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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w may bthe God of peace himself csanctify you completely, and may your dwhole e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f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24 gHe who calls you is faithful; hhe will surely do it.
b See Rom. 15:33
c Ex. 31:13; John 17:17
d 2 Pet. 3:14; Jude 1
e Luke 1:46, 47; Heb. 4:12; [1 Cor. 14:14]
f See ch. 2:19
g See 1 Cor. 1:9
h [Phil. 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23–24.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1) 또는 목숨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23–24.
 
23-24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계속되는 바울의 중보기도이다. 
앞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전반부를 마치면서 첫번째 중보기도(3:9-13)을 드렸다. 이제 본 서신의 후반부(4:1-5:24)을 마치면서 다시금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23절) 이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은 ‘평강의 하나님’이며 바울은 두가지를 간구하고 있다. 첫번째는 ‘거룩하게 하시고’, 두번째는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이다. 
‘평강’이라는 의미인 ‘에이레네’는 혼돈, 염려, 두려움, 무질서, 싸움이 없는 완전한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여러 성품중 매우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평강의 상태의 원형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완전한 교제를 나누었을 때 가능했지만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이 평강한 상태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없이는 영혼 깊은 곳에 두려움과 불안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질 수 있는, 채워져야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필연적으로 평강의 부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막힌 담을 허심으로 평화, 평강을 다시금 이루셨다.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본문에 거룩하게 하시고는 ‘하기아사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의 원형은 ‘하기아조’로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구별’과 ‘성별’의 개념을 강조하는 동사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악으로부터 구별하여 성화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성화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 4:3)으로 완전한 성화는 구원의 궁극적 지향점이다.(갈 1:4; 엡 1:4-5; 벧전 2:24) 
본문에 온전히로 번역된 ‘홀로텔레이스’는 이곳에 단 한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전체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거룩하게 하시된 모든 방면에서 완전히, 완벽하게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ἁγιάζω (hagiazō), 동사.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미래 능동태. ἁγιάσω; 부정과거 능동태. ἡγίασα; 완료 능동태. ἡγίακα; 부정과거 능동태. ἡγιάσθη; 완료 중간태. ἡγίασται. 히브리어 등가: קדשׁ (81).
동사 용법
1. 거룩하게 되다 —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구별, 헌신되거나 도덕적 순결함을 가지다. 관련 주제: 개혁하다; 경외; 거룩함; 정결; 성화하다; 청결한; 바치다; 성화되다; 제의적 거룩함;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규칙; 성화.
요 17:19 ἵνα ὦσιν καὶ αὐτοὶ ἡγιασμένοι ἐν ἀληθείᾳ.
고전 7:14 ἡγίασται γὰρ ὁ ἀνὴρ ὁ ἄπιστος ἐν
딤전 4:5 ἁγιάζεται γὰρ διὰ λόγου θεοῦ καὶ ἐντεύξεως.
히 2:11 ἁγιάζων καὶ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
히 10:10 ἐν ᾧ θελήματι ἡγιασμένοι ἐσμὲν διὰ τῆς
2. 거룩하다 — 하나님께 봉헌되게 하다, 더 구별, 헌신하거나 도덕적으로 순수하게 되어. 관련 주제: 개혁하다; 경외; 거룩함; 정결; 성화하다; 청결한; 바치다; 성화되다; 제의적 거룩함;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규칙; 성화.
요 17:17 ἁγίασον αὐτοὺς ἐν τῇ ἀληθείᾳ·
엡 5:26 ἵνα αὐτὴν ἁγιάσῃ καθαρίσας τῷ λουτρῷ τοῦ
살전 5:23 Αὐτὸς δὲ ὁ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 ἁγιάσαι
히 2:11 ἁγιάζων καὶ οἱ ἁγιαζόμενοι
벧전 3:15 κύριον δὲ τὸν Χριστὸν ἁγιάσατε ἐν ταῖς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완료 중간태. 완료 중간태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신학에서 인간을 구분하는데 삼분설과 이분설의 주장이 극렬하게 대치된다. 본문은 인간의 삼분설을 지지하는 중요 구절로 이용되어왔다. 하지만 본절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었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거듭난 성도의 전인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간구하는 표현이다.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는 ‘성령, 영, 영혼, 심령, 생기, 바람, 마음, 귀신’등으로 다양하게 378번이나 사용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실체로 영이란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롬 8:16) 본문에서 ‘프뉴마’는 구원받은 인간의 심령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흠없이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은 ‘프쉬케’로 신약에서 102번 이는 ‘목숨, 영혼, 생명, 사람’으로 사용되었다. ‘프뉴마’가 사람 외부의 영적 존재를 나타낼 때 쓰인것과 달리 ‘프쉬케’는 항상 사람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능이 강조되었다면 혼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렘 31:25; 벧전 2:11) 즉 ‘프쉬케’는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정신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다. 
 
‘몸’은 ‘소마’로 142번 ‘인간의 몸, 육체, 시체’를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소마’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영혼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영혼이 떠난 ‘소마’는 단지 ‘시체’에 불과하다.(유 1:9) 영혼이 떠난 육체가 시체에 불과한 것처럼, 육체를 떠난 영혼 또한 온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 성도로 하여금 흠없게 보전되도록 하시는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흠없게’로 번역된 ‘아멤프토스’는 물질의 표면에 흠집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서 책망할 요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2:10) 혹자들은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사람의 신체가 흠있는 상태로 죽으면 안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는 부활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몸이 불에 탔든, 야수에게 찢겼든, 완전히 썩었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다시는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키신다.(고전 15:42-44, 52-54) 여기서 바울은 성도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책망받을 것이 없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두가지 간구는 한가지로 성도의 삶이 하나님앞에서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테레데이에’러 원형은 ‘테레오’로 ‘지키다, 보전하다, 간직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특정한 상태, 위치, 행위를 유지한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흠이 없는 상태로 유지할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이것이 인간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를 이루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Paul’s first wish for his readers is for God to ἁγιάσαι ὑμᾶς ὁλοτελεῖς (“sanctify you completely”). The sanctification of the Thessalonians was already the last main theme in the earlier wish-prayer of 3:11–13, which, when taken with the present wish-prayer, thus forms a bracket around the parenetic material in 4:1–5:22, which has as one of its principal goals that of aiding the Thessalonians in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 In fact the thought of v. 23 is clearly modeled on 3:13. 5:23 recognizes that only God can bring about complete sanctification (with Frame, 210 I understand the predicate adjective ὁλοτελεῖς, which I have translated as though it were an adverb, quantitatively not qualitatively). This is God’s will for the Thessalonians according to 4:3, but as this text suggests they are involved in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 by virtue of what they do or do not do. For this reason we must interpret the aorist optative ἁγιάσαι as embracing the whole process. Aorists used this way are common in prayers (see BDF §337.4). The living of sanctified or holy lives is directed toward the coming of Christ and the day of God’s judgment when believers will stand before God (3:13).
The second wish of the prayer repeats and expands on the first: καὶ ὁλόκληρον ὑμῶν τὸ πνεῦμα καὶ ἡ ψυχὴ καὶ τὸ σῶμα ἀμέμπτως ἐν τῇ παρουσίᾳ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ηρηθείη (“and may your 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complete, without blame, at the parousia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wording of this clause is problematic. The aorist passive optative verb τηρηθείη (“may it be kept”) has both a predicate adjective, ὁλόκληρον (“complete”), virtually identical in meaning with ὁλοτελής of the previous clause, and a predicate adverb, ἀμέμπτως (“without blame”), which has to be translated as though it were a predicate adjective. The meaning of the verb and the predicate words is not in doubt. Paul clearly wants his converts to be found complete and without fault in every aspect of their existence at the time of the public manifestation of their Lord.
The most debated problem of the verse involves the juxtaposition of “spirit and soul and body,” which appears to presuppose a tripartite view of human nature not found elsewhere in Paul, or for that matter in the rest of the NT. Jewett (Paul’s Anthropological Terms, 175–183; see also Thessalonian Correspondence, 107f.) argues that this trichotomy derived from Gnostic or Gnostic-like anthropology, taken up by enthusiasts who sought to distinguish between the divinely given spirit and the corrupt human body and soul. He further claims that Paul sought to correct this understanding by his emphasis on wholeness or unity in the human being. Several objections may be made to this view. To begin with we have no evidence for a developed Gnostic anthropology this early. More significantly, if Paul had faced the difficulty envisioned by Jewett, it seems doubtful that a wish-prayer was either an appropriate or an adequate place to attempt to correct such a problem.
BDF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and rev. Robert W. Funk.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1.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05–206.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거룩함을 이루고 흠없이 보전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삶에서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성화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미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에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너희를 부르시는 이’로 표현한다. ‘부르시는’에 해당하는 ‘칼론’은 ‘칼레오’의 현재능동태분사로 계속적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께서 신앙에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성화의 여정을 완주하도록 계속해서 부르고 계시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 부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미쁘시니’에 해당하는 ‘피스토스’는 ‘믿음직한, 신실한’의 의미이다. 인간은 조변석개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딤후 2:!3; 민 23:19) 
또한 ‘이루시리라’로 번역된 ‘포이에세이’는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이에오’의 미래능동태로 능력의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앞장서셔서 일하시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시는가? 본문은 직접적으로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는다. 모리스는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실 때 ‘합의된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브루스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의 백성의 영적 삶에서 시작하신 ‘성화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도의 성화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를 성도의 의지와 노력과 전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러한 기쁘신 뜻을 위하여 성도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말하자면 성화를 이루고자 하는 뜻을 성도들에게 불어넣으시고 이로하여금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함에 이루고자 분투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그 성화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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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fore, my brothers,1whom I love and jlong for, kmy joy and lcrown, mstand firm thus in the Lord, my beloved. 
I entreat Euodia and I entreat Syntyche to nagree in the Lord. Yes, I ask you also, true companion,2help these women, who have labored3side by side with me in the gospel together with Clement and the rest of my fellow workers, owhose names are in the book of life. 
p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reasonableness4be known to everyone. qThe Lord is at hand; r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s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t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And uthe peace of God, v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whatever is jus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commendable, if there is any excellence, if there is anything worthy of praise, think about these things. What you have learned5and wreceived and heard and seen xin me—practice these things, and y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1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8, 21
jSee ch. 1:8
kch. 1:4; 2:16; See 2 Cor. 1:14
lProv. 16:31; 17:6
mch. 1:27
nch. 2:2
2Or loyal Syzygus; Greek true yokefellow
3Or strived(see 1:27)
oSee Luke 10:20
pch. 3:1
4Or gentleness
qSee James 5:8
rSee Matt. 6:25
s[Prov. 16:3]
tSee Rom. 1:8
u[ver. 9; Isa. 26:3; Col. 3:15]; See John 14:27
v[Eph. 3:19]
5Or these things9which things you have also learned
w1 Thess. 4:1
x[ch. 3:17]
y[ver. 7]; See Rom. 15:3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4:1–9.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따라서 주안에 견고히 서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빌립보 성도들이 그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칭찬의 표현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주안에서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올림픽 경기에서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의미하는데 최후의 심판때에 하나님께서 경주를 마친 이들에게 상을 주실 것을 바라면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3:13-14)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면류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이러한 수고로 영적인 보상, 면류관을 받을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교회 자체가 면류관이요 보상이었다. 

우리의 본문 빌립보서 4:1과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상의 이해를 더욱 뒷받침 해줍니다. 바울은 최후의 심판 때 그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그러한 훌륭한 교회들을 건설하였다 하여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그러한 훌륭한 교회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교회들이 건설되었음이 드러나는 것을 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훌륭한 교회들은 바울로 하여금 최후의 심판 때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을 얻게 할 근거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바울의 “금과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최후의 심판 때 면류관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시상대에 불려 올라갈 때 그들이 자신의 신실한 사도직의 수행으로 말미암아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집의 일부로 찬란히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저 만족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구원에서 “은혜로만(믿음으로만)”(sola gratia/sola fide)의 원칙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자는 주(만)을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렘 9:22–23, cf. 롬 5:11, 갈 6:14, 빌 3:3)고 하며 일체의 인간적 자랑을 배격했던 바울의 사상에 더 잘 조화됩니다. 하여간, 복음을 무료로 선포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상”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9:18과,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에 널리 유포된 ‘상급 신학’을 경계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종말에 완성될 구원에 덧붙여 주어질 하늘의 “상급”을 강조함으로써 은혜의 복음을 공로 신학으로 왜곡하지 않는가 살펴야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0–161.

주안에 굳게 서라는 권면은 1:27절의 반복인데 1:27-30과 3:2-4:3은 매우 밀접한 병행을,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한다. 그리고 순두게를 권한다.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여인은 빌립보 교회안에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여자들로 보인다. 앞서 1:27; 2:2에 말한 것처럼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안에 의견이 갈라지고 분쟁이 생기는 이유는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성령께서 한 마음을 갖게 하시는데 어떤 이유로 각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력히 주장할때 서로를 품고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판할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주안에 있는 것이다. 

3절) 나는 또한 당신, 나와 멍에를 같이 맨 당신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두 여자들을 도우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외의 나의 사역자들과 함께 나의 곁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애쓴 사람들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명의 한 사람, 멍에를 같이한 동료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울 것을 요청합니다. 이 무명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성도들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개역 개정의 번역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 자는 본문의 멍에를 같이 한 자라는 ‘시지고스’가 고유명사로 이름일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

(빌 4:3, 개정)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3, 새번역)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힘쓰다라는 표현 ‘시나트레오’는 1:27절의 표현의 반복으로 운동경기에서 한팀이 되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4-9절) 바울은 지금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분쟁으로 기쁨을 잃고 근심에 빠져있는 교회를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서 기쁨을, 평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4-9절의 격려를 쓰고 있다. 4-7절에서는 근심을 없애 평강을 얻는 비결을, 8-9절은 분쟁을 없애 평강을 얻는 비결을 가르치고 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은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의존하는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의 깊은 만족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래서 이는 고난의 순간에도 언제나 유효하다. 
Rejoice. The joy that Paul calls for is not a happiness that depends on circumstances but a deep contentment that is in the Lord, based on trust in the sovereign, living God, and that therefore is available always, even in difficult tim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독자들이 얼마나 힘이 빠져 있었으면 바울이 “기뻐하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하겠습니까? 그리고 바울 자신이 지금 이런 권면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까? 그는 지금 어쩌면 사형 언도로 끝날지도 모를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운명과 교회들의 앞날에 대해서 근심하는 사람 아닙니까? 특히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의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으며 내분에까지 휩쓸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이 정황을 생각하면 여기 되풀이 하여 “기뻐하라”고 하는 권면은 바울이 독자들에게만 주는 권면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주는 권면인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나오는 모든 권면들도 바울이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9절이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신앙은 이성과 반비례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이성과 대항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라고 외치는 별도의 요소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 이하에서 바울은 믿음의 의미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100세가 된 사라의 태가 다 죽은 것을 알았다(이성의 상황 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하여 신앙에 있는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쓰는 바울이나 그 편지를 받은 빌립보의 성도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기뻐할 근거가 없고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과 독자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꺾고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서서 그의 권능과 사랑을 덕 입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외적의 핍박과 경제적 가난과 내분을 일으키며 압박해 와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단을 근본적으로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로서 역사를 주관하시므로, 모든 것이 결국 그의 선한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6–167.

4-7절) 본문에서 바울은 4개의 명령을 하고 있다.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속의 염려를 거둬가는 해독제이다. 
본문 7절에서 지키다라는 표현은 군사 용어로 간수가 옥중의 죄수를 감독하듯이, 로마 군대가 성을 방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6절에 네 개의 명령어들이 나옵니다. 첫째, “기뻐하라”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셋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넷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7절). 바울은 그런데 이 네 개의 명령어들 중간에 하나의 신앙 고백을 끼어 넣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5절). 가운데 낀 이 신앙고백은 독자들이 전후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기에, 그 주에 힘입어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신앙고백은 시간적인 뜻과 공간적인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주께서 곧 재림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고난들을 참고 기뻐하며, 곧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않고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에게도 관용하고, 세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도에 전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공간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높고 먼 하늘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계시며 이 고난의 세상에 나를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성령)으로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아니 내 안에 내주하셔서 나를 돕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까이 계시는 주의 권능과 사랑에 힘입어서 고난 속에서도 염려를 극복하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67–168.

7절에서 바울은 독자들이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확신 가운데, 그 주에 힘입어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을 관용하고, 염려를 떨쳐 버리고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키다”(phrouresei)는 동사는 군사 용어로서 마치 로마 군대가 빌립보를 감싸고 트라케의 야만인들로부터 방위하듯이,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을 옹위하여 외적으로부터 방위하듯이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의 로마의 군사도시로서의 역사적 그리고 지리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이 편지에서 군사적, 정치적 그림언어들을 많이 썼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여기 “지키다”도 그런 언어입니다. 여기 “마음과 생각”이란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의 샘터인 심장과 그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뜻합니다. 외적의 핍박이나 교회 내 형제의 험담이 우리의 심장에 자극을 주어 염려와 분노와 원한의 생각들을 낳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적 평강을 잃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바울이 권면하는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감정과 생각의 샘터인 심장을 강력히 옹위하여 그런 외부의 자극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평강을 깨는 생각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얼마나 오묘한가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것을 “우리의 모든 지각을 뛰어 넘는 것”, 곧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랍고도 신비스럽고 효력 있는 것이라고 수식하고 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0–171.

As with joy, peace for Paul is a fruit of the Spirit (Gal 5:22). It is especially associated with God and his relationship to his people. Here it is called “the peace of God”53because God is “the God of peace” (v. 9), the God who dwells in total shalom(wholeness, well-being) and who gives such shalomto his people. And it is the “peace of God” that “transcends54all understanding.”55This could mean “beyond all human comprehension,” which in one sense is certainly true. More likely Paul intends that God’s peace “totally transcends the merely human, unbelieving mind,” which is full of anxiety because it cannot think higher than itself.56Because the God to whom we pray and offer thanksgiving, whose ways are higher than ours, is also totally trustworthy, our prayer is accompanied by his peace. And that, not because he answers according to our wishes,57but because his peace totally transcends our merely human way of perceiving the world. Peace comes because prayer is an expression of trust, and God’s people do not need to have it all figured out in order to trust him!
Such peace will therefore “guard”58their “hearts and thoughts.” In the Hebrew view the heart is the center of one’s being, out of which flows all of life (e.g., Mark 7:21). God’s peace will do what instruction in “wisdom” urged the young to do: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Prov 4:23). In the present context “God’s peace” will be his “garrison” around their “hearts” so that they do not fall into “anxiety.” It will also guard their “thoughts.”59Since God’s peace surpasses merely human understanding in any case, it will protect the mind from those very thoughts that lead to fear and distress and that keep one from trusting prayer.
53Only here in Paul; but peace is regularly noted as coming from God (most Pauline salutations), which is what this genitive intends. Cf. “peace of Christ” in Col 3:15.
54Gk. ὑπερέχουσα; for this word see on 3:8 above (n. 19).
55Gk. πάντα νοῦν, the word for “mind,” which here takes on the associated sense of “understanding.”
56Cf. Lightfoot, Meyer, Vincent, Jones, Plummer, Müller, Collange, Martin, Hawthorne, Silva; contraCalvin, Alford, Kennedy, Hendriksen, Kent, O’Brien, many of whom base their view on the alleged parallel with Eph 3:19 (the parallel seems to exist far more in our minds than in the actual language of Paul; cf. Schenk). Michael and Beare are ambivalent.
57Cf. several (Meyer, Plummer, O’Brien) who note that God’s peace is not contingent on “answered prayer,” but on his character.
58Gk. φρουρήσει, used literally by Paul of the ethnarch Aretas in 2 Cor 11:32, who set a guard at the city gates, and figuratively of the Law in Gal 3:23, in the sense of “keep in custody” until “faith” should come. This is a military metaphor, where a garrison, such as the one always stationed in Philippi, “guards the Roman pax.”
59Gk. τὰ νοήματα, found only in Paul in the NT and elsewhere only in pejorative contexts (2 Cor 2:11; 3:14; 4:4; 10:5; 11:3). As over against the “mind” (νοῦς, found in the preceding phrase, “which exceeds every mind”), this word, as with most nouns ending in -μα, denotes the concrete expression or activity of the mind, hence “your thoughts.” Cf. J. Behm, TDNT, 4.960–61.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0–411.

In a post-Christian, post-modern world, which has generally lost its bearings because it has generally abandoned its God, such spirituality is very often the key to effective evangelism. In a world where fear is a much greater reality than joy, our privilege is to live out the gospel of true shalom, wholeness in every sense of that word, and to point others to its source. We can do that because “the Lord is near” in this first sense, by the Spirit who turns our present circumstances into joy and peace, and who prompts our prayer and thanksgiving. And we should be at that task with greater concern than many of us are, because “the Lord is near” in the eschatological sense as well.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412–413.

8-9절)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겅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상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무슨 미덕, 탁월함이 있으면 그리고 무슨 찬양할 만한 것이 있으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행하라.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빌 4:8, 새번역) 『마지막으로, ④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 ④그, '형제들이여'』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무슨 덕목이 있으면 그리고 무슨 찬양할 만 한 것이 있으면, 그런 것들을 생각하시오”(개역 성경의 “무엇에든지”는 옳지 않음). 이 권면은 얼핏 보면 감옥에 갇혀 사형 판결이 날지도 모를 재판을 기다리며 교회들을 걱정하고 있는 바울에게나, 핍박과 내분에 휩싸여 있는 빌립보의 교회에게나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충고인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것은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겨야 할 권면입니다.
인간은 그 머리 속을 무슨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그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하루 종일 돈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수전노(守錢奴)가 됩니다. 하루 종일 성적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자기의 머리를 채우는 사람은 성적 노예가 됩니다. 하루 종일 적대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씩씩대며 사는 사람은 아주 불행하고 호전적인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고상한 가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핍박자에 대한 원한으로 불타거나, 교회 내 반대파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며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저열한 인격체가 되어 내적 평강을 얻을 수 없고, 공동체의 삶에서도 평강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예를 든 고상한 가치들과 덕목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들의 머리를 채우라고 권합니다. 심지어 적대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거짓되고, 악하고, 추한 면들만 생각하여 분노와 복수심으로 치를 떨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참됨이나 의로움이나 사랑할 만한 것이나 무슨 덕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고상한 가치들에 생각을 집중시키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71–174.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평강을 빌고 있다.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구 염려하지 않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과 찬양받을 것들을 생각하고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자신이 요청하고 설교한대로 살아간 진실한 사역자였다.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의 지배를 받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감옥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감옥 밖에서도 속박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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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 appeal to you, brothers, to watch out for those who cause divisions and create obstacles xcontrary to the doctrine that you have been taught; yavoid them. 18 For such persons do not serve our Lord Christ, but ztheir own appetites,6and aby smooth talk and flattery they deceive the hearts of the naive. 19 For byour obedience is known to all, so that I rejoice over you, but I want you cto be wise as to what is good and innocent as to what is evil. 20 dThe God of peace ewill soon crush Satan under your feet. f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21 gTimothy, my fellow worker, greets you; so do Lucius and Jason and Sosipater, my kinsmen. 
22 I Tertius, hwho wrote this letter, greet you in the Lord. 
23 iGaius, who is host to me and to the whole church, greets you. Erastus, the city treasurer, and our brother Quartus, greet you.7
x1 Tim. 1:3; 6:3
ySee 2 John 10
zPhil. 3:19; [2 Tim. 3:4; Titus 1:12]
6Greek their own belly
aCol. 2:4; 2 Pet. 2:3
bch. 1:8
c[Jer. 4:22]; See Matt. 10:16
dSee ch. 15:33
eGen. 3:15; [Luke 10:17–19; Rev. 12:11]
f1 Cor. 16:23
gSee Acts 16:1
hSee 1 Cor. 16:21
i1 Cor. 1:14; [Acts 19:29; 20:4; 3 John 1]
7Some manuscripts insert verse 24: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all. Ame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16:17–23.

17절) 바울은 형제들에게 권한다.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조심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바울은 지금 교회안에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들은 분쟁을 일으키고(강한 자와 약한자, 할례, 음식, 절기) 신자들앞에 장애물을 만들어 거치게 하는 이들이다.(9:33) 이러한 이들은 사람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배교로 이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이단의 주요한 특징들이다. 이것은 심각한 잘못일뿐만 아니라 실제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파괴한다.  
  • Paul is urgingor “exhorting” the church (cf. 12:1) and calls them “brothers [and sisters]” in order to stress his relationship with them. This points to a serious admonition. He commands them to watch outor maintain constant vigilance regarding the dangerous heretics who may come at any time. The first problem with these people is that they cause divisionsor “dissension” in the community. Their teaching is divisive and would further erode the cohesion of a community already experiencing problems over the “strong” and “weak” factions (14:1–15:13). Second, they put obstaclesor “stumbling blocks” before the believers. As stated in 9:33 (cf. 11:9), these are forces that destroy one’s faith and can lead to apostasy. This is in fact a primary characteristic of heresy. It is not just serious error but actually destroys the core doctrines of the Christian faith. Such people are not Christians because they espouse what is contrary to the teaching you have learned.Such teaching contradicts the cardinal doctrines of the faith. These are not issues like the security of the believer or predestination (on which see the discussion on chapters 8–11) but central tenets like the doctrine of Christ or of salvation. The only proper response is to keep away from them;that is,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This is more than just avoiding them, for that would imply a modicum of tolerance. This is a more direct opposition involving both censure and discipline. It could infer a type of excommunication such as found in Matthew 18:17 (“treat [them] as you would a pagan or a tax collector”) or 2 Thessalonians 3:14 (“do not associate with” them). Of course, such discipline should also be done “gently” with the purpose of bringing them to “repentance” (2 Tim 2:24–26). The goal is not primarily to remove them from the church (though that is certainly an aspect of it) but rather to wake them up and help them to get right with the Lord. Nevertheless, the purity of the church must be guarded zealously.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412–413.

18절) 이같은 자들, 앞서 교회안에 문제를 일으킴으로 교회로부터 떼어놓아야할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이들이다. 또한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들이다. 거짓 교사들을, 거짓 가르침을 허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궤멸된다. 따라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권징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라는 표현은 빌 3:19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탐욕이 가득하고 자기중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사탄은 속이는 이이다.(7:11) 거짓 가르침은 생명에 이르게할 하나님의 계명, 율법 마저도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게 할 수 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깊은 계획을 깨닫지 못함으로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에 쉽게 흔들리고 미혹된다. 이시대의 많은 이단들이 이와 같다.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교활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이들이 바로 이단이다. 
이시대에 왜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는가? 첫번째는 교회안에 진정한 교회와 돌봄이 없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인, 신학적인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단의 거짓 교사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바르게 보이는 내용을 가르치다가 어느 순간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이단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을 베뢰아인들처럼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  
(행 17:11, 개정)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우리는 성경의 진리, 신학적인 진리를 강조하고 우리의 신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고 묵상할지를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오용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이 거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상고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 The second reason the church must be vigilant is that false teachers deceive the minds of naïve people. Satan is the great “deceiver” (Rev 12:9, 20:3), and they follow in his steps (the connection with Satan is made in v. 20). Paul has used this word in 7:11, where he says “sin … deceived me, and through the commandment put me to death.” He pictures the false teachers as deliberately manipulating truth to suck in the “foolish” or “simple-minded” people. These are weak Christians (Eph 4:14 calls them “infants”) who do not understand the deep things of God and are easily fooled by the smooth talk and flattery,that is, the smooth “eloquence” of the heretics. What they say sounds so plausible and convincing that the gullible are easily drawn into their pernicious lies. This happens all too frequently. One is astounded at the ease with which a Jim Jones or a David Koresh finds adherents. I was once asked by Christianity Todayto write an article on why it is that the cults seem to draw so many of their followers from evangelical churches (Osborne 1979:22–23). I discovered two reasons: one, the lack of true fellowship and caring in many churches; the other, the lack of hermeneutical and theological awareness on the part of too many Christians. When they hear these cult leaders twisting Scripture, they cannot tell that truth is being compromised. The answer is clear. We must develop Berean Christians who “search the Scriptures daily to see if these things are true” (Acts 17:11). We need to stress theological truth and help our believers learn how to study the Bible for themselves and so know when God’s Word is being misused.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413–414.

19절)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렸고 그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선한것에 대해서는 지혜롭고 악한 것에 대해서는 순수한, 순진한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본문의 미련하다라는 단어 innocent)는 앞선 순진한(naive)라는 단어와 비슷한 단어이다. 악한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것을 모르는 무지한 상태가 아니라 순진한 상태이다. 악함을 알지만 선한데 지혜롭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에 악함을 따르지 않는 자들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악을 모르는 상태로 있을때는 어느 순간엔가 그 악함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교회는 성도들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악으로부터 선을 분별하는 법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근본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도외시하고 사변적인 것에 집착할때 거짓된 가르침으로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궤멸시키실 것이다. 본문의 사건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창 3:15절의 성취를 보여준다. 
  • This is a remarkable promise and probably is both specifically related to the false teachers in verses 17–19 and generally related to the victory of the church in every area, including the discord caused by the strong and the weak groups in the church (14:1–2). The one who will bring this about is the God of peace,a title used in 15:33 and closely connected with Paul’s plea for peace in the Roman community in 14:17 and 19. God will soon crush Satan under your feet,a concept that alludes to the protevangelium of Genesis 3:15, “he will crush your head, and you will strike his heel.” The false teachers are Satan’s emissaries, but their influence is both temporary and doomed. Paul also links heretics with demonic forces in 1 Timothy 4:1, “in later times some will abandon the faith and follow deceiving spirits and things taught by demons.” John also links the two in 1 John 2:18, “as you have heard that the antichrist is coming, even now many antichrists have come.” Yet at the same time this has an inaugurated thrust centering on the tension between the already and the not yet seen so often in Romans (e.g., 8:18, 23, 30). The crushing of Satan has already begun but will not be consummated and finalized until the eschaton, when Satan will be first bound (Rev 20:3) and then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Rev 20:10). The Jewish understanding of Genesis 3:15 was that the serpent, Satan, would be defeated by God and his angelic forces (Testament of Simeon6:6; Testament of Levi18:12; cf. 1 Enoch54:6; Jubilees10:8–9), a view found in Revelation 12:7–9, where Michael casts Satan and his armies out of heaven. Paul states that Satan would be defeated now in the Roman church and finally at the end of history. Moreover, this would occur soon,the same view of imminence seen in 13:12, “the day is almost here” (see on that passage).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414–415.

21절)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와 바울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문안한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사역자중의 한사람으로 바울의 2차 선교여행때 합류하여 이 편지를 기록한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했다.  바울은 디모데를 영적인 아들로 여겼다. 
  • Timothy.One of Paul’s closest ministry associates; he joined Paul on his second missionary journey (Acts 16:1–3) and was with Paul in Corinth as he wrote this letter to the Romans (Acts 20:3–4). Jason.Perhaps the same Jason with whom Paul stayed during his ministry in Thessalonica (Acts 17:5–9).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322.

22절) 이 편지를 기록하는 더디오도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한다. 
당시 이렇게 편지를 말로 하면 받아적는 이들이 있었다. 바울의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그는 이러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필사자가 바울의 말을 기계적으로 받아적었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자율성를 가지고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3절) 나, 바울과 온 교회를 돌봐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한다. 이 성의 새무관 에라스도와 우리의 형제 쿠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한다. 
본문의 가이오는 고전 1:14절의 가이오로 디도 유스도로(행 18:7)로 바울에 의해서 회심하여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로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숙소를 제공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당시 로마 제국의 높은 직책에 있던 인물들중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있다. 서기오 바울의 경우 지방 총독이었다.(행 13:6-12)
에라스도는 이 도시의 재무장관으로 ‘호 테스 폴리스 오이코노모스”이다. 이를 라틴어로 ‘에딜, aedile’라는 단어인데 고린도의 고대의 비석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에라스도, 그의 직책에 대한 보답으로, 자비로 이 포장도로를 놓는다” 

  • Gaius.Perhaps the Gaius mentioned in 1 Cor 1:14. This Gaius may also have been known as Titius Justus, whom Acts 18:7 identifies as the person with whom Paul stayed in Corinth. Erastus … the city’s director of public works.The Greek word rendered “director of public works” probably corresponds to the Latin aedile.An inscription discovered on an ancient block of stone in Corinth probably refers to this same Erastus: “Erastus, in return for his aedileship, laid [this pavement] at his own expense.” Acts 19:22; 2 Tim 4:20 also mention an Erastus, but the name was common enough that it is uncertain whether they refer to the same man.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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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I appeal to you, brothers, by our Lord Jesus Christ and by jthe love of the Spirit, kto strive together with me in your prayers to God on my behalf, 31 lthat I may be delivered from the unbelievers in Judea, and that mmy service for Jerusalem may be acceptable to the saints, 32 so that by God’s will I may come to you with joy and nbe refreshed in your company. 33 May othe God of peace be with you all. Amen. 
j[Phil. 2:1; Col. 1:8]
kCol. 4:12; [2 Cor. 1:11; Col. 2:1, 2; Heb. 13:18]
l2 Thess. 3:2; [2 Tim. 3:11; 4:17]
m2 Cor. 8:4
n[1 Cor. 16:18; 2 Cor. 7:13; Philem. 7, 20]
och. 16:20; 2 Cor. 13:11; Phil. 4:9; 1 Thess. 5:23; Heb. 13:20; [1 Cor. 14:33; 2 Thess. 3: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15:30–33.


30절)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성도들에게 힘을 다하여 나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강권한다. 본문에 ‘권하노니’라고 표현된 ‘파라칼레오’는 강권하다라는 강력한 표현이다. 게다가 강권하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강권하고 있다. 교회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와 교회와 우리안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안에서 하나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 기도를 통해서 그들이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정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앞에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나아와 간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사역에 하나가 되게하는 매우 중요한 방편이다. 

31절) 바울은 두가지 기도제목을 형제들에게 요청한다. 첫번째는 유대에서 불신자들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의 연보가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충동에 의해서 유대에서 체포되었기에 첫번째 기도요청이 응답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지만 만약에 그의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았다면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도리어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기에 그는 죽임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울, 자신이 섬기는 일이 성도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크게는 바울의 모든 사역, 섬김이고 작게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모은 헌금을 말한다. 실제로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연보는 예루살렘에 잘 전달되었다.(행 24:17)
  • The first prayer request is that I may be rescued from the unbelievers in Judea,showing that Paul already knew that the Jews were lying in wait for him. A short time later he learned of a plot against him as he was about to board a ship for Syria (Acts 20:3), so he could have been aware of potential problems. Such Jewish opposition had always been a part of his ministry (Acts 9:29; 13:45; 14:2–5, 19; 17:5–9, 13; 18:12–17; 19:9). Of course, history tells how well founded this concern was, with the riot and demand for his death after he had arrived in Jerusalem (Acts 21:27–36). In fact, the prayers were efficacious. His arrest by the Romans saved him from the mob, and when another plot took place, Paul’s nephew learned of it (miraculously it seems), and Paul was taken to Caesarea (Acts 23:12–24). God was firmly in control, and the prayer was answered (though in a way hardly expected). The second request was for the acceptance of the offering by the saints in Jerusalem. In one sense Paul’s serviceor “ministry” could be taken as all that Paul did, including the sacrifices in the temple. But this term was used in verse 25 explicitly for the offering to the poor in Palestine, and that is probably what it means here as well. This was also a valid concern, for he had also been opposed by many Jewish Christians (as in Galatians and Phil 4), who could have rejected a gift from Gentile Christians. But this prayer was granted as well, for Luke tells us that Paul and his team were “received … warmly” and the Jerusalem saints “praised God” at the report of the Gentile mission (Acts 21:17, 20).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400.

32절)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쁨으로 나아가 그들과 함께 편히 쉴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다. 바울이 실제로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참으로 여러운 과정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여러번의 시위가 있었고 이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호하셨다. 뿐만 아니라 로마로 가는 항해 여정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실제로 로마의 성도들이 가를 환대해주었다. 
(행 28:15, 개정)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실제로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서 사형판결을 다루는 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경험했다. 이렇게 수년의 시간을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보내는데 이에 대해서 빌립보서에서 감옥의 간수들이 복음을 들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매임으로 인해서 더욱 담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빌 1:13-14, 개정)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행 28장이나 바울의 옥중서신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바울은 투옥중에도 기쁨을 누리며 성도의 교제를 누렸다. 
  • The purpose of the two prayer requests was so that by God’s will I may come to you with joy.His deliverance from his Jewish enemies and the acceptance of the offering by the Jerusalem saints would fill him with joy as he arrived in Rome. Once again the irony of this is that it did indeed come to pass but not in the way Paul thought. All the tumult in Jerusalem, the two years in prison in Caesarea and the tumultuous journey by ship to Rome (Acts 22–27) must have made him wonder many times if God had rejected this prayer request. Yet the key is by God’s will,and that was certainly evident throughout those chaotic events. There is little doubt that Paul’s arrival was with joy,for Luke tells us that a group of Christians came down to meet Paul on the way to Rome, and “at the sight of these men Paul thanked God and was encouraged” (Acts 28:15). Even though he was a prisoner about to start a capital trial, there was joy because God was in charge. And it was in many ways a triumphant two years in Rome. Paul told the Philippian church at the end of that time that through his imprisonment the entire Pretorian guard had heard the gospel and Christians everywhere had become more bold for their faith (Phil 1:13–14). Paul’s second desire was that he might be refreshedduring his time in Rome. Schreiner (1998:783) says this is “the fellowship and joy that exist when members of the church mutually minister one to another.” In other words, this refers to fellowship with the believers there. There is no direct evidence that this occurred while Paul was in Rome, but the picture of Paul in Rome in Acts 28 and the prison epistles themselves show a person who does seem refreshedin his spirit. Undoubtedly he had many times of fellowship with the Roman church during that period.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400–401.

33절 )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 평강의 하나님은 구약이나 바울 서신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평강은 영혼의 개인적인 평정과 교회의 하나됨을 모두 포함한다. 
  • Paul concludes with a further prayer-wish (see 15:5–6, 13), asking that the God of peace be with you all.*The God of peaceis a major motif in the Old Testament (e.g., Lev 26:6; Judg 6:24; Ps 29:11; Is 26:12) and in Paul’s writings (2 Cor 13:11; Phil 4:9; 1 Thess 5:23). It connotes “the God who brings peace” and is linked with Paul’s plea for peace in the Roman community in 14:17 and 19. The peacehere probably includes both individual tranquility of the soul and corporate togetherness in the church. The concluding amen*affirms the prayer and provides a formal conclusion (see 1:25; 9:5; 11:36).
  • *15:32This could be a third prayer request (“Pray that I may be rescued, that the collection will be accepted, that I might arrive with joy”), but it is more likely that this is subordinate to verse 31 and indicates the purpose of the prayers (so Morris 1988; Moo 1996).
  • *15:33Cranfield (1979:780) points out that this cannot be the concluding prayer of the epistle because all the others in Paul’s epistles include the word grace.Thus this is the concluding prayer of this section (15:14–32, possibly 14:1–15:32).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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