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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벨 훅스, 문학동네)

 

Feminism is for everybody

 

 

저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페미니즘에 한걸음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초청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저자 본인이 유색인종으로 백인 여성이 주도하던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모두가 이 성차별주의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촉구한다.

 

 

서론. 페미니즘에 한 발 더 가까이

 

페미니즘하면 약간 화난 여성들을 떠올리게 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여자든 남자든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을 받아들이게끔 사회화 되어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잘 알게 되면 더이상 페미니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말이다. 투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혁명을 통해, 우리는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완전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우리의 꿈을 실현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오라.”(22)

 

1장. 페미니즘 정치_우리가 서 있는 곳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차별주의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페미니즘이 반남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페미니즘 활동가들 사이에 반남성 정서가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초기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대부분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기 전 남성들과 함께 계급주의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싸운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남성들은 세상을 향해서는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면서 정작 동료 여성들은 무시했고, 이런 환경에서 여성은 남성중심주의의 본성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 혁명적 페미니스트(revolutionary feminist)

- 개혁주의 페미니스트(reformist feminist) 

페미니즘 운동은 초기부터 양극화되었다. 개혁파들은 젠더 평등을 더 중시했다. 혁명파들은 기존체계를 조금 손보는 것으로 여성이 좀더 권리를 차지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예 그 체계를 뜯어고치고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일터에서의 젠더 평등에 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개혁적 페미니즘은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를 총체적으로 재편해 나라 전체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주의에 맞서게 해야 한다는 현대 페미니즘의 급진적인 토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학식이 뛰어나고 교육 수준이 높고 대개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특권층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2장. 의식화_꾸준한 회심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혁명적 페미니즘의 의식화 교육에서는 지배체계로서의 가부장자에 대해 꼭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가 어떻게 일상화되었으며 어떻게 유지되고 영구화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희생되고 착취당하고 더 나쁜 경우 학대받는지에 대한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하지만 여성학 강의가 의식화 모임을 대체하자 대중적 기반을 다질 가능성을 잃게 되었다. 의식화 모임이 와해되면서 페미니즘의 옹호자가 되려면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고 그에 근거해 페미니즘 정치를 수용할지 말지 선택해야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졌다. 

의식화 운동이 와해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은 직장에서의 평등과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운동 방향을 전환했다. 여성을 보상받아야 할 젠더 평등의 피해자로 해석하는데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다보니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우선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잃고 말았다.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배반하곤 했다. 

 

우리의 문화적 인식체계에 페미니즘은 곧 반남성운동이라는 억측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 남성의 특권을 벗어던지고 페미니즘 정치를 기꺼이 포용한 남성은 투쟁의 소중한 동료이지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반면 여성이라 해도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에 젖은 채 페미니즘 운동에 잠입한 여성은 운동에 해를 입히는 위험한 존재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여성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치의 기치를 내건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끝내 소멸해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의식화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진정한 성차별주의에 대한 인식없이 단지 반남성운동으로 페미니즘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차별주의에 동의한다면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3장. 자매애는 여전히 강력하다. 

자매애는 강력하다(sister is powerful).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들의 유대는 인정과 지지를 받는다. 사람들은 남성들이 집단을 만들면 단결하고 서로 지지하고 협력하고 개인적인 성취와 인정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아주 당연시해버린다. 하지만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의 유대는 불가능했다. 그런 행동 자체가 반역행위였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의 유대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게 도이상 자신과 자신의 몸을 남자의 소유물로 인식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결정권과 효과적인 피임, 임신선택권, 강간과 성희롱의 근절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는 단결해야 했다. 여성이 겪는 고용차별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로비활동을 벌여 공공정책을 개선해야 했다. 여성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끄집어내 이를 뜯어 고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 강력한 자매애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계급 특권을 지닌 백인 여성들이 소외 계층 여성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든 여성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지녔던 페미니즘 운동은 점점 계층화되었다. 운동의 구호로 외쳤던 자매애는 여성들에게 점점 중요치 않아졌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데다 성차별주의를 더이상 문제시하지 않는 그릇된 인식 또한 널리 퍼져 있기에 비판의식을 키우는 페미니즘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어린 여성들이 자라면서 저절로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된다. 

 

 

4장. 비판 의식을 키우기 위한 페미니즘 교육

페미니즘 이론은 처음부터 성차별주의적 사고가 어떻게 작용하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 변화를 이끌어낼지 여남 모두에게 설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대학에 여성학 강의가 신설되면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제도적 정당성도 갖춰졌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이 거둑 학문적 성과에 대한 존중, 과거에 쓰인 그리고 현재 쓰이는 여성 저작물에 대한 인정, 그리고 커리큘럼과 교육학에 자리한 젠더에 따른 편견을 철폐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혁명을 일으켰다. 

(여성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거나 좋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처음에는 의도적인 무게두기가 필요하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 분야에서 편견이 배제된 커리큘럼이 사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미래의 페미니즘 운동은 페미니즘 교육을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해야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제공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지 않으면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주류 언론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정보로 인해 늘 힘을 잃고 말 것이다. 

 

 

5장. 우리의 몸, 우리 자신_임신 선택권

페미니즘 운동이 민권운동과 성해방운동에 뒤이어 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문제들을 중요시하는 게 타당해 보였다.

페미니즘 운동을 촉진한 첫번째 이슈는 바로 섹슈얼리티 문제였다. 다시 말해 여성이 언제 그리고 누구와 섹스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문제였다. 

성혁명이 정점에 달했을 때 자유연애라는 이슈로 여성들은 원치 않은 임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에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피임을 할 수 없다면,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없다면 여성과 남성에게 진정한 의미의 성해방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됐다. 

 

임신중단권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계급에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계속 임신중단 수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중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불을 다시 지피려면 임신선택권을 페미니즘 의제 한가운데에 놓아야 한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여성들이 선택할 수 없다면 삶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6장.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모의 아름다움

여성의 몸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사고, 즉 우리의 가치가 외모에만 달려있으며 어쨌거나 보기 좋아야 하고 특히 남성이 보기에 그래야한다고 믿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브래지어와 거들, 코르셋, 가터벨트, 치마, 불편한 하이힐을 벗어던지라. 

페미니즘의 개입으로 의복과 인체 혁명이 촉봐되면서 여성은 우리 몸이란 본디 타고난 그대로 사랑하고 추앙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주어 여성들도 나이듦을 좀더 긍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으로서의 현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미를 정의하는 고루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다시 받아들였다. 성차별주의적으로 정의된 미의 기준을 다시 미화하려는 움직임은 분명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적 패션업계와 화장품업계의 이익과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현대 패션잡지는 거식증의 위험을 다루는 기사를 실으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욕망의 대상으로 비쩍 마른 젊은 여성들의 의미지를 퍼붓는다. 이 혼란스러운 메시지는 누구보다도 페미니즘 정치를 받아들인 적 없는 여성들에게 치명적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인지 모든 여성들이 전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위험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도, 그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묵살해서도 안되고 가부장제적인, 성차별주의적인 미의 기준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7장. 페미니즘 계급투쟁

새롭게 형성된 여성해방운동 내에서도 대체로 백인이 주류인 그룹에서 여성들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기준은 다름아닌 계급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존 계급구조를 유지하되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해방운동 개혁파와 기본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낡은 패러다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상호성과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모델을 세우자는 좀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세력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미니즘 운동이 진보하면서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로 구성된 특권 그룹이 백인 남성과 동등한 계급 권력을 손에 넣게 되자, 계급투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중요성을 잃고 말았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에서 여성이 전업주부로 가정에 속박되고 예속된다고 느끼는데서 오는 불만을 '이름없는 문제’라고 했지만 이는 소수의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의 위기였을 뿐이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에게 전업주부가 될 권리는 오히려 해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기존 구조를 유지하며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특권 계급 여성들은 같은 계급 내의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원했다. 같은 계급의 남성과 사회적 평등을 이루려는 페미니즘의 노력은 비백인에게도 경제력과 특권을 손에 넣을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면 백인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는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자본주의의 두려움과 교묘히 겹쳤다.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사실상 백인 권력을 지지함으로써, 주류인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가 권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방조했으며 동시에 급진주의 페미니즘 정치를 약화시켰다. 

 

특권 계급 여성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들의 종속상태를 유지해야만했다. 결국 계급 권력이 페미니즘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런 결탁이 페미니즘 운동의 약화에 한몫했다. 여성들이 남성과 다를 바 없이 활동하게 되고 더 높은 계급 지위와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자 페미니즘 정치는 약화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페미니스트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계급 문제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연대를 위한 토대를 쌓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원을 공유하고 개인적 성장을 위한 기회를 얻을 미래를 더 생생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8장. 글로벌 페미니즘

계급권력을 쥔 백인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을 자기네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들은 지도자이며 나머지는 추종자일 뿐이라고했다. 이것은 백인 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의 서구문화에 영향을 받아 신식민주의 사고를 띠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페미니스트들이 전 세계 여성의 평등을 위해 싸우고자 한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계급권력을 가진 개별 페미니스트들이 제국주의적 환상을 전세계 여성들에게 투사해 문제가 발행했다. 

 

수많은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인종과 젠더, 계급, 국적을 포괄하는 관점을 채택했음에도 백인 ‘파워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평등이 제국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식의 페미니즘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탈식민지화된 페미니즘은 다른 무엇보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성차별주의가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섭식장애나 목숨을 담보로하는 성형수술을 여성 할례와 연결지으면,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관행에 자리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misogyny)가 바로 여기 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파악(미러링)할 수 있다. 

 

글로벌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 그리고 억압을 종식하기 위한 전 지구적 투쟁에 손 내밀어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9장. 일터의 여자들

여성 해방의 열쇠로 일을 강조한 결과 많은 이들이 여성들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저임금 노동이 남성중심주의로부터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들을 해방해주지는 않는다. 

 

일이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경제적 자립이 꼭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경제적 자립을 일과 연관짓기보다는 해방의 수단으로 본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종류의 일이 여성해방을 가져다줄지 생각해봐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게끔 이끈 건 사실 소비 자본주의다. 경기 침체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때 전업주부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여자가 직장을 구하지 않고서는 이제 백인 중산층 가정이 누리를 계급적 지위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좀더 완벽한 경제적 자립의 길은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행복한 삶의 이미지와는 다른,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실직의 원인, 그리고 가부장제하에서 가장의 위치가 보장해주는 확고한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 원흉으로 일하는 여성을 지목한다. 미래를 위한 중요한 페미니즘 의제는 남성들에게 여성과 일의 관계에 관한 실제 상황을 보여주고 그들이 일터에서 여성을 적으로 돌리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들이 전반적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면 경제적 자급자족은 불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대중매체는 계급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일자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슈에서 여성과 남성을 대립하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여성들과 엘리트 여성들간에도 갈등이 일어나게 한다. 문제는 경제적 자립 수단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10장. 인종과 젠더

백인 여성들은 흑인 인권 운동의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이에 근거한 억압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면서 인종과 젠더를 나란히 놓고 고려한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림에서 아예 인종을 제거하여 차이를 지우고 부인했다. 젠더를 앞세운다는 말은 백인 여성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있다는 뜻이자 여자라면 누구든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 운동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성이 일종의 카스트 같은 성별 계급에 속해 있다는 개념을 제시하며 여성에 대한 억압을 깨는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백인 여성들이 오히려 모든 여성의 공통된 경험 이면에 자리한 여성들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를 꺼렸다. 백인 여성들이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리하여 페미니즘 운동이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맞서지 않는다면 백인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 사이에 진정한 자매애가 피어날 수 없다. 

 

인종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자 여자들은 모든 층위에 존재하는 차이라는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가 결합된 해로운 장벽들이 여자들을 갈라놓는다. 

 

실제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우리 사회안에 중요한 이슈이다. 저자는 백인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들간의 관계를 말하지만 우리 사회안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백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유색인종(동남아, 흑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존재하고 이것이 성차별과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런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먼저 깨달아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11장. 폭력 종식하기

페미니즘 운동은 가정 폭력을 끝장내기 위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은 물론 가정 폭력에 대해 보다 폭넓은 문화적 인식을 쌓아가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가부장제 폭력은 좀더 힘있는 개인이 다양한 강제력으로 다른 구성원을 통제해도 무방하다는 믿음을 토대로 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동성간의 폭력,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이 모두 포함된다. 

 

성차별주의적 사고는 남성중심주의를 뒷받침하고 그로 인한 폭력을 지지한다. 노동자 계급이면서 실직자인 많은 남성은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하에서는 자신의 일에서 권력을 맛보지 못하므로 자신들이 절대적인 권위와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가정에서 대리만족하라고 부추겨진다. 

 

전쟁이나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 십대에 대한 폭력,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 등 어떠한 방식의 폭력이든 사회 통제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면 여남을 불문하고 반대해야만 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종식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12장. 페미니즘 남성성

페미니즘 사상이 발전하면서 각성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남성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가 진짜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문제가 단지 남성들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성차별주의가 유지되고 영구화되는 데 여성들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보수적인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남성혐오자로 묘사했다. 페미니즘 운동 내에 반남성 분파나 그런 정서가 보인다 싶으면 페미니즘에 흠집을 내기위해 대중매체는 그 사실을 집중조명했다. 페미니스트를 남성혐오자로 몰아세우는 이면에는 페미니스트가 모두 레즈비언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페미니즘 정치는 남성중심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그 외연알 넓혀 가부장제가 남성들에게 성차별주의적 남성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남성들 역시 모종의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인식을 포괄했다. 

 

페미니즘내의 반남성 분파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런 남자들때문에 모든 남자는 억압자라거나 모든 남성은 여성을 혐오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재현하기 위해 모든 남성을 적으로 간주했다. 남성에 대한 적대는 일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 특권과 계급 권력을 향한 욕망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수단이었다. 

 

일자리가 없고, 일한 만큼 보상도 받지 못하고, 여자들이 더 많은 계급 권력을 쥐는 상황에서 돈 없고 힘없는 남자들은 자기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소년과 남성을 보듬어안으면서, 소녀와 여성이 꿈꾸는 모든 권리를 소년과 남성도 누려야한다고 요구하는 페미니즘 남성성을 수용하는 페미니즘이라면 미국 남성들을 새로 내어나게 할 수 있다. 특별하게도 페미니즘적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삶을 돌보고 긍정하는 방식으로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한국사회안에서 20대 남자현상은 계급화의 문제를 젠더화를 치환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든다. 실제 문제는 여성이 많은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자체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방향을 젠더의 문제로 돌려 남성들의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표출시키려 하고 있다. 

 

 

13장. 페미니스트 부모되기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사회운동 가운데 우리의 문화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문화가 아니며 부모가 자식을 자기 의지대로 조종하는 소유물로 본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운동이다. 

 

남성중심주의만 강조하면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어떤 수단으로든 힘없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수 있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의 위계 질서 안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용인되듯 아이에 대한 어른의 지배도 용인된다. 

 

아동에 대한 남성의 성적 학대나 폭력 뿐만 아니라 아동에 대한 여성의 성적 학대, 폭력도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이나 정신적 학대도 심각하다. 

 

그 어떤 가족형태보다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성된 가부장제 가족을 높게 치는 문화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기네 가족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에 부합하지 않을 때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아이들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 지배자가 존재하는 환경에서라면 사랑은 꽃피울 수 없다. 부모가 혼자든 아니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가장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랑이 넘치는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를 자존감을 가진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할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가족 친화적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인이 가부장제적으로 아이를 지배하지 않아야 비로소 아이가 안전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가정을 꾸릴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환경속에서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가정의 가부장제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가족안에 절대 권위자가 아내를, 아이들을 억압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권위를 잘못 사용하기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 권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위임받은 권위를 가정안에서 부모가 행사해야 한다. 건강하게 권위를 행사함으로 자녀를 양육할 필요가 있다. 

 

 

14장. 결혼과 동반자 관계를 해방하기

페미니즘 운동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숫처녀가 아니거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은 여성은 비난하면서도 남자는 성적 욕망을 품거나 그 욕망을 행동으로 옮겨도 용인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중잣대와 충돌했다. 

 

페미니스트들을 성노예제를 끝장내자는 주장을 지지했고, 부부간 성폭행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성이 성적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와 성적 만족을 추구할 권리를 옹호했다. 

 

페미니즘의 의제로 이성애 문제가 떠올랐을 때 수없이 논의된 주제가 바로 전희 없는 섹스였다. … 페미니즘 운동이 성적 쾌락에 대한 성차별주의적 통념을 비판함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듯이 이 또한 여성과 남성이 좀더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성적 유대관계에 일어난 본질적 변화는 남자도 집안일과 육아를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의식 변화 같은 가정내에서의 다른 변화로 이어졌다. 

 

평등과 존중이라는 원칙, 그리고 동반자 관계를 실현하고 오래 지속하려면 상호 만족과 성장이 필수라는 믿음의 원칙 위에 세운 동료애적 관계의 가치를 알리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자유로운 섹스, 출산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등결혼을 꿈꾼다. 그래서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도 등장한다. 결혼과 섹스, 출산과 자녀양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성경의 가치와 상이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보완이 가능할까? 성역할의 차이?

 

 

15장. 페미니즘 성정치_상호자유의 윤리학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주입받는다. 즉 성욕과 성적 쾌락은 늘 그리고 오로지 남성의 전유물이며 여성으로서의 덕목을 지니지 못한 여성들이나 성적 욕구나 갈망을 드러내는 거라고 배운다. 성차별주의적 사고는 여성을 성녀 또는 창녀로만 구분했으며 여성이 건강한 성적 자아를 구축할 만한 토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믿을만한 피임기구가 등장하기전 여성은 섹스할 때마다 임신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남성은 섹스를 원하고 여성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려면 믿을만하고 안전한 피임기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편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몸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한편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이 원할 때 원하는 상대와 섹스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 투쟁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반성차별주의적 방식으로 우리 몸을 존중하는 법이나 해방된 섹스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비판적 페미니즘 의식화 교육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권력 문제와 단단히 이어져 있다. 

 

해방된 성생활 그리고 성적 쾌락과 충만함을 서로의 선택과 합의가 보장되는 환경에서 가장 잘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가부장제가 뿌리깊게 남아 있는 사회에서 성적 감정과 정체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줄 페미니즘 이론이 다시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담론은,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이 다시 한번 시작되게끔 반드시 수면위로 올라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결혼관계안에서의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성경은 결혼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섹스를 터부시 하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에게 자유롭게 성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16장. 완전한 행복_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

여성해방운동의 최선봉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레즈비언과 양성애자 여성들은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의 고정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미 좌파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페미니즘 운동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이 젠더와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미 심리적으로는 여성해방의 기치를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덕 관습을 거스르는 성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레즈비언들에게 여성이 자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남성에게 기댈 필요가 없음을 배웠다. 

 

여성으로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와 몸을 나누고 함께 살지 선택할 자유는 동성애자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급진주의 레즈비언들 덕분에 크게 향상됐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예나 지금이나 레즈비언들은 모든 유색인종 여성들이 성적 취향이나 정체성에 상관없이 인종차별주의에 맞서고 저항해야 했던 것처럼 동성애 혐오에 맞서고 대항해야 했다. 동성애혐오를 영속화하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는 여성들은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를 고수하면서 자매애를 원하는 여성들만큼 착각에 빠져 있으며 위선적이다. 

 

동성애혐오에 대한 싸움은 언제나 페미니즘 운동의 한 축을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애자 여성들이 레즈비언을 계속 경멸하며 부차적인 존재로 보는 한, 여성들이 자매애를 키워나가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구적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레즈비언 활동가들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이번 장은 저자가 레즈비언들과의 관계에서 배운 교훈과 페미니즘 운동에서 레즈비어니즘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한다. 여성해방운동과 성해방운동중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선봉에 레즈비언 여성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들은 자신이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이처럼 레즈비언이나 게이, 양성애자들이 자연스럽게 커밍아웃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우리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힘든 사회이다. 

 

 

17장.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_페미니즘의 심장

페미니즘 운동 초기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낭만적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여성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를 가부장제적인 연인과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 연인은 우리의 사랑을 이용해 우리를 정복하고 종속하려 하기에 유혹적인 덫과 다름 없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은 여성들의 완전한 자아실현을 가로 막기 위해 사랑이 놓은 또다른 덫에 불과하다고 했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사랑은 소유의 개념 그리고 한쪽은 사랑을 주기만 하고 다른 쪽은 받기만 해도 된다는 지배와 복종의 패러다임과 연결되어 있다.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중심주의적 결합은 돌봄의 정서를 가진 젠더인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주어야 하고 권력과 공격성을 지닌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보호해준다는 기본전제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이성애자 가정에서 수많은 경우에 남성은 돌봄에 보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가진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해 가족을 통제하고 강압하는 폭군이 됐다. 페미니즘 운동 초창기에 이성애자 여성들은 더이상 고통받지 않으려고 사랑의 유대를 끊기 위해서 운동에 뛰어들었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현명함과 사랑이 넘치는 정치다. 페미니즘 정치의 정신은 지배를 종식하기 위한 헌신이다. 사랑은 결코 지배와 강압에 기반한 관계에 뿌리내릴 수 없다. 가부장제적 사랑의 개념을 매섭게 비판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페미니즘적 비전 :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된다. 

진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우리를 속박에서 자율, 사랑이 없는 곳에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상호동반자 관계야말로 사랑의 토대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야 말로 이 시대의 가부장제적 잘못된 구조, 지배와 강압을 해결하고 사랑을 이루는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와는 다르다. 

에베소서 5:22–25 (NKRV)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이 위계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죽기까지 하라고 말하고 있다. 

 

 

18장. 페미니즘적 영성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적인 실천을 도모하는 저항운동이다. 서구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여성들은 남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과 함께할 수 있는, 남성의 지배 없이도 신에 봉사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수도원 생활방식에 의존했다. 노리치의 줄리엔은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로, 우리는 그 안에서 끝없이 태어나고 그 없이는 결코 세상에 올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성차별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용인하는 기독교 교리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익혀나가는 젠더 역할에 다방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창조중심적 기독교 영성의 각성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운동과 연결됐다.

 

해방신학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집단을 해방하는 것이 신의 의지에 대한 헌신을 반영하는 핵심적인 신앙행위라고 본다. 가부장제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근본주의 가부장제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의 확산을 막는 장벽이다. 사실 페미니즘 사상가, 특히 여성의 임신선택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라고 부추기고 범행을 묵인한 우익 종교 근본주의자들보다 페미니스트들을 악마화하는 집단도 없다. 처음에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하자 수많은 여성이 운동에서 멀어졌다. 이후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창조중심적인 새로운 비판과 해석을 내놓자 여성들은 페미니즘 정치와 화해하면서도 기독교적 실천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은 초기에는 영적 세계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시민권과 세속적인 성과에 더 집중했다. 주류 대중매체는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한다는 사실을 조명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반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종교 사상이 변화하도록 이끌어 더 많은 여성들이 신성과의 연결을 찾아내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발흥이 진보적 영성을 위협한다. 근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게끔 부추길 뿐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고히 한다. 이에 임신선택권에 대한 탄압이 뒤따른다. 이와 동시에 종교적 근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성에 수많은 형태의 성적 강제를 용인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억압적인 통념을 불어넣는다. 반드시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조직화된 종교를 주시하고 비판과 저항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근본주의와 페미니즘은 서로를 타도해야할 대상이라고 본다. 텔레반의 등장으로 샤리아 법을 주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흥으로 여성의 인권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종교적 영성의 추구는 인권의 후퇴를 가져온다. 성경의 내용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여서 새롭게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 나라는 남자와 여자가, 종과 주인이, 부모와 자식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원리가 지금 21세기에는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19장. 페미니즘의 미래

진정으로 선구적이려면 우리의 상상은 구체적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현실을 넘어설 미래를 그릴줄도 알아야 한다. 

 

1960년대 초 여성해방운동이 갓 시작되었을 때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운동을 이끌며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 시스템의 힘을 약화하고 이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기존 체제하에서 여성의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한 개혁주의적 싸움도 지속했다. 그들은 지배의 문화에 찌든 이 세상을 공동체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바탕이 된 참여적 경제의 세상으로, 인종과 젠더에 따른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상호성과 상호의존에 대한 인정이 지배적인 정서를 이루는 세상으로, 지구의 생명을 지키며 모든 사람이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전 지구적인 생태주의 비전이 실현된 세상으로 바꾸는 꿈을 꾸었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의 운명을 바꾸고 그들이 각자 개인적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내는 것을 근본적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루려면 운동은 젠더 평등 의제를 뛰어넘어, 모든 여성들 특히 빈곤틍 여성들을 껴안을 수 있는 문맹퇴치운동 같은 기본적인 활동부터 시작해야 했다…. 요즘 학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페미니즘 이론은 대부분 자기들만 아는 은어 같은 어려운 학술용어로 쓰여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퍼뜨리고 싶다면 페미니즘을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자배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근절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투쟁이므로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선구적인 급진적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제국주의-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 내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젠더와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각자의 삶을 용감하게 되돌아보라고 격려한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을 준다. 페미니즘 사고는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평등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고 동시에 지배를 종식할 방법을 제안한다. 상호성이 일상인 세계에서는 때때로 모두가 평등하지 않더라도 그 불평등의 결과가 반드시 복종과 식민지화, 비인간화는 아닐 것이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하면 왠지 성이 난 여성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 의미를 규정한다. 이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복음을 치환하여 읽어도 별 무리가 없이 읽혀진다. 복음은 모든 차별과 착취, 억압을 종식시킨다. 높아진 것을 낮추고, 굽은 것을 곧게 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기에 페미니스트들은 기독교를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그것을 시대적 상황속에서 읽고 해석한다. 시대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성경해석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경의 가르침이 페미니즘과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충실성(Factfulness)라는 책이 있다. 사실에 기반해서 주어진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잘못된 해석을 한다. 공포본능, 크기본능, 간격본능등이 우리안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충실성(truthfulness)에 따라 우리 주변의 상황과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진리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진리가 진리되어도록 진리충실성을 따라야 한다.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가치가 성경의 진리와 부딪히지 않는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함께 대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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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생각의 힘)

-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4차 산업혁명등 사회 시스템의 변화에 따라서 노동시장은 더욱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데 처음 취업시장에 들어올 때 내부자(번듯한 일자리, 대기업 혹은 공기업)가 될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처음 외부자(중소기업 혹은 비정규직)로 밀릴 경우 이후 내부자로 승급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80년대 마지막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해 93년도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당시 학과의 게시판에는 유력 대기업의 구인 광고가 가득했었고 괜찮은 기업의 지원서를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IMF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급변했다. 지금의 20대들이 최고의 스펙을 가진 세대들이지만 취업전쟁을 겪고 있다. 

저자는 과거 60년대생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부를 대물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방법은 차별화된 사교육, 자신들만의 네트워킹을 이용한 경험의 전수, 부동산 증여등을 통해서 같은 세대안에 계층이 나뉘어지고 공고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이러한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부를 통해서 상위 10%는 해외 유학, 어학 연수, 인턴 생활을 하며 자신의 스펙을 점점 높여 가는데 반해서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습 중산층 사회의 강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의 차이이고 노력하지 않았다라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이 세습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내려놓음과 동시에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이것을 양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지금의 불평등과 세대 간의 격차, 세대안의 격차가 왜 발생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가 사역하는 죠이 공동체 안의 학생들이 어떤 자리에 서있는가 제대로 파악해야 그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지음, 생각의힘)                                                   정희원 간사(사역연구소) 정리

 

1장 문제는 노동시장

-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기업당 재직 연수가 짧다. 일자리가 안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한국 기업 특유의 연공서열제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너네 아빠 직영 아니야? 그럼 너네 집 못 사는 거야?’ 공공연한 작업장 내 차별도, 직영은 다 쉬는 휴일 근무와 야간 근무를 떠맡아야 하는 괴로움도, 불황기 가장 먼저 해고당하는 고용 불안정도 2차 노동시장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다.

오늘날 20대들은 첫 일자리로 사실상 ‘신분’이 결정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내부자로 남는다. 그러나 그 반대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직이나 전직을 해도 내부자는 또 다른 내부자의 일자리에 가고, 외부자는 계속해서 외부자의 일자리를 떠돈다.

‘성 안 사람’(부르주아지)

일자리의 양이 적은 것이 아니라 번듯한 괜찮은 일자리 창출이 적은 것이 숨겨진 진짜 문제

첫 번째 관문은 명문대 진학(이중 선별 과정의 1단계)

대기업 정규직 취업 기회가 명문대생들에게 주로 열려 있고, 학벌에 따른 임금격차는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노동시장 지위를 거쳐서 발생한다.

10퍼센트만이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다.

 

월 급여 200만 원대 취업자는 남성이 6.4만 명이고, 여성은 4.9만 명이다. 월 급여가 200만원이 못 되는 저임금 일자리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75퍼센트 더 많은데, 월 급여 200만 원대 일자리에서는 거꾸로 남성이 30퍼센트 더 많다. 월 급여 300만 원 이상 ‘번듯한 일자리’를 얻은 남성과 여성 숫자를 보면 남성이 훨씬 더 많다.월 급여 400만 원 이상으로 가면 남성 2.4만 명, 여성 9,000명으로 남성 우위가 더 심화된다.

 

‘번듯한 일자리’에 속하는 월 급여 300만 원 이상 일자리 숫자를 전공별로 따져보면 공학계열 2만 9천명, 자연계열 6천명, 의약계열 1만 3천명 등 이른바 ‘이과’가 4만 8천명으로 전체 ‘번듯한 일자리’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한다.

여성의 경우 인문, 사회계열 등 이른바 ‘문과’ 전공자 비중이 남성보다 높다.

1차 노동 시장 진입 인원의 69.7퍼센트는 이들 명문대 또는 상위권 대학, 학과 입학생이 차지한다. 나머지 30.3 퍼센트를 놓고 ‘비명문대’ 출신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어느 때보다 극심한 경쟁을 경험하는 세대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자 급증의 이면에는 전문계 또는 특성화고의 몰락이 있다. 과거 실업계 고교라 불리던 이들 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을 선택하는 인원이 2000년대 초중반 들어 급감했다. 특성화고를 졸업한 뒤 질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반계 진학을 선택한 결과다. ‘고졸 백수 집단의 폭증’

저출산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세대는 2000년대 생이지, 1990년대 생이 아니다. 1990년대 생은 오히려 직전 연령대보다 숫자가 많고, 따라서 더 치열한 상급학교 진학 및 취업 경쟁을 벌여야 한다.

오늘날 20대가 느끼는 ‘취업난’은 이전 세대가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 겪었던 수준인 셈

 

2장 좁아진 중산층 진입의 문

서울의 중간 정도 사립대나 지방 거점 국립대를 나와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일하는 시대는 이제 R&D 분야를 제외하면 과거의 일이 되겠다....

‘번듯한 일자리’에 속한 대기업 일자리 중 일반적인 사무직군 일자리가 가파르게 감소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을 나온 흙수저 남성’이 가차 없이 밀려나는 대신 ‘서울 명문대를 나오고 외국어에 능통한 중상위층 여성’은 이전보다 주목받기 시작했다.

‘번듯한 일자리’ 중 일부가 사라지고 이전에는 아래쪽 소득 분위에 속해 있던 일자리가 그 자리를 메움으로써 해당 분위의 평균을 떨어뜨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방 4년제 대학과 대학원, 2-3년제 대학 출신 취업자의 임금 수준이 그리 악화되지 않은 것은 ① 이공계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자에 대한 수요 ② 서울 4년제 대졸자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이 가는 2차 노동시장의 일자리 수나 여건은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

결국 2010년 이후 나타나는 대졸자 취업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번듯한 일자리’ 또는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서울 4년제 대졸자의 취업시장 여건이 크게 악화된 것

노동시장의 ‘내부자’가 될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첫 일자리에서 ‘외부자’로 밀릴 경우 내부자로 승급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기 때문

 

내부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

2010년 이후 가장 많이 줄어드는 직종은 ‘경영, 회계, 사무 관련’ 직업 / ‘금융, 보험 관련’ 직업도 반 토막 / 이들 직종에는 1차 노동시장에 속한 일자리가 많기 때문에, ‘번듯한 일자리’라는 범주에 한정한다면 감소폭이 커지게 된다.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난 ‘직업’은 음식 서비스 종사자

고령화로 인한 보건, 의료 서비스 수요 증가 / 대졸 화이트 칼라 일자리가 줄고 그 자리를 음시 서비스와 고령자 대상 보건, 의료 서비스가 채우는 양상

여성의 약진

2010년대 대졸자 취업시장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번듯한 일자리’에서 남성의 몫이 가파르게 감소하고, 여성의 몫은 거꾸로 큰 폭으로 뛰었다.

소득 6-8분위에서의 남성 취업자 감소가 취업자 전체 중 남성 취업자의 감소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남

최상위 10퍼센트(소득 10분위)와 월 급여가 200만원 이하인 최하위 30퍼센트(1-3분위)에서의 남성 취업자 비중은 늘고 있다.

1차 노동시장의 주변부 및 ‘탈숙련화’된 대기업 일자리에서 남성의 몫이 급속히 줄어들게 되자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에 입학한 남성 입장에서는 준거 집단인 3-4년 전 선배들에 비해 여성이 강력한 경쟁자처럼 비춰질 수 있을 것(실제로 여성들에게 유리한 법안이 생겼다기 보다는,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 결과)

이는 이들 집단에서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젠더 갈등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기초를 이룬다.(20대 남성 마이너리티)

 

서울 4년제 대졸 취업자 중 월 250-310만 원을 받는 집단에서 여성 몫이 가파르게 증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서울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여성 비율이 늘어났다는 것

문제는 여성 몫 증가와 남성 몫 감소가 2010년 이후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 괜찮은 일자리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성 취업자 및 구직자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첨예한 경험을 하게 된다.

중숙련 일자리가 사라진다.

대기업 사무직 일자리의 축소 : ‘루틴화(routinization) 가설’ 또는 ‘업무편향기술발전 가설’

루틴화는 업무 내에서 반복 수행 비율이 높고 그 때문에 컴퓨터 등 IT 기술을 이용한 자동화가 용이한 업무에 대해 기업들이 사무자동화(OA)에 투자해 고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업무편향기술발전은 기계로 쉽게 대체가 가능한 업무를 중심을 기술 변화와 그로 인한 직업 특성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

하지만, 고위 관리자, 연구직,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에 해당하는 전문직 일자리는 IT  기술로 대체되지 않기 때문에 고용규모가 줄지 않고 / 단순한 일을 하는 저숙련 일자리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기계보다 사람이 더 싼 이유ㅠ 대체 가능한 인력이 늘 있으므로)

 

임금격차 축소는 고소득자 임금 증가가 둔화되었기 때문 / 고소득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임금과 연관된 개인 특성의 영향력이 줄어든 결과가 나온 것

결국 지금의 20대는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이전 세대보다 더 치열하게 벌여야 하는 처지. 그 경쟁 과정에서 성별, 계층별, 학력별, 거주 지역별로 누가 더 ‘기회’를 많이 잃는지 그리고 누가 ‘선방’하는지에서 그들의 운명이 갈린다.

90년대 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지방 국립대를 졸업해서 지방에 위치한 대기업에 취직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거나 또는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전자 산업 대기업 생산직으로 서울의 대졸 화이트 칼라 부럽지 않은 고소득을 얻는 삶의 기회는 오늘날 20대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3장 가려진 20대 : 지방과 고졸

공부 잘하면 치인트, 못하면 복학왕

‘지방대생과 고졸자’라는 주변부

지방대 출신과 고졸 이하는 오늘날 청년 담론에서 거론되지 않는 존재들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고, 따라서 노동시장에서 갖는 열등한 지위는 당연하다는 것. 그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건 ‘품성’이 나쁘고 ‘노력’이 부족한 결과다ㅠ

지방대 내부의 사람들은 지방대생이 20대 청년들의 치열한 공부 경쟁에서 이탈하는 이유를 두고 그들이 ‘예정된 패배’를 맞이하는 방식이라 말한다. (공무원 시험도 도전은 해보지만 집중력 있게 돌파하기는 어렵다. 토익을 치르라고 권해도 해봤자 안 된다는 생각에 고득점을 올릴 만큼 집중하지 못한다. 결국 지인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구할 수 있는 열악한 일자리를 찾게 된다. 겸연쩍음의 습속)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 소재 대학의 격차는 학생의 계층 격차에 기인한 것

고졸자의 문제는 중간 아래 계층의 문제

지방의 현실, 질 좋은 일자리가 없다

전문대졸과 고졸 취업자의 경우에 지방 직장이 더 급여가 높다.

지방 고용률이 낮은 이유는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한 탓

제조업 비중이 낮을수록, 서비스업 비중이 높을수록, 상용직 비중이 낮을수록 체감실업률이 높다는 결과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가 있고, 제조업이 활성화되어 있으면, 실업률이나 고용률 등 양적 지표도 개선된다는 이야기

그러나, ‘질 좋은 일자리’가 지방에 있어도 가장 좋은 몫은 서울 명문대 졸업생의 차지 / 노동 시장에서 서울 소재 명문대와 지방대의 위계질서는 엄격하게 유지된다는 의미

지방대학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울타리 바깥’으로 밀렸다는 징표인 셈

취업시장의 ‘시골’이 된 지방

 

탈산업화 또는 산업 고도화가 가장 큰 타격을 가한 곳은 지방 일자리 ① 지방은 제조업 의존도가 높다 ② 서울에 본사를 둔 서비스업이나 제조업 관리직 일자리의 지방 출신에 대한 수요가 감소 ③ 사무자동화가 진전되고 판매, 영업에서 인터넷의 비중이 커지면서 일자리 수요가 빠르게 줄어든다.(기업이 지방에서 서울로 R&D 센터를 옮기는 이유는 엔지니어들이 제품 개발이나 양산 과정에서 공장과 협업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 인력확보를 위해서는 고급 연구 인력을 배출하고 그들이 모여 사는 수도권에 터를 잡아야 한다.)

구직 청년에겐 서울 사는 것도 ‘스펙’ / 요즘 취업에 필요한 기업체 인턴, 공모전 준비, 취업 스터디 기회 등이 전부 서울에 몰려 있기 때문

탈산업화 쓰나미는 시작됐다.

상대적으로 저임금,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서비스업에서만 고용이 증가

실제로 공공부문 일자리는 20대가 원하는 ‘괜찮은 일자리’ 보다는 보육 교사, 간병인 등 40-50대 여성이 주로 지망하는 서비스업종의 일자리가 대다수를 차지

고졸은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

미래가 없는 고졸 취업자

경력을 쌓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옮기겠다는 꿈은 애초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영세업체의 경력은 아무 곳에서도 인정해 주지 않아 회사를 수십 번 옮겨도 경력직이 아니라 신입 대우를 받을 뿐

대학을 포기하고 남들보다 먼저 경험을 쌓겠다는 생각으로 특성화고를 졸업했지만 보람보다는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다는 후회가 더 크다.

고졸 제조업 취업자 가운데 대다수는 전형적인 ‘2차 노동시장’ 종사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여성 4명 가운데 1명은 결국 미취업 상태가 됨(정규직 후 경력단절형)

근로빈곤 상태에 놓은 청년들

한 번 열악한 일자리에 발을 들여놓으면 좋은 일자리로 이행하기 어려운 ‘회전문 함정’이 존재한다.

 

4장 세습 중산층의 등장

20대 노동시장의 특징 : 고소득과 안정된 지위를 보장하는 ‘번듯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많아졌다. 그리고 ‘10퍼센트의 울타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학력이라는 출입증이 필요하다. 서울의 명문대, 의치대, 소수의 지방 소재 공대에 입학하지 않으면 월 급여 300만 원 이상의 일자리를 갖기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짐

‘좋은 대학’이라는 지위를 얻느냐 마느냐는 부모의 경제력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또는 직업)와 학력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20대에게 ‘아버지 뭐 하시노?’만 물어봐도 서울 4년제 대학에 다니는지 아닌지 대강 짐작이 가능한 상황

서울 4년제 대학에서 여성의 비율 증가는 대졸-사무직 부모의 딸들에게만 열린 기회

계층의 장벽은 소득 상위 20퍼센트와 나머지 80퍼센트 사이에 둘러쳐 있다.

 

다시 작동하는 ‘명문고’ 시스템 : 소수의 고등학교가 명문대 입학을 독식 / 서울대 합격자가 소수 고등학교에 몰려 있는 현상이 심화됨(일부 지방과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가 비록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중식 지원 학생 비율이 높아질수록 SKY 진학률이 급격하게 내려감

 

중산층 자녀의 인생을 ‘설계’ 합니다.

대치동 학원 : 다품종 소량 생산 / 관리 / 학생의 생활 전반을 관리하고 생활 자체가 입시에 최적화 되도록 돕는 코치

 

IMF 사태 이후 고용 불안정이 심해지면서 대치동 전문직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의 지위를 물려받는 길은 의사 같은 전문직 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됨 / 믿을 건 자신 분. / 조직이 더는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아픈 방식으로 깨닫게 됨 /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대학 진학열’과 ‘전문직 선호’라는 현상으로 나타남

중학교 때부터 드러나는 격차

고학력-고소득 집단과 저학력-저소득 집단의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과목은 수학(주병기 교수의 ‘개천용지수’ 낮음)

자녀가 중학생일 때부터 학업 성취에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

노오오오력도 계층 따라 간다

자녀의 노력 수준과 아버지의 학력이 밀접하게 연과되어 있음

아버지 학력이 높을수록, 그리고 부모 소득이 많을수록 자녀의 자기 학습 시간이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

환경이 좋을수록 자녀가 일정 시간 이상 혼자 공부할 확률이 더 높다. 좋은 환경의 학생들이 사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공부한 시간도 더 많다.

결국 성실성, 성취동기, 자존감 등 ‘품성’이라고 이야기되는 비인지적 능력 격차가 부모의 계층에 따라 발생함을 보여주는 것 / 집안 좋은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속설은 정말로 참이다.

(그렇다면 집 안이 좋지 못한 죠이어들에게 교양 있고 학식 있는 부모가 되어 주고, 비인지적 능력-필요하다면 인지적 능력까지도 키워주는 사역자가 있었으면)

 

56년생 최순실의 자녀 VS 65년생 조국의 자녀

90년대생의 부모인 60년대생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대졸 화이트 칼라 또는 대졸 중산층이 만들어진 세대

‘울타리 안’과 ‘울타리 밖’의 경계가 명확해졌다.

소득-학력-네트워크가 밀접하게 맞물리기 시작한 것

최순실이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으로 서울 강남에 빌딩을 가진 ‘못 배운 졸부’라면 / 조국은 부산의 향토 건설업체 집안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 학력과 서울대 교수, 80년대 운동권 인맥 등 인적자본과 사회자본을 두루 가진 ‘교양 있고 깨우친 중상위층’이다.

결국, 한국에서 90년대생들은 전문직이나 대기업 일자리를 가진 부모가 확보한 경제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괜찮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 세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단

 

5장 ‘정상가족’이라는 특권

결혼과 부동산에 나타난 계층 격차

20-30대 초반의 양대 과제 : 취업과 가족의 형성

과거와 같은 생애주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번듯한 일자리’와 ‘부모의 지원’이 필수적

오늘날의 20대들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 결혼하고, 1-2명의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주택 소유주가 되는 ‘정상가족’을 구성할 수 있을지 여부가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출신 계층’에 달렸다.

정상가족 형성 과정에서 부모의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점은 ‘독립적 20대’라는 개념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걸 시사

오늘날의 20대는 ‘가족을 만들 수도, 가족을 떠날 수도 없는’ 개인이다.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현재의 가족과 미래의 가족 모두를 의식해야 한다.

그 결과 4인 단위 핵가족을 꾸리는 것 자체가 ‘울타리’ 안에 있는 중산층의 특권적 행위가 되고 있다.

 

남성 5명 중 한 명은 ‘노총각’으로 40대를 맞이한다.

미혼을 강제 다하는 하층 남성

‘번듯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소득이 낮은 남성의 경우 결혼으로 ‘이행’하지 못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경제력이 모든 것을 좌우) / 미혼은 일종의 낙인처럼 작용(직종과 소득, 소득과 결혼율이 각각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기 때문(유일한 예외는 월 600만 원이 넘는 소득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있는 의료, 진료 전문가(의사) 집단이 있다.)

 

정규직 여부, 대기업 근무 여부, 학력, 사회적 계층 지위 등은 현재 소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어느 정도 소득을 거둘 수 있을지 가늠하는 일종의 신호 역할을 한다.

소득에 강한 영향을 주는 대기업 근무 여부와 학력은 결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대기업 근무 여부, 최종 학력 등이 결혼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미 소득에 흡수되었다고 보인다.)

대기업에 근무하거나 대졸이라고 할지라도 소득이 낮으면 결혼이 어렵다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된다ㅠ)(소득에는 자산도 포함되는데 자산은 과거에 벌어들인 소득이 쌓인 것으로 미래에 소비로 돌릴 수 있는 재원 :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집’ - 이 집을 남성이 소유하면 결혼 이행 확률이 급격히 올라간다.)

결혼하기 전 주택을 소유했다면 대부분 부모의 조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상식’(부모의 재산 수준도 남성의 결혼에 영향을 미친다.)

(모기업 취업 면접 질문 중 “3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본 경험이 있습니까?” 조부모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이 자녀가 대학에 가는 3대 중요 요소ㅠ)

 

반면, 여성에게 더 중요한 것은 ‘경제력’ 보다도 사회적 계층 지위와 대기업 근무 여부

여성, “완벽한 결혼” vs “비혼도 괜찮아”

고학력 여성은 완벽한 결혼을 위해 혼인을 지연하고, 저학력 여성은 결혼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이 조사에서 학력과 계층은 대체적으로 일치) / 중산층이나 중상위층 출신 여성들은 자신들의 계층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중간 이하 계층 출신들은 ‘결혼을 해도 경제적으로 지금의 삶보다 나아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혼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 부모의 경제적 자원은 곧 부모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도 연결 –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즉 계층적 하강혼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 / 결혼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

고학력 남성과 결혼하는 데 부모 자산이 활용됨으로써, 가족 단위에서 지위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부모의 자산은 남성 자녀의 결혼 이행을 촉진하며,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비견하는 만큼 영향력을 갖는다.

 

부동산 = 세대 + 계층

부동산의 가치는 토지와 토지 위에 세운 주택, 상가 등의 미래가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토지는 인위적으로 늘릴 수가 없다. 미래의 사용가치가 현재의 매매 가격에 포함된다. 해당 지역의 사용가치가 성장률만큼 내려가지 않는다면 집값은 오르게 된다.(경제성장률이 하락하는데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현상)

서울에 이미 주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고스란히 가격 상승의 수혜를 받고, 노동시장에 진입해 돈을 벌어 주택을 사야 하는 이들은 예전보다 더 높은 값을 기존 주택 보유자에게 지불해야 한다.(세대 간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

상속 자산의 비중이 커지고 자산 형성에서 근로소득의 기여도가 줄어들면서 중산층 지위는 세습에 가까운 것이 되고 이 자산 격차를 메우기는 어렵다.

중산층 거주 지역이 배타적인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건 자연스런 결과(마치 바벨의 탑처럼)

세습 신분이 된 ‘서울 거주-2주택 보유 중산층’(서울 2주택 보유자라면 상위 소득 10퍼센트)

세대 간 불평들이 그만큼 강화되었고 부모가 자산을 보유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사실 상 계층 간 불평등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이 비싸면 나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성 밖’ 거주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

전국 아파트 값은 2001년까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 강남의 가격만 가파르게 상승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2년까지 정체, 2013년부터 다시 상승하기 시작. / 2002-2007년에 만들어진 서울 강남 3구를 정점으로 한 아파트 가격의 지역 간 위계 구조가 2019년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이 2000년대 중반에 가파르게 늘어났기 때문 / 한국 기업의 고도화와 중국 경제의 수출 지향형 성장에 따른 중간재 수요 급증 등이 요인이었다. 그 결과 수출 대기업에 다니는 화이트 칼라의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한다.

수익률 변동성 측면에서도 부동산이 주식보다 더 안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자산이 상속되면서 부모가 주택을 소유했을 경우, 자녀가 주택을 소유하는 비율을 대폭 끌어올린다.(이는 후발 세대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6장 세습 중산층의 기원

60년대 생은 무엇이 다른가?

교육이라는 불평등 제조기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격차를 능력의 격차로 바꾸어 놓았다.

60년대 생이 40-50년대 생과 차이가 나는 건 노동시장에서의 경험이 달랐기 때문

① 1982년의 대학졸업정원제 도입을 기점으로 대졸자가 급증 

② 수출 대기업에서 이들 대졸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IMF 외환 위기에서 생존한 수출 대기업이 2000년대 들어 급성장) 

③ 2000년대 산업 고도화 국면에서 IT, 금융 등 새롭게 성장한 산업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할 기회를 대졸 학력에 대기업에서 10년 정도 일해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던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이 가질 수 있었다. 

④ 이렇게 늘어난 소득은 그대로 자산 시장(특히 부동산)으로 흘러 들어 가면서 서울 요지에 주택 1-2채를 가진 ‘중산층’과 나머지 계층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50년대 생 : ‘학벌’이 밀리더라도 어느 정도 경제력 축적의 가능성이 있었음

60년대 생 :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이라는 전제 조건을 갖춘 사람이 명문대-고소득 화이트 칼라 대군을 형성함

계층 간 격차는 ‘경제력’ 뿐만 아니라 ‘경제력-사회적 네트워크-문화 자본’등 복합적인 격차로 나타남

 

대기업의 성장과 테크노크라트(전문기술을 바탕으로 조직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 기술관료) 인력의 등장

대졸자에 대한 기업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에 계층화가 되었다.

1970년대 초중반만 해도 대졸자의 상당수는 갈 곳이 없었다 / 1981년부터 대졸자 취업시장이 늘어났다.

1970년대 후반 학번에서 1980년대 초중반 학번이 소득 상위 20퍼센트가 될 수 있는 직종에 집중적으로 채용되고, 자리를 채웠다는 의미

‘승리의 역사’가 함께 하는 60년대생의 근로 생애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은 한국의 주요 대기업의 성장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중화학 공업화와 그에 따른 본격적인 대기업의 성장 및 고도화 과정에서 기회를 잡았고, 개별 대기업의 부침과 운명을 같이한 것

1998년 외환 위기는 80년대 학번-60년대 생들에게 오히려 기회. 1998년 당시 82학번-63년생은 만 36세로 고참 대리 내지는 신참 과장 정도의 직급. 노동시장 최상층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 관리직에서 1955-1960년생이 대거 밀려난 자리를 대신 차지함

 

성장의 또 다른 과실 : 금융, IT와 대공장 생산직

2000년대 성장한 사모펀드 : 사모펀드는 부실기업이나 사연이 있어 매물로 나온 기업을 인수하여 구조조정한 후 비싼 값에 되팔아 수익을 남기는 업종으로 금융산업의 최첨단 영역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1997-1999년 금융과 IT분야 창업에 나섰을 때, 울산과 경남 일대의 대공장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IMF 외환 위기의 파고를 맞았다. 1999년부터 현대차 노조는 조합원들의 고용안정 보장과 임금 상승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는데, 비정규직 비율은 3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록 올라갔지만 정규직 노조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면서도 업황에 따라 고용 인원이 변하는(다시 말해 사실상의 해고가 자유로운) 비정규직 노동자의 존재가 자신들의 안정적 지위를 위한 ‘해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노조도 힘을 잃게 되는데) 자동차 노조의 힘은 2만 개에 달하는 부품을 실수 없이 조립하는 ‘숙련성’에 있는데, 모듈화(완성차 생산 과정을 탈숙련화 시키는 장치)는 이런 숙련된 인원을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동차 공장에서 기능공의 힘은 약해지고, 대신 모듈을 관리하고 조율하는 현장 엔지니어의 힘은 커진다.

‘귀족노조’라고 비난받기까지 하는 완성차 조립공장 정규직 일자리가 2000년 이후 뚝 끊긴 건 노조 때문이라 할 수 없다. 모듈화는 품질 개선과 생산 효율 개선을 위해 현대차 경영진이 내린 결정이었다.

블루칼라에서 ‘번듯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길이 끊기게 되었다.

 

학력-직업-경제적 지위의 결합

2000년대 중반 ‘좋은 일자리’를 갖는 데에는 학력과 직종의 영향력이 결정적

토지는 40-50년대 생이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고,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은 실탄(현금)은 충분히 많은데, 그 실탄을 사용할 곳이 없어 켜켜이 저축으로 쌓아놓고 있다.

80년대 학번도 불평등을 경험했다. 그래도 행운이 따르면 메울 수 있는 불평등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들은 불평등을 경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층 지위를 자녀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7장 계급의식의 형성

조국 사태와 공정성 얘기를 보면서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영화 같았다.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냉소와 자신처럼 ‘평범한’ 이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데 대한 분노

‘절차적 정의에 매달리고 보수화된 20대’라는 분석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 20대 의식 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G세대와 N포 세대의 공존

G세대 : 조선일보가 정의한 ‘어떤 분야에서든 앞서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한국 사회에 대한 신뢰와 낙관’ 그리고 ‘학연,지연이 아닌 인터넷 기반의 창조적 관계’를 맺는 희망으로 가득 찬 세대 / 50대-서울대 또는 연고대 졸업-강남 일대 아파트 거주 중산층의 자녀 / 생활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20대 중상위층에게는 꿈과 희망이 넘친다.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관철되느냐다. 경쟁과 자율을 신봉하는 부유한 20대 / 경쟁에 자신이 넘치고, 조국 논란에서는 명문대생들의 자존감이 훼손되어 분노한다.

 

N포 세대 : 경향신문이 정의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 / ‘기성 세대의 잘못으로 피해 대중이 된 요즘 것들’ / 부유한 부모를 둔 능력 있는 20대에 속하지 못한 ‘나머지’(90퍼센트) 20대에 해당되는 신조어

 

20대 남녀의 정치적 양극화? 그건 ‘세습 중산층’ 내부 이야기

20대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양극화는 부모가 대졸-사무직 또는 대졸-전문직인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동일 계층 내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분명해진다. 20대 남성이 보수화되었고, 20대 여성이 진보화 되었다는 담론은 상당 부분 중상위층의 자녀들에게 국한된 것(먹고 살만한 이들이 사유하는 꿈)

20대 남성은 30대 남성과 상당히 유사하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보수적인 성향을 띤다.(고졸 이하-블루칼라 계층의 자녀들이 30대보다 좀 더 보수적인 정도의 차이) / 과거에는 20대가 30대보다 진보적이었다면, 지금은 20대 남성의 보수화 정도가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20대 여성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급격히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 자신이 노동시장 등에서 받은 몫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불공정,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계급 문제

30대는 남성과 여성의 인식이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약간은 기회 공정성에 대한 보수성이 강해지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20대 남성의 경우 ‘결과의 공정성’에 대한 불만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배경 점수가 낮을수록 급격히 늘어난다.

20대는 30대와 뚜렷이 다르게 사회경제적 배경 점수가 높을수록 비정규직이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 문제라고 생각(능력주의)

‘부유하지 않은 20대 남성’의 경우 한국 사회가 기회가 보장된 사회라는 믿음은 30대보다 강하지만, 자신의 경제사회적 처지에 대한 불만도 더 강하다.

‘부유하지 않은 20대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 문제가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세습중산층의 아들들은 ‘교육의 기회’에 대한 공정성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중산층 여성의 경우 자신들의 ‘노력’을 사회가 가로막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고, 그럼에도 타인의 ‘지위’에 대해서는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노동시장에서 중상위층에 편입되는 비중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성별 차이에 따른 불평등 문제에 민감해졌음을 시사)

20대 남성 가운데 이전보다 기회의 공정성이나 능력 위주 사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집단이 있다면 중산층 출신의 남성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공정성’에 대한 이슈는 20대 세습 중산층 자녀의 이슈 / ‘번듯한 일자리’에 진입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된 집단인 이들의 ‘보수성’은 강한 경제적 압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공정성’을 집착적으로 강조하면서, 자신이 그 ‘기회의 공정성’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20대 남성의 경우 최근의 ‘20대 보수화’ 담론이 포괄하지 못하는 계층으로,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감지할 수 있다.

지금의 ‘공정성’ 문제는 20대 세습 중산층 자녀들에게 민감한 문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세계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에게만 그 문이 열려 있는 세계

 

8장 ‘20대 남성 보수화’라는 신화

정치적으로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20대 여성과 달리 20대 남성은 집나간 탕아마냥 행동한다. / 20대 여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라는 인식의 확산 / 법 집행이 남성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함 / 한국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유리하다. / 결혼시장과 같은 사회문화적 권력 관계에서도 남자가 약자

 

 

중상위층 20대 : 동일 계층 여성과 명문대 진학과 번듯한 일자리 취업을 놓고 예전보다 격렬한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분노

비정규직의 사회경제적 약자 20대 : 연애와 결혼시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약자’라는 현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분노

중상위층 여성 : 명문대를 나오고 남성 못지 않은 능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남성 우위인 사회에 분노

유권자 집단을 각기 다른 연령, 성별, 지역, 사회 계층 집단으로 나누어 살피듯 20대라는 연령 집단도 각기 다른 소집단으로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죠이의 현재 사역을 다시 한 번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지 지역에 따른 캠터스 구별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가진 대학들을 묶어서 전략적 카테고라이즈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서울 지역의 여대끼리, 전문대학들끼리, (조금 예민하지만) SKY끼리, 지방대학끼리.. 각자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

 

여성에 대한 적대감 ; 여성의 행동이 기만적이며 편의에 따라 외모를 이용한다는 불신, 사회에서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진다는 피해의식, 여성에 대한 주변 지인의 부정적인 감정(20대 남자 마이너리티에서 보이는 20대 남성의 ‘정체성’) 등 정서적인 반응이 도드라짐

중상위층 이상의 20대 남성은 어떤 연령-계층 집단보다 삶의 만족도가 높다.

그 외 계층의 20대 남성은 남성이라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던 사회적 안정과 인정과 권력이 자본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하면서, 이를 획득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나 시장의 구조적 위기로 좌절되는 상황들로부터 위협받기 쉬워졌다.

소득이 높아질수록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SNS는 인스타그램(아무래도 보여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선호하겠죠....)과 네이버 밴드

소득이 낮아질수록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SNS는 트위터, 카카오 스토리

> 단일한 창구를 조사하는 것만으로 일반적인 20대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

‘보수’ : 60대 중반 이상의 건물주(비싼 월세는 화가 나긴 하지만 돈을 벌어서 지불하면 되는 것)

‘진보’ : 50대 초중반의 대기업 부장 또는 임원(교육과 노동시장에서의 불공정한 경쟁은 교육과 일자리라는 근본적인 ‘기회’ 및 그 ‘결과’와 관련되어 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 문제에 계층 문제가 중첩될 경우, 상위 10퍼센트가 거주하는 ‘서울’과 나머지 90퍼센트가 모여 있는 ‘지방’은 대립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에필로그

한국 경제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면서 성장률이 낮아지면, 세습 중산층과 나머지 사람들 간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부모들은 자녀의 인적자본 투자의 수익성이 높아지는 만큼 더 대규모 투자에 나서게 된다.

90년대 생, 2000년대 생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고도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 결혼을 꿈꾸기 어려운 게 현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지적한, 근로소득만으로 살 수 없는 비싼 주택을 소유한 ‘세습 중산층’이 한국에도 나타났다.

자녀에게 얼마나 비싼 사교육을 시킬 수 있는지, 해외 유학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중산층 내부의 격차가 더 벌어질 것

진짜 문제는 명문대를 나오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적 인정과 명망까지 가진 80년대 학번-60년대 생이 90년대 생인 자신의 자녀들이 적합한 ‘능력’을 갖추도록 독려하고, 교육제도를 잘 이용해 새로운 경제 여건과 시대 상황에 걸맞는 ‘인재’로 키워내는 데 성공하는 그 자체

사회가 20대를 배려해 번듯한 일자리를 늘린다고 해도 그 기회는 대부분 세습 중산층의 자녀들이 차지하게 될 것

 

지금 가장 절실한 것

① 기회의 평등 : 근본적인 수준의 교육 기회와 능력 배양의 기회에서 하위 90퍼센트도 상위 10퍼센트 수준의 기회를 갖도록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 영유아기에서부터 공공 보육이나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돈 있는 사람들이 몇 백만원씩 들여서 보내는 영어유치원 등을 없애고)

② 사회에서 보장하는 최소 수준에 대한 합의와 그에 따른 적극적인 세원 확보 : 노동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부조하는 것 / 그들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도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마치 희년제도처럼, 기본소득?) / 상대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상위 10퍼센트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가 필요(지금의 불평등은 상위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대립이 아닌 10퍼센트와 90퍼센트의 격차임을 인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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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능력주의 신화의 세가지 명제

1)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

2) 능력을 마음껏 발휘

3)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

 

저자는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학입학에 제비뽑기를 제안한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은 능력에 따라 열매를 취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깨기 위한 파격적인 제안이다. 저자는 일류 대학(하버드나 스탠포드)의 지원자중 부적격자를 추려내고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는 지원자들을 몇배수 뽑아서 이들 중에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작업을 거치지 말고 제비뽑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그저 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운에 맡기는 방식이 능력주의의 폭정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에 오만하지 않게 되고, 탈락한 사람들도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급여세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투기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이런 과격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2016년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의 출현을 보면서 능력주의 신화가 깨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 포퓰리즘의 근원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

 

많은 사람들은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 그 능력을 만들어내었는지 생각하면, 능력이 성공을 보장하는 사회는 어쩌면 더이상 정의롭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조영태, 서울대 교수)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

능력주의(실력주의, meritocracy)에서 국가는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들고, 개인은 열심히 노력하여 자부심을 갖고 그 대가를 향유하게 하는 사회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함녀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서론. 대학입시와 능력주의 

2019년 3월 윌리엄 싱어라는 악덕 입시 상담가에 의한 입시 부정,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이 예일, 스탠포드, 조지타운, 서던캘리포니아에 자신들의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서 입시부정을 저지름. 

 

1. 입시의 윤리

- 뒷문 뚫기(기부금)와 옆문 뚫기(뇌물) / 뒷문은 합법적이며 옆문은 불법이다. 

- 그렇다고 정문이 누구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공정한 것인가? 뒷문, 옆문, 정문 모두 소득에 비례해 열려 있다. 

- 입시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누가 어디에 첫발을 들여놓았느냐에 따라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졸인가 고졸인가, 명문대와 비명문대)

 

2. 능력 지표 따내기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었다. 명문대라는 간판, ‘능력의 지표’를 주기를 원했다. 

 

 

CHAPTER 1. 승자와 패자

1.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첫번째 진단.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

두번째 진단.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 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

 

2.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세계화 프로젝트는 공공선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였고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내리게 했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3.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평등하게 배분했다. 

‘기회 균등'이라는 수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로 요약되었다. 하면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

지난 수십년간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노력과 재능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4. 능력주의 윤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바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5. 굴욕의 정치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6.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7. 포퓰리즘의 준동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린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는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직원 채용에 있어서 효율성과 공정성

1. 왜 능력이 중요한가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나름이라고 생각한다. 

-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2. 우주적 능력주의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며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이처럼 성서 신학은 인간의 능력을 한껏 강조한다.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다(욥기). 반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 

우주는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크며 신의 뜻 역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다. 

 

3. 구원과 자기 구제 

구원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행함으로 얻는 것인가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선행으로 얻는다면 이는 권선징악의 틀에는 맞지만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긴다.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본다면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힘들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5세기 펠라기우스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자유의지와 개인 책임을 내세운 대표적 인물로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대했다. 하지만 교회의 예식과 절차들은 능력주의를 불러들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계자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칼빈은 구원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이며 예정되어있다고 보았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내가 선택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의식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칼빈주의는 근명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고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빈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이상 제어할 수 없었다. 칼빈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은총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4.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앞서 구원의 문제를 성공의 문제로 생각해보자. 성공은 스스로의 힘으로 인한 것인가 통제 밖의 요인들이 작용한 것인가? 

일과 노력은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열띤 구원의 증표 탐색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중대성을 갖게 되었다. 자수성가론과 능력주의의 승리는 오늘날 세속 위주 경향의 결과라고 여기기 쉽다. 

능력주의의 승리주의적 측면은 신없는 섭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섭리론은 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한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전 9:11-12)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섭리론적인 관념은 오만한 목소리(금융위기 이후의  보너스)와 징벌의 목소리(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2009년 아이티 지진, 9.11 테러, 2011년 일본 대지진을 신의 징벌로 풀이)로 나타난다.

 

5.  부와 건강

최근 수십년간 미국 기독교가 전한 ‘번영의 복음’

21세기 초, 번영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한국의 기복신앙) 

번영의 복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윤리를 지지한다.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개념은 일이 잘 되어갈대는 기꺼워할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꺽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대통령들은(아이젠하워, 트럼프)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섭리론)’라고 주장했다. 

 

6.  자유주의적 섭리론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허리케인이 죄의 대가’라는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7.  역사의 옳은 편

클린턴,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라는 표현을 여러번 사용했다. 하지만 이는 두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일에 대한 예측은 고약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역사가 예측한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 기반이 될 수 없다. 

 

8.  도덕 세계의 궤적

‘도덕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마틴 루터 킹)

능력과 은총 사이의 균형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청고도들에서부터 번영 복음 전도자들까지, 성취의 윤리학은 거의 저항할 수 없을 만큼의 유혹이었고 언제나 보다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했다.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우리는 성공을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로 본다. 이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주지만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1990년이후 갈수록 학생들의 능력주의적 신념(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이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명문대 경쟁율이 높아지면서 점점 능력주의적 신념이 강해졌다.(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반대), 치열한 입시 경쟁은 이런 신념을 강화한다.

 

2. 시장과 능력

* 시장에 대한 논증

1) 효용성 담론 : 시장이 GDP를 늘리고 일반적 복지를 극대화할 동기를 부여한다고 주장

2) 자유담론 : 시장이 교환하는 재화의 가치를 두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

3) 능력주의 담론 :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시장은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준다고 여겨졌다. 

 

공정성과 생산성에 이어서 사람들이 오직 노력과 재능으로만 시장에 성과를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열화를 이룰것이다. 

 

이런 능력주의로의 전환의 문제점 첫째 책임을 강조함으로 복지에 대한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긴다. 둘째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 약속한다. 

 

3. 자기 책임의 담론 

1980년대 복지국가 관련 논쟁은 연대보다는 불우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우함에 얼마나 책임을 져야하느냐에 관심, 

클린턴은 복지가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어려운 형편인 사람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레이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영국의 대처 수상, 독일의 슈뢰더 수상 - 기회와 책임이 함께 가는 방향,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 

 

4.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어야 한다.’

-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주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 데 엮인다. 

 

5.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자격이 있다(You deserve)’(레이건->클린턴 2배->오바마 3배)

 

6. 포퓰리즘의 반격 

트럼프의 위대함의 비전은 능력주의적 기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트럼프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표결)

 

* 능력주의의 폭정

1)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꺽는다. 

2) 대학 학위가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위한 기본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3) 사회적 정서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7.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불평등의 심화(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50퍼센트보다 많이 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빈말로 들리고 불만을 낳는다. 첫째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한 살마도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만, 둘째 능력주의적 약속은 이미 지켜졌고 자신들은 볼 장 다 봤다는 절망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질문에 대한 순위(미국-독일-프랑스)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미국보다 중국이 세대간 이동성의 정도가 높다. 중궁이 성공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8. 보는 것과 믿는 것

미국보다 더 평등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유럽인은 사회적 상승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미국인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왜 그럴까? 두 경우 모두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했다.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 학력에 대한 공격

 

1. 무기가 된 대학 간판 

대학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빌 클린턴 :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오바마 : 더 많은 교육이 해답

이러한 주장은 포퓰리즘의 반격(브렉시트,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학력을 강조하는 주장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미국 성인의 2/3)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다라고 말해줌으로써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3. 최고의 인재들 

오바마는 엘리트(아이비 리그 출신, 대학원 학위자들)을 내각에 중용했다. 이렇게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정부를 이끈다는 것은 비교적 좋아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이라고 부른 것들을 소위 엘리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뛰어난 학력, 전문성에도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베트남 전쟁의 늪, 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

- 워싱턴은 월스트리트를 구하고 메인스트리트(미국인의 일상생활)을 저버렸다. 

 

4.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이분법적 가치 비교평가의 ‘스마트하냐 둔하냐’는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5.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6.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학력주의는 미국과 영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바꿔놓았다. 정부에 비대졸자가 거의 없는 상황은 능력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최근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팔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7. 학력 간 균열

2016년 미국의 대선에서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 지지여부에 더 확실한 변수였다. 

20세기 좌파 정당이 저학력자들, 우파 정당들이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면 이제 능력주의 시대에 이런 패턴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역전되었다(토마 피케티). 

한때 노동자들을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

피케틴ㄴ 좌파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거침없는 학력주의는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포퓰리즘 및 민족주의 정당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하며, 대학 학위가 있고 없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도록 하고 있다. 

 

8. 기술관료적 담론

오바마는 기술관료 정치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를 연관시켰다. 

기술 관료적 접근을 정책에 쓸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책결정권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가고 그만큼 일반 시민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설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9.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2016년 포퓰리즘의 갑작스러운 상승(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미국의 트럼프 승리)은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적 정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폭스 뉴스를 보는 사람과 뉴욕타임스를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의견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실에 있어서 벌어지는 격차다. 인식론상의 차이와 같다.”

 

10. 기후변화 논란

기후 변화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지구온난화는 자연적인 환경 변화 때문이다’라는 말에 대해서 대부분의 공화당원은 그렇다라고, 대부분의 민주당원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두 당의 고학력자들 간 의견차는 53퍼센트 였는데 저학력자들끼리는 단지 19%의 차이를 보였다. 

기후 변화를 놓고 정당간 나뉜 입장은 사실과 정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관이 달라서 생긴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과학을 알게 되면 기후변화에 대한 옥신각신이 사라질거라는 가정은 오류다. 우리가 사실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정책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술관료적 신념은 정치적 설득의 메커니즘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CHAPTER 5. 성공의 윤리

 

1.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귀족 사회 vs 능력주의 사회

내가 부자라고 할 때 나는 나의 부와 특권을 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회를 선호할 수 있다. 그러면 귀족제 사회가 정답일 것이다.

귀족정 체제에서 상류계급 집안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큰 행운임을 인식할 것이다. 한편 능력주의가 허용하는 최정상까지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치고 올라갔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게 아니라 쟁취한 것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귀족적 특권과 달리 능력주의적 성공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얻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2.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능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자격지심과 합쳐진다.

 

3.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학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인맥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불평들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이다.(능력주의 ->세습귀족제, 한국적으로는 세습중산층사회)

 

4.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부유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유리함(풍부한 관심, 자원, 인맥)을 차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인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 하려 한다. 

 

5.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재능의 도덕적 지위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다. 또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르브론 제임스-농구 재능, 그 재능이 인정받는 사회)

하지만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인식하면 자수성가의 그림이 복잡해진다. 

 

6.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성공 = 재능 + 노력

수고와 노력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금메달, 노벨상)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을 갖는다. 

 

7.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1) 자유시장 자유주의(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마거릿 대처)

하이에크는 능력과 가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능력은 각자가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다. 그러나 가치는 단지 소비자가 이런 저런 상품에 얼마칸큼의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느냐에 대한 척도일 뿐이다. 

 

2) 복지국가 자유주의(존 롤스)

비록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며 계층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완전히 보상해주는 체제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로 부르기에는 불충분하다.(정의론, 롤스)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했다. 

‘성공한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빚이 있다.

 

8.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경제적 소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된다’고 본다. 

 

9. 시장과 능력

맨큐는 사람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아야 한다.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는 사람은 그 큰 기여에 비례하는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자격이 있다”라고 했다. 

 

10.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11.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자격(desert)은 주체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이지만, 권리인정(entitlement)은 일정한 경쟁 규칙을 준수했을 때 부여되는 것이다. 어떻게 규칙을 정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단 알 수 없다. 

롤스는 반능력주의론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롤스는 부자들이 이 부는 내가 쌓은 것이다. 도덕적 자격에 따라 내것이다라며 재분배 목적의 징세에 항의하는 일을 차단하고 싶었다. 

 

12. 성공에 대한 태도

나의 성공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진정으로 믿으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눌 마음이 들 것이다. 

 

13. 운수와 선택

'행운 평등주의는 행운의 주인공이 행운의 결과로 얻은 것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불운한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공적 부조의 대상자들에게 굴욕을 안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가 스스로의 탓이 아님을 입증해야만 한다. 공적 부조의 자격 요건을 갖추려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의 희생자란 걸 제시해야 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선별급식, 기본소득, 재난지원금 지급)

행운 평등주의는 노력과 선택에 따른 불평등을 옹호한다. 

 

14. 재능 계산하기

천부적 재능은 비록 도덕적 자격이 되지 못한다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찬양을 불러들인다. 

 

15. 능력주의의 등장

능력주의라는 말은 본래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 버렸다.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1. 능력주의 쿠데타 

하버드의 장학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SAT는 이후 미국 전국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었다. 

19세기 터너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이동성의 도구는 바로 교육이었다. 

공립학교의 역할 : 민주사회 구성원으로 육성 기능 &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

 

2.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능력주의는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 하고,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코넌트는 더 유동적인 사회를 원하지 보다 평평한 사회를 원하지는 않았다.

 

3.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고등교육은 모든 사회경제적 배경의 유능한 학생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학비를 댈 능력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 부가 아니라 능력이 입학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사교육 시장의 호황) 

 

5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 반대로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 

세습 특권귀족제는 능력주의 엘리트층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 주는 방법이 아닌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입지를 마련해 준다. 

기회의 제공자’, ‘사회적 상승 엔진’의 역할을 담당하는 고등 교육은 확대된 불평등에 대해 어떠한 제동 기능도 하지 못했다. 

 

6.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대졸자 특히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회적 상승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입학 때부터 상류층 소속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7.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동문 자녀, 거액 기부금을 낸 자녀에게 우대 조치를 한다. 

 

8.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가드너는 모든 젊은이가 돈이나 사회적 지위, 종교나 인종 등의 장애물을 초월해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특권층은 그들이 배경이락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뭔가가 아니라 능력으로 명문대에 입학했음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경쟁률 높은 인기 대학들은 떠오르는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으므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갖게 되었다. 

 

9. 상처 입은 승리자들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부모의 역할 강화(미국이나 한국, 극성 부모)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징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으로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10.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특별한 기술이 있든 없든 캄핑(comping)이라 불리는 경쟁 시험을 치르는 학생조직이 일반적이다. 입단율이 낮은 것을 자랑한다. 

 

11 오만과 굴욕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말은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12. 유능력자 제비뽑기 

하버드나 스탠포드의 지원자중 부적격자들만 추려내고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는 이들중에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합격자를 뽑는 것이다. 

이렇게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대안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하도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찾아줄 것이다. 결국 어찌되었든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며, 탈락한 사람이나 자신이나 엇비슷한 가정환경과 천부적 재능, 그리고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네가지 예상되는 반론

1) 학업능력의 저하 : 적절히 1차 관문을 세우느냐. 

2) 다양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 추첨은 다양성 확보를 위해 조정 가능하다.

3) 동문 자녀 우대 입학과 기부금 입학은? : 우대 혜택을 없애야 하지만 추첨의 비율을 높여줄수도 있다.

4) 입시가 경쟁이 아니라 추첨이 되면 그 가치는 보다 떨어질테고, 그러면 지금의 명문대가 누리는 명예는 추락하지 않겠는가? :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제비뽑기를 통해 10대들의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온갖 스펙 쌓기 경쟁은 사라질 것이다. 

 

13.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우리는 최고 명문대들의 경쟁적 입시를 완화시킴으로써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전원을 뽑아버려야 한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 정부가 노동자 훈련과 재훈련을 위해 쓰는 돈의 액서는 고등교육 관련 지출액수와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적다. 직업 훈련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미국이 고용과 훈련을 모른체 하는 이유중 하나는 고등교육 지원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기 때문일 수 있다. 

 

14. 명망의 위계질서 

대부분의 대학들은 근본적인 도덕 및 시민적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 추론과 숙고를 할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기술관료적 스킬과 기술관료적 세계관에 대해 주입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인문학의 쇠퇴)

상아탑 밖에서의 시민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 교욱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 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 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15.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ㅇ벗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CHAPTER 7. 일의 존엄성

 

1. 일의 존엄성 하락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2. 절망 끝의 죽음 

미국 노동계급의 마음의 상처로 빚어진 현상은 구직 포기뿐만이 아니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다.

중년 백인 남성 사이에서 심장마비보다 약물, 알콜, 자살로 숨지는 경우가 많게 나타났다.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없이 발생하고 있다. 4년제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례에서 제외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 끝의 죽음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배나 많았다. “절망 끝의 죽음이란 저학력 백인 노동자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 상실을 나타낸다.

 

3. 분노의 원인 

201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다. 

경제적 진보는 그들의 살림을 더 어렵게 했으며 소수 엘리트에게만 햬택을 주었다. 하위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 머신은 자동화, 해외 아웃소싱, 다문화 정착민들의 위력 등등으로 작동이 멈춰버렸다. 동시에 그들 90퍼센트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경쟁(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등)에 휘말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4.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경제 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유권자들이 그보다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GDP 증대를 통해 이득을 본 이들이 세금을 통해서 이를 실직 노동자들에게 돌리는일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대신 신자우주의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걷잡을 수 없이 늘리기만 했다. 경제 성장에 따른 거의 모든 수익은 최상층에게 돌아갔고 대다수 노동계급의 사정은 거의 내지는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5.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 한다.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다.(헤겔, 뒤르켐)'

 

6. 기여적 정의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임금 정체, 아웃 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는 모욕을 던지는 관념론. 2016년 그 환상은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을 맞이하여 그리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완전히 깨졌다. 

 

7.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8. ‘열린 어젠다’의 오만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하고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 보전을 해주는 것을 제안했다. 

카스의 제안은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시장 조성'으로 옮기는 것이다. 

 

9.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오늘날 금융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경우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에 이래 세 배로 늘었다. 하지만 금융활동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지 않다. 금융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을 끌어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을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해치기만 했다. 

 

10.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인 듯한 정책 속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왜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보다 세율이 낮을까?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 투자가인 자신이 그의 비서보다 낮은 세율로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투자가는 ‘일자리를 만드는 자’이며 따라서 낮은 세율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폴 라이언). 라이언은 만드는 자(maker)와 가져가는 자(taker)를 구분했다. 그는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소위 가져가는 자가 만드는 자를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을 우려했다. 

CNN의 라나 포루하는 오늘날 가장 큰 ‘가져가는 자’는 거액의 불로소득을 노린 투기를 일삼으며 실물경제에는 기여가 전혀 없는 금융업게 종사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급여세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투기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이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이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1.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 일반 열람실에 구비되어 있는 책을 읽는 다양한 사람들

 

2. 민주주의와 겸손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된다.’라는 약속말이다. 

소비주의적인 공동선이 우리의 목표라면 시민의 도덕적 연대는 필요없다. 하지만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능력주의 신화의 세가지 명제>

1. 공평한 기회제공 

2. 능력을 마음껏 발휘 

3. 능력에 따라 성과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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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취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어 1980년대생들은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더 심각한 구조조정을 눈으로 목도하게 된다. 이제 1990년대생들이 사회로 나아오고 있다. 과거 시스템에 순응하던 이들과 달리 90년대생들은 간단함, 재미, 정직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고 있다. 인사 담당자들만이 아니라 기존의 조직이 이들과 함께 일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들은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하는지 의문을 제시하며 워라밸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근무 환경도 바뀌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정착되고 있으며 근무 형태도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기존의 소비자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스마트 컨슈머로 호갱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들과 함께 일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하고 살아내기 위해서 90년대생을 탐구해보자. 

 

1부. 90년대생의 출현

 

1. 그들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한국은 1960년 이후 고도 성장을 이룩해 왔다. 이 당시 세대들은 대기업에 입사해 평사원으로 들어가 조직 내 사다리를 한 단계씩 올라갔다. 이 순환 과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멈춰버렸다. 

70년대생들이 IMF 외환위기 시절 정리해고를 당하고 취업의 직격탄을 맞은 모습을 본 80년대생들이 선택한 길은 ‘자기 계발’이었다. 하지만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중간 관리자 이상만이 아니라 전 직급에 걸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90년대생들은 상시 구조조정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향후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연공서열과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 혹은 공무원 취업에 올인한다. 

신카스트제도의 출현 : 취업률을 기준으로 신분 등급을 매긴다. 문과생은 천민인 반면 이공계는 귀족 등급이다. 그중에서도 전-화-기(전기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 전공자는 왕족 등급으로 불린다. 

 

2. 90년대생들은 어떤 세대인가?

세대는 시간, 집단, 사회구조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다. 

세대는 비슷한 생애 과정을 경험한다.(8살 초등 입학, 14살 중등 입학) 또한 동일한 경험을 한다.(1987년 민주항생, 1997 IMF,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 중요한 것은 젊은 시절의 경험이 각인되면 시간이 지나서도 그것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1970년대생,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세대인 1980년대생과 지금의 1990년대생을 비교해볼 수 있다. 

X 세대는 자기중심적이고 소비에 민감하며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세대 중 비교적 나이가 많은 연령층을 의미했다. 

밀레니얼 세대 : 1980년대생과 90년대생은 IT 기기의 사용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지게 된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80-90년대 출생율 감소가 큰 특징이다. 

중국의 경우 바링허우(80년대생), 쥬링허우(90년대생)로 불리운다. 

90년대생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인가 ‘기성세대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는 세대’인가?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은 아마도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점토판 문자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하니 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도 가뿐히 돌을 들어 적에게 던졌지만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두명이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라는 표현이 쉬지 않고 나온다. “폴리스의 미래가 걱정된다”라는 말도 나온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은 아무데서나 먹을 것을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라는 말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비자]의 <오두>에서는 “지금 덜떨어진 젊은 녀석이 있어 부모가 화를 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욕해도 움직이지 않고,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 ‘동네 사람들의 행실’, ‘스승의 지혜’라는 세가지 도움이 더해져도 끈내 미동동 하지 않아, 그 정강이에 난 한 가닥 털조차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며 당시 젊은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했다. (66)

 

3. 90년대생의 첫 번째 특징 : 간단하거나

- 90년대생 은어의 특징과 유형 : 1) 줄임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2) 신규 은어의 생성 및 쇠퇴가 빠르다. 3) 더 다양하고 창의 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 줄임말이 생성되고 확장되는 방식 : 1) 축약형(케바케, 사바사, 낄끼빠빠, 할많하않), 2) 초성형(ㄱㄱ, ㅊㅋ), 3) 합성형(밥블레스유, 나일리지), 4) 오타형(고나리, 오나전)

단체 카톡방에서 두 문장 이상의 말을 입력하려다 보면 어느새 빠른 대화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빠른 문자 입력을 대신한 새로운 도구들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이모티콘과 짤방(짤림방지)이다.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긴 텍스트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 고로 이 세대에게는 문자를 빨리 쓰는 능력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보유한 이모티콘이나 짤을 보내는 것이 더 인정받는다.

비선형적 읽기 시대에 긴 글을 내려가면서 읽어주는 참을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이렇게 스크롤 압박을 이유로 세 줄 요약을 요구한다.

신기술의 변화는 35세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데 반해 35세 이상에겐 당황하고 난처하게 만든다. 2010년 이후 급격한 모바일의 변화는 70년대생들에게는 일종의 재앙과 같았고 80년대생들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90년대생들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셔츠를 직접 만들어 입거나 짐승을 직접 도살하는 것만큼이나 구식이고 심지어는 멍청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86)

80년대생들이 웹 네이티브라면 90년대생들은 앱 네이티브이다. 이들에게 조용하고 집중적인 기존의 선형적 사고는 구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온라인상으로 제공되는 축약된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필요할 때 바로 찾는 비선형적인 사고방식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바일의 배터리가 없거나 잔여 데이터가 떨어지면 단절의 두려움을 느낀다.

 

4. 90년대생의 두 번째 특징 : 재미있거나

80년대생 이전의 세대들이 소위 삶의 목적을 추구했다면 90년대생들은 삶의 유희를 추구한다. 이들은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질서라는 것을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썹맨 : TMI(Too Much information), JMT(존맛탱), 엄카(엄마카드), 흑우(호구), 핵인싸(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 새로운 세대에 맞춰서 재미의 포인트가 변화된 것이다. 이전의 시청자들에게는 외면되었을 내용이 지금 젊은 시청자들에게 병맛스러운 감성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컨텐츠가 TV채널 뿐만 아니라 유투브를 통해 확장되었다. 또한 시청자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빠르게,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90년대생의 새로운 능력 : 드립력(그 상황에 어울리는 짧은 말이나 글로써 촌철살인의 웃음을 주는 것)

브리태니커-위키피디아-나무위키(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나 말장난, 농담을 사용)

재미를 통한 자아실현이 기본이 된 90년대생들 : 먹방, 맛집 투어

 

5. 90년대생의 세 번째 특징 : 정직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이유

그들은 이제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완전무결한 정직을 요구한다. 당연히 혈연, 지연, 학연은 일종의 적폐다. 공개 채용의 비리를 접하면서 90년대 생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고 그래서 공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그나마 자신이 정직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을 믿지 못하고 이 제도가 있는 자에게만 유리하다고 여긴다. 이들은 신뢰의 시스템화를 요구한다. 진학과 취업을 넘어서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선수 선발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신뢰 시스템 요구, 부동산의 호가가 아니라 실거래가를 기준으로한 플랫폼의 출현, 화장품의 전체 정보를 제공하는 앱의 등장

솔직함 :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잡아라. 소비자가 기업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만나는 접점, 즉 영업과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을 말한다. 본인이 말한 작은 것에 책임을 지는 태도, 더 이상 기업의 광고가 통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결국 투명한 정보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제는 구직자가 면접관을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압박면접도 점차 사라지고 구조화 면접이 대세가 되고 있다.

화이트 불편러와 프로 불편러의 등장

불편러란 단어는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다. 개인의 권리의식과 지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과거에는 문제인지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중이 자유롭게 의견을 풀어놓을수 있는 인터넷의 발달로 토론과 비판활동이 활발해졌다.

사회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바른 소리를 내는 불편러들의 증가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러한 정의로운 예민함은 지속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다만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강화한다거나 타인에게 자신의 선호를 강요하거나 부당하게 참견한다면 꼰대질과 다를게 없어진다. 이는 프로 불편러가 아닌 블랙 불편러이다.

 

2부. 90년대생이 직원이 되었을 때

1. 90년대생, 그들이 몰려온다.

실제로 현재 기업들은 90년대생의 출현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마윈, 알리바바의 성공 비결은 중국과 인터넷 비즈니스의 미래, 그리고 청년 세대에 대한 신뢰였다.

 

정부가 청년일자리정책의 일환으로 중소기업에 대기업의 연봉과의 차이를 보상해주는 정책을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연봉이 적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기업문화가 꼰대 수준이기 때문이다.(145)

90년대생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꼰대질 속에서 살아왔다. 문제는 그동안은 꼰대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꼰대의 유형으로는 1)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유형(23%), 2) 상명하복(까라면 까) 유형(20%), 3) 전지전능형(내가 해봐서 안다) 유형(16%), 4) 무배려-무매너(네가 이해해라) 유형(13%), 5) 분노조절장애(너 미쳤어?) 유형(10%), 6) 반말(다짜고짜 야!) 유형(9%) (148)

꼰대질이 심해지면 갑질과 모욕과 같은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1) 또라이를 피해 조직을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 여럿이 있음

3) 팀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또라이 임

 

2. 90년대생 인재들의 특징

현재 20대인 90년대생들에 흔히 붙어 다니는 꼬리표는 다음과 같다. ‘충성심이 없고’, ‘자기 실수는 인정 안하고 변명만 늘어놓고’, ‘끈기가 없어서 쉽게 포기하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없고’, ‘고집이 세고’, ‘힘든 일은 견디지 못하고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꼬리표는 보통 기존 세대들의 시각에 따른 것이다.

로열티 ; 충성의 대상이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중진들이 볼때 90년대생들은 개인주의적이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보인다. 미국의 경우 1965년이후 출생한 X세대는 1990년대부터 회사에 진출하면서 이전의 베이비붐 세대와 갈등을 보였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돈 버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Young) 도시의(Urban) 전문직(Professional), 즉 여피족Yuppies과는 다르게 젊고(Young) 개인주의적이며(individualistic) 자유분방하고(Free-minded)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수고 적은(Few), 즉 이피족Yiffie으로 불렸다. 이들은 일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결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회사에 충성하려 하지 않아 회사에 대한 충성을 높게 사는 기존 세대나 관리자들이 이를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90년대생들은 IMF 직격탄을 맞은 70년대생들과 상시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가져왔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쑥대밭이 되었던 80년대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안정된 생활은 특정 세대의 기호가 아닌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이다. 하지만 정작 90년대생들은 안정적인 삶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이후로 열심히 일해온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팽겨쳐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그러니 90년대생들에게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야근 문화에 익숙한 70년대생 이전 세대에게 정시 퇴근 캠페인은 회사가 주는 하나의 혜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80년대, 90년대생들에게는 정시 퇴근이란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이다.

 

보여주기식 업무에 대한 염증

성과 창출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보여주기는 부지런한 비효율의 대표주자다.

 

형식에 빠져 낭비되는 시간들

90년대생들은 또한 실행보다 계획이 중시되고 알맹이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조직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을 방어적으로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격언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의사결정은 없다’라는 격언을 압도한다.

 

3.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고용

2018년 ‘주 52시간 근무 시대’의 개막

주 52시간 근로제의 시행은 누군가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을 가져다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저녁을 굶는 삶을 가져다줄 수 있다.

90년대생들은 기존의 세대들과는 다르게 기업의 종신고용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낮다. 반대로 기업에서 개인의 미래와 가치 상승에 대한 관심은 높다. 여기서 기존의 경직된 인사제도에서 벗어나 회사와 개인의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영할 필요가 생긴다.

 

4. 새로운 세대의 직원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강제 통제 방식이 통하지 않는 세대

예전 빠따로 다스리던 시절은 갔다. 무엇보다 90년대생들은 자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들에게는 권위와 통제가 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강압적인 요구에 그들의 권리를 잃으려 하지 않고,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견이 아닌 참여를 원하는 세대

버티라 하지 말고 버텨야 하는 기한을 알려야

90년대생들이 일하는 조직의 관리자들은 이제 이들이 입사 후 얼마 동안 도제식 방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부분과 그에 따른 모습을 현실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해결의 표준 답안을 제시하기 보다 더 나은 방안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90년대생들에게도 회사란 노동을 하러 오는 곳이다. 다만 그들은 어디에서라도 유희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유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회사는 일터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 

‘전 업무 프로젝트화 동기부여 관리법’ : 직장에 오락시설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그 회사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업무 몰입이나 흥미 증진에 있어서 제도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90년대생들에게 일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직에 관대한 기업일수록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하기 쉽다. 외부 인재들은 이직에 관대한 회사에 입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3부. 90년대생이 소비자가 되었을 때

1. 90년대생, 소비업계를 뒤흔들다

호갱의 탄생 그리고 반격

호갱은 기업의 차별적인 가격 부과 행위나 억지스러운 상술에 당한 고객을 말한다. 기업은 ‘어디에서 가장 좋은 조건의 거래를 할 수 있는지’를 고객에게 숨겼다.

정보의 비대칭과 그동안의 소비 프레임 속에 갇혔던 소비자들은 기업이라는 거인에 대항하지 못하고 벽만 쌓아 올렸었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과 모바일을 무기삼아 기업에 반격을 시작했다.

스마트 컨슈머와 스튜피드 컨슈머

간결하게, 더 간결하게

90년대생들은 고객만족이나 고객감동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번거로움의 제거다.

1-2인 가구 비중의 증가로 가정 간편식 시장이 급증하였고, 요식산업이나 조미료시장의 변화가 일고 있다.

90년대생들의 경우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이 생겼을 때 모바일로 검색을 하고 게시판에 문의사항을 남기거나 챗봇을 통해 즉시 상담을 한다. 비대면상담을 선호하는 것이다.

연결이 권리가 된 세대의 모습

90년대생들에게 연결은 이제 하나의 권리처럼 여겨진다.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므로 빼앗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방전포비아, 배터리 거지)

십대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로 두시간 동안 휴대폰을 꺼놔야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1위를 차지했다.

 

2. 90년대생들이 바꿔버린 소비 지형도

호갱기업

1) 직원과 협력업체에 대한 갑질 등 불공정 행위를 하는 기업, 2) 국내의 낮은 경쟁 상황을 이용하여 차별적인 가격정책을 취하는 기업, 3) 기업의 수익성 향상을 위해 제품의 품질을 고의로 악화시키는 기업, 4) 복잡한 프로세스를 개선하지 않아 소비자의 불편을 야기하는 기업

 

대리점 밀어내기로 갑질의 대표기업이 된 남양유업

용산 전자상가를 무너뜨리다.

프리미엄 전략을 역풍을 맞은 다이슨

한국 시장에 대한 역차별로 비판받는 현대자동차

맥도날드가 점차 사라지는 진짜 이유

질소 과자에 경종을 울리다

맥주 시장과 주점 프랜차이즈의 변화를 이끌다

스몰 비어의 등장과 기존 프랜차이즈의 몰락

해외 직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위기를 맞을 산업들

호갱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 : Slow-Death 시키기

 

새로운 소비자들이 용산 전자상가를 특별히 보이콧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호갱이되고 싶지 않았던 새로운 세대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말없이 떠났던 것이다.

 

3. 90년대생의 마음 사로잡기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이다. 이러한 융합기술의 발전 방향은 번거로움의 최소화이다.

아마존고라는 무인 매장과 알리바바의 미래형 매장인 허머.

기술의 발전 방향이 소비자의 편리보다 점포 관리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새로운 세대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20대가 유투브를 보는 또 다른 이유

네이버 캐스트와 같은 타 동영상 서비스에 비해서 짧은 광고 때문이다.

그들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유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의 경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저의 돈이 아닌 광고주의 돈이다. 광고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저의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유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90년대생들을 답한다. 우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미라고 말이다.

정직한 제품과 서비스만이 살아남는다.

창렬푸드의 몰락과 혜자푸드의 성공

배달앱의 사용이유로 간편성과 아울러 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형 뽑기방의 몰락(호구가 되기 싫은 90년대생들)

이처럼 90년대생들은 직원으로 일하든 소비자로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꼽는다.

 

4. 90년대생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방법

샤오미는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 소비자가 제공하는 피드백을 바탕으로 빠른 운영체제 업그레이드를 지원해 제품 안정성을 높여 소비자의 충성도를 이끌어내고 있다.

70년대생들이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불만을 전화나 엽서를 통해서 알렸다면, 80년대생들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내용을 올려 답변을 제공받았다. 이제 90년대생 고객들은 본인의 불만을 기업의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상담하거나 온라인 채널에 등록하지 않고 본인의 SNS에 잡담식으로 올리거나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올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를 관찰할 수 있는 두가지 방식

첫 번째 방법으로는 기업의 담당자 혹은 조사자가 별도의 체계적인 조사 설계 과정 없이 담당 세대가 하는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에 대한 내부자적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세대의 말과 행동의 전반적인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법으로는 해당 세대를 직접 기업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교회안에 정직에 대한 부분의 반영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교회의 문제, 불합리한 부분이 보이게 될때 어떻게 할것인가??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배신으로 여겨진다. 

지나치게 엘리트화된교회로 이동하던지 이원론에 빠져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지역교회 청년들에 대한 영적인 수준, 평가. 

이것이 90년대생만의 이야기인가? 교회가 이들의 특징을 채워주지 못하는 상황. 

성윤리 감수성, 생태 감수성. 물리적인 나이가 아니라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 

어떤 일에 가슴뛰게 할 것인가? 참여. 의사결정에 모두 함께 참여하도록. 

세대 통합의 방법 : 예배. 

- 정직, 직구. 목사라는 권위로 사역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제대로된 컨텐츠가 있어야 한다. 핵심을 준비하는 교회. 

- 뭔가가 없기땨문에 행사로 사람들을 돌리는 것이다. 제대로된 말씀과 기도가 아니라 형식으로서의. 구원의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속에서 찾아내는 새로움.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 다양한 세대가 존재하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복음이다. 센터처치. 

 

느림의 영성, 초월적 영성

빠른 이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급 노화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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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콜슨은 미국의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특별고문으로 일했으며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975년 출소 후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했고 이는 전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내 삶에서 진정한 재산은 전과자라는 나 자신의 엄청난 실패, 바로 그것이었다. 교도소 복역 경험이라는 나의 커다란 치욕이 하나님께서 나의 생애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시기 위한 시작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전혀 영광스럽지 못한 경험을 가진 자를 선택하신 것이다."(38) 

 

이 책의 앞 부분에 한 내과의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래 내용은 그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코른펠드(Boris Nicholayevich Kornfeld)입니다. 그는 내과의사였는데 1950년대 초 스탈린 시절에 정치적인 죄목으로 에키바스트츠에 있는 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수감자이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훨씬 나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런 오지에는 간수나 수감자 모두에게 의사는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평소 아주 혐오하던 한 간수를 수술하는 과정에서 그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 간수는 칼에 찔려 동맥이 끊긴 상태였다. 끊어진 혈관을 봉합하면서 코른펠드는 수술 직후에 꿰맨 곳이 바로 다시 터지게끔 특정한 방법으로 혈관을 봉합할 생각을 했다. 그러면 간수는 금세 죽게 될 것이고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이 특이한 복수과정을 상상하며 보리스 코른펠드는 그 간수와 그런 류의 인간들에게 가졌던 자신의 증오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모두 학살할 참이었다. 생각이 그쯤 이르렀을때 보리스 코른펠드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폭력성에 놀라 전율했다. 그렇다. 그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증오심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증오심은 코른펠드 자신속에 그칠 줄 모르는 또 다른 증오심을 부화시켰던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악순환인가!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던 바로 그 사악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코른펠드는 간수의 동맥을 제대로 봉합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료 그리스도인 수감자에게서 들어왔던 말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보리스 코른펠드는 수용소의 의사로서 몹시 고되고 희망없는 작업을 하는 동안 주님의 기도를 반복하며 진실할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다. 

 

수용소의 의료부 의사들은 수감자들 중에서 수용소 당국의 비위에 맞지 않거나 혹은 이 수용소 구역에서 쫓아내고 싶은 자들을 좁고, 어둡고, 추운 고문실인 독감방들로 이루어진 처벌동으로 보내기 위한 진단서에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서명이란 해당죄수가 그러한 징벌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건강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위증이었다. 독감방에 갇힌 수감자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른 모든 의사들처럼 코른펠드 역시 지금까지 자신의 몫의 진단서에 서명해 왔다. 거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수용소 당국은 의사의 서명따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처벌을 합법화시킬 수 있는 많은 다른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가 귀하다 해도 당국에 협조적이지 않은 의사들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코른펠드는 주기도문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시작한 이후 수감자의 처벌을 합법화시키는 일을 멈추었다. 진단서에 서명한 것을 거부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그러한 서류 수백장에 서명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가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없도록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반항은 아주 위험천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른펠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당번 한 명을 고발한 것이다. 당번은 수용소 당국에 협조적인 수감자 가운데서 차출되었는데 수감자들은 이들을 간수보다 더 미워했다. 당번들은 배신자들이었고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수감자들의 음식을 훔쳤고, 누구든지 그것을 보고하거나 따지려 드는 사람이 있으면 손쉽게 죽여 버렸다. 반면 간수들은 당번의 이러한 권력 남용을 눈감아 주었다. 당국은 수용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이런 배반적인 인물들을 필요로 했다. 

어느 날 수용소를 돌던 코른펠드는 펠라그라를 앓고 있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질병은 영양실조가 원인이었지만 악화되면 음식물을 전혀 소화시킬 수 없게 되고 굶어죽게 된다. 그 환자의 몸은 이병의 끔찍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은 검어지고 한쪽 볼은 깊게 멍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의 살가죽이 벗겨져 있었고 계속되는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감아야만 했다. 코른펠드는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환자에게 분유와 맛 좋은 흰 빵과 청어구이를 주었고 혈액 속에 영양주사를 놓았다. 

코른펠드가 그 환자를 곁을 떠난 직후였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펠라그라 환자용 흰 빵을 훔쳐먹고 있는 한 당번과 마주쳤다. 그는 입안에 빵을 잔뜩 문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코른펠드를 올려다 보았다. 코른펠드는 환자용 급식이 도난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환자들이 회복되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 당번병을 고발하였다. 

코른펠드가 당번의 비리에 대해 수용소장에게 보고서를 냈을 때 수용소장은 그 고발을 퍽 흥미로워했다. 최근 수용소에 연이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피살자들은 모두 고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누군가에 대해 고발한다는 것은 위험스럽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수용소장은 코른펠드이 고발을 접수하고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 해당 당번을 사흘간 처벌동으로 보내도록 조치했다. 수용소장으로서는 코른펠드가 죄수 처벌용 진단서에 서명해 주지 않는 것이 항상 골칫거리였는데 이번 사건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의사는 자신의 무덤을 판 것이다.

보리스 코른펠드는 특별히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고발한 그 당번이 처벌동에서 풀려나는 즉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뽑은 당번들에 의해 통제되는 막사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서 머물면서 짬이 날 때 적당한 곳에서 틈틈히 잤다. 그는 어느 순간이 그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불안 속에 지내는 그에게 엄청난 자유가 찾아왔다.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자 삶에 대해 자유로와졌다. 그는 더 이상 수감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서류나 진단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수용소 내에서 일어나는 가혹행위나 불법을 외면하거나 방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했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얼마 안가서 그는 자신의 영혼에서 분노와 증오, 폭력성이 사라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자유함을 알고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자기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보리스 코른펠드는 자신이 발견한 순종과 자유함의 새로운 삶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어느 흐린 오후 그는 대장암 수술을 마친 환자 한 명을 검진하고 있었다. 멜론처럼 생긴 머리와 고통스러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한 이 청년은 코른펠드의 영혼을 흔들었다. 청년의 눈은 슬픔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이미 수용소에서 보낸 오랜 세월이 깊게 새겨져 있는 그의 얼굴은 코른펠드가 이전에 보지 못한 깊은 영적 곤고함과 공허감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코른펠드는 이 환자에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환자는 마취약 기운 때문에 잠이 들었다 깼다 했으므로 이야기의 첫 부분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 코른펠드의 열정이 환자의 정신을 집중시켰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의사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의사는 그날 오후 내내 그리고 밤늦게까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새로 발견한 자유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환자는 믿을 수 없이 놀라운 고백을 자신이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술후의 통증이 몹시 심했고 뱃속은 녹은 납덩이가 누르듯 무겁고 아팠지만 그는 잠이 들때까지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젊은 환자는 수술실의 술렁거림과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가장 먼저 어젯밤의 그 의사를 떠올렸지만 그의 새로운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동료 환자가 코른펠드의 운명을 그에게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전날 밤 코른펠드가 잠든 동안 누군가 그에게 몰래 다가가 미장공의 망치로 그의 머리를 여덟 번이나 내리쳤다는 것이다. 동료 의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아침이 되자 머리가 깨진 코른펠드의 시신을 당번들이 싣고 나갔다. 

그러나 코른펠드의 고백은 죽지 않았다. 젊은 환자는 그 의사의 열정적인 마지막 말들을 생각했다. 그 결과 그 역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자신이 그곳에서 깨달은 것을 전 세계에 말하게 되었다. 그 젊은 환자의 이름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다. 

 

보리스 코른펠드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설을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조상의 신앙을 배신한 유대인이다. 여러 해 동안의 교육과 훈련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의사이다. 정치적 이상주의자로서 그의 유토피아의 꿈은 황량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묻혀져 갔다. 한덩이의 빵을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 고발하여 겨우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이다. 이 모든 면에서 보리스 코른펠드는 인생의 실패자였다. 적어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한사람의 실패, 그의 순전한 순종을 취하셔서 그를 전 세계를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며 당대에 최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가 될 인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셨다. 

 

코른펠드이 말은 후에 솔제니친이 “민감한 현악기의 음률”이라고 부른 것처럼 솔제니친을 감동시켜 회개와 확신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솔제니친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만유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비록 나는 당신을 부인했었지만 당신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작품 「수용소 군도」에서 외쳤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따라 한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생명이 전이되는 영적인 수혈이었다. 

코른펠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짧은 생애는 고립되고 제한되어 있는 환경에서 지낸 것이 전부이다. 여러모로 보아 그가 진단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일, 부패한 당번을 고발한 일, 중태 환자에게 몇 시간씩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일들은 모두 열매 없는 무익한 일 같고, 오히려 난폭자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만든 부질없고 어리석을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코른펠드의 신앙은 강하고 확실하며 진실한 것이었다.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과 성령님은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해주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순종하는 것, 믿음안에서 순전한 순종이었다. 

 

바로 이 한 사람 코른펠드의 작은 날갯짓이 알렉산더 솔제니친이라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솔제니친을 통해 세계는 억압받는 러시아의 상황을 모두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분의 날갯짓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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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상상력(월터 브루그만, 복있는 사람)

 

 

해설의 글(2009년 김회권) 

왜 우리는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야 하는가?

세계는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져 정신적 시계가 불확실한 밤바다를 표류하고 있다.(개정판 2000년)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부인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파라오의 압제 체제이며 급기야는 예언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극단적인 욕망 충족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지배 문화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 주는 한편, 왕권 의식으로 가득찬 지배 문화에 의하여 억눌리고 무기력해진 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책이다. 

 

브루그만은 예언자를 단지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획일화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한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 예언자적 상상력의 얼개와 메시지

1) 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

오늘날 미국 교회의 정체성을 앗아가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앙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 일을 한다. 

 

2) 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모세의 대항 공동체 구축 활동은 단순한 반체제적인 사회 활동과는 구분된다. 이 대안 의식은 첫째 체제 고착적인 질서의 신 관념에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대립시킨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관념을 역설한다. 

 

3) 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예레미야를 모세적 의미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예언자의 전범으로 파악한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였다. 

 

4) 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예레미야의 사역이 단지 근원적 비판을 넘어 가장 대담하고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한 목회였음을 역설한다.

 

5) 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브루그만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변혁하고 당대의 지배 문화였던 왕권 의식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논한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하나님의 친정통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통고하는 한편 당시의 지배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함의한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대표하는 몇가지 사역

첫째 예수의 용서 메시지와 용서 행위

둘째 예수의 안식일 이유

셋째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었던 예수의 밥상 교제

넷째 예수의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

다섯째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긍정과 존대

여섯째 세금과 빚에 대한 예수의 담론(마 20:1-16)

일곱째 예수가 성전에 대해 보였던 태도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6) 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그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이란 단지 낡은 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었다는 데 있다. 

예수의 일의 핵심은 해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 현실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활성화였다.

둘째 예수의 목회도 근원적인 시작을 열어주는 활성화다. 

셋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목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7) 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그의 예언자적 목회의 특징

첫째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에게 특별한 방식을 따라 행하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 빛을 비출 수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자세, 해석학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애통과 탄식을 피력함으로써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간다. 

넷째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다섯째 이런 예언자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언자적 상상력, 근원적 신앙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강조한다. 

 

* 예언자적 목회는 오늘도 가능하다.

결국 예언자적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능력과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창조적으로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내는 목회이다. 

예언자의 서식지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사회, 경쟁과 탐욕으로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키는 도시의 소비 문화에 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누추한 삶의 자리다. 

 

예언자적 목회는 기존 권력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후 정치적 유명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변두리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애통과 체휼 목회를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죽을 때까지 비영웅적으로 감당하다가 남몰래 죽는 목회다. 

 

 

개정판 서문(2000년 성령강림절) 

1. 1978년 발간 이후의 변화

첫째 비판적인 성서 연구의 경향과 방법의 변화

- 역사비평 -> 사회과학적 비평 -> 수사학적 비평(상상력) 

둘째 자신의 관점의 변화

셋째 교회의 주변화(marginalization) 

 

오늘날 필요한 일은 상대적으로 힘없는 예언자적 목소리에 본문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유롭고 과감하게 본문을 넘어 구체적 환경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상상적 방법들을 찾아주는 일이다. 

 

2. 의심의 해석학을 적용

 

3. 예언자적이라는 말과 상상력이라는 말을 연결한 것이 아주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4. 하위 공동체의 특성

첫째 오래되고 이용 가능한 기억들

둘째 고통에의 감각

셋째 희망의 적극적인 실천

넷째 효과적인 담론의 방식

 

5. 신학적 상상력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고문과 성만찬)

성만찬이 고문에 맞서는 저항과 대안의 잠재적인 행위가 된다면, 성만찬적 상상력은 또한 소비 과용에 대해서도 잠재적인 저항과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판 서문(1978년 사순절)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라는 고정 관념으로 굳어진 예언자 상을 벗겨 낸다면 예언자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예언자들은 인간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또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깊이 이해했던 사람들이다. 예언자들은 변화의 가능성이 삶의 감정적 곤경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적 신념과 개인적 열망 사이에 존재하는 껄끄러운 부조화를 이해했다. 또한 말의 재능에 있어서 ‘말씀으로 새롭게’ 새일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1장_모세의 대안 공동체

오늘날 미국 교회는 미국의 소비주의 풍조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고, 그 결과 믿음이나 행동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소 있다. 이러한 문화적응(enculturation) 현상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포함해 교회의 삶 전반에 걸쳐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응이 나타나게 된 내적 원인은 우리가 신앙의 전통을 저버리고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는 활력을 주는 기억을 기초로 삼고 급진적 희망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기인한 현상이자 위협적인 요소로 대접받는다. 

 

교회가 신앙 전통을 회복하고 나아가 그 전통을 문화적응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길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행동이나 믿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전통의 주장과 문화적응의 상황을 마주 세워 효과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이끄는 것이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다. 다시 말해 예언자란 전승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로서, 자기 고유의 인식 이론과 언어 체계를 갖추고자 전승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람이며 또 전승의 기억에 매우 정통해서 문화와 교회의 접촉점과 상충점을 날카롭게 식별하고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다.(50)

 

어떤 면에서 예언자들은 미래를 알리는 자이기는 하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미래란 현재로 치고 들어오는 미래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 탐색을 포기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일을 모두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는 현재에만 몰두했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우리를 둘러싼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예언자적 목회의 일차적 과제는 특정한 공정 위기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위기, 곧 우리의 대안적 소명을 무력화하고 길들여 버리는 위기와 씨름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성숙한 대안 의식은 지배의식을 해체(dismantle)할 목적으로 ‘비판’을 행한다. 다른 한편 성숙한 대안 의식은 신앙공동체가 나아갈 다른 시대와 상황을 약속해 줌으로써 개인과 공동체를 '활성화하는(energize)’ 일을 한다. 

예언자적 목회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모든 목회 행위 속에 대안 공동체를 불러내고 형성하고 개혁하는 방식을 반영해야 한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비판과 활성화를 하나로 결합하는 일이다. 

 

눈앞에 나타난 사회 정치적 현실이 너무나 근원적이고 불가해한 것이어서 생각나는 게 신학적 주장밖에 없을 때 예언은 탄생한다. 

 

1. 승리주의와 억압에서 벗어남

모세와 이스라엘이 제국의 현실과 완전히 갈라선 것은 정적인 승리주의(static triumphalism) 종교로부터의 단절과 억압과 착취의 정치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모세는 이집트의 신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들이 사실은 힘이 없고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정적 승리주의의 종교를 해체했다. 제국의 신화적 주장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안 종교가 등장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된다. 

이와 동시에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서 억압과 착취의 정치를 해체한다. 출에굽으로 이루어진 현실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라든가 새 종교 관념 또는 자유에의 비전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새로운 사회 공도체를 세우는 일로서, 이 공동체는 역사적인 조직을 갖추고 법을 제정하고 통치와 질서의 형태, 선과 악의 규범, 책임에 따른 처벌을 제정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제국의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벽돌공장의 압제는 인간 공동체에게 효과적이지 못하고 필수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인간의 정의의 정치와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와 긍휼의 정치 없이는 하나님의 자유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가 없이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2. 예언자적 비판

이스라엘은 체념의 한숨소리를 쏟아낸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면서 누군가 그것을 들어주고 응답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다.(출 2:23-25) 이스라엘이 애통하는데서 비판은 시작된다. 아픔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해체하는 비판의 중요한 첫걸음이 되고, 이러한 비판은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새로운 현실을 연다. 역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러한 울부짖음을 야웨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역사는 힘을 얻게 된다. 

 

3. 예언자적 활성화

옛 현실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 바로 그곳에서 모세의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활성화는 희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활력을 되찾는 일은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되어 있고 이제 곧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 활력은 불가해한 어둠을 꿰뚫어 보는데서 생겨난다. 

2) 하나님은 현실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요 편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요, 하늘의 회의 석상에서 보좌 가장자리로 달려 나와 자신의 특별한 관심사를 주의 깊게 헤아리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 

3) 활력을 불어넣는 마지막 요소가 송영(doxology)이다. 송영 속에서 노래하는 이는 이 자유로운 분께 초점을 맞추며, 또 그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자신의 자유로 품게 된다…. 송영이 있는 곳에서만 긍휼이 자랄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자명한 원리로 주장되는 이데올로기를 송영이 깨뜨리기 때문이다. 또 송영이 있는 곳에서만 정의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노래가 두려움을 활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모세의 전승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주장한다. 

1) 역사적이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매우 독특한 이 공동체 안에서는 대안적 삶이 이루어진다. 

2) 이 공동체는 자체의 특별한 기억을 수단으로 비판하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기억에는 제국의 현실로부터 단절과 완전한 탈출이 간직되어 있다. 

3) 그러한 기억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자신이, 제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좌우된다는 사실을 안다.

 

 

2장_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모세의 주된 관심은 대항 의식을 지닌 대항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었다. 

또 모세는 기존 체제를 회개시켜 사회를 개선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려 새로운 현실이 등장할 수 있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 이 예언자적 상상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언어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노예와 산파들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하나님의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롭지 못한 다른 신들은 이미 다 굴복해 버린 상황에서 그 방법 외에는 정적인 승리주의 종교에 대항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예로 이루어진 소수자 공동체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억압적인 상황에 저항하는데 버팀목이 되어 줄 사회적 비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변두리 인생들이 당대의 억압적인 체제에 대항하면서 자신들을 받쳐 줄 합법적인 근거를 찾는다면 그 근거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이다. 

 

솔로몬의 프로그램(왕과 왕조를 견고하게 세우는데만 관심을 기울인 이기적인 업적)

1) 하렘(왕궁 내에 둔 여인들만을 위한 생활 공간) : 정략적 결혼

2) 조세 구역의 정비

3) 체계적인 관료제도

4) 상비군의 설치

5) 지혜에 매료됨

6) 거대한 건설공사(성전, 왕국, 도시)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서 대안 의식이라든가 대안 공동체가 들어설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1. 풍요

솔로몬은 참으로 놀라운 복지와 풍요를 이루었다. 소비 사회속에서 대안 의식이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렵다. 

 

2. 억압적인 사회 정책

왕실과 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을 동원하고 노동을 착취한 것이 이 체제가 취한 정책이었다.

 

3. 정적인 종교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성전은 왕의 도시 계획의 일부로 편입되고 하나님의 주권은 왕의 목적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억압적 정치와 풍요로운 경제는 서로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두요소를 떠받치는 토대가 하나님을 포로로 잡은 종교(religion of the captive God)이며 이 종교 안에서 모든 반대는 사라지고 왕과 그의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안정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유와 연관된 이런 긴장이 해소되어 버릴 때 종교는 사회의 통합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며 비록 다른 수단에 비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중 하나가 될 뿐이다. 

 

솔로몬은 모세의 대항 문화에 완벽하게 맞설 수 있었다. 

1) 그는 풍요의 경제로 평등의 경제에 맞섰다. 

2) 솔로몬은 억압의 정치를 내세워 정의의 정치에 맞섰다. 

3) 솔로몬은 하나님의 접근성의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에 맞섰다. 

 

솔로몬 체제가 비판을 잠재운 방법은 첫째 엄격한 금지조치를 내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처벌을 동원하는 방법과 둘째 비판에 대해서 적절한 면역성을 키우고 귀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신학적 공헌 두가지

1) 창조신앙

2) 메시야 사상의 출현

창조 신앙과 메시야 사상은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에 긍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경향을 드러냈으며 현 체제를 강화하고 껄끄러운 언약의 문제들을 억누르는 역할을 감당했다.

 

제국 경제의 목적은 백성을 배부르게 만들어 그들이 눈뜨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다. 제국 정치는 거부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다. 제국 경제는 아편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아시는 그 참상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 폐쇄된 세계, 곧 혁명이나 변화, 역사, 약속, 희망이 없는 땅에 갇혀 있는 왕인 파라오는 숱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대표하는 모델이 된다. 모든 왕이 심지어는 모든 면에서 탁월했던 솔로몬 까지도 이렇게 고착되고 폐쇄되어 버린 세상을 부러워한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는 춤추는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으며, 어떠한 신음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분은 제국에서는 신임을 받지 못하고 법정에서는 무시당하고 성전에서는 배척당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외된 인생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그곳에서 그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섭정을 자처하는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격정과 파토스를 통해 자신의 품격을 드러내시며 돌보는 권세요 울 수 있는 능력이자 애통하며 기뻐할 수 있는 활력으로 다가오신다.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돌보고 눈물 흘리고 애통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왕의 완력이나 굳은 마음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왕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왕권 의식은 실현가능한 배부름에 몰두했다. 예언자적 대안 의식은 언약과 관련한 파토스와 격정에 전념했다. 왕권 의식은 실현 가능한 배부름이라는 프로그램을 수단으로 인간다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규정했고 나아가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했다. 왕권 의식은 오직 자기 만족밖에 모르는 자기 중심적인 의식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기억하기를 요구하는 전통, 우리가 응답하기를 바라는 권위, 우리가 돌보기를 요청하는 공동체는 이 왕권 의식에 의해 정당성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현실에 맞서서 일어설 수 있는 수단이 모세의 혁신에서 비롯된 예언자적 말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3장_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우리는 왕권 의식에 확실하게 맞설 수 있는 대안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예언자적 상상력의 패러다임으로 고려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진정한 역사적 새로움을 상상하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을만큼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가 물어야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성취에 앞서 상상력이 와야 한다. 우리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힘이 있지만,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기도 하다. 어떤 것이든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왕권 의식이 상상력을 억눌러 버린다. 상상력은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가를 두려워한다. 예언자의 소명은 상상력의 목회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해주는 일이요, 또 왕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라고 주장하는 그 단일한 미래를 대신할 미래를 그려내고 제시하는 일이다. 

 

왕권 의식은 사람들을 무감각 상태로, 특히 죽음에 대한 무감각으로 몰아간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예언자적 목회와 상상력의 과제다. 

솔로몬의 체제는 격정의 상실을 초래했다. 격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돌보거나 아파하는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왕들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고 자기의 작은 모래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괜찮아 잘 될꺼야라고 말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의 과제는 이러한 무감각을 깨뜨리고 자기기만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이요, 그렇게 해서 종말의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과제

1) 무감각하게 만들고 부인하도록 강요하는 두렵고 거대한 경험에 맞서 싸우는데 적합한 상징을 제공한다. 

2) 예언자적 과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부인되고 철저하게 억눌려 와서 있는지조차 몰랐던 바로 그 두려움과 공포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은유의 언어로) 

3) 예언자의 과제는 우리를 억누르고 내면으로도 좀먹고 있는 실질적인 죽음의 운명을 은유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종말의 공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무너졌음을 밝혀내고, 상대방을 희생시켜 나를 보호하려는 경계선과 사회 서열을 분명히 드러내며, 굶주린 형제자매의 식탁을 갈취하여 내 배를 불리는 끔찍한 관행을 폭로하는 일이다. 예언자의 사명은 왕에게 그가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일을 경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1. 예레미야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모델은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요구한 것은 단지 왕의 공동체가 자기의 현실을 바르게 경험하고, 그래서 종말 앞으로 다가서는 일뿐이었다. 

 

예레미야의 애통은 두가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그의 애통은 자기 백성에게 닥친 종말을 슬퍼한 것이었다. 둘째 예레미야에게는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어느 한 사람도 듣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 8-10장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 법인데 유다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은 울 때다. 지금은 죽음의 때인데도 백성을 그런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가려고 하지 않는 자리, 그에 앞서 호세아만 뛰어들었던 자리, 곧 하나님의 고통으로 돌진했다. 야웨는 이제 파괴하거나 벌을 내리는 적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식 곁에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어버이이다. 골고다 언덕의 마리아나 압살롬 앞에 엎드린 다윗처럼, 죽은 이 곁에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외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비통해 한다.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과격한 행동과 분노로도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은 눈물이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연대의 형식이 무너져 버렸을 때 눈물은 고통을 나누는 연대의 방법이다…. 고칠 수 없는 질병, 깨진 언약, 힘을 잃은 활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비판을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알았다. 

죽음의 현실을 끌어안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그의 말 속에는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위로받지 못하며, 종말에 마주서지 않는 사람은 시작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모세를 따르는 예레미야는 무감각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사실, 곧 애통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장_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예레미야가 보여준 가장 근원적 비판은 ‘죽음에 대한 애통’이다. 

예언자적 대안 공동체는 비판과 동시에 활성화에 관여한다. 우선 이 공동체는 지배 의식은 끝나고야 말 것이라는 점과 지배 의식은 우리에게 최종적 권한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생생한 신앙과 생명력을 유지하게 해 주는 대안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제다. 

 

왕권 의식은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의 과제는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우리의 역사 속에 작동하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붙잡게 해주는 것이다. 

 

1. 억눌린 희망

왕권 의식은 희망을 가로막는다.

솔로몬이 성공한 이후에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영에서 소외되어 갔다. 

 

2. 새로운 시작을 거부함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 멸망이후 왕권 의식은 자신에게 아무 자원도 남아있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시작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들고 사물이 현재 존재하는 방식만을 완강하게 고집할 수 밖에 없었다. 

목회가 풀어야할 문제는 희망을 부인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말하고 내세우고 행할 만한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3. 절망을 뚫고 들어가기

세가지 행동을 제안

 

1) 상징들

절망의 상황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한 상징들을 제공하는 것

예언자는 자신들의 왕에게 절망한 공동체에게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희망의 상징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일 수 없고, 특정한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어야 한다.(사라의 잉태, 출애굽)

예언자의 두가지 과제로는 첫째 이 백성의 기억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희망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 언어와 말과 언어와 글귀가 어떻게 의식을 형성하고 현실을 규정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에 의하면 참된 세상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서 시작되고 그 말씀에서 원동력을 얻는 세상이며 이러한 기준은 왕들이 자기 말 이외의 말은 모두 잠재우려고 애쓰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희망과 열망

예언자적 상상력과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희망과 열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희망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배워온 모든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전복적인 성질을 지닌다. 

희망은 성만찬을 통해 실연된다. 

희망은 예언자가 사용하는 으뜸가는 어법이다. 

예언자적 희망은 쉽사리 왜곡되기도 한다.

희망에 대해 가장 힘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경험한 사람이다. 

 

3) 현실을 재규정하는 새로움

예언자들은 희망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 말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상황을 재규정하는 참된 새로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4. 경탄의 언어

왕의 절망과 자포자기를 꿰뚫는 희망으로 가득한 예언의 언어는 경탄의 언어다. 애통의 언어가 무감각의 언어에 맞서듯이, 경탄의 언어는 절망의 언어와 맞선다. 

- 제2이사야(140)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장례식으로 나갔던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 시인(이사야)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왕의 대관식 축제로 안내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절한 비탄 속에 내버려 두는데 반해,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활기 넘치는 기쁨으로 인도한다. 제2이사야는 외적인 정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상상력을 되찾는 일을 하고 있다. 

 

이사야 52:7 (NKRV)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권력을 잃어버린 듯 했던 분이 이제 다시 그 자리에 앉는다. 예레미야서에서는 패배하고 슬픔에 빠져 버린 듯했던 분이 이제 역사를 뒤집어엎는 분으로 나선다. 그리고 시인은 실권을 회복하는 일은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사 49:14-15)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신앙을 새롭게 했다. 온전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하며 낡은 체제들을 해체하고 지친 권력자들을 무너뜨리는 일만이 정말 필요하고 제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성화다. 탄식은 참된 왕이 힘을 잃은 것을 슬퍼하는데 반해, 송영은 거짓 왕을 거부하고 참된 왕을 신실하게 받아들인다. 

 

1) 새 노래 

새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새 노래를 부르는 때다.

이사야 42:10 (NKRV)

10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새 노래의 시대는 새로운 언약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현실이 열리는 때다. 

 

2) 태가 닫힌 여인이 아이를 낳다.(사 54:1) 

임신 못하는 여인이 출산하는 이미지

- 사라(창 11:30), 리브가(창 25:21), 라헬(창 29:31), 한나(삼상 1:2), 엘리사벳(눅 1:7)

이사야 54:1 (NKRV)

1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3) 양식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 제국의 빵에 굴복할 수 없다. 이 시인이 말하는 빵은 바빌론의 빵집을 허물어 버린다. 

이사야 55:1–2 (NKRV)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는 새 노래, 다산, 신선한 빵의 은유를 통해서 절망에 사로잡혀 버리는 대신 절망에 맞설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제공해준다.(남북 철도 연결, 반도에서 대륙으로의 상상력) 

기꺼이 자신의 주권적 자유를 포기하셔서 우리를 위하기도 하고 우리로부터 거리를 두기도 하는 다른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절망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소망을 품은 이에게 역전이 허락되며, 이제 그들은 새 힘을 얻고 솟구쳐 오르며 뛰고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일들은 소망 가운데 존재한다. 소망은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 받는 것이며, 감춰 두는 게 아니라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토스와 경탄의 시인들인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를 서로 따로 떼어 놓아서는 안된다. 예레미야만 받아들인다면 신앙은 하나님을 뵐 수 없는 죽음의 자리로 떨어지게 된다. 제2이사야만 의지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분명 아파하는 사람만이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고뇌를 통과하지 않은 새 노래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 되고 더 심하게는 왕의 속임수가 되어 버린다. 

 

 

5장_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지배 의식은 철저히 비판받아야 하고 지배 공동체는 완벽하게 해체되어야 한다. 대안 의식을 지닌 대안 공동체의 목적은 그러한 비판과 해체를 이루는 데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비판의 특징적인 어법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이다. 이 어법의 요점은 자신의 고뇌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공동체로 하여금 그 고뇌에 뛰어들게 만드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인품을 통해 왕권 의식에 대해 궁극적 비판을 가했다. 실제로 그분은 지배 문화를 해체했고 그 문화의 주장을 무효화했다. 그분이 궁극적 비판을 행한 방식을 보면, 변두리 인생들과 단호하게 연대하고 그러한 연대를 통해 그들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방식이었다. 

 

1. 예수의 탄생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마태복음(2:6-23)과 누가복음(2:17-20)의 두 판본은 비판을 통해 해체하고 경탄을 통해 활성화함으로써 서로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다. 

누가의 판본이 다가오는 새로움을 축하하는데 반해 마패의 판본은 이야기의 한 가운데 애통을 배치한다. 새로움은 고뇌와 고통과 눈물 없이는 오지 않는다. 

 

2. 하나님 나라의 선포

막 1:15절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 선포 속에는 그와 대응부를 이루는 현존하는 나라들은 끝이 나고 대체될 것이라는 내용도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복음은 위협하지 않고는 약속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끝내지 않고는 시작하지 않으며,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는 선물을 주는 법이 없다. 

 

*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행동

1) 용서

2) 안식일

3) 밥상 교제

4) 치유와 귀신축출

5) 여성

6) 세금과 빚

7) 성전

 

3. 긍휼

예수는 변두리 인생들과 연대를 이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근원적 비판이 겉으로 나타난 한 형태가 긍휼이다. 아픔은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문제요, 아픔이란 인간됨에 따르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정해서는 안되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긍휼이기 때문이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무감각할 필요가 있다. 군국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은 전쟁의 대가로 생명이 희생되는 일에 사람들이 무감각하기를 원한다. 법인체 경제는 빈곤과 착취라는 대가에 사람들이 무지하기를 원한다. 정부와 지배 계층은 무감각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다. 예수는 긍휼을 가지고 이 무감각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긍휼을 수단으로 삼아 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린 이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를 폭로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긍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애간장이 녹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나 심정을 보듬어 주는 것을 말한다.(마 14:14, 막 6:34, 막 8:2, 눅 7:12-13, 마 9:35-36) 

소외된 이들이 당하는 아픔을 나의 일로 품는 일은 특히 호세아서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애통의 전승을 따른 것이다. 

 

* 긍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마리아 인의 비유(눅 10:33)와 탕자의 이야기(눅 15:20)

무감각 대신 긍휼을 내세우는 행위, 곧 냉소적인 무관심을 끝내고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일은 사회적 혁명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예수는 지배문화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 문화에 임한 파멸적 종말을 폭로하는 권세를 행사한다. 현 질서의 희생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긍휼이며, 지배 문화는 이 긍휼을 묵인하거나 받아 들일 수 없다. 지배 문화가 자선과 선의는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연대하는 일은 막을 수 없다. 

듣고 볼 수 있게 된 고난은 희망을 낳으며, 겉으로 표현된 애통은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수의 역사는 고통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분명한 목소리로 표현해 낸 역사인 것이다. 

 

* 고통을 통해 구제화되는 예수의 근원적 비판

나사로의 죽음(요 11:1-57)의 이야기와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린 이야기(눅 19:41-42)

예수가 예루살렘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나사로를 위해 흘린 눈물처럼 죽음에 대한 고뇌를 함께 나누는 행위다. 나사로가 죽은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았다면 예루살렘 죽음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

 

4.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에수는 죽음의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끌어안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 비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당해야할 죽음을 끌어안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비판은 대항하여 맞서는 일이 아니라 함께 서는 일이다. 궁극적 비판이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찬 비판이 아니라 격정과 긍휼로 이루어지는 비판이다. 

1) 수난 고지

2) 십자가 위에서 한 말

3) 기독론적 찬양(빌 2:5-11) :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 복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비운 이분은, 다른 누구도 감히 엄두도 못 낼 권위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허락하는 최상의 권력자다. 

 

5. 정의와 긍휼의 정치

십자가 처형은 모세가 파라오와 맞서 싸운이래로 예언자적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해 온 해체를 완벽하게 성취한 사건이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무기삼아 억압의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목회와 죽음이다. 모세처럼 예수도 하나님의 자유, 곧 당신의 뜻대로 생명을 베푸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 자유를 무기 삼아 하나님을 포로로 삼은 종교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목회와 죽음이다. 

 

예언자적 비판은 애통하는 사람만이 위로받을 수 있음을 알며, 따라서 몰락하는 이 세상을 위해 어떻게 하면 진지하고 신실하게 애통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예수는 예레미야가 그렇게 통렬하게 느꼈던 고뇌를 이해했고 몸으로 구현했다. 

 

 

6장_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대안 의식을 지닌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은, 지배 공동체를 비판하여 완벽하게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 공동체의 목적으로서 해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어주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동, 특히 십자가 처형을 통해 왕권 의식을 해체했으며 그의 공동체에게 그 해체를 슬퍼하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이 냉혹한 현재가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가능한 실존 상태라고 믿고 있을 때에 이 궁극적 활성화는 그들에게 미래를 열어주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 새 미래가 열렸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놀라운 경탄이었다. 

 

1. 예수의 탄생

예수의 탄생은 특히 누가에 의해 새로운 사회 현시로 향하는 결정적인 활성화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그 시대의 통치자들과 대립하는 천사들의 노래를 통해 알려진다. 로마는 예측하지 못했고 헤롯은 막을 수 없었던 이 새왕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 역사는 모든 왕권적인 옛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 시작은 옛 질서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시작은 옛 질서의 희생자들로부터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여인(엘리사벳), 결백하지만 믿음으로 행한 젊은 여인(마리아), 말문이 막혀버린 늙은 남자(사가랴),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가운데서 시작이 이루어진다. 이 사람들은 깊은 슬픔을 알았던 사람들이기에 경탄을 체험하는 기회를 누린다. 이렇게 경탄은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죽음을 애통할 줄 모르는 옛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움은 설명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설명한다는 것은 왕의 옛 범주들 속에 강제로 집어넣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활력을 일으키는 희망은 설명과 이해에 능숙하지 못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자기들로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허락된다. 

 

2. 예수의 목회

예수의 목회란 아무것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 바로 그 때에 근원적 시각을 열어주는 활성화다. 

탄생은 희망만을 담고 있으나, 목회는 그 희망의 가능성이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자리가 된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생명을 부어 주었던 예수의 치유에 대한 반응은 찬양의 성격을 띠는 경탄으로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은 동시대인들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었기에 그 반응은 부정과 저항과 분노의 성격을 띠는 놀람으로 나타났다. 한편 미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다른 한편 예수가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데 분개가 쏟아진다. 어떤 경우든 그의 목회는 무력한 옛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격정과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3.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은 주도면밀한 음모에 의해 부인되어 왔던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밝혀냈으며 이 일을 통해 근원적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가르침이 오히려 행위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그의 행위를 통해서는 암시적으로만 드러났던 과격한 도전과 근원적 변혁의 의미를 그의 가르침이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구분이 무너지고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일이다.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사람들을 병자와 죄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일은 더 큰 일이다. 가르침이 행동과 나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르침에 구체성과 현실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과 마찬가지로 가르침도 부수고 열고 초대하는 일을 한다. 가르침은 막혀버린 미래를 열어주고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일이 가능함을 알려준다.

 

화의 선언은 죽음을 예견하고 선포하고 있으며, 가장 근원적 비판이 된다. 복의 선언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말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4.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미래를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부활은 지금까지 존재한 현실에 근거해서는 설명이 안된다. 부활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경축하는 일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절망 가운데서 경탄하게 해 준다. 

부활은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는 예언자적 활성화의 궁극적 행위다. 부활은 죽은 이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진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새 역사는 사람들에게 새 정체성(마 28:19)과 새 윤리(마 28:20)를 제공한다. 

 

 

7장_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1. 요약

출애굽과 모세의 운동을 통해 역사 속에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해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과 탄식으로부터 시작되고 활성화는 새로운 공동체의 송영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지키는 데 관심을 둔 군주 체제는 비판을 잠재우고 활성화를 차단하기 위해 힘을 동원한다. 한편 왕권 의식에 맞서 예레미야는 근원적 비판을 수행한다. 예레미야는 장례식이라는 그림을 통해 죽어가는 이스라엘의 애통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이 일을 수행하고 제2이사야는 왕권의식에 맞서 근원적 활성화를 수행한다. 그는 대관식이라는 그림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의 경탄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예언자이자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로 해체를 성취하셨고 부활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미래를 활성화하셨다. 

 

2. 목회

예언자적 목회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일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거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 목회는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로 구성된 회중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아닐지는 몰라도 예언자적 목회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지원하지 않는다.

예언자적인 목회는 거창한 사회개혁 운동이라든가 의분을 쏟아내는 비판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적 목회란 대안적인 현실 인식을 제공하는 일이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또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자신들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유라든가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제가 언제나 그 시대의 가장 큰 쟁점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함께 살고자 노력하고 공통의 미래와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그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 예언자적 목회의 특질

1)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이 하는 일은 다른 일이요 다른 방신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다. 이 대안 공동체는 지배 공동체와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2)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또한 어떤 상황에도 빛을 밝혀 줄 수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 자세, 해석학을 다룬다.

3) 예언자적 목회는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가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게 해 준다.

우리가 흔히 무감각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화와 분노인데, 오히려 애통과 탄식이 무감각을 깨뜨리는 데는 훨씬 더 효과적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은 고통의 현실을 가라앉게 만들고 죽음을 몰아내는 방법이 된다.

4)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미래를 믿고 그 미래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확증해 주는 말과 몸짓과 행동만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3. 선물로 받는 근원적 신앙

근원적 신앙은 공로가 아니다. 

예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있었다. 예수는 매우 변증법적인 두 시대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는 현재의 세상을 유일한 세상이라 여기고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을 수 없다. 또 현재에는 무관심한 채 미래만을 갈망하는 탈세상적인 사람들과도 다르다. 현재에 미래가 임할 수 있도록 애통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기들에게 죽음이 임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해야 할 일이 있다.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힘이나 자유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애통할 일이 있다. 

애통은 기쁨에 이르는 형식적이고 외적인 요건이 아니라 유일한 문이자 통로가 된다. 울고 웃는 일에 관한 예수의 말은 한낱 멋들어진 경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 전체의 요약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애통하는 배울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사회의 현실에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애통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애통해하는 분이며, 그분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하기 전까지는 기뻐하기를 미루시는 분이다. 

 

 

실천 후기

예언자적 상상력을 한낱 멋진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교회의 예언자적 증언은 목회의 특정 기능이나 다른 어떤 일과도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예언자적 증언이란 정신적 태도를 뜻한다.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세상사를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항 문화적인 의식이다. 

교회의 모든 기능은 다 예언자적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으며, 그 예언자적 목소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배 문화를 향해서 비판을 가하는 한편 신앙인들에게는 활력을 불어넣는 데 봉사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목회적 돌봄은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설교도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교회 학교의 교육도 예언자적 목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본질적 문제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그 시대의 문화에 사로잡혀 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 일이다. 하나님 말씀의 전체 계획에 신실하고자 애쓰는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 체는 우리 시대의 지배 문화가 펼쳐 놓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된다 

 

 

 

 

 

Q. 코로나 시대 이후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발휘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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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두 가지 견해(IVP, 윌리엄 로더, 메건 드프린자, 웨슬리 힐, 스티븐 홈스)

 

 

일단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 견해라면 동성애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책 전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여기에 등장하는 4명의 견해가 두가지로 크게 나뉘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에 한 사람도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네명의 저자를 크게 둘로 나누면 윌리엄 로더와 메건 드프란자는 성경적, 신학적으로 동성 결혼까지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웨슬리 힐과 스티븐 홈스의 경우에는 결혼은 출산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동성 결혼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웨슬리 힐 본인이 게이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성서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동성애를 느끼는 것과 이것이 동성간의 성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책의 구성은 각각의 저자가 본인의 입장을 주장하고 나머지 세 명이 각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비평을 하고 이 비평들에 대한 저자의 반론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 비평의 과정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깍아내리지 않고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깊고 중요하다. 

 

한국 기독교는 동성애라는 주제에 대해서 매우 과격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동성애를 반대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서 겸허하게 듣고 이것에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서문(프레스턴 스프링클)

휴거나 전천년설이나 방언 등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논쟁을 벌이는 다른 문제들과는 달리 동성애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건드린다. 동성애가 그저 쟁점이 아닌 것은 사람이 단순한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결혼,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성경 본분이나 교리나 성경 신학적 주제의 영향을 받은 쟁점들이다. 동성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의 맥락이 되는 고대 근동 사회와 그리스-로마 사회를 파고들어야 하며, 동성 관계에 대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관점을 연구해야 하며, 심리학과 사회학과 생물학의 최근 연구들을 참고해야 한다. 또한 동성애는 들을 줄 알아야 하는 문제다. 실제 게이와 레즈비언과 양성애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저자들 소개

1) 윌리엄 로더 :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의 섹슈얼리티 전문가, 

- 동성애 관계를 긍정하는 입장

- 성경은 동성애 관계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윤리에 성경을 적용할 때는 생물학, 인류학, 사회학 등 섹슈얼리티와 젠더와 관련한 다른 분야들의 학문적 성과를 고려해야 한다. 해석학적, 윤리학적 이유에서 로더는 신실하고 배타적인 동성간 관계는 신성하다고 인정한다. 

 

2) 메건 드프란자 : 성,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신학적 연구의 전문가

- 성경의 금지 본문은 인신매매, 경제적 착취, 젠더와 사회 계급의 이해에 얽힌 서로 다른 권력들이 지배하던 고대 성 문화의 배경에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 본문은 서로 합의한 배타적 동성 간 결합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3) 웨슬리 힐 : 성서학자, 신학자, 게이 그리스도인

- 동성애 관계를 긍정하지 않는 관점에서 주장, 금지 본문들을 결혼, 성, 출산에 대한 신학의 지배적인 입장(아우구스티누스)과 대비시킨다. 

 

4) 스티븐 홈스 : 조직 신학자

- 아우구스티누스의 결혼에 대한 견해를 기초로 동성 커플은 출산을 할 수 없기에 동성 간 관계는 성과 결혼의 신성함에서 배제된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목회적인 입장에서 이혼 후에 재혼한 이성애 커플들을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받아들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교회가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들을 목회적으로 수용할 어떤 가능성을 살펴본다. 

 

 

제1장. 동성애와 성경(윌리엄 로더)

최근 들어 점점 커밍아웃,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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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아타나시우스, 죠이북스)

 

 

아타나시우스(295-373, 추정)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여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악렉산드로스의 비서가 되면서 제 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예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이단사상에 맞서 삼위일체를 수호했다. 이후 30세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어 46년간 섬겼다. 성경적 기독론을 수호하기 위해서 ‘콘트라 문둠(contra mundum)’, 즉 ‘세상에 대항’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의 묘비에는 ‘아타나시우스 콘트라 문둠(Athanasius contra mundum), 즉 ‘세상에 맞선 아타나시우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는 아리우스의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괴롭힘으로 교구장직을 박탈당하고 17년동안 추방이나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굽히지 않고 정통신학을 개진하고 옹호하는데 힘썼으며, 신약 성경 정경의 목록을 27권으로 제안했댜. 세상을 떠난지 8년후인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되었다. 

 

아나타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

 

이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싸운 정통 교회의 용사인 아타나시우스(293-373 A.D.)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비록 아타나시우스가 이 신경을 기록하지 않았고, 이 신경에 그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지 않을지라도, 이 신경은 계속해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왜냐하면 17세기까지 이 신경이 그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불리었기 때문이다. 이 신경은 라틴어 원본의 첫 단어를 따라 "Quincunque" 혹은 "Quincunque vult"라고도 부른다. 시작하는 문장(1-2)과 끝맺는 문장(42)을 제외하고, 이 신경은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첫 단락은 정통 삼위 일체 교리를 진술하고(3-28), 두 번째 단락은 그리스도의 교리, 특별히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다룬다(29-41). 어거스틴(354-430 A.D.)의 가르침은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단락의 배경을 형성한다. 그리고 칼세돈 공의회(451 A.D.)의 결정은 기독론적 단락의 배경을 형성한다. 이 신경은 6세기 초반부에 처음 나타났으나 그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신경은 원래 서방 교회의 것이고, 동방교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1.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2.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손상됨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3. 이 보편적인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4. 삼위가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5. 왜냐하면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7. 성부께서 계심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8. 성부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9. 성부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0. 성부께서도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11.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고 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12. 또한 세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 아니시고 세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고, 한 분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고, 한 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3. 동일한 방식으로, 성부께서도 전능하시고,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십니다.

14. 그러나 세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고 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15. 이와같이 성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자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십니다.

16.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17. 이와같이 또한 성부께서도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며, 성령께서도 주님이십니다.

18. 그러나 세 분의 주님이 아니시고 한 주님이십니다.

19.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20.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21.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22.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23.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24. 그러므로 한 성부이시지 세 성부가 아니시고 한 성자이시지 세 성자가 아니시고 한 성령이시지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25. 그리고 이 삼위안에 먼저 되시거나 나중되신 분이 없으시고, 더 큰 자나 더 작은 자도 없으십니다.

26. 그러나 삼위는 세 위가 영원히 서로 공존하시고, 동등하십니다.

27. 그래서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일체안에서 삼위이시고 삼위안에서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해야만 합니다.

28.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29. 그러나 한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것을 신실하게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30. 이에 대한 참된 신앙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1. 그는 시간이전에 성부의 본성에서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시간 안에 자기 어머니의 본성으로부터 나신 분이십니다.

32.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또한 이성있는 영혼과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입니다.

33. 신성으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인성으로 말하면 성부보다 낮으십니다.

34. 비록 그가 하나님이요, 또한 사람이시지만 두 분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35. 그러나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한 분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36. 그는 본성의 혼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위격의 일치로 말미암아 완전한 한 분이십니다.

37. 왜냐하면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있듯이 그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38.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 당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39.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40.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행한대로 아뢰일 것입니다.

41. 그래서 선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나 악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불로 들어갈 것입니다.

42. 이것은 보편 신앙입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확고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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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헨리 조지, 비봉출판사) / Progress and Poverty

 

 

역자의 글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인 세원으로 삼아야 한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후반에 사회를 풍미하던 통설, 즉 인구의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사회가 고도로 진보하는 가운데 극심한 가난이 존재하는 원인은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지대를 조셀 징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이후 많은 이상주의자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각국의 토지제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도입부 : 문제의 제기

금세기(19세기)의 특징은 부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거했다는 점이다. 증기와 전기의 이용, 개선된 생산공정과 노동 절약적 기계의 도입, 고도의 분업과 거대한 생산 규모, 교환의 눈부신 발전 등으로 인해 노동의 효율성이 대폭 높아졌다. 

새로운 힘에 의해 사회가 근본에서부터 개선됨으로써 극빈층도 전혀 부족함을 느낄 수 없고 최하층도 생활물자의 결핍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상상의 눈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못 크는 일이 없고, 노인이 물자 부족으로 시달리는 일이 없으며, 젊은이는 열심히 일하는 한편 찬란한 별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인다. 악은 사라지고 불화는 조화로 변한다. 모든 것이 풍족한 곳에 어찌 탐욕이 있을 것인가? 빈곤이 사라진 세상에, 빈곤 또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인 죄악이나 범죄나 무지나 잔인함이 어찌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자유인인데 누가 굽실거리며 살 것인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에 어찌 압제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꼬리를 무는 발견과 발명도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계층의 고된 일을 덜어 주지 않았고 빈민에게 생활의 여유를 주지도 않았다…. 문명 세계의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불황, 비자발적 실업, 자본의 낭비, 기업인의 자금 부족, 노동자 계층의 빈곤과 불안이다.(29) 

 

산업불황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는 각종 현상은 물질적 진보에 항상 수반하며 물질적 진보가 진전될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 강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진보가 이루어지는 곳에 빈곤, 빈부격차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한 논점도 피해가지 말고 어떠한 결론이 나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기로 하자. 우리는 진정한 법칙을 찾아야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우리 문명의 한 가운데서 여인들은 생기를 잃고, 어린이들은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칙이 어떤 내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못된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이 우리의 편견과 충돌하더라도 움츠리지 말자. 그 결론이 오랫동안 현명하고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여 온 제도를 부정하더라도 되돌아서지 말자.”

 

 

제 1권. 임금과 자본

1장. 현재의 임금학설-그 불충분성

“생산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왜 임금은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가?”

현 정치경제학에서는 임금은 노동자의 수와 자본의 양 사이의 비율에 의해 정해지는데 노동자 수는 자본이 증가하는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자의 생존과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최저 금액으로 낙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 임금기금설 : 임금으로 지급되는 자본이 정해져 있다라는 이론이다.

 

임금이론을 지지하는 여러 연구의 논리를 귀납이 아니라 연역(임금이 자본에서 나온다는 이론)적인 접근에서 나왔다. 

 

헨리 조지가 증명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나온다.”

 

현대의 복잡한 생산과정을 단순화시켜보면 사회의 모든 생산은 각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각자가 자기 노력에 대해 받는 보상은 원시인이 그랬던 것과 같이 노력의 결과로 자연으로부터 얻는 것임을 알 수 있다.(48) 

 

 

2장. 용어의 정의

임금 : 고용된 사람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는 대가

노동 : 부를 생산하는 모든 인적 노력을 말하고, 임금은 생산물 중에서 노동에 돌아가는 부분으로서 인적 노력에 대한 모든 대가를 포함한다. 

 

생산의 3요소 : 토지, 노동, 자본

- 토지 : 물이나 공기와 구별되는 지구의 표면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물질적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 자연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자본으로 분류될 수 없다. 

- 노동 : 모든 인적 노력

- 자본 : 토지나 노동을 제외한 것으로 이 두가지의 결헙에 의해 생산된 것. 

모든 자본은 부이지만 모든 부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자본을 교환 과정에 있는 부라고 정의한다면, 그리고 이때의 교환이 단지 거래뿐만 아니라 자연의 재생산력 내지 변형력을 통해 부를 증가시키는 것과 같은 변환까지도 포함한다면, 일반적으로 자본이라고 하는 내용을 모두 포괄할 수 있으며 자본이 아닌 것을 모두 배제할 수 있다.(67)

 

 

3장.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언제나 생산은 임금의 어머니이다. 생산이 없으면 임금은 생기지도 않고 생길 수도 없다. 임금의 원천은 자본이 아니라 노동생산물이다.(75)

- 헨리 조지는 ‘임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아담 스미스의 명제를 공격한다. 

 

가치는 생산물이 완성되어야만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 창조는 생산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노동 투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생하며 따라서 생산 과정이 아무리 길더라도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임금을 받기 전에 자본을 증가시킨다.(83)

 

임금 지불의 조건은 언제나 노동의 제공이며, 생산 과정이 아무리 길더라도 임금 지불은 자본의 선불이 아니고 잠시라도 자본을 줄이지 않는다.(84)

 

 

4장. 노동자의 생계비도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은 “한 나라의 국민은 현재 노동의 생산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거 노동의 생산물에서 생활물자를 공급받는다”라고 말했다. 헨리 조지는 이 명제가 자본에 대한 잘못된 정의로부터 기인하였다고 주장한다. 

 

음식이나 옷 등 모든 종류의 부는 이를 소비하지 않고 다른 상품 내지 생산적 서비스와 교환하려는 사람이 보유하고 있을 때에만 자본이며, 소비할 사람의 수중으로 넘어가면 자본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다른 부를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보유하는 부에서부터 욕구 충족의 목적으로 보유하는 부로 바뀌기 때문이다.(90)

 

“소비에 대한 수요가 생산에 투입될 노동의 방향을 결정한다.”(94)

 

 

5장. 자본의 진정한 기능

자본이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나 생산 기간 중 노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다면 자본의 기능은 무엇인가? 

자본은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로서 욕구의 직접적 만족을 위해 사용되는 부와 구별된다. 혹은 교환과정에 있는 부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노동에 의해 부로 전환되는 원료를 공급하지 않는다. 부의 원료는 자연에 의해 공급된다. 그러나 일부 가공된 원료와 교환 과정에 있는 원료는 자본이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임금을 공급하거나 선불하지 않는다. 임금은 노동의 생산물 중에서 노동자가 획득하는 부분이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작업 기간 동안 노동자의 생계를 유지시켜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계가 유지되며, 자신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자와 교환될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사실상 자신의 생계용 물자를 생산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통설과 달리 산업을 제약하지 않으며 산업에 대한 유일한 제약은 천연 원료에 대한 접근의 제약이다. 그러나 자본도 도구 사용과 노동 분업을 제약함으로써 산업의 형태와 생산성을 제약할 수는 있다.(99)

 

정치경제학에서 ‘자본은 산업을 제약한다’고 하는 격언은 자본이 노동의 형태나 노동의 생산성을 제약한다는 뜻이 아니고 노동의 투입을 제약한다는 의미이다. 이 명제가 타당하려면 자본이 노동에 원료와 유지비용을 공급한다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정에 근거가 없다는 점은 이미 검토하였다. 자본은 노동에 의해 생산되며 따라서 자본이 존재하려면 노동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가정이 명백히 앞뒤가 맞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자본은 산업의 형태와 산업의 생산성을 제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자본 없이는 산업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100)

 

임금이 자본에서가 아니라 노동생산성에서 나온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현재의 이론은 틀렸으며,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 내놓는 각종 처방들, 예를 들면 자본 증대, 노동자 수 제한, 노동자 작업 능률 향상 등은, 정치경제학 교수들이 내놓은 것이든 노동자가 내놓은 것이든 폐기되어야 한다. 개별 노동자가 진실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임금이 나오는 기금을 창출한다면 노동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임금이 줄어들 이유가 없다. 오히려 노동자 수가 많아질수록 노동의 능률이 분명히 증가하므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임금은 노동자 수와 더불어 오히려 증가히야 한다.(106) - 임금기금설에 대한 비판

 

 

제 2 권. 인구와 생존물자

제 1장. 맬서스 이론, 그 발생과 지지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의 이론은 ‘인구는 자연히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구 증가는 기하급수적이고 생존물자의 생산은 산술 급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맬서스의 결론은 인구의 무한 증가 경향은 인간의 출산력에 대한 도덕적 절제 또는 사망률을 높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억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결국 세상은 악하고 비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금이론 :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면 자본을 지금보다 더 잘게 나눠야 하므로 임금이 하락한다는 것이고, 이에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의 증가로 인해 생존물자를 더 나눠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빈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진화론(적자생존 원리)의 결합

 

제 2장. 사실로부터의 추론

저자는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가정은 경험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이유가 없음을 지적한다. 

 

인구론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물자는 산술적 비율로 증가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데 이 가정은 강아지 꼬리가 두배가 되는 시간에 몸무게가 2파운드 불어나는 사실을 보고 꼬리는 기하적 비율로, 몸무게는 산술적 비율로 불어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비율을 따르자면 개가 50파운드가 자랐을때 꼬리는 1마일이 넘게 된다는 것이다. 

 

- 인도와 중국의 예를 통해서 볼 때 기근의 이유는 조밀한 인구 때문이 아니라 사회조직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지 못하고 노동이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제도에 기인한다. 표면적으로 인구의 과잉으로부터 빈곤이 온 것처럼 보이는 결과도 그 원인을 추적하면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 아일랜드의 빈곤과 기근의 진정한 원인은 토지가 인구를 부양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압제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희소한 브라질의 기근의 원인이 인구 과잉이 아니듯이, 인도, 중국, 아일랜드의 기근의 원인도 인구과잉이 아닌 것이다. 결핍에서 오는 죄악과 비참의 원인은 자연이 인색해서가 아니다.(145) 

 

제 3장. 비유로부터의 추론

인간에게 식품을 공급하는 자연은 인간보다 재생산력이 훨씬 클 뿐만 아니라 일체의 생물 중에서 인간은 자연의 재생산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식품 증가가 인구 증가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인구 증가가 식품 증가의 원인이다. 

동식물세계에서는 어느 동식물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그 동식물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생존물자의 한계는 토지, 공기, 물, 햇빛의 궁극적 한계 내에서라면 인간 자신에 달려있다. 

 

생산성 체감의 법칙 : 어떤 점 이상에서 노동과 자본의 추가 투입에 대한 토지의 생산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외견상으로만 그럴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을 자연이 베푸는 물자가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그 중에서 한정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것만을 취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동물적 욕구가 충족되면 즉시 다른 욕구가 싹튼다. 인간도 짐승과 마찬가지로 먼저 음식을 원하고 다음에는 집을 원하고 그 다음에는 생식 본능이 일어난다. 그러나 짐승은 여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만 사람은 무한한 진행 단계의 다음 단계를 향한다. 인간은 양이 충족되고 나면 그 이후 질을 추구한다. 그리고 나아가 미(멋)을 추구한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무언가를 알고 싶어한다. 불타는 사막이나 살을 에는 북극의 바람 속을 탐험하는 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다. 

 

음식이 풍족해지고 생활의 조건이 풍요해진다면 동식물은 증식할 뿐이지만 인간은 발전한다. 

 

제 4장. 맬서스 이론의 부정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물자를 더 많이 마련할 수 있다. 빈곤과 비참함의 원인은-현재의 이론은 인구 증가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자연스러운 질서 속에서는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낸다.

 

생산력이 풍부하고 부의 생산이 최대가 되는 사회에서 빈곤이 발생한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문명세계를 당황하게하는 수수께끼이며 우리가 해명하려고 하는 문제이다. 빈곤의 원인이 생산력 감소에 있다고 하는 맬서스 이론은 이를 해명하지 못한다. 

 

 

제 3 권. 분배의 법칙

제 1장. 분배의 법칙과 법칙 간의 필연적 관계

물질적 진보와 더불어 임금이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하락하는 현상은 노동자 수아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임금 지불의 원천이 되는 자본총액 중에서 노동자 일인당의 몫이 줄어든다는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생산력의 대폭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산자가 얻는 대가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도에 국한되는 원인이 자본의 제약 또는 노동에 대응하는 자연력의 제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은 부의 생산을 제약하는 법칙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분배에 관한 법칙에서 찾아야 한다.(170)

 

토지, 노동, 자본이 결합하여 부를 생산하므로 생산물도 세 요소에 분배될 수 밖에 없다. 지대는 토지 소유자에게,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데 자본의 대가가 되는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난해하다. 이는 부가 지대, 임금, 이윤으로 나뉘어진다고 설명하는 것은 마치 인류가 남자, 여자, 인간으로 나뉘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한다.(173) 

 

임금은 노동의 임금과 생존물자에 충당할 자본의 양과 일자리를 구하는 노동자의 수 간의 비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 어느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노동과 자본의 투입으로 사용 토지 중 최열등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부분이다. 

이자는 자본 차용자의 수요와 대여자의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결정된다. 한편 이윤법칙이라는 것에 의하면 이윤은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 임금이 상승하면 이윤이 하락하고 임금이 하락하면 이윤이 상승한다.(176)

 

생산 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토지라는 용어는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기회와 힘을 의미한다. 노동이라는 용어는 모든 인적 노력을 의미한다. 자본이라는 용어는 더 많은 부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부를 의미한다.(177)

 

자본은 노동의 결과이고, 노동의 생산을 돕기 위해 노동에 의해 사용된다. 노동은 적극적이고 원초적인 힘이며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의 사용자가 된다. 노동은 토지가 있어야만 실행될 수 있고 노동에 의해 부로 전환될 물자는 토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토지는 노동의 선행조건이며, 노동의 장소이고, 노동에 필요한 원료이다. 세 요소의 자연스러운 순서는 토지, 노동, 자본의 순이 된다. 

 

 

제 2장. 지대와 지대법칙

지대(rent)는 생산물중 토지 기타 자연 능력의 소유자에게 그 소유권에 귀속되는 부분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토지 기타 자연 능력의 사용에 대해 지불되는 대가 이외에도 건물, 기계, 기타 고정 시설물의 사용에 대해 지불하는 대가도 일반적으로 렌트라고 부른다.(180)

 

지대는 독접가격이고 인적 노력에 의해 생산할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는 자연 요소를 개인 소유권의 대상으로 삼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투입으로 사용되고 있는 토지들 중에서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생산물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 법칙은 생산물이 지대와 임금으로만 나누어진다면 바로 임금법칙이 되며 지대, 임금, 이자로 나누어진다면 바로 임금과 이자를 합한 것의 법칙이 된다. 

*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이와 같이 임금과 이자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대를 공제하고 난 후의 잔여에 의해, 즉 무지대토지에서의 생산물 또는 사용 토지 중 가장 열등한 토지에서의 생산물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다.(186) 지대 상승이,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증대됨에도 불구하고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제 3장. 이자와 그 발생 원인

이자는 자본 사용에 대한 모든 대가를 포함하며, 차용자가 대여자에게 지불하는 것이 국한되지 않는다. 또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은 제외된다.(188)

 

* 대패 이야기

 

돈을 가만 내버려 둔다면 돈은 증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도주를 가만 내버려둔다면 1년이 지나면 포도주의 질이 향상되기 때문에 가치도 증가한다… 이런 경우 증가의 원인은 노동과는 다른 그 무엇이며 이를 자연의 능동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195-저자는 이 힘을 이자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생산에는 세 가지 방식, 적응(Adapting), 키우기(Glowing), 교환하기(Exchanging)가 있다. 자본을 사용하는 방식(나무와 쇠를 이용해서 대패를 만드는 것)의 이익은 노동에 돌아가고 증가(땅에 씨를 뿌리고 포도주를 저장하는 것)에서 나오는 이익은 자본에 돌아간다고 보았다.(201) 이렇게 해서 이자는 자연의 새생산력과 그에 준하는 효과를 가진 교환의 능력에 의해 자본이 갖게 되는 증가력에서 나온다. 

 

 

제 4장. 의사자본과 흔히 이자로 오인되는 이윤

자본의 대가에 포함되는 지대, 발전하는 사회에서 총생산 중의 비율이 계속 커지는 지대는 자본의 대가가 아니므로 이자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자본의 힘을 건설적이라고 한다면 집중(독점)이 계속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기는 힘은 파괴적이다.

 

흔히 이자라고 착각하는 이윤의 대부분이 실은 자본의 힘에 의해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자본에 의해 또는 집중된 자본이 나쁜 사회제도와 결합함으로써 생긴다는 사실(207) 

 

 

제 5장. 이자법칙

자연의 생명력이 시간 요소에 주는 이익이 이자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자율의 최고한도는 이 생명력이 생산에 기여하는 강도와 정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정상적인 이자 수준은 자본 대가의 필연적인 최고한도와 필연적인 최저한도 사이의 어느점에 놓이는데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 자본의 대가와 노동의 대가는 동일하게 된다.(212)

 

임금과 이자 간에는 어떤 관계 내지 비율이 존재하며, 이 관계 내지 비율은 매우 서서히 변화하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이 관계 내지 비율에 따라 노동이 자본으로 전환되어 당시의 지식 정도, 기술 상태, 인구밀도, 직업의 특성, 교환의 다양성과 범위 및 신속성에 비추어 생산에 필요한 만큼의 자본을 공급한다. 이러한 관계 내지 비율은 노동과 자본의 상호작용에 의해 유지되며 따라서 이자는 임금의 등락과 함께 등락하게 된다.(214) 

 

“임금과 이자 간의 관계는 자본이 재생산 형태로 사용될 때 그 자본이 가지는 평균적인 증가력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가 상승하면 이자는 임금과 더불어 하락한다. 즉 이자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

 

 

제 6장. 임금과 임금법칙

인간 행동의 기본 원리는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는 토지와 노동이라는 두 생산요소의 산물이다. 

 

고용주가 지불해야 하는 임금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자연적 생산력의 최저점에 의해 정해지고, 임금은 이 최저점의 등락에 따라 등락한다.(218)

 

임금은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고, 임금의 크기는 노동에 개방된 최고의 자연적 기회로부터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의 크기에 의해 정해지며, 이는 인간이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원리에서 나온다.(220)

 

“임금은 생산의 한계, 즉 지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 

 

저자는 아담 스미스와 같은 정치경제학 학자들이 임금법칙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제 7장. 법칙 간의 연관성과 일관성

인간은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것으로서, 생산요소 중의 하나와 관련지으면 지대법칙이 되고, 다른 요소와 관련지으면 이자법칙이 되고, 또 하나의 요소와 관련지으면 임금법칙이 된다.(229)

 

 

제 8장. 문제의 정태적 측면은 해명되었다. 

현 이론이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천문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처럼 단순성과 조화성을 갖춘 정치경제학 이론을 고려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233) 

 

임금이 생산력 증가에 맞추어 증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대의 증가 때문이다.

 

생산력이 증가한다고 해서 임금이 증가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생산력의 증가가 토지의 가치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지대가 모든 이익을 흡수하므로 빈곤이 진보와 동반하게 된다. 

 

 

제 4권. 물질적 진보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

“형제여, 저 울음이 들리는가? 슬퍼할 나이도 안 된 아이들의 울음이.

머리를 엄마에게 기대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어린 양은 목장에서 노래하고

어린 새는 둥지에서 지저귀고

어린 사슴은 그늘에서 뛰놀고

어린 꽃은 서쪽으로 바람에 흩날리는데 -

형제여, 어리디 어린 우리 아이들이 슬피 울고 있다. 

모두들 즐거이 노는 시간에 울고 있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 브라우닝 부인

 

 

제 1장. 문제의 동태적 측면에 대한 검토

지대 상승의 원인은 무엇인가?

리카도는 지대 상승의 원인으로 인구 증가만을 들었다. 

 

물질적 진보의 원인 세 가지

1) 인구의 증가

2) 생산과 교환의 기술 개선

3) 부의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진 지식, 교육, 정부, 치안, 예절, 도덕등의 개선

 

 

제 2장. 인구 증가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

맬서스의 이론에 의하면 생존 물자에 대한 인구의 압력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심해지며, 입 하나에 손 둘이 세상에 태어나는데도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 손은 새 입을 먹여 살리기가 더 힘들어진다고 한다. 리카도의 지대법칙에 의하면 사용 토지의 생산성 차이에서 지대가 발생하며, 리카도 내지 그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경험상 인구 증가에 지대 상승이 동행하는 것은 비용을 더 들이지 않으면 식품을 더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추가 인구는 더 낮은 생산점으로 밀려나고 그만큼 지대가 상승한다라고 말한다.(243)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면 경제성이 높아져서 노동의 효율이 향상되므로, 새로 경작되는 토지의 토질이 종전보다 열등하더라도 같은 양의 노동에 의해 생산할 수 있는 부는 종전보다 많아진다. 인구 증가의 효과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미 경작되고 있던 더 좋은 토지에서도 부의 생산력이 높아진다. 다시 말하면 비율로서의 임금은 하락하더라도 양으로서의 임금은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부의 평균생산은 증가한다…. 인구 증가로 인해 더 질이 낮은 토지를 추가 사용하게 되지만 동시에 모든 노동의 효율성도 향상되어 기존에 사용되고 있는 우수한 토지에서의 생산 증가는 새로 사용되는 토지의 생산성 하락을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총투입에 비한 부의 총생산은 많아지지만 부의 분배는 더 불공평해진다. 

 

- 광대한 평원에 처음 이주해서 정착한 가정, 뭐든지 하지만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혼자 살 때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만족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게 된다. 그의 토지에서 수확되는 밀이나 옥수수나 감자의 양은 전만 못하겠지만 이 토지로 인해 생기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은 훨씬 많다. 그 토지에 노동을 투입해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것도 아니고 더 가치있는 곡물을 얻는 것도 아니자만, 노동의 목적인 온갖 다른 물자는 훨씬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인근 주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인구가 증가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런 물자를 얻기 위한 노동 생산성이 높아졌고, 그 때문에 토질이 동일하더라도 주민이 없는 땅보다 우등한 토지가 되었다. 이 토지는 농업 생산성에 있어서는 처음보다 못하지만 그보다 높은 종류의 생산성이 발전하기 시작한다.(250)

 

이 토지에 결부되는 모든 유리함은 이 토지가 아닌 곳에서는 누릴 수 없다. 이곳이 인구의 중심이고 교환의 초점이고 고급 산업이 입지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구 밀집으로 인해 이 토지에 결보된 생산력은 토지의 비옥도가 수백 배, 수천 배 증가한 것과 맞먹는다…. 지구에서 가장 비싼 토지, 지대가 제일 높은 토지는 자연적 비옥도가 특히 높은 토지가 아니라 인구 증가로 인해 생긴 효용이 특히 높은 토지이다.(253)

 

인구 증가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지대를 상승시키고 그 결과 총생산 중 자본과 노동의 대가로 귀속되는 비율을 감소시킨다. 첫째는 경작의 한계를 낮추는 방식, 둘째는 잠재해 있던 특별한 능력을 토지에 발현시키고 이 특별한 능력을 특정 토지에 결부시키는 과정.

 

 

제 3장. 기술 개선이 부의 분배에 미치는 효과

인구 증가는 노동생산성을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향상시킴으로써 지대를 상승시킨다. 인구 증가와 관계 없이 생산과 교환 방법이 개선 될 때 지대가 상승된다.(255) 

 

부의 생산을 위해서는 두 가지, 즉 노동과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노동 절약적 개선은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며 사용 토지의 질이 한계에 다다른 곳에서는 자연의 생산성이 더 못한 토지가 새로 경작된다. 이렇게 해서 노동 절약적 개선의 일차적 효과는 노동의 힘의 증대이지만, 이차적인 효과는 경작의 확장이고 이로인해 경작의 한계가 낮아지면 지대가 상승한다.(256)

 

모든 노동 절약적 발명은 - 농기이건, 전신이건, 향상된 제련 공정이건, 완벽해지는 인쇄기이건, 재봉들이건 - 지대를 상승시키는 경향이 있다. 

 

“모든 형태의 부는 토지에 투입된 노동의 생산물이거나 토지의 생산물이다. 부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으므로 노동의 힘의 증가는 더 많은 부를 마련하는 데 활용될 것이고 그리하여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발명과 개선이 진행되면 인구가 일정하더라도 노동 능률은 계속 향상되고 생산의 한계는 더 낮은 곳으로 밀려 나가고 지대는 계속 늘어난다.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쟁기와 수확기가 등장하면서 고대 이탈리아에서 외국 전쟁을 통해 노예가 들어옴으로써 성립된 것과 같은 종류의 대토지를 현대 세계에 조성하고 있다. 마치 로마의 농민이 대도시의 빈민으로 밀려나거나 군대에 지원하여 피로써 빵을 구했던 것처럼 정든 고향에서 밀려나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노동 절약적 발명 자체를 저주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오늘날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는 것이 그 자체로 소망스러운 것처럼 말하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263) 

 

 

제 4장. 물질적 진보에 의해 생기는 기대의 효과

인구 증가는 지대를 상승시키는 경향이 있고 진보하는 사회에서 노동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모든 원인은 지대를 상승시킬 뿐 임금과 이자는 증가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 진보가 부의 분배에 미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미래의 토지 가치 상승에 대한 확실한 기대이다. 이러한 기대는 모든 진보하는 지역에서 지대가 꾸준히 상승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토지투기, 즉 정상적으로 형성될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바라면서 토지를 보유하는 행위를 야기한다.(265) 

 

성장하는 도시의 내부 유휴지가 존재하는 이유를 개발할 능력이 없거나 개발을 원하지 않는 토지소유자가 토지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에서 현재 토지를 개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대가보다 더 높은 대가를 받기 위해서 토지 개발을 보류하기 때문이다.(267-알박기)

또 도시의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토지도 앞으로 도시용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투기적 가치를 갖게 된다. 

 

진보하는 사회에서는 토지 가치가 일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는 사실로 인해 추가적인 상승이 발생한다…. 토지는 그 존재량이 고정되어 있어 인간이 늘리지도 줄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토지가치의 투기적 상승을 제한하는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269)

 

 

제 5권. 문제의 해결

제 1장. 반복적으로 발작하는 산업불황의 근본 원인

토지 가치의 투기적 상승이 경작 내지 생산의 한계를 그 정상적인 위치 밖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노동과 자본은 더 적은 대가로 만족하거나 생산을 중단-생산 중단은 그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다- 할 수 밖에 없다. 

 

투기가 불황을 초래하는 과정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번째는 투기가 과잉생산을 야기함으로써 불황이 조성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투기가 과잉소비를 야기함으로써 불황을 조성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두 이론은 일반적 진실의 한 면을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두 이론은 모두 실격이다.(276) 

 

산업 활황기마다 토지가치가 꾸준히 상승함으로써 결국 토지투기가 생기고 그로 인해 토지가치가 도약하였다. 그 후에는 예외 없이 일부 생산 중단 및 그와 관련된 유휴수요 중단 내지 거래 부진이 뒤따랐고 여기에 대체로 상업의 파탄이 동반하였다.(277)

 

노동이 이런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토지다. 노동이 부를 창조한다는 말은 비유일 뿐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 전 인류가 끝없이 노동한다고 해도 햇살 속에 떠다니는 작은 티끌 하나도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우주 속에 항해하는 이 지구를 한 푼도 더 무겁게나 가볍게 할 수 없다. 부의 생산이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노동을 통해 필요한 형태로 바꾸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를 생산하려면 반드시 이 물질, 즉 토지를 사용해야 한다. 토지는 모든 부의 원천이다. 토지는 노동이 가공할 광물을 캐내는 광산이며., 노동이 형태를 부여할 원료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필요한 물자를 얻지 못한다면 노동의 토지 사용이 거부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281)

 

토지가치 상승의 의미를 이해하고 철도 건설이 토지투기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급속한 철도 건설과 산업불황간에는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철도가 건설되거나 계획되는 곳에서는 토지가치가 투기의 영향으로 크게 튀었고 자본과 노동이 부를 생산하기 위해 토지를 사용하는 대가로서 -일시불로 또는 분납으로- 지불해야하는 명목적인 금액에 수십억 달러가 더 추가되었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생산의 제약이었으며, 생산 제약은 수요 중단으로 파급되고 그로 인해 다시 생산을 제약하게 된다.(284)

 

 

제 2장. 부의 증가 속에 영속되는 빈곤

노동에 필요한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전락하여,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면 모두 지대 -노동이 자신의 힘을 적용하는 기회의 사용 대가로 지불하는 가격- 상승으로 흡수된다. 이리하여 계속되는 진보에 의해 생기는 모든 이익이 토지소유자에게 들어가고 임금은 증가하지 않는다. 임금이 증가할 수 없는 이유는 생산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기회에 대해 지불하는 가격이 노동 생산의 증가에 동반하여 같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생산력 향상이 이루어져도 단순노동자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노동은 생산력 향상의 모든 혜택을 박탈당하고 문명 발달의 부작용에 희생된다. 노동은 문명 발달에 자연스럽게 수반하는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자유노동은 노예처럼 무기력하고 비천한 상태로 전락한다.(292)

 

오늘날의 세계를 보라. 각국은 정부, 산업, 관세, 통화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층의 고난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풍요 속에 고난과 궁핍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반드시 토지가 독점되어 있고, 토지가 전체 국민의 공동재산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취급되며, 노동이 토지를 사용할 때 고액의 사용료를 소득에서 징수당하고 있다. 세계 여러나라를 비교해 보면 임금의 고저는 자본의 양이나 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토지 독점 계층이 노동의 소득 중에서 지대로 가져가는 정도에 의해 결정됨을 알 수 있다. 부의 총량이 적고 토지가격이 싼 신생 지역은, 부유하지만 토지가 비싼 지역에 비해, 노동자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은 무식한 사람도 잘 아는 사실 아닌가? 토지가 싼 신개척지에서는 거지도 없고 생활의 불평등도 거의 없다. 토지가 비싼 대도시에서는 극단적인 빈곤과 사치가 병존한다.(297)

 

지금까지의 기나긴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진리에 도달하였다. 노동을 투입해서 부를 생산하려면 토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노동에 필요한 토지를 장악하면 노동의 열매 중에서 노도자의 생존에 소요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장악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적진 속을 행군하듯이, 걸음마다 확인하고 위치마다 경계를 강화하고 길목마다 수색하였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서 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명세계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악을 해명하기 위해 갖가지 측면을 다 검토하면서도 이 진리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또 사고의 오류와 잘못된 사고 습관 때문에, 단 한 가지, 즉 정답만을 빠뜨린다. 이와 같은 오류와 잘못된 이론의 배경에는 어떤 강력한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 힘은 정치 체제에 관계없이 모든 나라의 법을 제정하고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자 거대하고 지배적인 물직적 이해관계의 힘이다.(303)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란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인간의 토지에 대한 의존성을 없애 주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다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304)

 

 

 

제 6 권. 해결책

제 1장. 현재 옹호되는 해결책의 불충분성

 

1) 정부의 절약

사회의 총생산 중 조세로 징수하는 액수를 줄이는 것은 사회의 순생산력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구밀도의 증가나 기술의 개선처럼 노동의 생산력을 높여주는 효과를 갖는다. 어느 경우든 이익은 지대 상승을 통해 토지 소유자에게 귀속될 뿐이다. 

정부의 경비를 줄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생기는 악을 치유하거나 완화시킬 수는 없다. 

 

2) 교육의 확산 및 근면, 절약의 습관

노동자 계층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 곳에서는 반드시 인간적 품성도 향상되었고 물질적 생활이 악화된 곳에서는 반드시 인간적 품성도 타락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힘들게 벌어야 겨우 최저생활을 하는 계층의 근면, 기술, 절제, 지적 능력이 늘어났다고 해서 이들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 곳은 어디에도 없다. 

 

3) 노동자의 단결

임금률이 일부 업종에서 변할 경우에 노동에 대한 상대적 수요를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총수요를 변호하시키지는 못한다… 어느 한 나라의 모든 임금이 두 배가 되더라도 수출과 수입의 품목과 비율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교환은 절대생산비가 아니라 상대생산비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단결로 토지소유자도 불편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들이 불편할 정도이면 자본은 파괴되고 노동자는 굶주리는 정도에 이른다. 

 

4) 협동조합

협동조합이 목적하는 바는 생산, 교환 방법과 기계 개선의 효과와 같다. 즉 상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는데 드는 비용을 줄이고 노동의 능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선의 이익은 지대를 올릴 뿐이다. 

 

5) 정부의 지시와 간섭

규제와 제약이란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다른 방법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말아야할 방법이다. 

누진소득세의 경우에 세무조사권을 가진 많은 공무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조세가 효과를 낼 수록 부의 축적에 대한 유인이 작아진다.

 

6) 토지 분배의 확산

소유 면적 제한을 통해 부의 공정한 분배를 확보하려는 노력에는 분배의 총량을 감소시킨다는 단점이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토지 소유 면적을 제한하더라도 생산물의 공정한 분배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지 독점이라는 악은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토지의 균등한 분배는 불가능하고 그보다 못한 모든 수단은 치유책이 아니라 완화책이며 치유를 방해하는 완화책일 뿐이다.

 

 

제 2장. 진정한 해결책

현대 문명을 저주가호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은 토지사유제에 있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는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든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제 7권. 해결책의 정의성

 

제 1장. 토지사유제의 부정의성

토지사유제가 정의로운 것이라면 내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틀린 것이 되고, 반대로 토지사유제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나의 해결책은 옳은 것이 된다. 

 

소유에 대한 모든 정당한 권원은 모두 생산자의 권원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연권에서 도출된다. 그 밖에는 정당한 권원의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첫째 이유는 다른 정당한 권원을 도출할 수 있는 자연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만일 다른 권원이 존재한다면 두 권원이 상호 모순되어 이 근거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첫째 이유에 대해

“자연은 노력의 결과 이외에는 인간에게 어떠한 소유나 통제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이 없으면 자연의 보물을 채취할 수 없고, 자연의 힘을 다스리고 활용하고 통제할 수 없다.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자연은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지 않으며, 황과 신하를 구분하지 않으며, 성자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자격이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연은 노동의 결과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정한다. 해적의 배에도 바람은 불어주고 평화로운 상인이나 선교사의 배에도 바람은 불어준다. 왕과 백성이 같이 바다에 빠져도 헤엄을 치지 않으면 아무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놓을 수 없다. 새는 밀렵꾼의 총보다 토지소유자의 총에 먼저 맞아주지 않는다. 물고기도 주일학교에 다니는 착한 소년의 낚시나 못된 결석쟁이 소년의 낚시를 구별하지 않고 문다. 곡식도 밭을 갈고 씨를뿌려야 자란다. 광석이 광산에서 채취되는 것도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해는 골고루 비치고 비도 골고루 온다.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구너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에는 모든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향유할 권리, 노력을 자연에 투입할 권리, 자연으로부터의 대가를 수취하여 소유할 권리의 평등성이 폭넓게 그리고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주므로 노동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 배타적 보유의 유일한 권원이다. 

 

둘째 이유에 대해

노동에 근거하는 소유권은 다른 종류의 소유권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사람이 자기 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정당한 소유권을 갖는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것 또는 노동의 생산물로서 자기에게 정당하게 이전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정당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토지사유제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자연이 보장하지 않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토지는 인간이 존재하는 터전이자 환경이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는 창고이며 노동에 필수 불가결한 원료이자 힘이다.(344)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345)

 

물질적 진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이 먹여 살리지 못할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진보가 쓰디쓴 열매를 낳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의 마음으로도 승복할 수 없는 부정의한 오점을 자연법에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고도 문명 속에서 결핍으로 인해 인간이 쓰러지고 죽어가는 것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라 인간의 부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죄악과 비참, 빈곤과 궁핍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이런 결과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뒤따르는 이유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모든 인간을 위해 제공한 것을 일부 인간이 배타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최고의 정의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347) 

 

 

제 2장. 토지사유제의 궁극적 결과는 노동자의 노예화

노예사유제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토지사유제 역시 정의롭지 못하다.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해야 하는 토지의 소유는 사실상 인간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고, 일부가 토지를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면 다른 사람을 자기 사유재산으로 만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노동과 토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사용해야하는 토지를 소유하면 그 사람에 대해 절대 권력을 갖게 된다…. 토지 소유는 귀족제의 근거가 된다. 귀족 신분이 토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 귀족 신분을 만들어 준다.(356)

 

노예 해방 이후 토지 소유자들은 노동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되었다.(360) 

 

토지사유제를 인정하는 한 우리가 자랑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노예제도로 연결된다. 토지사유제가 철폐되기 전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도 노예해방법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며 노예 상태가 조성될 것이고 물질적 진보가 진행될 수록 그 정도가 반드시 심해진다.(362)

 

 

제 3장. 토지소유자의 보상 요구

토지소유자의 이익이 보존되면 일반 국민의 이익과 권리는 그만큼 무시되며 토지소유자가 특권을 잃지 않으면 일반 국민은 얻는 것이 없게 된다. 

 

지대는 과거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물에서 나온다. 지대는 지속적으로 노동에 부과되는 부담이다. 해머를 칠 때마다 곡괭이를 휘두를 때마다 직기가 움직일 때마다 증기기관이 고동칠 때마다 지대에 공물을 바친다. 지대는 깊은 지하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도, 배를 타고 세찬 파도를 무릅쓰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부과된다. 이런 절도는 자본가의 정당한 부수와 발명가의 인내 어린 노력의 열매를 가져간다. 어린이에게서 놀이와 학교를 빼앗으며 뼈가 단단해지고 근육이 튼튼해지기도 전에 어린이를 일터로 몰아낸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서 온기를, 배고픈 사람에게서 음식을, 병자에게서 약품을, 불안한 사람에게서 평온을 빼앗는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포악하게 하며 비참하게 만든다. 열 식구가 지저분한 단칸방에서 살도록 한다. 농촌의 소년 소녀들을 돼지처럼 자라게 한다. 가정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로 술집이 붐비도록 한다. 유망한 젊은이를 감옥이나 보호감호소에 갈 후보자로 만든다. 순수한 모성을 누려야할 소녀들로 매음굴을 채운다. 매서운 겨울이 이리를 마을로 내몰듯이 탐욕과 죄악을 사회에 퍼뜨린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며, 힘들고 어둡고 잔인한 운명이라는 베일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영상을 가린다. 이는 과거에 발생했던 절도일 뿐만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는 절도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린이에게서 천부적인 권리를 빼앗는 행위이다.(369)

 

 

제 4장. 토지사유제의 역사적 고찰

무제한적인 개인 소유가 자유롭게 채택된 곳은 없었음이 입증된다. 역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토지사유제는 강탈에 의해 생겼다. 토지사유제가 계약에 의해 생긴 경우는 없고 정의와 효율을 고려하여 생긴 경우도 없다. 어느 곳에서나 전쟁과 정복 또는 교활한 자들이 미신과 법률이라는 수단을 이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겼다.(375)

 

“모든 원시사회에서 토지는 부족의 공동재산이었고, 주기적으로 여러 가족 간에 배분되었으며, 누구나 자연의 혜택을 입어 노동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므로 각자 얼마나 편한 생활을 하느냐는 자신의 힘과 머리에 비례하였다. 어느 누구도 생존 수단이 박탈되지 않았고, 대를 거듭하면서 불평등이 누적되는 경우도 없었다.”(드 라블리에, 375)

 

평등한 인간적 권리가 부인되고 특권층이 생성된 원인

1) 소수 권력자 내지 군부로의 권력 집중, 전쟁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공동의 토지를 독점

2) 정복의 결과, 피정복민은 농노 상태로 전락하였고 토지는 정복자들끼리 너누어 가짐

3) 성직자 계층 및 전문 법률가 계층의 형성과 영향력, 이들은 토지에 대한 공동의 권리 대신 배타적 권리를 확립함으로써 이익을 취했다.

 

토지 제도의 변천

1) 원시 체제 : 경작지를 평등하게 분배하고, 비경작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식

2) 봉건 제도 : 봉토는 본질적으로 신탁이었고 봉토의 향유는 의무와 연계되었다. 봉건제도 하에서 군주의 토지로부터 오늘날 국민 일반이 부담하는 공공경비를 조달하였고, 교회의 토지로부터 신도의 예배와 교화에 드는 비용, 병약자를 돌보는 비용, 성직자처럼 사회적 선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계층을 지원하는 비용등을 조달하였다. 군대 토지로부터는 국방 비용을 조달하였다. 

3) 토지 사유제

 

과거에는 토지소유제도가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외관상으로도 확실히 드러났지만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그 외관이 사라지거나 다소 불분명하게 되었다. 토지 소유의 문제는 전보다 악화되었지만 잠재화됨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목하지 못하고 토지소유자는 용이하게 토지 재산권을 다른 재산권과 같이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제 5장. 미국의 토지사유제

미국의 경우 광대한 토지가 있었고 처음에는 토지를 절대 사유재산으로 하여도 별다른 해가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원하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토지가 남아 있었고 사적인 토지 소유가 계속될 경우에는 그 필연적 결과로 노예제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감지하지 못했다.(391)

간단히 말해서 미국 국민은 토지사유제의 악영향을 충분히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본질적 부정의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서부 개척 시대를 지나면서 점점 토지가 귀해지고 노동이 생산을 하는 데 불가결한 자연의 기회를 획득하는 조건이 점점 엄해졌다. 

 

 

제 8권. 해결책의 응용

 

제 1장. 토지사유제는 토지의 최선 사용에 어긋난다.

우연과 본질을 혼동하여 생긴 착각이 하나 있다. 그 착각이란 토지를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토지사유제가 필요하며 토지를 공동소유하면 문명이 파괴되고 야만상태로 회귀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돼지고기를 요리하기 위해 집을 불태울 필요가 없듯이, 토지를 개량하기 위해 토지의 절대적, 배타적 소유자가 될 필요가 없다. 돼지고기를 굽기 위해 집을 불태우는 것이 부적절하고 낭비적이며 불확실한 수단이듯이, 토지사유제는 토지개량물의 보장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부적절하고 낭비적이며 불확실한 수단이다. 

 

토지 사용에 필요한 것은 토지의 사적 소유가 아니라 개량물에 대한 보장이다. 토지의 경작과 개량을 유도하기 위해서 ‘이 땅은 당신의 것’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이땅에서 당신이 노동과 자본을 들여 생산한 것은 당신의 것’이라고 하면 족하다.(402)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하면 적절한 사용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토지를 공공재산으로 하면 필요가 있을 때 즉시 사용 내지 개량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하면 토지소유자 스스로 사용 내지 개량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경우네도 타인의 사용 내지 개량을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를 토지소유자가 갖는다.(405)

 

 

제 2장.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확립하고 보장하는 방법

도처에서 노동자 계층이 겪는 빈곤과 고통, 불황이라는 반복적인 마비 현상, 일자리 부족, 자본 불경기, 기아선상의 임금 등의 현상이 물질적 진보가 진행될수록 더 뚜렷이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우리 모두의 생존과 생활의 터전인 토지가 일부 사람의 배타적인 사유재산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지대를 모두 조세로 징수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최상의 해결책이다. 임금을 올려주고 자본 소득도 높여 준다. 빈민층을 해소하고 빈곤도 추방한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주고 인간의 힘을 자유스럽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범죄를 줄이고 도덕과 취향과 지성을 고양시키며, 정부를 깨끗하게 하고 문명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 형식상 토지소유권은 지금처럼 개인의 수중에 그대로 있다. 아무도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토지 소유량에 대한 제한도 없다. 그러나 국가가 지대를 조세로 걷기 때문에 토지 소유가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건 토지 소유량이 얼마가 되건 간에 토지는 실질적으로 공동재산이 되며, 사회이 모든 구성원이 토지 소유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 

 

토지가치 이외의 대상에 부과하는 모든 조세를 철폐하자.

(To abolish all taxation save that upon land values.)

 

 

제 3장. 조세의 원칙에 대한 검토

1) 조세가 생산에 주는 부담이 가능한 적을 것

2) 조세의 징수가 쉽고 징수 비용이 저렴하며 조세가 가능한 한 궁극적인 납세자에게 직접적으로 부과될 것

3) 조세가 확실성을 가질 것

4) 조세 부담이 공평할 것

 

1) 조세가 생산에 미치는 영향

모든 조세는 분명히 토지와 노동의 생산물에서 납부된다. 자연의 물질과 힘에 인간의 노동을 가하는 것 외에 부의 근원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보수를 줄이는 조세는 반드시 생산 의욕을 줄인다. 적절한 방식으로 부과하면 별 어려움없이 부담할 수 있는 조세도 잘못 부과하면 국민을 궁핍하게 하고 부의 생산력을 파괴할 수 있다.(414)

 

생산을 저해하지 않고 정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조세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점에 대한 조세이다.(415)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자연 독점의 성격을 가진 사업은 정부의 기능에 속하며 정부가 맡아서 운영하여야 한다. 정부가 체산사업을 하듯이 전신사업도 맡아야 하며 일반도로처럼 철도도 맡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그러나 토지 독점에 비하면 다른 독점은 아무 것도 아니다…. 토지가치에 부과되는 조세는 그 금액이 지대, 즉 연간 토지가치를 초과하지 않는 한 생산을 전혀 제약하지 않는다.(417)

 

공업에 과세하면 공업을 억제하는 효과가 생기고, 토지개량물에 과세하면 토지 개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기며, 상업에 과세하면 교환을 막는 효과가 생기고, 자본에 과세하면 자본 투입을 방해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러나 토지가치는 전액을 징수할 수 있으며, 그 효과는 산업을 진흥하고 자본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며 부의 생산을 중대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2) 징세의 용이성과 저렴성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 이외의 모든 다른 조세를 없앤다면 다른 조세를 징수하던 비용은 모두 절약할 수 있다.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물가를 올리지 않으며 부과되는 사람이 직접 조세를 부담한다…. 조세는 생산비를 올리고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가격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토지는 인간의 생산 대상이 아니며 지대에 매기는 조세는 토지 공급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조세로 인해 토지소유자의 세액이 늘어나더라도 토지소유자가 토지 사용대가를 올릴 힘이 없다.

 

3) 조세의 확실성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재량의 여지가 가장 적고, 최상의 확실성을 갖는 조세이다. 토지는 이동시킬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만큼 토지에 대한 조세의 평가와 징수도 확정적이다. 

토지개량물을 제외한 순수토지의 가치에만 조세를 부과한다면 조세체계가 단순하고 명확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 조세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므로 당국의 과세액 평가도 일반 부동산 중개인이 거래가격을 매기는 것과 같은 정도의 확실성을 갖게 될 것이다.

 

4) 조세의 공평성

자연은 노동에게 베풀며 그리고 노동에게만 베푼다. 에덴동산에서도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굶는 수밖에 없다. 동일한 소득을 가진 두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의 소득은 노동소득이고 다른 사람의 소득은 지대소득이라고 하자. 이 두사람이 국가의 경비를 똑같이 부담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소득은 그 스스로 창출한 부이자 사회적 부의 총량을 증가시킨 부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소득은 단지 이미 생산된 물자 중에서 취하는 것일뿐이며, 그 대가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소득을 향유하는 권리는 노동의 대가로 부를 준다고 하는 자연의 보장에 근거를 둔 권리이다. 그러나 지대소득자가 소득을 향유하는 권리는 허구적인 권리이고 인간의 제도가 만든 권리일 뿐이며 자연은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지대가 과세되어 사회의 필요경비에 충당되면, 자연이 예정하는 평등이 성취된다. 각 국민은 개인적인 근면, 기술, 지적 능력에 의한 이익 이외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이익을 받는 일이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번 것을 갖게 된다. 그 때가 되면,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노동은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자본은 자연적인 대가를 받는다. 

 

 

제 4장. 여러가지 지지와 반대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가 정부 수입의 수단으로 그토록 장점이 많다고 하면, 어째서 모든 정부가 수많은 다른 조세를 부과하는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비중있는 조세 중에서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유일한 조세이기 때문이다.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토지소유자에게 귀착되며 이 부담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킬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토지소유자라고 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계층은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를 낮게 유지하면서 다른 조세를 수입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토지가치에 과세하는 것을 반대하는 쪽에는 확실하고 강력한 이익집단이 존재하지만 현대 정부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다른 조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반대세력이 없다. 머리 좋은 정치인들은 교묘한 조세제도를 고안하여 흡혈박쥐가 살아있는 생명체의 피를 빨아먹듯이 노동 임금과 자본 이자를 뽑아내었다. 

 

 

제 9권. 해결책의 효과

 

제 1장. 부의 생산이 미치는 효과

현재 산업을 압박하고 교환을 저해하는 모든 부담을 제거하면 부의 생산이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하는 속도로 증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지가치도 상승할 것이다. 

현재 부과되는 조세는 인간의 노력, 근면, 기술,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자연의 기회가 노동에 개방되고, 자본과 토지개량물에 대한 조세가 면제되고, 교환이 제약을 벗음으로써, 일하려 하는데도 자신의 노동으로 필요한 물자를 구하지 못하는 비참한 광경은 볼 수 없게 된다. 산업을 마비시키는 주기적 공황이 사라진다. 모든 부문의 생산이 활기를 띤다. 수요는 공급과 보조를 맞추고 공급은 수요와 보조를 맞춘다. 모든 방향에서 거래가 증가하며 모든 사람의 부가 늘어난다. 

 

 

제 2장. 분배에 미치는 효과 및 이를 통해 생산에 미치는 효과

물질적 진보가 지대를 상승시키는 만큼 사회가 지대를 취하여 공동의 목적을 위해 쓰인다면, 현재 물질적 진보에 따라 불평등을 야기하는 그 동일한 원인이 이제는 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새로운 균형이 형성되면 생산력이 더 향상되고 이러한 방향의 변화가 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지대는 계속 상승하지만 임금과 이자의 희생 위에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 증가에 의해 상승한다. 사회가 지대를 징수하여 공공의 용도로 사용하면 지대 상승분은 모든 구성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446) 

 

 

제 3장. 개인과 계층에 미치는 효과

생산력이 대폭 증가함에 따라 노동과 자본은 토지사유제에서 입을 손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고, 이러한 이익 외에도 사회가 건강해짐으로써 생기는 더 큰 이익을 토지소유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회가 같이 누리게 된다. 

 

자신이 소득이 자본 소득에서부터 나오는 사람과 토지 이외의 대상에 대한 투자에서 나오는 사람의 소득도 증가할 것이 명백하다.(452)

 

스스로 일하는 농민은 노동자이자 자본가인 동시에 토지소유자이며, 노동과 자본에 의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농민의 손실은 명목적일 뿐이며 이익은 실질적이고 크다.(455)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부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각자의 힘과 욕구가 서로 다른 경우에 평등한 분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가 각자 근면, 기술, 지식, 절제를 통해 공동의 부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된다는 뜻이다. 생산하는 사람에게서 생산하지 않는 소수의 수중으로 부를 집중시키는 큰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토지 독점이 사라지면 엄청난 부자가 생길 염려도 없다. 부자의 재산은 문자 그대로 노동 생산물인 부로 구성될 것이고 부는 계속해서 소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제 4장. 사회조직과 사회생활에 나타날 변화

정부가 대폭 간소화된다. 사법부의 업무도 한결 줄어든다. 정부의 입법, 사법, 행정 기능도 대폭 간소화 된다. 

 

물질적 진보가 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지대가 꾸준히 상승할 것이므로 토지세 수입은 점점 많아진다. 공동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은 스파르타에서처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다. 공공의 식당을 운영할 필요는 없겠지만 공공의 화장실, 박물관, 도서관, 정원, 강연회장, 음악무용회관, 극장, 대학교, 기술학교, 실내사격장, 운동장, 체육관 등은 설립할 수 있다. 난방, 전기, 동력 등도 공공의 비용으로 도로를 따라 공급할 수 있다. 도로에는 과일나무를 가로수로 심을 수 있다. 발명과 발견에 보상을 하고 과학적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 공공이익을 위한 노력을 장려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공공수입을 사용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의 이상은 이렇게 달성할 수 있을뿐 정부의 압제를 통해서는 달성할 수 없다. 정부의 성격도 변화하여 사회라는 거대한 협동조합의 관리를 맡는 기관이 된다. 정부는 단지 공동의 재산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리하는 주체가 된다.(460)

 

노동에게 자유로운 일터와 완전한 대가를 주고,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생긴 기금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징수하면 여러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생산이라는 용추철은 자유롭게 튀어오르고 부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최하층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숨 쉴 공기에 대해 염려하지 않듯이 일자리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게 된다. 들에 핀 백합처럼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과학이 발전하고 발명이 계속되고 지식이 보급되어 모든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되면 부에 대한 동경도 수그러들고, 부의 획득과 과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타인의 존경과 인정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적인 문제의 처리나 공적인 자금의 관리에 있어서도 사익을 추구할 때처럼 신경을 써서 기술을 발휘하고 정성을 들이게 된다.(465)

 

사람이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경우는 음식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아서 모두에게 충분한 양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때이다. 그러나 공정한 분배와 충분한 음식이 보장되면 아무도 음식에 욕심을 내지 않게 된다. 현재의 사회에서는 분배 상태가 매우 불공정해서 각자에게 충분한 부가 돌아가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궁핍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에 욕심을 부린다…. 그러나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면 모든 사람이 궁핍에 대한 두려움에서 풀려나므로, 품위 있는 상류사회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처럼 부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468)

 

인간은 건설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건설하고, 개량하고, 발명하고, 조립하며, 무엇인가를 이룰 때마다 더 큰 것을 성취하려고 한다. 인간은 동물 이상의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이다.(470)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것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대가가 생기지 않는 노동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을 혐오할 뿐이다. 매일 매일 힘들여 일해서 겨우 연명한다면 이는 정말로 고된 노동이다. 이것은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펌프질을 계속하거나,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바퀴를 계속 밟는 지옥 같은 형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한 일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더 열심히, 더 훌륭히 일하게 되며, 그럴 때 자신을 위해서 또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일다운 일을 하게 된다…. 인류의 생활을 개선하는 일, 예를 들면 지식을 확대하고 힘을 증가시키고 문예를 풍부하게 하고 사상을 고양시키는 일은 생계를 위해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채찍질이나 동물적 욕구에 의해 강제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뿐,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입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궁핍이 사라지면 이러한 종류의 일이 대폭 증가할 것이다.(471)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모든 계층에게 여가, 편안함, 독립, 점잖고 세련된 생활, 정신적-도덕적 발전의 기회를 주면 사막에 물을 대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불모의 황무지에 신록이 덮이고, 생명이 없는 몹쓸 땅에 오래지 않아 수목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새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이다. 지금은 감추어진 자질, 있을 것 같지 않은 능력이 나타나서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고 충실하고 행복하고 고상하게 해 줄 것이다. 세모는 자리에 밀려들어가는 둥근 사람이나 둥근 자리에 쑤셔 넣어진 세모난 사람, 부자가 되려는 경쟁에 힘을  낭비하는 사람, 공장에서 기계와 다름없이 일하면서 연명하기 위해 일에 묶인 사람, 악하고 무지한 빈민가에서 자라는 어린이 등, 그 누구에게나 높은 수준의 힘과 빛나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과 재능은 기회만 주어지면 발휘될 수 있다…. 도덕이 향상되고 지적활동이 활발해지고, 사회 생활이 개선될 것이다. 모든 사회의 주민은 상호 긴밀한 연결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474)

 

 

제 10권. 인간 진보의 법칙

 

제 1장. 인간 진보에 관한 현재의 이론-그 불충분성

“인간 진보의 법칙은 무엇인가?

 

비버는 댐을 만들고, 새는 둥지를 틀고, 벌도 집을 짓지만 동물의 집은 언제나 같은 방법,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인간의 집은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지은 집에서부터 현대적 시설을 갖춘 대저택으로까지 변화되어 왔다. 개는 사물의 인과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몇 가지 재주도 읽힐 수 있지만 개선할 줄 아는 인간과 더불어 생활해오면서도 이런 능력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또 문명인과 가이 사는 개라고 해서 떠돌이 미개인과 같이 사는 개보다 더 수준이 높거나 지식이 더 많지도 않다. 동물 중에는 옷을 입거나 요리를 하거나 도구와 무기를 만들거나 다른 짐승을 사육해서 잡아먹거나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우속 속이 아니고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에다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보태는 임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자질이 없다면 태평양의 일부 작은 섬을 제외하고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481)

인간은 다른 인간과 같이 삶으로써만 원시적인 단계를 넘어 개선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인간의 문명화는 곧 사회 속에서 협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개선이 이루어진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인간은 새로운 노력과 발명을 하게 된다. 이러한 개선 및 개선능력은 유전에 의해 결정되며, 또 가장 잘 적응했거나 가장 많이 개량된 사람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는 경향과, 가장 잘 적응했거나 가장 많이 개량된 부족, 민족, 인종이 사회집단 간 투쟁에서 살아남는 경향에 의해 확대된다” - 저자는 이 진보에 대한 통속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문명을 자연의 선택이라는 원리가 작용하여 인간의 힘을 개선하고 고양한 결과로 보는 진화론적 견해는 세계사에 나타나는 이런 사실을 도저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문명이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속도로 발달했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견해와 배치되지 않는다. 추진력과 제어력의 배합이 동일하지 않으면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하던 모든 문명이 지속되지 않고 반드시 정체 내지 퇴보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견해와 완전히 배치된다. 진보가 있으면 인간의 본성이 개선되고 개선된 본성은 다시 진보를 초래한다는 진화론적 견해가 맞다면, 부분적인 예외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원칙으로는 진보는 계속되며 발전은 또 다른 발전을 낳아 문명이 계속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 현상이 일반원칙 정도가 아니라 보편원칙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는 죽은 자의 무덤이자 멸망한 제국의 무덤이다. 진보가 인간을 개조하여 더 큰 진보를 낳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현재의 서구문명처럼 활기차고 번성했던 모든 문명이 저절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499)

 

사회의 진보를 중단시키는 장애는 진보의 과정속에서 생기며,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도 문명의 성장 그 자체에 의해 조성되었다.(492)

 

 

제 2장. 문명의 차이와 그 원인

인간 진보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한 첫 단계로, 문명 간의 차이가 있다고 할 때 그 차이의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전 세계에 걸쳐 동일하다.”

 

유태인의 독특함을 보존해 온 것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태교의 가르침, 즉 어울림에 의해 전주된 종교의 가르침 때문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유리 눈이나 의족을 물려받지 않듯이 아버지의 지식도 물려받지 않는다. 지극히 무식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도 과학의 기수가 되거나 사상의 선도자가 될 수 있다. 시간과 장소가 다른 여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차이, 즉 문명의 차이는 개인에 내재하는 차이가 아니라 사회에 내재하는 차이이다. 

크고 작은 여러 사회는 각기 지식, 신념, 관습, 언어, 취향, 제도, 법률 등으로 하나의 그물을 짠다.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짠 그물에 출생 때부터 편입되어 죽을 때까지 머문다. 이 그물은 인간의 정신이 싹트고 발전하는 바탕이 된다. 관습, 종교, 편견, 취향, 언어 등이 이 그물에서 자라고 지속된다. 또 그물을 통해 기술이 전해지고 지식이 축적되며, 한 세대의 발견이 다음 세대의 공동 자산이자 디딤돌이 된다. 이 그물은 때에 따라서는 진보에 대한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 그물이 있기 때문에 진보가 가능해지기도 한다. 이 그물은 종족 전체에 대해 개인의 기억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 시대의 기술, 과학, 발명이 굉장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그물을 통해서 가능하다. 

 

제 3장. 인간 진보의 법칙

인간 진보의 법칙-문명의 전진을 지배하는 법칙은 무엇인가? 

정신은 인간이 전진하는 수단이다. 모든 전진은 정신을 통해 이룩되고, 또 새로운 전진을 위한 유리한 기초가 된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 체구를 키울 수는 없지만 생각윽 통해 우주에 대한 지식과 힘을 무한정 확대할 수 있다. 정신력은 진보의 동력이며, 인간은 진보에 투입하는 정신력에 비례하여 전진한다. 정신력의 양은 일정하다. 즉 사람의 신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듯이, 정신이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진보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력은 진보와 무관한 목적에 소비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정신력이다. 정신력을 소비하지만 진보와는 무관한 목적은 유지와 갈등의 두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유지에는 생존의 확보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속 및 기존 발전 성과의 보존도 포함된다. 갈등에는 전쟁과 전쟁 준비외에도 타인을 희생시켜 만족을 얻거나 이를 막는 데 드는 모든 정신력 소모가 포함된다. (509)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모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association)은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주오디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in equity)이 진보의 법칙이다.(510) 

 

어울림에 대한 최초의 장애는 자연조건에서 나온다.

전쟁은 어울림에 대한 부정이다.

종교가 취하는 형태 또는 종교가 야기하는 증오로 인해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전쟁을 하기도 하지만 종교가 어울림을 촉진하는 수단이 된 경우도 많다.

 

인구가 희소한 곳의 토지는 가치가 없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토지가치가 생기고 상승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생기는 가치와는 확실히 다르다. 이 가치는 어울림에 의해 생기며 어울림이 커지면 상승하고 어울림 깨지면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부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 이외의 형태를 가진 힘도 역시 이와 같다. 

 

불평등을 유발하는 커다란 원인은 토지의 사유라는 자연독점에 있다. 처음에는 토지가 공동재산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매년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공동으로 경작하는 등 소박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저수준의 발전 단계에나 맞는 방식이다. 인간이 사기의 생산물에 관해 자연스럽게 가지는 사유 관념이 토지에도 쉽사리 확대되는데, 토지사유제는 인구가 희소한 시기에는 토지의 개량자 내지 사용자에게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줄 수 있지만, 인구가 조밀해지고 지대가 상승하면 결국에는 생산자에게서 임금을 박탈하는 제도로 변모하다. 뿐만 아니라 지대를 징수하여 공공목적에 사용하는 방법도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일부 계층의 손에 들어감에 따라 이 계층이 토지 소유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은 소작인이 되는 제도로 바뀌고 만다. 전쟁과 정복은 정치 권력의 집중과 노예제도를 낳고, 사회가 성장하여 토지에 가치가 생기는 지역에서는 자연히 토지 독점을 야기한다. 지배계층은 권력을 수중에 집중시키고 머지 않아 토지도 집중 소유하게 된다. 정복한 토지의 대부분이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피정복민은 소작인이 되거나 농노가 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자연적 사회 성장과정에서 오랫동안 공공토지 내지 공동토지가 존재하면서 원시적 공동체 문화에서 목초지 등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이 땅마저 사유화되고 만다. 이러한 사례는 근대에 흔히 발견된다. 불평등이 일단 야기되면 발전이 진행되면서 토지 소유는 더욱 집중한다.(519) 

 

현대문명의 우월성은 어울림의 신장과 더불어 평등이 신장했다는 데 기인한다. 여기에는 집중되었던 권력이 유럽 북방 민족이 이동해 들어옴으로써 수많은 소규모 중심으로 분산되었다는 점과 기독교의 영향이 작용하였다.(523)

 

유럽 문명의 발생과 성장의 이유 : 문명은 협동이다. 문명의 핵심 요소는 화합과 자유이다. 도시의 인구규모나 밀도가 커지는 가운데 어울림이 확대되었고, 또 상업의 성장과 교역의 다양화로 멀리 떨어진 도시가 긴밀히 연결됨으로써 어울림이 확대되었다. 요약하자면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더 많이 존중되었다는 것이다. 서구문명이 과거의 어느 문명보다 더 위대하고 우수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변화에 있다. 또 사람의 어울림의 확대는 정신력에 자유를 주어 무지의 베일을 걷어 올림으로써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정의를 촉진하고, 권리의 평등성을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에 의해서만 제약되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문명을 발전시킨다. 사회제도가 이렇지 못하면 문명의 발전은 중단되고 퇴보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이 가난한 어부와 유태 농민에게 가르쳤던 단순한 진리 이상의 교훈을 정치경제학과 사회과학기 가르칠 수 없다.(527)

 

 

제 4장. 현대문명의 쇠퇴

토지를 공동재산으로 하면 문명에 엄청난 자극이 되는 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하고 만다. 우리 문명과 같은 유형의 문명은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한다. 정지란 있을 수 없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사회 진보의 조건은 어울림과 평등이다. 현대의 발전은 정치적, 법적 평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예를 들면 노예제도의 철폐, 신분의 폐지, 세습적 특권의 일소, 자의적 정부를 대신하는 의회제도의 도입, 종교 문제에 있어서 개인적 선택권 보장, 지위의 고하와 힘의 강약을 막론한 신체와 재산의 평등한 보장, 거주 이전, 직업 선택, 언론출판의 자유 확대 등이다. 

 

권력이 세습되지도 않고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국민에 의한 정부가 최악, 최저질의 전체정부로 변화하는 현상은 부의 불평등 분배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도둑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되는 경향을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더 강하고 뚜렷하게 나타난다.(537) 

 

부패가 만성화되고, 공공심이 소멸되고, 명예와 선행과 애국심의 전통이 약해지고, 법이 무시되고, 개혁의 가망이 사라지면, 고통받는 대중 속에서 화산과 같은 힘이 생겨 어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계기로 사회를 산산조각 내고 만다. 이런 와중에서 강력하고 분별없는 자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대중의 맹목적 요구 또는 대중의 광포한 열기를 이용하여, 이미 활력을 상실한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제쳐놓게 된다. 이렇게 되면 칼은 펜보다 강해지고 야만족인 힘과 거친 광기가 교차하면서 문명은 혼미 상태에 빠져 쇠퇴하고 만다.(538)

 

토지가 독점된 사회에서 물질적 진보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고, 이러한 경향이 계속 진행되면 문명은 하강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도처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생존 투쟁의 강도가 높아지고, 부를 위한 경쟁에서 남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온 신경을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사회를 개선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든다. 모든 문명국에서 신경을 혹사하고, 영양이 부족하고, 거처가 불결하고, 작업이 불건전하고 단조로우며, 어린이가 이른 나이에 노동을 하고, 부녀자들이 험한 일과 범죄에 물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 늘어가고 있다. 

 

 

제 5장. 중심적인 진리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서 악이 발생하는 현상은 현대 문명이 진행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이것은 진보의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현대 문명을 필연적으로 멈추게 할 하나의 경향이다. 

풍요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고 짐승처럼 만드는 빈곤과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가지 악들은 정의를 부정하는데서 발생한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베풀어준 기회를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는 근본적인 정의의법칙을 무시하였다. 우리가 아는 한, 큰 안목으로 볼 때 정의는 우주의 최고법칙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서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왔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떠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ㅏ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 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 덕목을 중시화지 않는 자가, 심지어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 있다.(546) 

 

자유와 미덕은 빛과 색채의 관계와 같다. 자유와 부는 햇빛과 곡식의 관계와 같다. 자유와 지식은 눈과 보이는 대상의 관계와 같다. 자유는 발명의 천재이고, 국력의 근육이며, 국가 독립의 정신이다. 자유가 신장되면 미덕이 자라고, 부가 증가하고, 지식이 늘어나고, 발명이 인간의 힘을 배가하며, 자유를 누리를 국가는 힘과 정신에서 다른 국가를 능가하게 된다. 반면에 자유가 위축되면 미덕은 사라지고, 부는 감소하고, 지식은 잊혀지고, 발명은 중지되며, 한때 무력이나 기술에서 융성했던 강대국이 자유로운 미개인에게 힘없이 멸망당한다. 자유라는 태양이 아직도 충분히 빛나지 못했지만, 모든 진보는 자유가 이룩한 결과이다.(547) 

 

 

결론

개인의 삶의 문제

저자가 제기한 내용은 쉽사리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벌써 수용되었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은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는 되풀이해서 세워져왔다. 그러나 진리와 정의는 되풀이해서 무너지고 말았으며 유혈사태가 발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위와같은 학설들을 검토한 결과 이들이 오류임을 알게 되었다.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많이 증가하는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맬서스의 인구론) 인간의 힘이 낭비되고 인간이 커다란 고통을 겪는 원인은 자연법칙에 있지 않고 인간이 무지하고 이기적이어서 자연법칙에 순응하지 않는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진보는 인간 본성의 개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일반적으로 불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현대 세계에서 미래의 삶에 대한 믿음을 추방하고 있는 악몽은 격파되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육신과 감정으로 싸여있는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며, 희미한 꿈과 같은 철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관념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육체로부터 자유로줘져서 보이지도 바라볼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순수한 곳에 이르면, 하나님이 영혼의 지도자이자 왕이 된다. 그곳에서 영혼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인간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끝없이 바라보면서 지극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저자는 물질적인 진보가 가속화되는 사회속에서 빈곤의 문제가 있는 것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이론(임금이론, 인구론, 진화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진보로 인해 생기는 부가 임금이나 이자로 노동자나 자본가에게 돌아가지 않고 토지소유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결과적으로 빈곤과 불황, 나아가 문명의 멸망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최근 LH공사의 직원들이 내부자 정보를 통해서 토지를 구입하고, 시의원이나 구의원들이 개발정보를 가지고 토지를 매입하여 토지의 용질을 변경하여 막대한 시세차액을 챙기는 것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극단적으로 토지를 공동소유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능하기에 지대조세제, 토지로부터 생긴 가치를 지대로 모두 환수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부동산의 불로소득은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공동체 전체의 노력, 예를 들어 SOC투자로 도로가 생기고, 전철역이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시세차익을 토지소유자가 모두 챙겨가는데 이를 적절하게 환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저항이 상당하다. 새로운 법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명확하다.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는 사회, 어울림과 평등을 통한 진보의 열매를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회를 꿈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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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비난 본능(The Blame Instinct)

 

할머니를 패자고?

노바르티스(제약회사) : 사장 - 이사들 - 주주들(은퇴 기금) - 할머니

 

비난 본능 

비난 본능은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이다.(호텔에서의 화상, 배관공-호텔지배인-옆방 투숙객)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긍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비행기 기장의 졸음 운항)

 

비난 게임 

우리에겐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해줄 나쁜 사람을 찾는 경향이 있다. 

1) 경영인 : 작은 기업이 지닌 혁신의 힘에 대한 무지(유니세프에 낮은 가격으로 입찰한 중소기업에 대한 조사)

2) 언론인 :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언론인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자도 사실은 세계를 오해하고 있다. 모든 보도가 그 자체로는 전적으로 진실이라도 기자가 세상에 알리기로 선택한 진실 이야기를 여럿 모으면 오해할 만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언론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일 수도 없으며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 

3) 난민 : 2015년 지중해에서 익사한 난민들, 밀입국 알선자들, 배를 통한 밀입국을 선택한 이유는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서나 공항까지 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유럽연합국들이 불법이민에 대처하는 규정때문이다. 무비자로 비행기를 탈 수 없고 유럽연합에 도착하는 난민의 배는 압수하게 되어 있기에 안전한 선박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4) 외국인 : 오늘날 대기에 축적된 이산화탄소의 대부분은 현재 4단계 삶을 사는 나라들이 지난 50년간 배출한 것이다. 4단계에 사는 이들은 1-2단계의 사람들이 자신들 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장하는 것이다.(매독의 다른 이름…)

 

비난과 칭찬

영향력 있는 지도자? :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마오쩌둥이나 교황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더 유력한 용의자

1) 사회 기반 : 우리의 사회 기반을 구성하는, 그물처럼 얽힌 서비스를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 인내심을 갖고 사회를 움직이는 용감한 사람들. 

2) 기술 : 세탁기와 화학 세제(이제 도서관에 가도 돼), 전기 사용, 기후변화의 심각한 위험에서 지구를 구하려면 비난할 사람을 찾아 책임을 지우기보다 현실적 계획이 필요하다.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삶을 앞으로 110억의 인구가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다 함께 힘을 쏟아야 한다.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사실충실성

지금 희생양이 이용되고 있다는것을 알아보라. 

-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 영웅을 찾지 말고 시스템을 찾아라. 

 

 

10장. 다급함 본능(The Urgency Instinct)

 

도로 차단막과 정신 차단막

알수 없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 이를 막기 위해서 도로 차단막을 설치, 버스가 다니지 않자 배를 타고 시장에 가던중에 전복 사고로 사람들이 사망함, 결국 카사바를 제대로 가공하지 않아서 먹음으로 인해 생긴 독성물질 때문인 것을 밝혀냄, 

이후 에볼라가 발생-도로 차단막 설치-카사바의 독성 물질에 마비됨

이후 다시 에볼라가 발생,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인내하며 침착하게 감염경로를 추적

- 빨리 결정하고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다급함에 쫓기다보면 분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다급함 본능

영업사원이나 활동가들은 ‘지금 하라.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다급함 본능에 자극한다. 이렇게 재촉하면 비판적 사고를 하기보다 빨리 결정하고 당장 행동하게 된다. 경고가 상시적이 되면 진짜 다급한 일에 무감각해지게 마련이다. 활동가가 행동을 이끌어내려고 문제를 실제보다 다급한 것처럼 말하면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만다. 

 

다급함 본능을 억제하는 법을 배우세요. 오늘 하루 특가!

편리한 다급함 : 두려움에 다급함이 더해지면 어리석고 극적인 결정을 내려,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긴다. 미래는 항상 어느정도 불확실하다. 가장 극적 추정치를 골라 최악의 시나리오를 확실하다는 듯 제시해서는 안된다. 

 

데이터를 고집하라 : 두려움과 다급함이 아닌, 데이터와 냉철한 분석에서 나온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말하는 데 쏟는 힘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쏟아야 한다. 행동에 나서야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행위는 데이터를 개선하는 것일 수 있다.

 

편리한 두려움 : 기후 난민이라는 용어를 쓰며 이를 강조하는 이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확신한다. 

기후 변화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다음 두가지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후 변화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둘 것, 그리고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경고성 메시지를 만들어 거기에 자신이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이를 위해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살피되, 그 데이터의 불확실성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에볼라 : 2014년 서아프리카의 에볼라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혈액 샘플의 결과를 통합하지 못한 상태로 의료진들은 모두 에볼라 자체에만 집중했고 의심 증상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에볼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다른 의료 서비스가 부실해짐으로 사망자가 늘었는데 이 숫자도 의심 사례에 포함된 것이다. 문제가 다급해 보일 때 맨 처음 할 일은 늑대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정리하는 것이다.(코로나 19상황) 데이터의 신뢰성과 그 데이터 생산자의 신뢰성을 보호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정은경 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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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함은 세계관을 왜곡하는 최악의 주범 중 하나이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세계적 위험 다섯 가지

1) 세계적 유행병(스페인 독감)

2) 금융 위기 :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3) 제3차 세계 대전

4) 기후 변화

5) 극도의 빈곤 : 가난이 내전을 불러오고 내전은 다시 가난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세계적 위험에 대해서 냉철한 머리와 확실하고 객관적 데이터로 접근해야 하며 국제적 협력과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 극적 조치가 아니라 아기 걸음마 같은 조치와 꾸준한 평가로 접근해야 한다. 

 

사실충실성

다급함 본능을 억제하려면 하나씩 차근차근 행동해야 한다. 

- 심호흡을 하라 : 일단 시간을 가지고 정보를 더 찾아보라. 

- 데이터를 고집하라 : 관련이 있고 정확한 데이터만 쓸모가 있다.

- 점쟁이를 조심하라 

- 극적 조치를 경계하라.

 

 

11장. 사실충실성 실천하기(Factfulness in Practice)

사실충실성이 어떻게 내 목숨을 구했나?

- 콘조라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피를 뽑아야 했다. 용감한 여성의 설득. 성난 군중이 극적 본능에 사로잡혔다. 여인은 이성적 논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 날카로운 주삿바늘, 피, 질병이 공포본능을 촉발했다. 일반화 본능은 나를 약탈자 유럽인이라는 상자에 집어 넣었다. 비난 본능은 마을 사람들을 피를 훔치러 온 사악한 의사에 맞서게했고, 다급함 본능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런 압력 속에서도 이 여성은 분연히 일어나 외쳤다. 통계를 배우거나 세계와 관련된 사실을 외운 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가 있었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극도로 긴장된 순간에 날카로운 논리와 완벽한 웅변술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사실충실성이 내 목숨을 살렸다. 

 

사실충실성 실천하기

1) 교육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실에 근거한 사고의 기본 틀(네 단계)을 가르치고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법을 훈련시켜야 한다. 겸손과 호기심을 가르쳐야 한다. 겸손이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아울러 내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실을 끌어안고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2) 업계

이력서에 오자 하나만 있어도 취업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1억 인구를 엉뚱한 대륙에 갖다놓아도 취업도 하고 승진도 한다. 뿌리깊은 낡고 왜곡된 세계관을 바꿔야 한한다. 

 

3) 언론인, 활동가, 정치인

이들도 정기적으로 세계관을 점검하고 업데이트해야 하며, 사실에 근거해 생각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세계의 여러 사건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지만(언론인) 여러 뉴스들을 보면서 사실에 근거해 이를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다.(소비자)

 

4) 내가 속한 조직

인구 구조의 변화, 대학의 구조 변화,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

 

마지막 당부

누구나 하루아침에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까? 큰 변화는 어렵지만 변화는 가능하다. 첫째 정확한 GPS가 길 찾기에 더욱 유용하듯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은 삶을 항해하는데 더욱 유용하다. 둘째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볼 때 마음이 더 편안하다. 대단히 부정적이고 사람을 겁주는 극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면 스트레스와 절망감이 적다.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계는 생각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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