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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p“What profit is an idol

when its maker has shaped it,

a metal image, qa teacher of lies?

For its maker trusts in his own creation

when he makes rspeechless idols!

19  sWoe to him twho says to a wooden thing, Awake;

to a silent stone, Arise!

Can this teach?

Behold, it is overlaid with gold and silver,

and uthere is no breath at all in it.

20  But v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wlet all the earth keep silence before him.”

p Isa. 44:10

q Jer. 10:8, 14; Zech. 10:2

r Ps. 115:5; 1 Cor. 12:2

s ver. 6, 9, 12, 15

t See 1 Kgs. 18:26, 27

u Ps. 135:17; Jer. 10:14

v Ps. 11:4; Mic. 1:2

w [Zeph. 1:7; Zech. 2: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합 2:18–20.

 

마지막 화에 대한 경고에서는 앞선 4개의 구조와는 다르게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이 두번째 절에 등장한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아닌 다른것들을 섬기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생기가 없는, 인간이 부어 만든 것들을 신으로 여기며 섬기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무언가에 의존하고 도움과 보호를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사람들은 부, 중요한 사람들, 무력, 아름다움, 인간적인 재능들을 뿐만 아니라 악을 의지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형제나 친구들을 의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는 완전하지 않고 종국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To trust “is a concept of central theological importance in the Old Testament. It expresses that which is, or at least should be, central in people’s relationship with God.”70 Trust “almost always refers to a process at the foundation of existence. Whoever trusts, relies on something, and everything depends upon the reliability of the other; one seeks protection, and one stands or falls with that on which one relies.”71 God calls on his people to trust him at all times (Ps 62:8; cp. 115:9–11; Isa 26:3–4; 30:15). People are trusting folk, but choose the wrong things in which to place their trust—riches (Job 31:24; Prov 11:28); important people (Ps 146:3; cp. Jer 17:5–8); military fortifications (Deut 28:52; Jer 5:17); beauty (Ezek 16:15); in personal abilities (Prov 3:5; 28:26). One can even trust in evil (Isa 30:12). “The logic of biblical monotheism requires that all these things be used in the service of God and not set up as alternatives to him.”72

Trust is not confined to God in the biblical revelation. Spouses (Prov 31:11), brothers (Jer 9:4) and friends can be trusted (Mic 7:5), but only in relationship to an ultimate trust in God. This trust in God is not an illusory, spiritual emotion. It relates to life crises, especially national ones (Pss 22:4–5; 25:1–2; 28:7; 31:14–15; Isa 36–37; Jer 39:18). But even trust in Yahweh can be misplaced if it is only ritualistic and not connected to genuine obedience (Jer 7:3–15).73 Trust in God wipes away all fear (Pss 56:5, 12; 25:2; 21:8). “Israelite tradition recognizes and demands an absolute, exclusive devotion to Yahweh; this trust in Yahweh includes hope of salvation (Job 11:18) and faith in the God of the fathers (Ps 22:4f.).”74 Like Habakkuk, the prophets mocked the Babylonians for their worship of idols and the people of Judah for wanting to be like the Babylonians in their worship.75

70 R. W. L. Moberly, “בּטח,” NIDOTTE 1:644.

71 E. Gerstenberger, “בטח bṭḥ to trust,” TLOT 1:228.

72 Moberly, “בּטח,” 645. Note Gerstenberger’s statement (“בטח bṭḥ to trust,” 229) that the OT assumes “that one can successfully place confidence only in Yahweh, that no other entity can be an ultimate object of trust.”

73 See Gerstenberger, “בטח bṭḥ to trust,” 229.

74 Ibid., 230.

75 Isaiah and Jeremiah scorned the Babylonians for idolatry. Of course, these prophets turned the lessons to be learned to the people of Israel and Judah who should have known better. Isaiah described the foolishness of idolatry in much the same way as Habakkuk, describing the making of an idol by cutting down a tree, carving the wood and finally overlaying the wood with metal (Isa 44:9–20). Isa 46:1–7 described two Babylonian gods being carried into exile before the invasion of Cyrus the Persian. Bel and Nebo sat helpless before the invader. Isaiah’s message decried the foolishness of worshiping gods which have to be carried. Better to worship the God who can carry you! Jeremiah coined a word for the idols—they were hăbālîm, only breath. For Jeremiah, the idols lacked the power to do good or to do evil (Jer 10:5). They were nothing.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6–347.

 

우리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긴다. 그 우상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금이나 은, 나무나 돌에 새긴 형태이기도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 아름다움, 건강, 미래에 대한 안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우상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안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앞에 잠잠히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문제는 우리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줄 것을, 저 멀리 계신 하나님, 마치 지금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 침묵하고 계시는듯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영향을 주고, 즉각적으로 효과를 제공해줄것과 같은 것들을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어야 한다. 

 

18절) 우상 만드는 자가 그것을 만들었을때 그 우상, 또는 거짓 스승이라하는 금속으로 만든 우상은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가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만들었을때 그 자신이 만든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어서 만든 말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상숭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둘째 우상은 거짓만을 가르친다. (렘 10:5) 세번째 우상을 만드는 것은 그 예배자가 그 자신의 이미지로 신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들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신이 우리 자신의 모습에 제한되기 때문에 항상 작게 된다. 네번째 우상은 말하거나 인도함을 주지 못한다. 우상은 말하거나 듣거나 인도하거나 구원해주지 못한다. 

 

19절)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깨어라 혹은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보라 이것이 금과 은으로 덮여져있지만 그 안에는 생기가 없다. 이것들이 가르칠 수 있느냐? 

본문에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생명을 의미한다. 우상은 생명이 없는 존재이다. 생기는 우상이 인도하거나 계시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우상은 인간의 깊은 필요에 대해 답할 능력이 없다. 생기 없음은 우상을 창조자보다 약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진정한 하나님으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The last line is more emphatic than the NIV rendering reflects. “There is no breath in it at all” would more adequately reflect the sense. In this context, “breath” (rûaḥ) meant life. An idol was a lifeless form. Snaith pointed out the peculiar significance of rûaḥ. He saw three particular points of emphasis. It stood for power, life, and came from God in contrast to coming from man.78 Breath could refer to the idol’s inability to give guidance or revelation. It lacked the ability to answer to the deepest needs of human beings. Lack of breath made the idol weaker than its “creator,” for the true God had placed breath in man’s nostrils (Gen 2: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78 N. H. Snaith, The Distinctive Ideas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46), 183–203.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9.

 

20절) 여호와는 그분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침묵하고 생기없는 우상들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분은 무가치한 우상들에게 드려졌던 존경과 경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모든 이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모든 만물에 대한 그분의 주재권을 깨닫을 것을 깊이 생각하도록 침묵을 명령받는다. 

But the Lord. There is a tremendous contrast between silent, inanimate idols and the awesome living God who sits enthroned in heaven and rules over the earth. He is the One who deserves the honor and reverence bestowed on worthless idols (see Isa. 41:1; Zeph. 1:7; Zech. 2:13). Silence is commanded so that everyone will consider God’s awesome nature and realize his sovereignty over all creation (see Zeph. 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25.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성전을 의미한다. 하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그분 홀로 영광을 받으셨다. 그룹 천사들 위에서 좌정하셔서 다스리시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은 거룩한 침묵이다. 잠잠하라는 단어는 ‘쉿’하고 말하는 의성어적 표현이다. 이 구절은 신이 아닌 사람들과 하늘에서 인간의 필요와 인간의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사이의 대조를 그려낸다. 하박국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가 하늘의 하나님의 성전에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장의 마지막 구절인 20절에서는 마지막 화에 대한 적절한 결론이자 일련의 모든 화들에 대한 결론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서 그의 망루로 후퇴하고 하나님의 침묵에 초초한 선지자를 가리킨다. 이제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때에 그분의 입을 여실 것을 기꺼히 기다릴 것을 자신과 모든 세계를 향해 ‘쉿’하고 요청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좌정하시고 이후 하박국의 기도에 독자들이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함이 입증되었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행동과 그의 신학을 화해시킬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분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경외심 가득한 침묵속에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For Habakkuk, the “temple” probably meant not only the temple in Jerusalem but also the heavenly sanctuary (Mic 1:2). From the heavenly temple, the Lord ruled over heaven and earth and received the honor due him alone. The proper response to such a God who is enthroned above the Cherubim is awed silence. The word for “keep silence” is “an onomatopoeic interjection with a force much like the English ‘hush!’ (cf. Zeph 1:7).”79 The verse pictures the contrast between those who are no gods and the one who is in heaven ready to respond to human need and to human questions. Habakkuk himself knew from experience that he could take his questions to God’s temple in heaven.

The last verse of the chapter serves as a fitting conclusion to the final woe as well as a conclusion to the entire series of woes.80 Likewise, it points back to a prophet making demands of God, asking questions of God, and retreating to his watchtower to wait for God’s answers, impatient at God’s silence. Now the prophet hushes himself and all the world, willing to let God act in God’s time and willing to wait for God to open his mouth when God chooses. This final verse of the chapter points the reader to the holy God enthroned in his holy temple and prepares the reader for the prayer of Habakkuk in chap. 3.“Finally, God’s holiness was vindicated, and the prophet was able to reconcile his theology with God’s actions.”81 “Despite his apparent silence, he still remains with them; he has not lost control of their destiny. One should wait upon him in the awed silence that is often the most appropriate expression of true worship.”82

79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209.

80 Patterson sees v. 20 as “the chief lesson to be learned from the whole discussion. Verse 20 forms an inclusio with v. 4 that reveals the underlying thesis and its implication for the entire section: The Lord is a just and holy God who deals righteously with all people and is actively present in the flow of earth’s history; therefore, He is to be acknowledged as God by all” (ibid., 205).

81 Barber, Habakkuk and Zephaniah, 20.

82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28.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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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sson from the Withered Fig Tree
20 iAs they passed by in the morning,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away to its roots. 21 And Peter remembered and said to him, j“Rabbi, look! The fig tree that you cursed has withered.” 22 And Jesus answered them, “Have kfaith in God. 23 lTruly, I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m‘Be taken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does not ndoubt in his heart, but obelieves that what he says will come to pass, it will be done for him. 24 Therefore I tell you, pwhatever you ask in prayer, obelieve that you qhave received3 it, and it will be yours. 25 And whenever ryou stand praying, sforgive, tif you have anything against anyone, so that uyour Father also who is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trespasses.”4

20-21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제 아침에 지나가실때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있었다. 마가의 경우 본문의 내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마태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땅히 열매를 맺혀야 함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바로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이다. 
  • The fig tree had withered within 24 hours, perhaps sooner (Matt. 21:19). It represents the judgment of God on Israel (Isa. 34:4; Joel 1:7–12; Amos 4:9; see note on Mark 11:13–14).

22-23절) 지금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말한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응답은 어쩌면 생뚱맞은 것이다. 지금 한창 시들어 버린 무화과 나무를 이야기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과 믿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주님의 관점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산을 옮기는 이 비유, 상징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주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다. 
  • Have faith in God. Jesus’ response must have surprised the disciples. (What does faith have to do with the cursing of the fig tree?) His point is that they should trust God to remove whatever hinders them from bearing fruit for God. Moving a mountain was a metaphor in Jewish literature for doing what was seemingly impossible (Isa. 40:4; 49:11; 54:10; cf. Matt. 21:21–22). Those who believe in God can have confidence that he will accomplish even the impossible,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절) 기도하고 구하는 바를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성급하게 일반화 시켜서는 안된다. 불가능한일을 “믿씁니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앞에 떼를 쓰면 하나님이 우리의 열정과 열심에 감복해서 들어주실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을 일반화시키거나 예외없이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동시에 이 본문의 내용이 오직 사도들에게만 한정되기에 우리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제껴놓아서도 안된다. 믿음은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  The statement is not to be universalized and applied without exception, but neither is it to be localized and confined to the original disciples or ignored as having no practical value. Faith is an indispensable element in answer to prayer.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다면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당시는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마가는 본문에서 응답되는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앞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응답받는 기도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용서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다. 
  • Standing probably was the most common Jewish posture for prayer, but both standing and kneeling are well attested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Mark seems to have understood that forgiveness of others is another prerequisite for answer to prayer. Some think the verse indicates that Mark and his readers knew the Lord’s Prayer, but no confident decision seems possible. What is certain is that effective prayer must be offered in faith with a spirit of forgiveness.

  • It is possible then that 11:25 describes a corporate prayer by an oppressed community that is asking God to rectify the injuries it has suffered. In that case the request for justice is to be tempered by forgiveness. It must be tempered also by the recognition that oppressed groups can injure other people as well, a concern that the disciples’ own conduct justifies (9:34; 10:13, 37). Viewed in this light, a prayer for justice is also ultimately a prayer for reconciliation.

  • Jesus’ use of the word father at the end of 11:25 should not be overlooked. This is the first time in the Gospel of Mark that God is described in this way. Jesus has been described as God’s “son” in 1:11 and 9:7, but heretofore no one has referred to God as father. One of the major themes in the previous sections of the Gospel is the creation of a new family (3:31–35), in which the will of God is the defining factor. The reference to God as father here is entirely consistent with that passage. We might wonder then why we have not seen it before or why it appears here. The best answer is that in this passage the will of God is startlingly and clearly revealed. Against the backdrop of nationalistic dreams and all the roiling patriotic fervor,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are revealed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God’s will.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성전 청결을 명하시고나서 이제 이 성전이 있는 산을 보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전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명하여 옮기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고 또한 용서를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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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leanses the Temple
15 aAnd they came to Jerusalem. And he entered the temple and began to drive out those who sold and those who bought in the temple, and he overturned the tables of bthe money-changers and the seats of those who sold cpigeons. 16 And he would not allow anyone to carry anything through the temple. 17 And he was teaching them and saying to them, “Is it not written, d‘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the nations’? But e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18 And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heard it and fwere seeking a way to destroy him, for they feared him, because gall the crowd was astonished at his teaching. 19 hAnd when evening came they2 went out of the city.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Mk 11:15–19.

15절) 앞서 11-12절의 상황을 볼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을 전날 둘러보셨고 베다니에서 묵으신 이후에 예루살렘에 다시 들어오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이들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테이블과 비둘기 파는 자의 자리를 둘러 엎으셨다. 마태와 누가와는 다르게 마가는 시간 순서에 따라 비교적 정확하게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상을 둘러엎은 사건은 성전의 바깥뜰, 소외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로마 화폐를 세겔로 바꿔주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에 바쳐야하는 성전세를 내기위해서였다. 미쉬나에 따르면 이 성전세의 마감이 니산의 첫날인데 이는 유월절 2주전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렇게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는 테이블은 일반적으로 이 마감일 5일전부터 준비되어서 운영되었다. 이로 볼때 예수님께서 유월절 한주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맞아 보인다. 
  • Whereas Matt 21:12 and Luke 19:45 appear to indicate that Jesus intervened in the temple the same day he entered the city, Mark clearly indicates that it was the following day when he did so (see v. 12). Again the best explanation is that the Gospel writers were not concerned to produce an exact chronology.
  • The scene is the outer courts, the so-called court of the Gentiles, the only area into which Gentiles could go. The money changers were those who exchanged Roman money for the Tyrian shekel, which was required for the annual temple tax imposed upon all Jewish males (Exod 30:11–16). The Tyrian shekel was the nearest available equivalent to the Old Testament shekel. According to the Mishna, the tax was due on the first of Nisan (two weeks before the Passover); and the exchange tables were set up in the temple during the five days prior to the due date.7 Doves were the prescribed offering for the poor who could not afford an animal (Lev 12:6; 14:22; 15:14, 29; cf. Luke 2:22–24).
  • Šeqal. 1.1–3. This may constitute additional evidence that Jesus was in Jerusalem for more than a week before his death. The Mishna, however, was not put together until two centuries after Jesus’ time; and there is always the problem of how accurately it describes the situation prior to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in a.d. 70.

17절) 예수님께서는 내집(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지금 이 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문은 구약의 인용이다. 주님은 지금 성전을 유대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한정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이 유일하게 예배드릴 수 있던 이 장소가 상인들의 돈벌이를 위한 소굴로 전락되어 소음과 매연으로 더렵혀질때 주님께서는 그들도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 곳을 청결케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상인들을 내보내심으로서 이방인들을 위한 예배의 장소를 마련해주신 것이다. 
  • The quotation in the middle part of the verse is from Isa 56:7, and the allusion in the last part is to Jer 7:11. Jeremiah continued in vv. 12–15 to say that God was going to do to the temple of Solomon what he did to the shrine at Shiloh—utterly destroy it. By quoting from Jeremiah, Jesus suggested that God would do the same to the temple of Herod that existed in his day.
  • Interestingly, only Mark included the words “for all nations” in his quotation. This may be significant. Isaiah predicted that the Gentiles would have a place among the people of God and in the temple of God. In Herod’s temple, however, they were always excluded from the inner shrine (cf. Acts 21:27–32). With the conversion of the court of the Gentiles into a bazaar with all its noise and commotion and stench, they were deprived of the only place in the temple where they could worship. By clearing out the traders Jesus literally and symbolically provided a place for Gentiles in the temple of God, although as indicated reforming the temple was not his primary purpose.

18절) 예수님의 행동과 그분의 말씀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놀랍고 두려워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주님의 경고를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고칠 기회를 얻었지만 도리어 이를 걷어차고 그분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은 군중들의 마음을 빼앗는 예수님의 인기를 두려워했고 또한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입지가 두려워질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 Paradoxically,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who are in favor of commerce in the temple) seek to destroy the Purifier (3:6; 15:31–32) rather than to be purified themselves. Their actions are motivated by fear of Jesus’ popularity, fear of losing power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and fear of a public uprising (in which case the Romans would intervene). The Jewish leaders correctly saw Jesus’ act as a challenge to their authority in the most sacred space in the world.

19절) 날이 저물매 주님께서는 그 성밖으로 나가셨다. 예수님의 행동으로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을 맞이하여 성안에 그분이 머물만한 숙소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분을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들이 있는 베다니로 가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 Jesus may have left the city at night because it was unsafe to remain there or because there were no accommodations available during the crowded Passover season or because he wanted to be with friends at Bethany (cf. 11:11; 14:3).

예수님의 성전 청결사건은 성전의 본연의 기능을 모든이들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분명히 이 당시에도 힘이 있고 명성이 있는 이들은 안락한 공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자들의 경우에 멀리서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하러 들렀지만, 또한 그중에 이방인의 경우라면 더더욱 성전의 뜰안으로 나아갈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야만 했던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많은 무리들이 오가며 돈을 바꾸고 희생 제물을 구입하기위해서 흥정하는 그러한 장소였을 것이다. 지금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내집은 힘있는 자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만민(가난하고 힘없고 빽없는 이들을 위한 곳)이 기도하는 곳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민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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