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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ying is vtrustworthy: If anyone aspires to wthe office of overseer, he desires a noble task. Therefore xan overseer1 must be above reproach, ythe husband of one wife,2 zsober-minded, self-controlled, respectable, ahospitable, bable to teach, not a drunkard, not violent but cgentle, not quarrelsome, dnot a lover of money. He must manage his own household well, with all dignity ekeeping his children submissive, for if someone does not know how to manage his own household, how will he care for wGod’s church? He must not be a recent convert, or he may fbecome puffed up with conceit and fall into the condemnation of the devil. Moreover, he must be well thought of by goutsiders, so that he may not fall into disgrace, into ha snare of the devil.
v See ch. 1:15
w See Acts 20:28
x Titus 1:6–9
1 Or bishop; Greek episkopos; a similar term occurs in verse 1
y [ch. 5:9]
2 Or a man of one woman; also verse 12
z ver. 11; Titus 2:2
a 1 Pet. 4:9
b 2 Tim. 2:24
c Titus 3:2
d Heb. 13:5; [ch. 6:10]
e [ver. 12]
w [See ver. 1 above]
f ch. 6:4; 2 Tim. 3:4
g See Mark 4:11
h 2 Tim. 2:26; [ch. 6: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3:1–7.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3:1–7.
 
앞선 2장에서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도와 교회안의 남녀 성도들의 품행에 대한 교훈을 한데 이어서 3장 1-13절에서는 교회안의 직분자들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한 자격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다. 
 
1절) 미쁘다 이 말이여, ‘피스토스 호 로고스’ 이는 앞선 1장 15절에서도 등장한다. 
디모데전서 1:15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앞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표현에 대한 진실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본문에서는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해야한다는 것이다. 
‘미쁘다’는 ‘피스토스’로 ‘충성된, 믿을만한, 신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아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는 1절 이하의 부분에 대한 언급이 신뢰할만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감독의 직분’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페스’는 ‘돌보다, 감독하다’는 의미의 동사 ‘에피스코페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에피스코포스’는 ‘감독, 관리자, 주교’라는 의미이고 ‘에피스코페’는 ‘방문, 지위, 감독’의 의미이다. 
사도행전 20:28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에피스코포스)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포이마이노) 하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교회안의 감독의 역할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감독, 장로는 초대 교회를 지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감독과 장로라는 표현을 혼용해서 사용한다.(딛 1:5-7)
신약에서 ‘장로’로 번역되는 ‘프레스뷔테로스’는 각 회당에서 경험과 나이가 많은 자로 말씀을 가르는 자로 목회자의 품위와 가르치는 사역의 측면을 강조한 용어라면, ‘감독’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포스’는 당시 헬라와 그에 종속된 도시를 다스리는 관리나 관원들을 일겉던 용어로 당시 행정 제도나 헬라적 어법이 반역된 표현으로 목회자의 사역 가운데 성도들의 생활을 돌보고 교회를 관리 감독하는 행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처럼 목회자는 ‘프레스뷔테로스’와 ‘에피스코포스’의 두가지 성격을 모두 지녀야 하며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교회를 가르치고 돌보는 직분임을 말해준다. 
바울은 이처럼 교회를 섬기는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는 사람은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본문의 ‘얻으려’라는 표현은 ‘오레게타이’로 원형인 ‘오레고마이’의 현재형이다. 이는 ‘손을 내밀다, 열망하다’라는 의미로 지속적으로 열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교회를 섬기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 일시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열망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공격이 심했고, 복음에 도전하는 거짓 선생들과 이단의 도전이 강력한 상황에서 감독의 직분은 매우 어렵고 중요한 역할이었다. ‘선한 일’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 하나님나라에 유익이 되는 일을 의미한다. 교회를 가르치고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며 칭찬받는 일이 바로 선한일이다. 본문에 ‘사모한다’는 표현은 ‘에피뒤메이’인데 이는 ‘마음에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 원형 ‘에피뒤메오’의 현재형이다. 앞선 ‘오레게카이’와 함께 현재형으로 지속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선한일을 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바로 감독인 것이다. 
 
2절) 본절부터 7절까지는 감독의 구체적인 자격조건을 다룬다. 이 내용은 딛 1:6-9절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 ‘아네필렘프톤 에이나이’, ‘책망할 것이 없다’로 번역된 ‘아네필렘프톤’은 부정의 의미를 지닌 ‘아’와 ‘붙잡히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필람바노’의 합성어로 ‘붙잡히지 않는’이란 뜻이다.
디모데전서 5:7
7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디모데전서 6:14
1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이는 전혀 흠이나 잘못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 눈에 띄게 흠 잡을 것이 없는이라는 의미이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미아스 귀나이코스 안드라’, 여기서 한 아내로 번역된 ‘미아스 귀나이코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 감독이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견해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감독의 자격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과 바울이 독신의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도출한다. 
둘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혼한 후에 재혼한 자들이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도 예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가 심각한 성적인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혼하게 된 이들의 경우’(마 5:31-32; 19:9)나 바울이 허락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결혼 관계를 지속하지 않으려 하기때문에 발생한 이혼의 경우’(고전 7:12)를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셋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별했다가 재혼한 자들이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두번 결혼한 남자들은 감독의 직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이 견해를 강력히 지지했지만, 롬 7:1-3이나 고전 7:39에서 과부나 홀아비의 경우 분명하게 그들의 재혼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넷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여러 아내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외적인 조건의 믜미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반대로 보는 것인데 당시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하나님이 창조 원리(창 2:21-25)에 어긋난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일처제의 결혼 관계 안에서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다섯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결혼 생활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어사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한 아내의 남편됨을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결혼생활의 규정으로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참되고 신실하며 도덕적으로 부정함이 없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절제하며로 번역된 ‘네팔리오스’는 ‘술이 깨다’라는 ‘테포’에서 파생된 단어(3:11; 딛 2:2)로 이후 3절의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과 병행된 표현이다. 당시 헬라 표현에서 이 단어는 ‘금주하는, 술취하지 않는’의미와 좀더 넓게는 식욕을 비롯해 세상의 많은 욕망을 제어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신중하며로 번역된 ‘소프로나’는 모든 일에 신중하게 임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단정하며로 번역된 ‘코스미온’은 행동이 선하고 무리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 세 표현은 모두 인간의 내적 자제력, 통제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감독은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이끄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다스릴줄 모르는 사람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필록세노스’는 ‘사랑’을 뜻하는 명사 ‘필로스’와 나그네, 낫선 사람을 뜻하는 명사 ‘크세노스’의 합성어로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서 자기를 절제할 수 있는 이들만이 다른 이들을 대접할 수 있다. 바울 당시 숙박 시설이 용이하지 않았는데 숙박의 어려움을 겪는 순회 설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인 여행자들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다.(히 13:2)
 
‘가르치기를 잘하며’, ‘디닥티콘’은 원형인 ‘디닥티코스’ 신약에 2번 등장하는데 본절과 딤후 2:24에 등장한다. 감독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당시 복음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이를 대적하는 이단의 세력들, 특히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나 영지주의자들에 맞서서 복음의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했다. 앞선 내용들이 도덕적인 성품, 자질이라면 이는 전문적인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Above reproach heads the list as the key qualification for an overseer; it is then expounded by the words and phrases that follow in these verses (see note on Titus 1:6). The meaning of husband of one wife (Gk. mias gynaikos andra) is widely debated. The Greek phrase is not common, and there are few other instances for comparison. The phrase literally states, “of one woman [wife] man [husband].” (1) Many commentators understand the phrase to mean “having the character of a one-woman man,” that is, “faithful to his wife.” In support of this view is the fact that a similar phrase is used in 1 Tim. 5:9 as a qualification for widows (Gk. henos andros gynē; “one-man woman,” i.e., “wife of one husband”), and in that verse it seems to refer to the trait of faithfulness, for a prohibition of remarriage after the death of a spouse would be in contradiction to Paul’s advice to young widows in 5:14. Interpreters who hold this first view conclude that the wording of 3:2 is too specific to be simply a requirement of marriage and not specific enough to be simply a reference to divorce or remarriage after divorce. In the context of this passage, the phrase therefore prohibits any kind of marital unfaithfulness. (2) Another view is that “husband of one wife” means polygamists cannot be elders. Interpreters who hold this view note that there is evidence of polygamy being practiced in some Jewish circles at the time. On this view, the phrase means “at the present time the husband of one wife,” in line with other qualifications which refer to present character. On either of these views, Paul is not prohibiting all second marriages; that is, he is not prohibiting from the eldership a man whose wife has died and who has remarried, or a man who has been divorced and who has remarried (these cases should be evaluated on an individual basis). (3) A third view is that Paul is absolutely requiring that an elder be someone who has never had more than one wife. But that does not fit the context as well, with its emphasis on present character. On any of these views, Paul is speaking of the ordinary cases and is not absolutely requiring marriage or children (cf. v. 4) but is giving a picture of the typical approved overseer as a faithful husband and father. able to teach. This is the one requirement in this list that is not necessarily required of all believers. It is also not required of deacons. Thus, it is a distinguishing skill required of the pastor/elder. It yields the only reference in this list to his actual duties (see note on Titus 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9.
 
3절)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메 파로이논’ ‘술을 즐기지’로 번역된 ‘파로이논’의 원형 ‘파로이노스’는 ‘곁에, 가까이’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와 ‘포도주, 술’을 의미하는 ‘오이노스’의 합성어로 ‘술 곁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뜻한다. 술은 이성과 판단력을 둔하게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품위에 손상을 주는 행동을 초래한다. 구약에서 성전에 들어가 다른 불을 드려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던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가 그러하다.(레 10:1-11) 바울은 절대적인 금주를 말하지는 않았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인간의 혈기와 관련된 교훈이다. 
‘구타하지'로 번역된 ‘플렉텐’은 물리적 폭력행사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말이나 태도를 통해서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 단어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의 뒤에 나오는 것은 술을 즐기는 자들이 이런 행위를 일삼기 때문이다. 
‘관용하며’로 번역된 ‘에피에이케’의 원형 ‘에피에에케스’는 ‘위에, ~에 대하여’란 전치사 ‘에피’와 ‘양도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이코’의 합성어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베푸는 선한 감정, ‘호의적인, 친절한, 동정심 많은’의 의미이다. 
‘다투지 아니하며’로 번역된 ‘아마콘’의 원형 ‘아마코스’는 부정사 ‘아’와 ‘쟁론’을 의미하는 ‘마케’의 합성오로 불필요한 논쟁이나 이해 관계로 인한 논쟁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가지 덕목은 예수 그리스도와(마 11:29) 사도 바울(고후 10:1)이 소유했던 덕목으로 교회의 감독들에게 필수 요구사항이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의 원형 ‘아필라르귀로스’는 부정사 ‘아’와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필로스’와 ‘돈’이라는 의미의 ‘아르귀로스’의 합성어로 돈에 대한 애착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울은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고 딤후 3:2에서 말세에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순회 설교자로 자처하면서 돈을 탐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떠돌이 철학자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자들이었다. 
베드로전서 5:2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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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nd cthe grace of our Lord overflowed for me with the dfaith and love that are in Christ Jesus. 15 The saying is etrustworthy and deserving of full acceptance, that Christ Jesus f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 gof whom I am the foremost. 16 But I received mercy for this reason, that in me, as the foremost, Jesus Christ might display his perfect patience as an example to those who were to believe in him for eternal life. 17 To hthe King of the ages, iimmortal, jinvisible, kthe only God, lbe honor and glory forever and ever.4 Amen.
c Rom. 5:20
d [Luke 7:47, 50]; See 1 Thess. 1:3
e ch. 3:1; 4:9; 2 Tim. 2:11; Titus 3:8; [Rev. 22:6]
f Matt. 9:13; See John 3:17; Rom. 4:25
g [1 Cor. 15:9]
h [Ps. 10:16; Rev. 4:9, 10]
i ch. 6:15, 16; Rom. 1:23
j John 1:18; Col. 1:15; Heb. 11:27; 1 John 4:12
k Jude 25
l 1 Chr. 29:11
4 Greek to the ages of age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1:14–17.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1:14–17.
 
 
14절)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는 ‘휘페레플레오나센’으로 이것의 원형은 ‘휘페르플레오나조’이다. 이는 '~위에, ~을 넘어서'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와 ‘증가하다, 자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플레오나조’의 합성어로 ‘풍성하다, 넘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보통 혹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풍성한이라는 의미로 이곳에서 단한번 사용된 표현이다. 이전에 바울 자신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주께서 그를 부르심으로 복음의 직분을 맡기신 것 그 자체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게 임했는지를 표현하는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주의 은혜가 너무 커서 도저히 표현하거나 측량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넘치도록 풍성하다라는 표현이 한글 성경에서는 맨 나중에 위치하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되고 있다. 
 
바울은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라고 고백한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은혜는 뿌리요, 믿음과 사랑은 줄기요, 선한 행실들을 구원나무의 열매다'라고 헨드릭슨은 말했다.
 
15절) 13절에서는 바울이 이전에 얼마나 복음에 적대적이었는지를 이어 14절에서는 그런 바울에게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넘치도록 풍성하게 임하였는지를 간증한다. 이어 15절, 16절에서 바울은 주의 긍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본문은 ‘미쁘다’(피스토스)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이는 목회서신의 특별한 특징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1, 4:9; 딤후 2:11; 딛 3:8) 특히 목회 서신과 계시록에서는 피스토스와 로고스를 함께 사용하여 말씀의 신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원문의 순서는 ‘피스토스 호 로고스 카이 파세스 아포도케스 악시오스’이다. 이는 ‘미쁘다 이 말이여, 이는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미쁘신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것이다. 이는 요 3:16-17절을 연상시킨다.
요한복음 3:16–17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모든 사람이 받아야만하는 복음의 핵심을 본절은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을 위해서 이땅에 오셨는지를 밝힌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 가운데 오신 것이다. 본문의 죄인은 ‘하마르톨로스’인데 여기에서 죄악, 불법이라는 ‘하마르티아’가 나왔고 이것의 동사형은 ‘하마르타노’이다. 구원하다는 표현은 헬라어 ‘소조’이다. 이는 구출하다, 구원하다, 치유하다등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어서 자신을 설명하면서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말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구원하시려는 죄인중에 내가 가장 큰 첫째가는 죄인이다’라는 의미이다. 괴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토스’로 이는 ‘처음, 첫째, 으뜸되는’의 의미로 KJV은 이를 ‘chief’ 우두머리라고 번역했고, NIV는 ’the worst’ 최악의로, ESV는 ’the foremost’ 으뜸으로 번역했다. 본절은 바울의 자기 인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본절에서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 우두머리’로 인식했으며 
고린도전서 15:9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에베소서 3:8
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사도는 본문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통해 분명한 자기 인식을 나타낸다. 여기서 ‘에이미’는 1인칭 현재 능동태 직설법 시제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 세가지의 바울의 자기인식을 순서대로 보자면 AD50년 중반의 고린도전서, AD60년 초반의 에베소서, 본서를 AD60중반이라고 본다면 바울은 점점 연륜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비추어볼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자인지 더 나아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절감하며 고백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단지 입에 발린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깊이 나아간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된 표현이다. 이런 온전한 자기 인식이 있을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영광의 복음앞에서 감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죄인이란 인식이 없다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땅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나 기쁨도 결코 있을 수 없다. 
 
1:15 Calling attention to certain sayings as trustworthy is a particular distinctive of the Pastoral Epistles (cf. 3:1; 4:9; 2 Tim. 2:11; Titus 3:8). Christ Jesus came … to save sinners, of whom I am the foremost (cf. Luke 19:10). Paul cannot mean that he now sins more than anyone in the world, for he elsewhere says that he has lived before God with a clear conscience (Acts 23:1; 24:16), and he asks other believers to follow his example (see note on Phil. 3:17). Apparently he means that his previous persecution of the church (1 Tim. 1:13; cf. 1 Cor. 15:9–10) made him the foremost sinner, for it did the most to hinder others from coming to faith (cf. 1 Thess. 2:15–16). Yet it also allowed God to save Paul as an “example” of grace (1 Tim. 1:16). Another interpretation is that, in light of the Holy Spirit’s powerful conviction in his heart, and his nearness to God, Paul could not imagine anyone being a “worse” sinner than he. Godly people with some self-knowledge are prone to think of themselves in this wa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6.
 
Excursus: The “Trustworthy Saying” Formula
The formula occurs five times in these letters. The core phrase is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the saying is trustworthy”), which occurs without expansion in 1 Tim 3:1; 2 Tim 2:11; Titus 3:8. The expanded form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καὶ πάσης ἀποδοχῆς ἄξιος (“the saying is trustworthy and deserving of full acceptance”) occurs in 1 Tim 1:15 and 4:9. The expansion phrase serves as reinforcement, stressing the need to affirm as true the cited material when (perhaps) the material did not elicit this affirmation clearly on its own (Knight, Faithful Sayings, 29, 144).
In the Hellenistic world, the phrase is attested in Dionysius of Halicarnassensis (Roman Antiquities 3.23.17; 7.66.2) and Dio Chrysostum (Oration 45.3; see further Spicq, 277) and serves the same basic purpose of affirming its referent but it does not appear to be formulaic as such (but see Quinn, 230–32). The only Jewish parallel reported (“The Book of Mysteries” = 1Q27 1:8; see discussion in Nauck, “Herkunft,” 50) is no more than a parallel. This leaves the occurrences in the letters to coworkers as the first “formulaic” use (Marshall, 327). For some the origin of the phrase has been thought to rest in the similar description of God as faithful: πιστὸς ὁ θεός (1 Cor 1:9; 10:13; 2 Cor 1:18; cf. 1 Thess 5:24; 2 Thess 3:3; Heb 10:23; cf. Fee, 52). While the trustworthiness of the “saying” in each context surely owes to its divine origin, that factor would seem to be somewhat farther back in Paul’s thinking and the desire to continue to draw the line between the sound teaching encapsulated by the sayings and the false teaching by means of the πίστις word group more to the fore (cf. Schlarb, Die Gesunde Lehre, 214).
Both the direction and extent of the “sayings” referred to by the formula in 1 Tim 3:1 and 4:9 are disputed (see further the commentary on each text). Most are agreed that in 1 Tim 1:15 and 2 Tim 2:11 the formula precedes the saying and that in Titus 3:8 it follows, but the extent of material encompassed by the formula in the case of Titus 3 (vv. 3–7; 4–7; 5–7, or 5–6?) is debated. It is not clear that the formula uniformly refers to salvation texts, or, indeed, that this should be the criterion for determining the substance of the logos in question (pace e.g. Campbell, “Faithful Sayings”; Young, Theology, 56–57; Johnson, 203, but cf. 250).
What are “faithful sayings”? The answer to this question revolves around that of the function of the formula. Does it mean to affirm the truthfulness of what is said (Marshall, 328–29; Donelson, Pseudepigraphy, 150–51; Trummer, Paulustradition, 204)? Or does it mark off the material to which it refers as part of the accepted tradition (Dibelius and Conzelmann, 28–29; Brox, 112–14; Spicq, 277; Hanson, 63)? Or is it both of these at once (Knight, Faithful Sayings, 19–20)? The majority considers the affirmation of truthfulness to be most significant, with the application of the material being intended (cf. Roloff, 90). The contents of the saying introduced or concluded by the formula, however, do not appear to be fully explained with the category of “accepted tradition.” Most of the sayings have been formulated, or significantly shaped, for use in their present contexts, so it is unlikely that Paul has drawn on a reservoir of “tradition” in the usual sense. Rather, with the formula, Paul emphasizes the authentic correspondence of the saying and its authority with the apostolic tradition, the (his) gospel, the sound teaching, and so on. From the outset, Paul identifies the problem as a collision of his gospel with an opposing teaching (1:3; 2 Tim 2:14–18; Titus 1:11). And in each community Paul’s gospel had come under heavy fire. The “trustworthy saying” formula is a technique by which Paul, in one motion, rearticulates his gospel (and corresponding aspects of teaching), asserts its authenticity and apostolic authority, and alienates the opposing teaching that, by implication (and this is the polemical significance of the πίστις word group), does not belong to the category denoted by the term πιστός (“trustworthy”).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43–145.
 
The content of the “saying”42 is a gospel statement consisting of a traditional verb and purpose statement: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43 The broad appeal of this saying may be seen in the way it resonates in varying degrees with Jesus’ mission statements preserved in both the Synoptic and Johannine traditions:
1 Tim 1:15: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
Luke 19:10: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Mark 2:17: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John 18:37: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Perhaps the strongest affinity is with the saying in Luke 19:10, which shares the verb-infinitive combination “came to save,” but lacks the phrase “into the world.”44 The name, “Christ Jesus,” corresponds to the dominant pattern in this letter (see note 1:1). Mark 2:17 includes the verb “come” and makes reference to “sinners,” but the purpose is expressed differently as “calling.”45 Johannine tradition shows ample use of the phrase “into the world” in combination with the verb “to come” (9:39; 11:27; 12:46; 16:28; 18:37; cf. 1 John 4:9),46 but the salvific purpose statement found here is never attached to the Johannine statements, and it is certainly not clear that Paul is indebted to this strand of theology in developing his view of incarnational Christology.47 Clearly, the gospel saying in 1:15 is not a verbatim quote of any text extant to us. Given Paul’s louder echo of Lukan material in 5:18, probably the stronger case can be made for some sort of reworking of the Jesus tradition known to Luke. But whatever pre-existing materials Paul drew on, he has fashioned a new statement, continuous with existing tradition, which exceeds it by placing the salvation work of Christ Jesus into historical relief as a divine work carried out in the human context. Let’s explore this claim further.
42 Gk. λόγος (3:1; 4:5, 6, 9, 12; 5:17; 6:3; 2 Tim 1:13; 2:9, 11, 15, 17; 4:2, 15; Titus 1:3, 9; 2:5, 8; 3:8); its use is varied: “saying” (1:15; 3:1; 4:9, etc.); ordinary “speech, conversation” (4:12); “message, teaching, what is to be preached” (Titus 2:8; 2 Tim 2:17; 4:2); “the word of God” as divine revelation (4:5; 2 Tim 2:9; Titus 1:3; 2:5); “words” (in the plural) that represent what has been preached (6:3; 2 Tim 1:13; 4:15). Schlarb, Die gesunde Lehre, 206–229. Cf. G. Kittel, TDNT 4:100–141; H. Ritt, EDNT 2:356–59.
43 Only this faithful saying is introduced by the recitative ὅτι (“that”).
44 Gk. ὅτι Χριστὸς Ἰησοῦς ἦλθε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ἁμαρτωλοὺς σῶσαι (1 Tim 1:15); ἦηλθεν γὰρ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ζητῆσαι καὶ σῶσαι τὸ ἀπολωλός (Luke 19:10). See Kelly, 54; Brox, 111.
45 Mark 2:17: οὐκ ἦλθον καλέσαι δικαίους ἀλλὰ ἁμαρτωλούς.
46 See e.g. John 9:39: εἰς κρίμα ἐγὼ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τοῦτον ἦλθον; see Windisch, “Christologie,” 221–22.
47 See discussion Dibelius and Conzelmann, 29; Roloff, 90–91.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45–146.
 
16절) 본절에서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긍휼을 입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그는 율법에 열심이 있던 자로 예수 믿던 이들을 죽이기에 열심을 품었던 자였다. 그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이제 생명을 바쳐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의 회심은 아주 강력한 본, 모델이 된다. 그는 참된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본이 된다. 
 
바울은 13절에 이어서 다시금 자신이 긍휼을 입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죄인중의 우두머리, 괴수였다. 그러나 그런 그가 긍휼을 입은 것이다. 그렇게 긍휼을 입은 이유가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었다. 본절에서 ‘오래 참으심’으로 번역된 ‘마크로뒤미안’의 원형 ‘마크로뒤미아’는 ‘길다, 멀다’를 의미하는 형용사 ‘마크로스’와 ‘진노’를 나타내는 명사 ‘뒤모스’의 합성어로 마땅히 심판과 진노를 내려야하는 상황에서 그 진노를 유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 대해서 인내하시는 것으로 인해 죄인에 대한 용서가 임하게 된 것이다. 
 
바울을 향한 주님의 인내의 목적은 다름 아닌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죄인 중의 괴수 였음에도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직분을 받을 수 있다면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용기와 희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바울처럼 저렇게 극악하게 율법을 따라 적대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조차도 주님의 오래 참으심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그 오래참으심, 용서와 긍휼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7절) 앞선 12절에서 능력을 주시고 충성되이 여기심으로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어 13-14절에서 회심 이전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넘치도록 주신 것에 감격했다. 이어 15-16절에서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로 고백하며 이런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을 고백했다. 이제 본절은 자신에게 이러한 불가항력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한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을 영원하신 왕이라고 찬양한다. 개역은 이를 ‘만세의 왕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바실레이 톤 아이오논’으로 직역하자면 ‘세대들의 왕’이다. 바울이 세대, ‘아이오논’을 복수로 쓴 것은 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를 양분하는 유대인들 및 당대 헬라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관념과 일치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현 세대와 오는 모든 세대에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래서 개역개정의 번역보다는 개역한글의 번역이 더 적합하다. 이 세상의 왕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 언제든지 반역이나 죽음으로 통치가 끝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다. 
두번째로 바울은 ‘썩지 아니하고’라고 하나님을 묘사했다. 이는 ‘압다르토’로 이것의 원형은 ‘압다르토스’인데 이는 부정 접두어 ‘아’와 썩어지다, 더럽히다, 악하다, 해롭게 하다, 멸망하다란 의미를 지닌 ‘프데이로’의 합성어로 절대 더럽혀지거나 약해지거나 해롭게 되거너 멸망당하여 업어지지 않는 분으로, 하나님의 불변성과 불멸성을 나타낸다. 
세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표사한다. 이는 ‘아오라토’로 이것의 원형 ‘아오라토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보이다란 뜻의 형용사 ‘호라토스’의 합성어로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과관련되어 5번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불가견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눈에 보이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없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다.(출 33:18-23)
 
네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을 홀로 하나이신 분으로 찬양한다. 원문에는 ‘모노’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오직 하나인, 단독이며 다른 것에서 고립된의 의미이다. 이는 요한복음에서는 ‘유일하신’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을 향해서 존귀(티메)와 영광(독사)이 있기를 기원하며 찬양한다. 바울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즐겨했다(롬 11:36; 16:27; 갈 1:5; 엡 3:21; 딤전 6:16).  이어서 본절은 ‘아멘’으로 끝마쳐지는데 이는 ‘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다. 
 
The next three terms owe their place within Jewish doxological expressions to the Jewish-pagan dialogue. “Immortal,” borrowed from Greek categories by late Jewish writers, in the NT describes God directly only here and in Rom 1:23, where it is clearly shown to be a quality proper to God alone.69 The “invisibility” of God (Col 1:15; Heb 11:27)70 is more widely affirmed in the NT in various constructions. As a quality of God it emerged especially in the polemic of Hellenistic Judaism against the materialistic views of gods in pagan idolatry.71 Equally, the phrase “the only God” (6:16; cf. 2:5) represents a fundamental affirmation of belief that goes back to the Shema of Deut 6:4 (“Hear, O Israel … the Lord is one”) and became standard theology in the early church.72 The original affirmation contested pagan polytheism, which in Deuteronomy was symbolized in Egyptian idolatry, and was later developed and used widely in the running debate with paganism.73 In a purely worship setting, the epithet would draw attention to the supremacy of God.
The expression of praise in the doxology74 comes in the dual phrase “honor and glory” that has become standard in the NT.75 Greek culture had elevated the importance of these elements of good reputation to the highest degree, with the ruler being the epitome of one worthy of such an acclamation. “Honor” is a public acknowledgement of worth.76 “Glory,” in this context, refers similarly to the recognition of honor that is owed to a deserving person of high repute.77 In the set combination, the terms function together to elevate the esteem that is rightly owed to God.78 Accentuating the immensity of honor even more is the prepositional phrase “for ever and ever”79 that forms the standard conclusion to doxologies. Neither the plural form (lit. “for the ages of the ages”) nor the repetition in this longer form reflect precise measurements of time.80 Rather, the Hebrew idiom functions to stretch the praise of the doxology beyond all limits to eternity.81 In the concluding “amen” (6:16; 2 Tim 4:18) the invitation is given to Timothy and the church to join in the acknowledgement.82
69 Gk. ἄφθαρτος; the term only appears late in Jewish writings (Wis 12:1; Philo, Life of Moses 2.171; Unchangeableness of God 26) and was borrowed from Stoic thought (T. Holtz, EDNT 3:422–23).
70 Gk. ἀόρατος; Philo, On Special Laws 1.20; 4:31; On the Cherubim 101 (as an epithet for God after the NT, see PGL, s.v. B.1–2); as a category of things or powers pertaining to God or to the spiritual realm, Rom 1:20; Col 1:16; in 2 Macc 9:5 of an action of God.
71 See esp. Philo, On the Embassy to Gaius 290, 310, 318; On Abraham 75–76; J. Kremer, EDNT 2:528–29; Spicq, 347; the conviction is expressed in various ways (1 Tim 6:16; John 1:18; 5:37; 6:46; 1 John 4:20).
72 Gk. μόνος θεός; Rom 16:27; more widespread in the NT is the similar εἷς θεός formula (Rom 3:29–30; 1 Cor 8:4–6; Gal 3:20; Eph 4:5–6; and discussion at 1 Tim 2:5)
73 2 Macc 7:37; Josephus, Antiquities 8.335; P. Dalbert, Die Theologie der hellenistisch-jüdischen Missionsliteratur unter Ausschluss von Philo und Josephus (Hamburg: Reich, 1954), 124–30.
74 The verb to be supplied is a form of “to be” that fits the implicit request that the items of praise and appellation be acknowledged.
75 Gk. τιμὴ καὶ δόξα; for the combination, see LXX Exod 28:2; Pss 8:6; 95:7; Rev 4:9, 11; 5:13; cf. Heb 2:7, 9; 2 Pet 1:17.
76 Gk. τιμή (“honor, esteem, price, value”; 5:17; 6:1, 16; 2 Tim 2:20); H. Hübner, EDNT 3:357–59; J. Schneider, TDNT 8:169–80.
77 1:11 (see discussion there); 2 Tim 4:18; Titus 2:13 (see discussion). H. Hegermann, EDNT 1:344–48, 345;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834–37.
78 Hübner, EDNT 3:358.
79 Gk.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ώνων (or the short form, minus the added genitive: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2 Tim 4:18; Rom 16:27; Gal 1:5; phil 4:20; Heb 13:21; 1 Pet 4:11; 5; 11; Rev 1:6; 5; 13; 7:12.
lit. literally
80 See esp. J. Barr, Biblical Words for Time (Second Ed.; London: SCM, 1969), 67–71.
81 T. Holtz, EDNT 1:44–46, 45.
82 Gk. ἀμήν; in doxologies see LXX Pss 44:14 (MT 41:13); 71:19 (MT 72:19); Isa 25:1; 3 Macc 7:23; 4 Macc 18:24. In NT see Rom 16:27; 2 Cor 1:20; Gal 1:5. See further H. Schlier, TDNT 1:335–38; H.-W. Kuhn, EDNT 1:69–70.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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