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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h Is Thrown into the Sea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ncast lots, that we may know on whose account this evil has come upon us.” So they cast lots, and the lot fell on Jonah. Then they said to him, “Tell us on whose account this evil has come upon us. What is your occupation? And where do you come from? What is your country? And of what people are you?” And he said to them, “I am a Hebrew, and I fear othe Lord, the God of heaven, pwho made the sea and the dry land.” 10 Then the men were exceedingly afraid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that you have done!” For the men knew that hhe was fleeing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because he had told them.

11 Then they said to him, “What shall we do to you, that the sea may quiet down for us?” For the sea grew more and more tempestuous. 12 He said to them, “Pick me up and hurl me into the sea; then the sea will quiet down for you, qfor I know it is because of me that this great tempest has come upon you.” 13 Nevertheless, the men rowed hard2 to get back to dry land, but they could not, for the sea grew more and more tempestuous against them. 14 Therefore they called out to the Lord, “O Lord, let us not perish for this man’s life, and rlay not on us innocent blood, sfor you, O Lord, have done as it pleased you.” 15 So they picked up Jonah and hurled him into the sea, tand the sea ceased from its raging. 16 Then the men feared the Lord exceedingly, uand they offered a sacrifice to the Lord vand made vows.

A Great Fish Swallows Jonah

17 3 And the Lord appointed4 a great fish to swallow up Jonah. wAnd Jonah was in the belly of the fish three days and three nights.

n [Judg. 20:9]

o Rev. 11:13

p Ps. 146:6

h [See ver. 3 above]

q [Josh. 7:20]

2 Hebrew the men dug in [their oars]

r Deut. 21:8

s [Ps. 115:3]

t Ps. 65:7; Luke 8:24

u [Gen. 8:20; 31:54]

v See ch. 2:9

3 Ch 2:1 in Hebrew

4 Or had appointed

w Matt. 12:40; 16:4; [Luke 11:3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1:7–17.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의기도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1:7–17.

 

 

7-10절) 심한 폭풍으로 인하여 배안의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고자 하였다. 이에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뽑혔다. 그러자 무리가 이 재앙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요나에게 물으며 그의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느 나라이며 어느 민족에 속했는지를 물었다. 

이에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며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인데 지금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기에 폭풍이 임했음을 말하자 무리가 이를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7절의 제비는 히브리어 ‘고랄’로 몫, 제비(물건), 분깃, 운명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무작위로 나온 결과를 통해서 결정을 내리거나 하나님(신)의 뜻을 결정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작은 물체를 의미한다.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 이러한 물건을 사용하였다.(민 16;8, 수 18:6, 수 21:4)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주장하신다고 생각했다.(잠 16:33) 

잠언 16:33 (NKRV)

33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The casting of lots was a widely used method in the ancient Near East.37 The most common word used for “lot” indicates that they were either stones or pebbles38 that were painted or colored. When the stones were thrown, if two dark sides landed up the usual interpretation was no. If two light sides landed up, that meant yes. A light and a dark side meant throw again. Using this system, the sailors dealt with each individual until the color revealed the guilty person.39 This specific means of discerning the Lord’s will is found many times in Scripture. For example, the casting of lots was the means for determining the guilt of Achan (Josh 7:14–18), for distributing the land to the tribes of Israel (Josh 18:10), and for selecting Saul as king (1 Sam 10:20–22). As Prov 16:33 says, “The lot is cast into the lap, but its every decision is from the Lord.”

37 Sasson, Jonah, 108–10.

38 J. Lindblom, “Lot-Casting in the Old Testament,” Journal of Theology 12 (1962): 164–78.

39 Stuart, Hosea-Jonah, 459–60.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2.

 

이 제비뽑기의 결과로 요나가 뽑히자 배안의 사람들은 요나에게 주목한다. 그가 어느 민족이며 누구이기에, 또한 무슨 일을 하였기에 지금 이런 심한 재앙이 임하였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9절에서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이 ‘이브리’라는 표현은 

히브리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창 14:13, 출 1:16) 요나는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모두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분명히 여호와가 어떤 신인지 분명하게 고백한다. 또한 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지금 요나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고백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폭풍을 통해서 그의 걸음을 멈추신 것이다. 

At first, Jonah, who here speaks for the first time in the story, appears to ignore the first question and merely answers the last one. He replies “I am a Hebrew.” This is a term which is seldom used in the Old Testament, which prefers the expression “Israelite.” It is frequently used by foreigners, especially Egyptians and Philistines, or by Israelites in speaking to foreigners, as these sailors were.* This is the only place in the Old Testament where someone says “I am a Hebrew,” though Joseph implies it in Genesis 40:15. In the New Testament, Paul describes himself as a Hebrew in Philippians 3:5. There is a tendency among translators to render I am a Hebrew as simply “I am a Jew” (for example, lb). Such a rendering is of course technically incorrect, because the term “Jew” refers essentially to persons from the southern part of Israel, not from the northern kingdom. It is important, therefore, to reproduce some kind of transliteration of Hebrew even though this may not appear to be the more common designation of present-day Jews.

The statement I am a Hebrew may, however, require some expansion in certain languages, for example, “my race is Hebrew” or “I belong to a family of Hebrews” or “my nation is called Hebrew.”

* Compare Gesenius-Kautzsch section 2b.

lb Living Bible

 Brynmor F. Price and Eugene Albert Nida, A Translators’ Handbook on the Book of Jonah, UBS Handbook Series (Stuttgart: United Bible Societies, 1978), 61.

 

이에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 하였다. 앞서 5절에서 심한 폭풍으로 인하여 두려워했다면 이제 이 심한 폭풍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기에 더욱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속에서 요나와 무리(선원)들의 차이를 발견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았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무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려워하고 있다. 

 

Many interpreters have identified vv. 4–16 as a chiasmus, that is, the recurrence of a series of terms and themes in reverse order. In all of these analyses vv. 9–10 are viewed as the center, focus, and turning point. D. Alexander has followed and refined the analyses of Lohfink, Pesch, and Fretheim in producing the following analysis that show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various parts:46

A Yahweh hurls a wind on the sea; the storm begins; sailors fear and cry to their gods (vv. 4–5a)

B Jonah sleeps; cry to your god; we shall not perish; divine sovereignty (vv. 5b–6)

C that we may know on whose account (v. 7)

D the sailors question Jonah (v. 8)

E I fear (v. 9)

E′ the sailors fear (v. 10)

D′ the sailors question Jonah (v. 11)

C′ I know that it is on my account (v. 12)

B′ sailors strive for land; sailors cry to Yahweh; let us not perish; divine sovereignty (vv. 13–14)

A′ sailors hurl Jonah into sea; the storm ceases; sailors fear Yahweh and sacrifice (vv. 15–16)

46 Alexander, Jonah, 106–9.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4.

 

11-13절) 바다가 점점 사나워지자 무리가 너를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 지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요나는 이 큰 폭풍의 원인이 바로 자신 때문인 줄 알고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잔잔해 질 것이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요나를 던지지는 못하고 힘써서 노를 저어 배를 돌려 육지로 향하고자 하지만 바다가 점점 더 사나워져 능히 그러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 폭풍의 원인이 바로 요나의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요나도 그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힘써 노를 저어 육지로 향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12절에서 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라고 말한다. 이 던지다라는 표현은 이미 앞서 여호와께서 바다에 큰 바람을 보내실 때(4절), 선원들이 배의 물건을 바다에 던질 때(5절) 사용한 표현이다. 이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차례가 된 것이다. 요나는 이 큰 폭풍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거나 하나님께 뜻을 돌이켜 순종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아직까지 그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느니 그저 죽는 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자신으로 인해서 애꿎게 죽게될 사람들을 위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지 이방인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The unnatural ferocity of the storm and the casting of the lot only confirmed what Jonah already knew. So now he resigned himself to his “fate.” He did not exhibit repentance for fleeing from the Lord but merely resigned himself to the only seeming solution. In v. 6 the captain had already asked Jonah to pray. Jonah did not seem so inclined but gave the sailors instruction on what to do so that they might possibly be saved from the ferocious tempest. It is interesting that Jonah did not offer to jump overboard on his own. Perhaps he was too frightened, or perhaps at this point he was merely asking for them to be the instrument of God’s punishment.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5–236.

 

14-16절) 이에 할수 없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요나로 인하여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말 것을 여호와께 청하면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뛰노는 것을 그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다. 

 

앞서 선원들은 5절에서 각자 자신들의 신들에게 기도했지만 이제는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요나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선원들이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주 여호와께서 주의 뜻대로 행하시는 주권적인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그리고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고 그를 바다에 던지게 된다. 선원들의 막연한 두려움(5절)은 이제 실체적인 두려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고(16절) 이제 나아가 그 두려우신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가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선원들에 의해 사나운 바다에 요나가 던져졌을 때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이 물고기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던 물고기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요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미리 예비하신 물고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으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이 예비하다라는 히브리어, ‘마나’가 피엘형으로 사용될 때 ‘예정하다, 임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표현은 이후에 4장 6-8절에서 세 번 더 언급된다. 큰 도시(1:2), 큰 바람(1:4), 큰 두려움(1:10, 16)처럼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큰 물고기’였다.  또한 본문에서 말하는 물고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향유 고래와 같이 거대한 물고기라고 말하지만 이 표현은 수생 동물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로 이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인지를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요나를 죽음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요나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냈다. 이는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시간을 상징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호 6:2)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시간을 언급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마 12:40)

마태복음 12:40 (NKRV)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1:17 appointed. This is the first of four uses of “appoint” that underscore God’s sovereign control over creation (cf. 4:6–8). Fish (Hb. dag) is not limited to what is called “fish” today (generally cold-blooded vertebrate sea creatures with fins and gills) but is a general word for an aquatic beast, which cannot be identified further. However, a large whale such as a sperm whale could easily swallow a man whol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Though this may be a symbolic expression for a time of dying and rising (cf. Hos. 6:2), it more likely describes the actual number of days, or parts of three days, according to accepted reckoning of days at that time (cf. 1 Sam. 30:12; 2 Kings 20:5, 8). In either case it has associations with return from death or near-death—which perhaps is why Jesus likened the time between his own death and resurrection to Jonah’s time in the fish (Matt. 12:4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688.

 

1:17 This verse, which begins chap. 2 in Hebrew, is perhaps the most famous verse in the Book of Jonah. Rimmer ironically says: “This is the first of 2 verses which ‘ruin’ the narrative. If this verse and 2:10 were removed, then the prophecy would be plausible for modern readers.”1 It probably is true but tragic that many point to this verse as their “reason” for not believing God’s Word. This miracle is singled out, even though it is simply one of several in the book (see p. 215 in the Introduction).

The text says that “the Lord provided” a great fish to swallow Jonah. The word “provided” (from mānâ) has been the subject of varying translations. In the KJV it is rendered “prepared.” This gives the perception that God created a special creature for the specific purpose of rescuing Jonah and providing a place for his training in humility and submission. But an accurate translation would be “ordained” or “appointed.” The word is used four times in the Book of Jonah and always points to the Lord’s power to accomplish his will. Here it shows his sovereignty over the creatures of the sea; in 4:6 it shows his power over plants; in 4:7 it shows his power over crawling creatures; and in 4:8 it shows his power over the wind. While God indeed may have prepared a special “fish” for Jonah, the text only indicates that God summoned the fish, common or special, to be at that place at the exact moment of need.

Conservative scholars throughout the years have spent a great deal of energy and time describing types of large fish that might have been capable of swallowing a human.2 But all we know for sure is that it was a “large fish.” The word translated “fish,” dag, is the general Hebrew word for any aquatic creature (cf. Gen 9:2; Num 11:22; 1 Kgs 4:33; Ps 8:8). The LXX uses kētos, which means a “huge sea-fish.”3 The KJV causes some misunderstanding, for in Matt 12:40, which quotes Jonah 1:17 (from the LXX), it translates the word as “whale.”

Trying to marshal evidence to confirm this Scripture may in fact result in the denigration of the miracle. Searching for historical incidents when people and large animals were swallowed and later recovered from sea creatures4 shows a posture of defensiveness that is unnecessary, counterproductive, and violates the nature of the biblical account. As D. Stuart says, “A miracle is a divine act beyond human replication or explanation.”5 On the other hand, it is hard to argue that the author invented the tale without presupposing the impossibility of the miraculous, which would be irreconcilable with Hebrew tradition. Also, as D. Alexander and others have observed: “The author’s portrayal of this most peculiar event is very low key; it has certainly not been included in order to heighten the dramatic quality of the narrative. This being so, why should the author have invented it, if it did not really happen?”6

Why did God use this specific means of returning Jonah to his appropriate place of service? For some the purpose of the fish was solely allegorical. Glaze states: “The literary apparatus rich in metaphors and poetic imagery indicates the broader purpose of the author, and the allusions are evident to the intended audience. The relationship to one of Jeremiah’s prophecies was clear: Israel, swallowed by Babylon, would be delivered.”7 In other words, the story had to present elements commensurate with the intended teaching lesson.

More fitting of the context is the view that the fish provided time for instruction from the Lord. R. T. Kendall says it well: “The belly of the fish is not a happy place to live, but it is a good place to learn.”8 Jonah was well aware of the numerous Old Testament reflections of chaos, pictured by the sea monster Leviathan (Pss 74:13–14; 104:26). During Jonah’s time in the fish he may have reflected on God’s dominance over every force in the world. Jonah had to learn that God’s purpose was serious and that his concerns as well as his power went far beyond the shores of Palestine.

Jonah was in the fish “three days and three nights,” although he would have realized this only after his removal from the fish. This phrase may be intended as an approximation rather than as a precise measure of seventy-two hours;9 however, the point of the fuller expression rather than simply “three days” would seem to be that Jonah was confined for “three full days.”10 Some think the expression reflects the ancient belief that death was permanent only after a body showed no signs of life for three days (cf. John 11:6, 14). If this interpretation is applied to the Jonah text, it apparently would mean that the fish was not primarily an agent of Jonah’s deliverance but an additional danger to his life.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phrase would point to his precarious state of existence, hovering between life and death.11 This interpretation, however, appears out of step with Jonah’s prayer of thanksgiving from inside the fish (2:2–9). Nevertheless, his thanksgiving probably was not solely for deliverance from drowning but was based on his anticipation of deliverance from the fish as well. Therefore the time frame perhaps should suggest that God’s power and grace retrieved Jonah as if from the dead (cf. 2:6), and the great fish was the vehicle God used.

A similar interpretation is that the expression alludes to a common motif in the ancient Near East of a three-day journey to the underworld and back. With that notion in mind, the readers of Jonah would have seen the fish as representing God’s rescue from the underworld, that is, death.12 Numerous texts in the Old Testament refer to three days as the period of a journey. For example, Moses asked that Pharaoh permit the Israelites to leave Egypt to go on a three-day journey into the wilderness (Exod 3:18; cf. also Gen 22:4; Num 10:33; Josh 9:17; 1 Sam 30:1; 2 Sam 24; 2 Kgs 2:17). Jonah’s preaching tour of Nineveh also took three days (3:3). Jonah later may have pondered regretfully upon his three days in the fish made necessary because he tried to avoid three days of walking and preaching in Nineveh.

Although the phras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ay have had a variety of connotations both from other Old Testament passages and from extrabiblical writings, no compelling reason exists to disbelieve the literal span of time indicated. In fact, none of the Old Testament allusions of a similar nature are necessarily figurative. The major point is that God, through the fish, could sustain this pouting prophet during “unbelievable” circumstances and return him to the place where he could renew his commission to serve.

1 H. Rimmer,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8th ed. (Berne, Ind.: The Berne Witness Company, 1939), 169.

2 Ibid., 190–91. See also A. J. Wilson,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 and Its Modern Confirmations,” in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25 (1927): 631–32. He discusses at length the physical characteristics of a number of sea creatures capable of swallowing a man.

LXX The Septuagint

3 T. Muraoka,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Septuagint (Twelve Prophets) (Louvain: Peeters, 1993), 134.

LXX The Septuagint

4 Many historical instances are cited by Wilson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 635–37). The most fascinating concerns James Bartley, who supposedly was swallowed by a sperm whale in 1891 and was recovered live but “raving.” Rimmer tells of other instances. One man was rescued alive and unhurt from the belly of a rhinodon shark but was “devoid of hair, and patches of a yellowish-brown color covered his entire skin” (Rimmer, Harmony of Science, 195–96). See also C. F. Keil and F. Delitzsch, “Jonah,” COT (Grand Rapids: Eerdmans, 1978), 10:398. Such stories are doubted by E. B. Davis, who diligently attempted to unearth the facts of the “Bartley” story. He concluded that the story is “a whale of a tale” (“A Whale of a Tale: Fundamentalist Fish Stories,” in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43, ed. J. W. Hass, Jr. [Ipswich, Mass.: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1991], 224–37).

5 D. Stuart, Hosea-Jonah, WBC (Waco: Word, 1987), 474.

6 T. D. Alexander, “Jonah,” TOTC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88), 111–12.

7 A. J. Glaze, Jr., “Jonah,” BBC 7 (Nashville: Broadman, 1972), 166.

8 R. T. Kendall, Jonah: An Exposi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78), 101; Keil and Delitzsch, “Jonah,” COT, 10:398.

9 Ellison, “Jonah,” 375.

10 Stuart, Hosea-Jonah, 474.

11 G. M. Landes,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otif in Jonah 2:1,” JBL 86 (1967): 446–50; id., “The Kerygma of the Book of Jonah,” Int 21 (1967): 11–12. While D. Stuart (Hosea-Jonah, 475) accepts this argument that “the Sheol journey motif is probably behind the author’s choice of words as a purposeful echo of the reference to the Underworld in the Psalm (v 7[6]),” Alexander considers that “there is insufficient evidence within the Old Testament itself to demonstrate that this is how a Hebrew reader would have interpreted the phrase” (“Jonah,” 112).

12 Landes,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otif in Jonah 2:1,” 448. In the Sumerian myth “The Descent of Inanna to the Nether World,” Inanna instructs her divine minister, Ninshubur, to set up an elaborate lament for her after she has departed for the underworld. Then follows the text of the lament, the account of Inanna’s departure and reception into the lower realm, culminating in her death at the hands of the goddess Ereshkigal. At this point the text then reads: “After three days (and) three nights had passed, her minister Ninshubur, her minister of favorable words, her knight of true words, sets up a lament for her by the ruins” (Part II, lines 169–73).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are intended to cover the time of travel to the realm of the dead. It would appear this is a most promising clue for understanding the full import of the word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Jonah 1:17. They are used to indicate the period of time it took the fish to bring Jonah back from the deep, understood more explicitly in the following psalm as the netherworld (cf. 2:6). Thus, just as Inanna required three days and three nights to complete her descent into the underworld, so also the fish is assigned the same time span to return Jonah from “Sheol” to the dry land.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9–242.

 

마소라 사본에서는 1장 17절이 2장 1절로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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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Now Joseph had been brought down to Egypt, and lPotiphar, an officer of Pharaoh, the captain of the guard, an Egyptian, mhad bought him from the nIshmaelites who had brought him down there. o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became a successful man, and he was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him and that the Lord pcaused all that he did to succeed in his hands. So Joseph qfound favor in his sight and attended him, and he made him overseer of his house rand put him in charge of all that he had. From the time that he made him overseer in his house and over all that he had, the Lord blessed the Egyptian’s house sfor Joseph’s sake; the blessing of the Lord was on all that he had, in house and field. So he left all that he had in Joseph’s charge, and because of him he had no concern about anything but the food he ate.

Now Joseph was thandsome in form and appearance. And after a time his master’s wife cast her eyes on Joseph and said, “Lie with me.” But he refused and said to his master’s wife, “Behold, because of me my master has no concern about anything in the house, and uhe has put everything that he has in my charge. He is not greater in this house than I am, nor has he kept back anything from me except you, because you are his wife. How then can I do this great wickedness and vsin against God?” 10 And as she spoke to Joseph day after day, he wwould not listen to her, to lie beside her or to be with her.

11 But one day, when he went into the house to do his work and none of the men of the house was there in the house, 12 xshe caught him by his garment, saying, “Lie with me.” But he left his garment in her hand and fled and got out of the house. 13 And as soon as she saw that he had left his garment in her hand and had fled out of the house, 14 she called to the men of her household and said to them, “See, he has brought among us a Hebrew to laugh at us. He came in to me to lie with me, and I cried out with a loud voice. 15 And as soon as he heard that I lifted up my voice and cried out, he left his garment beside me and fled and got out of the house.” 16 Then she laid up his garment by her until his master came home, 17 and she told him the same story, saying, “The Hebrew servant, whom you have brought among us, came in to me to laugh at me. 18 But as soon as I lifted up my voice and cried, he left his garment beside me and fled out of the house.”

19 As soon as his master heard the words that his wife spoke to him, “This is the way your servant treated me,” his anger was kindled. 20 And Joseph’s master took him and yput him into the zprison, the place where the king’s prisoners were confined, and he was there in prison. 21 But athe Lord was with Joseph and showed him steadfast love band gave him favor in the sight of the keeper of the prison. 22 And the keeper of the prison cput Joseph in charge of all the prisoners who were in the prison. Whatever was done there, he was the one who did it. 23 The keeper of the prison paid no attention to anything that was in Joseph’s charge, because dthe Lord was with him. And whatever he did, the Lord made it succeed.

l ch. 37:36

m ch. 37:28

n ch. 37:25

o ver. 21; Acts 7:9; [ch. 21:22; 26:24, 28; 28:15; 1 Sam. 16:18; 18:14, 28]

p 2 Chr. 26:5; Ps. 1:3

q ver. 21; ch. 19:19; 33:10

r ver. 8

s [ch. 30:27]

t [ch. 29:17; 1 Sam. 16:12]

u ver. 4

v 2 Sam. 12:13; Ps. 51:4

w [Prov. 1:10]

x [Prov. 7:13, 18]

y Ps. 105:18

z ch. 40:3, 5; [ch. 40:15; 41:14]

a ver. 2; Acts 7:9, 10

b Ex. 3:21; 11:3; 12:36

c ch. 40:4

d ver. 2, 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9:1–23.

 

39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9:1–23.

 

 

39장 1절의 이야기는 37:36절과 연결되는 이야기로 다시금 요셉을 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호출하고 있다. 형들의 손에 죽을뻔한 상황에서 요셉은 이스라멜 상인들의 손에 팔려서 바로의 신하인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된다. 

보디발이란 이름은 이집트어로 ‘레(태양신)가 주신 자’라는 의미로 추정되며 요셉의 장인 이름 ‘보디베라’(41:45)와 비슷하다. 

 

2-6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 그의 주인 보디발도 볼 수 있었다 이에 보디발이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서 자기의 소유를 요셉의 손에 위탁하였다. 이에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메 그의 집과 밭에 여호와의 복이 임하였다. 주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 팔려가서 열심히 일했다. 주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39장 본문 전체를 통해서 ‘여호와’라는 표현이 7번 등장하는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는 문장에서만 4번 사용된다.(2, 3, 21, 23절)

요셉이 형통케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다. 이 임마누엘의 약속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직접 언약을 베푸시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는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오직 꿈을 통해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셉을 애굽으로 이끄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그를 형통케 하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본문 5절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서 그렇게 형통케 된다라는 사실을 애굽 사람, 보디발도 분명히 알았고 이에 그에게 자신의 집의 모든 것을 맡긴 것이다. 옛적에 라반이 야곱으로 인해 많은 축복을 받았던 것이 연상된다. 보디발은 자신의 집안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4, 6, 8절) 본문은 보디발이 자기가 먿는 음식 외에는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기가 먹는 음식은 문자적으로 먹을거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사적인 것, 예를 들어 보디발의 아내를 비롯해 그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6절 하반절은 요셉의 용모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는 요셉의 어머니 라헬을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다.(29:17) 

창세기 29:17 (NKRV)

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이 짧은 요셉의 용모에 대한 묘사는 이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왜 그를 유혹하였는지를 말해준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던 요셉,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질투가 심했고 결국 노예로 팔렸다. 이제 집주인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 안주인의 총애도 받게 된다. 이로 인해서 그는 또다른 어려움을 겪게 된다. 

 

2  Three uses of waye punctuate this verse: Yahweh was, he (Joseph) was, he (Joseph) was.20 The first of these three occurrences sounds a key theme that explains, or encapsulates the theology of, the Joseph story: Yahweh was with him. The phrase recalls the promise of Yahweh’s presence with the patriarchs (26:3; 28:15; 31:3, all with the preposition ʿim, and 26:24, with the preposition ʾeṯ). V. 2a, however, is not a promise, but a fact (and comparable to third-person statements such as are found in 21:22; 26:28). Outside vv. 21 and 23 (and excluding Jacob’s word in 49:18), this is the only time the name “Yahweh” occurs in the Joseph narrative. Of the seven uses of the tetragrammaton in ch. 39 (vv. 2, 3 [twice], 5 [twice], 21, 23), four of them occur in the phrase “Yahweh was with Joseph” (vv. 2, 3, 21, 23). The presence of Yahweh uniquely in ch. 39 is not to be explained by appeal to the presence of variant literary traditions.21 Rather, the name Yahweh occurs here at what is the most uncertain moment in the life of Joseph. His future hangs in the balance. He is alone in Egypt, separated from family, vulnerable, with a cloud over his future. Or is he alone? Only the narrator, never any of the characters, uses the name Yahweh. Thus, it is the narrator who tells us, no less than five times, that in a very precarious situation, Joseph is not really alone. Yahweh is with him.22

There is no doubt about Yahweh’s presence with Joseph from this point on in the narrative. Was that presence with Joseph when his brothers were disputing how to dispose of him? Was that presence with Joseph when he was mired in the pit? Was that presence with him when he joined the Ishmaelites as an involuntary passenger to Egypt? We, the readers, know it was, although the phrase is not there. Joseph probably needed a while longer to realize that God was with him.

20 waye appears more times in this chapter than in the rest of the entire Joseph story—15 times: vv. 2 (3 times), 5 (2 times), 6, 7, 10, 11, 13, 15, 18, 19, 20, 21. Longacre (Joseph, p. 32) calls attention to “the elaborate paragraph setting in v. 2 where three clauses build on the verb hāyâ, ‘to be’ (a descriptive rather than an event verb).”

21 ”The alleged reasons for the curious employment of divine names in the Joseph story advanced by apologists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are weak in the extreme” (Redford, Study of the Biblical Story of Joseph, p. 130 n. 2).

22 See Longacre, Joseph, p. 45. Westermann (Genesis, 3:62) refers to 39:2–6, 21–23 as “the theological introit to the Joseph story as a whole.”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59.

 

5  Yahweh prospers (ṣālaḥ) Joseph (vv. 2–3), but he blesses (bāraḵ) Potiphar and his household because of his good treatment of Joseph. This verse must be read as fulfillment of 12:3a,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Just as Yahweh blessed Laban because of Jacob (30:27, 30), he now blesses Potiphar because of Joseph.27 Perhaps it is more accurate to say he blessed Laban and Potiphar through the presence of Jacob and Joseph, respectively.

27 See H. W. Wolff, in W. Brueggemann and Wolff, The Vitality of Old Testament Traditions, tr. W. A. Benware, et al., 2nd ed. (Atlanta: John Knox, 1982), pp. 59–60.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0–461.

 

7-10절) 그 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동침하기를 청했으나 요셉이 거절하였다. 이는 보디발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모두 자신에게 맡겼고, 주인 외에는 자신보다 큰 이가 없으며 아무것도 금한 것이 없지만 금한 것은 당신(보디발의 아내) 뿐이니 이는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이것이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하나님앞에 죄를 짓는 일임을 알았다. 이에 여인이 날마나 요셉을 유혹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도 않았고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단 두마디만 한다. ‘나와 동침하자’(Lie with me), 하지만 요셉은 이 직접적인 요구에 대해 거절의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길게 설명한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성관계를 맺자는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는 르우벤(35:22)과 유다의 행위(38:15-18)과 명백하게 대조를 이룬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관계를 맺었고,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요셉은 분명하게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자신의 주인, 보디발과 하나님께 동시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는 매우 올바른 판단이었다. 

이 시대는 도리어 반대로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탐하거나, 위계를 이용해 성적인 착취를 하는 것이 마치 힘이고 성공인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기에 이러한 유혹 가운데서 흔들림없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요셉은 여인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본문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여인은 매우 끈질기게 요셉에게 접근하여 사람들이 없을 때마다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함께 하기를 청했다. 이에 요셉은 가능한대로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죄는 싹부터 자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며, 먼발치에서라도 죄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도망치는 것이 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요셉은 이처럼 죄에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했다. 

 

10  The first few words of v. 10 indicate that Potiphar’s wife spoke to Joseph day after day,16 even though, as already mentioned, her words to him in the narrative are limited to just two in Hebrew (“lie with-me”), repeated twice (vv. 7, 12). By contrast, Joseph’s protestations are elaborate (vv. 8, 9). His lengthy statement of refusal to cooperate is sandwiched between her twice-repeated command. But this command is clearly only a tiny part of her larger, lengthier conversation with Joseph.

The narrator uses to lie beside her in place of Potiphar’s wife’s “Lie with me.” Joseph will give a wide berth to temptation. Not only will he not sleep with her, he will not even lie by her side, if possible.17 As noted above, or with her should not be deleted as an editorial gloss. It confirms just how far Joseph is prepared to go to avoid being caught in a morally compromising position. For if Joseph “could not be stormed [v. 7] he might be coaxed.”18

16 Note that the Testament of Joseph (part of the Testament of the Twelve Patriarchs, originally a Jewish composition as early as the 1st or 2nd century b.c.) makes much of Joseph’s repeated refusal, in spite of continued badgering from the woman that included everything from threatened suicide to exposure of her body (T. Joseph 2:1–9:5; translation by H. C. Kee in J. H. Charlesworth, ed.,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2 vols. [Garden City, NY: Doubleday, 1983–85], 1:819–20). Jub. 39:5–8 has Joseph claiming that Potiphar’s wife “begged him for one year.”

17 The LXX always renders šāḵaḇ ʾēṯ/ʿim with koimán meta, but here in v. 10 it renders šāḵaḇ ʿēṣel with katheúdein (met’ autḗs), a verb that never has sexual connotations. Cf. H. M. Orlinsky, “The Hebrew Root škb,” JBL 63 (1944) 34–36.

18 Kidner, Genesis, p. 190. Orlinsky (JBL 63 [1944] 34 n. 19) provides textual reasons for rejecting the phrase as a post-LXX gloss.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4.

 

11-18절) 그러할 때에 요셉이 업무를 보러 집에 들어갔었는데 그 집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에 그 여인이 요셉의 옷을 잡고 끌며 동침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자 보디발의 아내가 집 사람을 불러서 주인이 데려온 히브리 사람이 우리를 희롱하였다. 요셉이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 들어왔으나 내가 소리지르자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이후에 자신의 남편 보디발이 돌아오자 요셉의 옷을 보여주면서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도 들어왔는데 자신이 소리를 지르자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음녀의 유혹은 벗어날 수 없는 덫과 같다. 여인은 지금 요셉의 옷을 붙잡고 그를 잠자리로 끌어들이고 있다. 성경에서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거나 겁탈하는 경우들은 많이 있지만 이처럼 여자가 힘으로 남자를 겁탈하려고 한 경우는 유일하다. 빠져나가기 힘든 위기 상황에서 요셉은 자기의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쳐 나온다. 앞서 37장에서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겨서 그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증거로 야곱에게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요셉의 옷은 그의 유죄의 증거로 사용된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을 뿌리치고 도망간 요셉에 대해서 수치심과 분노가 일었을 것이다. 그를 유혹하던 마음이 이제 그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서 그의 인생을 망치려는 술수를 쓰게 된다. 여인은 요셉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한다. 

그녀는 보디발에게 세가지 사항을 통해 요셉을 올무에 빠드리고 있다. 첫번째 요셉을 자기 집에 들인 사람이 보디발임을 이야기함으로 책임을 남편에게 돌리고 있다.(14, 17) 두번째 요셉이 애굽인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인종적인 적대감을 강화시킨다.(14, 17) 세번째 요셉의 행위가 단순히 자신을 욕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보디발의 집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14, 17) 더 나아가 남편에게 책임과 부담을 주기 위해서 19절에서는 ‘당신의 종’이라고 말한다.  

옛적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후 하나님께 말한 것과 비슷하다.

창세기 3:12 (NKRV)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12절. 옷에 대한 표현 Appearing about two hundred times, beḡeḏ is the most widely used term for a garment in the OT.21 It appears that it could refer both to an outer garment (2 K. 7:15) and an inner garment (Ezek. 26:16). According to the end of v. 12 Joseph left all of his beḡeḏ with Potiphar’s wife, which means he left behind either his outer garment or one of his undergarments. V. 12 states that Potiphar’s wife grabbed Joseph “by his garment” (beḇiḡḏô). One finds the same form of this word in Exod. 21:8 (beḇiḡḏô ḇāh), where the expression refers to man who broke faith with his female slave and tried to sell her because she did not please him. By using beḡeḏ at this point, the narrator may be implying something about Joseph’s own emotional involvement in this story. He is on the verge of acting faithlessly to his master. Also,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homonymous Hebrew verb bāḡaḏ is sometimes used for marital unfaithfulness (Jer. 3:7–8, 20; Mal. 2:14).22

21 See J. M. Myers, “Dress and Ornaments,” IDB, 1:869–71; L. G. Running, “Garments,” ISBE, 2:401–7.

22 Kugel, In Potiphar’s House, pp. 96–98; Sarna, Genesis, p. 274.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5.

 

- 14절. 희롱하다는 표현  Once again we encounter the verb ṣāḥaq (v. 14), made famous in the Isaac stories (17:17; 18:12, 15 [twice]; 21:6, 9; 26:8), and occurring once in the Lot stories (19:14). According to the text, Potiphar’s wife claims that her husband brought Joseph into their household to sport in our presence (leṣaḥeq bānû, v. 14), and later to sport in my presence (leṣaḥeq bî, v. 17). What is she suggesting? That Potiphar brought Joseph into the household “to make sport” of them (NIV, NAB)? “to insult‘’ them (RSV, JB)? “to mock” them (AV; cf. NEB)? “to make love” to them (Speiser)?

Speiser’s interpretation is dubious simply because sexual abuse is covered by bāʾ ʾēlay liškaḇ ʿimmî (“he came to lie with me,” v. 14) and by bāʾ ʾēlay (“he came to me,” v. 17), not by leṣaḥeq bānû/bî. The “mock” and “insult” translations suffer from a lack of evidence that ṣāḥaq, in either the Qal or the Piel stem, has such a meaning. Of all the instances where ṣāḥaq occurs, the closest in form to the references here is 19:14—all three use ṣāḥaq in the Piel, followed by the preposition be. I suggested for 19:14 “clowning”—“horsing around,” to use a colloquialism. It seems best to use an equivalent in 39:14, 17.10 Potiphar’s wife claims that what Joseph had in mind by ṣāḥaq was considerably different than what Potiphar had in mind by ṣāḥaq. Joseph was introduced to Potiphar’s family to sport with them, to play games with them.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AB The New American Bible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JB Jerusalem Bible

AV Authorized (King James)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10 See Sasson, “Worship of the Golden Calf,” p. 155, who notes that Speiser’s translation “to make love to us” “reduces the sarcasm to a mass orgy.”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68.

 

19-23절) 보디발이 자신의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심히 노하여 그를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호아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인자(헤세드)를 더하심으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들을 모두 요셉의 손에 맡기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않았다. 

 

요셉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노예로서 그에게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 또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예가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다면 이는 가차없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리고 보디발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하지만 보디발은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둔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아내의 모함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다. 아마도 일반 잡범들을 가두는 곳이 아니라 정치범에 해당되는 이들이 갇혀있던 곳으로 요셉은 이곳에서 제국의 뒷 이야기들을 듣고 배울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여전히 이곳에서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이 임하자 간수장은 요셉에게 은혜를 베푼다. 간수장 또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맡긴 것은 살펴보지 않을 정도였다. 

 

21–23  Joseph moves from one confinement (a hole in the ground, ch. 37) to another confinement (a jail). Within ch. 39 itself he moves from one house (Potiphar’s) to another house (a round house, bêṯ hassōhar).11

In vv. 19–23 a number of items stand out. One is the threefold use of nāṯan with three different subjects: (1) Potiphar placed (wayyittenēhû, v. 20) Joseph in jail; (2) but Yahweh disposed (wayyittēn, v. 21) the chief jailer in his favor; (3) and the jailer placed (wayyittēn, v. 22) the prisoners in Joseph’s charge. Second, these verses contrast the chief jailer’s eyes (v. 21) with the woman’s eyes (v. 7).12 Both the woman and the jailer looked at Joseph and liked what they saw: she saw a male figure to satisfy her sexual lust; he saw a reliable, model prisoner who could be trusted with responsibilities. Third, these verses establish a relationship between the chief jailer and Joseph that resembles the relationship that formerly existed between Joseph and Potiphar. This trusting relationship is indicated by phrases like The chief jailer placed in Joseph’s hands … (v. 22), and the chief jailer did not oversee anything that was in his hands (v. 23). These phrases recall Potiphar’s willingness to relinquish control to Joseph (v. 6). Potiphar “took a liking to Joseph” (lit., “Joseph found grace in his eyes,” v. 4). Yahweh disposed the chief jailer in his favor (lit., “he gave him grace in the eyes of the chief jailer,” v. 22). Fifth, Yahweh was a constant presence with Joseph—before he was accused (v. 2), and after he was jailed (v. 23). The result of that presence was that Yahweh brought succcess or prospered (maṣlîaḥ) every undertaking of Joseph (vv. 3, 23).

11 The possible Egyptian background to this unique Hebrew phrase (only in Gen. 39:20–23 and 40:3, 5) is explored by Vergote, Joseph en Égypte, pp. 25–28. Redford (Study of the Biblical Story of Joseph, pp. 47–48) finds wanting all attempts connecting sōhar with a Vorlage in Egyptian.

12 See n. 7 above, and 39: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71–472.

 

우리는 본문속에서 지속적으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형통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형통이 요셉의 소원, 요구와 완전히 일치하였는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그는 애굽의 노예로 잡혀 왔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수의 신분, 강간미수범이 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셉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좀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직 요셉에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요셉은 그가 상상하지 못한 지위에서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요셉이 해야할 일은 주어진 순간, 역할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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