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벨 훅스, 문학동네)
Feminism is for everybody
저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페미니즘에 한걸음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초청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저자 본인이 유색인종으로 백인 여성이 주도하던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모두가 이 성차별주의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촉구한다.
서론. 페미니즘에 한 발 더 가까이
페미니즘하면 약간 화난 여성들을 떠올리게 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여자든 남자든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을 받아들이게끔 사회화 되어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잘 알게 되면 더이상 페미니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말이다. 투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혁명을 통해, 우리는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완전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우리의 꿈을 실현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오라.”(22)
1장. 페미니즘 정치_우리가 서 있는 곳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차별주의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페미니즘이 반남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페미니즘 활동가들 사이에 반남성 정서가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초기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대부분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기 전 남성들과 함께 계급주의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싸운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남성들은 세상을 향해서는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면서 정작 동료 여성들은 무시했고, 이런 환경에서 여성은 남성중심주의의 본성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 혁명적 페미니스트(revolutionary feminist)
- 개혁주의 페미니스트(reformist feminist)
페미니즘 운동은 초기부터 양극화되었다. 개혁파들은 젠더 평등을 더 중시했다. 혁명파들은 기존체계를 조금 손보는 것으로 여성이 좀더 권리를 차지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예 그 체계를 뜯어고치고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일터에서의 젠더 평등에 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개혁적 페미니즘은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를 총체적으로 재편해 나라 전체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주의에 맞서게 해야 한다는 현대 페미니즘의 급진적인 토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학식이 뛰어나고 교육 수준이 높고 대개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특권층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2장. 의식화_꾸준한 회심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혁명적 페미니즘의 의식화 교육에서는 지배체계로서의 가부장자에 대해 꼭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가 어떻게 일상화되었으며 어떻게 유지되고 영구화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희생되고 착취당하고 더 나쁜 경우 학대받는지에 대한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하지만 여성학 강의가 의식화 모임을 대체하자 대중적 기반을 다질 가능성을 잃게 되었다. 의식화 모임이 와해되면서 페미니즘의 옹호자가 되려면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고 그에 근거해 페미니즘 정치를 수용할지 말지 선택해야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졌다.
의식화 운동이 와해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은 직장에서의 평등과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운동 방향을 전환했다. 여성을 보상받아야 할 젠더 평등의 피해자로 해석하는데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다보니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우선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잃고 말았다.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배반하곤 했다.
우리의 문화적 인식체계에 페미니즘은 곧 반남성운동이라는 억측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 남성의 특권을 벗어던지고 페미니즘 정치를 기꺼이 포용한 남성은 투쟁의 소중한 동료이지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반면 여성이라 해도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에 젖은 채 페미니즘 운동에 잠입한 여성은 운동에 해를 입히는 위험한 존재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여성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치의 기치를 내건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끝내 소멸해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화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진정한 성차별주의에 대한 인식없이 단지 반남성운동으로 페미니즘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차별주의에 동의한다면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3장. 자매애는 여전히 강력하다.
자매애는 강력하다(sister is powerful).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들의 유대는 인정과 지지를 받는다. 사람들은 남성들이 집단을 만들면 단결하고 서로 지지하고 협력하고 개인적인 성취와 인정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아주 당연시해버린다. 하지만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의 유대는 불가능했다. 그런 행동 자체가 반역행위였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의 유대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게 도이상 자신과 자신의 몸을 남자의 소유물로 인식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결정권과 효과적인 피임, 임신선택권, 강간과 성희롱의 근절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는 단결해야 했다. 여성이 겪는 고용차별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로비활동을 벌여 공공정책을 개선해야 했다. 여성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끄집어내 이를 뜯어 고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 강력한 자매애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계급 특권을 지닌 백인 여성들이 소외 계층 여성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든 여성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지녔던 페미니즘 운동은 점점 계층화되었다. 운동의 구호로 외쳤던 자매애는 여성들에게 점점 중요치 않아졌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데다 성차별주의를 더이상 문제시하지 않는 그릇된 인식 또한 널리 퍼져 있기에 비판의식을 키우는 페미니즘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어린 여성들이 자라면서 저절로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된다.
4장. 비판 의식을 키우기 위한 페미니즘 교육
페미니즘 이론은 처음부터 성차별주의적 사고가 어떻게 작용하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 변화를 이끌어낼지 여남 모두에게 설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대학에 여성학 강의가 신설되면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제도적 정당성도 갖춰졌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이 거둑 학문적 성과에 대한 존중, 과거에 쓰인 그리고 현재 쓰이는 여성 저작물에 대한 인정, 그리고 커리큘럼과 교육학에 자리한 젠더에 따른 편견을 철폐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혁명을 일으켰다.
(여성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거나 좋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처음에는 의도적인 무게두기가 필요하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 분야에서 편견이 배제된 커리큘럼이 사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미래의 페미니즘 운동은 페미니즘 교육을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해야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제공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지 않으면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주류 언론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정보로 인해 늘 힘을 잃고 말 것이다.
5장. 우리의 몸, 우리 자신_임신 선택권
페미니즘 운동이 민권운동과 성해방운동에 뒤이어 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문제들을 중요시하는 게 타당해 보였다.
페미니즘 운동을 촉진한 첫번째 이슈는 바로 섹슈얼리티 문제였다. 다시 말해 여성이 언제 그리고 누구와 섹스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문제였다.
성혁명이 정점에 달했을 때 자유연애라는 이슈로 여성들은 원치 않은 임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에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피임을 할 수 없다면,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없다면 여성과 남성에게 진정한 의미의 성해방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됐다.
임신중단권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계급에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계속 임신중단 수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중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불을 다시 지피려면 임신선택권을 페미니즘 의제 한가운데에 놓아야 한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여성들이 선택할 수 없다면 삶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6장.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모의 아름다움
여성의 몸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사고, 즉 우리의 가치가 외모에만 달려있으며 어쨌거나 보기 좋아야 하고 특히 남성이 보기에 그래야한다고 믿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브래지어와 거들, 코르셋, 가터벨트, 치마, 불편한 하이힐을 벗어던지라.
페미니즘의 개입으로 의복과 인체 혁명이 촉봐되면서 여성은 우리 몸이란 본디 타고난 그대로 사랑하고 추앙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주어 여성들도 나이듦을 좀더 긍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으로서의 현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미를 정의하는 고루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다시 받아들였다. 성차별주의적으로 정의된 미의 기준을 다시 미화하려는 움직임은 분명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적 패션업계와 화장품업계의 이익과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현대 패션잡지는 거식증의 위험을 다루는 기사를 실으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욕망의 대상으로 비쩍 마른 젊은 여성들의 의미지를 퍼붓는다. 이 혼란스러운 메시지는 누구보다도 페미니즘 정치를 받아들인 적 없는 여성들에게 치명적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인지 모든 여성들이 전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위험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도, 그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묵살해서도 안되고 가부장제적인, 성차별주의적인 미의 기준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7장. 페미니즘 계급투쟁
새롭게 형성된 여성해방운동 내에서도 대체로 백인이 주류인 그룹에서 여성들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기준은 다름아닌 계급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존 계급구조를 유지하되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해방운동 개혁파와 기본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낡은 패러다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상호성과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모델을 세우자는 좀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세력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미니즘 운동이 진보하면서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로 구성된 특권 그룹이 백인 남성과 동등한 계급 권력을 손에 넣게 되자, 계급투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중요성을 잃고 말았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에서 여성이 전업주부로 가정에 속박되고 예속된다고 느끼는데서 오는 불만을 '이름없는 문제’라고 했지만 이는 소수의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의 위기였을 뿐이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에게 전업주부가 될 권리는 오히려 해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기존 구조를 유지하며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특권 계급 여성들은 같은 계급 내의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원했다. 같은 계급의 남성과 사회적 평등을 이루려는 페미니즘의 노력은 비백인에게도 경제력과 특권을 손에 넣을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면 백인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는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자본주의의 두려움과 교묘히 겹쳤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사실상 백인 권력을 지지함으로써, 주류인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가 권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방조했으며 동시에 급진주의 페미니즘 정치를 약화시켰다.
특권 계급 여성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들의 종속상태를 유지해야만했다. 결국 계급 권력이 페미니즘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런 결탁이 페미니즘 운동의 약화에 한몫했다. 여성들이 남성과 다를 바 없이 활동하게 되고 더 높은 계급 지위와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자 페미니즘 정치는 약화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페미니스트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계급 문제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연대를 위한 토대를 쌓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원을 공유하고 개인적 성장을 위한 기회를 얻을 미래를 더 생생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8장. 글로벌 페미니즘
계급권력을 쥔 백인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을 자기네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들은 지도자이며 나머지는 추종자일 뿐이라고했다. 이것은 백인 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의 서구문화에 영향을 받아 신식민주의 사고를 띠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페미니스트들이 전 세계 여성의 평등을 위해 싸우고자 한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계급권력을 가진 개별 페미니스트들이 제국주의적 환상을 전세계 여성들에게 투사해 문제가 발행했다.
수많은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인종과 젠더, 계급, 국적을 포괄하는 관점을 채택했음에도 백인 ‘파워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평등이 제국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식의 페미니즘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탈식민지화된 페미니즘은 다른 무엇보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성차별주의가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섭식장애나 목숨을 담보로하는 성형수술을 여성 할례와 연결지으면,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관행에 자리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misogyny)가 바로 여기 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파악(미러링)할 수 있다.
글로벌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 그리고 억압을 종식하기 위한 전 지구적 투쟁에 손 내밀어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9장. 일터의 여자들
여성 해방의 열쇠로 일을 강조한 결과 많은 이들이 여성들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저임금 노동이 남성중심주의로부터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들을 해방해주지는 않는다.
일이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경제적 자립이 꼭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경제적 자립을 일과 연관짓기보다는 해방의 수단으로 본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종류의 일이 여성해방을 가져다줄지 생각해봐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게끔 이끈 건 사실 소비 자본주의다. 경기 침체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때 전업주부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여자가 직장을 구하지 않고서는 이제 백인 중산층 가정이 누리를 계급적 지위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좀더 완벽한 경제적 자립의 길은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행복한 삶의 이미지와는 다른,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실직의 원인, 그리고 가부장제하에서 가장의 위치가 보장해주는 확고한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 원흉으로 일하는 여성을 지목한다. 미래를 위한 중요한 페미니즘 의제는 남성들에게 여성과 일의 관계에 관한 실제 상황을 보여주고 그들이 일터에서 여성을 적으로 돌리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들이 전반적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면 경제적 자급자족은 불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대중매체는 계급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일자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슈에서 여성과 남성을 대립하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여성들과 엘리트 여성들간에도 갈등이 일어나게 한다. 문제는 경제적 자립 수단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10장. 인종과 젠더
백인 여성들은 흑인 인권 운동의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이에 근거한 억압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면서 인종과 젠더를 나란히 놓고 고려한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림에서 아예 인종을 제거하여 차이를 지우고 부인했다. 젠더를 앞세운다는 말은 백인 여성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있다는 뜻이자 여자라면 누구든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 운동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성이 일종의 카스트 같은 성별 계급에 속해 있다는 개념을 제시하며 여성에 대한 억압을 깨는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백인 여성들이 오히려 모든 여성의 공통된 경험 이면에 자리한 여성들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를 꺼렸다. 백인 여성들이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리하여 페미니즘 운동이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맞서지 않는다면 백인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 사이에 진정한 자매애가 피어날 수 없다.
인종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자 여자들은 모든 층위에 존재하는 차이라는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가 결합된 해로운 장벽들이 여자들을 갈라놓는다.
실제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우리 사회안에 중요한 이슈이다. 저자는 백인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들간의 관계를 말하지만 우리 사회안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백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유색인종(동남아,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이것이 성차별과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런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먼저 깨달아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11장. 폭력 종식하기
페미니즘 운동은 가정 폭력을 끝장내기 위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은 물론 가정 폭력에 대해 보다 폭넓은 문화적 인식을 쌓아가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가부장제 폭력은 좀더 힘있는 개인이 다양한 강제력으로 다른 구성원을 통제해도 무방하다는 믿음을 토대로 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동성간의 폭력,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이 모두 포함된다.
성차별주의적 사고는 남성중심주의를 뒷받침하고 그로 인한 폭력을 지지한다. 노동자 계급이면서 실직자인 많은 남성은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하에서는 자신의 일에서 권력을 맛보지 못하므로 자신들이 절대적인 권위와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가정에서 대리만족하라고 부추겨진다.
전쟁이나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 십대에 대한 폭력,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 등 어떠한 방식의 폭력이든 사회 통제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면 여남을 불문하고 반대해야만 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종식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12장. 페미니즘 남성성
페미니즘 사상이 발전하면서 각성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남성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가 진짜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문제가 단지 남성들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성차별주의가 유지되고 영구화되는 데 여성들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보수적인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남성혐오자로 묘사했다. 페미니즘 운동 내에 반남성 분파나 그런 정서가 보인다 싶으면 페미니즘에 흠집을 내기위해 대중매체는 그 사실을 집중조명했다. 페미니스트를 남성혐오자로 몰아세우는 이면에는 페미니스트가 모두 레즈비언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페미니즘 정치는 남성중심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그 외연알 넓혀 가부장제가 남성들에게 성차별주의적 남성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남성들 역시 모종의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인식을 포괄했다.
페미니즘내의 반남성 분파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런 남자들때문에 모든 남자는 억압자라거나 모든 남성은 여성을 혐오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재현하기 위해 모든 남성을 적으로 간주했다. 남성에 대한 적대는 일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 특권과 계급 권력을 향한 욕망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수단이었다.
일자리가 없고, 일한 만큼 보상도 받지 못하고, 여자들이 더 많은 계급 권력을 쥐는 상황에서 돈 없고 힘없는 남자들은 자기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소년과 남성을 보듬어안으면서, 소녀와 여성이 꿈꾸는 모든 권리를 소년과 남성도 누려야한다고 요구하는 페미니즘 남성성을 수용하는 페미니즘이라면 미국 남성들을 새로 내어나게 할 수 있다. 특별하게도 페미니즘적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삶을 돌보고 긍정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한국사회안에서 20대 남자현상은 계급화의 문제를 젠더화를 치환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든다. 실제 문제는 여성이 많은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자체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방향을 젠더의 문제로 돌려 남성들의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표출시키려 하고 있다.
13장. 페미니스트 부모되기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사회운동 가운데 우리의 문화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문화가 아니며 부모가 자식을 자기 의지대로 조종하는 소유물로 본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운동이다.
남성중심주의만 강조하면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어떤 수단으로든 힘없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수 있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의 위계 질서 안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용인되듯 아이에 대한 어른의 지배도 용인된다.
아동에 대한 남성의 성적 학대나 폭력 뿐만 아니라 아동에 대한 여성의 성적 학대, 폭력도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이나 정신적 학대도 심각하다.
그 어떤 가족형태보다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성된 가부장제 가족을 높게 치는 문화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기네 가족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에 부합하지 않을 때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아이들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 지배자가 존재하는 환경에서라면 사랑은 꽃피울 수 없다. 부모가 혼자든 아니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가장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랑이 넘치는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를 자존감을 가진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할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가족 친화적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인이 가부장제적으로 아이를 지배하지 않아야 비로소 아이가 안전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가정을 꾸릴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환경속에서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가정의 가부장제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가족안에 절대 권위자가 아내를, 아이들을 억압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권위를 잘못 사용하기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 권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위임받은 권위를 가정안에서 부모가 행사해야 한다. 건강하게 권위를 행사함으로 자녀를 양육할 필요가 있다.
14장. 결혼과 동반자 관계를 해방하기
페미니즘 운동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숫처녀가 아니거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은 여성은 비난하면서도 남자는 성적 욕망을 품거나 그 욕망을 행동으로 옮겨도 용인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중잣대와 충돌했다.
페미니스트들을 성노예제를 끝장내자는 주장을 지지했고, 부부간 성폭행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성이 성적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와 성적 만족을 추구할 권리를 옹호했다.
페미니즘의 의제로 이성애 문제가 떠올랐을 때 수없이 논의된 주제가 바로 전희 없는 섹스였다. … 페미니즘 운동이 성적 쾌락에 대한 성차별주의적 통념을 비판함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듯이 이 또한 여성과 남성이 좀더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성적 유대관계에 일어난 본질적 변화는 남자도 집안일과 육아를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의식 변화 같은 가정내에서의 다른 변화로 이어졌다.
평등과 존중이라는 원칙, 그리고 동반자 관계를 실현하고 오래 지속하려면 상호 만족과 성장이 필수라는 믿음의 원칙 위에 세운 동료애적 관계의 가치를 알리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자유로운 섹스, 출산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등결혼을 꿈꾼다. 그래서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도 등장한다. 결혼과 섹스, 출산과 자녀양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성경의 가치와 상이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보완이 가능할까? 성역할의 차이?
15장. 페미니즘 성정치_상호자유의 윤리학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주입받는다. 즉 성욕과 성적 쾌락은 늘 그리고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며 여성으로서의 덕목을 지니지 못한 여성들이나 성적 욕구나 갈망을 드러내는 거라고 배운다. 성차별주의적 사고는 여성을 성녀 또는 창녀로만 구분했으며 여성이 건강한 성적 자아를 구축할 만한 토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믿을만한 피임기구가 등장하기전 여성은 섹스할 때마다 임신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남성은 섹스를 원하고 여성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려면 믿을만하고 안전한 피임기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편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몸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한편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이 원할 때 원하는 상대와 섹스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 투쟁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반성차별주의적 방식으로 우리 몸을 존중하는 법이나 해방된 섹스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비판적 페미니즘 의식화 교육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권력 문제와 단단히 이어져 있다.
해방된 성생활 그리고 성적 쾌락과 충만함을 서로의 선택과 합의가 보장되는 환경에서 가장 잘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가부장제가 뿌리깊게 남아 있는 사회에서 성적 감정과 정체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줄 페미니즘 이론이 다시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담론은,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이 다시 한번 시작되게끔 반드시 수면위로 올라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결혼관계안에서의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성경은 결혼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섹스를 터부시 하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에게 자유롭게 성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16장. 완전한 행복_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
여성해방운동의 최선봉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레즈비언과 양성애자 여성들은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의 고정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미 좌파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페미니즘 운동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이 젠더와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미 심리적으로는 여성해방의 기치를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덕 관습을 거스르는 성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레즈비언들에게 여성이 자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남성에게 기댈 필요가 없음을 배웠다.
여성으로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와 몸을 나누고 함께 살지 선택할 자유는 동성애자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급진주의 레즈비언들 덕분에 크게 향상됐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예나 지금이나 레즈비언들은 모든 유색인종 여성들이 성적 취향이나 정체성에 상관없이 인종차별주의에 맞서고 저항해야 했던 것처럼 동성애 혐오에 맞서고 대항해야 했다. 동성애혐오를 영속화하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는 여성들은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를 고수하면서 자매애를 원하는 여성들만큼 착각에 빠져 있으며 위선적이다.
동성애혐오에 대한 싸움은 언제나 페미니즘 운동의 한 축을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애자 여성들이 레즈비언을 계속 경멸하며 부차적인 존재로 보는 한, 여성들이 자매애를 키워나가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구적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레즈비언 활동가들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이번 장은 저자가 레즈비언들과의 관계에서 배운 교훈과 페미니즘 운동에서 레즈비어니즘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한다. 여성해방운동과 성해방운동중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선봉에 레즈비언 여성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들은 자신이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이처럼 레즈비언이나 게이, 양성애자들이 자연스럽게 커밍아웃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우리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힘든 사회이다.
17장.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_페미니즘의 심장
페미니즘 운동 초기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낭만적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여성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를 가부장제적인 연인과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 연인은 우리의 사랑을 이용해 우리를 정복하고 종속하려 하기에 유혹적인 덫과 다름 없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은 여성들의 완전한 자아실현을 가로 막기 위해 사랑이 놓은 또다른 덫에 불과하다고 했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사랑은 소유의 개념 그리고 한쪽은 사랑을 주기만 하고 다른 쪽은 받기만 해도 된다는 지배와 복종의 패러다임과 연결되어 있다.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중심주의적 결합은 돌봄의 정서를 가진 젠더인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주어야 하고 권력과 공격성을 지닌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보호해준다는 기본전제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이성애자 가정에서 수많은 경우에 남성은 돌봄에 보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가진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해 가족을 통제하고 강압하는 폭군이 됐다. 페미니즘 운동 초창기에 이성애자 여성들은 더이상 고통받지 않으려고 사랑의 유대를 끊기 위해서 운동에 뛰어들었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현명함과 사랑이 넘치는 정치다. 페미니즘 정치의 정신은 지배를 종식하기 위한 헌신이다. 사랑은 결코 지배와 강압에 기반한 관계에 뿌리내릴 수 없다. 가부장제적 사랑의 개념을 매섭게 비판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페미니즘적 비전 :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된다.
진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우리를 속박에서 자율, 사랑이 없는 곳에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상호동반자 관계야말로 사랑의 토대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야 말로 이 시대의 가부장제적 잘못된 구조, 지배와 강압을 해결하고 사랑을 이루는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와는 다르다.
에베소서 5:22–25 (NKRV)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이 위계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죽기까지 하라고 말하고 있다.
18장. 페미니즘적 영성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적인 실천을 도모하는 저항운동이다. 서구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여성들은 남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과 함께할 수 있는, 남성의 지배 없이도 신에 봉사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수도원 생활방식에 의존했다. 노리치의 줄리엔은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로, 우리는 그 안에서 끝없이 태어나고 그 없이는 결코 세상에 올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성차별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용인하는 기독교 교리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익혀나가는 젠더 역할에 다방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창조중심적 기독교 영성의 각성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운동과 연결됐다.
해방신학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집단을 해방하는 것이 신의 의지에 대한 헌신을 반영하는 핵심적인 신앙행위라고 본다. 가부장제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근본주의 가부장제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의 확산을 막는 장벽이다. 사실 페미니즘 사상가, 특히 여성의 임신선택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라고 부추기고 범행을 묵인한 우익 종교 근본주의자들보다 페미니스트들을 악마화하는 집단도 없다. 처음에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하자 수많은 여성이 운동에서 멀어졌다. 이후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창조중심적인 새로운 비판과 해석을 내놓자 여성들은 페미니즘 정치와 화해하면서도 기독교적 실천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은 초기에는 영적 세계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시민권과 세속적인 성과에 더 집중했다. 주류 대중매체는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한다는 사실을 조명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반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종교 사상이 변화하도록 이끌어 더 많은 여성들이 신성과의 연결을 찾아내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발흥이 진보적 영성을 위협한다. 근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게끔 부추길 뿐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고히 한다. 이에 임신선택권에 대한 탄압이 뒤따른다. 이와 동시에 종교적 근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성에 수많은 형태의 성적 강제를 용인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억압적인 통념을 불어넣는다. 반드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조직화된 종교를 주시하고 비판과 저항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근본주의와 페미니즘은 서로를 타도해야할 대상이라고 본다. 텔레반의 등장으로 샤리아 법을 주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흥으로 여성의 인권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종교적 영성의 추구는 인권의 후퇴를 가져온다. 성경의 내용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여서 새롭게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 나라는 남자와 여자가, 종과 주인이, 부모와 자식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원리가 지금 21세기에는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19장. 페미니즘의 미래
진정으로 선구적이려면 우리의 상상은 구체적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현실을 넘어설 미래를 그릴줄도 알아야 한다.
1960년대 초 여성해방운동이 갓 시작되었을 때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운동을 이끌며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 시스템의 힘을 약화하고 이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기존 체제하에서 여성의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한 개혁주의적 싸움도 지속했다. 그들은 지배의 문화에 찌든 이 세상을 공동체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바탕이 된 참여적 경제의 세상으로, 인종과 젠더에 따른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상호성과 상호의존에 대한 인정이 지배적인 정서를 이루는 세상으로, 지구의 생명을 지키며 모든 사람이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전 지구적인 생태주의 비전이 실현된 세상으로 바꾸는 꿈을 꾸었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의 운명을 바꾸고 그들이 각자 개인적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내는 것을 근본적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루려면 운동은 젠더 평등 의제를 뛰어넘어, 모든 여성들 특히 빈곤틍 여성들을 껴안을 수 있는 문맹퇴치운동 같은 기본적인 활동부터 시작해야 했다…. 요즘 학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페미니즘 이론은 대부분 자기들만 아는 은어 같은 어려운 학술용어로 쓰여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퍼뜨리고 싶다면 페미니즘을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자배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근절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투쟁이므로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선구적인 급진적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제국주의-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 내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젠더와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각자의 삶을 용감하게 되돌아보라고 격려한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을 준다. 페미니즘 사고는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평등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고 동시에 지배를 종식할 방법을 제안한다. 상호성이 일상인 세계에서는 때때로 모두가 평등하지 않더라도 그 불평등의 결과가 반드시 복종과 식민지화, 비인간화는 아닐 것이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하면 왠지 성이 난 여성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 의미를 규정한다. 이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복음을 치환하여 읽어도 별 무리가 없이 읽혀진다. 복음은 모든 차별과 착취, 억압을 종식시킨다. 높아진 것을 낮추고, 굽은 것을 곧게 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기에 페미니스트들은 기독교를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그것을 시대적 상황속에서 읽고 해석한다. 시대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성경해석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경의 가르침이 페미니즘과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충실성(Factfulness)라는 책이 있다. 사실에 기반해서 주어진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잘못된 해석을 한다. 공포본능, 크기본능, 간격본능등이 우리안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충실성(truthfulness)에 따라 우리 주변의 상황과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진리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진리가 진리되어도록 진리충실성을 따라야 한다.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가치가 성경의 진리와 부딪히지 않는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함께 대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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