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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e saying is qtrustworthy, for:
rIf we have died with him, we will also slive with him;
12 tif we endure, we will also reign with him;
uif we deny him, he also will deny us;
13 vif we are faithless, whe remains faithful—
for xhe cannot deny himself.
q See 1 Tim. 1:15
r [1 Thess. 5:10]; See Rom. 6:8
s Rev. 20:4
t [2 Thess. 1:4, 5]; See Rom. 8:17; Heb. 10:36; Rev. 20:4
u See Matt. 10:33
v See Rom. 3:3
w See 1 Cor. 1:9
x Num. 23:19; Titus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후 2:10–13.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후 2:11–13.
앞선 8-10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매임을 당해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는 자신을 본받을 것을 제시한다. 이제 11-13절을 통해서 바울은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매임가운데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영광에 참여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도 이 영광스러운 경주에 함께 동참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하면서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이 짧은 3절의 감격의 고백은 6소절의 평행 대구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찬양 시이다.
Prologue 11a.미쁘다 이 말이여
A 11b.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A’ 11c. 또한 함께 살 것이요
B 12a. 참으면
B’ 12b.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C 12c.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C’ 12d.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D 13a.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D’ 13b. 주는 일향 미쁘시니
E 13c.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먼저 이 찬양시는 바울의 탄성이 기록된 서언 (Prologue) P로 시작된다. ‘미쁘다 이 말이여’란 바울의 탄성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향한 자신의 가르침이자 바울 자신의 신념이기도 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내하는 사역자의 축복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격의 토로이다. 원문으로 볼 때 정관사까지 포함하여 ‘피스토스 호 로고스’란 단 세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매우 간결하다. 그러나 이는 간결한 만큼 오히려 더 긴 여운을 남긴다. 먼저 ‘°이 말이여’로 번역되었으나 ‘그 말’로 직역되는 ‘호 로고스’는 문맥상 본절 하반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바울은 이후 자신의 찬양에 담긴 가르침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신실한 내용임을 찬양시의 서두에서 선언한 것이다. 나아가 동사까지 생략하여 표현한 이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의미, 신실함 그 자체임에 대한 필자의 경탄을 참으로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음도 느끼게 만든다. 왜냐하면 ‘로고스’ 특히 정관사까지 사용된 ‘호 로고스’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며 특히 우주의 창조와 통치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간 구원에 있어서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를 묘사하는 주요 용어의 하나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요 1:1,14). 따라서 P의 표현은 그리스도의 절대 신실하심을 강력히 시사하는 뉘앙스도 갖고 있다.
이어지는 A-A“ B-B' C-C’ D-D’는 모두 조건-결과를 나타내는 문장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즉 A,B,C,D는 모두 ‘~이라면(if)’이란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 ‘에이’ 가 사용된 조건절이며 A’,B’,C’,D’는 그 조건이 충족될 때 이루어질 일들을 나타내는 결과절이다. 그런데 이처럼 A-A' B-B’ C-C’ D-D’는 문장의 형식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지니나 각 부분의 시제는 각기 달라 독자들로 하여금 그 시제의 차이가 지니는 의미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이 2:11-13절 사이의 찬양시에서는 바로 이같은 평행 대구 구조 안에서의 각 소절의 동사 시제의 다양한 차이에 따른 섬세한 의미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 이해의 결정적 포인트이다.
먼저 A의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쉬나폐다노멘’은 과거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이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를 성도들은 모두 이미 주와 함께 단번에 완전히 죽은 자임을 나타낸다. 반면 A'의 ‘함께 살 것이요’에 해당하는 ‘쉬제 소멘’은 직설법 미래형이다. 헬라어에서 직설법 미래형은 비실재법인 가정법이나 희구법 흑은 명령법이 미래의 불확실한 일을 나타내는 것과 다르게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러한 실재법을 사용하여 성도가 미래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 확실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B의 ‘참다’에 해당하는 ‘휘포메노멘(imojjivoiiev)’은 현재 1인칭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역시 A.C.D와 마찬가지로 원문에 포함된 ‘우리가’란 주어를 번역하는 것이 뜻을 명확하게 할 뿐 아니라 운율을 살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A의 동사가 부정 과거형인 것과 달리 현재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 상태와 현재 진행적 상황 및 앞으로 지속될 일을 나타내는 데 두루 사용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바울 자신과 당시 에베소 성도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이 세상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감당하여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B’의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에 해당하는 ‘쉼바실류소멘’은 A'의 동사와 마찬가지로 미래형이다. 이는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 이에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미래가 반드시 임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영광된 미래가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이야말로 현재의 고난을 괴로워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는 원천적 힘이 된다.
C의 ‘우리가 주를 부인하다’에 해당하는 ‘아르네소메다’는 A의 동사가 부정 과거형이며, B의 동사가 현재형인 것과 달리 미래형이다. 이는 과거나 현재까지는 주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미래에 주를 부인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를 지닌다. A와 B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우리가 주와 함께 죽는 일이나 고난을 참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사단이 틈타서 우리로 하여금 주를 부인하게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조건절 C에 대응되는 결과절 C‘는 앞서 나온 결과절들인 A'나 B’와 비교한다면 상당한 강조형 문장이다. A'와 B’는 모두 ‘또한(KJV, also)’이란 의미의 부사 ‘카이’와 동사가 연결된 단 두 개의 단어로 되어 있었다. 반면 C’는 부사 ‘카이’와 ‘그 사람’, ‘그 분’이란 의미의 지시 대명사 ‘에케이노스’의 합성어인 ‘카케이노스’와 동사 ‘아르네세타이’, 그리고 ‘우리를’로 번역된 인칭 대명사 ‘헤마스’가 사용되고 있다. 즉 A’와 B’에 나오지 않은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명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의 주어인 ‘에케이노스’를 한글 개역 성경은 ‘주’라는 명사로 번역했으나 이는 격리되어 있는 대상을 나타내는 지시 대명사이므로 ‘그 분’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A와 A’ 그리고 B와 B’에서 ‘우리’와 ‘주’는 함께 죽고 함께 살며 또한 함께 왕 노릇할 대상으로 묘사되어 우리와 주 사이에는 강한 일체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C’에 와서는 ‘주’가 ‘그 분’이라는 제 삼자, 즉 ‘우리를’이란 목적어를 부인하는 저 멀리 있는 분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원문으로 볼 때 주를 부인하는 자가 주로부터 분리되어 그들이 주를 부인했던 것과 동일하게 부인당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됨이 훨씬 잘 드러난다.
D에서 바울은 우리가 미쁨이 없음을 고백한다. 이는 C에 나오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이란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C에서 바울은 인간은 누구나 주를 부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은 신실함이 없다는 D의 고백은 필연적이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미쁨이 없다’라는 ‘아피스투멘’이란 현재형 표현을 사용하여 비록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으나 실제 현실 생활 가운데는 단 한순간도 완전한 신실함이 없이 여전히 늘 계속하여 흔들리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D의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신실하지 못하여 주를 부인할 수 있는 인간, 또한 그럼으로 인하여 주로부터 부인당할 수 있는 안타까운 인간의 현실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은 ‘주는 일향 미쁘시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D’에서 완전히 해소된다. 원문으로 볼 때 D'도 C’와 마찬가지로 강조적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주는’으로 번역된 ‘에케이노스’란 주격 지시 대명사와 ‘미쁘시내’란 형용사 ‘피스토스’,그리고 ‘일향’으로 번역되었으나 실제로는 ‘머물러 있다’(요 3:36〉, ‘거하다’(눅 8:27)란 의미를 지닌 동사 '메노‘의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메네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계속 1인칭 복수형 동사가 사용되었으나 D‘에서만은 1인칭 단수 동사가 사용되어 미쁘신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심을 보여준다. 또한 이 주님을 ’에케이노스’란 주격 지시 대명사를 사용하여 표현함으로써 미쁘지 않은 인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작의 계속을 나타내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주님과 미쁘심은 언제나 분리가 절대 불가능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주께서 항상 미쁘시다는 이 사실은 인간이 미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신 성도의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결언(Epilogue) E에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느니라’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물론 D’에 나오는 ‘주는 일향 미쁘시니’에 대한 보완 설명이라 할 수 있다. D'에는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나오고 앞 문장과는 쉼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NIV는 E를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for he cannot disown himself)”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입장이 있다. 즉 표준 원문(Textus Receptus)에는 E에 이유의 접속사 ‘가르’가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P와 A-A'와 B-B'와 C-C‘와 D-D'를 나누는데 사용된 콜론(•) 부호를 사용하여 E를 D'와 분리시키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E는 내용상 D’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은 사실이나 형식상으로는 독립된 것이 된다. KJV가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최초 원본의 정확한 표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원문 구조 분석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내용 배열이 갖는 의미만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즉 E는 직접적으로는 D'와 관련을 가져 형편과 사정에 따라 쉽게 변하는 신실함이 결여된 인간과 달리 주께서 신실하신 것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본 단락 전체의 종결문으로서 앞서 P와 일종의 수미 쌍관 형태로 말미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내하는 자들이 받을 축복의 확실성을 재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며(A.A'), 고난을 참고 견디면 주와 함께 왕 노릇하고(B.B'), 주를 부인하면 주의 부인하심을 받고(C,C’), 인간은 신실성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신실하시다는(D.D’) 지금까지의 진술 전체가 우리 주님은 그 언제나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므로 결국 이런 진술 모두는 분명히 실현될 것임을 거듭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엑스포지멘터리 460-464)
11절) ‘미쁘다’로 번역된 ‘피스토스’는 일반적으로 ‘믿을만한, 신실한’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로 ‘이 말’이란 11-13절까지의 언급을 지칭한다. 이는 인내한 복음 사역자가 누릴 장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으로 바울 당시 초대 교회에서 널리 애송되던 순교자의 찬송시에서 인용한 표현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쉬나폐다노멘’은 본래 ‘함께 죽다’라는 뜻을 지닌 ‘쉬나포드네스코’의 부정 과거형으로 이미 죽은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러한 시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주와 함께 죽었어야 마땅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 ‘함께 살 것이요’로 번역된 ‘쉬제소멘’은 ‘함께 살다’라는 뜻을 지닌 ‘쉬자오’의 미래형이다. 이러한 시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이 보장될 것이란 점을 나타낸다.
본절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죄에 대해서 죽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중생 체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가운데서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부정에 대한 진술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촉구하는 진술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동참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될 것이다.
함께 죽다, 함께 살다라는 표현은 모두 한 구절안에서 함께 사용되고 있다.
- 2:11a On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see 1 Tim. 1:15 (cf. 1 Tim. 3:1; 4:9; Tit. 3:8). This occurrence of these words is undoubtedly used as the others were, as a combination “quotation and affirmation” formula. ὁ λόγος signifies that the words are a “saying” and πιστός commends the saying.
But does this formula refer to what precedes or to what follows (see Knight, Faithful Sayings, 112–15)? Of those who think that it refers to something in the preceding verses (e.g., Ellicott, Fausset, Holtz, Ridderbos, Schlatter, H. von Soden, Weiss, and N. J. D. White), most also take the general viewpoint that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does not refer to a saying as such (e.g., Ridderbos). Many of these say that vv. 11ff., even if they are not what the formula refers to, are, in fact, a “saying” (e.g., Fausset, Holtz, and von Soden; White disagrees). Schlatter maintains that the formula always refers to a statement about salvation and thus that here it points to the soteriological statement that precedes it. But the use of the formula in 1 Tim. 3:1 has eliminated this necessity. Among the verses chosen by those who think that the formula refers to that which precedes are vv. 8 (e.g., Weiss, who also includes v. 9), 10 (Fausset), and vv. 4–11 (White).
Perhaps the most forceful objection offered to finding the λόγος in what follows the formula is that γάρ in v. 11 is out of place if the formula refers to vv. 11ff. (e.g., Ellicott and Weiss). This γάρ is understood as connecting vv. 11ff. to the preceding and therefore as a further demonstration that what precedes, not what follows, is the λόγος.
Among those who identify vv. 11ff. as the λόγος, some (Huther, Lenski, van Oosterzee, and Wohlenberg) take γάρ as “namely” and thus as emphasizing what follows in the saying. Most (Bernard, Easton, Gealy, Guthrie, Hendriksen, and Kelly), however, take γάρ as referring to what preceded the saying in the original hymn, of which only part is cited here. Fee, on the other hand, suggests that “the gar is probably explanatory—and thus intentional—but does not refer to ‘this is a true saying.’ Rather it goes back to all of the appeal in verses 1–10.” Understanding γάρ as “namely” is somewhat unnatural and not in accord with the usual usage of the word. The other two suggestions are more plausible and may not be mutually exclusive, if Spicq is correct in suggesting that Paul paraphrases the first part of the hymn in vv. 8–10, intermingling his own thoughts and words. The words about Christ in v. 8 might be part of the original hymn, and thus γάρ might have referred to them in the original hymn and might still refer to them in this paraphrased form now. The συν- verbs in vv. 11–12 imply some preceding antecedent in the original setting of the larger saying and an antecedent in the present context. That antecedent is undoubtedly Christ. Thus vv. 11b–13 fit well with what precedes in their present setting and may play a similar role to that which they played in their original setting. Therefore, γάρ does not present an obstacle to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referring to vv. 11bff.
Against referring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to what precedes is the personal note that characterizes vv. 8–10 (v. 8: “my gospel”; v. 9: “I suffer hardship”; v. 10: “I endure”), which reflects Paul’s situation as one in bonds. It is unlikely that Paul would use πιστὸς ὁ λόγος of something so personal since the other sayings connected with the formula do not do so. A further objection to v. 8 is its position some verses removed from the formula. V. 10b, with its rich soteriological content, would be a candidate for the “saying” were it not that Paul expresses in it why he is willing to endure all things, a very personal framework.
With vv. 11b–13 we find a different situation. Instead of the first person singular we find first person plural verb forms, conveying a corporate rather than strictly personal sense, which lends itself to a “saying” (cf. Tit. 3:5ff.). Furthermore, the structure of vv. 11b–13 is so striking that almost all commentators identify it as a “hymn” or “saying.” The overall symmetry is found in four lines consisting of four conditional clauses. The structure of each protasis is the same: εἰ plus a first person plural verb. In the first two lines the verbs in both the protases and the apodoses are first person plural active, three of the four verbs have the prefix συν, and the apodoses consist of καί with the verb. In the last two lines the apodoses begin with κἀκεῖνος and ἐκεῖνος and the verbs are third person singular.
The content is as striking as the form. The correlation throughout is between “we” and “he” (Christ). In the first two lines this is manifested by the use of συν- in three of the four verb forms, a usage that speaks of the relationship of Christians (“we”) “with” (συν-) Christ. This correlation is carried on in the last two lines by the “we” of the protasis being correlated to or contrasted with the “he” (Christ) of the apodosis (using the emphatic word ἐκεῖνος). The first two protases speak in positive terms, commending a particular kind of relationship to Christ. The third and fourth speak in negative terms of another kind of relation to him. The verbs of the protases present a chronological movement from past to present to future and then back to a consciously chosen present. The first two lines speak of a favorable outcome based on the condition. The third speaks of an unfavorable outcome based on the condition, and the last, as I understand it, speaks of a response not based on the condition but in God himself, as the additional clause after the protasis and apodosis indicates.
Some regard all of vv. 11b–13 as composed by Paul for the occasion (e.g., Lenski, White), but usually all or most of the four lines as a “saying” originally composed in a different situation. Some regard v. 13b as an addition by the author of 2 Timothy (e.g., Hanson, Hendriksen, Lock, von Soden). Others regard only the first two lines as the cited “saying” (above all Easton). But a number of commentators regard all of vv. 11b–13 as the saying (e.g., Barrett, Bernard, and Guthrie). The statement now stands as a whole consisting of vv. 11b–13, and we will deal with it in its present form. The origin of the particular elements will be considered as the question of a possible origin for the saying as a whole arises.
The saying seems to be cited because its emphasis on “enduring” (v. 12: ὑπομένομεν) undergirds Paul’s statement about “enduring” (v. 10: ὑπομένω) and shows that endurance is a characteristic that marks the Christian’s life (see further Knight, Faithful Sayings, 115f.). This stress is, therefore, both the semantic and ideological link to its setting. Nonetheless, Paul cites the saying at a natural transition point, “if we died with him, we shall also live with him,” which is itself crucial to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endurance.
2:11b συναπεθάνομεν in the saying’s first line poses two interrelated questions, that of who is referred to with συν- (also of concern with the second and fourth verbs of the saying) and that of the significance of “dying with.” W. Grundmann states that the sense of συν- in Paul “is always ‘together with’ ” (TDNT VII, 782). It is agreed that this συν- has Christ in view. This is clearly implied by the relationship of the three συν- verbs, because only of Christ would Christians say that they have died, will live, and will reign “with” him. This understanding is strengthened by the identification of the one referred to in the συν- with the one in view in the emphatic ἐκεῖνος in the apodoses of the last two lines of the saying.
Given that consensus, we turn to the second question. Some understand συναπεθάνομεν to refer to dying with Christ in martyrdom and thus understand the saying as a song of martyrdom (e.g., Bernard, Bouma, perhaps Fee, Huther, and von Soden). Others understand it as referring to a spiritual union with Christ in his death. Considerations favor the latter. Contextual significance is the first and major consideration: This “death with” results in “life with” (συζήσομεν) Christ (the apodosis). Furthermore, the wording of Rom. 6:8 is nearly identical, but the ideas are developed further in that context. Death with Christ is death to sin (Rom. 6:11), even as Christ died to sin once (v. 10); it is the crucifixion of the old person, the destruction of the body of sin, and release from the bondage of sin in crucifixion with Christ (v. 6). It is in Christ’s death (v. 5) that Christians have died with him. And because they have been united with Christ (v. 5) they have died with him in his death, which brought about the inner death of the old person, release from bondage to sin (v. 6), and justification from sin. With this death comes the concomitant life. Gal. 2:20 (vv. 19–20 in Greek editions) expresses the same thought.
Other considerations that favor this view of συναπεθάνομεν over that which takes it as referring to martyrdom include, first, that dying with Christ is a strange way of referring to martyrdom. There is no example in the NT of such usage. Rather, the NT uniformly speaks of dying with Christ in reference to the spiritual death of Christians who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 [19]) and who have therefore died with Christ to sin (Rom. 6:3ff.; Col. 2:12). Also the past tense of the verb speaks against it referring to a martyrdom yet to take place. The chronological progression in the protases of the saying (past, present, future, present) would be shattered by a reference to a martyr’s death in the first protasis, and “enduring” would be taken as the result of a martyr’s death. But “enduring” appropriately comes as the result of spiritual death with Christ. Therefore, the “faithful saying” begins with the believer’s foundational spiritual experience and by means of the aorist presents it as an accomplished fact.
The apodosis presents a result that comes about on the basis of the fulfillment of the condition in the protasis. The future tense of συζήσομεν,* “we shall live with him” (the verb also in Rom. 6:8; 2 Cor. 7:3), signifies that this result comes after “dying with Christ.” But is this the immediate future from the perspective of a past spiritual death, i.e., this present life, or a more distant future, i.e., life with Christ after death, or both? Here again the context of Rom. 6:8 aids our understanding. There, on the basis of Christ’s present life “to God” (vv. 9–10), Paul concludes from συζήσομεν αὐτῷ that Christians should “consider [them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v. 11). Since this statement demands that Christians “consider” themselves “dead to sin” now, the parallelism within the statement means that they should also “consider” themselves “alive (ζῶντας) to God in Christ Jesus” in this present life. As Christ now lives to God, so they are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The life they are to live is a present “walk[ing] in newness of life” because they have been united to Christ in his death (v. 4). Thus they may not “still live” (ἔτι ζήσομεν) in sin (v. 2), because those who have been “united with Christ in the likeness of his death” certainly shall be also “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 (v. 5). They are now “alive from the dead” (v. 13).
It has been objected that future tense συζήσομεν in 2 Tim. 2:11b must refer exclusively to the future life after death (e.g., Huther, Wohlenberg) or the resurrection life (e.g., Ellicott, Weiss). If this argument were acknowledged as valid, it would apply with equal force to Rom. 6:8. But this would be to miss the whole thrust of Romans 6, which is concerned with the present effect of union with Christ in a Christian’s life. The introductory question of Rom. 6:2 makes that perspective plain: “How shall we who died to sin still live in it?” There also the future tense is used (ἔτι ζήσομεν), and it refers to life here and now, as ἔτι, “still,” makes clear. Rom. 6:8, as we have seen, says the same thing as 2 Tim. 2:11b: The one who has died with Christ will live with him—in the present. (Of course life with Christ goes on into the distant future as well: See especially 1 Tim. 4:8; Rom. 6:22; cf. R. Bultmann, TDNT II, 869.) Adverbial καί throws emphasis on συζήσομεν and highlights the fact that we are “also” united to Christ in his life just because we were united to him in his death.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0–404.
12절) ‘참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휘포메노멘’은 ‘고난을 참다, 견디다’라는 뜻을 지닌 ‘휘포메노’의 현재형이다. 여기서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고난에 대한 인내와 견딤이 한순간이라도 포기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 곧 고난에 대한 인내와 견딤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주님께서도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고 하시며 동일한 사상을 교훈하신 바 있다.
바울은 여기서 주님께서 교훈하신 나중까지 견디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왕 노릇할 것 이란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로 번역된 ‘쉼바실류소멘’은 ‘함께 통치하다’라는 뜻을 지닌 ‘쉼바실류오’의 미래형으로 이와 같은 통치는 현재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바실레이아’는 ‘나라, 왕권, 왕위’를, ‘바실레우오’는 동사로 ‘왕으로 다스리다, 왕노릇하다’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함께’를 의미하는 전치사 ‘심’이 사용되어 ‘심바실레우오’로 ‘함께 다스리다, 함께 왕노릇하다’라는 표현이 만들어졌다. 혹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누리는 왕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고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의한 종말론적인 왕권의 수여라는 사상에 의해 보완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그것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을 보장하듯이, 우리가 지상에서 복음으로 인한 고난에 직면해 지속적으로 인내한다면 그것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만일 고난에 대한 인내가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임무라면 하나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는 그보다 훨씬 더 지속적인 그의 특권이 될 것이다(Guthrie).
- 2:12a ὑπομένω means generally “remain” or “stay behind.” Among its derived meanings, that of “endure” in trouble, affliction, or persecution is dominant in the NT and is seen here in the second line of the saying (cf. LSJM; BAGD; F. Hauck, TDNT IV, 581f.). The NT relates what is involved in enduring: Believers endure hatred by all for Christ’s sake (Mt. 10:22 par. Mk. 13:13; cf. Mt. 24:13), they persevere in tribulation (Rom. 12:12), they endure great sufferings (Heb. 10:32) and temptation (Jas. 1:12), and they patiently endure suffering for doing good (1 Pet. 2:20). This endurance is to continue throughout their lives, as the use of the present tense (in the four last-named passages) shows. Here also the present tense refers to continual enduring (cf. Hauck, 586: “In most of the NT passages ὑπομένειν refers to the stedfast endurance of the Christians under the difficulties and tests of the present evil age”). Since it is understood here that endurance is for Jesus’ sake (cf. Mt. 10:22 par. Mk. 13:13), it was not necessary for Paul to say so explicitly. This is particularly so because of the three συν- verbs in this context, especially the fourth: The one with whom Christians will reign is the one for whom they endure. The NT concept of endurance always has an expectant eschatological note (cf. Mt. 24:13; 10:22; Mk. 13:13; Heb. 12:2; Jas. 1:12), which is present here also in the outcome of endurance, reigning with Christ.
The future tense of συμβασιλεύσομεν refers to an end-time situation that comes after the responsibility of the present tense ὑπομένομεν has ceased, since this state of existence for Christians has ended. This understanding of συμβασιλεύσομεν** is illustrated by its only other NT occurrence, 1 Cor. 4:8, where Paul criticizes those who think and act as if they are already reigning with Christ. He wishes that it were so and then speaks of this present age as one in which “when we are persecuted, we endure” (4:12). The theme of reigning with Christ recurs elsewhere in Paul and the NT (e.g., Mt. 19:28; Lk. 22:29–30; 1 Cor. 6:2; Rev. 3:21; 20:4, 6; 22:5). Here it is presented as an encouragement for enduring, and, as in the first line of the saying adverbial καί, “also,” it lays emphasis on the future “reigning with Christ,” which, though it is so different from the present experience of enduring, is “also” a result of that enduring.
2:12b The saying turns in its third line from steadfast endurance to the contrary action of denial. And with that it turns from comfort and encouragement to stern warning. It also turns to a future tense presentation of an awesome future possibility, i.e., that the professing Christian will deny the one he claims to have died with and to now live with. The resultant reciprocal action in the apodosis, “he also will deny us,” makes it clear that the one denied is Christ, since ἐκεῖνος (here and in v. 13) after the συν- verbs, and in the context of the NT, signifies Christ.
ἀρνέομαι (Pl.* 6x, all in PE: here; 1 Tim. 5:8; Tit. 1:16; 2:12; 2 Tim. 2:13; 3:5) means basically “say no, deny,” and is used in the NT of denial of a person with whom there was some prior relationship (see H. Schlier, TDNT I, 409–71; Riesenfeld, “ἀρνεῖσθαι”). This is its significance in a saying of Jesus (Mt. 10:33; Lk. 12:9) that may be behind 2 Tim. 2:12b. The particularities involved in denial of Christ come to light in Peter’s denial (Mt. 26:69ff. par. Mk. 14:66ff./Lk. 22:54ff./Jn. 18:15ff.; cf. also Mt. 26:34f. par. Mk. 14:30f./Lk. 22:34/Jn. 13:38). Peter not only rejects the truth of the statements of the maid and others (Mt. 26:70 par. Mk. 14:68/Lk. 22:60), in particular he denies any knowledge of Jesus (Mt. 26:72, 74 par. Mk. 14:71/Lk. 22:56; cf. 22:61–62) and his relationship with Jesus (Mk. 14:69–70 par. Lk. 22:58/Jn. 18:26–27). The personal element in denial is also found in 2 Pet. 2:1 (“even denying the Master who bought them”; cf. Jude 4).
Denial of Christ manifests itself in various ways in the NT. It can consist in denying his name (Rev. 3:8) or faith in him (Rev. 2:13). It can thus take the form of forsaking or repudiating the Christian faith and its truths, particularly the truth concerning Jesus. In doing so one personally denies Christ (and the Father, cf. 1 Jn. 2:22–23). The denial can also manifest itself in the moral realm. Some may “profess to know God, but by their deeds deny him” (Tit. 1:16; cf. 1 Tim. 5:8).
The dire consequence of this denial is identified here in the form of a resultant reciprocal action (indicated by the κἀ, “also,” a contraction for καί when joined to ἐκεῖνος): “He also will deny us.” ἐκεῖνος (“that one” or “he”) implicitly refers to Christ (see above). The denial by Christ (ἀρνήσεται) is that future final evaluation which he will make to his Father (Mt. 10:33) in the presence of God’s angels (Lk. 12:9) when he returns in glory (cf. Lk. 9:26; Mk. 8:38; cf. also Mt. 7:23). The finality of his denial of those who have denied him will be as permanent and decisive as theirs has been of him, and will thus not be as in Peter’s case, where forgiveness was sought and received. For that situation something else must be said, and to that the saying turns with its fourth and last statement.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Pl. Paul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par. parallel Gospel passages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4–406.
13절) ‘우리는 미쁨이 없을’로 번역된 ‘아피스투멘’은 부정 불변사 ‘아’와 ‘믿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피스테오’의 합성어인 ‘아피스테오’의 현재형이다. 본문에는 이 단어가 접속사 ‘에이’와 함께 사용되었는데 ‘에이 아피스투멘’은 직역하면 ‘만약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NASB If we are faithless)’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주는 일향 미쁘시니’에 해당하는 ‘에케이노스 피스토스 메네이’와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주는 일향 미쁘시니’를 직역하면 ‘그는 믿음을 지니고 계시다(NASR He remains faithful)’가 되는데,’만약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그는 믿음을 지니고 계시다’라는 번역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본절 의 ‘에이’는 가정이 아니라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지라도’란 양보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인간은 비록 믿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믿음을 지니고 계시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다. 그런데 그 현재형이 함축하고 있는 이면적 의미는 다소 다르다. 먼저 인간에 대하여 사용된 ‘우리는 미쁨이 없을’로 번역된 ‘아피스투멘’이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인간들은 현재 신실치 못한 경우가 많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일향’으로 번역된 ‘메네이’는 현재 시점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신실성의 영원하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절을 ‘우리 인간은 신실하지 못해서 그를 부인할지라도 주께서는 그의 약속에 대해 항상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본절은 ‘그의 본분에 대한 신실함은 그의 약속들 뿐 아니라 그의 경고들도 실행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Hendriksen).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끝까지 인정하면 그도 우리를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인정하실 것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다”라는 본절의 진술은 배교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말씀이요,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축복의 말씀인 셈이다.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원인이 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포함되어 있어 본문이 13절 상반절 곧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라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본문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부인할 때 우리를 부인하시고 우리가 당신을 인정할 때 인정하시는데 그러한 원칙이 변함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분 스스로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주님께 대해 ‘할 수 없다(우 뒤나타이)’라는 표현이 적용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술은 주님의 전능성이란 속성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은 전제적인 폭군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처럼 발휘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분의 전능은 선한 것에 집중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존재와 속성에 부합되는 것만을 행하신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존재와 속성에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일은 결코 행하실 수 없는 것이다. 전능하신 주님은 자비와 공의가 영원하시기 때문에 이미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그를 인정하면 우리를 인정하실 것이며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러한 원칙에서 스스로 벗어나신다면 그분은 결코 더 이상 ‘신실하신’ 분일 수 없다.
- 2:13a The saying returns to the present tense in the fourth line with ἀπιστοῦμεν in the protasis speaking of what Christians might do or be and with the apodosis indicating Christ’s response. This response is not a resultant reciprocal action, as in the third line, but finds its explanation in the nature of the one responding (ἀρνήσασθαι γὰρ ἑαυτὸν δύναται).
Does ἀπιστοῦμεν** (NT 6x: Lk. 24:11, 41; Acts 28:24; Rom. 3:3; 1 Pet. 2:7; variant reading in Mk. 16:11, 16) refer here to “unbelief” (so Alford, Bernard, Chrysostom, Ellicott, and Fausset) or to “unfaithfulness” (so Bouma, Guthrie, Hendriksen, Huther, Kelly, Kent, Lenski, Ridderbos, Weiss, N. J. D. White, and Wohlenberg)? The verb normally implies unbelief in the NT, and Ellicott concludes that there is not sufficient reason for departing from this regular meaning here. But it is more appropriate to say that in a slight majority of NT occurrences (4 of 6), i.e., in the non-Pauline texts, the word refers to unbelief, but also that the two Pauline occurrences can be interpreted either way. Furthermore, extrabiblical usage knows the meaning “disobey,” under which “unfaithfulness” is a subcategory, along with that of “unbelief” (see LSJM and BAGD for references). These considerations point to the necessity of finding the meaning in this context. The key is that ἀπιστοῦμεν is answered with πιστός in the apodosis just as ἀρνήσεται answers ἀρνησόμεθα in the preceding line. Obviously what is in view in πιστός is God’s faithfulness. Thus what is in view in ἀπιστοῦμεν, to which God’s faithfulness answers, is “unfaithfulness” (so also BAGD; R. Bultmann, TDNT VI, 205, 208). This does not mean that temporary unbelief or lack of trust is not also present in the moment of unfaithfulness, for indeed it is.
But our understanding of ἀπιστοῦμεν here must be bound up with our understanding of this last statement of the saying in its entirety. Might this protasis be giving another, and perhaps worse, expression of denial (v. 12b), or is it giving an expression of the frailty of the believer, which is less than a hardened and final denial? The key is one’s understanding of the apodosis, and so to that we must turn: Is Christ faithful to punish and repudiate because he cannot deny the justice and holiness of his being, or is he faithful to hold on to Christians because of his character of fidelity and the permanence of his promise?
ἐκεῖνος is Christ here as in v. 12b. It is he who “remains faithful.” Paul’s references to the faithfulness of God and Christ are strikingly uniform. This faithfulness is God’s fidelity to his promises, and those promises relate to the positive outcome of human salvation (cf. 1 Cor. 1:9). Paul does not mention God’s faithfulness as a basis for the certainty that the faithless will be punished, but as the basis for the assurance of the gospel promises (2 Cor. 1:18–20), for safety in temptation (1 Cor. 10:13), for protection from the evil one (2 Thes. 3:3), and for the sanctification and preservation of God’s people (1 Thes. 5:24; cf. also Heb. 10:23; 11:11; 1 Pet. 4:19; 1 Jn. 1:9 [note πιστός]; Rev. 1:5; 3:14; 19:11). This understanding is also suggested here by μένει, “he remains,” which with πιστός implies that Christ continues as the faithful one in his relationship to Christians. Though they change and become unfaithful (to him, understood), he does not change but has remained faithful (to them, understood). The Pauline and NT usage also suggests that Christ’s remaining faithful here also includes his continuing adherence to the divine promises to his people even in the midst of their unfaithfulness. This understanding of the apodosis entails that the protasis most likely refers to temporary unfaithfulness and not to unbelief.
This fourth line of the saying is demonstrated in Christ’s faithfulness to Peter even though Peter was so unfaithful that he denied Jesus (Jn. 21:15ff.; Lk. 22:31–32). While the apodoses in the first three lines of the saying result from the corresponding protases, here the apodosis is not the result but the opposite of the protasis. In the fourth statement in the saying, εἰ means “although,” not “if.”
2:13b Since the protasis does not, therefore, give the basis for the apodosis, a clause is added to give the reason (γάρ) for Christ’s fidelity. Here ἀρνήσασθαι means “to say no, to belie, or to be untrue” to his own being (cf. BAGD s.v. 4; Riesenfeld, “ἀρνεῖσθαι,” 208, 216; H. Schlier, TDNT I, 469, 471). Christ is faithful because of his own nature: He cannot (οὐ δύναται) be untrue to himself (ἑαυτόν). This reason is so necessary to the sense of the fourth line of the saying and to the saying as a whole that it must have been part of the original saying.
2:11b–13 The saying in these verses gives a helpful overview of key aspects of the professing believer’s life. The first two lines encouragingly state the glorious results that accrue from one’s identification with Christ, first in dying to oneself in union with Christ’s death and second in enduring and suffering for Christ throughout one’s life. The last two lines state the sad possibilities that an imperfect disciple faces in this life, denial and unfaithfulness. The saying sharply warns against denial, which can only expect denial in turn by Christ. But as a counterbalance comfort is offered to the disciple who is unfaithful by assuring him that Christ will remain faithful to him.
We can only offer a probable answer to the question of the origin of the saying. Since 2 Timothy was written from Rome, then it is possible that the church in Rome developed the first line by reflection on Romans 6 and by utilizing Rom. 6:8 in a contracted form. This is probable not only because of this link but also because the idea of dying with Christ is more fully developed in Romans 6 than anywhere else in the NT. Since Romans 6 relates death with Christ to baptism, it would be appropriate to conjecture that the saying was used in connection with confession of faith at the time of baptism. The third line seems to reflect Jesus’ words in Mt. 10:33 and Lk. 12:9, cast here into the mold of the other lines. No very close similarity exists between the second and fourth lines and other NT statements. Thus one can only say that two likely sources have had their impact on the saying, and that the other lines were added as necessary when converts were confessing their faith and receiving baptism.
Paul has quoted the saying as a whole so that its various truths might have their impact on Timothy as he has called on him to suffer and endure for Christ (v. 3). In the light of that call, the second line’s promise that those who endure will reign with Christ not only stands out in its relevance to Timothy’s situation but is also set in the context of these other truth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the New Testament are listed or it is identified as a New Testament hapax legomenon
LSJM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with a Supplement by E. A. Barber. Oxford, 1968.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TDNT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 G. W. Bromiley, I–X. Grand Rapids, 1964–76.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406–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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