer who ought to have the first share of the crops
d 2 Pet. 2:20
e See 1 Cor. 9:25
f [ch. 4:8]
g 1 Cor. 9:10; [Heb. 6: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4–6.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3–6.
 
1-2절을 통해서 복음 전수의 사역을 명한 바울은 이어지는 3-6절을 통해서 충성된 복음 사역자가 닮아가야할 자세에 대하여 세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
 
3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삶을 자주 군사로 비유하였다. 
빌립보서 2:25
25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레몬서 2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고린도전서 9:7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린도후서 10:3–4
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디모데전서 1:18
18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여기서 병사로 번역된 ‘스트라티오테스’는 ‘군대, 무리’를 의미하는 ‘스트라디아’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군대에서 복무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당시 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했기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군인의비유는 매우 실감나는 실제적인 표현이었다. 
‘너는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로 번역된 ‘슁카코파데손’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쉰’과 ‘나쁘게, 흉악하게’를 의미하는 ‘카코스’, ‘경험하다, 겪다’를 의미하는 동사 ‘파스코’의 합성어로 ‘고난받다, 핍박받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코파테오’의 합성어인 ‘슁카코파테오’의 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 표현이다. 원문에서는 디모데가 누구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를 한글 번역에서는 임의로 ‘나와 함께, 즉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2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면 ‘바울을 포함한 많은 증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히브리서 13:23
23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실제로 디모데도 바울을 본받아 많은 복음의 증인들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랐다. 
 
 
2:3 συγκακοπάθησον, “suffer hardship with” (see TCGNT for preferring this reading over σὺ οὖν κακοπάθησον), resumes the exhortation given at the beginning of the letter (see 1:8). This exhortation will be included in Paul’s last charge to Timothy (4:1–5, κακοπάθησον). As in 1:8 no reference is given for συγ-, and here as there it most likely refers to Paul because Paul applies this concept to himself in v. 9 (κακοπαθῶ) and uses πάσχω of himself in 1:12 following the use of συγκακοπάθησον in 1:8.
ὡς, “as,” introduces the comparison: Timothy must suffer as a soldier. Paul uses military imagery elsewhere (e.g., 2 Cor. 10:3–5; Eph. 6:10–17; Phm. 2; see Pfitzner, Agon Motif, 157–86), though not always with the same words (στρατιώτης, “soldier,” here only in Pl.*, NT 27x; cf. στρατεύω in Pl.* 4x: 1 Cor. 9:7; 2 Cor. 10:3; 1 Tim. 1:18; here; see O. Bauernfeind, TDNT VII, 701–13), often in a context of struggling against opponents of the gospel, as in 1 Tim. 1:18. Paul uses καλός, “good,” here in the sense of praiseworthy or outstanding (cf. τὴν καλὴν στρατείαν in 1 Tim. 1:18). Genitive ΧριστοῦἸησοῦ indicates the one who has enlisted Timothy and whom he serves as a soldier and prepares the way for the analysis in v. 4.
TCGNT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1971.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2–393.
 
4절) 바울은 본절에서 군인의 특징중에 하나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것을 디모데에게 촉구한다. ‘자기 생활’로 번역된 ‘투 비우 프라그마테이아이스’이다. ‘비우’는 ‘생계, 생활’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삶에서 발생하는 행동과 사건을 의미한다. 
 
 
 
한글 번역은 ‘프라그마테이아이스’를 번역하지 않았다. 이는 눅 19:13에 사용된 ‘장사하다, 사업하다’라는 동사 ‘프라그마테우오마이’의 명사형이다.
누가복음 19:13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바울은 여기서 ‘자기 생활’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군 생활’을 대조시킴으로 일반 시민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병사로서의 공적인 직무 수행에 방해되는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병사로 복무하는 자가 시민으로서의 삶에 일체 개입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얽매이는’으로 번역된 ‘엠플레케타이’는 본래 ‘섞어 짜다’라는 뜻을 지닌 ‘엠플레코’의 현재형으로 벧후 2:20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베드로후서 2:20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여기서는 ‘휘말려 들어가다, 연루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병사들을 사적인 일에 연루되어 직무 수행을 방해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군사된 자가 무조건 자기의 삶을 일상의 영역과 단절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복음의 군사된 자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게 하는 개인적인 삶, 일상의 영역을 단호히 경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이 아니라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려 함이라’로 번역된 ‘히나’는 이하 문장의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서 병사로 모집한 자는 군대로 말하면 국가 내지는 상급자를 의미하겠지만 복음의 군사인 우리들을 모집하신 분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이시다. 군 입대하여 군사가 되면 자신의 일상을 정리하고 훈련을 받고 조직의 규율에 따라 생활한다. 군대은 전쟁을 준비하는 집단으로 상관의 명령이 있으면 죽음도 불사해야하는 조직이다. 그렇기에 시민으로 일상을 누리다가, 본문의 말대로라면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 살다가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생활이 아니라 조직의 명령, 상관의 명령에 복종,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기쁘게’로 번역된 ‘아레세’는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편의를 주려고 노력하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아레스코’의 가정법으로 군인의 의지와 열망이 그의 상관의 의지와 열망에 부합해야 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복음의 정병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대장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4 The statement in this verse speaks of the discipline needed to be a soldier. The operative verbs are “entangle” and “please.” The soldier does not become entangled in things that would be a hindrance to his singleminded dedication to follow gladly the commands of his leader. The implication is that Timothy should not let anything in this life distract him, Christ’s soldier, from pleasing and following Christ, his commander, even though such a course involves suffering hardship. οὐδείς, “no one,” makes the statement a general principle. The participle στρατευόμενος (in Pl.* at 1 Cor. 9:7; 2 Cor. 10:3; 1 Tim. 1:18) places emphasis on the actual involvement of the soldier in his task. TEV has wisely captured that by rendering the participle with “a soldier on active duty.” ἐμπλέκεται** is either passive, “is entangled,” or middle, “entangles himself,” and is used only figuratively in the NT (also in 2 Pet. 2:20) of the experience of one caught up in something. πραγματείαις** (a NT hapax) is used here and in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only in the plural and has the meaning “undertakings” or “affairs.” τοῦ βίου is used here of earthly or everyday “life” (BAGD s.v. 1; cf. Lk. 8:14).
This assertion is given to teach Timothy through analogy, not as direct instruction. The analogy teaches that ministers should not be distracted by the normal affairs of everyday life in such a way that they cannot and do not give themselves wholeheartedly to their commander and his orders (cf. the same concern for every professed believer in Lk. 8:14, which is obviously meant in terms of priorities and not as an absolute). Paul concretely applies this principle in 1 Corinthians 9, insisting that ministers be paid so that they can devote themselves to their ministry (1 Cor. 9:7–14; cf. Gal. 6:6; 1 Tim. 5:17–18; Tit. 3:13–14; 3 Jn. 5–8). But this application is not absolute: Paul presents this argument for paying ministers together with an argument for the propriety of his own tent-making work (1 Cor. 9:12, 15ff.), noting, however, that he does that work to further his service for Christ, not in such a way that it distracts him from that service (vv. 18ff.). Thus this passage does not teach that Timothy, or any other minister, should withdraw from everyday life, but that he should not let it and its affairs distract him from service to his commander.
A ἵνα clause sets forth the purpose for this demand. A soldier is to be unentangled so that he is free to “please” (ἀρέσῃ; perhaps to “please” by good service, as Lock suggests, referring to Milligan, Thessalonians, at 1 Thes. 2:4) “the one who enlisted him as a soldier” (τῷ στρατολογήσαντι,** a biblical hapax). Paul uses the participial form probably because it emphasizes that a man is a soldier because someone enlisted him and entails that, therefore, he should serve that one. Timothy is Christ’s soldier because Christ enlisted him (v. 3), and therefore he ought to serve him with unentangled service. The implication, following v. 3, is that such service involves suffering and that Timothy should be willing to please his commander by bearing such suffering.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3–394.
 
5절) 군인의 비유에 이어서 이제 경기하는 운동선수의 비유를 들어 복음의 일꾼의 사명을 설명한다. ‘경기하는’으로 번역된 ‘아들레’는 ‘경쟁’을 의미하는 명사 ‘아들로스’에서 파생된 동사 ‘아둘레오’의 현재형으로 ‘경쟁하다, 싸우다’라는 의미이다. 당시 헬라지역에서 올림픽 경기가 유명했기에 바울은 이 경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법대로, 룰대로 경기하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결과를 상기시키면서 충성된 복음의 일꾼으로 하여금 법대로 경기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의 명사는 ‘아틀레시스’인데 여기서 ‘운동선수’를 의미하는 ‘athlete’라는 단어가 나왔다.
 
‘법대로’로 번역된 ‘노미노스’ 문자적으로 ‘법에 일치하게’라는 의미로 딤전 1:8에서 ‘적법하게’로 사용되었다. 운동 경기마다 그 경기에 맞는 규칙들이 있다. 축구의 경우 골키퍼를 제외하고 손을 사용해서는 안되며, 반대로 농구는 발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게 경기에 임하고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법이 제대로 경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주지되고 심판을 통해서 집행되어야 한다. 만약 올림픽 경기에 참여한 선수가 경기의 규칙을 무시하게 되면 반칙을 하는 것이고 이것의 결과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면류관을 얻지’로 번역된 ‘스테파누타이’는 본래 ‘면류관’을 의미하는 ‘스테파노스’에서 파생한 동사 ‘스테파노오’의 현재 수동태로 본문에서는 부정어 ‘우’와 함께 사용되어 반칙을 행한 자는 경기에 참여해 승리한 것 같지만 경기 마치고 시상식에 마땅히 받을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면류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면류관 자체를 ‘구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한 충성된 일꾼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를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4)등으로 표현한다. 
본절에서는 경기하는 운동선수의 비유를 통해서 승리하여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되 공정한 방법으로 노력해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운동 선수들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 불법적인 약물이나 기구등을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 밝혀지지 않았을때는 잠깐의 영화를 누리겠지만 이것이 밝혀지게 되면 처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2:5 Paul adds (δέ) the analogy of a law-abiding athlete as a model for Timothy. Adverbial καί, “also,” indicates that this image is making much the same point as the preceding one (cf. Ellicott and NIV: “likewise”). This statement regarding the athlete is a general principle, as is evidenced by the generalizing ἐὰν … τις (BAGD s.v. τίς 1aγ; 1 Tim. 1:8) and especially by the concluding ἐὰν μὴ νομίμως ἀθλήσῃ. The principle is stated under the figure of anyone who “competes in a contest” (ἀθλέω,** a biblical hapax used twice in this verse; cf. E. Stauffer, TDNT I, 167f.; συναθλέω** in Phil. 1:27; 4:3).
Only with the apodosis (οὐ στεφανοῦται) with its exception clause (ἐὰν μὴ νομίμως ἀθλήσῃ) is the principle fully stated: “He is not crowned unless he competes by the rules.” The principle is that, just as with a soldier, so also with an athlete there are things that must be done. στεφανοῦται** (also in Heb. 2:7, 8), “is crowned,” refers to the wreath (στέφανον) that the victor wins as the prize (τὸ βραβεῖον) in the games of the day (1 Cor. 9:24–25; cf. W. Grundmann, TDNT VII, 615–36). 1 Cor. 9:25 also refers to a perishable wreath, indicating that the analogy points to an imperishable one. In 2 Tim. 4:8 we learn that the analogy points to a “crown of righteousness.”
ἐὰν μή introduces the exception clause that qualifies the apodosis: One is not crowned “unless.” The crucial word is νομίμως** (also in 1 Tim. 1:8), which is emphasized by its position. It means here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or laws of the athletic event” (cf. BAGD). Whether Paul was reflecting the requirement of some games that the athlete declare that he has trained the required number of months before being permitted to compete (see Kelly, Lock) need not be answered to understand the point of the analogy. The point is that the athlete must compete by whatever rules there are to gain the desired goal. νομίμως generalizes and leaves that point undefined, but in so doing makes the principle all the more forceful. For the Christian minister the point is that one of the laws of the Christian life is that God requires him to be willing to suffer hardship (v. 3; cf. 1:8). Paul makes this point explicitly in 3:12 (cf. Mt. 5:10–12 par. Lk. 6:22–23). The image of being crowned with a wreath has introduced the idea of blessing and reward.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4.
 
6절) 병사의 비유, 운동선수의 비유에 이어서 이제 6절은 수고하는 농부의 비유를 사용한다. 
‘수고하는 농부’로 번역된 ‘톤 고피온타 게오르곤’에서 ‘코피온타’는 ‘힘들여 고생하다, 피곤하다’라는 의미의 ‘코피아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쉬지 않고 땀흘리는 농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농부’로 번역된 ‘게오르곤’의 원현 ‘게오르고스’는 ‘땅’을 의미하는 ‘게’와 ‘일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르고’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이를 직역하면 ‘힘들여 땀흘려 수고하는 토지 경작자’이다. 고전 9:10에서는 ‘밭가는 자’로 번역하였다. 
고린도전서 9:10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코피아오는 ‘지치다, 피곤하다, 애쓰다, 수고하다’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땅은 정직하다. 농부가 땀흘려 수고한 만큼 열매로 보답한다. 그렇기에 수고한 농부는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 곡식, 열매를 영적인 차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물질적인 차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일차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으로 문자그대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면 이차적으로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가 구원의 기쁨을 먼저 맛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바울에게 위임된 복음 증거의 사명을 위탁받아 이 사역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땀흘리며 수고하는 농부와 같이 수고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고 그러면 먼저(프로톤)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땀흘리며 수고하며 가꾼 농부에게 가을에 추수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수고하고 애쓰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자에게는 그 뿌린 말씀의 씨앗을 통해서 풍성한 영적 열매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2:6 The image of the farmer who receives his share of the crops reiterates the idea of reward and continues the emphasis on the need for suffering by the use of the qualification “hard-working” (κοπιῶντα). In this context the verb κοπιάω means “work hard, toil” but also carries, in the transferable lesson of the analogy, the nuances “strive” and “struggle” (BAGD s.v. 2). This word is one of Paul’s favorites. He knows quite well its literal and physical significance from his own experience (1 Cor. 4:12) and urges such diligence upon Christians in their daily work (Eph. 4:28). Against this backdrop of his own experience, he most often uses the term to refer to the effort and struggle needed in spiritual ministry (cf. especially 1 Cor. 15:10; Phil. 2:16; Col. 1:29; and elsewhere in the PE* 1 Tim. 4:10; 5:17). The participle presents the condition (Bouma, Ridderbos) necessary for the farmer, just as there were conditions necessary for the athlete and the soldier. Paul does not hesitate to present such a condition in this image and elsewhere because his exhortations are premised on the enabling power of the grace in Christ (v. 1; cf. 1 Cor. 15:10; Col. 1:29).
The image highlights not only the necessity for “hard work” but also the reward that results from such labor and carries on the note of reward sounded in the preceding image (v. 5). δεῖ with accusative τὸν κοπιῶντα γεωργόν and the infinitive μεταλαμβάνειν can be rendered literally “it is necessary for the hard-working farmer to receive.” In idiomatic English the phrase is turned around with the hard-working farmer placed near the beginning of the sentence and the words “ought” (NASB, RSV) or “should” (TEV, NIV) rendering δεῖ. In any event, δεῖ expresses “the compulsion of what is fitting” (BAGD s.v. 6; cf. v. 24). μεταλαμβάνειν (here only in Pl.* although twice Acts has Paul using the word: 27:33, 34; cf. μετάλημψις in 1 Tim. 4:3) is used in the sense of “receive one’s share of” (cf. G. Delling, TDNT IV, 10f.). The farmer receives his share of “the crops” (τῶν καρπῶν, literally “fruits,” but as LSJM point out, usually “the fruits of the earth”).
πρῶτον, “first,” has been a puzzle for commentators. A basic question is whether it represents only something in the image of the farmer or is intended to carry over to Timothy’s situation. (1) Calvin and others have suggested that πρῶτον be taken adverbially with the participle κοπιῶντα: It is necessary that the farmer should first labor, and then enjoy the fruits. But it is doubtful that the Greek can be properly understood in this way, and thus most commentators have rejected this solution (e.g., Ellicott). (2) Others have suggested that the reference here is to the “first share of the crops” that the supported minister is to receive (e.g., Dibelius-Conzelmann, Hanson; cf. 1 Cor. 9:7, 10). Fee correctly repudiates this position by saying that it “is totally foreign to the context.” (3) If Paul does intend πρῶτον to carry over to Timothy’s situation and refer to something that the minister shares in here and now before his future reward, then it might refer to his seeing the spiritual results of his labors in the life of converts. Paul does talk about the “fruit” of his missionary endeavor among the Gentiles (Rom. 1:13) and refers to those who have become Christians under his ministry as his “crown” (Phil. 4:1; 1 Thes. 2:19). But even this solution, although more in keeping with the context and flow of the argument, seems less likely than (4) the recognition that πρῶτον is simply part of the imagery and is not to be pressed in regard to Timothy’s situation. The farmer’s arduous labors are so certainly rewarded that one can speak of the farmer as partaking of the fruits “first,” before anyone else does.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TEV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9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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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then, wmy child, xbe strengthened by the grace that is in Christ Jesus, and ywhat you have heard from me in the presence of many witnesses zentrust to faithful men,1 awho will be able to teach others also.
w See ch. 1:2
x See Eph. 6:10
y ch. 1:13
z 1 Tim. 1:18
1 The Greek word anthropoi can refer to both men and women, depending on the context
a [Titus 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1–2.
 
2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1–2.
 
본문 2:1-7은 사역자 양성을 통해 복음 사역이 계속되게하라는 권면과 충성된 복음사역자의 기본 자세로 군사, 경기자, 농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절) 한글 번역은 ‘내 아들아’를 먼저 번역했지만 원어에서는 ‘너는’에 해당하는 ‘쉬’라는 2인칭 주격 단수 대명사가 문장의 처음에 등장한다. 헬라어에서 주격 인칭 대명사는 강조 용법에만 사용되기에 여기서는 디모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크논 무’이다. 앞서 1:2에서 이미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의 연장선이다. 이는 육신으로 바울이 디모데를 낳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통해서 거듭났고 디모데의 성장을 위한 영적 아비의 역할을 했기에 이렇게 부르는 것은 매우 적합하다. 
‘테크논’이라는 단어는 ‘아이, 자손’을 의미하는 매우 일반적이고 중요한 단어로 본문에서는 자녀를 향한 돌봄과 양육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τέκνον -ου, τό; (teknon), 명사. 아이, 자손. 히브리어 등가: בֵּן 1 (119). 아람어 등가: בַּר 2 (1).
명사 용법
1. 아이 — 때로 전체적으로 자녀라고 불리는 나이를 막론한 아들이나 딸.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υἱός. 관련 주제: 아이; 자손.
롬 9:8 τὰ τέκνα τῆς σαρκὸς
갈 4:27 ὅτι πολλὰ τὰ τέκνα τῆς ἐρήμου μᾶλλον
벧전 1:14 ὡς τέκνα ὑπακοῆς,
요일 3:1 τέκνα θεοῦ
요일 3:10 ἐν τούτῳ φανερά ἐστιν τὰ τέκνα τοῦ
2. 아이 (어린) — 남성이든 여성이든 (대개)사춘기 이전에 있는 사람. 때로 사춘기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관련 주제: 아이.
고후 6:13 ὡς τέκνοις
3. 아이 (애정) — 사랑받는 것을 나타내는 기술적인 용어. 자녀를 향한 돌봄과 양육을 가리킬 것이다. 관련 주제: 아이; 딸.
딤전 1:2 Τιμοθέῳ γνησίῳ τέκνῳ ἐν πίστει·
딤후 1:2 Τιμοθέῳ ἀγαπητῷ τέκνῳ·
딛 1:4 Τίτῳ γνησίῳ τέκνῳ κατὰ κοινὴν πίστιν·
몬 10 τοῦ ἐμοῦ τέκνου, ὃν ἐγέννησα ἐν τοῖς
요삼 4 ἀκούω τὰ ἐμὰ τέκνα ἐν τῇ ἀληθείᾳ
4. 사람 (범주) — 특정한 계층이나 그룹에 속한 사람; 대개 해당 계층이나 그룹에 종속된 개념을 갖는다.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υἱός.
마 23:37|| ποσάκις ἠθέλησα ἐπισυναγαγεῖν τὰ τέκνα σου, ὃν
눅 13:34|| ποσάκις ἠθέλησα ἐπισυνάξαι τὰ τέκνα σου ὃν
눅 19:44 καὶ ἐδαφιοῦσίν σε καὶ τὰ τέκνα σου
요일 3:10 καὶ τὰ τέκνα τοῦ
계 2:23 τὰ τέκνα αὐτῆς
5. 아이 (종류) — 몇 가지 일반적인 특성에 의해 구별 하는 것 들 또는 품질 (그것의 headword에서 파생 된);의 카테고리 headword의 자식으로 이해.
갈 4:25 δουλεύει γὰρ μετὰ τῶν τέκνων αὐτῆς·
엡 2:3 καὶ ἤμεθα τέκνα φύσει ὀργῆς ὡς καὶ
요이 1 Ὁ πρεσβύτερος ἐκλεκτῇ κυρίᾳ καὶ τοῖς τέκνοις
요이 4 Ἐχάρην λίαν ὅτι εὕρηκα ἐκ τῶν τέκνων
요이 13 Ἀσπάζεταί σε τὰ τέκνα τῆς ἀδελφῆς σου
6. 아브라함의 후손 (영적) —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과 복을 물려 받는 적법한 후사으로 여겨지는 사람; 아마도 특별히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으로 특징되는.
롬 9:7 οὐδʼ ὅτι εἰσὶν σπέρμα Ἀβραάμ, πάντες τέκνα,
7. 후손 ⇔ 아이 — 부모의 직계로 이해되는 후손. 관련 주제: 아이.
마 3:9|| τούτων ἐγεῖραι τέκνα τῷ
눅 3:8|| τούτων ἐγεῖραι τέκνα τῷ
요 8:39 τέκνα τοῦ Ἀβραάμ
행 13:33 ὅτι ταύτην ὁ θεὸς ἐκπεπλήρωκεν τοῖς τέκνοις
여러 용어 명사 용법
1. 아브라함의 후손 (영적) —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과 복을 물려 받는 적법한 후사으로 여겨지는 사람; 아마도 특별히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으로 특징되는.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υἱός.
마 3:9|| τούτων ἐγεῖραι τέκνα τῷ
눅 3:8|| τούτων ἐγεῖραι τέκνα τῷ
칠십인역 참조 구절
창 3:16; 창 17:16; 삼상 3:16; 시 33:12; 지혜 16:21; 욜 2:23; 슥 9:13; 사 30:1; 사 63:8; 렘 38:17; 1마카 1:38
명사. 명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눅 13:34
||  || 마 23:37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눅 3:8
||  || 마 3:9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눅 3:8
||  || 마 3:9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바울은 자신의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강하라고 권면한다. ‘강하고’로 번역된 ‘엔뒤나무’는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엔’과 ‘힘을 주다,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뒤나모오’의 합성어로 ‘권능을 부여하다, 활력을 줄어넣다’라는 ‘엔뒤나모오’의 현재 수동태 명령형이다(롬 4:20; 빌 4:13; 엡 6:10). 현재 시제가 쓰인 것은 삶 가운데 항상 강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수동태가 쓰인 것은 강함의 원천이 디모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으므로 디모데는 단지 이 힘에 자신을 맡기면 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디모데가 자신을 맡길 힘의 원천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앞서 딤전 1:12에서 바울은 ‘자신을 능하게 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임을 밝힌바 있다. 바로 자신을 능하게 하신 주께서 디모데를 능하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 이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본절에는 ‘엔’이라는 전치사가 2번 사용된다. 이는 ‘~안에’라는 의미로 영역과 범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디모데가 권능으로 강해지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의 ‘영역과 그 범위 가운데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디모데가 강해지는 것은 자신의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선물인 은혜 역시 그리스도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과 모든 성도의 힘의 원천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2:1 σύ, “you,” is an emphatic personal address to Timothy. With οὖν, it contrasts him with those in Asia who turned away from Paul (1:15) and compares him with Paul and Onesiphorus (1:16–18). οὖν, “therefore,” an inferential particle introducing the following exhortation (cf. 1:8), denotes that the exhortation is required because of what can be inferred from what precedes it. Thus it harkens back to two elements: the imperatives of vv. 8, 13–14 to suffer for the gospel, to retain the standard of sound words, and to guard the deposit, which all necessitate the enabling power of Christ’s grace, and the defection of some (1:15) and the difficulties faced by those who remain faithful (1:16–18). These difficulties also make that power necessary. τέκνον μου (see 1 Tim. 1:2), “my child,” a warm personal appeal to Timothy’s spiritual relationship to Paul, adds the ever-present personal dimension to the robust imperative that follows (and to the imperative in v. 3).
Paul exhorts Timothy with the present passive imperative of ἐνδυναμόω, a verb that means in the passive “be strengthened,” and thus also “become strong,” and that is consistently used in the NT of spiritual strength (7x in the NT, all but one in Paul). The present tense indicates Timothy’s need for continual dependence on God, i.e., “keep on being strengthened.”
ἐν with τῇ χάριτι is, as Kelly says, “probably instrumental: ‘by means of,’ or ‘in the power of.’ ” The repeated τῇ before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indicates that this phrase modifies χάριτι and signifies that the “grace” is that found in Christ and in union with him (for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in this letter see 1:1, 13; 2:10; 3:12, 15 and especially 1:9, where the phrase is used with χάριν; for an overview on the use of ἐν Χριστῷ and literature see M. Harris, NIDNTT III, 1192). This is in accord with most of the other Pauline occurrences of ἐνδυναμόω, where the one doing the strengthening is the κύριος (Eph. 6:10; 2 Tim. 4:17) or Χριστὸς Ἰησοῦς (2 Tim. 2:1) or simply ὁ ἐνδυναμῶν με (Phil. 4:13: “he who strengthens me”). χάρις is that which strengthens one to live the Christian life and to accomplish what God asks, whether it be in doing some activity or in bearing suffering. χάρις is God’s gracious enabling power (cf. 2 Cor. 9:8; Tit. 2:11–14).
NIDNTT C. Brown,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I–III. Grand Rapids, 1975–78.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89.
 
2절) 본절은 제자훈련의 중요한 원리를 다루고 있다. 
앞서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해질 것을 권면한 이후에 바울은 ‘많은 증인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앞에서’로 번역된 ‘디아’는 문자적으로 ‘~를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그래서 이 표현은 ‘많은 증인들을 통하여 지지되는’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많은 증인’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증언자들로 디모데가 안수 받을 당시에 그에게 복음 사역을 위탁한 ‘장로의 회’일수도 있고, ‘디모데의 어머니나 외조모 및 바울과는 관련이 없는 다른 복음 전도자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만 디모데가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많은 증인을 통해서 들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디모데에게 전수한 복음의 진리가 자신만을 통해 전해져야하는 배타적인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내용은 ‘디아’라는 표현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단순히 ‘~사이에서, 앞에서’라는 의미라면 바울은 디모데가 많은 증인들이 보고 있는 그 앞에서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는 의미가 된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디모데의 경우 ‘많은 증인을 통하여, 많은 증인이 보는 앞에서’이루어졌다. 이는 디모데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자신만이 아닌 여러 사람과 공유해야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러한 배경에서 디모데에게 자신에게서 들은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한글 번역에는 ‘타우타’가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것들을’에 해당하는 ‘타우타를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여기서 ‘부탁하라’로 번역된 ‘파라두’는 본래 ‘옆에 세우다, 위탁하다’라는 의미의 ‘파라티데미’의 명령형으로 앞선 1:12, 14절에서 사용된바 있다. 스토트는 ‘나의 의탁한 것이 실제로 너의 의탁한 것이 되며 그리고 내게 맡겨진 것이 이제는 네게 맡겨진 진리가 된다’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이렇게 복음의 위탁과 의뢰의 전승으로, 제자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복음의 진리를 부탁하는 일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맡겨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이것들을(타우타) 다른 사람이 아닌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충성된 사람들에게’로 번역된 ‘피스토이스 안드로포이스’는 직역하면 ‘신실한 사람들, 믿음직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는 믿음직한 사람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복음 전수, 제자훈련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역시 무분별한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위탁받은 믿음직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처럼 충성된 사람들에게서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로 복음은 전수된다. 우리에게 전달된 복음은 바로 이런 연결 고리를 통해서 이어져온 것이고 우리들도 이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2:2 Paul combines with the need for personal spiritual strength (v. 1) the need to handle rightly and communicate faithfully the apostolic message (cf. 1:6–8, 13–14; 1 Tim. 4:6–16, especially v. 16, where this combination is succinctly stated). Timothy is to “entrust” to “faithful men” what he has “heard” from Paul, ἃ ἤκουσας παρʼ ἐμοῦ (cf. 1:13). Paul uses ἀκούω to refer to his apostolic message because that message was so often given in oral preaching and teaching (for ἀκούω in this sense see Rom. 10:14, 18; 2 Cor. 12:6; Eph. 1:13; 4:21; especially Phil. 4:9; Col. 1:6, 23; 1 Tim. 4:16; 2 Tim. 4:17).
Paul refers to this message with the indefinite plural relative pronoun , which is appropriately rendered by the broad and indefinite terms “what” (RSV) or “the things [which]” (NIV, NASB) and which includes all of his teaching (cf. 1:13–14). He has made explicit this sense of the authority and permanent significance of his words on several earlier occasions (cf. 1 Thes. 2:13). He speaks of his teaching as “tradition(s)” (παράδοσις) received from him and to be held and followed by Christians (2 Thes. 2:15; 3:6–7) and commends the Corinthians for holding firmly to the “traditions” just as he delivered them (1 Cor. 11:2). He says of the things that he writes that they “are the Lord’s commandment” (1 Cor. 14:37) and requires that his letters be read and shared with other churches (1 Thes. 5:27; Col. 4:16). So it comes as no surprise that what he has done throughout his ministry he now requires Timothy to do, i.e., to see that that teaching be faithfully entrusted to “faithful men.”
Paul qualifies his statement about “the things that you have heard from me” with διὰ πολλῶν μαρτύρων. It is not immediately clear what these words mean. Some have suggested that διά be understood as “through” and that Paul is saying that Timothy has received Paul’s message “through” the teaching and ministry of others. But that seems unlikely since Timothy has so often been with Paul and because it does little justice to the meaning of μαρτύρων, “witnesses.”
Chrysostom (and others since him) suggested that διά be understood, instead, in the sense of “in the presence of” and that the μαρτύρων bear witness to what was taught and who received the teaching (for this meaning of διά see Lock; BAGD s.v. A.III.2a; Chrysostom wrote: “You did not hear in secret or privately, but in the presence of many, with all openness of speech”). Within this view, it is suggested that “witnesses” refers to those present at Timothy’s “ordination” (1 Tim. 4:14; 2 Tim. 1:6) and that they bear witness to the fact that then and there Paul instructed him and entrusted to him the “sound words.” Appeal is made to the fact that the only other occurrence of the phrase “many witnesses” (πολλῶν μαρτύρων) is found in such a setting (1 Tim. 6:12). It is doubtful, however, that Paul has this exclusively in view because not all of what Timothy heard from Paul was communicated to Timothy on that occasion.
This consideration has brought many to the probably correct position that the phrase is used in a wider sense (but not one that excludes the occasion of ordination). In that wider sense the witnesses (likely fellow ministers of Paul and Timothy) testify to the “soundness” of those words and to the fact that those words are the truth of God that should be passed on. That the witnesses are “many” also testifies to the truth that Paul has proclaimed those words openly and publicly (cf. Acts 20:20, 27). It is a public teaching testified to and known not just by Timothy or by some few friends and colleagues but by “many witnesses” (πολλῶν μαρτύρων, πολλῶν in the sense of “numerous,” BAGD s.v. πολύς I.1aα; cf. Gal. 2:6–9).
ταῦτα, “these things,” in the next clause refers back to ἃ ἤκουσας κτλ., to that which Timothy has heard from Paul. Plural ταῦτα emphasizes that Paul wants all that he has taught to be passed on. παράθου is second aorist middle imperative of παρατίθημι, which is used in the NT in the middle with the meaning “entrust” (Lk. 12:28; 23:46; Acts 14:23; 20:32; 1 Tim. 1:18; 1 Pet. 4:19). Timothy is to “entrust” “these things” “for safekeeping” and for “transmission to others” (BAGD s.v. 2b α).
That safekeeping is, indeed, in mind is signaled by the designation of those to whom “these things” are to be entrusted as πιστοῖς, “faithful.” πιστοῖς is not used in this setting to designate them as “believing” (which is assumed) but as “trustworthy” and “dependable,” ones to whom one can “entrust” such important truths. This imagery is seen also in 1 Cor. 4:1–2, where Paul speaks of himself, Apollos, and Cephas as “stewards of God’s mysteries” (and in Tit. 1:7 he calls the presbyters/overseers “stewards”). In 1 Cor. 4:1–2, 17 Paul’s faithfulness consists in his rightly communicating the mysteries of God and Timothy’s in his faithfully handing on the public teaching of the apostle (that which he teaches “everywhere in every church”). The context signifies that this significance is intended here also. This point is important because there are those who are in opposition to the truth (v. 25), who will turn away from the truth and not endure sound doctrine (4:3–4). Furthermore, there are leaders who will oppose the truth (3:8) and who go astray from the truth (2:18). In such a setting, it is imperative that those to whom the teachings of the apostle are entrusted (to pass them on to others) be “faithful.” Faithfulness negatively consists in their not losing, neglecting, ignoring, or falsifying (like the false teachers mentioned in this letter) what Paul has said, and positively consists of their “handling accurately the word of truth” (2:15).
Since the task committed to these faithful ones is that of teaching others also, it is certain that they are the same group of whom Paul wrote in 1 Timothy, the presbyters who “work hard in word and teaching” (5:17), and also in Titus, the presbyters/overseers who are “holding fast the faithful word that is in accordance with the teaching” so that they are “able both to exhort in sound doctrine and refute those who contradict” (1:9).
These “faithful” ones were men. Their task was “to teach” an audience that included the entire church, a task forbidden to women because of the men in the audience (1 Tim. 2:12; cf. 1 Cor. 14:34ff.). These presbyters/overseers were required to be men in view of their duty to rule over their own households (1 Tim. 3:4–5; cf. Eph. 5:22ff.; 6:4; Col. 3:21). Therefore, ἄνθρωπος is used here, as on occasion elsewhere in the NT (Mt. 19:5; 1 Cor. 7:1; Eph. 5:31) and in the LXX (1 Esdras 9:40; Tobit 6:7) and other literature, of “ ‘man, adult male’ … in contrast to a woman” (BAGD s.v. 2bα; cf. 2 Tim. 3:8) rather than in its more general sense. As elsewhere in the NT the plural is used of those who bear this teaching responsibility (cf. 1 Tim. 5:17; 1 Thes. 5:12, 13; Eph. 4:11; Phil. 1:1; Acts 14:23; 20:17, 28).
Timothy is to entrust what he has heard from Paul to others marked by their ability to teach others (cf. Ellicott; BAGD s.v. ὅστις 2). Their teaching activity is future (future ἔσονται) in that it takes place after they have been entrusted with Paul’s teachings. ἱκανοί (cf. 1 Cor. 15:9; 2 Cor. 2:16; 3:5)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competent, qualified and able” (BAGD s.v. 2) with the infinitive διδάξαι, “to teach” (cf. 2 Thes. 2:15; 1 Tim. 2:12; 4:11; 6:2), denoting that which they are able to do (Burton, Syntax, §376; cf. διδακτικός** in 1 Tim. 3:2; 2 Tim. 2:24).
ἑτέρους, “others,” is used here, as often in the NT, in much the same sense as ἄλλος. It represents an indefinite number distinct from those who teach and most likely implies that they, or more probably some portion of them, will in turn carry on this process of teaching the apostolic message (cf. H. W. Beyer, TDNT II, 702). καί, “also,” puts emphasis on ἑτέρους. Plummer is correct in suggesting that this brief reference to men being taught so that they can teach others gives evidence of “the earliest traces of a theological school.” But the focus of the passage is on the absolute value and crucial importance of what the apostle taught.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LXX Septuagint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389–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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