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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세상 경영

 

1. 세상 경영의 원리 : 정의와 사랑

* 생각해볼 질문 :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원래 계획

창세기 1:27–28 (NKRV)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주신 문화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만드신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다음 그 세상을 직접 다스리고 통치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요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므로 그 권한과 능력을 행사하도록 요구 받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처음 한 일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 이름하나 짓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인데 수많은 동물들을 그 특성에 맞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놀라운 창의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을 때’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훼손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인간들에게 동산의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를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그 왜곡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는 바로 정의와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 : 정의와 사랑

우리는 문화명령속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표현을 접합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정복이라는 단어는 전쟁을, 다스림이라는 표현은 억압과 통제를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우리의 역사는 일제통치와 군부독재를 경험했기에 인권탄압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성경의 다스림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시편 89:14 (NKRV)

14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편 89:14 (NKSV)

14정의와 공정이 주님의 보좌를 받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님을 시중들며 앞장서 갑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묘사하는데 의와 공의는 주님의 보좌의 기초이고 인자와 신실함, 사랑과 신실은 그 보좌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보좌는 정의로 세워져 있고 그 앞에서 사랑이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정리하면 ‘사랑과 정의’이 두가지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기본 원리입니다. 이 두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 둘을 동시에 조화롭게 발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원칙을 따지고 그래서 차갑고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뭔가 지적을 받을 것 같고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깝게 지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반면 사랑을 중시하는 사람은 주변의 사람을 넉넉히 품어주기는 하지만 원칙이 없는 것 같고 우유부단합니다. 중심이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정의와 사랑을 완벽하게 조화롭게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도 사랑으로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바로 사랑과 정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조화로움이 완벽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정의의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주인노릇하며 살아간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최고의 정의와 최고의 사랑이 크로스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세상을 다스려라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세상을 착취하고 마음대로 힘을 남용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잠재력이 최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과 정의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가지고 가정, 교회,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2.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기

* 생각해볼 질문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의 원리로 살아가기 힘든 영역은 어떤 영역입니까? 

 

하나님의 세상 경영원리는 ‘사랑과 정의’로 명확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원리를 우리의 삶에, 일상속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 직장 갑질, 젠더 문제, 정치와 사회 영역, 군대 문제, 영화, 남북 문제, 미국-일본과의 관계

 

이렇게 우리의 일상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단선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두권의 책으로, 내가한 경험을 절대화하며 세상만사를 균형있게 이해하고 평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세상을 다스릴 자로서 사랑과 정의를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할 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1) 억울한 자들의 피할 요새

시편 9:8–12 (NKRV)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주님은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정직으로 모든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이 책은 정의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저자는 정의를 바라보는 세가지 기준으로 행복, 자유, 미덕을 설정하여 공리주의, 자유주의와 관련된 윤리적 갈등 사례들을 보여주며 후에 본인의 입장인 공동체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철학자의 주장은 논외로 하고 성경이 주장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조금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본문 9절에서 여호와는 압제당하는 자, 다른 말로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가 되시고 환난 당한 자, 고난을 당할 때 피할 요새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정의가 살아 있었다면 억울함이나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이들의 피할 산성, 요새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억울해 하는 사람들,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주목하시고 이들을 돕기 원하십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정의를 외칠 때 억울한 이들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힘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가진 힘으로 정의를 굽게하고 정의를 부인할 때 억울한 자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한다면 내가 가진 힘을 남용할 수 없고, 억울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단지 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넘어서서 온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십니다. 

 

2)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아모스 5:24 (NKRV)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에 온전히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에서 정의가 물처럼 흐르고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정의와 공의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회사에서 누가봐도 옳지 않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데 다른 이들이 모두 묵인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으로, 공의와 사랑의 원리를 따른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실제로 문제제기를 했을때 발생할 불이익이나 피해나 따돌림으로 인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뱀지비순’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냥 순진하게 ‘전 그렇게 못해요’라고 말하는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융통성 없게 표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원칙, 기준이 흔들릴 수는 없습니다. 문제 제기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지혜롭게 표현한다고 해도 불이익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때 우리는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노예해방을 주도한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의 정치가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치의 영역속으로 부르셨음을 깨닫고 영국의 잘못된 인습과 제도를 개혁하기로 다짐합니다. 1787년 28세의 젊은 하원의원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자신이 볼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노예 제도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엄청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서 이를 수출하는 것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거둬들였습니다. 이전까지는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바라보니 이 노예제도가 성경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그는 수십년간 150번 이상의 대의회 연설과 법안 제출과정을 통해서 56년만인 1833년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리웠고 그를 통해서 영국이, 세계가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3)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

야고보서 4:17–5:4 (NKRV)

17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소리칠 때, 하나님이 그 소리에 ‘그래 네가 억울할 것이 맞다’라고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관계된 사람이 억울하다고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억울함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죄인 것입니다.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지금 갑질을 하고 있지 않은지, 누군가를 억울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4)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원리를 적용해야하겠습니까? 

⓵ 일이나 직업

때로는 직업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직업이 있다. 포주를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 의사, 교사로서 어떤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⓶ 우리가 속한 직장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직장이나 식당같은 곳에서 부하 직원이나 종사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

⓷ 사회에서 특별히 소외된 사람들

동성애자들에 대한 태도, ‘저는 동성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이런 성적소수자나 장애인들을 대하는 태도, 님비 현상

⓸ 사회의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

강도와 강간사건이 일어나는 마을이나 거래에서 그 피해자들만을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치안을 강화하고, 방범 등이나 CCTV를 설치하고 순찰을 강화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을 보완하고 개혁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⓹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연과 생태계

물과 전기 절약, 쓰레기 분리수거및 자원의 재활용 /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 재앙이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끼고 돌보는 삶의 방식에 힘써야 한다. 

⓺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나 세계의 불의와 불공정 문제

남북 통일을 위한 지원, 통일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노력, 새터민들에 대한 관심

인종 갈등과 소수자를에 대한 폭력과 수탈, 이를 통한 생산품을 거부하는 운동

 

이러한 구체적인 삶의 노력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3. 세상 경영의 방법 : 노동

* 당신은 어떤 목표와 마음가짐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일-공부든, 직장일이든, 집안일이들-하고 있습니까? 

 

1) 일하는 인간을 만드신 일하시는 하나님

시편 104:19–23 (NKRV)

19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20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21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22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23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해와 달을 통해서 낮과 밤을 만드셨는데 밤에는 동물들이 나와서 일하고 낮이 되어 그 동물들이 들어가고 나면 인간들이 나와서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실 때 일하셨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왜 사람을 고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만큼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와 사상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사상에서 노동은 천민들에게 요구되었고 지식인이나 귀족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⓵ 가사노동 : 가정의 공동체적 삶 유지

⓶ 농사 : 먹거리 제공

⓷ 교사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신성합니다. 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다룬 ‘풍성한 삶의 기초’를 더 충실히 다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하고, 공동체적 삶의 원리들을 알아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며 살려고 애쓰다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점점 더 선명하게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2) 타락한 세상에서의 노동

창세기 3:17–19 (NKRV)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그분의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노동은 저주가 되었고 땀흘리고 수고해야만 그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고를 한다고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노동은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도 노동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의 노동은 고통스럽고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이 성화되어서 그 본연의 모습이 회복될 것입니다. 

 

 

4. 노동하며 살아가기

* 생각해볼 질문 : 하나님은 무엇때문에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빌립보서 2:13 (NKRV)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의 노동에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하다보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다양한 소원을 두신다는 것은 이 깨진 세상,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 벽돌공 이야기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생각하며 그 원리인 정의와 사랑속에서 일을 할 때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걸레질을 할 때도, 음악을 연주할 때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커피를 내릴 때도,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도 모든 일에 의미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때의 자세

골로새서 3:22–23 (NKRV)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자세는 바로 성실과 탁월함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할 때 프로의식을 가지고 성실함으로 일해야 합니다. 또한 그저 열심히만이 아니라 잘해야 합니다. 세상의 탁월성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우월성이지만 성경의 탁월성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온전히 발현하는 것입니다. 

 

3)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

이렇게 성실과 탁월함으로 일을 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고린도전서 10:31 (NKRV)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태복음 5:16 (NKRV)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옷을 입고 푯말을 들고 다닌다고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과 착한 행실을 통해서, 무슨일을 하든지 그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심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참 좋다라고 느낄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교회 밖에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안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교회안에서는 배우고 익힌 다음 실제로 그 내용을 실천으로 옮기는 곳은 우리의 삶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때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을 믿고 지금 이곳에서 그러한 다스림의 원리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날마다 내가하는 일이 하나님앞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믿고 확인해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는 행동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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