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nd God said, c“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 And God saw that the light was good. And God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5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first day.
c 2 Cor. 4: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3–5.
3절) 빛의 창조
본문의 빛은 ‘욜’이라는 단어이다. 5절에서 하나님은 이 빛을 낮(욤)이라 칭하셨다. 이 단어는 이후에 날이라는 단어와 같다. 여기서 빛을 낮이라고 부르신 것은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을 창조하셨다라고도 볼 수 있다. 왕관이 왕을 상징하고, 요람이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것처럼 빛이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빛의 기간, 시간을 나타내는 환유법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의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첫번째 행하신 것이 바로 시간을 창조하심으로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인 시간의 진행이 있게 하신 것이다.
- Day one concerns something much more significant, something much more elemental to the functioning of the cosmos and to our experience of the cosmos. On day one, God created time.44 This is the first of the functions God will use to bring order to the chaos of the cosmos: the orderly and regular sequence of time.
44 W. Vogels, “The Cultic and Civil Calendars of the Fourth Day of Creation (Gen 1,14b)” SJOT 11 (1997): 178–79, comes to similar conclusions, though he draws different conclusions from it.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79.
4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좋음은 미적인 또한 도덕적인, 영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시 34:8; 100:5; 렘 33:11; 나 1:7; 벧전 2:3)
빛을 창조하시자 어둠과 구별되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는데 이는 창조의 첫 세날 동안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나눔은 구별과 정화 모두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을 나뉘게 하셨고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다. 이 나눔의 역사는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고 그 창조물 자신의 정체성을 주는 것이다.
5절)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바로 그 본성, 정체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창조주 자신이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그것의 목적에 따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결국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왕따, 그림자)
본문의 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욤은 24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큰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창 2:4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날은 창조의 7일을 하루로 보고 있다. 1장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1:5,8,13,19,23,31)은 욤을 하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을 24시간으로 볼 것이냐하는 것에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1)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것은 넷째날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날의 개념은 넷째날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창조의 1-3일의 날을 24시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2장의 창조기사는 1장과 달리 더이상 날짜 별로 창조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3) 창 2:19이하에서 하나님이 동물을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와 이름을 짓게 하는데 하루에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4) 동물의 이름을 지은후 하나님은 아듬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나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이를 여섯째날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현실적인 하루와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창조 기간이 7일인 것으로 창세기 1장은 기록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6/7의 패턴을 통해 피조 세계의 창조와 구조의 완전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를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제의적인 차원에서 7일 안식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6/7패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창세기 1:1은 7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은 14개의 단어(7×2)로 구성되어 있다.31) 창조의 시작을 7단어로 묘사했는데, 창조의 절정은 제7일에 이루어지며, 제7일은 35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7×5=35).
31) 계시록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새창조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7은 창세기를 모델로 삼은 것으 로 보인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53.
여기에 사용된 욤이라는 단어는 의미론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1) 낮 시간, 2) 24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 3) 특별한 날들(그의 죽음의 날), 4) 여러 날 혹은 일 년, 5) 욤에 정관사가 붙어서 오늘을 의미, 6) 그 앞에 전치사가 붙거나 지시대명사가 덧붙여져서 ‘그날에’혹은 ‘~할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In the semantic range of yom we must include (1) the daylight hours, (2) a twenty-four-hour day, (3) special days (e.g., day of his death), and (4) a plural use that can refer to a few days or even a year.47 Furthermore, (5) the definite article can be added to yom to make it mean “today,” or (6) a preposition can be tacked on the front and a demonstrative pronoun associated with it to say “in that day” or simply “when.” The important point to be made here is that these categories cannot be merged carelessly. It is not unusual for an interpreter to claim something like, “The word day can mean an extended, indefinite period of time,” and then follow up with a series of supporting references. The problem is that invariably most if not all of those references will be examples of category 6. Unfortunately, one cannot pull the word yom out of that setting and still retain the meaning it has in that setting.
47 Adapted from HALOT, 2:399–400.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81.
예를 들어 외출을 준비하는 중에 아내가 ‘1분만 기달려’라고 했을 때 그때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서 60초 후에 바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업시간을 50분으로 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정확하게 종을 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이라는 표현이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문맥속에서 확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첫째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은 무엇일까? 천체(해와 달과 별)은 넷째날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 첫째날의 빛은 천체들의 빛과는 무관한 빛으로 보기도 한다.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편 104:2은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고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22:5에서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1:4에서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것은 이 빛을 하나님의 임재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또 다른 가능성은 창세기 1:1에서 이미 만들어진 천체가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지구를 향하여 빛을 비취게 하는 것이다. 5절에서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는 것은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빛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또는 빛이 존재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구분이다. 뿐만 아니라 낮과 밤이라고 부른 것은 밝은 상태의 기간과 어두운 상태의 기간을 가리킨다. 결국 첫째 날 창조는 빛의 생성과 더불어 시간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날의 빛과 시간의 탄생은 넷째 날에 창조 활동의 기반이 되며, 이를 통해 낮과 밤은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53–54.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 표현은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루의 첫 시작은 아침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유대식 사고방식에 따르면 저녁이 하루의 첫 시작에 해당한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전통적인 유대의 사고방식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창세기 1장의 이러한 묘사 때문에 그와 같은 유대식 사고방식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첫째날의 빛의 창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시간의 창조라고 볼 때 이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고대 근동의 문화속에서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본문의 하루, 첫째 날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현대 과학의 여러 발견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욤이 24시간일 수 없다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을 과학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찬양의 시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선포로 읽어내는 이들에게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해하고 변호하기를 원하는 개념들을 읽어내는 것이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구약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본문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당시의 저자나 유대인들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 했다. 예를 들어 21세기의 사람들은 세계를 합리적인 세계 이해를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과 용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묘사할 때 가장 정확하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고대세계에서는 오늘날 과학의 역할을 신화가 담당하고 있었다. 신화적인 접근은 자연 세계의 기능들을 어떤 목적에 따른 결과로 파악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천둥번개는 대기의 압력과 대류현상으로 설명되지만 고대에는 신들의 분노로 해석하였다. 이처럼 구약의 기록은 고대 문화들 속에서 신화가 감당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감당했다. 즉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존하고 전수하기 위한 문학적인 메카니즘을 제공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전역에 존재한 거대한 문화적 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현대 우리의 세계관 속에서 기능은 구조의 결과라면 고대 세계관에 따르면 기능은 목적의 결과이다.
어린 아이의 질문 “나는 어디에서 왔어?”
생명 탄생의 신비와 성에 대한 지식 전달을 위해서 고뇌하며 아이에게 이를 설명하는 부모, 아이는 뒤돌아서며 “엄마, 한결이가 그러는데 자기는 서울에서 왔대.”
우리는 우주의 물질적인 구조와의 관계속에서 주로 우주를 생각한다 헬라 철학은 우주의 물질적 인 구조를 분별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계몽주의는 우주의 물질적 인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다윈 이후의 시대는 물질적 인 구조가 우주에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해 왔다. 래비 재커라이어스는 비슷한 것을 목격하였다. “먼저 이 세계에서 초월성이 제거되었다. 이어서 성경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마지막으로 인류를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고대인들이 창조를 묘사하거나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했을 때, 물질적인 구조나 우주의 형성사같은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기능적인 우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들은 창조를 사물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현실 연속체를 확립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우주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실상은 우주의 모양이나 구조 혹은 그것의 형성사 등에 대한 묘사를 들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본문은 우주적인 실상을 전달하고 있다. 즉 시간을 통해서 모든사람이 우주를어떻게 경험해 왔는가 하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종종 사람들이 우주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작용하도록 우주를 설정하셨고 그것이 것을 그 본문은 확증하고 있다.
열린 우주(open universe)-영들의 지배(과학적 연구 불가능), 닫힌 우주(closed universe)-순수한 인과관계로 설명-이신론, 통제된 우주(controlled universe)-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주관자로 본다. 그분은 질서있게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D.A. carson)
An open universe is espoused by animism. The spirits control most things, and the appropriate thing for human beings to do is to appease the spirits so that they may do the things we want. Science is not possible because nothing is regular: the whims of the spirits are unpredictable, and even the sacrifices do not always work. In a closed universe, everything is explained by cause and effect at a purely material level. Science is possible; God is excluded. A modification of this model is espoused by deism. God set the whole thing up and established the principles of operation, but since then he has been rather removed from the scene, while he lets nature take its course. Science is possible, but there is little need to appeal to God, except for the initial act of creation.
The controlled universe reflected in the Bible, however, has God as both its creator and its sustainer/ruler. He creates in an ordered way, and sustains and rules it in an ordered way, so that science is possible; but he is not bound by what he has created, so he is at perfect liberty to do things another way, with the result that miracles are possible.90
90 D. A. Carson, The Gagging of God (Grand Rapids: Zondervan, 1996), 201.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00–101.
하나님을 과학이 메울 수 없는 간격들만을 채우는 신 일명 간격의 신(God of the gaps)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한번도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과 무관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도, 자연계의 질서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다.
첫째날의 창조가 바로 빛이고, 이 빛의 창조가 무질서한 세계 가운데 시간을 창조하신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던지게 된다. 조지오웰의 ‘1984년’에서 사람들은 치명적인 고통에 지배를 받고 있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에서 사람들은 치명적인 쾌락에 지배를 받고 있다.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시간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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