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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일곱번째 만남. 형제 사랑을 살아내는 공동체

 

1.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공동체

생각해볼 질문 : ‘기독교인이 되면 꼭 교회를 다녀야 해?’라거나 ‘교회를 다니더라도 혼자 좀 조용히 다니면 안돼?’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된 나

에베소서 2:4–7 (NKRV)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의 주제는 ‘우리’이다. 우리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서, 지금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10 (NKRV)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10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이 작품이라는 표현, ‘포이에마’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우리가 함께 어우러져서 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작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의미

⓵ 하나님의 가족

에베소서 2:19 (NKRV)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본문의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표현이 바로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외인이였고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우애하고 서로 아끼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며 사랑하고 우애하고 서로 아끼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⓶ 그리스도의 몸

에베소서 2:16 (NKRV)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서로 넘을 수 없는 막힌 담을 그분이 허심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몸된 우리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들입니다. 몸과 고깃덩어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구성 성분은 같습니다. 하지만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지만 고깃덩어리는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리되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⓷ 성령의 전

에베소서 2:21–22 (NKRV)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 공사를 하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려야 합니다. 여러 구성 요소들이 순서에 맞게 연결될 때 아름다운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에서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족이지만 우리 안에 위선과 부족함이 존재합니다. 더 사랑이 넘치고 안전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아직 어리고 약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전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기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성령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데, 많은 교회나 공동체의 모습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교회안의 어떤 의견 차이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최근 교회는 집단 감염의 온상, 목회자의 성적 타락, 재정의 잘못된 집행등으로 세상의 근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갈등과 아픔이 두려워서 교회를 너무 가까이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지불하셨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인 교회를 깨뜨리려는 여러 시도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려는 이들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실제 공동체

첫번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두번째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족이 되었다는, 한 몸이 되었다는, 함께 지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를 그저 건물로 인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 드리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나안 성도들은 가시적인 교회 무용론을 펼칩니다. 우주적인 교회에 속해 있기에 지역 교회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들은 가시적인 지역 교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그저 건물이나 예배드리는 곳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나님의 꿈을 꾸며 자라가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공동체 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이땅의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인간적인 지위와 계산, 개인의 취향이나 혈연이나 지연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분모, 하나님 아버지, 그분을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2) 힘써 지키라

이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됨입니다. 

에베소서 4:3 (NKRV)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경은 우리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가 되자’가 아니라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면만을 바라볼 때 공동체는 상처받고 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다른 면을 다양성으로 바라보게 될 때 이 다름은 축복이 됩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꼼꼼한 사람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사람도 필요합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도 필요한 반면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이 다름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가 되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다름이 어우러지게 됩니다. 조율되지 않은, 튜닝되지 않은 피아노나 기타를 쳐보거나 그 연주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 피아노를 조율할 때 중간의 A음에 맞추어서 튜닝을 합니다. 그렇게 잘 조율된 악기의 연주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서로 다른 음들이 화음에 맞춰서 어우러질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의 목소리, 욕망을 조율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풍성한 삶의 기초’에는 계속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기초로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알아가며 사랑하는 특별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제 나를 부인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공동체적으로 하나되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 생각해볼 질문 : 우리에게는 특별히 사랑하기가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 수 있을 까요? 

그리스도의 다스림안에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1) 사랑은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다. 

요한1서 3:14–16 (NKRV)

14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본문에서 말하는대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습니다. 옮겨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옮겨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구원받은 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구원이라는 추상적인 진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확증된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이며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에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존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먼지만도 못한, 바이러스보다 못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먼지끼리, 바이러스끼리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2) 나뉠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요한1서 4:19–21 (NKRV)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입증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이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4.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성경은 이 사랑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전문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데에 탁월성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서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고 가르치지만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을 세상 문화에서 배웁니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어그러진 사랑을 보면서 사랑을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19, 23-24절을 통해서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1서 3:16–19, 23-24 (NKRV)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3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1) 희생하는 사랑(16절) 

첫번째는 목숨을 버리는 사랑, 즉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기 것을 허비합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느낌이 오는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자기희생이 빠져버린 그런 느낌은 단순한 에로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폭력이나 배우자의 외도를 참는 것이 희생이 아닙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서 더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2) 진실한 사랑(18절) 

두번째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 진실하다는 것은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다른 숨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또한 자신의 관심과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숨김없이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 투명성은 아닙니다. 이 투명성에는 반드시 성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겉과 속이 다를 필요가 없는 성숙함이 있을 때 진정으로 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교인들이 모두 그 말의 진위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느라고 분주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목사의 뜻을 분별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곤란합니다. 사랑은 진실되고 투명해야 합니다. 

 

3) 구체적인 사랑(17-18절) 

세번째는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공동체 안의 형제의 문제를 보고 구체적으로 돕지 않고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성을 띠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듣고 기도해줄께라고 이야기 했다면 진짜 기도해야 합니다. 힘들게 지내는 분을 보면서 ‘식사 잘 하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 한 번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만 하는 것이야 말로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만나서 함께 밥 한 끼 함께 하면 됩니다. 만나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안수현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기독 의사로 33살의 나이에 유행성출혈열로 사망했습니다. 이 의사는 자신이 수입의 1/3을 환자들이나 자신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이나 음반, 설교 테이프등을 구입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이 안수현 의사의 장례식에 3000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우리들도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을 표현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중심이 있는 사랑(23-24절) 

네번째는 중심이 있는 사랑입니다. 2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 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측은지심에서 출발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난 다음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사랑하는 것 위선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그것을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투명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투명하셨으며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랑이었습니다. 중심이 분명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을 본받아 형제 사랑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5) 사랑을 훈련하고 배우라

이 사랑은 느낌을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결단으로 시작하고, 인내로 유지하며, 지혜로 성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바른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아니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잘못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정에서 배운 사랑을 교회와 사회에서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많은 가정에서 이런 사랑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왜곡된 사랑, 때로는열등감과 분노를 가르칩니다. 가정에서 이러한 사랑을 못 배웠다면 교회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배운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졌습니다. 아주 성숙한 사람들만이 모인 것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사람들, 절대로 예수 아니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서로 삐죽삐죽하고 모난 가지들이 성령의 띠로 하나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다가 지치거나, 사랑하다가 실망하거나, 사랑하다가 상처받거나, 사랑하다가 시험들었다고 공동체를 떠나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해야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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