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But it displeased Jonah exceedingly,1 and yhe was angry. 2 And he prayed to the Lord and said, “O Lord, is not this what I said when I was yet in my country? zThat is why I made haste to flee to Tarshish; for I knew that you are a agracious God and merciful,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and arelenting from disaster. 3 bTherefore now, O Lord, please take my life from me, cfor 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 4 And the Lord said, d“Do you do well to be angry?”
1 Hebrew it was exceedingly evil to Jonah
y [ver. 4, 9]
z ch. 1:3
a See Joel 2:13
a See Joel 2:13
b [1 Kgs. 19:4]
c [Eccles. 7:1]
d [ver. 1, 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욘 4:1–4.
4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욘 4:1–4.
요나의 분노에 찬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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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1:17-2:10 |
욘 4:1-4 |
1) 요나 “여호와께 기도하다" |
1:17-2:1 |
4:1-2 |
2) 요나의 기도 |
2:1-9 |
4:2-3 |
3) 하나님의 말씀 |
2:10 |
4:$ |
1절) 그것이 요나를 매우 불쾌하게, 못마땅하게 하였고 그는 성을 냈다.
본문에서 요나가 화낸 이유는 바로 앞선 3:10의 내용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그 악(라아)에서 돌이켰고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라아)을 내리지 않으셨는데 요나만이 홀로 싫어하고(라아) 있다.
요나의 분노의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는 2절에서 말한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들을 용서하실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마도 니느웨(앗수르)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억압했기에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싫어했고 그래서 이들을 향한 재앙을 돌이키신 것때문에 분노한다.
- 4:1 Nineveh’s repentance led to the reaction of mercy from the Lord and great displeasure from Jonah. What pleased God displeased Jonah. After recognizing that God had relented of his threatened destruction, Jonah reacted in a way many would deem peculiar. One writer says, “Jonah finds that the time-fuse does not work on the prophetic bomb that he planted in Nineveh.”1
The NIV speaks of Jonah’s great displeasure and great anger. The literal translation is, “It was evil to Jonah with great evil.” There is a play on words here with the root rāʿâ, which can refer to wickedness on the one hand (see 1:2) or to disaster, trouble, or misery as here. The evil that was characteristic of the people of Nineveh here described the prophet of God.
As we study this verse in context, we find that several emotions were involved: anger and displeasure as well as a lack of understanding. Jonah literally hated what God had done. As God’s anger and judgment were averted in chap. 3, Jonah’s anger was incited. Why was Jonah’s reaction so negative? Could his reaction have been due to a narrow-minded nationalism as a Hebrew prophet? Many have supposed that this was the primary reason for Jonah’s displeasure and the main target of the book’s author.2 Others have cited as the cause Jonah’s awareness that Assyria would be the downfall of Israel. Nineveh was head of a resurgent Assyrian military state. Even in this period of Assyrian history, their imperialistic ambitions had been displayed. Perhaps Jonah foresaw and feared the movement of the Assyrian armies toward Israel. The stigma of being instrumental in the sparing of one of Israel’s greatest enemies may have been more than Jonah’s emotional makeup could withstand. Still others point to the possibility that Jonah felt his personal reputation was at stake. After all, he had prophesied destruction, and then it did not occur. Calvin said that the reason for Jonah’s anger was “because he was unwilling to appear as a vain and lying prophet.”3 This “loss of face” would cause him an embarrassing loss of stature in Nineveh. In addition, what would happen when he returned home to Israel?
Another explanation supposes that Jonah had proclaimed devotion to Yahweh in his native Israel with very little success. Israel was experiencing a time of prosperity and resulting lack of dependence on Yahweh. Perhaps Jonah longed for God’s strong hand of judgment to awaken Israel. If God had destroyed Nineveh, what a mighty lesson it would have been to the Hebrews. Jonah recognized that God averted judgment and thereby removed the very weapon from his hand by which he hoped to prevail with his rebellious countrymen.4
At the very worst we see a prophet with a shocking disregard for human life and a bitter hatred toward those who had experienced mercy. At the very best he was a prophet who misunderstood God’s mercy and had a limited view of God’s plan for the redemption of his own people. While there may have been some reasons for Jonah’s displeasure, it is sad to see him place limits on the same grace that saved him. While missionaries and evangelists would be delighted at such results, Jonah failed to recognize his privilege of being an instrument of God in a miraculous situation. Failing to recognize God’s sovereign plan, he missed the joy of the situation. Much like Elijah (1 Kgs 19:3–18), Jonah sank into a selfish state of mind. Here again the message of the Book of Jonah is seen to be abidingly relevant. Countless numbers of modern-day believers miss much of the joy of being involved in God’s wonderful work because of self-centeredness.
1 L. C.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76), 227.
2 D. Stuart, Hosea-Jonah, WBC (Waco: Word, 1987), 501–2.
3 Calvin, quoted in P. Fairbairn, Jonah, His Life, Character and Mission (Grand Rapids: Kregel, 1964 [1849]), 148.
4 Ibid., 156.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1–272.
2-3절) 요나의 기도
요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고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가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을 요청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요나의 기도를 통해서 요나의 이중성, 자기중심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은 욜 2:13에서 소망의 근거가 된다.
요엘 2:13 (NKRV)
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출애굽기 34:6–7 (NKRV)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6–7 (NKRV)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시편 145:8 (NKRV)
8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기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인애(헤세드)가 요나 자신에게 베풀어졌을때에는 감사를 했지만(2:9) 니느웨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을 때 요나는 분노하며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빠진 한 선지자를 만나고 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차서 그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들에게 임한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지만 이것이 타민족, 이방에게 전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못마땅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심지어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사람들에게까지 베푸는 일방적인 배려를 뜻한다(cf. 33:12, 16-
17).
둘째,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이 단어는 지궁(womb)과 연관된 단어로서 어머니의 아이를 향한 모성적인 사랑과 관심을 뜻한다.
셋째,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분이시다. 이 문구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긴 코를 가지다”라는 뭇이다(cf. 장 14:29; 15:18; 16:32). 히브리 사람들
은 사람이 화가 나면 코에서 열이 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코가 길면 그만큼 열을 식힐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화를 더디 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긴 코를 가진 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은 다정하시고 자비가 많으신 분이라는 의인법이다.
넷째,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신 분이시다. 인자(헤세드)는 근본적으로 언약/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뭇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자가많은분이라는것은이스라엘과의 언약을충실하게 지키며 이행하실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오까지도 용서하시고 용납하셔서 언약관계를 유지하시겠다는 의지를 밝히시는 것을 뭇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인자가 많으신 분이 되신 것은 곧 그들의 참회를 받으시고 누구든지 회개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분이라는 뜻이다. 혹은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로 가득한 분이라는 뜻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시는 분이시다. 요나는 이 사실을 니느웨에서 체험했다. 죄인이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셨고 이미 선포하셨던 재앙마저도 거두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중에 죄에 대한 심판만람은 항상 바뀔 기능성이 었다. 죄인이 회개하면 언제든지 계획하신 심판을 취소하시거나 보류하신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심판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일로 인해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분’이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명예훼손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기를 원하신다. 그만큼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이신 것이다.
이처럼 보수적인 신학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왜 삶에서는 이 원리들을 적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요나의 삶에서도 신학과 삶이 따로 놀았던 것일까? 우리는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결핍되었던 선지자를 보며 무엇을 배우는게 혹시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지는 않은개 펼자는 목회자 세미나에서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진보적인 신학을 지향히는 사람들은 신론을 다시 해야 하며,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인간론을 다시해야 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 하나님은 실존히는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만들어낸 말들이요, 그 말들을 담고 있는 성경은 인간이 저작한 책이지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야 한다. 반면에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일수록 인간(죄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틀의 고통과 필요(need)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비와 긍흘이 동반하지 않는 신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요나가 건전한 신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이 살게 된일로 인해 분개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인간의 고충과 아픔에 대한 이해를 새로이 해야 히는 것이다.(엑스포지멘터리 115-117)
3절에서 내 생명은 히브리어로 ‘나프시’이고 사는 것은 히브리어 ‘하야이’이다. 이 두 표현은 앞서 요나의 첫번째 기도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자신의 생명이 구덩이(2:6)에서 건짐을 받은 것과 자신의 희미해져가는 영혼이 되살아난 것(2:7)에 대해 감사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똑같은 자비를 니느웨 백성에게 베푸셨을 때 요나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시기를 구하고 있다.
요나의 신앙은 말그대로 정통, 보수 그 자체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2절에서 묘사하면서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정확히 알고 있었다.
- 4:2 In this verse Jonah shared with the Lord his reason for anger and turmoil. At least Jonah did express this to the Lord in prayer. Instead of complaining about God, he complained to God. However, this prayer was quite unlike Jonah’s prayer in 2:1. Obviously, differing circumstances call for different kinds of prayers. But often differing kinds of prayers suggest varying stages of maturity or serve as an indication of swings in commitment. In this prayer we find a reversion to the “old Jonah” who ran away from God’s stated wish.
The prayer begins with a particle of entreaty, but the petition does not appear until the end. The selfishness of this prayer needs to be noted. The word “I” or “my” occurs no fewer than nine times in the original. Not only does this prayer show an extreme selfishness, but it also indicates Jonah’s shortsightedness. As stated in the prayer, he had already told the Lord what he dreaded, and yet the Lord, by his action, had brought it about. This was a grave offense to Jonah. He presumptuously felt that the Lord should have shaped his course according to his (Jonah’s) mind. Jonah did not want God to do what was right and proper according to his merciful nature. Instead of bestowing upon Nineveh the kind of grace God had granted to Israel, Jonah wished the Ninevites’ destruction without any chance to repent. It is easier to assume that God is with “us” more than he is with our foes. The natural tendency of Jonah and his readers would have been to presume that God could never be “on the side” of the Ninevites.5 Jonah audaciously stated, in essence, “I told you so.” Then he acted as though this was sufficient to excuse his running to Tarshish.
The second half of v. 2 rehearses God’s compassionate nature. In this segment Jonah went on to argue with God by complaining about God’s goodness! To Jonah the most recent occurrences in Nineveh seemed a theological embarrassment and a divine faux pas.6 In this sarcastic complaint Jonah cited an ancient formula that is basically a quotation of Exod 34:6–7.7 The wording used here is descriptive of God’s character. First, God is seen as a “gracious” (ḥannûn) God. This word communicates the attitude of the Lord toward those who are undeserving, thereby expressing benevolence in the ultimate sense. The next word used to describe God is the word “compassionate” (raḥûm). This word is translated in many ways and can mean “loving” or “merciful.” It also expresses the understanding and loving compassion of a mother to her child, hence the idea of understanding and loving favor. God is also described as “slow to anger” (ʾerek ʾappayim). This speaks to the patience and longsuffering of the Lord. Nineveh was the obvious recipient of this characteristic of the Lord. The next phrase used to describe God in this segment is “abounding in love” (rab ḥesed). The word ḥesed refers to the covenant love of God. This attribute expresses itself in redemption from sin. It encompasses the qualities of kindness, loyalty, and unfailing love. No one term in English adequately and accurately expresses the meaning of ḥesed. This covenant love issues itself in God’s being “a God who relents [niḥam] from sending calamity” (rāʿâ). Amazingly, Jonah did not use these words in praise to the Lord but as a tirade against him.
This verse is an extremely disturbing one. It indicates that while Jonah had become obedient, he still lacked a spirit of submission. Lest we judge Jonah too harshly, we should remember the common frailty of murmuring against God’s sovereign will. Throughout the pages of history, believers have stood in direct opposition to God’s revealed will and sought the implementation of their own wishes.
5 Stuart, Hosea-Jonah, 502.
6 Allen,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229.
7 This statement had virtually the status of a creed in ancient Israel. It occurs some ten times (Exod 34:6–7; Joel 2:13; Num 14:18; Neh 9:17; Pss 86:15; 103:8; 145:8; Nah 1:3; 2 Chr 30:9) and is alluded to in many other places (e.g., Pss 111:4; 112:4; 116:8).
Billy K. Smith and Franklin S. Page, Amos, Obadiah, Jonah, vol. 19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72–274.
4절)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다.
이 말은 정죄의 말이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해보도록 유도하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한 일,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던 일 등 과거의 그의 행적으로 인해 그를 탓하거나 문제 잠시 않으신다. 그러면서 그가 지금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인해서 화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화를 내며 억지를 쓰는 요나를 책망하지도 않으시고 대화를 멈추시려고 하지도 않으신다. 어쩌면 자기의로 충만해 있는 요나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도록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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