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진정한 사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1. 성경이 설명하는 깨진 세상의 원인, 죄
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깨어짐의 원인을 ‘죄’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곰곰히 생각하다가 자신은 그렇게 큰 죄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보통 죄를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이나 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 LH 직원이 자신의 정보로 땅을 투기하는 행위, 시의원이나 구의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의 땅의 용지를 변경하거나 개발을 추진하여 땅값을 올리는 행위, 자신의 자녀를 학대하거나 방치, 유기하는 행위
위의 구체적인 심각한 죄들을 짓지 않았기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존재 원칙과 질서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이 유지될 수 있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과 나의 인생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나 자신이 중심을 차지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SIN, I-centeredness, 자기중심성
이것이 죄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을 그분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본 질서를 거부한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이를 거부하고 내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 선악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특별함
1) 아름다운 도덕적 성품 : 겸손, 순수, 정의감, 사랑, 자비, 인내
2) 언어의 사용 : 말씀하시는 하나님
3) 사회성 : 삼위일체(페리코레시스), 남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4) 이성 : 사고력(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판단)
5) 영성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종교성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계실때 이러한 성품들은 제대로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모독 : 무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나의 인생살이에서 하나님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주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평소에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근사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고 식사를 하며 가족들과 멋진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집은 아주 잘 꾸며져 있었고, 그 친구와는 말이 잘 통했습니다. 그런데 뒷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꾸 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몰라도 된답니다. 식사후 화장실에 가는 길에 우연히 열린 뒷방의 문을 통해서 보니 그 방안에는 그 친구의 늙으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모습으로 더러운 음식을 먹고 계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친구를 계속해서 좋은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홀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특별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 불쾌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이유는 도덕적으로 선해서라기 보다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죄란 우리 인간 세상과 사회를 가능하게 하신,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 삶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지으시고 지금도 보존하고 운영하십니다. 모든 행성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만물이 그 원칙에 따라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존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원칙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이 원칙이 무시될 때 이 원칙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이 원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 피해를 받고, 이 원칙을 어긴 인간이 결국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주 만물에 작용하는 법칙중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목에 보자기를 묶고 뛰어 내립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의자나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점점 더 이 법칙을 거스립니다. 2층, 3층 옥상에서 뛰어내립니다. 잘못하면 발목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3층에서도 무사하니 63빌딩에서 뛰어내려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아주 작은 물리 법칙을 무시해도 큰 사고가 납니다.
이런 물리법칙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시하지 말고 지키며 살아가야할 삶의 원리들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법, 특히 사랑하는 법, 돈을 벌고 쓰는 법, 불의를 다루는 방법,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법,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자원을 사용하는 법등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원리들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삶의 원리중에 가장 중요한 원리인 사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방법대로, 세상 방식과 유행에 따라 사랑을 합니다. 수많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시와 그림을 그립니다. 사랑의 방법을 다루는 수많은 책들, 지침서들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은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면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랑의 원리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의 원리를 배우고 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자신이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합니다.
결국 이러한 원리들을 무시하면 가장 먼저 자신이 손해를 보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나아가 사회적, 문화적, 생태적으로 인류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치명적인 모습입니다.
2. 죄에 대한 심층적인 설명
여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일까요? 뿌리와 가지만을 바라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음 그림은 가지에 잎사귀와 열매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습니다.
밑둥만 남아있는 나무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나무 그림은 죄를 심층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사람들은 꽃, 열매, 잎사귀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규범, 도덕, 윤리, 법률을 어겼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죄로 말미암은 결과, 죄의 열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사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나 음욕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질투심이나 탐욕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때 이를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등 종교에서는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합니다.
마 5:28
마 5:22
성경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을 가질 때 이미 간음했다라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욕할 때 이를 살인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열매를 다 없애버려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본질적인 죄는 단지 마음을 의미하는 줄기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이 위치한 뿌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주와 나의 중심이신데, 내가 주인이 된 상태가 죄의 본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된 상태라면, 마음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난 여전히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열매와 잎사귀를 없애 버려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이고, 나무 몸체를 댕강 잘라버려도 그 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뿌리가 사과나무이니, 마음을 잘 닦으며 우지하지 않으면 줄기가 나오고, 겉으로 아무리 조심하여도 결국 마음 속에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마음과 실제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시작된 가정이 깨져 버립니다. 인류문명이 진보하지만 빈곤은 여전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생산성을 자랑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실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먼저 여러분은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무한하다면 지금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보고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바꾸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2리터자리 생수 병 혹은 화장지와 같습니다. 내 인생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소모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니 그냥 한번 살아보겠다라는 마음 자체가 죄의 본질을 반영하는 자세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럭저럭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왔지만 이것으로는 안된다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셨다면 하나님께 나아오실 때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 행세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 사회의 문제이고, 세상의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이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문명과 과학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는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그 해결 방법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진실한 인격적 반응을 기대하십니다. 다음 시간에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나눔 질문
1.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깨진 이유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볼 때 당신은 죄인입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또는,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그래서 쾌락, 명예, 권력, 재산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구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삶의 의미, 목적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세상과 나를 어떻게 만드셨는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가시는지,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이 회복에 어떤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
우리가 실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재이 세상과 우리의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원래 어떻게 만드셨는지, original design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원래 계획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분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로, 걸작품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원래 계획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성경이 인간을 나머지 피조물과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많은 면에서 동물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물에게는 없는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모 에렉투스 : 직립 보행, 똑바로 선 사람
호모 사피엔스 : 지혜가 있는 사람
호모 루덴스 : 유희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 : 도구의 인간
호모 하빌리스 : 손을 쓰는 인 간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독특한 이유에 대해서 인간만이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반응할 수 있고,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그 분을 슬프게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렇게 만드셔서 인간과 아주 깊은 사랑을 나누기 원하시고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먼저 그렇게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37–38 (NKRV)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스바냐 3:17 (NKRV)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구절에서 너 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지만,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으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을 정말 믿게 된다면, 하나님에게서 정말 무조건적인 사랑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때의 경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셔서, 그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고 인간은 그에 반응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2. 자신과의 관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마태복음 22:39 (NKRV)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기 사랑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장점을 알고 잘 누리고, 약함과 부족함은 인정할 수 있을때,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주변의 아이들을 살펴보면 이런 건강한 자기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환경이라고 해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를 건강하게 사랑해줄때, 아이들은 자라면서 건강해집니다. 부모의 역할은 환경적으로 좋은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아이와 공감하고, 아이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때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3. 이웃과의 관계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면 여유로와집니다.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면 편안해져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사랑하시고, 내가 독특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22:39 (NKRV)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요한복음 13:34 (NKRV)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또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랑을 주고 받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입니다.
세상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세상을 거부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큰 행복은 누리는 때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입니다.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서로 깊이 이해하여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깊은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사랑을 주고 받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4. 세상과의 관계
인간은 세상을 사랑하며 경영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창세기 1:28 (NKRV)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세상 경영을 맡기셨습니다. 본문에서 다스리라는 말의 부정적인 어감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자신이 가진 힘으로 세상을 착취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연상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다스린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피조물 본래의 가치가 최고로 나타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고 발전시켜 최선, 최고가 될 수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한다는 것은 세상을 이용해서 얄팍하게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 피조물이 원래의 가치를 최대한도록 드러냄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원래 가졌던 계획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누리고, 또 그럼으로써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함으로 넉넉해져서 이웃도 사랑하고 받아들여 이웃과 아주 건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 더 살기 좋고 멋진 곳으로 만드는 삶의 목적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깨진 세상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떻습니까?
앞서 살펴본 네가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
먼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정말 믿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자신과의 깨진 관계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인 사랑이 없기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습니다. 내가 소유한 것이나 성취한 것, 그리고 이런 것들에 기초한 다른 사람의 평가에 따라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이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성형수술을 받습니다. 이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외모 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바꾸려고 합니다. 학위를 위조하고 족보를 바꾸기까지 합니다. 건강한 자기 계발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바꿀수 없는, 바꿔서는 안되는 것들을 수용하지 못해서 바꾸려고 하는 이들은 불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지 못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건강하지 못한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절망하고 좌절, 자신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포기한 사람의 첫번째 모습이 게으름입니다. 스스로 대강 살아도 되는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포기한 사람은 나아가 자기를 학대하게 되고 다양한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중독의 특성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상황과 그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뭔가에 몰입하는 것이 중독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게임, 인터넷, 술, 도박, 쇼핑, 포르노, 성, 일, 관계에 빠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포기가 심해지면 극단적인 선택, 자살을 선택하기까지 합니다.
3. 사람들과의 깨진 관계
이렇게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마음이 좁아집니다. 자신을 담지 못하기에 다른 이웃을 품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도 깨집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깨진 관계는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나와 관계없는, 멀리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할,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서 받은 상처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어 자신이 무가치해보이고, 더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겁나고 싫고 사는게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4. 세상과의 깨진 관계
이렇게 깨진 모습의 우리는 세상을 잘 경영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세상을 당장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만을 생각합니다.
노동의 의미가 전락되어서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다보니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세상을 보살핀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1970년대 말 ‘로마 클럽’과 1997년 ‘교토의정서’ 에서는 지구 환경의 문제, 특히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이산화탄소의 증가로 인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극한 기후와 폭염 기후가 증가하고, 가뭄과 홍수, 빙하와 영구 동토층의 감소로인한 해수면의 상승등이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의 경고를 듣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기후 변화, 환경 보호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특히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나라들에서 자신들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지 않고, 자원 재활용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편리함이 다음 세대에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 내면 깊숙이 있는 갈망
하나님과 자신,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네가지 관계가깨져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세상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인간은 우리 개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갈등, 생태계의 위기 같은 문제들을 바라보며, 교육이 부족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해서, 경제적인 억압구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부조리한 권력 때문이라 생각하고, 인류 역사 내내 다양한 방법들로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 인해 인류가 긴 역사를 통해서 여러 부분에서 진보를 이룩한 것이 사실이지만 진보한 만큼 또 다른 문제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진보와 빈곤(헨리 조지)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삶의 목적과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왜 우리는 이 고귀한 것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일까 질문해야 합니다. 이 내용은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나눔 질문
1,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의 원래 계획을 듣고 난 후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당신이 이러한 온전한 관계들을 맺고 있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깨져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까? 어떤 면에서 당신은 이 세상의 깨짐을 절감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무엇을 합니까? 또한 인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습니까?
지난 이야기에서 우리는 ‘신이 있다, 신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념이나 세계관, 전제에 관한 문제 라고 했습니다. 만약 신이 있다라고 전제하더라도 그 신이 소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나뉘고, 소통하지 않는 신의 경우에는 인간이 스스로 그 신을 찾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먼저 소통하시고 급기야 자신이 인간이 되심으로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소통하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지 알아야할 내용을 텍스트의 형식으로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요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도 하나님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논리적 궁구로, 예술가는 감성적 언어로, 농부는 진솔한 이야기로 하나님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실존적인 추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1. 행복, 모든 인간의 소망
어제,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과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표정으로 만나셨습니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같은 아파트나 주택의 엘리베이터나 계단에서 만나는 이들의 얼굴을 어떤 표정이던가요? 아니 여러분들은 그사람들에게 어떤 표정을 보여주셨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원하는데 우리 얼굴 표정은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 원합니다. 만약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깊은 병이 든 사람일 것입니다.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마음은 깊은 좌정과 무기력이 가져 온,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저점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실 이러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인류의 소망이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행복을 논하며 행복을 추구해왔습니다.(수렵-농경-산업-4차산업)
행복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추구(4 pursuits : 4P)
Pleasure, prestige, power, property
1) 쾌락(pleasure)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보고 입는 것들, 성적인 추구등을 통해서 쾌락, 즐거움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쾌락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 쾌락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쾌락의 문제는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강력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먹고 마시는 쾌락, 쇼핑 중독, 성적인 쾌락은 적정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점점더 강력한 자극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그 쾌락이 인간됨을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또 자신만이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이웃, 가까이에 있는 자기 가족의 즐거움까지 무시하거나 그들의 안전에 위협을 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쾌락을 좇다가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쾌락은 우리에게 재미와 편리함 등을 선사할 수는 있지만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2) 명예(prestige)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인기, 명예를 추구하지만 명예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혹 여러분들은 '나는 정치인도, 연예인도 아닌데 내가 무슨 명예를 추구하나?’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명예는 자기 이름값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던지 나라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필요한 존재야, 가치있는 존재야’라는 평가를 받을 때 행복합니다. 이런 평가를 받으면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 꼰대질, 갑질
그렇다면 우리가 명예를 얻으면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될까요? 약간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사람들의 평가는 언제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늘 진심을 알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최근 배구계 쌍둥이 자매의 몰락
3) 권력(power)
세번째는 권력입니다. 우리들은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서 권력은 필요없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모두 권력을 추구합니다. 권력이란 다른 사람에게 조종되지 않는 정도의 힘, 내지는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대다수 조직의 맨 아래에서 시작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승진하기를 원합니다. 통제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임원이 되어서 시키는 일만 하지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일정 정도 힘, 권력으로 그 관계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더 많은 힘을 가지면 더 안전하게 느끼고 자신감도 더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사장이 직원에게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힘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을 세우고 섬길 수도 있지만 이것이 잘못 사용되면 사람을 조작하거나 조직을 망가뜨리고 나아가 본인도 망가지게 됩니다.
- LH 상황
4) 재산(property)
네번째는 재산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앞선 세가지를 모두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쾌락도, 명예도, 권력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평수가 얼마인가, 어느 지역에 사는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가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고, 이런 저런 휴가를 갔다 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건강도 돈으로 살 수 있고, 미모도 돈으로 만들어 낼 수 있고, 교육도 돈으로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초등학생들의 꿈이 건물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자되세요’라고 덕담합니다. 그러나 돈이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관계, 건강, 교육, 사랑, 참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2005년 삼성 이재용 회장의 막내딸 이윤형 씨가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지금도 이것이 타살이다라는 루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재벌가 딸의 죽음앞에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뭐가 부족한게 있어서? 호상에 겨워서?’라고들 했습니다. 이미 본인 명의의 수천억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렇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이 4P(쾌락, 명예, 권력, 재산)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뼛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호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런 것들을 갖는다고 해서 궁극적인,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약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줄수는 있습니다. 재미, 편리함 같은 것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근원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2. 행복의 조건
각자가 진정한 행복의 조건으로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두가지를 이야기할려고 합니다.
1) 무조건적인 사랑
사람은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해집니다. 엄마의 품안에 있는 아기를 보십시오. 연애를 하며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왜 행복해 보일까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원히 뜨거울 것 같았던 이성간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시들해집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런 사랑을 받는 아이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엄마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엄마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더 크다고 이야기하지만 좀 다르게 생각해보면 거꾸로 아이의 무조건적인 사랑때문에 엄마가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 늘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진정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2) 삶의 의미, 삶의 목적
사람에게는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사랑만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행복의 또 다른 축은 삶의 의미와 목적입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찾으면 행복해집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살 때 내 삶이 의미있고 내 존재가 가치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 사람들은 행복해집니다.
과거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많은 사람이 독재에 항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독재에 항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 역사가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 전태일, 이한열 / 미얀마의 민주화 항쟁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일에 바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과격한 종교나 국가주의에 세뇌되어 잘못된 삶의 목적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폭탄 테러에 자신을 바치면서, 수많은 이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넣으면서 자신들은 자신의 종교에, 국가에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앞서 살펴본 4p가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이런 쾌락, 명예, 권력, 재산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바른 삶의 목적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잘못된 삶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
제가 오늘 이렇게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 이 두가지, 무조건적인 사랑과 삶의 의미, 목적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쾌락, 명예, 권력, 재산 이런 것들을 가지면 행복해진다고 말하며 여러 종류의 모조품 행복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장난감으로 우리를 기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삶의 의미를 주고 싶어 하신다고, 이미 주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두가지이고, 이것을 제대로 갖출 때 나머지 쾌락, 명예, 권력, 재산이 자기 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고 가치있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바로 제가 성경에서 만난 하나님입니다.
* 나눔 질문
1. 행복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추구 중 나에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2.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삶의 목적’이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합니까? 당신은 이 두가지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또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생활양식, 경험과 체험, 탐구와 추구라는 문들 중 하나의 문으로 들어와서 진리, 풍성한 삶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우리들. 우리 앞에 있는 여러 장애물들을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제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볼 차례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여부와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념, 세계관의 문제이다.
1. 신에 대한 두가지 입장, 무신론과 유신론
1) 무신론, 신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 이들은 물질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연이라는 방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이 우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 물질 + 시간 + 우연 = 존재하는 모든 것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궁극적 진리나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 유신론, 신이 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입장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신이 의도적으로 질서 있게 창조하였고 인간도 그중 하나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유신론은 종교적 입장이고 무신론은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때문이다. 과학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꼭 필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과학으로 모든 질문에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신이 있는 것을 증명하면 믿겠다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이 없다는 것또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 혹은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신념 체계 또는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신념 체계, 세계관, 전제점은 우리가 철저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이나 중요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전제점, 세계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라고 했다. 과학이 눈에 보이고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을 연구한다면,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 특히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 진화론 옹호자인 리차드 도킨스와 같은 학자는 종교와 과학을 대립시킨다.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만 그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온다.
이처럼 무신론과 유신론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 개인이 선택해야하는 문제이다.
우리들도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야 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우주가 물질과 시간과 우연에 의해서 수십억년에 걸쳐서 형성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죽어서 물질로 돌아가는 존재인가? 죽임 이후의 삶은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아니면 이 세상은 초월적인 어떤 신에 의해서 특별한 목적과 원리에 의해서 창조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가?” 이것은 전제의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하는 질문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데 그냥 믿어라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런 질문이나 고민없이 믿을 때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이 전제, 세계관과 관련된 부분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유신론적 입장들을 가르는 중요한 축, 소통
이제 우리는 한 발 나아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우리는 이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통, 다른 말로 계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조금 단순화 시켜서 본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소통하는 신과 소통하지 않는 신이 있습니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의 일반적인 사상, 동양 철학의 입장은 신이라는 존재를 인격적 존재로 보지 않고 이 궁극적 진리가 인간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이것을 알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 대부분의 종교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살다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인생에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은가? 선과 악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그 답을 스스로 생각하고 명상하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고등 종교가 만들어집니다. 모든 문화의 중심에는 이런 고등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나 도가의 기본 개념이기도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깨달음에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구도의 과정을 거칩니다. 고행을 하기도 하고 장좌불와라고 해서 눕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성철 스님 같은 분은 8년 동안 한 번도 눕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매우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이나 진리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먼저 소통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통, 자기 계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성경책도 읽고 여러 경건 서적도 읽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진리 또는 하나님을 깨닫기 위해서 집도 떠나고 결혼도 하지 말고 철저한 금욕 수행, 장좌불와를 해야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노력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저의 지적 능력과 의지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셔서 우리와, 저와 소통해주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3. 이스라엘, 예수, 성경이라는 미디어
기독교에서 소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해야할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1) 그것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서 이야기했는데 누구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대상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으로 보면 중동지역에 위치하여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강소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셨을때는 세상에서 형편없는 가정,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불러내셔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야곱에 이르러서 기근을 피해 애굽에 이주했다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될, 종족 살상(제노사이드)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변변한 이름조차 없었던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가장 핍박을 받고, 고통스러운 상황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권력과 재력, 지혜와 도덕으로 무장한 민족이 아니라 당시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민족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시기에, 지금 이 땅 모든 사람에게 이 하나님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신 내용을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기록하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비천한 민족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바로 성경에, 구약의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특별한 지식을 받았음에도, 선민으로 율법과 할례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을 위한 분으로 사유화했고 결국 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열방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해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성경의 앞부분인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오해했고 배신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인간 눈높이에 맞춰, 인간이 하나님을 깨달아 더 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몸으로 보여주신 놀라운 소통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놀랍게도 당시 식민지 국가의 아주 가난한 동네의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비천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목수의 아들로, 평범 이하의 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정황속에서 함께 공감하던 이들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어떤 신적 경험이나 꿈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텍스트화되어서 신약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해서 그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고급 정보를 담아 인간에게 주신 미디어이기 때문입니다.
4. 성경과 함께 하는 영적 순례길
말씀드린대로 구약과 신약의 텍스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소통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랍니다. 이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의 여정은 바로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그들의 설명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라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또는 신)은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 나누어봅시다.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와 소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2)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하여 ‘성경’이라는 미디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3) 다음 성경 본문 가운데 세 부분을 골라 읽고, 거기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 본문들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음 만남에서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을 그것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다.
드라마, 아이돌 그룹, 운동을 좋아하는 분들은 만나면 그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그 드라마를 함께 보자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함께 듣자고, PT나 축구를 같이 하자고 초대한다.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는 그런 책이다. 회심을 경험하여 생명가운데에 자라고 그 풍성한 삶을 누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풍성한 삶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초대한다. 초대해야 한다. 이 책은 그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그곳으로 오리를 초대한다.
풍성한 삶으로 나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그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속에서 하나님과 자신, 이웃과 세상과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하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서 이 깨어진 관계, 깨어진 세상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만든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이며 이것을 받아들인 이들의 반응과 이후에 이 영적인 여정을 어떻게 해 가야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면서 공동체(교회)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삶을 맛본 사람만이 그 풍성함을 알기에 그것을 자랑하고 그 풍성한 삶으로 초대할 수 있다.
저자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성경의 기준으로 우리의 삶과 세상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누군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래의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다.
1)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2) 나는 어디에 있는가? Where am I?
3) 무엇이 문제인가? What is the problem?
4)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What is the remedy?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가이드를 제공해준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세상가운데 살고 있으며 그 세상속의 문제는 무엇이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살아가야하는지를 설명해준다.
물론 이것은 경주의 시작점(start line)에 우리를 서게 해주는 것이다. 경주로 우리를 초대하고 목표가 어디이며 그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경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이것이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중간 중간 물과 음식물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경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성한 삶으로의 경주에 초대한다.
1강. 세 가지 문과 세 가지 장애물
영적 여정, 진지한 구도의 출발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여정, 인생의 의미, 하나님을 찾아 들어오는데는 세 가지 문이 존재한다.
1. 세 가지 문
1) 생활 양식 : 모태 신앙, 입에 십자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그냥 기독교인이 되어 문화적으로, 생활의 일부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
2) 경험, 체험, 위기 : 인생의 위기나 어떤 특별한 경험, 영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함. 이들은 세상에서의 실패, 어려운 관계, 건강 악화등으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거나 인생의 고통을 경험하고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또는 실존적인 경험이나 아주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
3) 탐구, 추구 : 어떤 생활 양식이나 체험도 하지 않았지만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구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문을 통해서 들어왔던지간에 이 세가지 요소는 영적인 여정 가운데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태 신앙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스갯 소리로 신앙생활을 잘 못해서 ‘못해신앙'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만 기독교인이지 지적으로 동의하지도 않고, 특별한 경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초, 중, 고등학교 정도까지는 부모님을 봐서 교회에 출석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기독교가 이들에게 어떤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체험을 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봅시다. 특별한 치유의 경험이라든지 영적인 체험은 강력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강력한 자극이나 체험을 추구하다가 잘못된 가르침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좀더 진지하게 내가 믿는 내용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과정을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구도자로서, 추구를 통해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에 체험이 더해지지 않고 삶의 양식이 바뀌지 않으면 머리만 커진 기독교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냉철한 머리는 가졌을지 모르지만 뜨거운 가슴이 없기에 냉랭한 신앙이 되어버릴 확률이 큽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진리는 통합적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양식, 영적 체험, 탐구 등 어떤 문으로 들어왔든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이 선순환의 과정을 통해서 심화되어가며 균형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
2. 장애물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여정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가지 장애물을 소개합니다.
1) 기독교인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장애물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모습,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세상속에서의 모습이 일치 되지 않는 신앙인들
또한 기독교인이나 교회가 자신들이 어떤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는 자세로 다른 종교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무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인터콥, BTJ, 대적기도-땅밟기)
말만 있지 실제 삶의 모습이 없는 한국 교회, 이 시대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이 시대의 짐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구정물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순결한 아기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구정물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 한국 사회안에서 기독교가, 교회가 제대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통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며 또한 이 구정물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 구정물은 진리 자체에서 온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오용하고 악용한 타락한 사람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정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진리가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건재해 있습니다. 이 진리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애쓰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2) 지적 장애물
인간의 지성사는 게속 변해갑니다. 문화 역시 지속적으로 새로운 옷을 갈아 입으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사람들은 진리를 이해하려고 시대마다 다양한 시도들을 해 왔고, 이러한 수고가 인간의 철학사, 문명사, 종교사, 과학사에 축적되어 나타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주도하는 시대에는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는 절대권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일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라고 외치는 포스트모던 시대가운데 기독교는 유일하고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주지 않고 ‘무조건 믿어라’라고 강요하는 것은 지적 폭력이자 지적 태만입니다.
- 창조와 진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있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 질문에 성실하게, 진실되게 답변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냥 믿어지는 내용이 누군가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실존적 장애물
우리의 인생은 겉으로는 다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에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나 혹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의 인생에 이런 고통이 있을 수 있는가? 선하신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과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실존적 고통의 경험은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만 이 고통을 통해서 수많은 인간들의 진보가 가능했습니다. 철학과 예술, 종교적 추구가 이 고통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성숙하게도 만들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실존적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인생과 세상을 정직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실존적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가운데 나아가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디딤돌, 도약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적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문을 통과해서 여러 장애물을 거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솔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솔직한 질문을 하면 솔직한 답변이 주어진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세, 하나님에 대해서 언제든지 솔직하고 자유롭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솔직한 답을 발견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은 ‘세 가지 문’중에 어느 문을 통해 들어왔습니까? 지금은 어떤 과정에 있습니까?
2) 당신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찰스 콜슨은 미국의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특별고문으로 일했으며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975년 출소 후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했고 이는 전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내 삶에서 진정한 재산은 전과자라는 나 자신의 엄청난 실패, 바로 그것이었다. 교도소 복역 경험이라는 나의 커다란 치욕이 하나님께서 나의 생애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시기 위한 시작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전혀 영광스럽지 못한 경험을 가진 자를 선택하신 것이다."(38)
이 책의 앞 부분에 한 내과의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래 내용은 그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코른펠드(Boris Nicholayevich Kornfeld)입니다. 그는 내과의사였는데 1950년대 초 스탈린 시절에 정치적인 죄목으로 에키바스트츠에 있는 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수감자이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훨씬 나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런 오지에는 간수나 수감자 모두에게 의사는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평소 아주 혐오하던 한 간수를 수술하는 과정에서 그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 간수는 칼에 찔려 동맥이 끊긴 상태였다. 끊어진 혈관을 봉합하면서 코른펠드는 수술 직후에 꿰맨 곳이 바로 다시 터지게끔 특정한 방법으로 혈관을 봉합할 생각을 했다. 그러면 간수는 금세 죽게 될 것이고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이 특이한 복수과정을 상상하며 보리스 코른펠드는 그 간수와 그런 류의 인간들에게 가졌던 자신의 증오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모두 학살할 참이었다. 생각이 그쯤 이르렀을때 보리스 코른펠드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폭력성에 놀라 전율했다. 그렇다. 그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증오심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증오심은 코른펠드 자신속에 그칠 줄 모르는 또 다른 증오심을 부화시켰던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악순환인가!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던 바로 그 사악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코른펠드는 간수의 동맥을 제대로 봉합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료 그리스도인 수감자에게서 들어왔던 말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보리스 코른펠드는 수용소의 의사로서 몹시 고되고 희망없는 작업을 하는 동안 주님의 기도를 반복하며 진실할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다.
수용소의 의료부 의사들은 수감자들 중에서 수용소 당국의 비위에 맞지 않거나 혹은 이 수용소 구역에서 쫓아내고 싶은 자들을 좁고, 어둡고, 추운 고문실인 독감방들로 이루어진 처벌동으로 보내기 위한 진단서에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서명이란 해당죄수가 그러한 징벌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건강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위증이었다. 독감방에 갇힌 수감자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른 모든 의사들처럼 코른펠드 역시 지금까지 자신의 몫의 진단서에 서명해 왔다. 거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수용소 당국은 의사의 서명따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처벌을 합법화시킬 수 있는 많은 다른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가 귀하다 해도 당국에 협조적이지 않은 의사들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코른펠드는 주기도문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시작한 이후 수감자의 처벌을 합법화시키는 일을 멈추었다. 진단서에 서명한 것을 거부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그러한 서류 수백장에 서명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가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없도록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반항은 아주 위험천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른펠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당번 한 명을 고발한 것이다. 당번은 수용소 당국에 협조적인 수감자 가운데서 차출되었는데 수감자들은 이들을 간수보다 더 미워했다. 당번들은 배신자들이었고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수감자들의 음식을 훔쳤고, 누구든지 그것을 보고하거나 따지려 드는 사람이 있으면 손쉽게 죽여 버렸다. 반면 간수들은 당번의 이러한 권력 남용을 눈감아 주었다. 당국은 수용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이런 배반적인 인물들을 필요로 했다.
어느 날 수용소를 돌던 코른펠드는 펠라그라를 앓고 있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질병은 영양실조가 원인이었지만 악화되면 음식물을 전혀 소화시킬 수 없게 되고 굶어죽게 된다. 그 환자의 몸은 이병의 끔찍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은 검어지고 한쪽 볼은 깊게 멍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의 살가죽이 벗겨져 있었고 계속되는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감아야만 했다. 코른펠드는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환자에게 분유와 맛 좋은 흰 빵과 청어구이를 주었고 혈액 속에 영양주사를 놓았다.
코른펠드가 그 환자를 곁을 떠난 직후였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펠라그라 환자용 흰 빵을 훔쳐먹고 있는 한 당번과 마주쳤다. 그는 입안에 빵을 잔뜩 문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코른펠드를 올려다 보았다. 코른펠드는 환자용 급식이 도난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환자들이 회복되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 당번병을 고발하였다.
코른펠드가 당번의 비리에 대해 수용소장에게 보고서를 냈을 때 수용소장은 그 고발을 퍽 흥미로워했다. 최근 수용소에 연이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피살자들은 모두 고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누군가에 대해 고발한다는 것은 위험스럽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수용소장은 코른펠드이 고발을 접수하고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 해당 당번을 사흘간 처벌동으로 보내도록 조치했다. 수용소장으로서는 코른펠드가 죄수 처벌용 진단서에 서명해 주지 않는 것이 항상 골칫거리였는데 이번 사건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의사는 자신의 무덤을 판 것이다.
보리스 코른펠드는 특별히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고발한 그 당번이 처벌동에서 풀려나는 즉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뽑은 당번들에 의해 통제되는 막사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서 머물면서 짬이 날 때 적당한 곳에서 틈틈히 잤다. 그는 어느 순간이 그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불안 속에 지내는 그에게 엄청난 자유가 찾아왔다.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자 삶에 대해 자유로와졌다. 그는 더 이상 수감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서류나 진단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수용소 내에서 일어나는 가혹행위나 불법을 외면하거나 방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했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얼마 안가서 그는 자신의 영혼에서 분노와 증오, 폭력성이 사라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자유함을 알고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자기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보리스 코른펠드는 자신이 발견한 순종과 자유함의 새로운 삶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어느 흐린 오후 그는 대장암 수술을 마친 환자 한 명을 검진하고 있었다. 멜론처럼 생긴 머리와 고통스러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한 이 청년은 코른펠드의 영혼을 흔들었다. 청년의 눈은 슬픔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이미 수용소에서 보낸 오랜 세월이 깊게 새겨져 있는 그의 얼굴은 코른펠드가 이전에 보지 못한 깊은 영적 곤고함과 공허감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코른펠드는 이 환자에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환자는 마취약 기운 때문에 잠이 들었다 깼다 했으므로 이야기의 첫 부분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 코른펠드의 열정이 환자의 정신을 집중시켰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의사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의사는 그날 오후 내내 그리고 밤늦게까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새로 발견한 자유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환자는 믿을 수 없이 놀라운 고백을 자신이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술후의 통증이 몹시 심했고 뱃속은 녹은 납덩이가 누르듯 무겁고 아팠지만 그는 잠이 들때까지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젊은 환자는 수술실의 술렁거림과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가장 먼저 어젯밤의 그 의사를 떠올렸지만 그의 새로운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동료 환자가 코른펠드의 운명을 그에게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전날 밤 코른펠드가 잠든 동안 누군가 그에게 몰래 다가가 미장공의 망치로 그의 머리를 여덟 번이나 내리쳤다는 것이다. 동료 의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아침이 되자 머리가 깨진 코른펠드의 시신을 당번들이 싣고 나갔다.
그러나 코른펠드의 고백은 죽지 않았다. 젊은 환자는 그 의사의 열정적인 마지막 말들을 생각했다. 그 결과 그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자신이 그곳에서 깨달은 것을 전 세계에 말하게 되었다. 그 젊은 환자의 이름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다.
보리스 코른펠드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설을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조상의 신앙을 배신한 유대인이다. 여러 해 동안의 교육과 훈련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의사이다. 정치적 이상주의자로서 그의 유토피아의 꿈은 황량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묻혀져 갔다. 한덩이의 빵을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 고발하여 겨우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이다. 이 모든 면에서 보리스 코른펠드는 인생의 실패자였다. 적어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한사람의 실패, 그의 순전한 순종을 취하셔서 그를 전 세계를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며 당대에 최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가 될 인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셨다.
코른펠드이 말은 후에 솔제니친이 “민감한 현악기의 음률”이라고 부른 것처럼 솔제니친을 감동시켜 회개와 확신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솔제니친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만유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비록 나는 당신을 부인했었지만 당신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작품 「수용소 군도」에서 외쳤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따라 한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생명이 전이되는 영적인 수혈이었다.
코른펠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짧은 생애는 고립되고 제한되어 있는 환경에서 지낸 것이 전부이다. 여러모로 보아 그가 진단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일, 부패한 당번을 고발한 일, 중태 환자에게 몇 시간씩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일들은 모두 열매 없는 무익한 일 같고, 오히려 난폭자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만든 부질없고 어리석을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코른펠드의 신앙은 강하고 확실하며 진실한 것이었다.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과 성령님은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해주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순종하는 것, 믿음안에서 순전한 순종이었다.
바로 이 한 사람 코른펠드의 작은 날갯짓이 알렉산더 솔제니친이라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솔제니친을 통해 세계는 억압받는 러시아의 상황을 모두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분의 날갯짓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는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져 정신적 시계가 불확실한 밤바다를 표류하고 있다.(개정판 2000년)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부인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파라오의 압제 체제이며 급기야는 예언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극단적인 욕망 충족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지배 문화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 주는 한편, 왕권 의식으로 가득찬 지배 문화에 의하여 억눌리고 무기력해진 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책이다.
브루그만은 예언자를 단지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획일화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한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 예언자적 상상력의 얼개와 메시지
1) 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
오늘날 미국 교회의 정체성을 앗아가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앙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 일을 한다.
2) 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모세의 대항 공동체 구축 활동은 단순한 반체제적인 사회 활동과는 구분된다. 이 대안 의식은 첫째 체제 고착적인 질서의 신 관념에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대립시킨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관념을 역설한다.
3) 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예레미야를 모세적 의미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예언자의 전범으로 파악한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였다.
4) 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예레미야의 사역이 단지 근원적 비판을 넘어 가장 대담하고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한 목회였음을 역설한다.
5) 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브루그만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변혁하고 당대의 지배 문화였던 왕권 의식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논한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하나님의 친정통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통고하는 한편 당시의 지배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함의한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대표하는 몇가지 사역
첫째 예수의 용서 메시지와 용서 행위
둘째 예수의 안식일 이유
셋째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었던 예수의 밥상 교제
넷째 예수의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
다섯째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긍정과 존대
여섯째 세금과 빚에 대한 예수의 담론(마 20:1-16)
일곱째 예수가 성전에 대해 보였던 태도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6) 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그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이란 단지 낡은 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었다는 데 있다.
예수의 일의 핵심은 해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 현실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활성화였다.
둘째 예수의 목회도 근원적인 시작을 열어주는 활성화다.
셋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목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7) 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그의 예언자적 목회의 특징
첫째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에게 특별한 방식을 따라 행하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 빛을 비출 수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자세, 해석학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애통과 탄식을 피력함으로써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간다.
넷째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다섯째 이런 예언자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언자적 상상력, 근원적 신앙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강조한다.
* 예언자적 목회는 오늘도 가능하다.
결국 예언자적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능력과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창조적으로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내는 목회이다.
예언자의 서식지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사회, 경쟁과 탐욕으로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키는 도시의 소비 문화에 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누추한 삶의 자리다.
예언자적 목회는 기존 권력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후 정치적 유명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변두리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애통과 체휼 목회를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죽을 때까지 비영웅적으로 감당하다가 남몰래 죽는 목회다.
개정판 서문(2000년 성령강림절)
1. 1978년 발간 이후의 변화
첫째 비판적인 성서 연구의 경향과 방법의 변화
- 역사비평 -> 사회과학적 비평 -> 수사학적 비평(상상력)
둘째 자신의 관점의 변화
셋째 교회의 주변화(marginalization)
오늘날 필요한 일은 상대적으로 힘없는 예언자적 목소리에 본문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유롭고 과감하게 본문을 넘어 구체적 환경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상상적 방법들을 찾아주는 일이다.
2. 의심의 해석학을 적용
3. 예언자적이라는 말과 상상력이라는 말을 연결한 것이 아주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4. 하위 공동체의 특성
첫째 오래되고 이용 가능한 기억들
둘째 고통에의 감각
셋째 희망의 적극적인 실천
넷째 효과적인 담론의 방식
5. 신학적 상상력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고문과 성만찬)
성만찬이 고문에 맞서는 저항과 대안의 잠재적인 행위가 된다면, 성만찬적 상상력은 또한 소비 과용에 대해서도 잠재적인 저항과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판 서문(1978년 사순절)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라는 고정 관념으로 굳어진 예언자 상을 벗겨 낸다면 예언자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예언자들은 인간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또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깊이 이해했던 사람들이다. 예언자들은 변화의 가능성이 삶의 감정적 곤경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적 신념과 개인적 열망 사이에 존재하는 껄끄러운 부조화를 이해했다. 또한 말의 재능에 있어서 ‘말씀으로 새롭게’ 새일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1장_모세의 대안 공동체
오늘날 미국 교회는 미국의 소비주의 풍조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고, 그 결과 믿음이나 행동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소 있다. 이러한 문화적응(enculturation) 현상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포함해 교회의 삶 전반에 걸쳐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응이 나타나게 된 내적 원인은 우리가 신앙의 전통을 저버리고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는 활력을 주는 기억을 기초로 삼고 급진적 희망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기인한 현상이자 위협적인 요소로 대접받는다.
교회가 신앙 전통을 회복하고 나아가 그 전통을 문화적응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길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행동이나 믿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전통의 주장과 문화적응의 상황을 마주 세워 효과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이끄는 것이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다. 다시 말해 예언자란 전승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로서, 자기 고유의 인식 이론과 언어 체계를 갖추고자 전승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람이며 또 전승의 기억에 매우 정통해서 문화와 교회의 접촉점과 상충점을 날카롭게 식별하고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다.(50)
어떤 면에서 예언자들은 미래를 알리는 자이기는 하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미래란 현재로 치고 들어오는 미래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 탐색을 포기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일을 모두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는 현재에만 몰두했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우리를 둘러싼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예언자적 목회의 일차적 과제는 특정한 공정 위기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위기, 곧 우리의 대안적 소명을 무력화하고 길들여 버리는 위기와 씨름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성숙한 대안 의식은 지배의식을 해체(dismantle)할 목적으로 ‘비판’을 행한다. 다른 한편 성숙한 대안 의식은 신앙공동체가 나아갈 다른 시대와 상황을 약속해 줌으로써 개인과 공동체를 '활성화하는(energize)’ 일을 한다.
예언자적 목회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모든 목회 행위 속에 대안 공동체를 불러내고 형성하고 개혁하는 방식을 반영해야 한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비판과 활성화를 하나로 결합하는 일이다.
눈앞에 나타난 사회 정치적 현실이 너무나 근원적이고 불가해한 것이어서 생각나는 게 신학적 주장밖에 없을 때 예언은 탄생한다.
1. 승리주의와 억압에서 벗어남
모세와 이스라엘이 제국의 현실과 완전히 갈라선 것은 정적인 승리주의(static triumphalism) 종교로부터의 단절과 억압과 착취의 정치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모세는 이집트의 신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들이 사실은 힘이 없고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정적 승리주의의 종교를 해체했다. 제국의 신화적 주장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안 종교가 등장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된다.
이와 동시에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서 억압과 착취의 정치를 해체한다. 출에굽으로 이루어진 현실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라든가 새 종교 관념 또는 자유에의 비전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새로운 사회 공도체를 세우는 일로서, 이 공동체는 역사적인 조직을 갖추고 법을 제정하고 통치와 질서의 형태, 선과 악의 규범, 책임에 따른 처벌을 제정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제국의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벽돌공장의 압제는 인간 공동체에게 효과적이지 못하고 필수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인간의 정의의 정치와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와 긍휼의 정치 없이는 하나님의 자유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가 없이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2. 예언자적 비판
이스라엘은 체념의 한숨소리를 쏟아낸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면서 누군가 그것을 들어주고 응답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다.(출 2:23-25) 이스라엘이 애통하는데서 비판은 시작된다. 아픔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해체하는 비판의 중요한 첫걸음이 되고, 이러한 비판은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새로운 현실을 연다. 역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러한 울부짖음을 야웨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역사는 힘을 얻게 된다.
3. 예언자적 활성화
옛 현실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 바로 그곳에서 모세의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활성화는 희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활력을 되찾는 일은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되어 있고 이제 곧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 활력은 불가해한 어둠을 꿰뚫어 보는데서 생겨난다.
2) 하나님은 현실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요 편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요, 하늘의 회의 석상에서 보좌 가장자리로 달려 나와 자신의 특별한 관심사를 주의 깊게 헤아리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
3) 활력을 불어넣는 마지막 요소가 송영(doxology)이다. 송영 속에서 노래하는 이는 이 자유로운 분께 초점을 맞추며, 또 그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자신의 자유로 품게 된다…. 송영이 있는 곳에서만 긍휼이 자랄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자명한 원리로 주장되는 이데올로기를 송영이 깨뜨리기 때문이다. 또 송영이 있는 곳에서만 정의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노래가 두려움을 활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모세의 전승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주장한다.
1) 역사적이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매우 독특한 이 공동체 안에서는 대안적 삶이 이루어진다.
2) 이 공동체는 자체의 특별한 기억을 수단으로 비판하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기억에는 제국의 현실로부터 단절과 완전한 탈출이 간직되어 있다.
3) 그러한 기억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자신이, 제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좌우된다는 사실을 안다.
2장_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모세의 주된 관심은 대항 의식을 지닌 대항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었다.
또 모세는 기존 체제를 회개시켜 사회를 개선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려 새로운 현실이 등장할 수 있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 이 예언자적 상상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언어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노예와 산파들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하나님의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롭지 못한 다른 신들은 이미 다 굴복해 버린 상황에서 그 방법 외에는 정적인 승리주의 종교에 대항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예로 이루어진 소수자 공동체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억압적인 상황에 저항하는데 버팀목이 되어 줄 사회적 비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변두리 인생들이 당대의 억압적인 체제에 대항하면서 자신들을 받쳐 줄 합법적인 근거를 찾는다면 그 근거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이다.
솔로몬의 프로그램(왕과 왕조를 견고하게 세우는데만 관심을 기울인 이기적인 업적)
1) 하렘(왕궁 내에 둔 여인들만을 위한 생활 공간) : 정략적 결혼
2) 조세 구역의 정비
3) 체계적인 관료제도
4) 상비군의 설치
5) 지혜에 매료됨
6) 거대한 건설공사(성전, 왕국, 도시)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서 대안 의식이라든가 대안 공동체가 들어설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1. 풍요
솔로몬은 참으로 놀라운 복지와 풍요를 이루었다. 소비 사회속에서 대안 의식이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렵다.
2. 억압적인 사회 정책
왕실과 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을 동원하고 노동을 착취한 것이 이 체제가 취한 정책이었다.
3. 정적인 종교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성전은 왕의 도시 계획의 일부로 편입되고 하나님의 주권은 왕의 목적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억압적 정치와 풍요로운 경제는 서로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두요소를 떠받치는 토대가 하나님을 포로로 잡은 종교(religion of the captive God)이며 이 종교 안에서 모든 반대는 사라지고 왕과 그의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안정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유와 연관된 이런 긴장이 해소되어 버릴 때 종교는 사회의 통합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며 비록 다른 수단에 비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중 하나가 될 뿐이다.
솔로몬은 모세의 대항 문화에 완벽하게 맞설 수 있었다.
1) 그는 풍요의 경제로 평등의 경제에 맞섰다.
2) 솔로몬은 억압의 정치를 내세워 정의의 정치에 맞섰다.
3) 솔로몬은 하나님의 접근성의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에 맞섰다.
솔로몬 체제가 비판을 잠재운 방법은 첫째 엄격한 금지조치를 내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처벌을 동원하는 방법과 둘째 비판에 대해서 적절한 면역성을 키우고 귀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신학적 공헌 두가지
1) 창조신앙
2) 메시야 사상의 출현
창조 신앙과 메시야 사상은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에 긍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경향을 드러냈으며 현 체제를 강화하고 껄끄러운 언약의 문제들을 억누르는 역할을 감당했다.
제국 경제의 목적은 백성을 배부르게 만들어 그들이 눈뜨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다. 제국 정치는 거부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다. 제국 경제는 아편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아시는 그 참상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 폐쇄된 세계, 곧 혁명이나 변화, 역사, 약속, 희망이 없는 땅에 갇혀 있는 왕인 파라오는 숱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대표하는 모델이 된다. 모든 왕이 심지어는 모든 면에서 탁월했던 솔로몬 까지도 이렇게 고착되고 폐쇄되어 버린 세상을 부러워한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는 춤추는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으며, 어떠한 신음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분은 제국에서는 신임을 받지 못하고 법정에서는 무시당하고 성전에서는 배척당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외된 인생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그곳에서 그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섭정을 자처하는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격정과 파토스를 통해 자신의 품격을 드러내시며 돌보는 권세요 울 수 있는 능력이자 애통하며 기뻐할 수 있는 활력으로 다가오신다.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돌보고 눈물 흘리고 애통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왕의 완력이나 굳은 마음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왕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왕권 의식은 실현가능한 배부름에 몰두했다. 예언자적 대안 의식은 언약과 관련한 파토스와 격정에 전념했다. 왕권 의식은 실현 가능한 배부름이라는 프로그램을 수단으로 인간다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규정했고 나아가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했다. 왕권 의식은 오직 자기 만족밖에 모르는 자기 중심적인 의식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기억하기를 요구하는 전통, 우리가 응답하기를 바라는 권위, 우리가 돌보기를 요청하는 공동체는 이 왕권 의식에 의해 정당성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현실에 맞서서 일어설 수 있는 수단이 모세의 혁신에서 비롯된 예언자적 말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3장_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우리는 왕권 의식에 확실하게 맞설 수 있는 대안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예언자적 상상력의 패러다임으로 고려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진정한 역사적 새로움을 상상하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을만큼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가 물어야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성취에 앞서 상상력이 와야 한다. 우리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힘이 있지만,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기도 하다. 어떤 것이든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왕권 의식이 상상력을 억눌러 버린다. 상상력은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가를 두려워한다. 예언자의 소명은 상상력의 목회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해주는 일이요, 또 왕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라고 주장하는 그 단일한 미래를 대신할 미래를 그려내고 제시하는 일이다.
왕권 의식은 사람들을 무감각 상태로, 특히 죽음에 대한 무감각으로 몰아간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예언자적 목회와 상상력의 과제다.
솔로몬의 체제는 격정의 상실을 초래했다. 격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돌보거나 아파하는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왕들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고 자기의 작은 모래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괜찮아 잘 될꺼야라고 말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의 과제는 이러한 무감각을 깨뜨리고 자기기만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이요, 그렇게 해서 종말의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과제
1) 무감각하게 만들고 부인하도록 강요하는 두렵고 거대한 경험에 맞서 싸우는데 적합한 상징을 제공한다.
2) 예언자적 과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부인되고 철저하게 억눌려 와서 있는지조차 몰랐던 바로 그 두려움과 공포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은유의 언어로)
3) 예언자의 과제는 우리를 억누르고 내면으로도 좀먹고 있는 실질적인 죽음의 운명을 은유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종말의 공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무너졌음을 밝혀내고, 상대방을 희생시켜 나를 보호하려는 경계선과 사회 서열을 분명히 드러내며, 굶주린 형제자매의 식탁을 갈취하여 내 배를 불리는 끔찍한 관행을 폭로하는 일이다. 예언자의 사명은 왕에게 그가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일을 경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1. 예레미야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모델은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요구한 것은 단지 왕의 공동체가 자기의 현실을 바르게 경험하고, 그래서 종말 앞으로 다가서는 일뿐이었다.
예레미야의 애통은 두가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그의 애통은 자기 백성에게 닥친 종말을 슬퍼한 것이었다. 둘째 예레미야에게는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어느 한 사람도 듣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 8-10장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 법인데 유다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은 울 때다. 지금은 죽음의 때인데도 백성을 그런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가려고 하지 않는 자리, 그에 앞서 호세아만 뛰어들었던 자리, 곧 하나님의 고통으로 돌진했다. 야웨는 이제 파괴하거나 벌을 내리는 적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식 곁에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어버이이다. 골고다 언덕의 마리아나 압살롬 앞에 엎드린 다윗처럼, 죽은 이 곁에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외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비통해 한다.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과격한 행동과 분노로도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은 눈물이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연대의 형식이 무너져 버렸을 때 눈물은 고통을 나누는 연대의 방법이다…. 고칠 수 없는 질병, 깨진 언약, 힘을 잃은 활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비판을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알았다.
죽음의 현실을 끌어안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그의 말 속에는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위로받지 못하며, 종말에 마주서지 않는 사람은 시작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모세를 따르는 예레미야는 무감각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사실, 곧 애통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장_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예레미야가 보여준 가장 근원적 비판은 ‘죽음에 대한 애통’이다.
예언자적 대안 공동체는 비판과 동시에 활성화에 관여한다. 우선 이 공동체는 지배 의식은 끝나고야 말 것이라는 점과 지배 의식은 우리에게 최종적 권한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생생한 신앙과 생명력을 유지하게 해 주는 대안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제다.
왕권 의식은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의 과제는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우리의 역사 속에 작동하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붙잡게 해주는 것이다.
1. 억눌린 희망
왕권 의식은 희망을 가로막는다.
솔로몬이 성공한 이후에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영에서 소외되어 갔다.
2. 새로운 시작을 거부함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 멸망이후 왕권 의식은 자신에게 아무 자원도 남아있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시작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들고 사물이 현재 존재하는 방식만을 완강하게 고집할 수 밖에 없었다.
목회가 풀어야할 문제는 희망을 부인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말하고 내세우고 행할 만한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3. 절망을 뚫고 들어가기
세가지 행동을 제안
1) 상징들
절망의 상황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한 상징들을 제공하는 것
예언자는 자신들의 왕에게 절망한 공동체에게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희망의 상징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일 수 없고, 특정한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어야 한다.(사라의 잉태, 출애굽)
예언자의 두가지 과제로는 첫째 이 백성의 기억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희망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 언어와 말과 언어와 글귀가 어떻게 의식을 형성하고 현실을 규정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에 의하면 참된 세상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서 시작되고 그 말씀에서 원동력을 얻는 세상이며 이러한 기준은 왕들이 자기 말 이외의 말은 모두 잠재우려고 애쓰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희망과 열망
예언자적 상상력과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희망과 열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희망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배워온 모든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전복적인 성질을 지닌다.
희망은 성만찬을 통해 실연된다.
희망은 예언자가 사용하는 으뜸가는 어법이다.
예언자적 희망은 쉽사리 왜곡되기도 한다.
희망에 대해 가장 힘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경험한 사람이다.
3) 현실을 재규정하는 새로움
예언자들은 희망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 말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상황을 재규정하는 참된 새로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4. 경탄의 언어
왕의 절망과 자포자기를 꿰뚫는 희망으로 가득한 예언의 언어는 경탄의 언어다. 애통의 언어가 무감각의 언어에 맞서듯이, 경탄의 언어는 절망의 언어와 맞선다.
- 제2이사야(140)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장례식으로 나갔던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 시인(이사야)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왕의 대관식 축제로 안내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절한 비탄 속에 내버려 두는데 반해,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활기 넘치는 기쁨으로 인도한다. 제2이사야는 외적인 정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상상력을 되찾는 일을 하고 있다.
이사야 52:7 (NKRV)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권력을 잃어버린 듯 했던 분이 이제 다시 그 자리에 앉는다. 예레미야서에서는 패배하고 슬픔에 빠져 버린 듯했던 분이 이제 역사를 뒤집어엎는 분으로 나선다. 그리고 시인은 실권을 회복하는 일은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사 49:14-15)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신앙을 새롭게 했다. 온전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하며 낡은 체제들을 해체하고 지친 권력자들을 무너뜨리는 일만이 정말 필요하고 제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성화다. 탄식은 참된 왕이 힘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데 반해, 송영은 거짓 왕을 거부하고 참된 왕을 신실하게 받아들인다.
1) 새 노래
새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새 노래를 부르는 때다.
이사야 42:10 (NKRV)
10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1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3) 양식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 제국의 빵에 굴복할 수 없다. 이 시인이 말하는 빵은 바빌론의 빵집을 허물어 버린다.
이사야 55:1–2 (NKRV)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는 새 노래, 다산, 신선한 빵의 은유를 통해서 절망에 사로잡혀 버리는 대신 절망에 맞설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제공해준다.(남북 철도 연결, 반도에서 대륙으로의 상상력)
기꺼이 자신의 주권적 자유를 포기하셔서 우리를 위하기도 하고 우리로부터 거리를 두기도 하는 다른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절망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소망을 품은 이에게 역전이 허락되며, 이제 그들은 새 힘을 얻고 솟구쳐 오르며 뛰고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일들은 소망 가운데 존재한다. 소망은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 받는 것이며, 감춰 두는 게 아니라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토스와 경탄의 시인들인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를 서로 따로 떼어 놓아서는 안된다. 예레미야만 받아들인다면 신앙은 하나님을 뵐 수 없는 죽음의 자리로 떨어지게 된다. 제2이사야만 의지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분명 아파하는 사람만이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고뇌를 통과하지 않은 새 노래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 되고 더 심하게는 왕의 속임수가 되어 버린다.
5장_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지배 의식은 철저히 비판받아야 하고 지배 공동체는 완벽하게 해체되어야 한다. 대안 의식을 지닌 대안 공동체의 목적은 그러한 비판과 해체를 이루는 데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비판의 특징적인 어법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이다. 이 어법의 요점은 자신의 고뇌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공동체로 하여금 그 고뇌에 뛰어들게 만드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인품을 통해 왕권 의식에 대해 궁극적 비판을 가했다. 실제로 그분은 지배 문화를 해체했고 그 문화의 주장을 무효화했다. 그분이 궁극적 비판을 행한 방식을 보면, 변두리 인생들과 단호하게 연대하고 그러한 연대를 통해 그들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방식이었다.
1. 예수의 탄생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마태복음(2:6-23)과 누가복음(2:17-20)의 두 판본은 비판을 통해 해체하고 경탄을 통해 활성화함으로써 서로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다.
누가의 판본이 다가오는 새로움을 축하하는데 반해 마패의 판본은 이야기의 한 가운데 애통을 배치한다. 새로움은 고뇌와 고통과 눈물 없이는 오지 않는다.
2. 하나님 나라의 선포
막 1:15절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 선포 속에는 그와 대응부를 이루는 현존하는 나라들은 끝이 나고 대체될 것이라는 내용도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복음은 위협하지 않고는 약속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끝내지 않고는 시작하지 않으며,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는 선물을 주는 법이 없다.
*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행동
1) 용서
2) 안식일
3) 밥상 교제
4) 치유와 귀신축출
5) 여성
6) 세금과 빚
7) 성전
3. 긍휼
예수는 변두리 인생들과 연대를 이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근원적 비판이 겉으로 나타난 한 형태가 긍휼이다. 아픔은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문제요, 아픔이란 인간됨에 따르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정해서는 안되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긍휼이기 때문이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무감각할 필요가 있다. 군국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은 전쟁의 대가로 생명이 희생되는 일에 사람들이 무감각하기를 원한다. 법인체 경제는 빈곤과 착취라는 대가에 사람들이 무지하기를 원한다. 정부와 지배 계층은 무감각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다. 예수는 긍휼을 가지고 이 무감각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긍휼을 수단으로 삼아 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린 이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를 폭로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긍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애간장이 녹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나 심정을 보듬어 주는 것을 말한다.(마 14:14, 막 6:34, 막 8:2, 눅 7:12-13, 마 9:35-36)
소외된 이들이 당하는 아픔을 나의 일로 품는 일은 특히 호세아서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애통의 전승을 따른 것이다.
* 긍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마리아 인의 비유(눅 10:33)와 탕자의 이야기(눅 15:20)
무감각 대신 긍휼을 내세우는 행위, 곧 냉소적인 무관심을 끝내고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일은 사회적 혁명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예수는 지배문화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 문화에 임한 파멸적 종말을 폭로하는 권세를 행사한다. 현 질서의 희생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긍휼이며, 지배 문화는 이 긍휼을 묵인하거나 받아 들일 수 없다. 지배 문화가 자선과 선의는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연대하는 일은 막을 수 없다.
듣고 볼 수 있게 된 고난은 희망을 낳으며, 겉으로 표현된 애통은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수의 역사는 고통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분명한 목소리로 표현해 낸 역사인 것이다.
* 고통을 통해 구제화되는 예수의 근원적 비판
나사로의 죽음(요 11:1-57)의 이야기와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린 이야기(눅 19:41-42)
예수가 예루살렘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나사로를 위해 흘린 눈물처럼 죽음에 대한 고뇌를 함께 나누는 행위다. 나사로가 죽은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았다면 예루살렘 죽음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
4.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에수는 죽음의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끌어안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 비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당해야할 죽음을 끌어안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비판은 대항하여 맞서는 일이 아니라 함께 서는 일이다. 궁극적 비판이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찬 비판이 아니라 격정과 긍휼로 이루어지는 비판이다.
1) 수난 고지
2) 십자가 위에서 한 말
3) 기독론적 찬양(빌 2:5-11) :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 복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비운 이분은, 다른 누구도 감히 엄두도 못 낼 권위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허락하는 최상의 권력자다.
5. 정의와 긍휼의 정치
십자가 처형은 모세가 파라오와 맞서 싸운이래로 예언자적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해 온 해체를 완벽하게 성취한 사건이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무기삼아 억압의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목회와 죽음이다. 모세처럼 예수도 하나님의 자유, 곧 당신의 뜻대로 생명을 베푸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 자유를 무기 삼아 하나님을 포로로 삼은 종교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목회와 죽음이다.
예언자적 비판은 애통하는 사람만이 위로받을 수 있음을 알며, 따라서 몰락하는 이 세상을 위해 어떻게 하면 진지하고 신실하게 애통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예수는 예레미야가 그렇게 통렬하게 느꼈던 고뇌를 이해했고 몸으로 구현했다.
6장_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대안 의식을 지닌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은, 지배 공동체를 비판하여 완벽하게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 공동체의 목적으로서 해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어주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동, 특히 십자가 처형을 통해 왕권 의식을 해체했으며 그의 공동체에게 그 해체를 슬퍼하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이 냉혹한 현재가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가능한 실존 상태라고 믿고 있을 때에 이 궁극적 활성화는 그들에게 미래를 열어주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 새 미래가 열렸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경탄이었다.
1. 예수의 탄생
예수의 탄생은 특히 누가에 의해 새로운 사회 현시로 향하는 결정적인 활성화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그 시대의 통치자들과 대립하는 천사들의 노래를 통해 알려진다. 로마는 예측하지 못했고 헤롯은 막을 수 없었던 이 새왕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 역사는 모든 왕권적인 옛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 시작은 옛 질서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시작은 옛 질서의 희생자들로부터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여인(엘리사벳), 결백하지만 믿음으로 행한 젊은 여인(마리아), 말문이 막혀버린 늙은 남자(사가랴),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가운데서 시작이 이루어진다. 이 사람들은 깊은 슬픔을 알았던 사람들이기에 경탄을 체험하는 기회를 누린다. 이렇게 경탄은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죽음을 애통할 줄 모르는 옛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움은 설명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설명한다는 것은 왕의 옛 범주들 속에 강제로 집어넣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활력을 일으키는 희망은 설명과 이해에 능숙하지 못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자기들로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허락된다.
2. 예수의 목회
예수의 목회란 아무것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 바로 그 때에 근원적 시각을 열어주는 활성화다.
탄생은 희망만을 담고 있으나, 목회는 그 희망의 가능성이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자리가 된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생명을 부어 주었던 예수의 치유에 대한 반응은 찬양의 성격을 띠는 경탄으로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은 동시대인들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었기에 그 반응은 부정과 저항과 분노의 성격을 띠는 놀람으로 나타났다. 한편 미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다른 한편 예수가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데 분개가 쏟아진다. 어떤 경우든 그의 목회는 무력한 옛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격정과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3.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은 주도면밀한 음모에 의해 부인되어 왔던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밝혀냈으며 이 일을 통해 근원적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가르침이 오히려 행위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그의 행위를 통해서는 암시적으로만 드러났던 과격한 도전과 근원적 변혁의 의미를 그의 가르침이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구분이 무너지고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일이다.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사람들을 병자와 죄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일은 더 큰 일이다. 가르침이 행동과 나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르침에 구체성과 현실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과 마찬가지로 가르침도 부수고 열고 초대하는 일을 한다. 가르침은 막혀버린 미래를 열어주고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일이 가능함을 알려준다.
화의 선언은 죽음을 예견하고 선포하고 있으며, 가장 근원적 비판이 된다. 복의 선언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말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4.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미래를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부활은 지금까지 존재한 현실에 근거해서는 설명이 안된다. 부활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경축하는 일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절망 가운데서 경탄하게 해 준다.
부활은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는 예언자적 활성화의 궁극적 행위다. 부활은 죽은 이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진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새 역사는 사람들에게 새 정체성(마 28:19)과 새 윤리(마 28:20)를 제공한다.
7장_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1. 요약
출애굽과 모세의 운동을 통해 역사 속에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해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과 탄식으로부터 시작되고 활성화는 새로운 공동체의 송영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지키는 데 관심을 둔 군주 체제는 비판을 잠재우고 활성화를 차단하기 위해 힘을 동원한다. 한편 왕권 의식에 맞서 예레미야는 근원적 비판을 수행한다. 예레미야는 장례식이라는 그림을 통해 죽어가는 이스라엘의 애통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이 일을 수행하고 제2이사야는 왕권의식에 맞서 근원적 활성화를 수행한다. 그는 대관식이라는 그림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의 경탄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예언자이자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로 해체를 성취하셨고 부활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미래를 활성화하셨다.
2. 목회
예언자적 목회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일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거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 목회는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로 구성된 회중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아닐지는 몰라도 예언자적 목회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지원하지 않는다.
예언자적인 목회는 거창한 사회개혁 운동이라든가 의분을 쏟아내는 비판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적 목회란 대안적인 현실 인식을 제공하는 일이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또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자신들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유라든가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제가 언제나 그 시대의 가장 큰 쟁점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함께 살고자 노력하고 공통의 미래와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그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 예언자적 목회의 특질
1)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이 하는 일은 다른 일이요 다른 방신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다. 이 대안 공동체는 지배 공동체와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2)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또한 어떤 상황에도 빛을 밝혀 줄 수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 자세, 해석학을 다룬다.
3) 예언자적 목회는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가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게 해 준다.
우리가 흔히 무감각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화와 분노인데, 오히려 애통과 탄식이 무감각을 깨뜨리는 데는 훨씬 더 효과적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은 고통의 현실을 가라앉게 만들고 죽음을 몰아내는 방법이 된다.
4)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미래를 믿고 그 미래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확증해 주는 말과 몸짓과 행동만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3. 선물로 받는 근원적 신앙
근원적 신앙은 공로가 아니다.
예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있었다. 예수는 매우 변증법적인 두 시대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는 현재의 세상을 유일한 세상이라 여기고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을 수 없다. 또 현재에는 무관심한 채 미래만을 갈망하는 탈세상적인 사람들과도 다르다. 현재에 미래가 임할 수 있도록 애통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기들에게 죽음이 임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해야 할 일이 있다.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힘이나 자유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애통할 일이 있다.
애통은 기쁨에 이르는 형식적이고 외적인 요건이 아니라 유일한 문이자 통로가 된다. 울고 웃는 일에 관한 예수의 말은 한낱 멋들어진 경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 전체의 요약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애통하는 배울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사회의 현실에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애통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애통해하는 분이며, 그분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하기 전까지는 기뻐하기를 미루시는 분이다.
실천 후기
예언자적 상상력을 한낱 멋진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교회의 예언자적 증언은 목회의 특정 기능이나 다른 어떤 일과도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예언자적 증언이란 정신적 태도를 뜻한다.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세상사를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항 문화적인 의식이다.
교회의 모든 기능은 다 예언자적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으며, 그 예언자적 목소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배 문화를 향해서 비판을 가하는 한편 신앙인들에게는 활력을 불어넣는 데 봉사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목회적 돌봄은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설교도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교회 학교의 교육도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본질적 문제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그 시대의 문화에 사로잡혀 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 일이다. 하나님 말씀의 전체 계획에 신실하고자 애쓰는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 체는 우리 시대의 지배 문화가 펼쳐 놓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된다
동성애에 대한 두 가지 견해(IVP, 윌리엄 로더, 메건 드프린자, 웨슬리 힐, 스티븐 홈스)
일단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 견해라면 동성애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책 전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여기에 등장하는 4명의 견해가 두가지로 크게 나뉘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에 한 사람도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네명의 저자를 크게 둘로 나누면 윌리엄 로더와 메건 드프란자는 성경적, 신학적으로 동성 결혼까지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웨슬리 힐과 스티븐 홈스의 경우에는 결혼은 출산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동성 결혼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웨슬리 힐 본인이 게이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성서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동성애를 느끼는 것과 이것이 동성간의 성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책의 구성은 각각의 저자가 본인의 입장을 주장하고 나머지 세 명이 각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비평을 하고 이 비평들에 대한 저자의 반론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 비평의 과정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깍아내리지 않고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깊고 중요하다.
한국 기독교는 동성애라는 주제에 대해서 매우 과격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동성애를 반대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서 겸허하게 듣고 이것에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서문(프레스턴 스프링클)
휴거나 전천년설이나 방언 등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논쟁을 벌이는 다른 문제들과는 달리 동성애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건드린다. 동성애가 그저 쟁점이 아닌 것은 사람이 단순한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결혼,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성경 본분이나 교리나 성경 신학적 주제의 영향을 받은 쟁점들이다. 동성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의 맥락이 되는 고대 근동 사회와 그리스-로마 사회를 파고들어야 하며, 동성 관계에 대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관점을 연구해야 하며, 심리학과 사회학과 생물학의 최근 연구들을 참고해야 한다. 또한 동성애는 들을 줄 알아야 하는 문제다. 실제 게이와 레즈비언과 양성애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저자들 소개
1) 윌리엄 로더 :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의 섹슈얼리티 전문가,
- 동성애 관계를 긍정하는 입장
- 성경은 동성애 관계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윤리에 성경을 적용할 때는 생물학, 인류학, 사회학 등 섹슈얼리티와 젠더와 관련한 다른 분야들의 학문적 성과를 고려해야 한다. 해석학적, 윤리학적 이유에서 로더는 신실하고 배타적인 동성간 관계는 신성하다고 인정한다.
2) 메건 드프란자 : 성,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신학적 연구의 전문가
- 성경의 금지 본문은 인신매매, 경제적 착취, 젠더와 사회 계급의 이해에 얽힌 서로 다른 권력들이 지배하던 고대 성 문화의 배경에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 본문은 서로 합의한 배타적 동성 간 결합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3) 웨슬리 힐 : 성서학자, 신학자, 게이 그리스도인
- 동성애 관계를 긍정하지 않는 관점에서 주장, 금지 본문들을 결혼, 성, 출산에 대한 신학의 지배적인 입장(아우구스티누스)과 대비시킨다.
4) 스티븐 홈스 : 조직 신학자
- 아우구스티누스의 결혼에 대한 견해를 기초로 동성 커플은 출산을 할 수 없기에 동성 간 관계는 성과 결혼의 신성함에서 배제된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목회적인 입장에서 이혼 후에 재혼한 이성애 커플들을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받아들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교회가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들을 목회적으로 수용할 어떤 가능성을 살펴본다.
제1장. 동성애와 성경(윌리엄 로더)
최근 들어 점점 커밍아웃,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타나시우스(295-373, 추정)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여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악렉산드로스의 비서가 되면서 제 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예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이단사상에 맞서 삼위일체를 수호했다. 이후 30세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어 46년간 섬겼다. 성경적 기독론을 수호하기 위해서 ‘콘트라 문둠(contra mundum)’, 즉 ‘세상에 대항’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의 묘비에는 ‘아타나시우스 콘트라 문둠(Athanasius contra mundum), 즉 ‘세상에 맞선 아타나시우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는 아리우스의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괴롭힘으로 교구장직을 박탈당하고 17년동안 추방이나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굽히지 않고 정통신학을 개진하고 옹호하는데 힘썼으며, 신약 성경 정경의 목록을 27권으로 제안했댜. 세상을 떠난지 8년후인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되었다.
아나타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
이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싸운 정통 교회의 용사인 아타나시우스(293-373 A.D.)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비록 아타나시우스가 이 신경을 기록하지 않았고, 이 신경에 그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지 않을지라도, 이 신경은 계속해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왜냐하면 17세기까지 이 신경이 그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불리었기 때문이다. 이 신경은 라틴어 원본의 첫 단어를 따라 "Quincunque" 혹은 "Quincunque vult"라고도 부른다. 시작하는 문장(1-2)과 끝맺는 문장(42)을 제외하고, 이 신경은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첫 단락은 정통 삼위 일체 교리를 진술하고(3-28), 두 번째 단락은 그리스도의 교리, 특별히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다룬다(29-41). 어거스틴(354-430 A.D.)의 가르침은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단락의 배경을 형성한다. 그리고 칼세돈 공의회(451 A.D.)의 결정은 기독론적 단락의 배경을 형성한다. 이 신경은 6세기 초반부에 처음 나타났으나 그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신경은 원래 서방 교회의 것이고, 동방교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1.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2.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손상됨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3. 이 보편적인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4. 삼위가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5. 왜냐하면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7. 성부께서 계심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8. 성부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9. 성부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0. 성부께서도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11.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고 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12. 또한 세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 아니시고 세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고, 한 분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고, 한 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3. 동일한 방식으로, 성부께서도 전능하시고,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십니다.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인 세원으로 삼아야 한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후반에 사회를 풍미하던 통설, 즉 인구의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사회가 고도로 진보하는 가운데 극심한 가난이 존재하는 원인은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지대를 조셀 징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이후 많은 이상주의자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각국의 토지제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도입부 : 문제의 제기
금세기(19세기)의 특징은 부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거했다는 점이다. 증기와 전기의 이용, 개선된 생산공정과 노동 절약적 기계의 도입, 고도의 분업과 거대한 생산 규모, 교환의 눈부신 발전 등으로 인해 노동의 효율성이 대폭 높아졌다.
새로운 힘에 의해 사회가 근본에서부터 개선됨으로써 극빈층도 전혀 부족함을 느낄 수 없고 최하층도 생활물자의 결핍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상상의 눈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못 크는 일이 없고, 노인이 물자 부족으로 시달리는 일이 없으며, 젊은이는 열심히 일하는 한편 찬란한 별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인다. 악은 사라지고 불화는 조화로 변한다. 모든 것이 풍족한 곳에 어찌 탐욕이 있을 것인가? 빈곤이 사라진 세상에, 빈곤 또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인 죄악이나 범죄나 무지나 잔인함이 어찌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자유인인데 누가 굽실거리며 살 것인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에 어찌 압제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꼬리를 무는 발견과 발명도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계층의 고된 일을 덜어 주지 않았고 빈민에게 생활의 여유를 주지도 않았다…. 문명 세계의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불황, 비자발적 실업, 자본의 낭비, 기업인의 자금 부족, 노동자 계층의 빈곤과 불안이다.(29)
산업불황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는 각종 현상은 물질적 진보에 항상 수반하며 물질적 진보가 진전될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 강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진보가 이루어지는 곳에 빈곤, 빈부격차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한 논점도 피해가지 말고 어떠한 결론이 나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기로 하자. 우리는 진정한 법칙을 찾아야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우리 문명의 한 가운데서 여인들은 생기를 잃고, 어린이들은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칙이 어떤 내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못된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이 우리의 편견과 충돌하더라도 움츠리지 말자. 그 결론이 오랫동안 현명하고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여 온 제도를 부정하더라도 되돌아서지 말자.”
제 1권. 임금과 자본
1장. 현재의 임금학설-그 불충분성
“생산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왜 임금은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가?”
현 정치경제학에서는 임금은 노동자의 수와 자본의 양 사이의 비율에 의해 정해지는데 노동자 수는 자본이 증가하는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자의 생존과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최저 금액으로 낙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 임금기금설 : 임금으로 지급되는 자본이 정해져 있다라는 이론이다.
임금이론을 지지하는 여러 연구의 논리를 귀납이 아니라 연역(임금이 자본에서 나온다는 이론)적인 접근에서 나왔다.
헨리 조지가 증명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나온다.”
현대의 복잡한 생산과정을 단순화시켜보면 사회의 모든 생산은 각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각자가 자기 노력에 대해 받는 보상은 원시인이 그랬던 것과 같이 노력의 결과로 자연으로부터 얻는 것임을 알 수 있다.(48)
2장. 용어의 정의
임금 : 고용된 사람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는 대가
노동 : 부를 생산하는 모든 인적 노력을 말하고, 임금은 생산물 중에서 노동에 돌아가는 부분으로서 인적 노력에 대한 모든 대가를 포함한다.
생산의 3요소 : 토지, 노동, 자본
- 토지 : 물이나 공기와 구별되는 지구의 표면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물질적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 자연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자본으로 분류될 수 없다.
- 노동 : 모든 인적 노력
- 자본 : 토지나 노동을 제외한 것으로 이 두가지의 결헙에 의해 생산된 것.
모든 자본은 부이지만 모든 부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자본을 교환 과정에 있는 부라고 정의한다면, 그리고 이때의 교환이 단지 거래뿐만 아니라 자연의 재생산력 내지 변형력을 통해 부를 증가시키는 것과 같은 변환까지도 포함한다면, 일반적으로 자본이라고 하는 내용을 모두 포괄할 수 있으며 자본이 아닌 것을 모두 배제할 수 있다.(67)
3장.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언제나 생산은 임금의 어머니이다. 생산이 없으면 임금은 생기지도 않고 생길 수도 없다. 임금의 원천은 자본이 아니라 노동생산물이다.(75)
- 헨리 조지는 ‘임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아담 스미스의 명제를 공격한다.
가치는 생산물이 완성되어야만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 창조는 생산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노동 투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생하며 따라서 생산 과정이 아무리 길더라도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임금을 받기 전에 자본을 증가시킨다.(83)
임금 지불의 조건은 언제나 노동의 제공이며, 생산 과정이 아무리 길더라도 임금 지불은 자본의 선불이 아니고 잠시라도 자본을 줄이지 않는다.(84)
4장. 노동자의 생계비도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은 “한 나라의 국민은 현재 노동의 생산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거 노동의 생산물에서 생활물자를 공급받는다”라고 말했다. 헨리 조지는 이 명제가 자본에 대한 잘못된 정의로부터 기인하였다고 주장한다.
음식이나 옷 등 모든 종류의 부는 이를 소비하지 않고 다른 상품 내지 생산적 서비스와 교환하려는 사람이 보유하고 있을 때에만 자본이며, 소비할 사람의 수중으로 넘어가면 자본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다른 부를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보유하는 부에서부터 욕구 충족의 목적으로 보유하는 부로 바뀌기 때문이다.(90)
“소비에 대한 수요가 생산에 투입될 노동의 방향을 결정한다.”(94)
5장. 자본의 진정한 기능
자본이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나 생산 기간 중 노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다면 자본의 기능은 무엇인가?
자본은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로서 욕구의 직접적 만족을 위해 사용되는 부와 구별된다. 혹은 교환과정에 있는 부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노동에 의해 부로 전환되는 원료를 공급하지 않는다. 부의 원료는 자연에 의해 공급된다. 그러나 일부 가공된 원료와 교환 과정에 있는 원료는 자본이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임금을 공급하거나 선불하지 않는다. 임금은 노동의 생산물 중에서 노동자가 획득하는 부분이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작업 기간 동안 노동자의 생계를 유지시켜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계가 유지되며, 자신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자와 교환될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사실상 자신의 생계용 물자를 생산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통설과 달리 산업을 제약하지 않으며 산업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천연 원료에 대한 접근의 제약이다. 그러나 자본도 도구 사용과 노동 분업을 제약함으로써 산업의 형태와 생산성을 제약할 수는 있다.(99)
정치경제학에서 ‘자본은 산업을 제약한다’고 하는 격언은 자본이 노동의 형태나 노동의 생산성을 제약한다는 뜻이 아니고 노동의 투입을 제약한다는 의미이다. 이 명제가 타당하려면 자본이 노동에 원료와 유지비용을 공급한다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정에 근거가 없다는 점은 이미 검토하였다. 자본은 노동에 의해 생산되며 따라서 자본이 존재하려면 노동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가정이 명백히 앞뒤가 맞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자본은 산업의 형태와 산업의 생산성을 제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자본 없이는 산업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100)
임금이 자본에서가 아니라 노동생산성에서 나온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현재의 이론은 틀렸으며,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 내놓는 각종 처방들, 예를 들면 자본 증대, 노동자 수 제한, 노동자 작업 능률 향상 등은, 정치경제학 교수들이 내놓은 것이든 노동자가 내놓은 것이든 폐기되어야 한다. 개별 노동자가 진실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임금이 나오는 기금을 창출한다면 노동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임금이 줄어들 이유가 없다. 오히려 노동자 수가 많아질수록 노동의 능률이 분명히 증가하므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임금은 노동자 수와 더불어 오히려 증가히야 한다.(106) - 임금기금설에 대한 비판
제 2 권. 인구와 생존물자
제 1장. 맬서스 이론, 그 발생과 지지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의 이론은 ‘인구는 자연히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구 증가는 기하급수적이고 생존물자의 생산은 산술 급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맬서스의 결론은 인구의 무한 증가 경향은 인간의 출산력에 대한 도덕적 절제 또는 사망률을 높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억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결국 세상은 악하고 비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금이론 :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면 자본을 지금보다 더 잘게 나눠야 하므로 임금이 하락한다는 것이고, 이에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의 증가로 인해 생존물자를 더 나눠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빈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진화론(적자생존 원리)의 결합
제 2장. 사실로부터의 추론
저자는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가정은 경험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이유가 없음을 지적한다.
인구론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물자는 산술적 비율로 증가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데 이 가정은 강아지 꼬리가 두배가 되는 시간에 몸무게가 2파운드 불어나는 사실을 보고 꼬리는 기하적 비율로, 몸무게는 산술적 비율로 불어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비율을 따르자면 개가 50파운드가 자랐을때 꼬리는 1마일이 넘게 된다는 것이다.
- 인도와 중국의 예를 통해서 볼 때 기근의 이유는 조밀한 인구 때문이 아니라 사회조직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지 못하고 노동이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제도에 기인한다. 표면적으로 인구의 과잉으로부터 빈곤이 온 것처럼 보이는 결과도 그 원인을 추적하면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 아일랜드의 빈곤과 기근의 진정한 원인은 토지가 인구를 부양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압제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희소한 브라질의 기근의 원인이 인구 과잉이 아니듯이, 인도, 중국, 아일랜드의 기근의 원인도 인구과잉이 아닌 것이다. 결핍에서 오는 죄악과 비참의 원인은 자연이 인색해서가 아니다.(145)
제 3장. 비유로부터의 추론
인간에게 식품을 공급하는 자연은 인간보다 재생산력이 훨씬 클 뿐만 아니라 일체의 생물 중에서 인간은 자연의 재생산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식품 증가가 인구 증가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인구 증가가 식품 증가의 원인이다.
동식물세계에서는 어느 동식물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그 동식물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생존물자의 한계는 토지, 공기, 물, 햇빛의 궁극적 한계 내에서라면 인간 자신에 달려있다.
생산성 체감의 법칙 : 어떤 점 이상에서 노동과 자본의 추가 투입에 대한 토지의 생산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외견상으로만 그럴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을 자연이 베푸는 물자가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그 중에서 한정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것만을 취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동물적 욕구가 충족되면 즉시 다른 욕구가 싹튼다. 인간도 짐승과 마찬가지로 먼저 음식을 원하고 다음에는 집을 원하고 그 다음에는 생식 본능이 일어난다. 그러나 짐승은 여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만 사람은 무한한 진행 단계의 다음 단계를 향한다. 인간은 양이 충족되고 나면 그 이후 질을 추구한다. 그리고 나아가 미(멋)을 추구한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무언가를 알고 싶어한다. 불타는 사막이나 살을 에는 북극의 바람 속을 탐험하는 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다.
음식이 풍족해지고 생활의 조건이 풍요해진다면 동식물은 증식할 뿐이지만 인간은 발전한다.
제 4장. 맬서스 이론의 부정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물자를 더 많이 마련할 수 있다.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은-현재의 이론은 인구 증가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는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낸다.
생산력이 풍부하고 부의 생산이 최대가 되는 사회에서 빈곤이 발생한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문명세계를 당황하게하는 수수께끼이며 우리가 해명하려고 하는 문제이다. 빈곤의 원인이 생산력 감소에 있다고 하는 맬서스 이론은 이를 해명하지 못한다.
제 3 권. 분배의 법칙
제 1장. 분배의 법칙과 법칙 간의 필연적 관계
물질적 진보와 더불어 임금이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하락하는 현상은 노동자 수아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임금 지불의 원천이 되는 자본총액 중에서 노동자 일인당의 몫이 줄어든다는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생산력의 대폭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산자가 얻는 대가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도에 국한되는 원인이 자본의 제약 또는 노동에 대응하는 자연력의 제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은 부의 생산을 제약하는 법칙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분배에 관한 법칙에서 찾아야 한다.(170)
토지, 노동, 자본이 결합하여 부를 생산하므로 생산물도 세 요소에 분배될 수 밖에 없다. 지대는 토지 소유자에게,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데 자본의 대가가 되는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난해하다. 이는 부가 지대, 임금, 이윤으로 나뉘어진다고 설명하는 것은 마치 인류가 남자, 여자, 인간으로 나뉘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한다.(173)
임금은 노동의 임금과 생존물자에 충당할 자본의 양과 일자리를 구하는 노동자의 수 간의 비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 어느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노동과 자본의 투입으로 사용 토지 중 최열등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부분이다.
이자는 자본 차용자의 수요와 대여자의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결정된다. 한편 이윤법칙이라는 것에 의하면 이윤은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 임금이 상승하면 이윤이 하락하고 임금이 하락하면 이윤이 상승한다.(176)
생산 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토지라는 용어는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기회와 힘을 의미한다. 노동이라는 용어는 모든 인적 노력을 의미한다. 자본이라는 용어는 더 많은 부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부를 의미한다.(177)
자본은 노동의 결과이고, 노동의 생산을 돕기 위해 노동에 의해 사용된다. 노동은 적극적이고 원초적인 힘이며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의 사용자가 된다. 노동은 토지가 있어야만 실행될 수 있고 노동에 의해 부로 전환될 물자는 토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토지는 노동의 선행조건이며, 노동의 장소이고, 노동에 필요한 원료이다. 세 요소의 자연스러운 순서는 토지, 노동, 자본의 순이 된다.
제 2장. 지대와 지대법칙
지대(rent)는 생산물중 토지 기타 자연 능력의 소유자에게 그 소유권에 귀속되는 부분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토지 기타 자연 능력의 사용에 대해 지불되는 대가 이외에도 건물, 기계, 기타 고정 시설물의 사용에 대해 지불하는 대가도 일반적으로 렌트라고 부른다.(180)
지대는 독접가격이고 인적 노력에 의해 생산할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는 자연 요소를 개인 소유권의 대상으로 삼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투입으로 사용되고 있는 토지들 중에서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생산물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 법칙은 생산물이 지대와 임금으로만 나누어진다면 바로 임금법칙이 되며 지대, 임금, 이자로 나누어진다면 바로 임금과 이자를 합한 것의 법칙이 된다.
*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이와 같이 임금과 이자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대를 공제하고 난 후의 잔여에 의해, 즉 무지대토지에서의 생산물 또는 사용 토지 중 가장 열등한 토지에서의 생산물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다.(186) 지대 상승이,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증대됨에도 불구하고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제 3장. 이자와 그 발생 원인
이자는 자본 사용에 대한 모든 대가를 포함하며, 차용자가 대여자에게 지불하는 것이 국한되지 않는다. 또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은 제외된다.(188)
* 대패 이야기
돈을 가만 내버려 둔다면 돈은 증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도주를 가만 내버려둔다면 1년이 지나면 포도주의 질이 향상되기 때문에 가치도 증가한다… 이런 경우 증가의 원인은 노동과는 다른 그 무엇이며 이를 자연의 능동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195-저자는 이 힘을 이자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생산에는 세 가지 방식, 적응(Adapting), 키우기(Glowing), 교환하기(Exchanging)가 있다. 자본을 사용하는 방식(나무와 쇠를 이용해서 대패를 만드는 것)의 이익은 노동에 돌아가고 증가(땅에 씨를 뿌리고 포도주를 저장하는 것)에서 나오는 이익은 자본에 돌아간다고 보았다.(201) 이렇게 해서 이자는 자연의 새생산력과 그에 준하는 효과를 가진 교환의 능력에 의해 자본이 갖게 되는 증가력에서 나온다.
제 4장. 의사자본과 흔히 이자로 오인되는 이윤
자본의 대가에 포함되는 지대, 발전하는 사회에서 총생산 중의 비율이 계속 커지는 지대는 자본의 대가가 아니므로 이자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자본의 힘을 건설적이라고 한다면 집중(독점)이 계속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기는 힘은 파괴적이다.
흔히 이자라고 착각하는 이윤의 대부분이 실은 자본의 힘에 의해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자본에 의해 또는 집중된 자본이 나쁜 사회제도와 결합함으로써 생긴다는 사실(207)
제 5장. 이자법칙
자연의 생명력이 시간 요소에 주는 이익이 이자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자율의 최고한도는 이 생명력이 생산에 기여하는 강도와 정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정상적인 이자 수준은 자본 대가의 필연적인 최고한도와 필연적인 최저한도 사이의 어느점에 놓이는데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 자본의 대가와 노동의 대가는 동일하게 된다.(212)
임금과 이자 간에는 어떤 관계 내지 비율이 존재하며, 이 관계 내지 비율은 매우 서서히 변화하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이 관계 내지 비율에 따라 노동이 자본으로 전환되어 당시의 지식 정도, 기술 상태, 인구밀도, 직업의 특성, 교환의 다양성과 범위 및 신속성에 비추어 생산에 필요한 만큼의 자본을 공급한다. 이러한 관계 내지 비율은 노동과 자본의 상호작용에 의해 유지되며 따라서 이자는 임금의 등락과 함께 등락하게 된다.(214)
“임금과 이자 간의 관계는 자본이 재생산 형태로 사용될 때 그 자본이 가지는 평균적인 증가력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가 상승하면 이자는 임금과 더불어 하락한다. 즉 이자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
제 6장. 임금과 임금법칙
인간 행동의 기본 원리는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는 토지와 노동이라는 두 생산요소의 산물이다.
고용주가 지불해야 하는 임금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자연적 생산력의 최저점에 의해 정해지고, 임금은 이 최저점의 등락에 따라 등락한다.(218)
임금은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고, 임금의 크기는 노동에 개방된 최고의 자연적 기회로부터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의 크기에 의해 정해지며, 이는 인간이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원리에서 나온다.(220)
“임금은 생산의 한계, 즉 지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
저자는 아담 스미스와 같은 정치경제학 학자들이 임금법칙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제 7장. 법칙 간의 연관성과 일관성
인간은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것으로서, 생산요소 중의 하나와 관련지으면 지대법칙이 되고, 다른 요소와 관련지으면 이자법칙이 되고, 또 하나의 요소와 관련지으면 임금법칙이 된다.(229)
제 8장. 문제의 정태적 측면은 해명되었다.
현 이론이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천문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처럼 단순성과 조화성을 갖춘 정치경제학 이론을 고려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233)
임금이 생산력 증가에 맞추어 증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대의 증가 때문이다.
생산력이 증가한다고 해서 임금이 증가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생산력의 증가가 토지의 가치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지대가 모든 이익을 흡수하므로 빈곤이 진보와 동반하게 된다.
제 4권. 물질적 진보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
“형제여, 저 울음이 들리는가? 슬퍼할 나이도 안 된 아이들의 울음이.
머리를 엄마에게 기대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어린 양은 목장에서 노래하고
어린 새는 둥지에서 지저귀고
어린 사슴은 그늘에서 뛰놀고
어린 꽃은 서쪽으로 바람에 흩날리는데 -
형제여, 어리디 어린 우리 아이들이 슬피 울고 있다.
모두들 즐거이 노는 시간에 울고 있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 브라우닝 부인
제 1장. 문제의 동태적 측면에 대한 검토
지대 상승의 원인은 무엇인가?
리카도는 지대 상승의 원인으로 인구 증가만을 들었다.
물질적 진보의 원인 세 가지
1) 인구의 증가
2) 생산과 교환의 기술 개선
3) 부의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진 지식, 교육, 정부, 치안, 예절, 도덕등의 개선
제 2장. 인구 증가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
맬서스의 이론에 의하면 생존 물자에 대한 인구의 압력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심해지며, 입 하나에 손 둘이 세상에 태어나는데도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 손은 새 입을 먹여 살리기가 더 힘들어진다고 한다. 리카도의 지대법칙에 의하면 사용 토지의 생산성 차이에서 지대가 발생하며, 리카도 내지 그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경험상 인구 증가에 지대 상승이 동행하는 것은 비용을 더 들이지 않으면 식품을 더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추가 인구는 더 낮은 생산점으로 밀려나고 그만큼 지대가 상승한다라고 말한다.(243)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면 경제성이 높아져서 노동의 효율이 향상되므로, 새로 경작되는 토지의 토질이 종전보다 열등하더라도 같은 양의 노동에 의해 생산할 수 있는 부는 종전보다 많아진다. 인구 증가의 효과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미 경작되고 있던 더 좋은 토지에서도 부의 생산력이 높아진다. 다시 말하면 비율로서의 임금은 하락하더라도 양으로서의 임금은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부의 평균생산은 증가한다…. 인구 증가로 인해 더 질이 낮은 토지를 추가 사용하게 되지만 동시에 모든 노동의 효율성도 향상되어 기존에 사용되고 있는 우수한 토지에서의 생산 증가는 새로 사용되는 토지의 생산성 하락을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총투입에 비한 부의 총생산은 많아지지만 부의 분배는 더 불공평해진다.
- 광대한 평원에 처음 이주해서 정착한 가정, 뭐든지 하지만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혼자 살 때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만족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게 된다. 그의 토지에서 수확되는 밀이나 옥수수나 감자의 양은 전만 못하겠지만 이 토지로 인해 생기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은 훨씬 많다. 그 토지에 노동을 투입해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것도 아니고 더 가치있는 곡물을 얻는 것도 아니자만, 노동의 목적인 온갖 다른 물자는 훨씬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인근 주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인구가 증가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런 물자를 얻기 위한 노동 생산성이 높아졌고, 그 때문에 토질이 동일하더라도 주민이 없는 땅보다 우등한 토지가 되었다. 이 토지는 농업 생산성에 있어서는 처음보다 못하지만 그보다 높은 종류의 생산성이 발전하기 시작한다.(250)
이 토지에 결부되는 모든 유리함은 이 토지가 아닌 곳에서는 누릴 수 없다. 이곳이 인구의 중심이고 교환의 초점이고 고급 산업이 입지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구 밀집으로 인해 이 토지에 결보된 생산력은 토지의 비옥도가 수백 배, 수천 배 증가한 것과 맞먹는다…. 지구에서 가장 비싼 토지, 지대가 제일 높은 토지는 자연적 비옥도가 특히 높은 토지가 아니라 인구 증가로 인해 생긴 효용이 특히 높은 토지이다.(253)
인구 증가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지대를 상승시키고 그 결과 총생산 중 자본과 노동의 대가로 귀속되는 비율을 감소시킨다. 첫째는 경작의 한계를 낮추는 방식, 둘째는 잠재해 있던 특별한 능력을 토지에 발현시키고 이 특별한 능력을 특정 토지에 결부시키는 과정.
제 3장. 기술 개선이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
인구 증가는 노동생산성을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향상시킴으로써 지대를 상승시킨다. 인구 증가와 관계 없이 생산과 교환 방법이 개선 될 때 지대가 상승된다.(255)
부의 생산을 위해서는 두 가지, 즉 노동과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노동 절약적 개선은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며 사용 토지의 질이 한계에 다다른 곳에서는 자연의 생산성이 더 못한 토지가 새로 경작된다. 이렇게 해서 노동 절약적 개선의 일차적 효과는 노동의 힘의 증대이지만, 이차적인 효과는 경작의 확장이고 이로인해 경작의 한계가 낮아지면 지대가 상승한다.(256)
모든 노동 절약적 발명은 - 농기이건, 전신이건, 향상된 제련 공정이건, 완벽해지는 인쇄기이건, 재봉들이건 - 지대를 상승시키는 경향이 있다.
“모든 형태의 부는 토지에 투입된 노동의 생산물이거나 토지의 생산물이다. 부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으므로 노동의 힘의 증가는 더 많은 부를 마련하는 데 활용될 것이고 그리하여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발명과 개선이 진행되면 인구가 일정하더라도 노동 능률은 계속 향상되고 생산의 한계는 더 낮은 곳으로 밀려 나가고 지대는 계속 늘어난다.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쟁기와 수확기가 등장하면서 고대 이탈리아에서 외국 전쟁을 통해 노예가 들어옴으로써 성립된 것과 같은 종류의 대토지를 현대 세계에 조성하고 있다. 마치 로마의 농민이 대도시의 빈민으로 밀려나거나 군대에 지원하여 피로써 빵을 구했던 것처럼 정든 고향에서 밀려나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노동 절약적 발명 자체를 저주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오늘날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는 것이 그 자체로 소망스러운 것처럼 말하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263)
제 4장. 물질적 진보에 의해 생기는 기대의 효과
인구 증가는 지대를 상승시키는 경향이 있고 진보하는 사회에서 노동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모든 원인은 지대를 상승시킬 뿐 임금과 이자는 증가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 진보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미래의 토지 가치 상승에 대한 확실한 기대이다. 이러한 기대는 모든 진보하는 지역에서 지대가 꾸준히 상승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토지투기, 즉 정상적으로 형성될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바라면서 토지를 보유하는 행위를 야기한다.(265)
성장하는 도시의 내부 유휴지가 존재하는 이유를 개발할 능력이 없거나 개발을 원하지 않는 토지소유자가 토지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에서 현재 토지를 개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대가보다 더 높은 대가를 받기 위해서 토지 개발을 보류하기 때문이다.(267-알박기)
또 도시의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토지도 앞으로 도시용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투기적 가치를 갖게 된다.
진보하는 사회에서는 토지 가치가 일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는 사실로 인해 추가적인 상승이 발생한다…. 토지는 그 존재량이 고정되어 있어 인간이 늘리지도 줄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토지가치의 투기적 상승을 제한하는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269)
제 5권. 문제의 해결
제 1장. 반복적으로 발작하는 산업불황의 근본 원인
토지 가치의 투기적 상승이 경작 내지 생산의 한계를 그 정상적인 위치 밖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노동과 자본은 더 적은 대가로 만족하거나 생산을 중단-생산 중단은 그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다- 할 수 밖에 없다.
투기가 불황을 초래하는 과정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번째는 투기가 과잉생산을 야기함으로써 불황이 조성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투기가 과잉소비를 야기함으로써 불황을 조성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두 이론은 일반적 진실의 한 면을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두 이론은 모두 실격이다.(276)
산업 활황기마다 토지가치가 꾸준히 상승함으로써 결국 토지투기가 생기고 그로 인해 토지가치가 도약하였다. 그 후에는 예외 없이 일부 생산 중단 및 그와 관련된 유휴수요 중단 내지 거래 부진이 뒤따랐고 여기에 대체로 상업의 파탄이 동반하였다.(277)
노동이 이런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토지다. 노동이 부를 창조한다는 말은 비유일 뿐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 전 인류가 끝없이 노동한다고 해도 햇살 속에 떠다니는 작은 티끌 하나도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우주 속에 항해하는 이 지구를 한 푼도 더 무겁게나 가볍게 할 수 없다. 부의 생산이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노동을 통해 필요한 형태로 바꾸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를 생산하려면 반드시 이 물질, 즉 토지를 사용해야 한다. 토지는 모든 부의 원천이다. 토지는 노동이 가공할 광물을 캐내는 광산이며., 노동이 형태를 부여할 원료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필요한 물자를 얻지 못한다면 노동의 토지 사용이 거부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281)
토지가치 상승의 의미를 이해하고 철도 건설이 토지투기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급속한 철도 건설과 산업불황간에는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철도가 건설되거나 계획되는 곳에서는 토지가치가 투기의 영향으로 크게 튀었고 자본과 노동이 부를 생산하기 위해 토지를 사용하는 대가로서 -일시불로 또는 분납으로- 지불해야하는 명목적인 금액에 수십억 달러가 더 추가되었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생산의 제약이었으며, 생산 제약은 수요 중단으로 파급되고 그로 인해 다시 생산을 제약하게 된다.(284)
제 2장. 부의 증가 속에 영속되는 빈곤
노동에 필요한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전락하여,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면 모두 지대 -노동이 자신의 힘을 적용하는 기회의 사용 대가로 지불하는 가격- 상승으로 흡수된다. 이리하여 계속되는 진보에 의해 생기는 모든 이익이 토지소유자에게 들어가고 임금은 증가하지 않는다. 임금이 증가할 수 없는 이유는 생산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기회에 대해 지불하는 가격이 노동 생산의 증가에 동반하여 같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생산력 향상이 이루어져도 단순노동자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노동은 생산력 향상의 모든 혜택을 박탈당하고 문명 발달의 부작용에 희생된다. 노동은 문명 발달에 자연스럽게 수반하는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자유노동은 노예처럼 무기력하고 비천한 상태로 전락한다.(292)
오늘날의 세계를 보라. 각국은 정부, 산업, 관세, 통화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층의 고난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풍요 속에 고난과 궁핍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반드시 토지가 독점되어 있고, 토지가 전체 국민의 공동재산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취급되며, 노동이 토지를 사용할 때 고액의 사용료를 소득에서 징수당하고 있다. 세계 여러나라를 비교해 보면 임금의 고저는 자본의 양이나 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토지 독점 계층이 노동의 소득 중에서 지대로 가져가는 정도에 의해 결정됨을 알 수 있다. 부의 총량이 적고 토지가격이 싼 신생 지역은, 부유하지만 토지가 비싼 지역에 비해, 노동자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은 무식한 사람도 잘 아는 사실 아닌가? 토지가 싼 신개척지에서는 거지도 없고 생활의 불평등도 거의 없다. 토지가 비싼 대도시에서는 극단적인 빈곤과 사치가 병존한다.(297)
지금까지의 기나긴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진리에 도달하였다. 노동을 투입해서 부를 생산하려면 토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노동에 필요한 토지를 장악하면 노동의 열매 중에서 노도자의 생존에 소요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장악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적진 속을 행군하듯이, 걸음마다 확인하고 위치마다 경계를 강화하고 길목마다 수색하였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서 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명세계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악을 해명하기 위해 갖가지 측면을 다 검토하면서도 이 진리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또 사고의 오류와 잘못된 사고 습관 때문에, 단 한 가지, 즉 정답만을 빠뜨린다. 이와 같은 오류와 잘못된 이론의 배경에는 어떤 강력한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 힘은 정치 체제에 관계없이 모든 나라의 법을 제정하고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자 거대하고 지배적인 물직적 이해관계의 힘이다.(303)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란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인간의 토지에 대한 의존성을 없애 주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다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304)
제 6 권. 해결책
제 1장. 현재 옹호되는 해결책의 불충분성
1) 정부의 절약
사회의 총생산 중 조세로 징수하는 액수를 줄이는 것은 사회의 순생산력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구밀도의 증가나 기술의 개선처럼 노동의 생산력을 높여주는 효과를 갖는다. 어느 경우든 이익은 지대 상승을 통해 토지 소유자에게 귀속될 뿐이다.
정부의 경비를 줄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생기는 악을 치유하거나 완화시킬 수는 없다.
2) 교육의 확산 및 근면, 절약의 습관
노동자 계층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 곳에서는 반드시 인간적 품성도 향상되었고 물질적 생활이 악화된 곳에서는 반드시 인간적 품성도 타락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힘들게 벌어야 겨우 최저생활을 하는 계층의 근면, 기술, 절제, 지적 능력이 늘어났다고 해서 이들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 곳은 어디에도 없다.
3) 노동자의 단결
임금률이 일부 업종에서 변할 경우에 노동에 대한 상대적 수요를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총수요를 변호하시키지는 못한다… 어느 한 나라의 모든 임금이 두 배가 되더라도 수출과 수입의 품목과 비율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교환은 절대생산비가 아니라 상대생산비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단결로 토지소유자도 불편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들이 불편할 정도이면 자본은 파괴되고 노동자는 굶주리는 정도에 이른다.
4) 협동조합
협동조합이 목적하는 바는 생산, 교환 방법과 기계 개선의 효과와 같다. 즉 상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는데 드는 비용을 줄이고 노동의 능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선의 이익은 지대를 올릴 뿐이다.
5) 정부의 지시와 간섭
규제와 제약이란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다른 방법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말아야할 방법이다.
누진소득세의 경우에 세무조사권을 가진 많은 공무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조세가 효과를 낼 수록 부의 축적에 대한 유인이 작아진다.
6) 토지 분배의 확산
소유 면적 제한을 통해 부의 공정한 분배를 확보하려는 노력에는 분배의 총량을 감소시킨다는 단점이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토지 소유 면적을 제한하더라도 생산물의 공정한 분배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지 독점이라는 악은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토지의 균등한 분배는 불가능하고 그보다 못한 모든 수단은 치유책이 아니라 완화책이며 치유를 방해하는 완화책일 뿐이다.
제 2장. 진정한 해결책
현대 문명을 저주가호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은 토지사유제에 있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는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든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제 7권. 해결책의 정의성
제 1장. 토지사유제의 부정의성
토지사유제가 정의로운 것이라면 내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틀린 것이 되고, 반대로 토지사유제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나의 해결책은 옳은 것이 된다.
소유에 대한 모든 정당한 권원은 모두 생산자의 권원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연권에서 도출된다. 그 밖에는 정당한 권원의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첫째 이유는 다른 정당한 권원을 도출할 수 있는 자연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만일 다른 권원이 존재한다면 두 권원이 상호 모순되어 이 근거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첫째 이유에 대해
“자연은 노력의 결과 이외에는 인간에게 어떠한 소유나 통제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이 없으면 자연의 보물을 채취할 수 없고, 자연의 힘을 다스리고 활용하고 통제할 수 없다.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자연은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지 않으며, 황과 신하를 구분하지 않으며, 성자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자격이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연은 노동의 결과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정한다. 해적의 배에도 바람은 불어주고 평화로운 상인이나 선교사의 배에도 바람은 불어준다. 왕과 백성이 같이 바다에 빠져도 헤엄을 치지 않으면 아무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놓을 수 없다. 새는 밀렵꾼의 총보다 토지소유자의 총에 먼저 맞아주지 않는다. 물고기도 주일학교에 다니는 착한 소년의 낚시나 못된 결석쟁이 소년의 낚시를 구별하지 않고 문다. 곡식도 밭을 갈고 씨를뿌려야 자란다. 광석이 광산에서 채취되는 것도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해는 골고루 비치고 비도 골고루 온다.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구너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에는 모든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향유할 권리, 노력을 자연에 투입할 권리, 자연으로부터의 대가를 수취하여 소유할 권리의 평등성이 폭넓게 그리고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주므로 노동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 배타적 보유의 유일한 권원이다.
둘째 이유에 대해
노동에 근거하는 소유권은 다른 종류의 소유권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사람이 자기 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정당한 소유권을 갖는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것 또는 노동의 생산물로서 자기에게 정당하게 이전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정당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토지사유제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자연이 보장하지 않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토지는 인간이 존재하는 터전이자 환경이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는 창고이며 노동에 필수 불가결한 원료이자 힘이다.(344)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345)
물질적 진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이 먹여 살리지 못할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진보가 쓰디쓴 열매를 낳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의 마음으로도 승복할 수 없는 부정의한 오점을 자연법에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고도 문명 속에서 결핍으로 인해 인간이 쓰러지고 죽어가는 것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라 인간의 부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죄악과 비참, 빈곤과 궁핍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이런 결과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뒤따르는 이유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모든 인간을 위해 제공한 것을 일부 인간이 배타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최고의 정의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347)
제 2장. 토지사유제의 궁극적 결과는 노동자의 노예화
노예사유제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토지사유제 역시 정의롭지 못하다.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해야 하는 토지의 소유는 사실상 인간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고, 일부가 토지를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면 다른 사람을 자기 사유재산으로 만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노동과 토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사용해야하는 토지를 소유하면 그 사람에 대해 절대 권력을 갖게 된다…. 토지 소유는 귀족제의 근거가 된다. 귀족 신분이 토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 귀족 신분을 만들어 준다.(356)
노예 해방 이후 토지 소유자들은 노동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되었다.(360)
토지사유제를 인정하는 한 우리가 자랑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노예제도로 연결된다. 토지사유제가 철폐되기 전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도 노예해방법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며 노예 상태가 조성될 것이고 물질적 진보가 진행될 수록 그 정도가 반드시 심해진다.(362)
제 3장. 토지소유자의 보상 요구
토지소유자의 이익이 보존되면 일반 국민의 이익과 권리는 그만큼 무시되며 토지소유자가 특권을 잃지 않으면 일반 국민은 얻는 것이 없게 된다.
지대는 과거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물에서 나온다. 지대는 지속적으로 노동에 부과되는 부담이다. 해머를 칠 때마다 곡괭이를 휘두를 때마다 직기가 움직일 때마다 증기기관이 고동칠 때마다 지대에 공물을 바친다. 지대는 깊은 지하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도, 배를 타고 세찬 파도를 무릅쓰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부과된다. 이런 절도는 자본가의 정당한 부수와 발명가의 인내 어린 노력의 열매를 가져간다. 어린이에게서 놀이와 학교를 빼앗으며 뼈가 단단해지고 근육이 튼튼해지기도 전에 어린이를 일터로 몰아낸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서 온기를, 배고픈 사람에게서 음식을, 병자에게서 약품을, 불안한 사람에게서 평온을 빼앗는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포악하게 하며 비참하게 만든다. 열 식구가 지저분한 단칸방에서 살도록 한다. 농촌의 소년 소녀들을 돼지처럼 자라게 한다. 가정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로 술집이 붐비도록 한다. 유망한 젊은이를 감옥이나 보호감호소에 갈 후보자로 만든다. 순수한 모성을 누려야할 소녀들로 매음굴을 채운다. 매서운 겨울이 이리를 마을로 내몰듯이 탐욕과 죄악을 사회에 퍼뜨린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며, 힘들고 어둡고 잔인한 운명이라는 베일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영상을 가린다. 이는 과거에 발생했던 절도일 뿐만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는 절도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린이에게서 천부적인 권리를 빼앗는 행위이다.(369)
제 4장. 토지사유제의 역사적 고찰
무제한적인 개인 소유가 자유롭게 채택된 곳은 없었음이 입증된다. 역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토지사유제는 강탈에 의해 생겼다. 토지사유제가 계약에 의해 생긴 경우는 없고 정의와 효율을 고려하여 생긴 경우도 없다. 어느 곳에서나 전쟁과 정복 또는 교활한 자들이 미신과 법률이라는 수단을 이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겼다.(375)
“모든 원시사회에서 토지는 부족의 공동재산이었고, 주기적으로 여러 가족 간에 배분되었으며, 누구나 자연의 혜택을 입어 노동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므로 각자 얼마나 편한 생활을 하느냐는 자신의 힘과 머리에 비례하였다. 어느 누구도 생존 수단이 박탈되지 않았고, 대를 거듭하면서 불평등이 누적되는 경우도 없었다.”(드 라블리에, 375)
평등한 인간적 권리가 부인되고 특권층이 생성된 원인
1) 소수 권력자 내지 군부로의 권력 집중, 전쟁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공동의 토지를 독점
2) 정복의 결과, 피정복민은 농노 상태로 전락하였고 토지는 정복자들끼리 너누어 가짐
3) 성직자 계층 및 전문 법률가 계층의 형성과 영향력, 이들은 토지에 대한 공동의 권리 대신 배타적 권리를 확립함으로써 이익을 취했다.
토지 제도의 변천
1) 원시 체제 : 경작지를 평등하게 분배하고, 비경작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식
2) 봉건 제도 : 봉토는 본질적으로 신탁이었고 봉토의 향유는 의무와 연계되었다. 봉건제도 하에서 군주의 토지로부터 오늘날 국민 일반이 부담하는 공공경비를 조달하였고, 교회의 토지로부터 신도의 예배와 교화에 드는 비용, 병약자를 돌보는 비용, 성직자처럼 사회적 선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계층을 지원하는 비용등을 조달하였다. 군대 토지로부터는 국방 비용을 조달하였다.
3) 토지 사유제
과거에는 토지소유제도가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외관상으로도 확실히 드러났지만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그 외관이 사라지거나 다소 불분명하게 되었다. 토지 소유의 문제는 전보다 악화되었지만 잠재화됨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목하지 못하고 토지소유자는 용이하게 토지 재산권을 다른 재산권과 같이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제 5장. 미국의 토지사유제
미국의 경우 광대한 토지가 있었고 처음에는 토지를 절대 사유재산으로 하여도 별다른 해가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원하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토지가 남아 있었고 사적인 토지 소유가 계속될 경우에는 그 필연적 결과로 노예제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감지하지 못했다.(391)
간단히 말해서 미국 국민은 토지사유제의 악영향을 충분히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본질적 부정의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서부 개척 시대를 지나면서 점점 토지가 귀해지고 노동이 생산을 하는 데 불가결한 자연의 기회를 획득하는 조건이 점점 엄해졌다.
제 8권. 해결책의 응용
제 1장. 토지사유제는 토지의 최선 사용에 어긋난다.
우연과 본질을 혼동하여 생긴 착각이 하나 있다. 그 착각이란 토지를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토지사유제가 필요하며 토지를 공동소유하면 문명이 파괴되고 야만상태로 회귀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돼지고기를 요리하기 위해 집을 불태울 필요가 없듯이, 토지를 개량하기 위해 토지의 절대적, 배타적 소유자가 될 필요가 없다. 돼지고기를 굽기 위해 집을 불태우는 것이 부적절하고 낭비적이며 불확실한 수단이듯이, 토지사유제는 토지개량물의 보장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부적절하고 낭비적이며 불확실한 수단이다.
토지 사용에 필요한 것은 토지의 사적 소유가 아니라 개량물에 대한 보장이다. 토지의 경작과 개량을 유도하기 위해서 ‘이 땅은 당신의 것’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이땅에서 당신이 노동과 자본을 들여 생산한 것은 당신의 것’이라고 하면 족하다.(402)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하면 적절한 사용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토지를 공공재산으로 하면 필요가 있을 때 즉시 사용 내지 개량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하면 토지소유자 스스로 사용 내지 개량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경우네도 타인의 사용 내지 개량을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를 토지소유자가 갖는다.(405)
제 2장.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확립하고 보장하는 방법
도처에서 노동자 계층이 겪는 빈곤과 고통, 불황이라는 반복적인 마비 현상, 일자리 부족, 자본 불경기, 기아선상의 임금 등의 현상이 물질적 진보가 진행될수록 더 뚜렷이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우리 모두의 생존과 생활의 터전인 토지가 일부 사람의 배타적인 사유재산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지대를 모두 조세로 징수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최상의 해결책이다. 임금을 올려주고 자본 소득도 높여 준다. 빈민층을 해소하고 빈곤도 추방한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주고 인간의 힘을 자유스럽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범죄를 줄이고 도덕과 취향과 지성을 고양시키며, 정부를 깨끗하게 하고 문명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 형식상 토지소유권은 지금처럼 개인의 수중에 그대로 있다. 아무도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토지 소유량에 대한 제한도 없다. 그러나 국가가 지대를 조세로 걷기 때문에 토지 소유가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건 토지 소유량이 얼마가 되건 간에 토지는 실질적으로 공동재산이 되며, 사회이 모든 구성원이 토지 소유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
토지가치 이외의 대상에 부과하는 모든 조세를 철폐하자.
(To abolish all taxation save that upon land values.)
제 3장. 조세의 원칙에 대한 검토
1) 조세가 생산에 주는 부담이 가능한 적을 것
2) 조세의 징수가 쉽고 징수 비용이 저렴하며 조세가 가능한 한 궁극적인 납세자에게 직접적으로 부과될 것
3) 조세가 확실성을 가질 것
4) 조세 부담이 공평할 것
1) 조세가 생산에 미치는 영향
모든 조세는 분명히 토지와 노동의 생산물에서 납부된다. 자연의 물질과 힘에 인간의 노동을 가하는 것 외에 부의 근원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보수를 줄이는 조세는 반드시 생산 의욕을 줄인다. 적절한 방식으로 부과하면 별 어려움없이 부담할 수 있는 조세도 잘못 부과하면 국민을 궁핍하게 하고 부의 생산력을 파괴할 수 있다.(414)
생산을 저해하지 않고 정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조세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점에 대한 조세이다.(415)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자연 독점의 성격을 가진 사업은 정부의 기능에 속하며 정부가 맡아서 운영하여야 한다. 정부가 체산사업을 하듯이 전신사업도 맡아야 하며 일반도로처럼 철도도 맡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그러나 토지 독점에 비하면 다른 독점은 아무 것도 아니다…. 토지가치에 부과되는 조세는 그 금액이 지대, 즉 연간 토지가치를 초과하지 않는 한 생산을 전혀 제약하지 않는다.(417)
공업에 과세하면 공업을 억제하는 효과가 생기고, 토지개량물에 과세하면 토지 개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기며, 상업에 과세하면 교환을 막는 효과가 생기고, 자본에 과세하면 자본 투입을 방해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러나 토지가치는 전액을 징수할 수 있으며, 그 효과는 산업을 진흥하고 자본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며 부의 생산을 중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2) 징세의 용이성과 저렴성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 이외의 모든 다른 조세를 없앤다면 다른 조세를 징수하던 비용은 모두 절약할 수 있다.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물가를 올리지 않으며 부과되는 사람이 직접 조세를 부담한다…. 조세는 생산비를 올리고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가격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토지는 인간의 생산 대상이 아니며 지대에 매기는 조세는 토지 공급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조세로 인해 토지소유자의 세액이 늘어나더라도 토지소유자가 토지 사용대가를 올릴 힘이 없다.
3) 조세의 확실성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재량의 여지가 가장 적고, 최상의 확실성을 갖는 조세이다. 토지는 이동시킬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만큼 토지에 대한 조세의 평가와 징수도 확정적이다.
토지개량물을 제외한 순수토지의 가치에만 조세를 부과한다면 조세체계가 단순하고 명확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 조세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므로 당국의 과세액 평가도 일반 부동산 중개인이 거래가격을 매기는 것과 같은 정도의 확실성을 갖게 될 것이다.
4) 조세의 공평성
자연은 노동에게 베풀며 그리고 노동에게만 베푼다. 에덴동산에서도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굶는 수밖에 없다. 동일한 소득을 가진 두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의 소득은 노동소득이고 다른 사람의 소득은 지대소득이라고 하자. 이 두사람이 국가의 경비를 똑같이 부담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소득은 그 스스로 창출한 부이자 사회적 부의 총량을 증가시킨 부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소득은 단지 이미 생산된 물자 중에서 취하는 것일뿐이며, 그 대가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소득을 향유하는 권리는 노동의 대가로 부를 준다고 하는 자연의 보장에 근거를 둔 권리이다. 그러나 지대소득자가 소득을 향유하는 권리는 허구적인 권리이고 인간의 제도가 만든 권리일 뿐이며 자연은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지대가 과세되어 사회의 필요경비에 충당되면, 자연이 예정하는 평등이 성취된다. 각 국민은 개인적인 근면, 기술, 지적 능력에 의한 이익 이외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이익을 받는 일이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번 것을 갖게 된다. 그 때가 되면,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노동은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자본은 자연적인 대가를 받는다.
제 4장. 여러가지 지지와 반대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가 정부 수입의 수단으로 그토록 장점이 많다고 하면, 어째서 모든 정부가 수많은 다른 조세를 부과하는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비중있는 조세 중에서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유일한 조세이기 때문이다.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토지소유자에게 귀착되며 이 부담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킬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토지소유자라고 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계층은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를 낮게 유지하면서 다른 조세를 수입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토지가치에 과세하는 것을 반대하는 쪽에는 확실하고 강력한 이익집단이 존재하지만 현대 정부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다른 조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반대세력이 없다. 머리 좋은 정치인들은 교묘한 조세제도를 고안하여 흡혈박쥐가 살아있는 생명체의 피를 빨아먹듯이 노동 임금과 자본 이자를 뽑아내었다.
제 9권. 해결책의 효과
제 1장. 부의 생산이 미치는 효과
현재 산업을 압박하고 교환을 저해하는 모든 부담을 제거하면 부의 생산이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하는 속도로 증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지가치도 상승할 것이다.
현재 부과되는 조세는 인간의 노력, 근면, 기술,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자연의 기회가 노동에 개방되고, 자본과 토지개량물에 대한 조세가 면제되고, 교환이 제약을 벗음으로써, 일하려 하는데도 자신의 노동으로 필요한 물자를 구하지 못하는 비참한 광경은 볼 수 없게 된다. 산업을 마비시키는 주기적 공황이 사라진다. 모든 부문의 생산이 활기를 띤다. 수요는 공급과 보조를 맞추고 공급은 수요와 보조를 맞춘다. 모든 방향에서 거래가 증가하며 모든 사람의 부가 늘어난다.
제 2장. 분배에 미치는 효과 및 이를 통해 생산에 미치는 효과
물질적 진보가 지대를 상승시키는 만큼 사회가 지대를 취하여 공동의 목적을 위해 쓰인다면, 현재 물질적 진보에 따라 불평등을 야기하는 그 동일한 원인이 이제는 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새로운 균형이 형성되면 생산력이 더 향상되고 이러한 방향의 변화가 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지대는 계속 상승하지만 임금과 이자의 희생 위에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 증가에 의해 상승한다. 사회가 지대를 징수하여 공공의 용도로 사용하면 지대 상승분은 모든 구성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446)
제 3장. 개인과 계층에 미치는 효과
생산력이 대폭 증가함에 따라 노동과 자본은 토지사유제에서 입을 손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고, 이러한 이익 외에도 사회가 건강해짐으로써 생기는 더 큰 이익을 토지소유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회가 같이 누리게 된다.
자신이 소득이 자본 소득에서부터 나오는 사람과 토지 이외의 대상에 대한 투자에서 나오는 사람의 소득도 증가할 것이 명백하다.(452)
스스로 일하는 농민은 노동자이자 자본가인 동시에 토지소유자이며, 노동과 자본에 의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농민의 손실은 명목적일 뿐이며 이익은 실질적이고 크다.(455)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부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각자의 힘과 욕구가 서로 다른 경우에 평등한 분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가 각자 근면, 기술, 지식, 절제를 통해 공동의 부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된다는 뜻이다. 생산하는 사람에게서 생산하지 않는 소수의 수중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큰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토지 독점이 사라지면 엄청난 부자가 생길 염려도 없다. 부자의 재산은 문자 그대로 노동 생산물인 부로 구성될 것이고 부는 계속해서 소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제 4장. 사회조직과 사회생활에 나타날 변화
정부가 대폭 간소화된다. 사법부의 업무도 한결 줄어든다. 정부의 입법, 사법, 행정 기능도 대폭 간소화 된다.
물질적 진보가 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지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이므로 토지세 수입은 점점 많아진다. 공동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은 스파르타에서처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다. 공공의 식당을 운영할 필요는 없겠지만 공공의 화장실, 박물관, 도서관, 정원, 강연회장, 음악무용회관, 극장, 대학교, 기술학교, 실내사격장, 운동장, 체육관 등은 설립할 수 있다. 난방, 전기, 동력 등도 공공의 비용으로 도로를 따라 공급할 수 있다. 도로에는 과일나무를 가로수로 심을 수 있다. 발명과 발견에 보상을 하고 과학적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 공공이익을 위한 노력을 장려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공공수입을 사용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의 이상은 이렇게 달성할 수 있을뿐 정부의 압제를 통해서는 달성할 수 없다. 정부의 성격도 변화하여 사회라는 거대한 협동조합의 관리를 맡는 기관이 된다. 정부는 단지 공동의 재산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리하는 주체가 된다.(460)
노동에게 자유로운 일터와 완전한 대가를 주고,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생긴 기금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징수하면 여러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생산이라는 용추철은 자유롭게 튀어오르고 부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최하층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숨 쉴 공기에 대해 염려하지 않듯이 일자리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게 된다. 들에 핀 백합처럼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과학이 발전하고 발명이 계속되고 지식이 보급되어 모든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되면 부에 대한 동경도 수그러들고, 부의 획득과 과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타인의 존경과 인정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적인 문제의 처리나 공적인 자금의 관리에 있어서도 사익을 추구할 때처럼 신경을 써서 기술을 발휘하고 정성을 들이게 된다.(465)
사람이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경우는 음식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아서 모두에게 충분한 양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때이다. 그러나 공정한 분배와 충분한 음식이 보장되면 아무도 음식에 욕심을 내지 않게 된다. 현재의 사회에서는 분배 상태가 매우 불공정해서 각자에게 충분한 부가 돌아가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궁핍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에 욕심을 부린다…. 그러나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면 모든 사람이 궁핍에 대한 두려움에서 풀려나므로, 품위 있는 상류사회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처럼 부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468)
인간은 건설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건설하고, 개량하고, 발명하고, 조립하며, 무엇인가를 이룰 때마다 더 큰 것을 성취하려고 한다. 인간은 동물 이상의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이다.(470)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것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대가가 생기지 않는 노동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을 혐오할 뿐이다. 매일 매일 힘들여 일해서 겨우 연명한다면 이는 정말로 고된 노동이다. 이것은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펌프질을 계속하거나,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바퀴를 계속 밟는 지옥 같은 형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한 일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열심히, 더 훌륭히 일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을 위해서 또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일다운 일을 하게 된다….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 예를 들면 지식을 확대하고 힘을 증가시키고 문예를 풍부하게 하고 사상을 고양시키는 일은 생계를 위해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채찍질이나 동물적 욕구에 의해 강제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뿐,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입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궁핍이 사라지면 이러한 종류의 일이 대폭 증가할 것이다.(471)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모든 계층에게 여가, 편안함, 독립, 점잖고 세련된 생활, 정신적-도덕적 발전의 기회를 주면 사막에 물을 대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불모의 황무지에 신록이 덮이고, 생명이 없는 몹쓸 땅에 오래지 않아 수목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새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이다. 지금은 감추어진 자질, 있을 것 같지 않은 능력이 나타나서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고 충실하고 행복하고 고상하게 해 줄 것이다. 세모는 자리에 밀려들어가는 둥근 사람이나 둥근 자리에 쑤셔 넣어진 세모난 사람, 부자가 되려는 경쟁에 힘을 낭비하는 사람, 공장에서 기계와 다름없이 일하면서 연명하기 위해 일에 묶인 사람, 악하고 무지한 빈민가에서 자라는 어린이 등, 그 누구에게나 높은 수준의 힘과 빛나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과 재능은 기회만 주어지면 발휘될 수 있다…. 도덕이 향상되고 지적활동이 활발해지고, 사회 생활이 개선될 것이다. 모든 사회의 주민은 상호 긴밀한 연결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474)
제 10권. 인간 진보의 법칙
제 1장. 인간 진보에 관한 현재의 이론-그 불충분성
“인간 진보의 법칙은 무엇인가?
비버는 댐을 만들고, 새는 둥지를 틀고, 벌도 집을 짓지만 동물의 집은 언제나 같은 방법,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인간의 집은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지은 집에서부터 현대적 시설을 갖춘 대저택으로까지 변화되어 왔다. 개는 사물의 인과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몇 가지 재주도 읽힐 수 있지만 개선할 줄 아는 인간과 더불어 생활해오면서도 이런 능력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또 문명인과 가이 사는 개라고 해서 떠돌이 미개인과 같이 사는 개보다 더 수준이 높거나 지식이 더 많지도 않다. 동물 중에는 옷을 입거나 요리를 하거나 도구와 무기를 만들거나 다른 짐승을 사육해서 잡아먹거나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우속 속이 아니고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에다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보태는 임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자질이 없다면 태평양의 일부 작은 섬을 제외하고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481)
인간은 다른 인간과 같이 삶으로써만 원시적인 단계를 넘어 개선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인간의 문명화는 곧 사회 속에서 협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개선이 이루어진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인간은 새로운 노력과 발명을 하게 된다. 이러한 개선 및 개선능력은 유전에 의해 결정되며, 또 가장 잘 적응했거나 가장 많이 개량된 사람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는 경향과, 가장 잘 적응했거나 가장 많이 개량된 부족, 민족, 인종이 사회집단 간 투쟁에서 살아남는 경향에 의해 확대된다” - 저자는 이 진보에 대한 통속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문명을 자연의 선택이라는 원리가 작용하여 인간의 힘을 개선하고 고양한 결과로 보는 진화론적 견해는 세계사에 나타나는 이런 사실을 도저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문명이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속도로 발달했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견해와 배치되지 않는다. 추진력과 제어력의 배합이 동일하지 않으면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하던 모든 문명이 지속되지 않고 반드시 정체 내지 퇴보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견해와 완전히 배치된다. 진보가 있으면 인간의 본성이 개선되고 개선된 본성은 다시 진보를 초래한다는 진화론적 견해가 맞다면, 부분적인 예외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원칙으로는 진보는 계속되며 발전은 또 다른 발전을 낳아 문명이 계속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 현상이 일반원칙 정도가 아니라 보편원칙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는 죽은 자의 무덤이자 멸망한 제국의 무덤이다. 진보가 인간을 개조하여 더 큰 진보를 낳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현재의 서구문명처럼 활기차고 번성했던 모든 문명이 저절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499)
사회의 진보를 중단시키는 장애는 진보의 과정속에서 생기며,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도 문명의 성장 그 자체에 의해 조성되었다.(492)
제 2장. 문명의 차이와 그 원인
인간 진보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한 첫 단계로, 문명 간의 차이가 있다고 할 때 그 차이의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전 세계에 걸쳐 동일하다.”
유태인의 독특함을 보존해 온 것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태교의 가르침, 즉 어울림에 의해 전주된 종교의 가르침 때문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유리 눈이나 의족을 물려받지 않듯이 아버지의 지식도 물려받지 않는다. 지극히 무식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도 과학의 기수가 되거나 사상의 선도자가 될 수 있다. 시간과 장소가 다른 여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차이, 즉 문명의 차이는 개인에 내재하는 차이가 아니라 사회에 내재하는 차이이다.
크고 작은 여러 사회는 각기 지식, 신념, 관습, 언어, 취향, 제도, 법률 등으로 하나의 그물을 짠다.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짠 그물에 출생 때부터 편입되어 죽을 때까지 머문다. 이 그물은 인간의 정신이 싹트고 발전하는 바탕이 된다. 관습, 종교, 편견, 취향, 언어 등이 이 그물에서 자라고 지속된다. 또 그물을 통해 기술이 전해지고 지식이 축적되며, 한 세대의 발견이 다음 세대의 공동 자산이자 디딤돌이 된다. 이 그물은 때에 따라서는 진보에 대한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 그물이 있기 때문에 진보가 가능해지기도 한다. 이 그물은 종족 전체에 대해 개인의 기억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 시대의 기술, 과학, 발명이 굉장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그물을 통해서 가능하다.
제 3장. 인간 진보의 법칙
인간 진보의 법칙-문명의 전진을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인가?
정신은 인간이 전진하는 수단이다. 모든 전진은 정신을 통해 이룩되고, 또 새로운 전진을 위한 유리한 기초가 된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 체구를 키울 수는 없지만 생각윽 통해 우주에 대한 지식과 힘을 무한정 확대할 수 있다. 정신력은 진보의 동력이며, 인간은 진보에 투입하는 정신력에 비례하여 전진한다. 정신력의 양은 일정하다. 즉 사람의 신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듯이, 정신이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진보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력은 진보와 무관한 목적에 소비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정신력이다. 정신력을 소비하지만 진보와는 무관한 목적은 유지와 갈등의 두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유지에는 생존의 확보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속 및 기존 발전 성과의 보존도 포함된다. 갈등에는 전쟁과 전쟁 준비외에도 타인을 희생시켜 만족을 얻거나 이를 막는 데 드는 모든 정신력 소모가 포함된다. (509)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모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association)은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주오디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in equity)이 진보의 법칙이다.(510)
어울림에 대한 최초의 장애는 자연조건에서 나온다.
전쟁은 어울림에 대한 부정이다.
종교가 취하는 형태 또는 종교가 야기하는 증오로 인해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전쟁을 하기도 하지만 종교가 어울림을 촉진하는 수단이 된 경우도 많다.
인구가 희소한 곳의 토지는 가치가 없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토지가치가 생기고 상승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생기는 가치와는 확실히 다르다. 이 가치는 어울림에 의해 생기며 어울림이 커지면 상승하고 어울림 깨지면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부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 이외의 형태를 가진 힘도 역시 이와 같다.
불평등을 유발하는 커다란 원인은 토지의 사유라는 자연독점에 있다. 처음에는 토지가 공동재산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매년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공동으로 경작하는 등 소박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저수준의 발전 단계에나 맞는 방식이다. 인간이 사기의 생산물에 관해 자연스럽게 가지는 사유 관념이 토지에도 쉽사리 확대되는데, 토지사유제는 인구가 희소한 시기에는 토지의 개량자 내지 사용자에게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줄 수 있지만, 인구가 조밀해지고 지대가 상승하면 결국에는 생산자에게서 임금을 박탈하는 제도로 변모하다. 뿐만 아니라 지대를 징수하여 공공목적에 사용하는 방법도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일부 계층의 손에 들어감에 따라 이 계층이 토지 소유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은 소작인이 되는 제도로 바뀌고 만다. 전쟁과 정복은 정치 권력의 집중과 노예제도를 낳고, 사회가 성장하여 토지에 가치가 생기는 지역에서는 자연히 토지 독점을 야기한다. 지배계층은 권력을 수중에 집중시키고 머지 않아 토지도 집중 소유하게 된다. 정복한 토지의 대부분이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피정복민은 소작인이 되거나 농노가 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자연적 사회 성장과정에서 오랫동안 공공토지 내지 공동토지가 존재하면서 원시적 공동체 문화에서 목초지 등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이 땅마저 사유화되고 만다. 이러한 사례는 근대에 흔히 발견된다. 불평등이 일단 야기되면 발전이 진행되면서 토지 소유는 더욱 집중한다.(519)
현대문명의 우월성은 어울림의 신장과 더불어 평등이 신장했다는 데 기인한다. 여기에는 집중되었던 권력이 유럽 북방 민족이 이동해 들어옴으로써 수많은 소규모 중심으로 분산되었다는 점과 기독교의 영향이 작용하였다.(523)
유럽 문명의 발생과 성장의 이유 : 문명은 협동이다. 문명의 핵심 요소는 화합과 자유이다. 도시의 인구규모나 밀도가 커지는 가운데 어울림이 확대되었고, 또 상업의 성장과 교역의 다양화로 멀리 떨어진 도시가 긴밀히 연결됨으로써 어울림이 확대되었다. 요약하자면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더 많이 존중되었다는 것이다. 서구문명이 과거의 어느 문명보다 더 위대하고 우수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변화에 있다. 또 사람의 어울림의 확대는 정신력에 자유를 주어 무지의 베일을 걷어 올림으로써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정의를 촉진하고, 권리의 평등성을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에 의해서만 제약되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문명을 발전시킨다. 사회제도가 이렇지 못하면 문명의 발전은 중단되고 퇴보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이 가난한 어부와 유태 농민에게 가르쳤던 단순한 진리 이상의 교훈을 정치경제학과 사회과학기 가르칠 수 없다.(527)
제 4장. 현대문명의 쇠퇴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하면 문명에 엄청난 자극이 되는 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하고 만다. 우리 문명과 같은 유형의 문명은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한다. 정지란 있을 수 없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사회 진보의 조건은 어울림과 평등이다. 현대의 발전은 정치적, 법적 평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예를 들면 노예제도의 철폐, 신분의 폐지, 세습적 특권의 일소, 자의적 정부를 대신하는 의회제도의 도입, 종교 문제에 있어서 개인적 선택권 보장, 지위의 고하와 힘의 강약을 막론한 신체와 재산의 평등한 보장, 거주 이전, 직업 선택, 언론출판의 자유 확대 등이다.
권력이 세습되지도 않고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국민에 의한 정부가 최악, 최저질의 전체정부로 변화하는 현상은 부의 불평등 분배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도둑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되는 경향을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더 강하고 뚜렷하게 나타난다.(537)
부패가 만성화되고, 공공심이 소멸되고, 명예와 선행과 애국심의 전통이 약해지고, 법이 무시되고, 개혁의 가망이 사라지면, 고통받는 대중 속에서 화산과 같은 힘이 생겨 어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계기로 사회를 산산조각 내고 만다. 이런 와중에서 강력하고 분별없는 자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대중의 맹목적 요구 또는 대중의 광포한 열기를 이용하여, 이미 활력을 상실한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제쳐놓게 된다. 이렇게 되면 칼은 펜보다 강해지고 야만족인 힘과 거친 광기가 교차하면서 문명은 혼미 상태에 빠져 쇠퇴하고 만다.(538)
토지가 독점된 사회에서 물질적 진보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고, 이러한 경향이 계속 진행되면 문명은 하강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도처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생존 투쟁의 강도가 높아지고, 부를 위한 경쟁에서 남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온 신경을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사회를 개선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든다. 모든 문명국에서 신경을 혹사하고, 영양이 부족하고, 거처가 불결하고, 작업이 불건전하고 단조로우며, 어린이가 이른 나이에 노동을 하고, 부녀자들이 험한 일과 범죄에 물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 늘어가고 있다.
제 5장. 중심적인 진리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서 악이 발생하는 현상은 현대 문명이 진행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이것은 진보의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현대 문명을 필연적으로 멈추게 할 하나의 경향이다.
풍요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고 짐승처럼 만드는 빈곤과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가지 악들은 정의를 부정하는데서 발생한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베풀어준 기회를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는 근본적인 정의의법칙을 무시하였다. 우리가 아는 한, 큰 안목으로 볼 때 정의는 우주의 최고법칙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서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왔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떠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ㅏ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 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 덕목을 중시화지 않는 자가, 심지어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 있다.(546)
자유와 미덕은 빛과 색채의 관계와 같다. 자유와 부는 햇빛과 곡식의 관계와 같다. 자유와 지식은 눈과 보이는 대상의 관계와 같다. 자유는 발명의 천재이고, 국력의 근육이며, 국가 독립의 정신이다. 자유가 신장되면 미덕이 자라고, 부가 증가하고, 지식이 늘어나고, 발명이 인간의 힘을 배가하며, 자유를 누리를 국가는 힘과 정신에서 다른 국가를 능가하게 된다. 반면에 자유가 위축되면 미덕은 사라지고, 부는 감소하고, 지식은 잊혀지고, 발명은 중지되며, 한때 무력이나 기술에서 융성했던 강대국이 자유로운 미개인에게 힘없이 멸망당한다. 자유라는 태양이 아직도 충분히 빛나지 못했지만, 모든 진보는 자유가 이룩한 결과이다.(547)
결론
개인의 삶의 문제
저자가 제기한 내용은 쉽사리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벌써 수용되었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은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는 되풀이해서 세워져왔다. 그러나 진리와 정의는 되풀이해서 무너지고 말았으며 유혈사태가 발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위와같은 학설들을 검토한 결과 이들이 오류임을 알게 되었다.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많이 증가하는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맬서스의 인구론) 인간의 힘이 낭비되고 인간이 커다란 고통을 겪는 원인은 자연법칙에 있지 않고 인간이 무지하고 이기적이어서 자연법칙에 순응하지 않는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진보는 인간 본성의 개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일반적으로 불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현대 세계에서 미래의 삶에 대한 믿음을 추방하고 있는 악몽은 격파되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육신과 감정으로 싸여있는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며, 희미한 꿈과 같은 철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관념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육체로부터 자유로줘져서 보이지도 바라볼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순수한 곳에 이르면, 하나님이 영혼의 지도자이자 왕이 된다. 그곳에서 영혼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인간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끝없이 바라보면서 지극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저자는 물질적인 진보가 가속화되는 사회속에서 빈곤의 문제가 있는 것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이론(임금이론, 인구론, 진화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진보로 인해 생기는 부가 임금이나 이자로 노동자나 자본가에게 돌아가지 않고 토지소유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결과적으로 빈곤과 불황, 나아가 문명의 멸망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최근 LH공사의 직원들이 내부자 정보를 통해서 토지를 구입하고, 시의원이나 구의원들이 개발정보를 가지고 토지를 매입하여 토지의 용질을 변경하여 막대한 시세차액을 챙기는 것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극단적으로 토지를 공동소유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능하기에 지대조세제, 토지로부터 생긴 가치를 지대로 모두 환수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부동산의 불로소득은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공동체 전체의 노력, 예를 들어 SOC투자로 도로가 생기고, 전철역이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시세차익을 토지소유자가 모두 챙겨가는데 이를 적절하게 환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저항이 상당하다. 새로운 법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명확하다.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는 사회, 어울림과 평등을 통한 진보의 열매를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회를 꿈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