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적 상상력(월터 브루그만, 복있는 사람)
해설의 글(2009년 김회권)
왜 우리는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야 하는가?
세계는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져 정신적 시계가 불확실한 밤바다를 표류하고 있다.(개정판 2000년)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부인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파라오의 압제 체제이며 급기야는 예언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극단적인 욕망 충족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지배 문화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 주는 한편, 왕권 의식으로 가득찬 지배 문화에 의하여 억눌리고 무기력해진 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책이다.
브루그만은 예언자를 단지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획일화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한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 예언자적 상상력의 얼개와 메시지
1) 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
오늘날 미국 교회의 정체성을 앗아가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앙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 일을 한다.
2) 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모세의 대항 공동체 구축 활동은 단순한 반체제적인 사회 활동과는 구분된다. 이 대안 의식은 첫째 체제 고착적인 질서의 신 관념에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대립시킨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관념을 역설한다.
3) 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예레미야를 모세적 의미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예언자의 전범으로 파악한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였다.
4) 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예레미야의 사역이 단지 근원적 비판을 넘어 가장 대담하고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한 목회였음을 역설한다.
5) 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브루그만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변혁하고 당대의 지배 문화였던 왕권 의식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논한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하나님의 친정통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통고하는 한편 당시의 지배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함의한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대표하는 몇가지 사역
첫째 예수의 용서 메시지와 용서 행위
둘째 예수의 안식일 이유
셋째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었던 예수의 밥상 교제
넷째 예수의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
다섯째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긍정과 존대
여섯째 세금과 빚에 대한 예수의 담론(마 20:1-16)
일곱째 예수가 성전에 대해 보였던 태도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6) 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그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이란 단지 낡은 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었다는 데 있다.
예수의 일의 핵심은 해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 현실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활성화였다.
둘째 예수의 목회도 근원적인 시작을 열어주는 활성화다.
셋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목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7) 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그의 예언자적 목회의 특징
첫째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에게 특별한 방식을 따라 행하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 빛을 비출 수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자세, 해석학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애통과 탄식을 피력함으로써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간다.
넷째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다섯째 이런 예언자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언자적 상상력, 근원적 신앙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강조한다.
* 예언자적 목회는 오늘도 가능하다.
결국 예언자적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능력과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창조적으로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내는 목회이다.
예언자의 서식지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사회, 경쟁과 탐욕으로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키는 도시의 소비 문화에 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누추한 삶의 자리다.
예언자적 목회는 기존 권력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후 정치적 유명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변두리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애통과 체휼 목회를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죽을 때까지 비영웅적으로 감당하다가 남몰래 죽는 목회다.
개정판 서문(2000년 성령강림절)
1. 1978년 발간 이후의 변화
첫째 비판적인 성서 연구의 경향과 방법의 변화
- 역사비평 -> 사회과학적 비평 -> 수사학적 비평(상상력)
둘째 자신의 관점의 변화
셋째 교회의 주변화(marginalization)
오늘날 필요한 일은 상대적으로 힘없는 예언자적 목소리에 본문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유롭고 과감하게 본문을 넘어 구체적 환경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상상적 방법들을 찾아주는 일이다.
2. 의심의 해석학을 적용
3. 예언자적이라는 말과 상상력이라는 말을 연결한 것이 아주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4. 하위 공동체의 특성
첫째 오래되고 이용 가능한 기억들
둘째 고통에의 감각
셋째 희망의 적극적인 실천
넷째 효과적인 담론의 방식
5. 신학적 상상력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고문과 성만찬)
성만찬이 고문에 맞서는 저항과 대안의 잠재적인 행위가 된다면, 성만찬적 상상력은 또한 소비 과용에 대해서도 잠재적인 저항과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판 서문(1978년 사순절)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라는 고정 관념으로 굳어진 예언자 상을 벗겨 낸다면 예언자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예언자들은 인간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또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깊이 이해했던 사람들이다. 예언자들은 변화의 가능성이 삶의 감정적 곤경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적 신념과 개인적 열망 사이에 존재하는 껄끄러운 부조화를 이해했다. 또한 말의 재능에 있어서 ‘말씀으로 새롭게’ 새일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1장_모세의 대안 공동체
오늘날 미국 교회는 미국의 소비주의 풍조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고, 그 결과 믿음이나 행동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소 있다. 이러한 문화적응(enculturation) 현상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포함해 교회의 삶 전반에 걸쳐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응이 나타나게 된 내적 원인은 우리가 신앙의 전통을 저버리고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는 활력을 주는 기억을 기초로 삼고 급진적 희망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기인한 현상이자 위협적인 요소로 대접받는다.
교회가 신앙 전통을 회복하고 나아가 그 전통을 문화적응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길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행동이나 믿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전통의 주장과 문화적응의 상황을 마주 세워 효과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이끄는 것이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다. 다시 말해 예언자란 전승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로서, 자기 고유의 인식 이론과 언어 체계를 갖추고자 전승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람이며 또 전승의 기억에 매우 정통해서 문화와 교회의 접촉점과 상충점을 날카롭게 식별하고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다.(50)
어떤 면에서 예언자들은 미래를 알리는 자이기는 하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미래란 현재로 치고 들어오는 미래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 탐색을 포기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일을 모두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는 현재에만 몰두했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우리를 둘러싼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예언자적 목회의 일차적 과제는 특정한 공정 위기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위기, 곧 우리의 대안적 소명을 무력화하고 길들여 버리는 위기와 씨름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성숙한 대안 의식은 지배의식을 해체(dismantle)할 목적으로 ‘비판’을 행한다. 다른 한편 성숙한 대안 의식은 신앙공동체가 나아갈 다른 시대와 상황을 약속해 줌으로써 개인과 공동체를 '활성화하는(energize)’ 일을 한다.
예언자적 목회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모든 목회 행위 속에 대안 공동체를 불러내고 형성하고 개혁하는 방식을 반영해야 한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비판과 활성화를 하나로 결합하는 일이다.
눈앞에 나타난 사회 정치적 현실이 너무나 근원적이고 불가해한 것이어서 생각나는 게 신학적 주장밖에 없을 때 예언은 탄생한다.
1. 승리주의와 억압에서 벗어남
모세와 이스라엘이 제국의 현실과 완전히 갈라선 것은 정적인 승리주의(static triumphalism) 종교로부터의 단절과 억압과 착취의 정치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모세는 이집트의 신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들이 사실은 힘이 없고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정적 승리주의의 종교를 해체했다. 제국의 신화적 주장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안 종교가 등장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된다.
이와 동시에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서 억압과 착취의 정치를 해체한다. 출에굽으로 이루어진 현실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라든가 새 종교 관념 또는 자유에의 비전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새로운 사회 공도체를 세우는 일로서, 이 공동체는 역사적인 조직을 갖추고 법을 제정하고 통치와 질서의 형태, 선과 악의 규범, 책임에 따른 처벌을 제정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제국의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벽돌공장의 압제는 인간 공동체에게 효과적이지 못하고 필수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인간의 정의의 정치와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와 긍휼의 정치 없이는 하나님의 자유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가 없이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2. 예언자적 비판
이스라엘은 체념의 한숨소리를 쏟아낸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면서 누군가 그것을 들어주고 응답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다.(출 2:23-25) 이스라엘이 애통하는데서 비판은 시작된다. 아픔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해체하는 비판의 중요한 첫걸음이 되고, 이러한 비판은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새로운 현실을 연다. 역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러한 울부짖음을 야웨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역사는 힘을 얻게 된다.
3. 예언자적 활성화
옛 현실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 바로 그곳에서 모세의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활성화는 희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활력을 되찾는 일은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되어 있고 이제 곧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 활력은 불가해한 어둠을 꿰뚫어 보는데서 생겨난다.
2) 하나님은 현실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요 편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요, 하늘의 회의 석상에서 보좌 가장자리로 달려 나와 자신의 특별한 관심사를 주의 깊게 헤아리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
3) 활력을 불어넣는 마지막 요소가 송영(doxology)이다. 송영 속에서 노래하는 이는 이 자유로운 분께 초점을 맞추며, 또 그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자신의 자유로 품게 된다…. 송영이 있는 곳에서만 긍휼이 자랄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자명한 원리로 주장되는 이데올로기를 송영이 깨뜨리기 때문이다. 또 송영이 있는 곳에서만 정의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노래가 두려움을 활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모세의 전승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주장한다.
1) 역사적이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매우 독특한 이 공동체 안에서는 대안적 삶이 이루어진다.
2) 이 공동체는 자체의 특별한 기억을 수단으로 비판하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기억에는 제국의 현실로부터 단절과 완전한 탈출이 간직되어 있다.
3) 그러한 기억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자신이, 제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좌우된다는 사실을 안다.
2장_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모세의 주된 관심은 대항 의식을 지닌 대항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었다.
또 모세는 기존 체제를 회개시켜 사회를 개선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려 새로운 현실이 등장할 수 있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 이 예언자적 상상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언어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노예와 산파들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하나님의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롭지 못한 다른 신들은 이미 다 굴복해 버린 상황에서 그 방법 외에는 정적인 승리주의 종교에 대항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예로 이루어진 소수자 공동체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억압적인 상황에 저항하는데 버팀목이 되어 줄 사회적 비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변두리 인생들이 당대의 억압적인 체제에 대항하면서 자신들을 받쳐 줄 합법적인 근거를 찾는다면 그 근거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이다.
솔로몬의 프로그램(왕과 왕조를 견고하게 세우는데만 관심을 기울인 이기적인 업적)
1) 하렘(왕궁 내에 둔 여인들만을 위한 생활 공간) : 정략적 결혼
2) 조세 구역의 정비
3) 체계적인 관료제도
4) 상비군의 설치
5) 지혜에 매료됨
6) 거대한 건설공사(성전, 왕국, 도시)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서 대안 의식이라든가 대안 공동체가 들어설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1. 풍요
솔로몬은 참으로 놀라운 복지와 풍요를 이루었다. 소비 사회속에서 대안 의식이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렵다.
2. 억압적인 사회 정책
왕실과 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을 동원하고 노동을 착취한 것이 이 체제가 취한 정책이었다.
3. 정적인 종교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성전은 왕의 도시 계획의 일부로 편입되고 하나님의 주권은 왕의 목적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억압적 정치와 풍요로운 경제는 서로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두요소를 떠받치는 토대가 하나님을 포로로 잡은 종교(religion of the captive God)이며 이 종교 안에서 모든 반대는 사라지고 왕과 그의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안정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유와 연관된 이런 긴장이 해소되어 버릴 때 종교는 사회의 통합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며 비록 다른 수단에 비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중 하나가 될 뿐이다.
솔로몬은 모세의 대항 문화에 완벽하게 맞설 수 있었다.
1) 그는 풍요의 경제로 평등의 경제에 맞섰다.
2) 솔로몬은 억압의 정치를 내세워 정의의 정치에 맞섰다.
3) 솔로몬은 하나님의 접근성의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에 맞섰다.
솔로몬 체제가 비판을 잠재운 방법은 첫째 엄격한 금지조치를 내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처벌을 동원하는 방법과 둘째 비판에 대해서 적절한 면역성을 키우고 귀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신학적 공헌 두가지
1) 창조신앙
2) 메시야 사상의 출현
창조 신앙과 메시야 사상은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에 긍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경향을 드러냈으며 현 체제를 강화하고 껄끄러운 언약의 문제들을 억누르는 역할을 감당했다.
제국 경제의 목적은 백성을 배부르게 만들어 그들이 눈뜨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다. 제국 정치는 거부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다. 제국 경제는 아편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아시는 그 참상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 폐쇄된 세계, 곧 혁명이나 변화, 역사, 약속, 희망이 없는 땅에 갇혀 있는 왕인 파라오는 숱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대표하는 모델이 된다. 모든 왕이 심지어는 모든 면에서 탁월했던 솔로몬 까지도 이렇게 고착되고 폐쇄되어 버린 세상을 부러워한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는 춤추는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으며, 어떠한 신음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분은 제국에서는 신임을 받지 못하고 법정에서는 무시당하고 성전에서는 배척당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외된 인생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그곳에서 그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섭정을 자처하는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격정과 파토스를 통해 자신의 품격을 드러내시며 돌보는 권세요 울 수 있는 능력이자 애통하며 기뻐할 수 있는 활력으로 다가오신다.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돌보고 눈물 흘리고 애통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왕의 완력이나 굳은 마음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왕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왕권 의식은 실현가능한 배부름에 몰두했다. 예언자적 대안 의식은 언약과 관련한 파토스와 격정에 전념했다. 왕권 의식은 실현 가능한 배부름이라는 프로그램을 수단으로 인간다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규정했고 나아가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했다. 왕권 의식은 오직 자기 만족밖에 모르는 자기 중심적인 의식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기억하기를 요구하는 전통, 우리가 응답하기를 바라는 권위, 우리가 돌보기를 요청하는 공동체는 이 왕권 의식에 의해 정당성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현실에 맞서서 일어설 수 있는 수단이 모세의 혁신에서 비롯된 예언자적 말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3장_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우리는 왕권 의식에 확실하게 맞설 수 있는 대안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예언자적 상상력의 패러다임으로 고려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진정한 역사적 새로움을 상상하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을만큼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가 물어야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성취에 앞서 상상력이 와야 한다. 우리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힘이 있지만,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기도 하다. 어떤 것이든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왕권 의식이 상상력을 억눌러 버린다. 상상력은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가를 두려워한다. 예언자의 소명은 상상력의 목회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해주는 일이요, 또 왕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라고 주장하는 그 단일한 미래를 대신할 미래를 그려내고 제시하는 일이다.
왕권 의식은 사람들을 무감각 상태로, 특히 죽음에 대한 무감각으로 몰아간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예언자적 목회와 상상력의 과제다.
솔로몬의 체제는 격정의 상실을 초래했다. 격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돌보거나 아파하는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왕들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고 자기의 작은 모래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괜찮아 잘 될꺼야라고 말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의 과제는 이러한 무감각을 깨뜨리고 자기기만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이요, 그렇게 해서 종말의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과제
1) 무감각하게 만들고 부인하도록 강요하는 두렵고 거대한 경험에 맞서 싸우는데 적합한 상징을 제공한다.
2) 예언자적 과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부인되고 철저하게 억눌려 와서 있는지조차 몰랐던 바로 그 두려움과 공포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은유의 언어로)
3) 예언자의 과제는 우리를 억누르고 내면으로도 좀먹고 있는 실질적인 죽음의 운명을 은유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종말의 공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무너졌음을 밝혀내고, 상대방을 희생시켜 나를 보호하려는 경계선과 사회 서열을 분명히 드러내며, 굶주린 형제자매의 식탁을 갈취하여 내 배를 불리는 끔찍한 관행을 폭로하는 일이다. 예언자의 사명은 왕에게 그가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일을 경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1. 예레미야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모델은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요구한 것은 단지 왕의 공동체가 자기의 현실을 바르게 경험하고, 그래서 종말 앞으로 다가서는 일뿐이었다.
예레미야의 애통은 두가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그의 애통은 자기 백성에게 닥친 종말을 슬퍼한 것이었다. 둘째 예레미야에게는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어느 한 사람도 듣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 8-10장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 법인데 유다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은 울 때다. 지금은 죽음의 때인데도 백성을 그런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가려고 하지 않는 자리, 그에 앞서 호세아만 뛰어들었던 자리, 곧 하나님의 고통으로 돌진했다. 야웨는 이제 파괴하거나 벌을 내리는 적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식 곁에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어버이이다. 골고다 언덕의 마리아나 압살롬 앞에 엎드린 다윗처럼, 죽은 이 곁에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외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비통해 한다.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과격한 행동과 분노로도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은 눈물이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연대의 형식이 무너져 버렸을 때 눈물은 고통을 나누는 연대의 방법이다…. 고칠 수 없는 질병, 깨진 언약, 힘을 잃은 활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비판을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알았다.
죽음의 현실을 끌어안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그의 말 속에는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위로받지 못하며, 종말에 마주서지 않는 사람은 시작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모세를 따르는 예레미야는 무감각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사실, 곧 애통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장_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예레미야가 보여준 가장 근원적 비판은 ‘죽음에 대한 애통’이다.
예언자적 대안 공동체는 비판과 동시에 활성화에 관여한다. 우선 이 공동체는 지배 의식은 끝나고야 말 것이라는 점과 지배 의식은 우리에게 최종적 권한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생생한 신앙과 생명력을 유지하게 해 주는 대안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제다.
왕권 의식은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의 과제는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우리의 역사 속에 작동하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붙잡게 해주는 것이다.
1. 억눌린 희망
왕권 의식은 희망을 가로막는다.
솔로몬이 성공한 이후에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영에서 소외되어 갔다.
2. 새로운 시작을 거부함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 멸망이후 왕권 의식은 자신에게 아무 자원도 남아있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시작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들고 사물이 현재 존재하는 방식만을 완강하게 고집할 수 밖에 없었다.
목회가 풀어야할 문제는 희망을 부인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말하고 내세우고 행할 만한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3. 절망을 뚫고 들어가기
세가지 행동을 제안
1) 상징들
절망의 상황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한 상징들을 제공하는 것
예언자는 자신들의 왕에게 절망한 공동체에게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희망의 상징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일 수 없고, 특정한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어야 한다.(사라의 잉태, 출애굽)
예언자의 두가지 과제로는 첫째 이 백성의 기억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희망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 언어와 말과 언어와 글귀가 어떻게 의식을 형성하고 현실을 규정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에 의하면 참된 세상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서 시작되고 그 말씀에서 원동력을 얻는 세상이며 이러한 기준은 왕들이 자기 말 이외의 말은 모두 잠재우려고 애쓰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희망과 열망
예언자적 상상력과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희망과 열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희망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배워온 모든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전복적인 성질을 지닌다.
희망은 성만찬을 통해 실연된다.
희망은 예언자가 사용하는 으뜸가는 어법이다.
예언자적 희망은 쉽사리 왜곡되기도 한다.
희망에 대해 가장 힘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경험한 사람이다.
3) 현실을 재규정하는 새로움
예언자들은 희망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 말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상황을 재규정하는 참된 새로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4. 경탄의 언어
왕의 절망과 자포자기를 꿰뚫는 희망으로 가득한 예언의 언어는 경탄의 언어다. 애통의 언어가 무감각의 언어에 맞서듯이, 경탄의 언어는 절망의 언어와 맞선다.
- 제2이사야(140)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장례식으로 나갔던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 시인(이사야)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왕의 대관식 축제로 안내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절한 비탄 속에 내버려 두는데 반해,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활기 넘치는 기쁨으로 인도한다. 제2이사야는 외적인 정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상상력을 되찾는 일을 하고 있다.
이사야 52:7 (NKRV)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권력을 잃어버린 듯 했던 분이 이제 다시 그 자리에 앉는다. 예레미야서에서는 패배하고 슬픔에 빠져 버린 듯했던 분이 이제 역사를 뒤집어엎는 분으로 나선다. 그리고 시인은 실권을 회복하는 일은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사 49:14-15)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신앙을 새롭게 했다. 온전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하며 낡은 체제들을 해체하고 지친 권력자들을 무너뜨리는 일만이 정말 필요하고 제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성화다. 탄식은 참된 왕이 힘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데 반해, 송영은 거짓 왕을 거부하고 참된 왕을 신실하게 받아들인다.
1) 새 노래
새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새 노래를 부르는 때다.
이사야 42:10 (NKRV)
10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새 노래의 시대는 새로운 언약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현실이 열리는 때다.
2) 태가 닫힌 여인이 아이를 낳다.(사 54:1)
임신 못하는 여인이 출산하는 이미지
- 사라(창 11:30), 리브가(창 25:21), 라헬(창 29:31), 한나(삼상 1:2), 엘리사벳(눅 1:7)
이사야 54:1 (NKRV)
1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3) 양식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 제국의 빵에 굴복할 수 없다. 이 시인이 말하는 빵은 바빌론의 빵집을 허물어 버린다.
이사야 55:1–2 (NKRV)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는 새 노래, 다산, 신선한 빵의 은유를 통해서 절망에 사로잡혀 버리는 대신 절망에 맞설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제공해준다.(남북 철도 연결, 반도에서 대륙으로의 상상력)
기꺼이 자신의 주권적 자유를 포기하셔서 우리를 위하기도 하고 우리로부터 거리를 두기도 하는 다른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절망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소망을 품은 이에게 역전이 허락되며, 이제 그들은 새 힘을 얻고 솟구쳐 오르며 뛰고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일들은 소망 가운데 존재한다. 소망은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 받는 것이며, 감춰 두는 게 아니라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토스와 경탄의 시인들인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를 서로 따로 떼어 놓아서는 안된다. 예레미야만 받아들인다면 신앙은 하나님을 뵐 수 없는 죽음의 자리로 떨어지게 된다. 제2이사야만 의지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분명 아파하는 사람만이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고뇌를 통과하지 않은 새 노래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 되고 더 심하게는 왕의 속임수가 되어 버린다.
5장_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지배 의식은 철저히 비판받아야 하고 지배 공동체는 완벽하게 해체되어야 한다. 대안 의식을 지닌 대안 공동체의 목적은 그러한 비판과 해체를 이루는 데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비판의 특징적인 어법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이다. 이 어법의 요점은 자신의 고뇌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공동체로 하여금 그 고뇌에 뛰어들게 만드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인품을 통해 왕권 의식에 대해 궁극적 비판을 가했다. 실제로 그분은 지배 문화를 해체했고 그 문화의 주장을 무효화했다. 그분이 궁극적 비판을 행한 방식을 보면, 변두리 인생들과 단호하게 연대하고 그러한 연대를 통해 그들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방식이었다.
1. 예수의 탄생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마태복음(2:6-23)과 누가복음(2:17-20)의 두 판본은 비판을 통해 해체하고 경탄을 통해 활성화함으로써 서로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다.
누가의 판본이 다가오는 새로움을 축하하는데 반해 마패의 판본은 이야기의 한 가운데 애통을 배치한다. 새로움은 고뇌와 고통과 눈물 없이는 오지 않는다.
2. 하나님 나라의 선포
막 1:15절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 선포 속에는 그와 대응부를 이루는 현존하는 나라들은 끝이 나고 대체될 것이라는 내용도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복음은 위협하지 않고는 약속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끝내지 않고는 시작하지 않으며,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는 선물을 주는 법이 없다.
*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행동
1) 용서
2) 안식일
3) 밥상 교제
4) 치유와 귀신축출
5) 여성
6) 세금과 빚
7) 성전
3. 긍휼
예수는 변두리 인생들과 연대를 이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근원적 비판이 겉으로 나타난 한 형태가 긍휼이다. 아픔은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문제요, 아픔이란 인간됨에 따르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정해서는 안되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긍휼이기 때문이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무감각할 필요가 있다. 군국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은 전쟁의 대가로 생명이 희생되는 일에 사람들이 무감각하기를 원한다. 법인체 경제는 빈곤과 착취라는 대가에 사람들이 무지하기를 원한다. 정부와 지배 계층은 무감각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다. 예수는 긍휼을 가지고 이 무감각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긍휼을 수단으로 삼아 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린 이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를 폭로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긍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애간장이 녹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나 심정을 보듬어 주는 것을 말한다.(마 14:14, 막 6:34, 막 8:2, 눅 7:12-13, 마 9:35-36)
소외된 이들이 당하는 아픔을 나의 일로 품는 일은 특히 호세아서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애통의 전승을 따른 것이다.
* 긍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마리아 인의 비유(눅 10:33)와 탕자의 이야기(눅 15:20)
무감각 대신 긍휼을 내세우는 행위, 곧 냉소적인 무관심을 끝내고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일은 사회적 혁명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예수는 지배문화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 문화에 임한 파멸적 종말을 폭로하는 권세를 행사한다. 현 질서의 희생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긍휼이며, 지배 문화는 이 긍휼을 묵인하거나 받아 들일 수 없다. 지배 문화가 자선과 선의는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연대하는 일은 막을 수 없다.
듣고 볼 수 있게 된 고난은 희망을 낳으며, 겉으로 표현된 애통은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수의 역사는 고통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분명한 목소리로 표현해 낸 역사인 것이다.
* 고통을 통해 구제화되는 예수의 근원적 비판
나사로의 죽음(요 11:1-57)의 이야기와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린 이야기(눅 19:41-42)
예수가 예루살렘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나사로를 위해 흘린 눈물처럼 죽음에 대한 고뇌를 함께 나누는 행위다. 나사로가 죽은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았다면 예루살렘 죽음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
4.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에수는 죽음의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끌어안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 비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당해야할 죽음을 끌어안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비판은 대항하여 맞서는 일이 아니라 함께 서는 일이다. 궁극적 비판이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찬 비판이 아니라 격정과 긍휼로 이루어지는 비판이다.
1) 수난 고지
2) 십자가 위에서 한 말
3) 기독론적 찬양(빌 2:5-11) :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 복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비운 이분은, 다른 누구도 감히 엄두도 못 낼 권위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허락하는 최상의 권력자다.
5. 정의와 긍휼의 정치
십자가 처형은 모세가 파라오와 맞서 싸운이래로 예언자적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해 온 해체를 완벽하게 성취한 사건이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무기삼아 억압의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목회와 죽음이다. 모세처럼 예수도 하나님의 자유, 곧 당신의 뜻대로 생명을 베푸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 자유를 무기 삼아 하나님을 포로로 삼은 종교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목회와 죽음이다.
예언자적 비판은 애통하는 사람만이 위로받을 수 있음을 알며, 따라서 몰락하는 이 세상을 위해 어떻게 하면 진지하고 신실하게 애통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예수는 예레미야가 그렇게 통렬하게 느꼈던 고뇌를 이해했고 몸으로 구현했다.
6장_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대안 의식을 지닌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은, 지배 공동체를 비판하여 완벽하게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 공동체의 목적으로서 해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어주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동, 특히 십자가 처형을 통해 왕권 의식을 해체했으며 그의 공동체에게 그 해체를 슬퍼하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이 냉혹한 현재가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가능한 실존 상태라고 믿고 있을 때에 이 궁극적 활성화는 그들에게 미래를 열어주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 새 미래가 열렸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경탄이었다.
1. 예수의 탄생
예수의 탄생은 특히 누가에 의해 새로운 사회 현시로 향하는 결정적인 활성화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그 시대의 통치자들과 대립하는 천사들의 노래를 통해 알려진다. 로마는 예측하지 못했고 헤롯은 막을 수 없었던 이 새왕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 역사는 모든 왕권적인 옛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 시작은 옛 질서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시작은 옛 질서의 희생자들로부터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여인(엘리사벳), 결백하지만 믿음으로 행한 젊은 여인(마리아), 말문이 막혀버린 늙은 남자(사가랴),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가운데서 시작이 이루어진다. 이 사람들은 깊은 슬픔을 알았던 사람들이기에 경탄을 체험하는 기회를 누린다. 이렇게 경탄은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죽음을 애통할 줄 모르는 옛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움은 설명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설명한다는 것은 왕의 옛 범주들 속에 강제로 집어넣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활력을 일으키는 희망은 설명과 이해에 능숙하지 못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자기들로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허락된다.
2. 예수의 목회
예수의 목회란 아무것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 바로 그 때에 근원적 시각을 열어주는 활성화다.
탄생은 희망만을 담고 있으나, 목회는 그 희망의 가능성이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자리가 된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생명을 부어 주었던 예수의 치유에 대한 반응은 찬양의 성격을 띠는 경탄으로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은 동시대인들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었기에 그 반응은 부정과 저항과 분노의 성격을 띠는 놀람으로 나타났다. 한편 미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다른 한편 예수가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데 분개가 쏟아진다. 어떤 경우든 그의 목회는 무력한 옛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격정과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3.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은 주도면밀한 음모에 의해 부인되어 왔던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밝혀냈으며 이 일을 통해 근원적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가르침이 오히려 행위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그의 행위를 통해서는 암시적으로만 드러났던 과격한 도전과 근원적 변혁의 의미를 그의 가르침이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구분이 무너지고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일이다.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사람들을 병자와 죄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일은 더 큰 일이다. 가르침이 행동과 나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르침에 구체성과 현실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과 마찬가지로 가르침도 부수고 열고 초대하는 일을 한다. 가르침은 막혀버린 미래를 열어주고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일이 가능함을 알려준다.
화의 선언은 죽음을 예견하고 선포하고 있으며, 가장 근원적 비판이 된다. 복의 선언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말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4.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미래를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부활은 지금까지 존재한 현실에 근거해서는 설명이 안된다. 부활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경축하는 일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절망 가운데서 경탄하게 해 준다.
부활은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는 예언자적 활성화의 궁극적 행위다. 부활은 죽은 이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진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새 역사는 사람들에게 새 정체성(마 28:19)과 새 윤리(마 28:20)를 제공한다.
7장_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1. 요약
출애굽과 모세의 운동을 통해 역사 속에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해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과 탄식으로부터 시작되고 활성화는 새로운 공동체의 송영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지키는 데 관심을 둔 군주 체제는 비판을 잠재우고 활성화를 차단하기 위해 힘을 동원한다. 한편 왕권 의식에 맞서 예레미야는 근원적 비판을 수행한다. 예레미야는 장례식이라는 그림을 통해 죽어가는 이스라엘의 애통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이 일을 수행하고 제2이사야는 왕권의식에 맞서 근원적 활성화를 수행한다. 그는 대관식이라는 그림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의 경탄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예언자이자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로 해체를 성취하셨고 부활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미래를 활성화하셨다.
2. 목회
예언자적 목회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일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거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 목회는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로 구성된 회중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아닐지는 몰라도 예언자적 목회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지원하지 않는다.
예언자적인 목회는 거창한 사회개혁 운동이라든가 의분을 쏟아내는 비판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적 목회란 대안적인 현실 인식을 제공하는 일이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또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자신들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유라든가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제가 언제나 그 시대의 가장 큰 쟁점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함께 살고자 노력하고 공통의 미래와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그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 예언자적 목회의 특질
1)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이 하는 일은 다른 일이요 다른 방신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다. 이 대안 공동체는 지배 공동체와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2)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또한 어떤 상황에도 빛을 밝혀 줄 수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 자세, 해석학을 다룬다.
3) 예언자적 목회는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가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게 해 준다.
우리가 흔히 무감각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화와 분노인데, 오히려 애통과 탄식이 무감각을 깨뜨리는 데는 훨씬 더 효과적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은 고통의 현실을 가라앉게 만들고 죽음을 몰아내는 방법이 된다.
4)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미래를 믿고 그 미래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확증해 주는 말과 몸짓과 행동만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3. 선물로 받는 근원적 신앙
근원적 신앙은 공로가 아니다.
예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있었다. 예수는 매우 변증법적인 두 시대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는 현재의 세상을 유일한 세상이라 여기고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을 수 없다. 또 현재에는 무관심한 채 미래만을 갈망하는 탈세상적인 사람들과도 다르다. 현재에 미래가 임할 수 있도록 애통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기들에게 죽음이 임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해야 할 일이 있다.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힘이나 자유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애통할 일이 있다.
애통은 기쁨에 이르는 형식적이고 외적인 요건이 아니라 유일한 문이자 통로가 된다. 울고 웃는 일에 관한 예수의 말은 한낱 멋들어진 경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 전체의 요약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애통하는 배울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사회의 현실에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애통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애통해하는 분이며, 그분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하기 전까지는 기뻐하기를 미루시는 분이다.
실천 후기
예언자적 상상력을 한낱 멋진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교회의 예언자적 증언은 목회의 특정 기능이나 다른 어떤 일과도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예언자적 증언이란 정신적 태도를 뜻한다.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세상사를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항 문화적인 의식이다.
교회의 모든 기능은 다 예언자적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으며, 그 예언자적 목소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배 문화를 향해서 비판을 가하는 한편 신앙인들에게는 활력을 불어넣는 데 봉사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목회적 돌봄은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설교도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교회 학교의 교육도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본질적 문제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그 시대의 문화에 사로잡혀 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 일이다. 하나님 말씀의 전체 계획에 신실하고자 애쓰는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 체는 우리 시대의 지배 문화가 펼쳐 놓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된다
Q. 코로나 시대 이후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발휘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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