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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h went out of the city and sat to the east of the city and emade a booth for himself there. He sat under it in the shade, till he should see what would become of the city. Now the Lord God appointed a plant2 and made it come up over Jonah, that it might be a shade over his head, to save him from his discomfort.3 So Jonah was exceedingly glad because of the plant. But when dawn came up the next day, God appointed a worm that attacked the plant, so that it withered. When the sun rose, God appointed a scorching feast wind, gand the sun beat down on the head of Jonah so that he hwas faint. And he asked that he might die and said, c“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 But God said to Jonah, i“Do you do well to be angry for the plant?” And he said, “Yes, I do well to be angry, angry enough to die.” 10 And the Lord said, “You pity the plant, for which you did not labor, nor did you make it grow, which came into being in a night and perished in a night. 11 And should not I pity jNineveh, that great city, in which there are more than 120,000 persons who do not know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and also much kcattle?”

e [Neh. 8:15]

2 Hebrew qiqayon, probably the castor oil plant; also verses 7, 9, 10

3 Or his evil

f Jer. 18:17

g [Ps. 121:6]

h [Amos 8:13]

c [See ver. 3 above]

i [ver. 1, 4]

j See ch. 1:2

k [ch. 3: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4:5–11.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4:5–11.

 

 

5절) 요나는 성읍에서 나가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성읍에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요나는 앞서 4절에서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을 거부하고 성읍 동쪽으로 나가서 자리를 잡는다. 여전히 하나님이 처음에 말씀하신대로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실 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 그늘아래 앉아 있는 것이다. 이미 3:10에서 니느웨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하지만 여전히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것처럼 니느웨에 임할것을 기대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거하면서 사용했던 임시 주거지로 천막과는 다른 것이었다. 천막은 거두어서 다시 세우는 튼튼하고 실용적인 것이었다면 초막은 일단 해체하면 사용된 재료는 다 버렸다. 요나가 천막, 텐트를 짓지 않고 초막을 만든 것은 자신이 기대하는 바, 성읍이 멸망하는 것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aving arrived there, he constructed a shelter such as one the caretaker of a vineyard would use (Isa 1:8; 4:6). This booth or hut was a crude shelter that provided only slight assistance in deflecting the hot Assyrian sun. The same word (sukkâ; cf. Amos 9:11, “tent”) is used for the structures of leafy branches made for the Feast of Tabernacles, so the making of these booths or huts was a familiar occupation with the Hebrews. The booths were constructed primarily of interlaced branches of trees. After constructing his temporary dwelling place, Jonah sat down under its partial shadow and watched and waited.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6.

 

6-8절)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로 요나를 가리게 하셨다. 이로 인해 요나가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튿날 하나님께서 벌레를 예비하사 새벽에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셔서 시들게 하겼다. 해가 뜰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배하심으로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게 되었고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다’라고 하였다. 

 

박넝쿨(아주까리, 잎이 큰 식물)을 예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에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요나는 박넝쿨로 인해서는 기뻐하였던 반면에 벌레와 동풍은 싫어했고 죽기를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박넝쿨과 벌레와 동풍을 예비히신다. 이를 요나를 위한 실물교육의 일환이었다. 가장 먼저 준비하신 것은 박넝쿨인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잎이 커서 그늘을 만들수 있으며 하룻밤 만에 쑥쑥 자랄수 있는 식물이었다. 6절에서 분명히 요나는 이 박넝쿨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였다. 지금까지 요나서를 통해서 처음으로 요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니느웨 지역은 대낮이면 기온이 많이 올라서 그 뜨거움으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이를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생긴다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모습과 비교할 때 요나가 이 식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은 아쉬운 모습이다. 

어쩌면 요나는 지금 이 박넝쿨의 그늘로 인해서만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이제 아시고 니느웨를 심판하시겠구나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큰 바람과 큰 물고기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셨다면 지금은 아주 작은 벌레를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큰 것들만 사용하셔서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작은 것들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바다의 큰 바람만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 육지(사막)의 작은 바람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본문에서 예비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마나’로 요나서에서는 4번에 걸쳐서 등장한다(1:17; 4:6, 7, 8). 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것이나 사람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6절에서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라는 표현은 그를 악에서 구원하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괴로움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히브리어 ‘라아’로 요나서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괴로움, 악독, 재앙, 악한으로 사용되었다.(1:2, 7, 8; 3:10; 4:1, 2, 6)

The verb “provided” is the same Hebrew word (mānâ) used in 1:17 to describe the “preparing” of the great fish. Thus both the great fish and the vine are illustrations of God’s continuing sovereignty over creation and his intention to be active in the affairs of human beings through his creation.

The word translated “vine” has been a matter of dispute. The Hebrew word qîqāyôn designates an unidentified garden plant. Most scholars seem to believe that this plant may be the castor vine, a shrub with large leaves and common in Eastern lands. Possibly the word is equivalent to the Egyptian kiki, which is the castor oil tree. However, the textual versions (LXX, Syr, Vg) favor the bottle/gourd plan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e significance of the controversy over the identification of this plant. When Jerome changed the traditional rendering of this word from gourd to identify it with the castor oil plant, a riot broke out in Oea, a city east of Carthage.22 This disagreement also caused bitter controversy between Jerome and Augustine. While it is true that the gourd plant is commonly employed in Palestine for shading arbors, either plant could have provided sufficient shelter for one man’s relief from the unrelenting rays of the Assyrian sun.23

The phrase “to ease his discomfort” is literally “to deliver him24 from his evil” (rāʿâ). The latter word is the term occurring throughout the book with its two senses, “wickedness” or “trouble, calamity” (see comments at 1:2; 4:1). The translation of the NIV, “discomfort,” while perhaps on the side of understatement, does express the general state of Jonah’s malcontent. No doubt the heat was a major cause for this discontent. The mean daily maximum temperature in Mesopotamia is about 110 degrees, so the temperature was a factor. Any shade would have been most welcome. Perhaps adding to his discomfort was the sound of mourning and supplication from the city below him. From his overlooking perch he could hear the cries of the cattle and the wailings and earnest beseechings of the human inhabitants.25 These factors, combined with the restlessness that inevitably occurs when a believer is out of the perfect will of God, accounted for Jonah’s discomfort.

LXX The Septuagint

Syr Syriac

Vg Vulgate

22 J. N. D. Kelley, Jerome: His Life, Writings and Controversies (London: Deckworth, 1975), 266.

23 For a detailed discussion of the probable plants and their characteristics, see Kirk, Life and Mission, 219–21, or B. P. Robinson, “Jonah’s Qiqayon Plant,” ZAW 97 (1985): 397–402. Both of these writers opt for the gourd plant.

24 The verb for “deliver,” נצל, is a play on the word for “shade,” צל. There also is intentional ambiguity in the use of רָעָה, for while God’s immediate purpose for the vine was to relieve Jonah’s discomfort, his real purpose was to deliver Jonah from his sinful attitude.

25 Kirk, Life and Mission, 217.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7–278.

 

9절)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라고 물으시고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라’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요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구원하심을 인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요나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 그는 '죽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하나님앞에 떼를 쓰고 있다. 요나는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죽기를 원한다. 2장에서 물에 빠져 죽을 지언정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거부하던 요나를 만났다. 또한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리세겠다던 심판을 거두시자 차라리 죽여달라고 항의하던 선지자를 보았다.(4:3) 그리고 이제 박넝쿨이 시드는 것으로 인해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앞서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박넝쿨이 시들었다고 내게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는 하나님께 남들은 박대하고 우리만 환대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10-11절) 이에 여호와께서 ‘네가 수고도 않고 재배도 하지 않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도 아끼면서 이 큰 성읍 니느웨에 있는, 죄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명의 사람과 많은 가축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은 요나와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대조를 읽을 수 있다. 

요나는 수고도 않고 재배도 하지 않고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버린 박넝쿨을 아꼈다. 

하나님께서는 큰 성읍안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명의 사람과 가축을 아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박넝쿨을 아꼈지만 나는 사람을 아꼈다라고 말씀하신다. 

 

니느웨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큰 성읍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저 큰 성읍 니느웨는 죄악이 가득한 도시였다.(1:2) 그런데 이제 니느웨는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큰 성읍 니느웨가 되었다.(4:11) 니느웨가 회개한 것이다. 니느웨라는 성읍의 물리적인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큰 성읍이었다. 회개를 통해서 신분상의 변화,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도시가 된 것이다. 

본문의 12만명이라는 숫자가 많은 사람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니느웨와 주변의 모든 인구를 표현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수많은 사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니느웨와 주변의 인구를 포함한 숫자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많은 이들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셔서 이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요나서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10 Whereas God’s question in v. 9 seemed to contain the element of tenderness, the statement of the Lord in v. 10 conveys the idea of forcefulness. The reluctant pupil was then addressed in terms that commanded attention. Gaebelein states, “We may be sure, Jonah is at last ready to hear.”36 The wording in this verse obviously was chosen for emphasis. The emphatic “you” of v. 10 (“You have been concerned about this vine”) is in contrast with the emphatic “I” of v. 11 (“Should I not be concerned about that great city?”).

The word translated “concerned” (ḥûs) in vv. 10–11 also is significant. The translation “have compassion” would better express the emotional connotation of this word. While one normally does not have pity on a plant, the Lord was driving home Jonah’s inappropriate expression of anger. The Lord continued his teaching lesson as he admonished Jonah for his inappropriate compassion for a plant for which he had done nothing. He had neither cultivated nor encouraged the growth of the plant, and yet he used it to express ultimate anger. Because of the withering of an inanimate plant whose life was measured by a single day, he wished to die. He simply had no right to make any claims regarding the plant. It had been a gift of God’s grace. The Lord was trying forcefully to drive home the ultimate question, “Who are you [Jonah] to question me?” Jonah’s anger expressed not only a lack of understanding but also a lack of trust.

36 Gaebelein, Servant and Dove, 135.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81–282.

 

4:11 Jonah’s deep concern had been expressed on behalf of a relatively insignificant portion of God’s creation, the vine, while God’s deep concern was expressed on behalf of his highest creation, human beings. Jonah apparently had grown completely indifferent to the fate of God’s creation beyond the bounds of Israel. At every point in this entire chapter, Jonah’s attitude stands in complete contrast to God’s relationship to Nineveh. God created and nurtured them and extended to them the hand of mercy.

Jonah did not answer correctly God’s questions in vv. 4 and 9 and thereby showed his lack of understanding. Consequently, God drew the tremendous contrast between Jonah’s anger over the death of a plant and his own delight in Nineveh’s turn toward life. The first clause in the Hebrew text is literally, “Should I, on the other hand, not have compassion on the great city of Nineveh?” The NIV moves this phrase to the end of the verse in an apparent attempt to end the text with a question for the readers to answer. The rearrangement of the clause is unnecessary and perhaps unfortunate. Leaving it as it is found in the Hebrew text shows the connection better with v. 10.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82.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섹션에서 요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창조주인 내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훌을 베푸는데 인간인 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 ?". 하나님께서는 똑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만일 요나처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 스스로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오히려 인간의 허락에 따라 은혜를 베풀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긍훌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왜 우리만 사랑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신다. 그것도 매우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세요?" 하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양 쪽으로 팔을 활짝 펴시면서 이만큼!’ 하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내가 하나님께 소중하다면, 타인도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엑스포지멘터리 127) 

 

요나가 초막을 짓고 그늘을 만들기 위해서 식물의 잎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잎은 강한 빛에 금새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친히 에비하신 것이다. 요나가 기뻐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불과 하루만에 벌레와 뜨거운 동풍으로 인해 이 박넝쿨이 시들어버리자 요나는 도리어 낙심하여 죽기를 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해서 네가 박넝쿨도 아끼면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수 많은 니느웨 백성들과 가축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들을 아끼고 있으며 요나도, 또한 우리들도 이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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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it displeased Jonah exceedingly,1 and yhe was angry. And he prayed to the Lord and said, “O Lord, is not this what I said when I was yet in my country? zThat is why I made haste to flee to Tarshish; for I knew that you are a agracious God and merciful,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and arelenting from disaster. bTherefore now, O Lord, please take my life from me, cfor 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 And the Lord said, d“Do you do well to be angry?”

1 Hebrew it was exceedingly evil to Jonah

y [ver. 4, 9]

z ch. 1:3

a See Joel 2:13

a See Joel 2:13

b [1 Kgs. 19:4]

c [Eccles. 7:1]

d [ver. 1, 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4:1–4.

 

4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4:1–4.

 

 

요나의 분노에 찬 기도

 

욘 1:17-2:10

욘 4:1-4

1) 요나 “여호와께 기도하다"

1:17-2:1

4:1-2

2) 요나의 기도

2:1-9

4:2-3

3) 하나님의 말씀

2:10

4:$

1절) 그것이 요나를 매우 불쾌하게, 못마땅하게 하였고 그는 성을 냈다. 

본문에서 요나가 화낸 이유는 바로 앞선 3:10의 내용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그 악(라아)에서 돌이켰고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라아)을 내리지 않으셨는데 요나만이 홀로 싫어하고(라아) 있다.

 

요나의 분노의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는 2절에서 말한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들을 용서하실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마도 니느웨(앗수르)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억압했기에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싫어했고 그래서 이들을 향한 재앙을 돌이키신 것때문에 분노한다. 

 

4:1 Nineveh’s repentance led to the reaction of mercy from the Lord and great displeasure from Jonah. What pleased God displeased Jonah. After recognizing that God had relented of his threatened destruction, Jonah reacted in a way many would deem peculiar. One writer says, “Jonah finds that the time-fuse does not work on the prophetic bomb that he planted in Nineveh.”1

The NIV speaks of Jonah’s great displeasure and great anger. The literal translation is, “It was evil to Jonah with great evil.” There is a play on words here with the root rāʿâ, which can refer to wickedness on the one hand (see 1:2) or to disaster, trouble, or misery as here. The evil that was characteristic of the people of Nineveh here described the prophet of God.

As we study this verse in context, we find that several emotions were involved: anger and displeasure as well as a lack of understanding. Jonah literally hated what God had done. As God’s anger and judgment were averted in chap. 3, Jonah’s anger was incited. Why was Jonah’s reaction so negative? Could his reaction have been due to a narrow-minded nationalism as a Hebrew prophet? Many have supposed that this was the primary reason for Jonah’s displeasure and the main target of the book’s author.2 Others have cited as the cause Jonah’s awareness that Assyria would be the downfall of Israel. Nineveh was head of a resurgent Assyrian military state. Even in this period of Assyrian history, their imperialistic ambitions had been displayed. Perhaps Jonah foresaw and feared the movement of the Assyrian armies toward Israel. The stigma of being instrumental in the sparing of one of Israel’s greatest enemies may have been more than Jonah’s emotional makeup could withstand. Still others point to the possibility that Jonah felt his personal reputation was at stake. After all, he had prophesied destruction, and then it did not occur. Calvin said that the reason for Jonah’s anger was “because he was unwilling to appear as a vain and lying prophet.”3 This “loss of face” would cause him an embarrassing loss of stature in Nineveh. In addition, what would happen when he returned home to Israel?

Another explanation supposes that Jonah had proclaimed devotion to Yahweh in his native Israel with very little success. Israel was experiencing a time of prosperity and resulting lack of dependence on Yahweh. Perhaps Jonah longed for God’s strong hand of judgment to awaken Israel. If God had destroyed Nineveh, what a mighty lesson it would have been to the Hebrews. Jonah recognized that God averted judgment and thereby removed the very weapon from his hand by which he hoped to prevail with his rebellious countrymen.4

At the very worst we see a prophet with a shocking disregard for human life and a bitter hatred toward those who had experienced mercy. At the very best he was a prophet who misunderstood God’s mercy and had a limited view of God’s plan for the redemption of his own people. While there may have been some reasons for Jonah’s displeasure, it is sad to see him place limits on the same grace that saved him. While missionaries and evangelists would be delighted at such results, Jonah failed to recognize his privilege of being an instrument of God in a miraculous situation. Failing to recognize God’s sovereign plan, he missed the joy of the situation. Much like Elijah (1 Kgs 19:3–18), Jonah sank into a selfish state of mind. Here again the message of the Book of Jonah is seen to be abidingly relevant. Countless numbers of modern-day believers miss much of the joy of being involved in God’s wonderful work because of self-centeredness.

1 L. C.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76), 227.

2 D. Stuart, Hosea-Jonah, WBC (Waco: Word, 1987), 501–2.

3 Calvin, quoted in P. Fairbairn, Jonah, His Life, Character and Mission (Grand Rapids: Kregel, 1964 [1849]), 148.

4 Ibid., 156.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1–272.

 

2-3절) 요나의 기도

요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고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가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을 요청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요나의 기도를 통해서 요나의 이중성, 자기중심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은 욜 2:13에서 소망의 근거가 된다. 

요엘 2:13 (NKRV)

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출애굽기 34:6–7 (NKRV)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6–7 (NKRV)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시편 145:8 (NKRV)

8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기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인애(헤세드)가 요나 자신에게 베풀어졌을때에는 감사를 했지만(2:9) 니느웨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을 때 요나는 분노하며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빠진 한 선지자를 만나고 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차서 그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들에게 임한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지만 이것이 타민족, 이방에게 전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못마땅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심지어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사람들에게까지 베푸는 일방적인 배려를 뜻한다(cf. 33:12, 16-

17). 

둘째,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이 단어는 지궁(womb)과 연관된 단어로서 어머니의 아이를 향한 모성적인 사랑과 관심을 뜻한다.

셋째,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분이시다. 이 문구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긴 코를 가지다”라는 뭇이다(cf. 장 14:29; 15:18; 16:32). 히브리 사람들

은 사람이 화가 나면 코에서 열이 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코가 길면 그만큼 열을 식힐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화를 더디 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긴 코를 가진 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은 다정하시고 자비가 많으신 분이라는 의인법이다.

넷째,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신 분이시다. 인자(헤세드)는 근본적으로 언약/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뭇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자가많은분이라는것은이스라엘과의 언약을충실하게 지키며 이행하실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오까지도 용서하시고 용납하셔서 언약관계를 유지하시겠다는 의지를 밝히시는 것을 뭇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인자가 많으신 분이 되신 것은 곧 그들의 참회를 받으시고 누구든지 회개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분이라는 뜻이다. 혹은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로 가득한 분이라는 뜻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시는 분이시다. 요나는 이 사실을 니느웨에서 체험했다. 죄인이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셨고 이미 선포하셨던 재앙마저도 거두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중에 죄에 대한 심판만람은 항상 바뀔 기능성이 었다. 죄인이 회개하면 언제든지 계획하신 심판을 취소하시거나 보류하신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심판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일로 인해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분’이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명예훼손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기를 원하신다. 그만큼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이신 것이다.

이처럼 보수적인 신학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왜 삶에서는 이 원리들을 적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요나의 삶에서도 신학과 삶이 따로 놀았던 것일까? 우리는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결핍되었던 선지자를 보며 무엇을 배우는게 혹시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지는 않은개 펼자는 목회자 세미나에서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진보적인 신학을 지향히는 사람들은 신론을 다시 해야 하며,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인간론을 다시해야 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 하나님은 실존히는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만들어낸 말들이요, 그 말들을 담고 있는 성경은 인간이 저작한 책이지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야 한다. 반면에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일수록 인간(죄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틀의 고통과 필요(need)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비와 긍흘이 동반하지 않는 신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요나가 건전한 신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이 살게 된일로 인해 분개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인간의 고충과 아픔에 대한 이해를 새로이 해야 히는 것이다.(엑스포지멘터리 115-117)

 

3절에서 내 생명은 히브리어로 ‘나프시’이고 사는 것은 히브리어 ‘하야이’이다. 이 두 표현은 앞서 요나의 첫번째 기도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자신의 생명이 구덩이(2:6)에서 건짐을 받은 것과 자신의 희미해져가는 영혼이 되살아난 것(2:7)에 대해 감사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똑같은 자비를 니느웨 백성에게 베푸셨을 때 요나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시기를 구하고 있다. 

 

요나의 신앙은 말그대로 정통, 보수 그 자체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2절에서 묘사하면서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정확히 알고 있었다. 

 

4:2 In this verse Jonah shared with the Lord his reason for anger and turmoil. At least Jonah did express this to the Lord in prayer. Instead of complaining about God, he complained to God. However, this prayer was quite unlike Jonah’s prayer in 2:1. Obviously, differing circumstances call for different kinds of prayers. But often differing kinds of prayers suggest varying stages of maturity or serve as an indication of swings in commitment. In this prayer we find a reversion to the “old Jonah” who ran away from God’s stated wish.

The prayer begins with a particle of entreaty, but the petition does not appear until the end. The selfishness of this prayer needs to be noted. The word “I” or “my” occurs no fewer than nine times in the original. Not only does this prayer show an extreme selfishness, but it also indicates Jonah’s shortsightedness. As stated in the prayer, he had already told the Lord what he dreaded, and yet the Lord, by his action, had brought it about. This was a grave offense to Jonah. He presumptuously felt that the Lord should have shaped his course according to his (Jonah’s) mind. Jonah did not want God to do what was right and proper according to his merciful nature. Instead of bestowing upon Nineveh the kind of grace God had granted to Israel, Jonah wished the Ninevites’ destruction without any chance to repent. It is easier to assume that God is with “us” more than he is with our foes. The natural tendency of Jonah and his readers would have been to presume that God could never be “on the side” of the Ninevites.5 Jonah audaciously stated, in essence, “I told you so.” Then he acted as though this was sufficient to excuse his running to Tarshish.

The second half of v. 2 rehearses God’s compassionate nature. In this segment Jonah went on to argue with God by complaining about God’s goodness! To Jonah the most recent occurrences in Nineveh seemed a theological embarrassment and a divine faux pas.6 In this sarcastic complaint Jonah cited an ancient formula that is basically a quotation of Exod 34:6–7.7 The wording used here is descriptive of God’s character. First, God is seen as a “gracious” (ḥannûn) God. This word communicates the attitude of the Lord toward those who are undeserving, thereby expressing benevolence in the ultimate sense. The next word used to describe God is the word “compassionate” (raḥûm). This word is translated in many ways and can mean “loving” or “merciful.” It also expresses the understanding and loving compassion of a mother to her child, hence the idea of understanding and loving favor. God is also described as “slow to anger” (ʾerek ʾappayim). This speaks to the patience and longsuffering of the Lord. Nineveh was the obvious recipient of this characteristic of the Lord. The next phrase used to describe God in this segment is “abounding in love” (rab ḥesed). The word ḥesed refers to the covenant love of God. This attribute expresses itself in redemption from sin. It encompasses the qualities of kindness, loyalty, and unfailing love. No one term in English adequately and accurately expresses the meaning of ḥesed. This covenant love issues itself in God’s being “a God who relents [niḥam] from sending calamity” (rāʿâ). Amazingly, Jonah did not use these words in praise to the Lord but as a tirade against him.

This verse is an extremely disturbing one. It indicates that while Jonah had become obedient, he still lacked a spirit of submission. Lest we judge Jonah too harshly, we should remember the common frailty of murmuring against God’s sovereign will. Throughout the pages of history, believers have stood in direct opposition to God’s revealed will and sought the implementation of their own wishes.

5 Stuart, Hosea-Jonah, 502.

6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229.

7 This statement had virtually the status of a creed in ancient Israel. It occurs some ten times (Exod 34:6–7; Joel 2:13; Num 14:18; Neh 9:17; Pss 86:15; 103:8; 145:8; Nah 1:3; 2 Chr 30:9) and is alluded to in many other places (e.g., Pss 111:4; 112:4; 116:8).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2–274.

 

4절)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다. 

이 말은 정죄의 말이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해보도록 유도하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한 일,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던 일 등 과거의 그의 행적으로 인해 그를 탓하거나 문제 잠시 않으신다.  그러면서 그가 지금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인해서 화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화를 내며 억지를 쓰는 요나를 책망하지도 않으시고 대화를 멈추시려고 하지도 않으신다. 어쩌면 자기의로 충만해 있는 요나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도록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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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 reached3 the king of Nineveh, and phe arose from his throne, removed his robe, covered himself with sackcloth, qand sat in ashes. And he issued a proclamation and published through Nineveh, r“By the decree of the king and his nobles: Let neither man nor sbeast, herd nor flock, taste anything. Let them not feed or drink water, but let man and sbeast be covered with sackcloth, and let them call out mightily to God. tLet everyone turn from his evil way and from uthe violence that is in his hands. vWho knows? God may turn and relent wand turn from his fierce anger, so that we may not perish.”

10 When God saw what they did, xhow they turned from their evil way, xGod relented of the disaster that he had said he would do to them, and he did not do it.

3 Or had reached

p [Job 1:20; Ezek. 26:16]

q Job 2:8

r [Dan. 6:26]

s [ch. 4:11; Ps. 36:6; Joel 1:18, 20]

s [See ver. 7 above]

t Jer. 18:11; 36:3

u Isa. 59:6

v 2 Sam. 12:22; Joel 2:14

w Ps. 85:3

x [Jer. 18:8]

x [Jer. 18: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3:6–10.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3:6–10.

 

 

니느웨는 사흘 길을 걸을 만큼의 큰 성읍인데 요나는 하루 동안 선포했고 이에 즉각적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반응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었던 사실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지만 더욱 놀라운 기적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자마자 하루만에 회개하고 나아온 것이다. 

 

6절) 니느웨 왕이 요나가 니느웨에 대해서 선포한 메시지를 들었다. 그러자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본문의 니느웨 왕은 앗수르 왕이라기 보다는 니느웨를 다스린 지방  총독이었을 것이다. 

 

The remainder of v. 6 describes the exciting response by this ruler. He rose50 from his throne, the seat of his royal power, and humbled himself with the common people. He laid aside his robe, which was a large and beautifully embroidered mantle. The word that is used here for robe is the same as that given to the garment found by Achan among the spoils of Jericho (Josh 7:21). In its place the king put on sackcloth as a sign of mourning, and he sat in ashes, a sign of deep humiliation. The radical nature of his repentance is stressed by the literary structure of the clauses:

he rose from his throne,

took off his royal robes,

covered himself with sackcloth

and sat down in the dust.

He who was the highest in the empire took the lowest position of abasement.51 It must also be noted that Ezek 26:16 depicts the mourning of the Tyrians over the ruin of their capital in just the same manner as the king of Nineveh is described here; however, instead of sackcloth they clothed themselves with “terror.”

50 Trible notes (Rhetorical Criticism, 183) that this verb is used previously with Jonah as the subject in 1:3 and 3:3 to describe his response to the Lord’s “word” (דָּבָר).

51 Kirk, Life and Mission, 174–75.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65.

 

7-9절) 왕은 왕과 그의 대신들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였다. 아무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고 먹지도 말고 물을 마시지도 말고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힘을 다해 부르짖으라. 모두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자신의 손으로 행한 폭력으로부터 돌아서라. 하나님께서 그의 맹렬한 분노를 돌이키시고 노를 누그러뜨리실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7절에서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리는데 이미 5절에서 니느웨 백성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었다. 이는 3장의 본문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순서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왕이 먼저 조서를 내리고 그 다음에 백성들이 그 조서를 실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5절에서 먼저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신속하게 백성들이 요나의 메시지에 반응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지금 니느웨 왕과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화개했는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않았다.(왕하 17:13-18) 

열왕기하 17:13–18 (NKRV)

13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본문에서 왕이 백성들에게 내일 칙령의 내용은 4가지로 요약된다. 1) 금식, 2) 굵은 베옷을 입을 것, 3)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 4)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다. 

 

- 7,  The decree called for four behavioral responses to Jonah’s message: fasting (v. 7), wearing sackcloth, pleading with God, and turning from evil and violence (v. 8). The decree regarding fasting consists of two parts: a general order not to “taste anything,” which is then emphasized by a command neither to “eat” (better “graze”) nor to drink. The unusual aspect of the decree was the inclusion of animals in the fasting and also the wearing of sackcloth. There is some evidence of the involvement of animals in rites of mourning and humiliation among the Persians, although none has been found among the Assyrians.53 This is flimsy evidence, however, from which to argue for the Persian period as the time of writing,54 especially since even the Persian evidence is limited. D. J. Wiseman does cite an Assyrian decree from the early eighth century b.c. that calls for a general state of mourning and prayer by “you and all the people, your land, your meadows.”55

The inclusion even of animals in this royally mandated fast is the act of a desperate monarch and a desperate people. Fasting and uncomfortable dress represented self-denial. By eschewing normal comforts and making themselves physically miserable, they sought to show the genuineness of their prayers for mercy.56 This action was an attempt to impress forcibly upon the Lord the sincerity of Nineveh’s repentance. It was an attempt to move the heart of God and lead him to relent. In other words, they were using every option available, including superstition. Perhaps they also felt that combining their cries of contrition with the pleading of the animals for water and food would rise as one mighty prayer for mercy to this God who threatened their destruction.

53 Many point to the report of Herodotus that the Persian army cut the manes from their war horses as a part of the lamentation ceremony when an esteemed general was lost in battle (Herodotus, The Histories, 9.24). To a degree the cases are parallel, for in both instances animals were included in the symbolic expression of distress and sorrow. A nearer parallel to Jonah in ancient literature occurs in the apocryphal book of Judith (4:10–14), where animals were dressed in sackcloth as part of a day of repentance.

54 Allen uses it to suggest a date of composition in the Persian period, “between the mid-sixth century b.c. and the mid-fourth”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186).

55 D. J. Wiseman, “Jonah’s Nineveh,” TynBul 30 (1979): 51.

56 Stuart, Hosea-Jonah, 493.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66.

 

3:8 This verse contains the second, third, and fourth responses called for in the decree. The second response, the wearing of sackcloth, continued the external nature of the first and also its application to animals as well as humans. The inclusion of animals shows again the earnest, almost desperate, plea of the Ninevites. Outwardly, it sounds even more unusual to require animals to wear sackcloth than it did to require them to fast (v. 7). As seen earlier, this odd behavior was not uncommon in ancient cultures.

The next two responses had an internal and spiritual nature. The third commanded “everyone” (a word only implied in the Hebrew text) to call on God “urgently.” This adverb translates a Hebrew word meaning literally “with strength,” which perhaps “serves as a device by which to gauge the depth of a worshiper’s conviction57 and prepares us for the radical nature of the last required response. No subject is specified in this third part of the decree. The Hebrew text simply says, “Let them call to God with strength.” Some writers persist in extending the subject from the first two parts of the decree, where animals were included in the outward trappings of mourning and repentance. Although Job 38:41 refers to the raven’s young who “cry out to God” for food, it is not likely that the Assyrians expected their animals to voice their repentance to God.58

The last command, “Let them give up their evil ways and their violence,” indicates yet another point of advanced understanding by the ruler. He decreed that the people’s lives should match their prayers. The language of this verse is a typically Hebrew way of joining the general and the specific, the individual and the corporate. Anything and everything condemned by law and conscience is included under “evil ways,”59 but the pronoun is singular. It is literally, “Let them each turn from his evil way,” indicating individual responsibility. A generic term is used here and appropriately so, for the sins of the Ninevites would be as diverse as any people of any ag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word for “evil” is rāʿâ, occurring nine times in the book in its two senses of “evil” and “trouble, calamity” (see comments on 1:2). The Ninevites were to turn from evil to avoid trouble (cf. v. 10).

The phrase “their violence” is literally “from the violence which is in their hands.” It indicates a more specific confession and at the same time a corporate responsibility.60 Archaeology is unanimous in substantiating the cruelty of the Ninevites. One writer said, “The Assyrian records are nothing but a dry register of military campaigns, spoliations, and cruelties.”61 The term “violence,” the arbitrary infringement of human rights, is a term often used by the prophets (cf. Isa 59:6; Ezek 7:23; Hos 12:1; Amos 3:10). It seems to suggest moral misbehavior and aggressive violence toward other nations. Assyria, and therefore Nineveh, was especially guilty of such violence. The wickedness identified by God in 1:2 now becomes a point of self-awareness on the part of the Ninevites. They were urged by the king to change their ways.

57 Sasson, Jonah, 258. See also Trible, Rhetorical Criticism, 186.

58 Cf. Price and Nida, Translator’s Handbook, 61. Perhaps there is intentional ambiguity here to call attention to the fact that most of the praying in the Book of Jonah seems to have been done by nonbelievers.

59 Ellison, “Jonah,” 383.

60 Trible, Rhetorical Criticism, 186.

61 Kirk, Life and Mission, 184.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66–267.

 

9절에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것을 기대하며 이를 누가 알겠느냐라고 질문한다. 이는 앞서 선장이 한 말과 같다.(1:6) 

 

9절의 돌이키다라는 표현은 ‘니함’으로 문맥과 문법적인 형태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후회하다, 누그러뜨리다,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어가 사람일때는 주로 후회하다. 마음을 바꾸다라는 믜미로 사용되었다.)욥 42:6; 렘 31:19) 그러나 하나님이 주어로 사용되어서 사람들의 회개나 간주 혹은 다른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사용될 때 뜻을 돌이키다라는 의미로 쓰였다.(암 7:3)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돌이킴으로 인해서 그분이 니느웨의 죄악으로 인해 40일안에 무너뜨리실 것이라는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The word translated “relent” (niḥam) varies in meaning in different grammatical forms and in different contexts, but it always connotes in some sense the feeling of emotional pain.63 Elsewhere it can mean to “comfort” or “regret.” As Sasson explains, here and in its two other uses in Jonah (3:10; 4:2) it refers to “divine actions that are contemplated but are never fulfilled.”64 The meaning “repent” or “change one’s mind” is an appropriate translation when the subject is humans (cf. Job 42:6; Jer 31:19). But when it refers to God’s decision to change an announced course of action in response to human repentance, prayer, or some other circumstances, the translation “relent” is preferable (see Amos 7:3 and comments in this volume). In this chapter God decided that in light of Nineveh’s turning, he would save them rather than follow through on his previous announcement to destroy them.

63 Ellul, Judgment of Jonah, 98–99.

64 Sasson, Jonah, 262.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68.

 

10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것, 어떻게 그들이 그들의 죄악된 길에서 돌이켰는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돌이키셨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본문의 악과 재앙은 같은 단어, 히브리어 ‘라아’를 번역한 말이다.(1:2) 같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반응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이 자신들의 악을 회개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으로 그들에 대한 심판을 돌이키셨다. 

 

앞서 왕이 선포한 내용중에 금식이나 굵은 베옷, 부르짖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을 돌이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입으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자신이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의 정석에 따라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뜻을 돌이키셨다. 

이 돌이키다라는 단어는 ‘니함’으로 슬퍼하다, 위로를 받다, 수그러들다, 마음을 바꾸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에서 ‘느헤미야, 나훔’이 유래했다. 본절에서는 어떤 특정한 활동을 중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0절의 본문처럼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죄인들에게 돌려야할 화를 내리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한다.(출 32:12, 14; 렘 26:3, 19, 욜 2:14)

 

3:10 This verse explicitly relates the Ninevites’ repentance and God’s mercy. Its structure derives from the repetition of two Hebrew roots and the use of two synonyms, translated “turned” (šûb) and “had compassion” (nḥm). The structure can be seen more clearly by a literal translation:

Then God saw their deeds (ʿśh)

that they turned (šûb) from their ways of evil (rāʿâ)

and God relented (nḥm) concerning the “evil” (rāʿâ)

which he had spoken to do (ʿśh) to them, and he did not do (ʿśh) it.

The Ninevites’ “turning” from “evil” led to God’s “turning” from “evil.”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of all the “deeds” of the Ninevites, the fasting, wearing of sackcloth, calling on God, and turning from evil, only the last is mentioned as explicitly leading to God’s relenting. This is perhaps because it was Nineveh’s evil that led to Jonah’s mission in the first place (1:2).

As the king and people of Nineveh had hoped, God relented. No fire and brimstone fell on this Sodom-like city after all.66 God pulled back his hand of judgment, though not forever. As prophesied by Nahum, Nineveh later experienced total destruction. There was a period of many years, however, between Jonah and Nahum. Stuart said it well: “When Nineveh repented, God relented.”67 The very thought of God “changing his mind” causes difficulty for some believers. In perfect consistency with his justice, righteousness, and mercy, he spared Nineveh. There is absolutely no contradiction here. God’s character and his promises do not change, as Jas 1:17 says (cf. Num 23:19). But many other verses show that God does change his plan of action according to his purposes. In Exod 32:12 Moses prayed that Israel might not be destroyed despite their sinful behavior in making and worshiping the golden calf. He asked God, “Turn from your fierce anger, relent and do not punish your people” (cf. Amos 7:3, 6; Jer 18:7–11; 26:2–3). Again and again the Old Testament relays the truth that God is responsive to his creation.68

The turning of the Ninevites demonstrated at least a recognition of their condition before the Lord. God’s compassionate heart is always sensitive to those who cry out for mercy. This truth is evidenced powerfully here in v. 10. This passage speaks of the incredible mercy of God’s heart, of his incredible love. Here one finds irrefutable evidence that God wishes not for the destruction of the sinner but for the redemption and reconciliation of all his creation. Even if their repentance was not thorough, God’s hand of judgment was removed at least temporarily to give this frail flower of searching sufficient time to bloom.

66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226.

67 Stuart, Hosea-Jonah, 495.

68 Fretheim, Message of Jonah, 114.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69–270.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죄인이라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금식과 굵은 베옷을 입는 것과 같은 근신의 행위나 부르짖음도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뜻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바로 악한 행위를 멈추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포하신 심판 마저도 돌이키시는 분이시다. 

1장에서는 선원들이, 2장에서는 요나가, 3장에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 요나서는 3장에서 끝났다면 해피엔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나서는 4장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죄인들이 심판당하는 것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앞서 요나 또한 이를 경험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물에 던져져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셨다.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임해진 것이다. 요나를 통한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예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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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Jonah the second time, saying, “Arise, go to lNineveh, that great city, and call out against it the message that I tell you.” So Jonah arose and went to Nineveh,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Now lNineveh was an exceedingly great city,1 three days’ journey in breadth.2 Jonah began to go into the city, going a day’s journey. And he called out, “Yet forty days, and Nineveh shall be overthrown!” mAnd the people of Nineveh believed God. nThey called for a fast and oput on sackcloth, from the greatest of them to the least of them.

l See ch. 1:2

l [See ver. 2 above]

1 Hebrew a great city to God

2 Or a visit was a three days’ journey

m [Matt. 12:41; Luke 11:32]

n See 2 Chr. 20:3

o See 2 Sam. 3:3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3:1–5.

 

3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3:1–5.

 

 

1-2절)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로 임하였다. 앞서 1:1-2의 내용이 첫번째 임한 말씀이었다. 첫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갔던 요나를 돌이키게 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말씀을 주심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다. ‘내가 네게 명한 바’는 앞서 1:2에서 이야기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라는 내용이다. 

 

1장과 3장의 메시지는 비슷하지만 지금 요나는 엄청나게 많은 경험,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을 받아 다시금 말씀을 받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두번째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런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본문에서는 앞선 요나의 불순종에 대한 회개의 표현은 없다. 

3:1 If we read the Book of Jonah in one sitting, these words will be familiar, for 3:1–2 is strikingly similar to 1:1–2. In a sense Jonah was back to where he began. However, the Jonah in chap. 3 is somewhat different from the person found in chap. 1. Much had happened, and many lessons were learned, but the process of discipleship obviously was not yet complete. The text simply points out that God spoke to Jonah again. There is no mention of reproach for the prophet’s former disobedience. The Lord simply repeated his command. While Jonah had taken quite a detour since the first command, God’s will remained steadfast.

Although God’s word came to Jonah a second time, demonstrating his forbearance and mercy, examples in Scripture show that not everyone has a second chance to do what God has commanded (cf. Gen 3; Num 20:12; 1 Kgs 13:26). However, this text should bring thanksgiving to the heart of every believer who has been given another opportunity to do what God requires. This text, more than anything else, points to God’s sovereignty and his insistence upon the accomplishment of his will. As J. Baldwin has written, “He will not be frustrated by the effrontery of a prophet, nor has he allowed the prophet to wander indefinitely off course.”1

1 J. Baldwin, “Jonah,” in The Minor Prophets: An Exegetical and Expository Commentary, ed. T. E. McComiskey (Grand Rapids: Baker, 1993), 2:576.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54–255.

 

2절은 앞선 1:2과 같은 구조,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라는 세개의 명령을 하고 있다. 하지만 1:2은 요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이유에 방점이 있다면 3:2은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에 강조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그 말씀을 변경하거나 가감해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 전해야할 책임이 있다. 

3:2 This verse is almost identical to 1:2 except for the final clause (see Introduction, “Structure,” p. 219). It uses the same three imperatives in Hebrew, literally, “Arise, go … proclaim.” But in 1:2 the reason for Jonah’s mission is given, while in 3:2 the stress is on delivering God’s words. Although the precise content of the message Jonah was commanded to preach to this Assyrian city is not yet mentioned, two things are made clear: where he should preach and the source of the message. Jonah was given specific “marching orders” about the destination. He also was reminded that the message would not come from him nor from anyone else, but only from the Lord. His job was to deliver the message, not to critique or revise it.2

2 D. Stuart, Hosea-Jonah, WBC (Dallas: Word, 1987), 482. Another difference in 1:2 and 3:2 is that in 1:2 the verb קרא governs the prepositional phrase עָלֶיהָ, “against it,” which ends the main clause, whereas in 3:2 it governs אֵלֶיהָ, “to it,” followed by the object אֶת־הַקְּרִיאָה, “the proclamation,” with its modifying relative clause. As J. Sasson explains: “The first time around, Nineveh is simply being served with a death warrant. In this case, however, God commissions Jonah with a qerîʾâ; Nineveh, therefore, will receive a specific message from Israel’s god” (Jonah, AB [New York: Doubleday, 1990], 226).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55.

 

3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앞에 큰 성읍이었다. 

요나서에서는 반복해서 니느웨를 큰 성읍(1:2, 3:2)로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물리적으로도 큰 성읍이었고 당시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이 사흘 동안 걸을 만큼의 크기라는 것이 도시의 직경이 그정도의 거리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각각의 마을을 이동하며 메시지를 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The phrase “a very important city” is literally “a city great to God.”5 Most versions have rendered the word meaning “to God” (lēʾlōhîm) as an adverb such as “exceeding” or “very.” L. C. Allen sees this phrase as a striking, biblical way of expressing a superlative by bringing it into relation with God. It is simply saying that Nineveh was “God-sized.”6 Although the word ʾelōhîm may serve in this way elsewhere in Scripture,7 Sasson claims that in such cases it is always paired with a noun, such as “prince of God” in Gen 23:6 or “mountains of God” in Ps 36:6 [Heb., v. 7]. He favors treating the phrase “as a circumlocution whereby ‘the large city’ is said to ‘belong’ to God.” It thus expresses “God’s dominion over the staunchest of Israel’s foes.”8 While a literal rendering “great to God” may be unnecessary, clearly God cared deeply about the Ninevites, whom he had created in his image.9 Therefore he sent this prophet with a message that would ultimately lead to their turning.

Following the phrase “great to God” that modifies “city” is another phrase (literally), “a journey of three days.” While some would dismiss this phrase as part of the general hyperbole or exaggeration of the writer,10 several scholars have shown that it can be understood in a literal sense (see Introduction, “Date,” p. 206). In the first century b.c., Diodorus Siculus correlated all the information received from the fourth-century Ctesias that Nineveh’s total circumference was approximately fifty-five miles. Given this, a three-day journey would be a reasonable trek around the city.11 On the other hand, the Assyrian king Sennacherib (704–681) wrote that he enlarged the circumference of the city of Nineveh from 9,300 to 21,815 cubits, or from about three miles to seven miles.12

But Wiseman has shown that this phrase can relate not only to Nineveh proper but to the entire administrative district of Nineveh. This metropolitan district included also the cities of Assur, Calah (Nimrud), and even Dur-Sharruken (Khorsabad).13 This interpretation is supported by Gen 10:11–12, where “that is the great city” seems to refer to the whole district covered by Nineveh, Rehoboth, Ir, Calah, and Resen.

Regardless of the extent of Nineveh, perhaps the best way of understanding this phrase is as a description of the type of visit Jonah made to the city of Nineveh. As the NIV has translated, Jonah’s visit to Nineveh was a three-day event. Nineveh was a major diplomatic center of the ancient world, and the message God wanted the city to hear could not be shared hastily. For Jonah to have accomplished his mission, he would have had to travel to various sections, speaking to as many groups as possible.14 Such a visit could have taken three days. Another suggestion is that the three-day journey refers to the ancient Oriental practice of hospitality in which a visit required three days. The first day was for arrival, the second for the primary purpose of the visit, and the third for return.15 However the phrase is understood, it does not necessarily refer to the size of the city.

5 D. J. Wiseman has noted that Scripture uses the adjective “great” of only four cities: Babylon (Dan 4:30), Jerusalem (Jer 22:8), Gibeon (Josh 10:2), and Nineveh.

6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221.

7 Cf. Joüon and Muraoka, GBH § 142n; Waltke and O’Connor, IBHS § 14.5b.

8 Sasson, Jonah, 228–29.

9 Gaebelein describes the significant cultural attainments of Nineveh, verified by modern archaeology (Servant and Dove, 112–13).

10 Fretheim states that “the author’s purposive use of exaggeration is especially prominent in this chapter” (Message of Jonah, 106).

11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221.

12 J. Walton, Jonah, BSC (Grand Rapids: Zondervan, 1982), 37.

13 D. J. Wiseman, “Jonah’s Nineveh,” TynBul 30 (1979): 38.

14 Stuart, Hosea-Jonah, 487–88.

15 Wiseman, “Jonah’s Nineveh,” 38.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56–258.

 

4-5절) 이에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에서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앞서 3절에서 니느웨가 사흘 걸을 만큼의 규모의 도시였는데 요나는 고작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쳤다. 여전히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에 이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4절에서 무너지리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 사용된 동사이다.(창 19:21, 25, 29) 이는 ‘하파크’로 변하다, 멸하다, 돌아서다,  전복하다라는 의미이다. 

4절만을 읽으면 40일이 지나면 무조건적으로 무너지게 될 것처럼 읽히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이 뜻을 돌이키실 것이라는 한가지 조건이 숨겨져 있다.(렘 18:7-8) 

예레미야 18:7–8 (NKRV)

7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이러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4:2) 그래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까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 심판의 메시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히브리어 어순에서는 믿다라는 단어가 이 문자의 가장 처음에 등장한다. 이는 회개의 신속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금식을 선호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처럼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믿는 것은 고대에 강력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이었다.(느 9:1; 에 4:3; 단 9:3) 

Believed is the first word in the Hebrew text of the sentence, and the grammar underscores the immediacy of Nineveh’s repentance. To fast and wear sackcloth were ancient demonstrations of mourning (Neh. 9:1; Est. 4:3; Dan. 9: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690.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먼 여정을 통해서 니느웨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선포했다. 이는 히브리어로 단 여섯 단어에 불과하다. 이 짧은 메시지 외에 어떤 메시지를 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기괴한 선지자의 외침을 니느웨 사람들은 듣고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믿고 나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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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Jonah prayed to the Lord his God from the belly of the fish, saying,

x“I called out to the Lord, out of my distress,

and he answered me;

yout of the belly of Sheol I cried,

zand you heard my voice.

aFor you cast me into the deep,

into the heart of the seas,

and the flood surrounded me;

ball your waves and your billows

passed over me.

cThen I said, ‘I am driven away

from your sight;

dyet I shall again look

upon your holy temple.’

eThe waters closed in over me fto take my life;

the deep surrounded me;

weeds were wrapped about my head

at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went down to the land

whose bars closed upon me forever;

yet you brought up my life from the pit,

O Lord my God.

When my life was fainting away,

I remembered the Lord,

gand my prayer came to you,

into your holy temple.

hThose who pay regard to vain idols

iforsake their hope of steadfast love.

jBut I with the voice of thanksgiving

will sacrifice to you;

what I have vowed I will pay.

kSalvation belongs to the Lord!”

10 And the Lord spoke to the fish, and it vomited Jonah out upon the dry land.

x Ps. 3:4; 120:1; Lam. 3:55

y Ps. 118:5

z Lam. 3:56

a Ps. 88:6, 7

b Ps. 42:7

c Ps. 31:22

d [1 Kgs. 8:35, 38]

e [Lam. 3:54]

f Ps. 69:1

g [2 Chr. 30:27]

h Ps. 31:6; [2 Kgs. 17:15; Jer. 2:5]

i [Jer. 2:13]

j Ps. 50:14; [Hos. 14:2; Heb. 13:15]

k Ps. 3: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2:1–10.

 

2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1)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1) 음부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2.

 

 

1-2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여호와를 불러 아뢰었더니 그가 나에게 응답하셨다. 스올의 뱃속에서 내가 부르짖었더니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 

 

이방의 선원들조차 각자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했지만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었다. 결국 물에 던져져서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요나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요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었다. 부르짖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기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죽음의 공포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통해서 그를 구원하신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건지신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거부했던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게 되었다. 이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던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어쩌면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면서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고 그래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추적하고 계신다. 그리고 먼저 큰 물고기를 통해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어미신 것이다. 그러지 그 죽음의 문턱에서 요나의 마음이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게 된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한 경험은 어땠을까? 큰 물고기에게 삼킨바 되어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스올의 경험을 하고 있다. 스올은 음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2:1 The significance of this verse is found in Jonah’s willingness to pray. From a near drowning experience he awakened to find himself in a terrifying environment. Nonetheless, his ability to breathe and continue living was a cause for rejoicing. So he prayed (lit.) “from the belly of the fish.” We do not know how long Jonah was in the fish before he prayed. No doubt he found his entire experience in the sea overwhelming. That this prophet of few words finally prayed marks a turning point in the book. Although exhorted to pray earlier by the pagan captain, there is no indication Jonah did so.13 That Jonah prayed not only to the Lord, as the sailors did, but to “the Lord his God” is significant.

13 Price and Nida, Translator’s Handbook, 35. The usual verb for “pray” (hithpael of פלל) is used twice in the book, here and in 4:2. Elsewhere the verb is קרא, “call.”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42.

 

The term “my distress” defines Jonah’s situation, and its poetic parallel, beten šĕʾôl, literally, “the belly of sheol” (“the depths of the grave”), would be understood by the reader as metonymy, the use of a term in place of that to which it compares. Jonah believed that he was as good as dead, that he had been “eaten” by death, which was often spoken of as an enemy that devours (Pss 49:14; 55:15; Prov 1:12; 27:20; Isa 5:14). Jesus’ comparison of his own coming death to this event in Jonah’s life focuses on two elements of correspondence: the time period of three days and the nature of the event as a sign (cf. Matt 12:40; 16:4; Luke 11:29–30). While Jonah’s imagery of death supported the comparison, a literal correspondence at this point was not required by the comparison.28

28 On the nature of Jonah’s experience as “a sign to the Ninevites” (Luke 11:30), see E. H. Merrill, “The Sign of Jonah,” JETS 23 (1980): 23–30. He argues that the sign was Jonah’s deliverance from the fish, interpreted in light of the name of the city, which meant “fishtown,” and the Ninevites’ belief that their city was founded by a fish god. Jonah’s experience was somehow communicated to the inhabitants, who concluded that he was a divine messenger.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46.

 

3-4절) 주께서 요나를 깊음 속 바다에 던지셨고 큰 물이 요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요나의 위에 넘쳤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요나의 현재 상태에 대한 인식과 변화, 요나는 지금 물속에 던져저서 큰 파도와 물결에 둘러 있다. 그는 주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추적하셨다. 그리고 그로 인해 큰 바람과 물결로 배를 흔드셨고 결국 그를 바다에 던져 넣게 하셨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다시금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럼에도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라고 고백한다. 결국 구원의 시작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 상태를 인식하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구원과 변화는 시작된다. 

요나는 주께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셨다라고 고백한다. 물론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다. 하지만 요나는 분명히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선원들이 자신을 바다에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2:3 Perhaps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v. 3 is Jonah’s testimony to God’s sovereignty. He not only recognized God’s hand in his being thrown into the sea, but he also saw the “waves and breakers” that swept over him as belonging to God, tools in his hand. He finally came to grips with the author of his life. Martin Luther said: “Jonah does not say the waves and the billows of the sea went over me; but thy waves and thy billows, because he felt in his conscience that the sea with its waves and billows was the servant of God and of His wrath, to punish sin.”29

It may be that the sea language in this verse and others must be understood both figuratively and literally.30 However, it is an accurate description of Jonah’s experience after being thrown overboard.

29 Quoted in Keil and Delitzsch, “Jonah,” COT, 10:401.

30 Fretheim, Message of Jonah, 102.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46–247.

 

5-7절)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고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다. 내가 산의 뿌리가지 내려갔으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막았으나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 즉 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했더니, 기억했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고 주의 성전에 이르렀다. 

 

지금 요나는 죽음의 지경까지 내려갔다. 거의 임사체험에 가까울 정도로 음부, 죽음이 그를 가두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건지셨다. 7절의 본문에서 요나의 생명이 힘이 없게 되었을때에,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그가 한 것은 여호와를 기억한 것이다. 여호와를 기억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이 임하게 된다. 지금 요나가 한 것이라고는 물고기 뱃속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께 기도한 것이다. 그러자 요나의 기도가 주님께 닿았고 성전에 이르렀다. 

 

6절에서 요나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라고 말한다. 이 ‘야라드’라는 표현은 창 11장에서 바벨탑 사건에서 처음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죄악을 보시고 내려오셔서, 강림하셔서 그들을 흩으섰다. 요나서에서 이 내려가다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1:3에서 먼저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1:5에서 요나는 풍랑을 보고 배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6절에서 요나는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산의 뿌리, 음부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감은 절정에 이른다. 이제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덩이에서 건져올리셨다. 죽음은 요나를 가두려고 빗장을 채우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신 것이다. 

요나를 깊음 속 바다에 던지신 주께서 이제 그를 깊은 곳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음 가운데 던지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 깊은 곳에서 구원해 내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이제 요나는 앞서 1절에서 ‘그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해었는데 이제야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요나서에서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처음 부르고 있다. 

 

지금 요나는 가장 깊은 음부의 구덩이에서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한다. 가장 성전과 대조되는 곳에서 성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으실 것을 약속하신다.(왕상 8:30, 35, 38, 42; 단 6:10) 

 

2:7 While it is obvious from a reading of the entire Book of Jonah that the prophet had not reached spiritual maturity, there were some significant advances in his life. This prayer clearly shows him turning back to the Lord. This verse echoes the initial summary statement in v. 2 of Jonah’s distress and his prayer, which the Lord answered.49

It is accurate to call Jonah an Old Testament prodigal. L. C. Allen picks up on this theme: “Now the prodigal returns, drawn closer to him than ever before by the cords of redemptive love. Just as dire physical extremity forced the prodigal son to a decision to return home in penitence, so Jonah in his last moments thought of the one who alone could help him as Creator and controller of the sea.”50 As Jonah had said more than once (vv. 2, 5, 6), his “life” was as good as gone. The word for “life” here is different from the one used in the previous verse. Here it is the word nepeš that occurs in v. 5. It was at this desperate moment, he said, when (literally) “Yahweh I remembered.” The verb “remember” (zākar) refers here to the mental act of focusing attention on something. It is almost always the basis for action (Exod 20:8; Num 15:40; Ezek 6:9). By itself, especially in contrast to “forget” (šākaḥ), it often means “to act on the basis of knowledge” (cf. Ps 74:22–23). In 2 Sam 14:11 it is translated “invoke,” which would fit here as well.51

The last phrase of v. 7 is identical in Hebrew to the final phrase of v. 4. However, there is no proof that the earthly temple in Jerusalem was intended here. For example, Solomon’s prayer in 1 Kings 8 shows the ideas of the earthly temple and the heavenly dominion of God as closely related. Simply, Jonah knew that his prayer reached God’s heart.

49 Wolff, Obadiah and Jonah, 137.

50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217–18. See also Gaebelein, Servant and Dove, 104.

51 J. T. Walsh explains that Jonah’s “last conscious thought had been a remembrance of Yahweh” and that “this thought must have been received as an effective prayer for salvation” (“Jonah 2:3–10,” 224).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50–251.

 

8-9절)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으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게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이제야 요나는 조금 정신을 차리고 거짓되고 헛된 우상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자신의 서원을 갚을 것을 약속한다. 도한 구원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고백한다. 

8절은 각자 자신의 신에게 기도했던 이방의 선원들을 가리킨다.(5절) 뿐만 아니라 이는 헛된 신을 섬기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을 향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본것처럼 이방의 선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신들을 향해서 기도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한다. 도리어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다. 

구원이 여호와께 속해있다라는 요나의 고백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이후의 요나의 행적은 이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여전히 니느웨의 백성들의 회개와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심을 그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두를, 그들 까지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0절)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자 그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었다. 

 

2:10 In this verse the narrative of 1:17 is resumed. The verse begins with the Lord’s speaking to the great fish. God concluded his assignment for this fish by commanding it to relieve itself of its cumbersome cargo. The word translated “vomited” in the NIV is a coarse word and is used in the Old Testament only in images that arouse disgust (Isa 19:14; Jer 48:26; Lev 18:28). While in other versions it is translated “spit” or “spewed,” the word used in the NIV is not only graphic but also accurate.57

Jonah’s expulsion from the ship may have landed him in the coastal area near Joppa, his “starting place.” At least one writer makes this assertion based on a probable translation of 1:13, where the seamen rowed hard to bring the ship “back” to the land. This indicated their nearness to the starting port of Joppa.58 The point of emphasis here is that Jonah was returned to dry land, thus completing God’s rescue.

This chapter may be the “happiest” section in the entire book. These verses contain the story of miracle and grace, praise and thanksgiving, deliverance and renewed hope. In this chapter the poor fish is relieved of its cargo (few ever express sympathy for the difficult days of this marine creature). In these verses are found the education of the pouting prophet and the affirmation of God’s sovereignty. It is God who is the most important character. He is the one who affects salvation, and he is the one who enables deliverance. Neither Jonah nor the fish had control. It was God and God alone.

57 A. J. Wilson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 and Its Modern Confirmations,” 637) relates the sperm whale’s practice of relieving itself of awkward and indigestible objects.

58 Gaebelein, Servant and Dove, 107. This point is used to show that when a person rebels, God wishes to bring that person back to the point of departure from fellowship. While this may be true, this text does not contain any such message. Jonah 3:1 may, but 2:10 does not.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52–253.

 

선원들은 요나와 자신들을 육지에 내려놓으려고 수고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육지에 내려주셨다. 이 육지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 니느웨 인근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욥바 인근일까? 결국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망하던 요나는 다시금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서게 된다. 

 

본문 2장은 전체 요나서에서 가장 행복한 장이다. 본문에는 기적과 은혜, 찬양과 감사, 구원과 희망의 쇄신을 담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시고, 자연을 다스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결코 요나도, 물고기도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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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h Is Thrown into the Sea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ncast lots, that we may know on whose account this evil has come upon us.” So they cast lots, and the lot fell on Jonah. Then they said to him, “Tell us on whose account this evil has come upon us. What is your occupation? And where do you come from? What is your country? And of what people are you?” And he said to them, “I am a Hebrew, and I fear othe Lord, the God of heaven, pwho made the sea and the dry land.” 10 Then the men were exceedingly afraid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that you have done!” For the men knew that hhe was fleeing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because he had told them.

11 Then they said to him, “What shall we do to you, that the sea may quiet down for us?” For the sea grew more and more tempestuous. 12 He said to them, “Pick me up and hurl me into the sea; then the sea will quiet down for you, qfor I know it is because of me that this great tempest has come upon you.” 13 Nevertheless, the men rowed hard2 to get back to dry land, but they could not, for the sea grew more and more tempestuous against them. 14 Therefore they called out to the Lord, “O Lord, let us not perish for this man’s life, and rlay not on us innocent blood, sfor you, O Lord, have done as it pleased you.” 15 So they picked up Jonah and hurled him into the sea, tand the sea ceased from its raging. 16 Then the men feared the Lord exceedingly, uand they offered a sacrifice to the Lord vand made vows.

A Great Fish Swallows Jonah

17 3 And the Lord appointed4 a great fish to swallow up Jonah. wAnd Jonah was in the belly of the fish three days and three nights.

n [Judg. 20:9]

o Rev. 11:13

p Ps. 146:6

h [See ver. 3 above]

q [Josh. 7:20]

2 Hebrew the men dug in [their oars]

r Deut. 21:8

s [Ps. 115:3]

t Ps. 65:7; Luke 8:24

u [Gen. 8:20; 31:54]

v See ch. 2:9

3 Ch 2:1 in Hebrew

4 Or had appointed

w Matt. 12:40; 16:4; [Luke 11:3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1:7–17.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의기도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1:7–17.

 

 

7-10절) 심한 폭풍으로 인하여 배안의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고자 하였다. 이에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뽑혔다. 그러자 무리가 이 재앙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요나에게 물으며 그의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느 나라이며 어느 민족에 속했는지를 물었다. 

이에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며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인데 지금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였기에 폭풍이 임했음을 말하자 무리가 이를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7절의 제비는 히브리어 ‘고랄’로 몫, 제비(물건), 분깃, 운명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무작위로 나온 결과를 통해서 결정을 내리거나 하나님(신)의 뜻을 결정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작은 물체를 의미한다.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 이러한 물건을 사용하였다.(민 16;8, 수 18:6, 수 21:4)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주장하신다고 생각했다.(잠 16:33) 

잠언 16:33 (NKRV)

33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The casting of lots was a widely used method in the ancient Near East.37 The most common word used for “lot” indicates that they were either stones or pebbles38 that were painted or colored. When the stones were thrown, if two dark sides landed up the usual interpretation was no. If two light sides landed up, that meant yes. A light and a dark side meant throw again. Using this system, the sailors dealt with each individual until the color revealed the guilty person.39 This specific means of discerning the Lord’s will is found many times in Scripture. For example, the casting of lots was the means for determining the guilt of Achan (Josh 7:14–18), for distributing the land to the tribes of Israel (Josh 18:10), and for selecting Saul as king (1 Sam 10:20–22). As Prov 16:33 says, “The lot is cast into the lap, but its every decision is from the Lord.”

37 Sasson, Jonah, 108–10.

38 J. Lindblom, “Lot-Casting in the Old Testament,” Journal of Theology 12 (1962): 164–78.

39 Stuart, Hosea-Jonah, 459–60.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2.

 

이 제비뽑기의 결과로 요나가 뽑히자 배안의 사람들은 요나에게 주목한다. 그가 어느 민족이며 누구이기에, 또한 무슨 일을 하였기에 지금 이런 심한 재앙이 임하였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9절에서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이 ‘이브리’라는 표현은 

히브리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창 14:13, 출 1:16) 요나는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모두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분명히 여호와가 어떤 신인지 분명하게 고백한다. 또한 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지금 요나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고백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폭풍을 통해서 그의 걸음을 멈추신 것이다. 

At first, Jonah, who here speaks for the first time in the story, appears to ignore the first question and merely answers the last one. He replies “I am a Hebrew.” This is a term which is seldom used in the Old Testament, which prefers the expression “Israelite.” It is frequently used by foreigners, especially Egyptians and Philistines, or by Israelites in speaking to foreigners, as these sailors were.* This is the only place in the Old Testament where someone says “I am a Hebrew,” though Joseph implies it in Genesis 40:15. In the New Testament, Paul describes himself as a Hebrew in Philippians 3:5. There is a tendency among translators to render I am a Hebrew as simply “I am a Jew” (for example, lb). Such a rendering is of course technically incorrect, because the term “Jew” refers essentially to persons from the southern part of Israel, not from the northern kingdom. It is important, therefore, to reproduce some kind of transliteration of Hebrew even though this may not appear to be the more common designation of present-day Jews.

The statement I am a Hebrew may, however, require some expansion in certain languages, for example, “my race is Hebrew” or “I belong to a family of Hebrews” or “my nation is called Hebrew.”

* Compare Gesenius-Kautzsch section 2b.

lb Living Bible

 Brynmor F. Price and Eugene Albert Nida, A Translators’ Handbook on the Book of Jonah, UBS Handbook Series (Stuttgart: United Bible Societies, 1978), 61.

 

이에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 하였다. 앞서 5절에서 심한 폭풍으로 인하여 두려워했다면 이제 이 심한 폭풍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기에 더욱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속에서 요나와 무리(선원)들의 차이를 발견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았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무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려워하고 있다. 

 

Many interpreters have identified vv. 4–16 as a chiasmus, that is, the recurrence of a series of terms and themes in reverse order. In all of these analyses vv. 9–10 are viewed as the center, focus, and turning point. D. Alexander has followed and refined the analyses of Lohfink, Pesch, and Fretheim in producing the following analysis that show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various parts:46

A Yahweh hurls a wind on the sea; the storm begins; sailors fear and cry to their gods (vv. 4–5a)

B Jonah sleeps; cry to your god; we shall not perish; divine sovereignty (vv. 5b–6)

C that we may know on whose account (v. 7)

D the sailors question Jonah (v. 8)

E I fear (v. 9)

E′ the sailors fear (v. 10)

D′ the sailors question Jonah (v. 11)

C′ I know that it is on my account (v. 12)

B′ sailors strive for land; sailors cry to Yahweh; let us not perish; divine sovereignty (vv. 13–14)

A′ sailors hurl Jonah into sea; the storm ceases; sailors fear Yahweh and sacrifice (vv. 15–16)

46 Alexander, Jonah, 106–9.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4.

 

11-13절) 바다가 점점 사나워지자 무리가 너를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 지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요나는 이 큰 폭풍의 원인이 바로 자신 때문인 줄 알고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잔잔해 질 것이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요나를 던지지는 못하고 힘써서 노를 저어 배를 돌려 육지로 향하고자 하지만 바다가 점점 더 사나워져 능히 그러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 폭풍의 원인이 바로 요나의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요나도 그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힘써 노를 저어 육지로 향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12절에서 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라고 말한다. 이 던지다라는 표현은 이미 앞서 여호와께서 바다에 큰 바람을 보내실 때(4절), 선원들이 배의 물건을 바다에 던질 때(5절) 사용한 표현이다. 이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차례가 된 것이다. 요나는 이 큰 폭풍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거나 하나님께 뜻을 돌이켜 순종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아직까지 그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느니 그저 죽는 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자신으로 인해서 애꿎게 죽게될 사람들을 위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지 이방인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The unnatural ferocity of the storm and the casting of the lot only confirmed what Jonah already knew. So now he resigned himself to his “fate.” He did not exhibit repentance for fleeing from the Lord but merely resigned himself to the only seeming solution. In v. 6 the captain had already asked Jonah to pray. Jonah did not seem so inclined but gave the sailors instruction on what to do so that they might possibly be saved from the ferocious tempest. It is interesting that Jonah did not offer to jump overboard on his own. Perhaps he was too frightened, or perhaps at this point he was merely asking for them to be the instrument of God’s punishment.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5–236.

 

14-16절) 이에 할수 없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요나로 인하여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말 것을 여호와께 청하면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뛰노는 것을 그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다. 

 

앞서 선원들은 5절에서 각자 자신들의 신들에게 기도했지만 이제는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요나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선원들이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주 여호와께서 주의 뜻대로 행하시는 주권적인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그리고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고 그를 바다에 던지게 된다. 선원들의 막연한 두려움(5절)은 이제 실체적인 두려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고(16절) 이제 나아가 그 두려우신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가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선원들에 의해 사나운 바다에 요나가 던져졌을 때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이 물고기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던 물고기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요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미리 예비하신 물고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으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이 예비하다라는 히브리어, ‘마나’가 피엘형으로 사용될 때 ‘예정하다, 임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표현은 이후에 4장 6-8절에서 세 번 더 언급된다. 큰 도시(1:2), 큰 바람(1:4), 큰 두려움(1:10, 16)처럼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큰 물고기’였다.  또한 본문에서 말하는 물고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향유 고래와 같이 거대한 물고기라고 말하지만 이 표현은 수생 동물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로 이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인지를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요나를 죽음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요나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냈다. 이는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시간을 상징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호 6:2)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시간을 언급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마 12:40)

마태복음 12:40 (NKRV)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1:17 appointed. This is the first of four uses of “appoint” that underscore God’s sovereign control over creation (cf. 4:6–8). Fish (Hb. dag) is not limited to what is called “fish” today (generally cold-blooded vertebrate sea creatures with fins and gills) but is a general word for an aquatic beast, which cannot be identified further. However, a large whale such as a sperm whale could easily swallow a man whol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Though this may be a symbolic expression for a time of dying and rising (cf. Hos. 6:2), it more likely describes the actual number of days, or parts of three days, according to accepted reckoning of days at that time (cf. 1 Sam. 30:12; 2 Kings 20:5, 8). In either case it has associations with return from death or near-death—which perhaps is why Jesus likened the time between his own death and resurrection to Jonah’s time in the fish (Matt. 12:4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688.

 

1:17 This verse, which begins chap. 2 in Hebrew, is perhaps the most famous verse in the Book of Jonah. Rimmer ironically says: “This is the first of 2 verses which ‘ruin’ the narrative. If this verse and 2:10 were removed, then the prophecy would be plausible for modern readers.”1 It probably is true but tragic that many point to this verse as their “reason” for not believing God’s Word. This miracle is singled out, even though it is simply one of several in the book (see p. 215 in the Introduction).

The text says that “the Lord provided” a great fish to swallow Jonah. The word “provided” (from mānâ) has been the subject of varying translations. In the KJV it is rendered “prepared.” This gives the perception that God created a special creature for the specific purpose of rescuing Jonah and providing a place for his training in humility and submission. But an accurate translation would be “ordained” or “appointed.” The word is used four times in the Book of Jonah and always points to the Lord’s power to accomplish his will. Here it shows his sovereignty over the creatures of the sea; in 4:6 it shows his power over plants; in 4:7 it shows his power over crawling creatures; and in 4:8 it shows his power over the wind. While God indeed may have prepared a special “fish” for Jonah, the text only indicates that God summoned the fish, common or special, to be at that place at the exact moment of need.

Conservative scholars throughout the years have spent a great deal of energy and time describing types of large fish that might have been capable of swallowing a human.2 But all we know for sure is that it was a “large fish.” The word translated “fish,” dag, is the general Hebrew word for any aquatic creature (cf. Gen 9:2; Num 11:22; 1 Kgs 4:33; Ps 8:8). The LXX uses kētos, which means a “huge sea-fish.”3 The KJV causes some misunderstanding, for in Matt 12:40, which quotes Jonah 1:17 (from the LXX), it translates the word as “whale.”

Trying to marshal evidence to confirm this Scripture may in fact result in the denigration of the miracle. Searching for historical incidents when people and large animals were swallowed and later recovered from sea creatures4 shows a posture of defensiveness that is unnecessary, counterproductive, and violates the nature of the biblical account. As D. Stuart says, “A miracle is a divine act beyond human replication or explanation.”5 On the other hand, it is hard to argue that the author invented the tale without presupposing the impossibility of the miraculous, which would be irreconcilable with Hebrew tradition. Also, as D. Alexander and others have observed: “The author’s portrayal of this most peculiar event is very low key; it has certainly not been included in order to heighten the dramatic quality of the narrative. This being so, why should the author have invented it, if it did not really happen?”6

Why did God use this specific means of returning Jonah to his appropriate place of service? For some the purpose of the fish was solely allegorical. Glaze states: “The literary apparatus rich in metaphors and poetic imagery indicates the broader purpose of the author, and the allusions are evident to the intended audience. The relationship to one of Jeremiah’s prophecies was clear: Israel, swallowed by Babylon, would be delivered.”7 In other words, the story had to present elements commensurate with the intended teaching lesson.

More fitting of the context is the view that the fish provided time for instruction from the Lord. R. T. Kendall says it well: “The belly of the fish is not a happy place to live, but it is a good place to learn.”8 Jonah was well aware of the numerous Old Testament reflections of chaos, pictured by the sea monster Leviathan (Pss 74:13–14; 104:26). During Jonah’s time in the fish he may have reflected on God’s dominance over every force in the world. Jonah had to learn that God’s purpose was serious and that his concerns as well as his power went far beyond the shores of Palestine.

Jonah was in the fish “three days and three nights,” although he would have realized this only after his removal from the fish. This phrase may be intended as an approximation rather than as a precise measure of seventy-two hours;9 however, the point of the fuller expression rather than simply “three days” would seem to be that Jonah was confined for “three full days.”10 Some think the expression reflects the ancient belief that death was permanent only after a body showed no signs of life for three days (cf. John 11:6, 14). If this interpretation is applied to the Jonah text, it apparently would mean that the fish was not primarily an agent of Jonah’s deliverance but an additional danger to his life.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phrase would point to his precarious state of existence, hovering between life and death.11 This interpretation, however, appears out of step with Jonah’s prayer of thanksgiving from inside the fish (2:2–9). Nevertheless, his thanksgiving probably was not solely for deliverance from drowning but was based on his anticipation of deliverance from the fish as well. Therefore the time frame perhaps should suggest that God’s power and grace retrieved Jonah as if from the dead (cf. 2:6), and the great fish was the vehicle God used.

A similar interpretation is that the expression alludes to a common motif in the ancient Near East of a three-day journey to the underworld and back. With that notion in mind, the readers of Jonah would have seen the fish as representing God’s rescue from the underworld, that is, death.12 Numerous texts in the Old Testament refer to three days as the period of a journey. For example, Moses asked that Pharaoh permit the Israelites to leave Egypt to go on a three-day journey into the wilderness (Exod 3:18; cf. also Gen 22:4; Num 10:33; Josh 9:17; 1 Sam 30:1; 2 Sam 24; 2 Kgs 2:17). Jonah’s preaching tour of Nineveh also took three days (3:3). Jonah later may have pondered regretfully upon his three days in the fish made necessary because he tried to avoid three days of walking and preaching in Nineveh.

Although the phras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ay have had a variety of connotations both from other Old Testament passages and from extrabiblical writings, no compelling reason exists to disbelieve the literal span of time indicated. In fact, none of the Old Testament allusions of a similar nature are necessarily figurative. The major point is that God, through the fish, could sustain this pouting prophet during “unbelievable” circumstances and return him to the place where he could renew his commission to serve.

1 H. Rimmer,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8th ed. (Berne, Ind.: The Berne Witness Company, 1939), 169.

2 Ibid., 190–91. See also A. J. Wilson,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 and Its Modern Confirmations,” in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25 (1927): 631–32. He discusses at length the physical characteristics of a number of sea creatures capable of swallowing a man.

LXX The Septuagint

3 T. Muraoka,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Septuagint (Twelve Prophets) (Louvain: Peeters, 1993), 134.

LXX The Septuagint

4 Many historical instances are cited by Wilson (“The Sign of the Prophet Jonah,” 635–37). The most fascinating concerns James Bartley, who supposedly was swallowed by a sperm whale in 1891 and was recovered live but “raving.” Rimmer tells of other instances. One man was rescued alive and unhurt from the belly of a rhinodon shark but was “devoid of hair, and patches of a yellowish-brown color covered his entire skin” (Rimmer, Harmony of Science, 195–96). See also C. F. Keil and F. Delitzsch, “Jonah,” COT (Grand Rapids: Eerdmans, 1978), 10:398. Such stories are doubted by E. B. Davis, who diligently attempted to unearth the facts of the “Bartley” story. He concluded that the story is “a whale of a tale” (“A Whale of a Tale: Fundamentalist Fish Stories,” in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43, ed. J. W. Hass, Jr. [Ipswich, Mass.: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1991], 224–37).

5 D. Stuart, Hosea-Jonah, WBC (Waco: Word, 1987), 474.

6 T. D. Alexander, “Jonah,” TOTC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88), 111–12.

7 A. J. Glaze, Jr., “Jonah,” BBC 7 (Nashville: Broadman, 1972), 166.

8 R. T. Kendall, Jonah: An Exposi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78), 101; Keil and Delitzsch, “Jonah,” COT, 10:398.

9 Ellison, “Jonah,” 375.

10 Stuart, Hosea-Jonah, 474.

11 G. M. Landes,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otif in Jonah 2:1,” JBL 86 (1967): 446–50; id., “The Kerygma of the Book of Jonah,” Int 21 (1967): 11–12. While D. Stuart (Hosea-Jonah, 475) accepts this argument that “the Sheol journey motif is probably behind the author’s choice of words as a purposeful echo of the reference to the Underworld in the Psalm (v 7[6]),” Alexander considers that “there is insufficient evidence within the Old Testament itself to demonstrate that this is how a Hebrew reader would have interpreted the phrase” (“Jonah,” 112).

12 Landes,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otif in Jonah 2:1,” 448. In the Sumerian myth “The Descent of Inanna to the Nether World,” Inanna instructs her divine minister, Ninshubur, to set up an elaborate lament for her after she has departed for the underworld. Then follows the text of the lament, the account of Inanna’s departure and reception into the lower realm, culminating in her death at the hands of the goddess Ereshkigal. At this point the text then reads: “After three days (and) three nights had passed, her minister Ninshubur, her minister of favorable words, her knight of true words, sets up a lament for her by the ruins” (Part II, lines 169–73). Th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are intended to cover the time of travel to the realm of the dead. It would appear this is a most promising clue for understanding the full import of the word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Jonah 1:17. They are used to indicate the period of time it took the fish to bring Jonah back from the deep, understood more explicitly in the following psalm as the netherworld (cf. 2:6). Thus, just as Inanna required three days and three nights to complete her descent into the underworld, so also the fish is assigned the same time span to return Jonah from “Sheol” to the dry land.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39–242.

 

마소라 사본에서는 1장 17절이 2장 1절로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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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Jonah the son of Amittai, saying, “Arise, go to bNineveh, that cgreat city, and call out against it, dfor their evil1 has come up before me.” But Jonah erose to flee to fTarshish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He went down to gJoppa and found a ship going to fTarshish. So he paid the fare and went down into it, to go with them to fTarshish, haway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But ithe Lord hurled a great wind upon the sea, and there was a mighty tempest on the sea, so that the ship threatened jto break up. Then the mariners were afraid, and keach cried out to his god. And lthey hurled the cargo that was in the ship into the sea to lighten it for them. But Jonah had gone down into the inner part of the ship and had lain down and was fast asleep. So the captain came and said to him, “What do you mean, you sleeper? Arise, kcall out to your god! mPerhaps the god will give a thought to us, that we may not perish.”

a 2 Kgs. 14:25

b Gen. 10:11, 12; 2 Kgs. 19:36; Nah. 1:1; Zeph. 2:13; Matt. 12:41; Luke 11:30, 32

c ch. 3:3; 4:11

d Rev. 18:5

1 The same Hebrew word can mean evil or disaster, depending on the context; so throughout Jonah

e ch. 4:2

f See 1 Kgs. 10:22

g See Josh. 19:46

f See 1 Kgs. 10:22

f See 1 Kgs. 10:22

h Gen. 4:16; [Ps. 139:9, 10]

i [Ps. 107:25]

j 1 Kgs. 22:48; Ps. 48:7

k [Ps. 107:28]

l [Acts 27:18, 19, 38]

k [See ver. 5 above]

m [ch. 3: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1:1–6.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1:1–6.

 

요나서 자체에서 볼 때. 요나는 열렬한 민족주의 자이며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이방을 대적하는 사람 그리고 적어도 반( 反 ) 앗수르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요나서는 또한 요나는 헌신되었고. 훈련되었으며. 강한 의지를 가진 선지자였고 모든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그렇듯이 시인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조차 까다롭고 완강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요나는 스블론 지파 가드헤벨 출신으로 여로보암 2세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이 전쟁으로 인해 북 이스라엘의 영토가 확장될 것을 예언하였다.(왕하 14:25) 

 

 

1-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말씀은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악독이 여호와 앞에 상달되었음을 외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를 향하는 배를 탔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선지서의 시작을 알리는 형식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선포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주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요나서에서 7번 사용된다.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셨는지, 무서운 폭풍과 지진을 통해서 혹은 아주 작고 은밀한 목소리로 였는지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분명하게 요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부인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부터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 명령은 분명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라고 말씀하신다.  2절 한 문장안에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라는 세개의 명령문이 등장한다. 이는 니느웨가 당한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 것인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요나의 이름의 뜻은 ‘작은 비둘기’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요나는 이스라엘에서 어리석고 지각없음의 상징인 비둘기(호 7:11)였다.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인데 아밋대라는 의미는 신실함이라는 뜻으로 ‘나의 신실함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진리의 아들 비둘기’가 된다.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는 노아에게 홍수가 끝났음을 알리는 평화의 상징인 감람나무 가지를 물어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심판의 위기에 처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비둘기)를 통해서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구원의 도구가 되어야할 요나(비둘기)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가 아니라 저 멀리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하고 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북동쪽으로 800km 떨어진 티그리스 강 동쪽에 위치한 앗수르의 도시였다. 니느웨는 주전 4500년경에 설립된 메소포다미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도시로 성경에 의하면 위대한 사냥꾼 니므롯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를 지속적으로 큰 성읍이라고 말한다.(3:3, 4:11) 요나서에서는 이 큰이라는 표현, ‘가돌’이라는 히브리어가 14번이나 사용된다. 또한 니느웨를 표현하면서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라아’라는 표현으로 요나서에서 9번이나 사용되는데 이는 약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재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니느웨 사람들은 악했고 그래서 곧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2절에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라는 표현은 노아의 홍수 때 하늘에 닿은 인류의 죄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닿으려는 인류의 죄를 연상케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말하는 것일까? 학자들에 의하면 앗수르는 고대 근동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제국으로 앗술바니발은 상습적으로 포로들의 입술과 손목을 잘랐고 디글랏블레셀은 살아있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희생자들의 목을 잘라 산더미처럼 전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다른 민족에 대한 폭력적인 만행일 수도 있고 니느웨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행한 개인적인 범죄를 뜻할 수도 있다. 

1:2 Nineveh sat on the east bank of the Tigris River about 220 miles (354 km) north of present-day Baghdad and over 500 miles (805 km) northeast of Israel. Great (Hb. gadol) is used 14 times in Jonah. Nineveh was an important (“great”) city (see 3:3). evil. As the ESV footnote indicates, the same Hebrew term (Hb. ra‘ah; used 9 times in Jonah [see chart]) can mean “evil” or “disaster.” The Ninevites were evil, and they were in line for disaster.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687.

 

3절에서 요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간다.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한 이유는 2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말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그들의 악독함을 알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스는 니느웨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 위치한 지중해 서부의 먼 도시로 직선 거리가 3800km로 니느웨보다 거의 4배이상 먼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은 육로로 갈 수가 없어서 배를 타고 가기 위해서 욥바로 내려갔고 배 삯을 주고 그 배에 오른 것이다. 

요나는 왜 다시스로 애써서 가려고 했을까? 그냥 이스라엘에 머물면서 니느웨로 가지 앟았으면 되지 않았을까?  요나는 계시의 땅인 이스라엘을 벗어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재이시지만 요나는 하나님을 지역 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지역을 멀리 떠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거하는 것과 반대되는 표현이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명령하셨는데 지금 요나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욥바로 내려갔다.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욥바로 내려갔다. 이후 5절에서도 배 밑층으로 내려갔다. 2:6에도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창 37:35의 표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죽음을 향해 갔다라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내려가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1:3 To Tarshish is repeated three times in this verse to underscore that Jonah is not going to Nineveh. Tarshish, an unknown locale associated with distant coastlands, was somewhere in the western Mediterranean—the opposite direction from Nineveh.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is repeated at the end of this verse to underscore Jonah’s purpose in going to Tarshish. Went down (see also v. 5; 2:6; the same verb is used for went on board) is also a euphemism for death (e.g., Gen. 37:35). The suggestion is that each step away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is one step closer to “going down” to death (see notes on Jonah 1:4–5; 2: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687.

 

이 구절을 교차대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So Jonah rose (그래서 요나가 일어났다)

    to flee to Tarshish from before Yahweh (여호와의 목전에서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He went down to Joppa (그는 용바로 내려갔다)

            he found a ship (그는 배를 발견했다)

                about to leave for Tarshish (다시스로 곧 떠나는 배였다)

            he paid the fare (그는 뱃삯을 지불했다).  

        and he went into it (그는 배로 들어갔다)

    to go with them to Tarshish from before Yahweh. (여호와의 목전에서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지금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올라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마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속에 있는 것처럼 욥바 항구에 도착하자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고, 요나에게는 배삯을 지불할 돈이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배에 올랐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었다. 

 

4-6절) 이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로 인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에 내리심으로 큰 폭풍이 일어나서 거의 배가 부서지게 되었다. 이에 사공등이 두려워하여 각기 자신들의 신을 부르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선장에 요나에게 가서 그를 깨우며 지금 배가 파선하게 되었는데 어찌 자고 있느냐하면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생각하셔서 망하지 않게 하실것을 구하고 있다. 

 

4절에서 큰 폭풍이 일어났다. 4절에 사용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다’라는 표현이 5, 12, 15절에 반복되어 사용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창이나 칼, 물건을 던질 때 사용되었다.(삼상 18:11, 20:33) 바람을 내리다, 던지다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된다. 이는 던지다라를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내리신 것처럼 사공들은 배의 물건들을 던지고 풍랑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요나를 바다로 던진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가고 있는데 바람과 바다, 심지어 배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There is nothing uncommon about a storm at sea, but we are informed that this storm had a special purpose. It was caused by a “great wind” that God’s hand hurled like a spear to stop the fleeing prophet in his tracks. The verb translated “sent” (ṭûl) is elsewhere used of hurling an object such as a spear (cf. vv. 5, 12, 15, “throw”; 1 Sam 18:11; 20:33; Isa 22:17; Jer 22:26–28). Persons at sea often experience feelings of isolation, but Jonah would find such feelings misleading. The eyes of the Lord were continually upon him (cf. Prov 15:3), and the sea is God’s dominion. As the psalmist wrote, “The earth is the Lord’s, and everything in it, the world, and all who live in it; for he founded it upon the seas and established it upon the waters” (Ps 24:1–2).

The last clause of the verse is striking because of its imagery and syntax. The verb translated “threatened” (ḥāšab) means to “consider” or “plan” when it occurs with a human or divine subject (cf. 1 Sam 18:25; 2 Sam 14:13–14; Esth 8:3; 9:24; Jer 26:3; 29:11). Thus the ship is here personified.25 It was determined to break apart. The drama of the situation is heightened by the syntax, which sets off this clause parenthetically from the others. This might be better expressed by translating, “Now the ship was determined to break apart.” In contrast to the disobedient prophet, the wind, the sea, and even the ship were tuned in to the Lord’s purposes (cf. Lev 18:25). As Sasson describes, “The ship is first to realize the brutality of the storm, and its own terror at breaking up is quickly communicated to the sailors.”26 As v. 5 will explain, Jonah was the last one to respond.

25 Sasson, Jonah, 96.

26 Ibid., 105.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29–230.

 

5절에서 이 폭풍에 대한 사공들의 반응은 3단계로 진행된다. 두려워하고 기도하고 물건을 던졌다. 사공들은 큰 바람과 폭풍에 익숙한 전문가였다. 하지만 이들이 두려워하며 자신의 신께 간구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전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이는 자신들의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다. 또한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바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 요나는 배 밑으로 내려가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누구보다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깨어서 노력해야할 하나님의 사람이 모두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애쓰는 상황가운데 배 밑으로 내려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인 잠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선장을 통해서 요나를 깨우신다. 6절에서 선장의 입을 통해서 요나의 사명을 다시금 상기시키신다. 바로 선지자의 사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망하지 않도록 죄를 경책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데 이를 거부하고 도망가는 요나로 인해서 사람들이 멸망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요나보다 이방인 선장이 더욱 뛰어난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나에게 너의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질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니느웨의 죄악을 질책하기를 거부한 요나 자신이 지금 질책을 받고 있는 것이다. 

6절의 망하다라는 말은 이후에 14절, 3:9, 4:10에서도 반복되어 사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나는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간다. 이 도망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일으키셔서 요나의 길을 막으신다. 니느웨의 구원을 위해서 요나가 나아가야 하는데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이 싫어하는 앗수르, 니느웨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을 알기에 이것을 원치 않아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사용하심으로 폭풍을 일으키셔서 그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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