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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since indeed God considers it hjust ito repay with affliction those who afflict you, 7 and to grant jrelief to you who are afflicted as well as to us, when kthe Lord Jesus is revealed from heaven lwith his mighty angels 8 min flaming fire, inflicting vengeance on those nwho do not know God and on those who odo not obey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9 They will suffer the punishment of peternal destruction, qaway from2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from the glory of his might,
h [Rev. 6:10]
i [Ex. 23:22; Joel 3:4, 7]
j [Rev. 6:11; 11:18; 14:13]
k See Luke 17:30
l See Jude 14
m Isa. 66:15, 16; Matt. 25:41; 1 Cor. 3:13; Heb. 10:27; 12:29; 2 Pet. 3:7; [Mal. 4:1]
n See Gal. 4:8
o Rom. 2:8
p [Phil. 3:19; 1 Thess. 5:3]
q Isa. 2:10, 19, 21; [ch. 2:8]
2 Or destruction that comes from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6–9.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6–9.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을 통해서 환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심
6절)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하나님
본절에서 '환난을 받게하는’이라는 표현은 ‘들리부신’은 ‘들리보’의 현재 분사 능동태 표현이다. ‘들리보’는 원래 포도를 짓눌러 즙을 짜내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신약에서는 사람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압박한다는 의미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성도들에게 이러한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환난으로 갚으실 것이다.
‘갚으시고’로 번역된 ‘안타포두나이’의 원형은 ‘안타포디도미’로 ‘~에 대하여’를 의미하는 전치사 ‘안티’와 ‘되돌려주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포디도미’의 합성어로 되돌려주어야 할 것을 있는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보응하시며 선한 행실에 대해서도 갚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상과 벌로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의로 보응하신다는 믿음은 환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7절)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심판의 핵심이다.
‘안식으로’에 해당하는 ‘아네신’의 원형 ‘아네시스’는 ‘~를 향하여’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나’와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히에미’의 합성어로 늦추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래 팽팽했던 활줄이 느슨해진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바울이 말하는 ‘아네시스’, 안식은 이 세상의 혹독한 환난으로부터 해방되어 더이상 마음 졸임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날마다 팽팽한 긴장감 가운데 있는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그 안식을 ‘우리와 함께’ 갚으신다고 말한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로 표현된 바울과 실라, 디모데 역시 환난 가운데 안식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시니’ 이 표현은 원어에서는 6정 상반절에 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대한 묘사이다. 본문에서 ‘나타나다’라는 의미의 ‘아포칼륍세이’의 원형 ‘아포칼립시스’는 ‘~로부터’를 의미하는 ‘아포’와 ‘덥다, 가리다’라는 의미의 ‘칼립토’의 합성어로 본래 덥개를 벗기는 것,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명백히 보이는 것을 나타내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계시로 번역된다.(고전 14:6; 갈 1:12; 엡 3:3) 이는 신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개념이다. 주님의 재림은 승천 이후 사람들 눈에 감추어졌던 예수께서 신적이고 초월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명백히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은 그분의 재림시에 나타날 두가지 모습을 묘사한다. 첫번째는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내려오시는 것이다. 천사들 자체가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보다는 천사들은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두번째는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불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을 상징한다.(단 7:9-10)
다니엘 7:9–10
9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예수께서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는 표현은 그분의 재림이 심판 집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준다.
8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형벌의 대상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다. 전자는 이방인, 후자는 유대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한 모두 불신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복음에 복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기에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고 있는가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형벌은 통제되지 않는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처벌하시는 분이시다.
9절) 본문의 이런 자들은 앞서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다. 원문을 보면 분리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가 두번 사용되었다. 이는 재림시 형벌을 당하는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주의 얼굴’에 해당하는 ‘프로소푸 투 퀴리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추방되었던 것처럼(창 4:10-1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고 영원히 추방될 것이다. 또한 ‘그의 힘의 영광’은 하나님나라의 충만한 영광을 상징한다. 이는 재림 이후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의미하는데 이런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영광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받으리로다’로 번역된 ‘티수신’은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유일하게 쓰인 동사이다. 원형은 ‘티노’로 ‘치르다, 지불하다’의 의미이다. 이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의 표현으로 주님의 재림시에 이 형벌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런 자들이 현 시대에 처벌 받지 않고 도리어 더 형통해 보이는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주께서 불꽃 가운데 재림하심으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일시적 형통에 즐거워하고 있는 악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현재 당하는 고난에 좌절하거나 낙망할 필요가 없다.
영원한에 해당하는 ‘아이오니온’은 ‘끝이 없다’라는 의미이고 멸망에 해당하는 ‘올레드론’의 원형 ‘올레드로스’는 ‘파멸, 멸망’을 의미한다. 말그대로 파멸, 형벌이 끝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당하는 이들은 그 존재가 영원히 소멸하여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소멸 없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매튜 헨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항상 죽어가고 있을 것이나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최후의 형벌은 불멸의 영혼에게 가한 형벌이기 때문에 영속적인 모습을 띠고 계속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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