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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Feeds the Four Thousand
8 lIn those days, when again a great crowd had gathered, and they had nothing to eat,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 and said to them, 2 m“I have compassion on the crowd, because they have been with me now three days and have nothing to eat. 3 And if I send them away hungry to their homes, they will faint on the way. And some of them have come from far away.” 4 And his disciples answered him, “How can one feed these people with bread here in this desolate place?” 5 And he asked them, “How many loaves do you have?” They said, n“Seven.” 6 And he directed the crowd to sit down on the ground. And he took the seven loaves, and ohaving given thanks, he broke them and gave them to his disciples to set before the people; and they set them before the crowd. 7 And they had a few small fish. And phaving blessed them, he said that these also should be set before them. 8 And qthey ate and were satisfied. And they took up the broken pieces left over, nseven baskets full. 9 And there were about four thousand people. And he sent them away. 10 And immediately he got into rthe boat with his disciples and went to the district of sDalmanutha.1
l For ver. 1–10, see Matt. 15:32–39; [ch. 6:32–44]
m [Matt. 9:36]
n Matt. 16:10
o ch. 14:23; Matt. 26:27; Luke 22:17, 19; John 6:11, 23; Acts 27:35; Rom. 14:6; 1 Cor. 10:30; 11:24; 14:16; 1 Tim. 4:3, 4
p See Matt. 14:19
q [2 Kgs. 4:42–44]
n [See ver. 5 above]
r See ch. 3:9
s [Matt. 15:39]
1 Some manuscripts Magadan, or Magdala
7개의 떡
1-2절) 본문의 그 무렵이 언제를 의미하는가? 또한 어느 장소에서 이 이적을 베푸신 것인가?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상 앞선 7장의 기록의 여정과 연관되어서 볼때 주님은 두로-시돈-데가볼리-갈릴리 호수로 이어지는 여정을 하고 계셨다. 아마도 수로보니게 여인(페니키아)이 있던 곳에서 데가볼리로 이어지는 여정의 어딘가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여러날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과 함께 하는 큰 무리들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사흘이나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었고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 하는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본문의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스플란크니조마이’라는 단어로 to deeply moved(bowels)라는 의미를 가진다. 깊은 동성심, 측은히 여김의 의미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무리들을 향해 연민의 감정을 느끼셨다는 것이다.
- Although Mark did not specifically locate the feeding of the four thousand, “during those days” seems to place it during Jesus’ tour of Phoenicia and the Decapolis (7:24, 31). The most likely location is somewhere in the Decapolis, which was inhabited by a Jewish minority and a Gentile majority.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5.
위 본문들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보시고 애간장이 끊는 아픔을 느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동기는 바로 이러한 연민의 마음, 애통히 여기는 마음이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 주님의 복음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의 사역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3절) 이어서 주님께서는 이 무리중에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에게 아무것도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굶겨서 보낸다면 이들이 길에서 기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문제의 식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본문의 멀리서 온 사람들은 바로 이방인들을 말한다. 이처럼 이방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 내용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올 것을 기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 The expression translated “a long distance” and cognates are used in the LXX to describe the Gentile lands to which Israel had been exiled (e.g., Isa 43:6; 49:12; 60:4, 9; Jer 26:27 LXX only; 30:10; 38:10 LXX only; 46:27 Hebrew only; cf. Josh 9:6; Acts 2:39; 22:21; Eph 2:11–12). The early church sometimes referred these passages to the calling of the Gentiles. Mark, therefore, may have wanted his readers/hearers to see an allusion to the Gentile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5.
4절)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 외딴 광야에서 도대체 어디에서 떡을 얻어서 이 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 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불가능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출 16장의 사건,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받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오병이어의 기적(6:35-)의 사건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앞선 이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다.
- The “remote place” was more likely in the region east of Lake Galilee than in Galilee itself. Again the dullness of the disciples comes to the front. The juxtaposition of “remote place” and “bread” (cf. 6:35ff.) again recalls the giving of the manna in the desert (Exod 16), which implies for Christians that God will also supply their physical need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5.
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개의 떡이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을 일곱 개의 떡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앞선 이적에서는 오병이어를 보여주었는데 본문에서는 7개의 떡과 두어마리의 물고기가 등장한다. 왜 일곱이냐에 대해서 큰 의미가 없는 숫자라고도 하고 어떤 무리들은 이 노아 계명의 7번째 계명과 관련이 있다라고 말하며 그래서 이것이 이방인을 향한 준비라고 말한다.(창 9:4-6) 다섯개의 떡은 모세의 율법, 오경의 조항을 의미하고 7개의 떡은 노아 계명으로 이방인을 위한 조항이라는 것이다.
- Not to worship idols.
- Not to curse God.
- To establish courts of justice.
- Not to commit murder.
- Not to commit adultery or sexual immorality.
- Not to steal.
- Not to eat flesh torn from a living animal.
- Some think the seven loaves reflect the Noachian commandments of Gen 9:4–6 and therefore provision for the Gentiles, whereas five symbolizes the five books of the law and provision for the Jews. Certainty about such matters is impossibl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5–126.
6절) 이제 예수님께서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시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이를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연상하게 한다. 성찬을 집행하시면서 떡을 가지사-축사하시고-떼어-주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본문에서 무리들을 먹이는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은혜가운데 공급하시는 것을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때의 축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 The statement “When he had taken the … loaves and had given thanks, he broke them” corresponds closely with the account of the institution of the Lord’s Supper in 1 Cor 11:24. As with the earlier feeding narrative, Mark and other early Christians may have seen a preview of the Lord’s Supper; but the absence of the cup and the introduction of the fish (v. 7) preclude any significant Eucharistic connection. The recognition that the two feedings and the Lord’s Supper point to the same deep truths, i.e., Christ’s gracious provision for his people’s needs and the festive consummation of God’s kingdom, accounts for what connections there ar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6.
8절) 이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였다. 그런데 앞서 오병이어에서 12 바구니는 ‘코피노스’라는 단어로 본문의 ‘스피리스’가 더 큰 규모의 그릇인 것을 감안할 때 양만을 놓고 보면 7 광주리의 양이 더 많은 양이다. 12바구니가 이스라엘을, 7광주리가 이방을 상징한다고 볼때 의도적으로 다른 규모의 그릇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The word here meaning basket (spyris) is different from the one (kophinos) in 6:43. It refers to a large basket (cf. Acts 9:25) made of wicker or rope for carrying provisions. Therefore the seven basketfuls here may have contained more than the twelve. The number “twelve” in the previous account obviously is relevant to Israel; the number “seven” here may symbolize fullness and completion and therefore the Gentile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6.
9절) 이렇게 먹은 무리의 숫자가 사천 명이라고 기록한다. 이 사천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온 땅의 네 부분에서 이방인들이 나아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Again women and children are not included in the enumeration (cf. 6:44). Inasmuch as there were so many more Gentiles than Jews, a question arises about how the larger number could symbolize Jews and the smaller one Gentiles. Perhaps the answer is that the larger number or the placement of the accounts symbolize the precedence of the Jews. According to one interpretation the four thousand men symbolize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from which the Gentiles cam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6.
10절) 이렇게 무리들의 필요를 체우시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신다. 본문을 마 15:39에서는 마가단이라고 하고 어떤 본문에서는 막달라라고 한다. 본문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은 없다.
- The location of “Dalmanutha” is unknown. Matthew 15:39 has “Magadan,” but its location is also unknown. “Magdala” (among others) is a variant reading with fair attestation in both passages. It is barely possible that Magdala, Dalmanutha, and Magadan are different names for the same place. Magdala, on the western shore of the lake, was certainly in the right place for a landing following a crossing from the eastern side. However, at present Mark and Matthew cannot be completely or satisfactorily reconciled at this point.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26.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들은 흩어 보내셨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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