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Jonah went out of the city and sat to the east of the city and emade a booth for himself there. He sat under it in the shade, till he should see what would become of the city. Now the Lord God appointed a plant2 and made it come up over Jonah, that it might be a shade over his head, to save him from his discomfort.3 So Jonah was exceedingly glad because of the plant. But when dawn came up the next day, God appointed a worm that attacked the plant, so that it withered. When the sun rose, God appointed a scorching feast wind, gand the sun beat down on the head of Jonah so that he hwas faint. And he asked that he might die and said, c“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 But God said to Jonah, i“Do you do well to be angry for the plant?” And he said, “Yes, I do well to be angry, angry enough to die.” 10 And the Lord said, “You pity the plant, for which you did not labor, nor did you make it grow, which came into being in a night and perished in a night. 11 And should not I pity jNineveh, that great city, in which there are more than 120,000 persons who do not know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and also much kcattle?”

e [Neh. 8:15]

2 Hebrew qiqayon, probably the castor oil plant; also verses 7, 9, 10

3 Or his evil

f Jer. 18:17

g [Ps. 121:6]

h [Amos 8:13]

c [See ver. 3 above]

i [ver. 1, 4]

j See ch. 1:2

k [ch. 3: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4:5–11.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4:5–11.

 

 

5절) 요나는 성읍에서 나가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성읍에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요나는 앞서 4절에서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을 거부하고 성읍 동쪽으로 나가서 자리를 잡는다. 여전히 하나님이 처음에 말씀하신대로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실 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 그늘아래 앉아 있는 것이다. 이미 3:10에서 니느웨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하지만 여전히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것처럼 니느웨에 임할것을 기대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거하면서 사용했던 임시 주거지로 천막과는 다른 것이었다. 천막은 거두어서 다시 세우는 튼튼하고 실용적인 것이었다면 초막은 일단 해체하면 사용된 재료는 다 버렸다. 요나가 천막, 텐트를 짓지 않고 초막을 만든 것은 자신이 기대하는 바, 성읍이 멸망하는 것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aving arrived there, he constructed a shelter such as one the caretaker of a vineyard would use (Isa 1:8; 4:6). This booth or hut was a crude shelter that provided only slight assistance in deflecting the hot Assyrian sun. The same word (sukkâ; cf. Amos 9:11, “tent”) is used for the structures of leafy branches made for the Feast of Tabernacles, so the making of these booths or huts was a familiar occupation with the Hebrews. The booths were constructed primarily of interlaced branches of trees. After constructing his temporary dwelling place, Jonah sat down under its partial shadow and watched and waited.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6.

 

6-8절)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로 요나를 가리게 하셨다. 이로 인해 요나가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튿날 하나님께서 벌레를 예비하사 새벽에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셔서 시들게 하겼다. 해가 뜰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배하심으로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게 되었고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다’라고 하였다. 

 

박넝쿨(아주까리, 잎이 큰 식물)을 예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에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요나는 박넝쿨로 인해서는 기뻐하였던 반면에 벌레와 동풍은 싫어했고 죽기를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박넝쿨과 벌레와 동풍을 예비히신다. 이를 요나를 위한 실물교육의 일환이었다. 가장 먼저 준비하신 것은 박넝쿨인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잎이 커서 그늘을 만들수 있으며 하룻밤 만에 쑥쑥 자랄수 있는 식물이었다. 6절에서 분명히 요나는 이 박넝쿨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였다. 지금까지 요나서를 통해서 처음으로 요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니느웨 지역은 대낮이면 기온이 많이 올라서 그 뜨거움으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이를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생긴다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모습과 비교할 때 요나가 이 식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은 아쉬운 모습이다. 

어쩌면 요나는 지금 이 박넝쿨의 그늘로 인해서만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이제 아시고 니느웨를 심판하시겠구나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큰 바람과 큰 물고기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셨다면 지금은 아주 작은 벌레를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큰 것들만 사용하셔서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작은 것들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바다의 큰 바람만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 육지(사막)의 작은 바람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본문에서 예비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마나’로 요나서에서는 4번에 걸쳐서 등장한다(1:17; 4:6, 7, 8). 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것이나 사람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6절에서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라는 표현은 그를 악에서 구원하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괴로움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히브리어 ‘라아’로 요나서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괴로움, 악독, 재앙, 악한으로 사용되었다.(1:2, 7, 8; 3:10; 4:1, 2, 6)

The verb “provided” is the same Hebrew word (mānâ) used in 1:17 to describe the “preparing” of the great fish. Thus both the great fish and the vine are illustrations of God’s continuing sovereignty over creation and his intention to be active in the affairs of human beings through his creation.

The word translated “vine” has been a matter of dispute. The Hebrew word qîqāyôn designates an unidentified garden plant. Most scholars seem to believe that this plant may be the castor vine, a shrub with large leaves and common in Eastern lands. Possibly the word is equivalent to the Egyptian kiki, which is the castor oil tree. However, the textual versions (LXX, Syr, Vg) favor the bottle/gourd plan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e significance of the controversy over the identification of this plant. When Jerome changed the traditional rendering of this word from gourd to identify it with the castor oil plant, a riot broke out in Oea, a city east of Carthage.22 This disagreement also caused bitter controversy between Jerome and Augustine. While it is true that the gourd plant is commonly employed in Palestine for shading arbors, either plant could have provided sufficient shelter for one man’s relief from the unrelenting rays of the Assyrian sun.23

The phrase “to ease his discomfort” is literally “to deliver him24 from his evil” (rāʿâ). The latter word is the term occurring throughout the book with its two senses, “wickedness” or “trouble, calamity” (see comments at 1:2; 4:1). The translation of the NIV, “discomfort,” while perhaps on the side of understatement, does express the general state of Jonah’s malcontent. No doubt the heat was a major cause for this discontent. The mean daily maximum temperature in Mesopotamia is about 110 degrees, so the temperature was a factor. Any shade would have been most welcome. Perhaps adding to his discomfort was the sound of mourning and supplication from the city below him. From his overlooking perch he could hear the cries of the cattle and the wailings and earnest beseechings of the human inhabitants.25 These factors, combined with the restlessness that inevitably occurs when a believer is out of the perfect will of God, accounted for Jonah’s discomfort.

LXX The Septuagint

Syr Syriac

Vg Vulgate

22 J. N. D. Kelley, Jerome: His Life, Writings and Controversies (London: Deckworth, 1975), 266.

23 For a detailed discussion of the probable plants and their characteristics, see Kirk, Life and Mission, 219–21, or B. P. Robinson, “Jonah’s Qiqayon Plant,” ZAW 97 (1985): 397–402. Both of these writers opt for the gourd plant.

24 The verb for “deliver,” נצל, is a play on the word for “shade,” צל. There also is intentional ambiguity in the use of רָעָה, for while God’s immediate purpose for the vine was to relieve Jonah’s discomfort, his real purpose was to deliver Jonah from his sinful attitude.

25 Kirk, Life and Mission, 217.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7–278.

 

9절)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라고 물으시고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라’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요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구원하심을 인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요나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 그는 '죽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하나님앞에 떼를 쓰고 있다. 요나는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죽기를 원한다. 2장에서 물에 빠져 죽을 지언정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거부하던 요나를 만났다. 또한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리세겠다던 심판을 거두시자 차라리 죽여달라고 항의하던 선지자를 보았다.(4:3) 그리고 이제 박넝쿨이 시드는 것으로 인해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앞서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박넝쿨이 시들었다고 내게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는 하나님께 남들은 박대하고 우리만 환대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10-11절) 이에 여호와께서 ‘네가 수고도 않고 재배도 하지 않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도 아끼면서 이 큰 성읍 니느웨에 있는, 죄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명의 사람과 많은 가축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은 요나와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대조를 읽을 수 있다. 

요나는 수고도 않고 재배도 하지 않고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버린 박넝쿨을 아꼈다. 

하나님께서는 큰 성읍안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명의 사람과 가축을 아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박넝쿨을 아꼈지만 나는 사람을 아꼈다라고 말씀하신다. 

 

니느웨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큰 성읍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저 큰 성읍 니느웨는 죄악이 가득한 도시였다.(1:2) 그런데 이제 니느웨는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큰 성읍 니느웨가 되었다.(4:11) 니느웨가 회개한 것이다. 니느웨라는 성읍의 물리적인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큰 성읍이었다. 회개를 통해서 신분상의 변화,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도시가 된 것이다. 

본문의 12만명이라는 숫자가 많은 사람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니느웨와 주변의 모든 인구를 표현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수많은 사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니느웨와 주변의 인구를 포함한 숫자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많은 이들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셔서 이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요나서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10 Whereas God’s question in v. 9 seemed to contain the element of tenderness, the statement of the Lord in v. 10 conveys the idea of forcefulness. The reluctant pupil was then addressed in terms that commanded attention. Gaebelein states, “We may be sure, Jonah is at last ready to hear.”36 The wording in this verse obviously was chosen for emphasis. The emphatic “you” of v. 10 (“You have been concerned about this vine”) is in contrast with the emphatic “I” of v. 11 (“Should I not be concerned about that great city?”).

The word translated “concerned” (ḥûs) in vv. 10–11 also is significant. The translation “have compassion” would better express the emotional connotation of this word. While one normally does not have pity on a plant, the Lord was driving home Jonah’s inappropriate expression of anger. The Lord continued his teaching lesson as he admonished Jonah for his inappropriate compassion for a plant for which he had done nothing. He had neither cultivated nor encouraged the growth of the plant, and yet he used it to express ultimate anger. Because of the withering of an inanimate plant whose life was measured by a single day, he wished to die. He simply had no right to make any claims regarding the plant. It had been a gift of God’s grace. The Lord was trying forcefully to drive home the ultimate question, “Who are you [Jonah] to question me?” Jonah’s anger expressed not only a lack of understanding but also a lack of trust.

36 Gaebelein, Servant and Dove, 135.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81–282.

 

4:11 Jonah’s deep concern had been expressed on behalf of a relatively insignificant portion of God’s creation, the vine, while God’s deep concern was expressed on behalf of his highest creation, human beings. Jonah apparently had grown completely indifferent to the fate of God’s creation beyond the bounds of Israel. At every point in this entire chapter, Jonah’s attitude stands in complete contrast to God’s relationship to Nineveh. God created and nurtured them and extended to them the hand of mercy.

Jonah did not answer correctly God’s questions in vv. 4 and 9 and thereby showed his lack of understanding. Consequently, God drew the tremendous contrast between Jonah’s anger over the death of a plant and his own delight in Nineveh’s turn toward life. The first clause in the Hebrew text is literally, “Should I, on the other hand, not have compassion on the great city of Nineveh?” The NIV moves this phrase to the end of the verse in an apparent attempt to end the text with a question for the readers to answer. The rearrangement of the clause is unnecessary and perhaps unfortunate. Leaving it as it is found in the Hebrew text shows the connection better with v. 10.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82.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섹션에서 요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창조주인 내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훌을 베푸는데 인간인 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 ?". 하나님께서는 똑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만일 요나처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 스스로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오히려 인간의 허락에 따라 은혜를 베풀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긍훌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왜 우리만 사랑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신다. 그것도 매우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세요?" 하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양 쪽으로 팔을 활짝 펴시면서 이만큼!’ 하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내가 하나님께 소중하다면, 타인도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엑스포지멘터리 127) 

 

요나가 초막을 짓고 그늘을 만들기 위해서 식물의 잎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잎은 강한 빛에 금새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친히 에비하신 것이다. 요나가 기뻐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불과 하루만에 벌레와 뜨거운 동풍으로 인해 이 박넝쿨이 시들어버리자 요나는 도리어 낙심하여 죽기를 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해서 네가 박넝쿨도 아끼면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수 많은 니느웨 백성들과 가축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들을 아끼고 있으며 요나도, 또한 우리들도 이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