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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sson from the Withered Fig Tree
20 iAs they passed by in the morning,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away to its roots. 21 And Peter remembered and said to him, j“Rabbi, look! The fig tree that you cursed has withered.” 22 And Jesus answered them, “Have kfaith in God. 23 lTruly, I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m‘Be taken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does not ndoubt in his heart, but obelieves that what he says will come to pass, it will be done for him. 24 Therefore I tell you, pwhatever you ask in prayer, obelieve that you qhave received3 it, and it will be yours. 25 And whenever ryou stand praying, sforgive, tif you have anything against anyone, so that uyour Father also who is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trespasses.”4

20-21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제 아침에 지나가실때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있었다. 마가의 경우 본문의 내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마태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땅히 열매를 맺혀야 함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바로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이다. 
  • The fig tree had withered within 24 hours, perhaps sooner (Matt. 21:19). It represents the judgment of God on Israel (Isa. 34:4; Joel 1:7–12; Amos 4:9; see note on Mark 11:13–14).

22-23절) 지금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말한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응답은 어쩌면 생뚱맞은 것이다. 지금 한창 시들어 버린 무화과 나무를 이야기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과 믿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주님의 관점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산을 옮기는 이 비유, 상징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주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다. 
  • Have faith in God. Jesus’ response must have surprised the disciples. (What does faith have to do with the cursing of the fig tree?) His point is that they should trust God to remove whatever hinders them from bearing fruit for God. Moving a mountain was a metaphor in Jewish literature for doing what was seemingly impossible (Isa. 40:4; 49:11; 54:10; cf. Matt. 21:21–22). Those who believe in God can have confidence that he will accomplish even the impossible,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절) 기도하고 구하는 바를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성급하게 일반화 시켜서는 안된다. 불가능한일을 “믿씁니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앞에 떼를 쓰면 하나님이 우리의 열정과 열심에 감복해서 들어주실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을 일반화시키거나 예외없이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동시에 이 본문의 내용이 오직 사도들에게만 한정되기에 우리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제껴놓아서도 안된다. 믿음은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  The statement is not to be universalized and applied without exception, but neither is it to be localized and confined to the original disciples or ignored as having no practical value. Faith is an indispensable element in answer to prayer.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다면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당시는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마가는 본문에서 응답되는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앞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응답받는 기도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용서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다. 
  • Standing probably was the most common Jewish posture for prayer, but both standing and kneeling are well attested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Mark seems to have understood that forgiveness of others is another prerequisite for answer to prayer. Some think the verse indicates that Mark and his readers knew the Lord’s Prayer, but no confident decision seems possible. What is certain is that effective prayer must be offered in faith with a spirit of forgiveness.

  • It is possible then that 11:25 describes a corporate prayer by an oppressed community that is asking God to rectify the injuries it has suffered. In that case the request for justice is to be tempered by forgiveness. It must be tempered also by the recognition that oppressed groups can injure other people as well, a concern that the disciples’ own conduct justifies (9:34; 10:13, 37). Viewed in this light, a prayer for justice is also ultimately a prayer for reconciliation.

  • Jesus’ use of the word father at the end of 11:25 should not be overlooked. This is the first time in the Gospel of Mark that God is described in this way. Jesus has been described as God’s “son” in 1:11 and 9:7, but heretofore no one has referred to God as father. One of the major themes in the previous sections of the Gospel is the creation of a new family (3:31–35), in which the will of God is the defining factor. The reference to God as father here is entirely consistent with that passage. We might wonder then why we have not seen it before or why it appears here. The best answer is that in this passage the will of God is startlingly and clearly revealed. Against the backdrop of nationalistic dreams and all the roiling patriotic fervor,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are revealed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God’s will.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성전 청결을 명하시고나서 이제 이 성전이 있는 산을 보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전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명하여 옮기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고 또한 용서를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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