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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Not that I have already lobtained this or mam already perfect, but I press on to make it my own, because Christ Jesus has made me his own. 13 Brothers, I do not consider that I have made it my own. But one thing I do: n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strain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othe prize of the upward pcall of God in Christ Jesus. 15 Let those of us who are qmature think this way, and if in anything ryou think otherwise, sGod will reveal that also to you. 16 Only tlet us hold true to what we have attained.
l[1 Tim. 6:12, 19]
mHeb. 11:40; 12:23; [Heb. 5:9]
n[Ps. 45:10; Luke 9:62; Heb. 6:1]
o1 Cor. 9:24
p[Heb. 3:1; 1 Pet. 5:10]; See Rom. 8:28
q1 Cor. 2:6; See Matt. 5:48
r[Gal. 5:10]
s[John 7:17]
tGal. 6: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2–16.
12절) 바울은 자신이 이미 소유했다거나 이미 완전하게 되었다라고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그리스도 예수 께서 나를 그분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기에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달려간다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이 여전히 죄악된 세상가운데서 분투하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부활의 영광은 아직 임하지 않은 미래의 것이므로 그는 여전히 현재의 삶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속하신 것을 의지하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달려간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과 행함의 균형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신자들의 응답을 의미한다.
Paul stresses that he is not already perfect—he is still involved in the struggles of life in a fallen world and hence he still sins; the full glory of the resurrection remains in the future. I press on to make it my own, because Christ Jesus has made me his own. There is a balance of faith and works, of God’s call and the believer’s respons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혔으므로 나도 붙잡을 수 있도록 매진할 따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뒤의 “붙잡다”라는 동사에 대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이 앞의 3:7–10에서 밝힌 자신의 목적(목표)을 요약하여 표현한 말이므로 그 생략된 목적어는 “그리스도”입니다. “붙잡다”(katalambanein)라는 말은 영어의 “grasp”이나 우리의 한자 용어 “파악(把握)하다”와 같이 물리적으로 “붙잡다, 손아귀에 쥐다”의 뜻과 함께 “터득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붙잡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의 다매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두고 말합니다. 그는 그때 그리스도에 의해서 체포되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그의 사도로 징집되었는데,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앎”의 대상이 된 사건, 즉 그로부터 선택받아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 사건이었습니다(고전 13:12 참조). 그것이 그의 구원의 시작이요 동시에 사도로서의 섬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붙잡는 은혜를 베풀어 그는 그리스도를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잡음”- 그를 온전히 얻음(앎), 그의 구원을 온전히 덕 입음- 은 아직 미래적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것을 위해 아직 매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미리 은혜를 베풀어 그를 붙잡았으므로, 그는 그 은혜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붙잡으려” 매진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34–135.
12절과 13절에 잡다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사용되는데 이는 ‘카타람바노’라는 단어로 붙잡다. 얻다, 파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신약에서 13번 등장하고 있다.
καταλαμβάνωoccurs 13× (plus 2× in the story of the woman “caught” in adultery, John 8:3–4). In negative contexts, it is used of an evil spirit “seizing” a boy and throwing him to the ground (Mark 9:18), of darkness not “overcoming” or “understanding” the light (John 1:5; sim. 12:35), and of the final day “overtaking” unprepared Christians (“surprise you like a thief,” 1 Thess 5:4). The remaining occurrences are positive. Paul does not claim that he has “already obtained [λαμβάνω]” or “taken hold of [καταλαμβάνω]” the goal of his high calling (Phil 3:12a, 13), but rather: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διώκω δὲ εἰ καὶ καταλάβω, ἐφʼ ᾧ καὶ κατελήμφθην ὑπὸ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3:12b). In contrast to Israelites who have not responded to the gospel, Gentiles have “obtained” righteousness through faith (Rom 9:30; NRSV, “attained”). Believers are exhorted to run their spiritual race so they can “win” the victor’s imperishable crown of eternal life (1 Cor 9:24, in par. with λαμβάνω). The mid. voice can denote mental grasping, thus “to comprehend, understand, realize” (Acts 4:13; 10:34; 25:25), and it is used in Eph 3:18 of understanding the extent of God’s love (cf. Eng. comprehend, from Lat. prehendere, “to grasp”).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83.
13- 14절)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바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만 일한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한 푯대(목적)을 향해서 달려간다.
본문의 푯대는 ‘스코포스’로 달리기 경주의 결승점 혹은 화살의 과녁을 의미한다. 바울의 삶을 하늘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목표를 가진 삶 이었다. 그 부름의 상은 다가올 시대의 풍성한 축복과 보상인데 특별히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완벽한 교제를 누리를 것이다.
Goal(Gk. skopos) could also refer to the finish line in a race or an archery target. Paul’s life is purposeful, for he constantly aims toward a heavenly goal. The prizeis the fullness of blessings and rewards in the age to come, most especially being in perfect fellowship with Christ forever.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6.
이 두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내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를) 완전히 붙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해서 나의 몸을 앞으로 빼며 푯대를 좇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로 부르시는 상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삶을 단거리 주자가 자기 몸을 앞으로 쭉 내밀고 두 눈은 저 멀리에 놓여 있는 푯대에 집중하여 전력으로 달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단거리 주자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잊어버리고자 하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자신이 과거 유대인으로서 성취한 것들과 교회의 핍박자로서의 저지른 죄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가 자신의 과거의 성취에 연연하면 그는 자만해져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경주에 매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과거의 실패니 죄에 대한 애석함과 죄책감에 짓눌려 있어도 심령이 병들고 믿음이 뒤틀려 건전한 성화의 길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한 죄를 잊기 어려워했음을 보여 줍니다. 구체적으로는 고린도전서 15:8–10에서 사도로 부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0에서 그는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아를 적대하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등 원수 노릇 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6에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적대했었다는 대적들의 공격을 시인합니다. 고린도후서 5:11–21은 그의 대적들이 자신의 사도됨을 부인하고 공격하는 데 대한 바울의 변호입니다. 그의 대적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그에게 환상(vision) 가운데 나타나 자신을 사도로 불렀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황홀경(ecstasy)에 빠진 미친 사람이 하는 주장이라고 비아냥거리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짓 메시아라고 욕하며 교회를 핍박했던 사실을 들어 공격해 댔던 것입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 변증하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에서 그들의 말을 받아 자신이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6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욕하고 교회를 핍박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육신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판단했을 때의 과오나,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서 예수가 참 메시아(그리스도)인 것을 알고는 그를 더 이상 그런 “육신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의 관점에서 메시아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유대인들에게 자유와 정의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그가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 욕하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시고 그를 자신의 우편에 높여 참 메시아요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 것을 보고는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은 “육신적” 이해에 불과하고 예수가 하신 일이 참 메시아적 사역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15에 그가 그때 얻은 메시아적 사역에 대한 참된 이해를 적고 있습니다.
메시아(그리스도, 즉 종말의 구원자)는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인 인류를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대속적 죽음을 이루신 분, 그리하여 그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토론을 종결하는 마지막 절(고후 5:21)에서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지고 그것에 대한 대속의 제사로 스스로를 내어 주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든 분이 참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우리를 위해 대속적 죽음을 한 메시아 예수를 믿어 대속적 죽음을 덕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앞에서 설명한 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고 그와 연합되어 죄인으로서의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죄가 깨끗이 씻어지고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새로 지음 받음(새 피조물 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17의 그 유명한 말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다.” 이 말은 이제 일반화하여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자서전적인 언명으로서 바울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그의 유대교 시절에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육신적 이해로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교회를 핍박했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임을 계시 받고 그의 메시아적 행위에 힘입어 새 피조물이 되고 의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한 흉악한 죄인이라고 공격해 대는 대적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물고 늘어져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36–139.
본문 12절과 14절에서 달려가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디오코’라는 단어로 박해하다, 따라가다, 힘쓰다, 추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앞서 ‘카타람바노’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면서 힘써서 달려가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님의 부활을 소망하며 믿음의 삶을 살기위해서 분투하는, 단거리 경주에서 결승점을 통과하기위해서 몸을 앞으로 내밀며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2 The meaning “to persecute”—in the specific sense of oppressing people because of their faith—is distinctive to the NT, though of course it has its roots in the OT usage summarized above (note also that many of the occurrences in 1 Maccabees, while found in military contexts, reflect an attempt to suppress the Jewish religion). According to the NT, God’s messengers meet persecution. Such was already the experience of the prophets (Matt 5:12; Acts 7:52) and will equally be that of Jesus’ disciples (Matt 5:11–12, 44; 10:23), the more so as they are followers of the Lord, who had to suffer persecution himself (John 5:16; Acts 9:4–5). This connection is clearly expressed in John 15:20: “If they persecuted me, they will persecute you also.” Persecution is caused by the world’s hatred of God V 1, p 751 and his revelation in Christ (15:18–19; cf. also Matt 10:22; Mark 13:13; Luke 21:17; Rev 12:13). Such suffering may be a sign that one is on God’s side; thus Jesus calls those blessed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Matt 5:10; see also vv. 11–12).
Paul, once the persecutor of the church (Acts 22:4; 1 Cor 15:9; Gal 1:13; 23; Phil 3:6; 1 Tim 1:13), experienced persecution himself after the glorified Lord had made him his messenger (Gal 5:11; 2 Tim 3:11). In 2 Tim 3:12 he warns that being a Christian will always be linked with persecution (on suffering, see πάσχωG4248). Paul sees behind it the contrast between flesh and Spirit—the hostility of the flesh against God and so also against those who are led by God’s Spirit (Gal 4:29; see σάρξG4922).
There is the danger of corrupting the message in order to avoid persecution (Gal 6:12). Christians are therefore challenged to maintain their faith during such times. Indeed, they are to meet the hatred of their persecutors by a word of blessing (Rom 12:14; cf. esp. Matt 5:44). But it is esp. in persecution that Christians experience the help, strength, and saving power of Christ (Rom 8:35–39; 2 Cor 4:7–12; 12:10). Paul himself set an apostolic example by enduring hostility patiently (1 Cor 4:12). It is a special reason for giving God thanks when believers endure persecution with faith (2 Thess 1:3–4).
3 The fig. meaning of διώκωis used to express—like its partial synonym ζητέωG2426 (“to seek”), but with greater intensity—the striving that must characterize believers. They should pursue hospitality (Rom 12:13), mutual peace (14:19; 1 Pet 3:11; Heb 12:14), holiness, love (1 Cor 14:1), doing good (1 Thess 5:15), and righteousness (1 Tim 6:11; 2 Tim 2:22; in Rom 9:30–31, using δικαιοσύνηG1466 in a different sense, roughly equivalent to “salvation,” Paul says that righteousness cannot be attained if we pursue it apart from faith [here he also uses both καταλαμβάνωG2898—as in Sir 27:8, cited above under JL—and φθάνωG5777]). Such qualities are lasting objectives in the life of faith, which has as its goal the attaining of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see ἀνίστημιG482). Paul sees the Christian life as ultimately directed to this goal, and he presses on toward it like the runner set on winning the victor’s prize (βραβεῖονG1092, Phil 3:12–14; here again we find καταλαμβάνω, while the use of διώκωin the context of a race is attested elsewhere, as in Diod. Sic. 4.73.4; see al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173–77).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750–751.
15-16절) 우리중에 누구든지 온전한 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해라.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다르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저것도 나타내실 것이다. 오직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얻었던지 그대로 행하라.
앞선 12절에서 바울자신도 아직 온전히 이루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너희가 온전한 자라고 여긴다면 그 온전함을 나타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온전함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 온전함을 향해서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를 향해서 멈추지 않고 행할 것을, 그 자리를 지킬 것을, 그 믿음의 경주를 경주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온전히 율법을 지켰다고 여기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서 이전의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서 달려갔다. 그가 이 경주를 달려가는 동안 주위에서 그의 회심을 비난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렇게 자신을 잡아 끄는 이들의 손길로 인해서 뒤를 돌아보며 자기 연민 혹은 두려움에 빠질 수 있었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에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 달려가기에 힘썼다. 우리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여정을 달려가고 있다. 이 여정을 온전히 마치기 위해서는 그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야만 한다. 내가 달려갈 푯대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아야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때로는 주위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달려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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