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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왜 사과하지 않을까(윤서람, 봄에)
-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최소한의 방법
"왜 그 사람은 나에게만 화를 낼까?"
"뻔한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보기에 인간의 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심리 문제는 바로 여러 가지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이다.’(스캇 펙) 
 
나르시시스트 : 이들은 연인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늘 서열을 정하려 들고, 관계에서 자신이 강자가 되어 지배력과 결정권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서 ‘러브 바밍(love bombing)’을 시도한다. 이는 마치 폭탄을 추하하듯이 강렬하게 그리고 과도하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이다. 
러브바밍 시기가 지나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기(devalue)를 시도한다. 이어서 상대를 무시하고 버려두기(discard)를 시작한다. 
 
에코이스트(echoest) : 나르시시스트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으로 이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거짓말을 싫어하며 특별 대우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로 보통 사람들보다 매우 신중하고 생각이 깊다.(41)
 
우리 주변에 다양한 관계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절대 사과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거나 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거짓말도 너무나 뻔뻔하게 한다. 한 두번 그런 상황에서 분쟁이나 마찰이 불편해서 넘어가다보면 결국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된다. 그 사람이 나의 부모일수도 있고, 배우자나 직장 상사, 연인이나 친구일 수도 있다. 나르시시스트들에게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끊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을때는 참고 먼저 사과하기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모라면 물리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해야하고 연인이나 친구라면 분명하게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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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트렌드 2024(목회데이터연구소, 규장)

 

 

 

 

1. 교회 리빌딩(Rebuilding Church)

한국 교회는 코로나19(covid-19)를 겪으며 대격변기를 맞았다. 먼저는 교인 수가 급감했다. 이미 교단마다 교인수가 줄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교인 수 감소는 교회의 존립위기를 낳는다. 교인 감소 폭은 인구감소 현상과 맞물리면서 앞으로 더 가팔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심각한 교세 감소 속에서 한국 교회 는 어렵사리 버티고 있지만, 곧 임계점에 다다르면 한국 교회의 민낯이 드러날것으로 보인다. 
교인들도 변했다. 코로나 기간 새로운 유형의 교인들이 나타났다. 2022년에 출간한 《한국 교회 트렌드 2023>(규장)에서는 코로나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유형의 크리스천 현상으로 '플로팅 크리스천'과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을 제시한 바 있다. 이 현상은 엔데믹 시대에서도 여전하다. 
교회 공동체성도 예전 같지 않다. 코로나로 교회와의 연결 고리가 약해지면서 신앙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된 교인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 신앙을 만들어 갔다. 거기에는 유튜브 같은 온라인 콘텐츠가 큰 역할을 했다. 교회는 이와 같은 격변의 시대에 대응하기위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이전 같은 구조와 형태로는 유지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교회 리빌딩은 자의든 타의든 이루어 질 것이다. 지속 가능한 목회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교회 리빌딩을 당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가 주도적으로 리빌딩을 할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방향이 바뀌지는 않고 속도만 달라졌다. 언택트가 미래에 나타날 현상이라고 여겼는데 코로나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어쩌면 몇년이 걸렸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언택트로 바뀌었다.'(28)
 
코로나 19 이후 한국 교회 변화
  1. 개인주의화된 성도들
  2. 슬기로운 성도
  • 신앙 공급이 끊어지자 성도들은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3. 플로팅 크리스천의 정착

4.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현상의 지속

5. 무너진 소형 교회, 무너지는 중형 교회

 

트렌드 전망 시사점

1. 전 교인이 바라볼 북극성이 있는가

2. 성도들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

- 합리적 선택이론 : 인간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근원적인 종교적 욕구가 있는데 욕구를 특정 종교에서 충족받지 못할 사람들을 종교를 벗어난다.

3. 평신도 역할의 확대

4. 개인 맞춤형 신앙 콘텐츠 지원

 

- 언제나 이런 위기 상황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종교적이지 않은 하지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제시할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 

 

 

2. 외로운 크리스천(Loneliness in Church)

외로움이 사무친 시대다. 주위에 외롭고 고립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공허하고 힘들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언택트의 뉴노멀화를 뿌리내렸고, 거리두기라는 단절 속에서 인간관계는 얕아졌다. 게다가 세계적 경제 불황과 불평등의 심화, 각자도생의 위기 속에 '혼밥'은 일상어가 됐고 '먹방'은 이 시대 한국을 상징하는 세계적 아이콘이 되었다. 증가하는 1인 가구 속에서 사람들은 혼밥을 기꺼이 즐기며 유튜브 먹방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ᅠ찾는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나 만족은 찰나적이다. 자유와 고독을 즐긴다고 하지만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현실 속에 우울감은 증가한다. 
경제적 빈곤은 사람들이 살아가려는 욕망을 파괴한다. 빈곤은 먹고 마시며 여행하는 여유와 재미를 앗아간 채 생계라는 돌을 어깨에 받치고 끝없는 노동을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살게 한다. 경제적 심리적 고립의 비극적 결말에는 고독사라는 어두운 그림자마저 도사리고 있다. 사회 경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고립되어서 느끼는 외로움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니다. 이런 상태가 길어지면 심리적 우울과 불안, 분노가 쌓이고 신체적으로도 다양한 질병을 초래한다. 
크리스천 역시 외롭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크리스천도 사회 경제 구조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외롭다. 외로움을 떨치려는 방법도 신앙 활동이 일순위가 아니었다. 2024년 한국 교회는 교회 안의 외로운 신자부터 돌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같이 식사하거나 차를 마실 사람도 없는 신자들이 많았다.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외로운 크리스천'의 등장이다. 
 
등장 배경
  1. 신자유주의와 경제 불황
  2. 1인 가구 증가와 고독사
 
크리스천도 외롭다
  1. 경제적 어려움이 외로움을 만든다
  2. 교회 안에서도 외롭다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외로움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지지와 공감, 신뢰와 친절을 나누는 DNA를 지닌 영적이며 실체적인 공동체이다. 외로운 이웃을 돌보는 가교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학교, 교회, 직장안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호소하는 이들에게 주목하고 있는가? 이런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진실한 공동체안에서의 진실한 나눔이다. 

 

 

3. OTT 크리스천(OTT Christian)

현재 우리는 '초개인화 시대'(Hyper-Personalization)를 살아가고 있다. '평균의 종말'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대는 개인의 요구와 상황을 더 세밀하게 고려하는 초개인화 기술의 발전과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인공지능(AI)의 등장에 힘입어 생겨났다. 이는 콘텐츠 소비 형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곧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 TV를 시청하게 될 것이라는 빈트 서프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국민 10명 중 7명이 OTT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고, 그 이용률은 특히 20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한 교회도 맞춤형 콘텐츠 제공에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AI와 알고리즘의 도움을 받아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맞는 콘텐츠를 선별, 제공하는 서비스가 점차 늘고 있다. 그중 알고리즘을 통한 큐레이션은 사용자의 행동패턴과 선호도를 분석해 개인화된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관심사에 맞는 맞춤형 콘텐츠를 알고리즘을 통해 제공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맞춤형 콘텐츠'가 아니다. 동시간성, 즉 함께 보는 '파티'(Party)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실시간 예배를 선호하는 통계를 보면 교회생활에 있어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그들의 바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디지털 기술 발전과 신앙생활의 변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OTT 크리스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했다. OTT 크리스천은 언제 어디서나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큐레이션을 통해 개성에 맞춘 신앙 경험을 추구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공유되는 시간의 가치를 인식하며 디지털 시대에도 공동체의 경험을 강조한다. OTT 크리스천의 등장은 OTT 기술이 향후 교회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 탐구를 요구하며, 미래 교회와 신앙생활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나갈 것인지를 상상하게 한다.
 
등장 배경
  1. 초개인화 시대와 평균의 종말
  2. AI의 등장과 종교 큐레이션 가능성
 
OTT 크리스천
  1. On cloud : 언제, 어디서나!
  • 다양한 교회 관련 플랫폼들, 유튜브 댓글 소통, 카카오톡 채널 운영
  1. Tailored curation(맞춤형 큐레이션) : 나만을 위한!
  2. Tele-party(텔레파티) : 함께하는 공동체!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1. 플랫폼 선택
  2. 맞춤형 콘텐츠 제공
  3. AI 리터러시
 
교회 공동체들이 너도 나도 이런 콘텐츠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소모적이다. 새롭게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이미 갖춰진 플랫폼을 자신의 공동체에 맞게 각색하려는 시도가 필요하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교회와 공동체가 함께 힘을 모아 필요한, 탁월한 컨텐츠를 제작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4. 제너레이션(Meme Generation)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다음세대 신앙 전수의 생태계가 급변했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면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듯 코로나는 다음세대 신앙 전수의 생태계를 빠르게 변화시켰다. 2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중심에 있는 청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달고 나온 '포노 사피엔스'로서 디지털 원주민이며, 심리적으로는 '질풍노도의 시기', 종교적으로는 '미전도종족'으로 불리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복잡한데 여기에 'Meme Generation'(밈세대)라는 말이 추가되고 있다.
청소년은 '밈'(meme) 없이는 대화를 못할 정도다. 잠자는 시간보다 인터넷을 더 많이 사용하고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더 많은 대화를 하는 청소년에게 밈은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진화생물학 용어인 밈이 디지털 세대의 소통 방식을 일컫는 말로 재탄생한 것이다. 오늘의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밈을 이해해야 한다.
밈세대는 세 가지 트렌드를 보인다. 첫째, 'Modeling Elders'로서 신앙형성에서 부모와 교사 등 기성세대를 모델링 하는 특징이 있다. 둘째, 'Making Environment'로서 문화 형성에 온오프라인을 양손잡이처럼 사용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전에 어떤 인류보다 기술 친화적이고, 수평적이며 개방적이고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세대로 한국 교회 미래를 책임질 세대라는 것이다. 2024년 청소년 사역은 머리 아픈 사역이 아니라 가슴 뜨거워지는 사역이 될 것이다.
 
밈이라는 말은 모방을 뜻하는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와 유전자(gene)의 합성어이다. 도킨스는 밈을 '인간의 유전자처럼 자기복제적 성격을 지니며 번식해 대를 이어 전해져 오는 사상이나 종교, 이념같은 정신적 사유'로 정의했다. (108)
 
Modeling Elders
  1. 신앙형성의 토양, 가정
  2. 신앙 형성의 뿌리, 목회자와 교사
 
Making Environment
  1. 청소년 문화를 창조하라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코로나 팬데믹은 다음세대 신앙 전수 현장의 날씨가 아니라 기후를 바꾸어버렸다.(데이비드 킨나만) 기후가 바뀌었다면 새로운 기후에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한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5. 약한 고리 3040(3040 Millennials)

3040세대가 주목받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인생의 절반에 해당하 는 3040세대가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개인의 인생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 사회보다 고령화가 더 심각한 교회 역시 새로운 청년층에 해당하는 이 연령대에 주목하고 있다.
3040세대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대표 세대이다. 특히 이 세대는 대부분 젊은 부부들로 구성되어 있어 침체에 빠질 경우 교회학교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3040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세대까지 그 파장이 미친다는 것이며 결국 한국 교회의 미래도 좌우된다고 할수 있다. 중년기에 접어드는 3040세대는 인생에서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개인의 정체성 면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 많은 혼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세대는 흔히 신세대도, 쉰세대도 아닌 '낀세대'라고 불린다. 한때 40대는 '잊혀진 세대라고 불리기도 할 만큼 정체성이 매우 약하다. 이들은 20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결혼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형성하면서 생활 환경이 크게 변한다. 부모 의존에서 벗어나 분가와 자녀 출산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교회 안의 3040세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청년세대를 마감하고 기성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이지만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감으로 장년부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다. 삶의 불안정과 분주함으로 신앙도 약화되기 쉽다. 대면 예배 출석 비율이 가장 낮은 연령대가 이 세대이고, 요즘 이슈로 떠오른 '플로팅 크리스천(온라인상에서 떠다니는 성도)도 이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가나안 성도의 주된 연령대 역시 40대였다. 3040세대는 한국교회의 약한 고리가 되고 있다.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3040세대를 위해 교회는 먼저 3040세대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잃어버린 세대, 교회를 떠난 세대로 치부하고 그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들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에 공감하면서 영적 필요에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들이 인생 전환기에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6. 교회 거버넌스(Bottom-up Commuinity)

기업 경영에서 ESG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거버넌스(Governance)가 대세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적 책임(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인데 지구를 망가뜨리지 말고 더불어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지속가능성을 높이자는 의미이다. 이중 거버넌스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말한다. 건강한 거버넌스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고 투명하게 소통하는 좋은 의사결정을 한다. 한국 기업이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건강하지 못한 거버넌스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2030청년세대는 건강한 거버넌스, 특히 공정성과 소통, 수평적이고 참여적인 문화를 중시한다. 한국 사회와 기업들은 청년세대의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국 교회는 어떤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교회에 대한 낮은 사회적 신뢰도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모습에 대한 원인 중에는 좋은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교회 거버넌스'가 있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목회자와 당회 중심이며 일방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의사결정 구조에 머물러 있다. 교회 직분은 서열화되어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한다. 교회 문화는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다. 참여적, 수평적 문화로 가는 사회 흐름에 한참 뒤처져 있다. 고학력, 지식정보 사회가 되면서 성도들은 미래 사회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담임 목회자와 소수 리더만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교회는 이제 건강한 거버넌스, 좋은 의사결정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때다.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공동체이므로 사람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세상 조직과 차별화된 교회 공동체의 건강한 거버넌스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 교인들이 바라는 이상적 교회는 하나님 중심(예배, 기도), 개인 도덕성, 이웃 섬김(사회 구제 봉사)이 균형 잡힌 교회이다. (164) 
 
- 거버넌스는 ‘좋은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상명하복이나 독단이 아니라 민주적 의사 결정 체계를 의미한다. 즉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협력하고 소통하여 의사 결정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한 것이다. 
 
교회 거버넌스
1) 건강한 의사결정 구조
2) 의사결정에 구성원의 참여와 협력
3)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해 헌신하게 함
4) 성경은 성도들이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라고 말씀하심
 
한국 교회 거버넌스의 현주소
의사 결정 과정에 다양한 구성원의 참여가 미흡, 의견 수렴이 부족, 의사 결정 사항에 대한 소통도 잘 안되고 있다.
 
교회 거버넌스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
1) 지나친 담임 목회자 중심 구조
2) 직분 제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계층화가 고착됨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1. 교회 거버넌스의 원칙
1) 한 백성 의식(선지자, 제사장, 왕)
2) 권위와 자율 간의 균형
3) 상호 호혜적이어야 함
 
2. 건강한 거버넌스를 위한 제안
1)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긴다. 
2) 당회의 민주적인 운영
3) 당회와 제직회의 역할 구분
4) 직분자의 올바른 역할 인식을 위한 교육 강화
5) 교인의 전문성 활용
6) 여성과 청년세대가 참여할 기회를 제공
7) 의사결정의 투명성과 소통 채널
8) 주기적인 평가와 피드백
 
-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건강한 거버넌스가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7. 처치 처치(Church in Church)

직장생활 때문에 오피스텔에서 혼자 생활하는 딸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었다. 매일 '편장족'(편의점에서 장보는 사람이라는 뜻의 신조어)이 되어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다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누군가의 간섭 없이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고 살면 과연 행복할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회적 관계(Sociality) 욕구를 지닌 존재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고 그곳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싶어 한다. 특히 혼자 생활할수록 누군가와 가슴속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를 기대하게 된다.
교회는 이런 사회적 관계 욕구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대안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관계적 친밀감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뤄내는 '교회 내 또 하나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인 소그룹 사역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소그룹은 함께한 이들의 표정 변화까지 읽어내면서 원만한 소통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소그룹은 코로나19 이후 한국 교회의 거대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 기간에도 그 위력을 발휘하며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왜 소그룹인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인간은 삶의 여정 속에서 최소한 네 가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첫째는 소속감, 둘째는 수용감, 셋째는 안정감, 넷째는 자존감이다. 
 
효과적인 소그룹 사역
1) 대그룹과 소그룹의 균형
2) 일단 시작하자.
3) 리더 훈련을 위한 시스템
소그룹 리더들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 :  교회 본질과 기능에 대한 이해, 소그룹 자체에 대한 이해, 소그룹 리더 자신에 대한 이해, 소그룹을 인도하는 구체적인 인도 방법에 대한 이해
4) 효과적인 소그룹 교재도 중요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모이고 연결할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자연스럽게 묻는 소그룹이 있는 교회, 새신자를 따뜻하게 환대하는 소그룹이 있는 교회, 어떤 부끄러운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소그룹이 있는 교회,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면서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는 교회, 심지어 물질적인 필요까지 자연스럽게 채워주는 소그룹이 있는 한국 교회를 기대해본다. 

 

8. 어시스턴트 포비아(Assistant Phobia)

최근 한국 교회에서 전도사, 교육전도사를 포함해 부교역자 청빙이 어렵다는 말이 들린다. 담임목사 청빙에는 많은 부교역자가 몰리고 있지만, 부교역자 청빙에는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비수도권에서 나타나던 부교역자 구인난은 서울과 수도권으로 확산하고 있다.
구인난은 수요보다 공급이 적기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최근 벌어지는 구인난의 원인에는 '사역 기피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역 기피 현상이란 부목사, 전도사, 교육전도사를 포함한 부교역자들이 지역 교회와 같은 전통적 사역 현장을 선호하지 않거나, 전임 사역을 스스로 내려놓고 파트 사역을 하면서 다른 일을 병행하거나, 사역 자체를 포기하는 현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사역 기피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현상은 한국교회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짙어지면서 젊은 사역자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한국 교회의 대외 이미지 하락 등의 문제로 인한 목회직 자긍심 하락, 오랜 시간 누적된 부교역자 처우 문제, 하늘의 별따기로 비유되는 담임목사 구직난이 그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새로운 목회자 그룹은 사역에 대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통적 목회 방식과 교회 조직 문화에 대한 회의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머지않아 부교역자가 귀해지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부교역자들의 사역 상황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이들이 건강하게 목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부교역자 사역 기피현상의 등장 배경
1) 교회 미래에 대한 불투명
2) 목회직에 대한 자긍심 약화
3) 교회 양극화
 
사역 기피 현상의 이유
1) 부교역자가 처한 경제적인 문제
2) 사역 인식의 변화 : 헌신과 노동 사이에서(열정 페이, 헌신 페이)
3) ‘라떼는 말이야’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1) 부교역자의 처우 개선이 필요
2) 교회 부교역자에 대한 인식 변화
3) 교회 사역이 교역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의 전환이 필요
4) 청빙 양극화를 극복
5) 부교역자의 전문성을 길러줄 필요

 

 

9. 다시 선교적 교회(Re-missional Church)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 교회의 전망이 어둡다. 눈앞에 드러난 다양한 지표들이 팬데믹 기간 동안 교회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단지 코로나의 영향이 아니다. 오히려 지난 10여 년간 누적되어 온 지속적인 침체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염려 속에서 선교적 교회가 부상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는 북미를 넘어 세계적인 현상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대안 찾기에 나선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지처럼 보인다. 관건은 선교적 교회가 한국교회에서 또 다른 브랜드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원래 취지대로 교회 본질 회복의 도화선이 될 것인지이다.
다행히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이 선교적 교회를 또 다른 성장의 도구로 인식하지는 않고 있다. 목회자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교회란 무엇인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선교적 접촉점을 만들어 사명을 이룰 것인가?"를 질문하며 치열하게 고민해왔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선교적 교회에 접근하고 있다. 풀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선교적 교회론에 근거해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을 찾아가는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선교적 교회에 대한 전국 담임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목회데이터 연구소가 실시한 '2024 한국 교회 트렌드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목회자들의 인식과 미래적 방향성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붙잡고 성육신적이고 복음적인 사역을 통해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득 찬 교회가 되기 위해 붙잡아야 할 미래적 요소를 찾는 여정이 되길 바란다.
 
선교적 교회의 등장 배경
선교적 교회의 출발점은 서구 교회 쇠퇴와 맞물려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의 세속화와 몰락을 보면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복음과 근대 서구 문화와의 선교적 만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문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 교회는 어떻게 이 시대 문화 속에서 선교적 참여를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선교적 교회론 : 교회란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백성들의 공동체 이기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그분이 선교에 참여할 수 있을까를 목적으로 삼는다. 
 
한국의 선교적 교회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제3의 공간을 통해 선교적 접촉점을 만든다. 이들은 마을과 지역 사회의 소리를 경청하여 필요를 찾아 채우는 대안적 사역을 감당한다. 나아가 제자도에 기초한 공공성과 하나님나라 가치를 실현한다.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 :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는 것과 선교적 교회가 되는 일은 별개다. 따라서 지도자는 전통적 프로그램과 사역으로 가득찬 교회를 선교적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철학을 바꾸고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구조를 바꾸고 사역을 바꾸어야 한다. 회중 가운데 선교적 비전과 상상력이 가득 차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은사와 자원을 통해 선교적 모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를 실현할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1) 선교적 교회가 단순한 구호나 유행에 머물지 않게 하는 일
2) 선교적 교회의 사역 패러다임을 형성 :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성부가 성자를, 성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교회를 보내신다. 보냄받은 교회는 부름 받은 제자들인 성도를 훈련하고 교육하여 보냄을 실천해야 한다. 이렇듯 교회의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냄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선교 사역의 대리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면 교회는 이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해야 한다. 
3) 선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
4) 선교적 교회의 개념을 지역사회에 국한된 봉사나 활동으로 제한해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선교 개념이 열방을 강조하면서 지역(local)을 잃어버린 실수를 범했다면, 선교적 교회를 지역 사회로 한정해 열방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10. 인에비터블 컬트(Inevitable Cult)

2023년 3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람을 살리고 소망을 주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하고 짓밟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다>에 소개된 단체들은 정통 기독교단에서 소위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들이었다.
2023년 한 해 이단 문제는 한국 교회가 주목하고 대비해야 할 거대한 목회 트렌드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이단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준비는 부족한 실정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단을 인식하는 전형적인 공식이 있다. 이단으로 큰 충격을 받고 그 피해가 일파만파 퍼진 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2020년 2월, 31번째 코로나19 확진자로 인해 대구 경북지역에 신천지를 중심으로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확산한 사건이다.
이단은 이전부터 한국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 점이 한국 교회의 부정적 측면을 형성한 트렌드로서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했다. 주목할 사실은 이단에 빠지는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신앙에서 넘어간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중 다수는 자신이 속한 이단 단체야말로 '성경적'이라는 확신이 있으며, 자기네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나 교주가 죽더라도 그 단체를 떠날 생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끊임없이 가족과 지인들에게 포교 활동을 하며 끌어들이려 한다. 이들에게는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언론 보도는 대부분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믿기에 자신이 속한 단체를 적극 옹호할 뿐,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단은 앞으로도 한국 교회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무시할 수 없는 주요한 트렌드로 계속 자리잡을 것이다.
 
한국 교회 내 이단의 발흥
1) 국내에서 자생한 이단 : 구원파, 통일교, 영생교, 장막성전, 신천지, JMS
2) 해외에서 들어온 수입형 이단 : 안식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3) 해외에서 들어온 수입형 이단 교리와 국내의 자생적 이단 교리가 결합되어 발전된 형태의 이단 : 하나님의 교회
 
트렌드 전망 및 시사점
이단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길러주는 바이블 백신, 즉 교리 백신의 접종이 필수적이다. 
한국교회는 이단에 빠졌던 이들이 이탈할 때 상담하고 돌이키고 회심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 
지역 교회는 그 지역에 있는 공신력있는 이단 상담소와 연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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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뉴스를 고통의 포르노로 소비하며 자신이 처한 안전한 자리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평소에 보지 않았던 곳으로 눈길을 돌리길 바라며(p.122)

 

이 내용은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목회자 독서모임에서 '황계찬 목사'가 정리한 것을 옮긴 것입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 저자 : 김인정(경계를 넘나드는 저널리스트)

  -前 광주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現 프리랜서 기자(미국)

 

▣ 저자가 목격한 고통

·이태원 참사 ·기후 위기의 불공평함 ·서울과 비非서울 ·서울 뉴스와 지역뉴스 사이의 권력 관계
·산업재해 ·세월호 참사 ·5.18 민주화 운동 ·가난한 사람의 기부
·환경미화원 ·젠더 갈등 ·홍콩 시위 ·미국 내 아시아계 증오 범죄
·텐더로인의 마약거리

 

 

 

prologue   구경하는 인간(Homo spectators)

 

 

-세계 3대 구경 : 1.                      2.                     3.                    

-걸프 전쟁

-911 테러

-쌍용자동차 사태

-세월호 참사

-10.29 참사  

 

 

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목격(目擊)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求景)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 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p.24-25). 

카메라가 한 대씩 탑재된 스마트폰과 이미지 전달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를 발판 삼아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많은 사람을 향하여 고통의 중개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중개하는 일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따라붙는다. 전달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할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는 딜레마(P29-30).

 

구경과 대면 역시 현실에선 정확하게 갈라낼 수 없을 정도로 엉켜서 일어난다. 흥미 때문에 모여든 군중의 수가 역설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목격자가 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머지 결국 구경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자괴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p.30).

 

오늘날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은 범람하는 이미지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사고 현장의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p31).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 이기도하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 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만일 슬픔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매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슬픔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사회적 실패에서 오고, 공공영역의 오류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목격한 장면이 구경거리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 대화는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p.34-35). 

 

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p.37).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 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p.49).

 

 

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된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우리는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p.74). 

 

지금 일어나는 위험을 알리고, 경고하고, 서로가 안전하도록 다 함께 지켜보는 일은 공동체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이다. 공동선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궂은 날씨의 스펙터클이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를 꽤 이상하게 오염시키거나, 비틀어버릴 때가 있다. 약자의 고난은 구경거리로 보여지고, 재난 현장은 대상화되어 정치적 포토월로 전락한다. 예를 들면, 일가족이 생명을 잃은 반지하 침수 현장을 찾아간 대통령의 사진이 고통을 굽어살피는 지도자의 이미지인 양 홍보자료로 유포된다(p.79-80).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Jeff Goodell)은, 폭염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도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p.89).

 

우리는 국경이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나누어 인식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지구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끔 잊는다(p.90).

 

침묵이야말로 산업재해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흔적이다. 위급한 상황에도 사고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119 신고를 미루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입을 닫으라는 명령의 배후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산업재해는 주로 인재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지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안전 관리를 소홀하게 했다는, 뻔한 패턴이다. 산업재해는 이미 입력되어 있는 설계 오류다(p.91-92).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p.94).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p.96).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 숨진 김 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석탄 이송 컨베이어 밸트에 끼여 숨진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하루에 6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p.100).

 

5.18이 국가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서 인정받고도 북한 특수군이 광주 시민인척하며 저지른 일이라느니, 폭동이라느니 하는 끈질길 거짓말에 수십 년간 시달리는 이유다. 문제는 “5.18은 폭동”이며 “북한 소행”이라는 가짜 뉴스와 역사 왜곡이, 전라도에 대한 오랜 지역 차별과 맞물려 새로운 인터넷 ‘밈’이 된 현상이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오는 즐거운 놀이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폭력적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 사이트, 이른바 일베에 게재됐던 ‘홍어 택배’ 게시글이었다. 일베에는 이런 글 외에도 신군부의 논리를 조악하게 이식받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가짜 뉴스, 희생자와 유공자에 대한 혐오가 넘쳐났다(p.107).

 

혐오가 뉴스가 되는 현상은 인터넷의 관심 끌기 문화와 결합해 주체할 수 없이 증폭했다. 이슈가 되니까 원래 있던 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p.108).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p.120-121).

 

이게 일종의 포르노처럼 소비되어 안방의 시청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위무하는 데,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계층 안에 더욱 깊숙하고 안온하게 머무르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서로를 돌아보기 힘든 팍팍한 사회 안에서, 억지로라도 더 약한 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돕는 게 뉴스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뉴스의 주제로 도마 위에 올라가고 적당한 ‘예시’가 되어 인터뷰를 요구받는 것 역시, 약자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 아닌가 싶기도 했다(p.122-123).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곳에서 쉴 권리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의 휴식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 사회는, 그들이 쉬는 모습을 실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일지도 모르겠다는 걸 취재 끝 무렵에야 깨달은 것이다.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쳐져야 하는 건 보이는 인프라나 환경만이 아니라 이들을 어둑한 땅속으로 밀어 넣고서 깐깐한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노동과 쉼을 고작 자신의 눈에 띈 장면만으로 평가하는 무례함이다(p.124).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p.136).

 

 

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나, 나의 가족, 나의 친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p.140).

 

서구 언론이 우크라이나전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건 편견을 노출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내가 보기엔 다분히 의도적이며, 여러 맥락이 있다. 전쟁터는 폭력과 죽음과 비극이 도처에 널려 있는 특수한 공간이다. 전쟁 보도는 인권과 평화를 기반으로 한 저널리즘이라도 간단히 믿어지기도 하지만 개별의 보도와 언론사들의 관점을 살피면 그 안에서 부글거리는 이해관계의 날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소속된 국가와 문화권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반대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전쟁터에 만연한 참상의 증언을 주워 가해와 피해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는 숱한 관점과 의도와 무의식에 스민 계산이 개입되곤 한다(p.144). 

‘우리’와 닮은 것들은 옹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간단히 반대쪽으로 밀어내는 이런 발언은 거의 당연하다 싶게 나빠 보인다. 인권에 대해 말하며 편견과 배타주의를 끄집어 쓰는 당혹스러운 모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엄호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편으로 몰아낸다. 더러움과 추함, 폭력과 불행을 우리 바깥으로 쓸어낸다(p.145).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Paul Bloom)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페이스북을 만든 메타 최고 경영자 마크 저커버스(Mark Zuckerberg)는 “누군가에게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당장 자기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더 큰 관심사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p.148).

 

더구나 개인의 프로필을 중심으로 한 소셜미디어를 주축으로 뉴스의 소비가 극도로 개인화되고 에코 체임버(echo chamber)효과(폐쇄된 환경에서 유사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소통하며 기존의 신념을 증폭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에 갇히게 된 시대다. 나에게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와닿지 않는 뉴스는 점차 존재하지 않는 뉴스나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에게 ‘신경 쓰이는’ 뉴스만이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는 것이다(p.148).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어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p.155).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로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쏠리던 시기인데다 팬데믹과도 연관된 이슈라는 데 힘입어 주류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의 인종차별 의제가 전례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다(p.158).

 

알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고통받는 몸》에서 “때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내곤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도록 하는 일이, 세상의 눈에 띄는 고통을 반복하고 늘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언어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p.167).

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고통과 상실을 겪어낸 한 사람이 잔해 속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같은 이름의 다른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슬픔과 우울, 기억이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쓰려 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사적인 애도를 겪어내는 이들을 위해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p.212). 

 

그렇다면 기자들은 시청자들이 뉴스를 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하며 뉴스를 전할까.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울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보고 들어줄 가능성. 대개 자신의 일로 꽉 차 있을 머리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소식을 끼워 넣고 염려해 줄 가능성. 다 보고 난 뒤에도 기억해 줄 가능성. 뒷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할 가능성. 나아가 뒷이야기를 새로 쓰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가능성. 줄여 말하면 행동과 변화의 가능성(p.236).

 

뉴스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만들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없이 순진한 희망에 기대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줄 것이고, 이로 인해 세상이 약간 변할 수도 있다는 천연덕스러운 믿음, 이걸 믿는 일은 정말 가능한가?(p.237)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머리 콜빈(Marie Colvin)의 말이다(p.237).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p.237-238).

 

한국사회를 취재할 때는 자주 잊고 있었던 질문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있나? 나는 과연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사람일까? 이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누굴까? 이 고통을 이야기할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중산층 기자들이 ‘사회적 약지’를 대변한다며 쪽방촌에 들이닥치는 풍경이 얼마나 침략적인지 계속해서 묻게 했다. 이민을 와서 당장 생계를 위해 스파에 취직해야 했던 여성들보다 훨씬 안전한 지대에 머무르고 있는 내가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기만 아닐까? 우리는 인종과 언어, 계급을 모두 뛰어넘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p.248-249).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남의 사정 같은 건 없다. 인종과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무한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p.253).

 

한 공동체가 슬퍼하기도 결정한 죽음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주어의 영역을 확장해 준다. ‘무엇을 애도하는 사회인가’, ‘이 죽음은 애도할 만한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과정은, 적어도 그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도는 눈치 챌 수 있게끔 한다(p.259).

 

애도는 이때 정치로 흐른다. 공적 애도 안에서 자주 가치를 다투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사회적 합의 과정이 힘겹게 겨루기를 펼치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사유하고 고쳐나가려는 시도 안에는 성실한 슬픔이 깔려있다. 이럴 때 사회적 애도를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며 사적인 영역에만 밀어 넣으려 하는 건, 개인의 애도 과정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사적이라는 건 보이지 않도록 감춘다는 것과도 비슷한 질감의 단어다. ‘애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는 국가나 기업이 다루기에 까다로운, 감정을 가진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애도의 사적인 속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위로 이어지는 공적 애도의 진정성을 두고 매번 시비가 붙는 건, 사회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도 보인다. 

공적 애도의 상황에서 이야기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죽은 이를 숫자로 남겨두지 말고 이름이나 얼굴이 등장할수록 좋다고 여겨진다.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파편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것 정도다. 공적 애도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자주 화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259-260).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p.262). 

 

epilogue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

 

 

“보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릴 뿐이다.”

 

 

■ 질문-1 : 목회자와 기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질문-2 :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목사로 살고 있는가?

 

■ 질문-3 : 우리 시대의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질문-4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구경꾼인가? 목격자인가? 증인인가?

 

■ 질문-5 :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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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길을 묻다(최종원, 비아토르)

 

 
 
수도원이 개별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를 함축하는 반면, 수도회는 역동성과 운동성을 포괄한다고 보기에 이 책에서는 ‘수도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부. 탄생
1장. 서론, 오늘 왜 수도회인가?
수도회 탐구 여정의 시작점에서
 
그리스도교는 금욕의 종교인가?
마가복음 14:25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수도회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21)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를 염원한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서 빠져나와 사막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수도회 존재의 핵심은 일상과 하나님 나라를 긴장속에 이어주는데 있다. 
 
수도회는 고립을 추구하는가?
수도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스테리온’은 ‘혼자’라는 뜻의 ‘모노스’와 ‘장소’라는 뜻의 ‘테리온’이 결합된 용어다. 수도사를 나타내는 단어닌 ‘몽크’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풀어 쓰자면, 수도회는 세상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다.(22)
 
제국과 천국 사이에 선 나그네
그리스도교는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의 정점에서 탄생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제국에서 또 다른 꿈, 곧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를 꿈꾸는 것은 제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제국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보이는 제국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가치 충돌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핵심 이유였다. (25)
 
제국은 체제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안녕과 번역을 약속한다. 그 체제하에서 문명인과 야만인, 자유민과 노예,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않은 종속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화는 민족과 인종,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르쳤다. 나그네와 병자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고 나눔늘 실천하는 삶을 그리스도가 가르친 인간관을 수용한 결과다. 그리스도교가 제기하는 인권과 평등의 가치는 노예를 인격체가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던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박애 정신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천이었다.(27)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제국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거주 외국인(resident alien)’으로,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일을 하늘나라의 '식민지 건설’로 표현했다. 바울의 식민지 유비를 빌리자면 거주 외국인들을 시온의 신을 알지 못하는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이 식민지는 제국의 한가운데에 있는 일종의 문화의 섬이었으며, 거주 이방인들의 낯선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그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28) 제국의 정복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확산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식민지 건설은 철저하게 주변과 경계, 아래에서 형성되어 퍼지는 가치다. 
 
그리스도교가 만들어가는 식민지는 제국의 영토 안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더 높은 윤리와 도덕의 가치를 보여줄 책임을 지닌다…. 이 식민지에는 두가지 극단의 위험이 존재한다. 하나는 제국에 동화되어 식민지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 안에서 거주하기를 포기하고 분리하여 고립되는 위험이다.(29)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하늘나라와 제국의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수도회가 탄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도회야말로 제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양립하는 현장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거센 저항이었다.(31)
 
오늘의 나와 무관한가?
고독 속에서 연대했던 수도사들의 가치와 지향을 우리 삶 속에 연결해야 한다. 
 
 
2장. 수도회의 탄생_그리스도교 공인과 사막 교부들
수도회의 탄생, 왜 4세기인가?
4세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과 그리스도교 공인 시기가 맞닿아 있다. 
 
그리스도교 공인의 명과 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이제 오히려 많은 사람이 신앙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결단 없이도 자기 편의와 향후의 기회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삶의 변화 없이 이교도의 가치관을 유지하니 교회의 질적 순도가 점점 떨어졌다. 
 
핍박받던 소수가 이제 주류 중의 주류가 되었다. 항상 제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던 가치 및 문화와 같은 방향에 서게 되었다. 점차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가 동일시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는 박해을 받았지만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를 수용했을 때 세속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왔고, 눈먼 교회는 제국의 권력을 나누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42)
 
교회의 두 가지 반응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에는 두가지로 반응했다. 첫째 제도 교회는 공인에 따른 변화를 환영하고 급속히 적응했고 둘째 일부는 그리스도교 공인과 그 이후의 교회 정책을 거부했다. 이 지점이 수도회주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두가지 형태의 수도회
은둔 수도회 vs 공주 수도회
1) 은둔 수도회, 앵커라이트(anchorite) 혹은 은둔 수사((hermit)로 불린다. 창시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안토니우스이다. 그는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마 19:21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35세 되던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래된 요새에 가서 20년을 은둔하며 살았다. 
 
2) 공주 수도회는 공동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케노비움’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코이노스’와 ‘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비오스’의 합성어이다. 그들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수도사 공동체에서 산다. 창시자 파코미우스는 로마의 군인으로 전쟁중에 자신을 돌봐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섬김에 감화를 받고 작은 수도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변의 나그네를 섬기는 돌봄 공동체로 순종을 어떤 가치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유럽의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인 베네딕트 수도회에 영향을 준다. 파코미우스의 수도회는 수도사 개인의 내적 완전성을 추구하기보다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애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 수도회가 신적 음성을 듣기 위해 내면에 집중하며 완전을 갈망했다면, 파코미우스로 대표되는 공주 수도회는 타자 돌보기로 시선이 확장되었다. 
 
긴장을 줄 공동체
 
 
3장. 수도사의 일상_기도와 노동, 하나님의 일이 되다
일상과 영성
관상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
 
포기하는 것과 얻는 것
 
기도와 노동
수도원에서는 여덟 차례 공동체 기도를 드린다(성무일도). 시 119편 164절과 62절. 
 
수도원의 기도는 읽기와 침묵으로 뒷받침된다. 독서를 통한 기도는 텍스트를 사색하여 몸과 영혼에 아로새기는 방법이며 침묵은 더 적극적인 기도이다.(67)
 
기도의 한 방편으로서의 육체노동은, 수도사가 순종과 고행의 삶을 실천하는 동시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려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68)
 
또 다른 종류의 노동
야외 육체노동은 줄어들었지만 필경사들의 노동은 과중했다. 그 노동으로 생성된 책이라는 물성은 당대와 후속 세대를 위해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는 토대가 되었다.(73)
 
유럽을 만든 회랑 안의 일상
삶이 물질로 환원되고 종교마저 내 유익을 위한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그 너머의 초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균형을 찾아갈 때 삶은 좀 더 내밀해지고 덜 흔들리게 될 것이다. 
 
 
2부. 역사
4장. 유럽을 만들다_아일랜드 수도회, 베테딕토회
무너진 제국과 수도회
초기 수도회주의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고 세속적 번영에 반동하는데서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났다. 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 476년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손에 함락. 
 
아일랜드, 성인과 학자들의 섬
켈트 수도회를 특징 짓는 단어 : 금욕, 학문, 선교
- 고전 교육에 회의적이고 명상과 기도에서 성경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동방의 사막 수도사들과는 달리 켈트 수도사들은 학문과 교육에 열정이 넘쳤다.(84)
 
노섬브리아 궁정교사로 임명받은 앨퀸은 교약 교육의 기초로 3학(문법, 수사, 논리)과 4과(산수, 기하, 음악, 천문)을 정했다. 이시기 카롤링거 서체가 채택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들의 문화적 토대인 게르만의 가치위에 그리스도교를 융화하여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문명을 형성했다.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토
켈트 수도회가 문명이 없는 황량한 산과 섬에 문명의 싹을 틔우고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면, 베네딕토 수도회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라 부르는 고전 문명이 무너져 내린 잔해 위헤서 출발했다. 
베네딕토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가 50세가 지났을 무렵인 529년 이탈리아 남부 몬테카시노로 이주하여 수도원을 설립했다. 베네딕토회 규칙의 가장 큰 장점은 금욕적인 닫힌 세계와 열린 현실 세계 사이의 균형감이었다.  기도, 노동, 학습을 강조했다. 견습 수도사 생활을 마친후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사는 ‘청빈’, 독신으로 사는 ‘정결’, 수도회의 규칙에 순종하는 ‘순명’을 약속하는 수도 서약을 한다.(95)
 
중심을 흔드는 주변부 공동체
수도회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세속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곳이 아니다. 현실 세계의 가장 전위에 서 있는 공동체, 주변부에서 중심을 파고들어 흔드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도회의 존재의미이자 목적이었다. 
 
 
5장. 유럽을 깨우다_클뤼니 개혁운동과 시토 수도회
교회의 암흑기
수도회는 본질적으로 세속과 의 긴장 속에 형성하는 대조 공동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클뤼니 개혁과 뒷모습
중세 성직자는 교회에 봉사하는 직책이지만 동시에 세속 군주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국가직이기도 했다. 
 
클뤼내 개혁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매매 금지, 세제 혼인 금지, 세속 통치자의 성직자 서임 금지문제에 천착했다. 
 
시토 수도회, 엄격한 수도 생활로의 회귀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가 추구했던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 회복의 핵심이라고 파악하여 베네딕토회 규칙을 문자 그대로 읽어내교, 고립속에서 살아가며, 매우 엄격하게 완전함의 이상을 추구했다. 
클뤼니 수도원이 예배를 수도회의 특징적 중심으로 놓고 전례의 방식과 철학을 발전시켰던 반면,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 규칙이 추구하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에 더 치중했다. 
시토 수도회는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고 세속 후원자들로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무지를 기증받아 공동체를 일구었다. 또한 시토 수도회는 중세 신비주의 영성과 성모 마리아 공경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시대정신을 담아낸 수도회 운동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당대 사회와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종교가 지닌 고유한 힘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오히려 버리고 비우는 데서 나온다. 
이 수도회 운동들을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 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6장. 십자군의 혼란 속에서_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스콜라’에는 학교라는 의미와 정예부대라는 의미가 있다. 
서유럽인들의 성지순례는 고해 사제가 부과한 벌을 이행하는 참회의 길, 또 자발적 종교적 헌신을 위해 걸어가는 순례길의 의미가 있었다. 
 
무기를 든 수도사들
‘성전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이다. 성전 기사단은 용감한 전사로서 비무장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성전 기사단의 확산과 몰락
성전 기사단은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순례 여정을 만들고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하려는 유럽인을 위해 땅을 매입해주고 송금을 대신하고 필요한 비용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땅을 매입해 개간하고 정착할 수 있는 종합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성전 기사단의 문어발식 확장은 비판을 받게 되고 해산을 요구받게 된다. 이는 교황권과 세속권의 갈등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프랑스 국왕의 시도였다. 
 
가장 오래된 군사 수도회, 구호 기사단
구호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 형제회’이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환자를 구호하는 것이었다. 
 
평화를 위한 무력은 정당한가?
군사 수도회는 기사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거나 전투에서 부상한 이들을 치료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군사 수도회의 역할과 지위를 옹호했다. 그는 무장한 수도사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보았다. 
수도회가 국가나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보편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 종교의 이름으로 제국이 제기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주의, 패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종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 같은 수도사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7장. 세속화에 급진적으로 맞서다_탁발 수도회
사도적 청빈의 거대한 바람
13세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칠성사와 화체설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성직자 중심주의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제도교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교회 본연의 길을 잃었다고 판단될 때면 항상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등장하여 제도 교회를 정화시켜왔다. 
 
이들(발도파와 탁발 수도회)은 사도적 청빈 즉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살아간 방식을 추구했다. 무소유를 실천하며 타인의 은총과 신뢰를 얻으며 살았다.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의 발도가 주도한 운동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청빈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했다. 주교 없이 설교하는 이들은 제도 교회와의 갈등을 일으켰고 1184년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형제가된 수도사
탁발 수도회는 수도회의 재산을 만들지 않았고 그 대신 대중들의 자비에 의존하는 탁발을 생의 수단으로 선택했다. 기존 수도회는 종교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폐쇄 공동체에 가까왔다. 탁발 수도회는그 틀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했다.(13세기 프린치스코회와 도미티코회의 등장)
 
프란치스코회와 청빈의 딜레마
프란치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 전쟁중 부상으로 투병하며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마 10장의 설교를 들으며 감화를 받아 절대적 빈곤의 실천을 선택했다. 탁발 수도사들이 빈곤의 가치, 무소유의 가치를 강조하면 할수록 수도회에 더 많은 기부와 헌납이 이루어졌다. 이에 수도원 운영을 위한 재정을 가지는 문제로 인해서 온건파 ‘콘벤투알’과 급진파 ‘영성파’로 분열되었다. 
사도적 청빈의 궁극은 물질의 소유뿐 아니라 물질을 엄어서서 이 땅의 권력과 힘까지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포기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도미티코회, 설교와 학문의 전문성
프란치스코회가 청빈이라는 사도적 삶의 실천을 강조한 반면, 도미티코회는 사도적 삶의 또 다른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강조했다. 
도미니코회는 당시 이단인 카타리파와의 논쟁과 설교를 통해 그들을 돌아오게 하고 카톨릭 대중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중세말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이끈 수도회로 악명을 쌓았으며 이와 별개로 설교법, 웅변술, 교수법으로 중세말 대학과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 상태에 대한 급진적 제고
교권의 전성기에 사도적 청빈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둥장한 탁발 수도회는 견고하게 구조화된 성직주의에 불만을 가진 대중이 추구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탁발 수도회는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고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탁발 수도회는 화폐경제의 활성화와 신흥 도시의 등장이라는 원시 자본주의 속에서 그 자본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이 그리스도교가 선택해야할 방향이라며 급진적으로 이념을 제시했다. 
그들은 제국 한가운데서 제국의 가치 논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가치로 살며, 이 땅에 천국의 식민지를 확장해가려는 무모한 시도를 했다. 
 
 
8장. 닫힌 공간에서 피어난 영성_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공동체
여성, 이브와 마리아 사이
수녀원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서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독립성이 중요한 가치이다. 동시에 수녀원의 탄생은 악의 근원을 세상과 단절시켜야 한다는 여성 혐오의 부산물이었다. 
 
여성 혐오와 차별로 기획된 공간
여성에 대한 남성의 깊은 불신은 하와의 불순종 범죄로 이 땅에 악이 들어왔다는 믿음에 근거했다. 남성 중심 교회는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얕잡아 봤다.
 
명예남성인가? 여성성의 대표인가?
빙엔의 히데가르트와 아시시의 클라라는 각각 당대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현한 인물이자 그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목소리를 낸 인물로서 대표성을 지닐 만 하다. 
 
억압과 돌파
여성의 목소리에 위기 의식을 느낀 교회는 수녀원에 엄격한 고립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부정적인 힘 때문에 남성을 영적으로 오염시키고 구원을 위협하기 때문이며 당시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에서 확산되는 여성들의 종교 활동때문이었다. 
신비주의는 스콜라학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종교성에 대한 여성의 대안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의 신비 체험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이 판단하는 종교재판에서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남성 성직자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에게 불안을 느꼈고 이에 그들의 경험을 마법술과 동일시했다. 1487년 도미티코회 수도사인 야콥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라머가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는 악명 높은 마녀사냥 교범이다. 
 
모순과 역설의 공간
중세 여성에 대한 담론은 악의 통로가 된 ‘이브’로서의 여성과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구원의 통로가 된 ‘아베’마리아로 나뉘어 있었다. 수녀원은 이브 곧 하와가 속죄를 통해 아베 마리아의 길을 걷길 기대하는 공간이었다. 
제한이 있고 자약도 있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오롯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수녀원의 힘의 원천이었다. 
 
 
9장. 종교개혁, 수도원을 없애다_수도원 폐쇄와 새로운 물결들
수도원을 나온 수도사들
마르틴 루터가 교황에 반기를 들며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결과, 카톨릭 유럽이 분열되었다. 교황제나 화체설의 부정과 같은 신학적 차치 외에도 사제 결혼 허용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금지하던 이혼이 제도화되는 등 개신교 지역에서는 큰 변화들이 생겨났다. 이에 수도회주의 부정과 수도회 해산이 일어났다. 
 
개신교 개혁가들은 수도회가 지향하는 정신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수도원해산을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하여 수도원 재산을 국가가 몰수했다. 개신교 지역의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그리스도교를 열어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루터의 수도회주의 비판
수도회와 종교개혁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가치 회복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면, 수도회 경험이 루터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루터는 수도회주의가 지닌 근본적 결점을 현실 도피라고 지적했다. 
 
카톨릭 수도회주의가 소멸하면서 개신교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는데 이제 교회 내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사처럼 소명받은 삶을 살아야 했다. 
수도원이 추구하던 기도하고 노동하는 일의 가치가 개신교 지역에서는 일상의 소명으로 이어져서 일이 곧 기도가 되었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수도원의 가치를 담벼락 너머 세속의 일상으로 연장했다. 이처럼 종교 개혁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잉글랜드의 수도원 해산은 카톨릭과 결별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세속 군주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의 첫걸음이었다.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과의 결별을 끌어낸 헨리 8세의 오른팔 토머스 크랜머가 주도했다. 수도원이 보유하던 엄청난 부를 국유화하고 교회의 정치적 복종을 이끌어 내려한 것이다. 이러한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종교의 강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대조 공동체가 영원히 상실되었다. 
 
전위를 차지한 예수회
예수회는 스페인의 군인 출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카톨릭 수도회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을 포함하여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삼았다. 예수회는 은둔하거나 정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격적인 방식의 선교가 핵심이었다. 
 
제3의 길, 재세례파
메노파, 아미시파, 후터파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재세례파 공동체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와 갈등관계를 보였다. 카톨릭 국가에서 유아세례는 종교적인 행사인 동시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는 종교적 호적 신고였다. 재세례파는 교회를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여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구원자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하기로 할 때에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모든 종류의 폭력 거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들이 복음서에서 끄집어 올린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이었다. 
 
진화한 수도회주의
개신교가 수도사직을 폐지한 것을 단선적으로 읽기보다는 수도회 정신이 카톨릭의 예수회, 개신교의 만인사제주의, 재세례파 운동등으로 다양하게 진화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지닌다. 
 
 
10장. 이성이 종교가 된 시대_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로 가는 여정
프랑스 혁명(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클뤼니 수도원 파괴
수도원 해체, 탈종교화되는 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성의 해체를 도모한 사건
수도원 개혁에 대한 세속 통치자들의 요구 : 수도원 토지문제, 존립 목적에 부합하는 수도원만 유지, 각 국가내 수도회의 주도권을 교황이 더이상 가질 수 없었다. 
 
혁명과 수도회 폐쇄
프랑스는 1789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했고 교회는 면세 특권과 십일조 마저 상실했다. 
1790년 성직자 공민헌장 : 국가가 성직자 급여를 부담하고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오던 구제사업의 책임을 떠맡았다. 이때부터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등 호적 업무가 교회에서 국가로 이관되었다. 
침묵과 기도, 신비로 대표되며 1500년 이상 이어온 수도회 정신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었다. 
 
이성, 혁명의 종교
프랑스 혁명 기간에 수도원에서 400만권 이상의 책이 불탔다. 책을 태우는 것은 과거의 기록을 파괴함으로써 과거 문화의 기억을 지우고 자신의 의지대로 재구성하고 하는 시도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는 국가 통제하에 들어가고 전통적 종교성은 이성과 합리의 시대, 인권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로 평가절하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세속화의 길을 열었고 그리스도교가 유럽 역사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수도회에 가해진 도전도 거셌다. 청빈, 순결, 순명이 대표하는 수도회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가치에 압도되었다. 종신 수도 서약은 시대에 뒤처진 인권 유린으로 매도되었다. 혁명이 몰아낸 것은 구체제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2천년 가까이 쌓아 온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전통도 혁명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길을 잃은 근대, 인간을 잃은 종교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전해진 것은 우월한 유럽의 가치였다. 그들이 실천한 것은 보편적인 인간애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정한 인종주의였다.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우생학이 등장한 후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인간의 우월을 가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자본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 그로 인한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 확산 앞에서 모든 것은 물질로 환원되었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힘을 주창했다. 그는 놀이의 자발성, 상상력, 순수성, 비일상성이 건전한 창조성을 낳는 힘이라고 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과 생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놀이를 무가치하게 보는 관점이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만들기보다 기계화된 세계의 부품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는 '일과 생산은 시대의 이상이 되고 나아가 우상이 되었다'라고 했다. 
비생산적인 기도와 침묵의 삶이 주는 가치, 성찰과 기도의 삶을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며 수도원을 파괴한 근대가 제거해 버린 것은, 어쩌면 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찰하는 힘이었다. 
 
 
11장. 잿더미에서 찾는 희망의 조각들_떼제와 라브리 공동체
저항하는 부조리 인간
1, 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헛된 환상이었음을 드러낸 암울할 사건이다. 
실존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이므로 불안이라는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인류의 진보를 약속했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부조리한 시대였다.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 긍정과 성찰 없는 진보의 폭주 앞에서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교회는 실존하는 고통에 참여할 능동적 의지를 상실한 채 추상적인 본질에 천착했다. 
제도 교회는 현실을 읽어내고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한 채 천상의 진비와 추상의 본질에만 매달렸다.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 선교회는 유신론적 가치를 매개로 신존의 고민을 풀어나가려는 시도에 가깝다. 
 
화해와 떼제 공동체
프랑스 개신교인 로제 수사가 떼제에 정착, 1940년 시작된 이 공동체는 유대인 난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전후 기부를 거절하고 자급자족을 실천하며 수도회 밖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매일의 공동체 기도를 통해, 생활에서는 예배와 침묵을 통해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스도인 간의 화해, 젊은 세대를 향한 복음 전도, 그리스도교 내에서의 창조성 촉진.
 
프란시스 쉐퍼와 스위스 라브리
라브리는 프랑스어로 피난처이다. 실존의 물음을 풀어가는 일에서 떼제 공동체가 주정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라브리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이다. 
 
라브리의 지향점은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다. 라브리의 존재 목적은 인생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가 인격적이고 무한하며 실재하는 절대자 안에서 해답을 찾도록 하는데 있다. 
쉐퍼는 그리스도교와 일상의 삶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합리성과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라브리는 시대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질문이 달라지고 고민이 중층화된 시대에서도 여전히 쉐퍼의 답변은 단순하고 도식화되어 있다. 단순함 속에 의외의 힘이 있지만 단순할수록 자칫하면 전투적이 된다. 세상 문화는 야만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치없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복음주의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핵심이다. 
 
한계와 의미
그리스도교는 힘이 아니라 갈망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본원적 가치를 향한 갈망 말이다. 
사막 교부들로부터 시작된 수도회 영성의 현대적 적용에 초점을 맞춘 인물은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머튼이다. 
수도회주의는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가치로 돌아가자는 복고적이거나 반동적인 운동이 아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조각을 찾자는 것이다. 
 
 
3부. 유산
12장. 예것을 익혀 새것을 깨닫다_베내딕토회 규칙의 현재적 의미
왜 오늘 베네딕토회 규칙인가?
베네딕토회 규칙은 독창적인 문서라기 보다는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가지 수도 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유연성, 개방성, 탄력성
 
공동체 만들기
베네딕토는 허물과 결점이 명백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살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영성이 구현될 수 있다고 이해했다. 베네딕터회는 기도와 노동, 공부, 식사와 휴식, 수면시간등을 균형있게 배치했다. 
 
듣기 위한 침묵
상대적인 침묵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자 말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는 성찰이다. 
침묵의 목적은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듣는 법을 배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침묵과 대조를 이룬다.(눅 22:61-62)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남이시기도 하다. 기록된 말씀 못지 않게 비언어적 텍스트, 침묵의 텍스트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침묵으로 완성되었다. 
 
청빈의 의미
베네딕토회가 말하는 청빈이란 개인의 재산권 대신 공동의 소유권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청빈의 핵심은 삶의 방향성이다. 순결과 복종 역시도 우리 인간이 가진 말초적인 육신의 욕망과 힘에 대한 재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무모하게 시도하는 장소다. 이성과 합리, 이 땅의 구조를 넘는 불가능에의 요구를 실천하는 장소다.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교회가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때에 체험하는 신비다. 가난이란 물질이 주는 영향력을 포기하는 저항이다. 
 
복종, 부름받은 대가
복종은 결국은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참다운 복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이란 값없는 은혜를 남용하는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제자되기란 값없는 은혜를 향유하는 자리에 서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삶이다. 
자본과 소비 중심의 세계에서 단순한 삶, 소박한 삶을 사는 것도 복종의 한 모습이다. 
 
환대, 수도회 정신의 정수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타락한 세속을 멀리하는 공동체와 세속에서 찾아오는 낯선 나그네를 기꺼이 맞아주는 공동체가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라는 것은 긴장을 유발한다. 
 
오늘에도 적용가능한가
현대의 소비주의, 욕망의 무한 긍정, 성취 지향의 문화에서 청빈, 순결, 복종, 환대가 가능할까 싶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가난과 차별이 여전하고 타자에 대한 편견이 지속되는 세상,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로 탄식하고 신음하는 지구 앞에 정의와 평화를 책임감있게 공유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짊어지고 풀어갈 과제다. 
 
 
13장. 전위에 선 저항자들_디트리히 본회퍼와 토마스 머튼
구도자의 길
간디의 평화주의, 흑인 인권문제, 유대인 문제와 같은 인종주의,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등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수도회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독일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8살때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형 둘이 전장에 나갔다가 둘째 형 발터는 사망하고 다른 형은 부상을 안은 채 돌아왔다. 본회퍼는 21살때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가 되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와 교류하며 교회와 사회를 바라보는 사유에 폭과 깊이를 더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25세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6년 나치정부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프랑스 피레네산맥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부모님 밑에서 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롱아일랜드로 이주했다. 5살때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15살때 아버지마저 악성뇌종양으로 사망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18살때 영적 강성을 경험했지만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간후 성적으로 방탕하게 지내다가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카톨릭 친구들과 교류하며 24살 때 세례를 받았다. 
 
핑겐발데, 제국의 한복판에서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취임하며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인종주의 정책에 저항하며 고백교회를 시작해 제국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고백하고 나치의 정책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핑겐발데 신학교에서 ‘신수도회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와 제자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회복은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주의에서 나올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것과 공통점이 없으며,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협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사랍들을 모을 때가 왔다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제국교회에 물들지 않은 예배와 성찬,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공동체의 목표는 공동체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배운대로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무력과 공포로 통치하는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가가 무엇인지를 동시대인들과 후대에 제시해 주었다. 이땅을 뒤덮고 있는 제국의 가치에 저항했고 제국 내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처럼 핑겐발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를 위해 연대하도록 준비시키는 공간이었다. 
 
겟세마네, 제국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1939년 토마스 머튼은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후 수도사의 길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프란체스코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전 친자 관련 소송문제로 거절당했다. 1941년 그는 가장 엄격한 시토회의 트라피스트 수도회로 향했다. 머튼은 수도회의 생활을 통해 평화, 침묵, 고독 등의 가치를 문장속에 녹여냈다. 1948년 ‘칠층산’은 큰관심을 얻었다. 그는 점점 더 심오한 관상의 삶으로 들어갈수록 세속에서 멀어지고 천상으로 이끌려 가기보다, 자신이 세상과 떨어질 수 없으며 세상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58년 루이빌의 교차로에서 갑자가 자신이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압도되었다. 그에게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몸부림에 동참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더욱 현실 세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갔다. 동서 냉전, 베트남전, 미국 내 흑인 인권이나 원주민 문제등 첨예한 대립과 불공정의 문제들을 직시하며 그 속에서 정의를 회복할 길과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경계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과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진정한 복종과 영적 갈망은 홀로 떨어져 자신의 내면 완성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분열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그 세계 안에 함께 거주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쓰기의 주제는 더욱 다양해지고 선명해졌다. 반전, 인권, 자본주의의 한계 등에 대해 글을 썼다. 
 
변방과 중심, 다시 만나다
핑겐발데 신학교가 폐쇄되고 나치의 감시가 심해져 미국의 친구들이 본회퍼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9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 남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후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참여했고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몇주전인 1945년 4월 9일 사형당했다. 
 
토머스는 루이빌 경험이후 교회, 국가 권력과 갈등을 겪었다. 1960년대 그가 쓴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에 묶여 출판될 수 없었다. 그에게 진정한 복종은 교회나 권위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복종이 침묵이 아니라 불의를 보고 눈감는 행동이 침묵이었다. 그는 영성가의 자리를 넘어 시대의 예언자의 자리에 섰다. 1966년 그는 전쟁, 인종차별, 가난 등의 사회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을 출판했다. 1968년 ‘마르크스주의와 수도훤의 관점’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구조의 혁명을 주장한 반면 수도주의는 의식의 변화를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고 주장했다. 
 
전위에 선 저항자들
본회퍼는 고통받는 대중들 속에서 함께 신음하는 그리스도를 위해 폭력의 방법을 선택했다. 머튼은 자본주의 제국의 긴장 없는 동행을 비판적으로 읽어가기 위해 마르크스가 사회와 역사, 종교를 읽는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수도사는 또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문화와 사회, 정세를 어떻게 읽어 내고 살아내야 하는지를 찾기 위해 앞서서 헤쳐 나가는 사람, 전위에 선 사람들이다. 오늘 제국의 가치와 지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을 일깨우는 수도사들이 더욱 필요하다.
본회퍼와 머튼의 삶은 깊은 영성 추구와 급진적인 제자됨의 실천이 결국은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수도사의 삶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만드는 삶, 더 이상 이 땅과 분리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14장. 오늘, 수도회를 다시 묻다_신수도회주의 운동
새로운 수도회 요청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수도회주의를 거부했다. 어떻게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라는 가치를 개신교에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수도회는 대항문화의 성격을 가졌지만 제도 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도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촉매였다. 그 제도 교회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수도 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은 반드시 필요했다. 
핑겐발데에서 시작된 신수도회주의는 독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국가 주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타협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이들은 제국의 중심이 아닌 제국의 주변부를 향했다. 
 
파편화된 사회와 공동체의 도덕
1998년 조너선 윌슨은 ‘파편화된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라는 책을 통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책 ‘덕의 상실’을 분석하면서 신수도회주의를 정의하는데 디딤돌을 놓았다. 윌슨은 현대 교회가 문화의 파편화와 계몽주의 프로젝트 실패의 연장선 속에 있다고 보았다. 
매킨타이어는 현대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가 아닌 파편화된 사회라고 도발한다. 전통이 사라진 곳엔 야만이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가져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기대어왔던 근대 계몽주의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근대가 약속한 진보 대신 암흑이 깊게 드리웠다. 매킨타이어는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틀림없이 매우 다른 성 베네딕토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의 야만이 쓸고 지나간 부조리한 자리에 누구인지 모를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할 공동체를 기대했다. 
제국은 자신들의 지배적인 문화를 강제하며, 힘에 의한 지배를 추구한다. 그 가치에 저항하기른 쉽지 않다. 그 야만의 제국은 외부의 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의 삶에 익숙하게 뿌리내렸다. 유럽인들은 자신들 내부에 자리 잡은 야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진보와 근대화의 이름으로 식민 침탈을 정당화했다. 오랫동안 제국이 약속하는 풍요와 제국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인 폭력을 방관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매킨타이어는 유럽 문명이 마주한 전대미문의 암흑기에 시민성을 갖추고 지적이며 도덕적인 삶, 곧 덕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 지역 공동체는 제국이 지배하는 가치를 거부하고 그 너머의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이에 윌슨은 또다른 베네딕토를 기다리는 일을 새로운 수도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읽었다. 
 
교회와 세속 문화 사이의 긴장이 상실되어,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닮아 갔다. 국가와 교회 모두가 확장을 위한 효율과 통제를 추구했다. 가장 효율적인 지배와 통제의 방식은 전체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비단 나치즘이나 파시즘에서만 발견되는 양상이 아니다. 효율과 효과를 극상의 가치로 놓고 다름과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한 근대성의 부정적 특성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곳이 되었고, 성장을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관리방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실천의 장이 되었다. 또한 교회는 국가주의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혹은 내밀하게 지지하는 정신적 지지 세력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지나치게 친밀하게 얽히면, 제국 너머의 가치를 추구할 고등 종교의 자리는 줄어든다. 
 
공인과 제도화를 경험한 이래 교회는 역사 속에서 늘 세속 문화에 개입해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에 제국의 중심부, 심장을 향한 추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패배적, 도피적, 심지어 급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현실에서 선택해야 할 길은, 교회의 엣 영향력 회복이 아니라 제국과 교회가 긴장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리이다. 그 자의식이 신수도회주의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신수도회주의는 교회의 세속화를 자각하고 자발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사들의 자취를 따라, 21세기 제국 문화 속에서 같은 자각을 가진 이들이 건설해 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새로운 수도회의 열두가지 표지
셰인 클리어본의 ‘심플웨이’와 조너선과 레아 윌슨하트그로브 부부가 시작한 ‘룻바하우스’, 심플웨이와 룻바하우스 모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인종과 계급 분열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공동체다. 그들은 제국 내에서 버려진 곳으로 이주했다. 스스로 중산층의 혜택을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 
 
1) 제국의 버려진 곳으로 이동한다.
2) 공동체 구성원 및 가난한 이들과 경제 자원을 공유한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겸손히 복종한다. 
4) 공동체의 규칙을 공유하는 구성원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산다. 
5)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6)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공동생활을 발전시킨다. 
7) 마태복음 18장을 따라 지역사회의 폭력과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든다. 
8) 교회와 공동체 내의 인종적 분열을 애통해하고, 정의로운 화해를 적극 추구한다. 
9)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돌보고 지역 경제를 지원한다. 
10) 부부와 자녀들 및 독신자들을 지원한다. 
11) 오랜 수련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삶과 공동체 규칙을 익힌다. 
12) 관상 생활을 훈련하는데 헌신한다. 
 
이 12가지 표지의 특징적 범주
첫째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향한다. 제국의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향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역 공동체의 연계를 강조한다.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파라처치가 아닌 프로처치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셋째 공동체 규율과 개인의 덕성을 훈련한다. 
 
이 운동은 수비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가치에 젖어 있는 제도 교회이 현실을 오랜 과거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한다. 개신교의 열광적이고 분주한 이미지 또는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도 포함한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 전부라고 상정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다른 모습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에,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끈다. 
 
대안이냐는 질문에 대해
제국이 정해 놓은 틀과 방식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파격한 형태의 저항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인 수도사가 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수도사의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표면적으로는 수도사 제도를 없앤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사와 같은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성, 타자를 향한 배제 대신 환대, 폭력과 갈등 속에서의 평화 추구, 지구 공동체의 환경에 대한 책임은 물질 만능과 무한 경쟁의 사회속에 개개인 모두가 성찰하며 살펴야할 주제들이다. 
 
 
나가는 말
수도원은 제국의 가치와 삶에 대한 저항이다. 제국의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너머를 시도해 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다르게 살기, 거슬러 살기는 오늘날 가장 어렵고 거대한 저항이다. 소비가 미덕이고 자본이 가장 강력한 종교가된 시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그 구조에 저항하는 건 웬만한 작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도사가 보여주는 삶의 키워드는 주변성을 유지하며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지키는 것이다. 제국의 중심부를 향하려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주변으로 가는 삶 말이다. 
주변에서 생성되어 마침내 중심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불어난 것, 그것이 수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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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선교(손창남, 죠이북스)

 

 

1. 풀뿌리 선교란 무엇인가

1. 난타차이 목사 이야기 

홍성철 목사 뉴질랜드 유학, 태국인 우본완 교수()에게 복음 전파, 약혼자 난타차이도 예수님을 믿게 , 이후 난타차이는 목사가 되어 태국의 유력한 복음주의 지도자로 성장

- 볶음밥(gospel rice)

 

2. BL 이야기

이상훈 교수(한국학 중앙 연구소) M국의 BL에게 제자훈련, 이후 남편에게도 복음 증거

 

3. 풀뿌리 선교의 다섯가지 특징

1)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갖지 않음

2)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함

3)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만남

4) 사역적 전문성을 갖춤

5) 자신의 삶에서 진정정을 보임

-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보다 중요한 것은 전도자인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4. 풀뿌리 선교인가

-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용어에서 영감을 받음

-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은 로마 제국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있었으며 여러 민족에게 다가가고, 자기 옆으로 다가온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있었다

 

핵심 : 일반 성도가 해외로 가는 일이 많아진 지금, 선교사라는 정체성 없이 세계에 흩어져 선교를 감당하는 풀뿌리 선교가 더욱 중요해졌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풀뿌리 선교

1. 흩어진 사람들

11:19-20, 선교란 타문화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4:25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11:20에서는 예수(큐리오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 유대인 디아스포라 바나바와 사울

사도행전 초반에 교회에서 주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실행할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바나바를 보낸다

바나바와 사울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났고,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3. 풀뿌리 선교 모델과 - 선교 모델

랄프 윈터 

- 소달리티(Sodality) : 다른 곳으로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구조(선교단체)

- 모달리티(Modality) : 목양하는 사역 구조(지역교회)

 

4. 모델의 비교

 

5. 계속되는 풀뿌리 선교

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사역

- 이들은 아볼로를 훈련시킬 정도의 전문성이 있었다

2. 빌립의 사역

- 빌립은 이후 가이사랴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의 딸들도 귀한 사역을 감당했다.( 21:9)

3. 에베소의 흔적들 

- 16:6 여기서 아시아는 튀르키예 서쪽을 의미,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의 2년간의 사역으로 여러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1:7-8)

 

핵심 : 성경에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사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선교 외에도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모델이 분명히 존재한다

 

 

3. 고대의 풀뿌리 선교

1. 선교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의 선교

가톨릭 사제들을미시오라고 불렀는데 이는보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미토에서 나온 표현으로 이후에 영어의미션’, ‘미셔너리 어원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비록 타문화 사역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17세기 이후에 나타난 선교사들처럼 전혀 모르는 언어를 배운다든지 성경을 번역한다든지 필요가 없었다

 

- 민족 이동, ‘하나님 나라가 반격을 가하다-역사에 나타난 시대’(랄프 윈터)

- 비자발적으로 가기, 게르만족의 이동

 

2. 아시아 지역의 선교

로마 제국 동쪽으로의 복음 전파, 로마 도로, 실크로드

아리우스파 이단 논쟁, 이후 이들을 동쪽으로 가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만들어 당나라에 경교를 전파했다

 

3. 대항해 시대의 선교

보보이론(Blinked out, Blinked on), 전기가 잠시 나갔다가 얼마후 다시 들어오는 현상

- 중세시대의 선교 , 장원 경제체제에서 상인들의 역할 축소, 이슬람의 강력한

 

- 십자군전쟁, 기독교는 이슬람과 더욱 멀어졌지만 유럽과 사라센 제국 사이의 교역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 주었고,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

 

- 선교의 황금기,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 사제들(주로 수도사들) 파송했다.  

미시오들은 시간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보다 선교지에 오래 머물렀다.그들은 대부분 한곳에 정착해서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을 전했다

 

4. 선교의 황금기가 가져다준 영향

윌리엄 캐리의 논문, ‘이방인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에 관한 질문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면서 문제도 많이 발생했다. 선교 기지를 통한 사역으로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도록 했고 현지 문화를 말살하는데 앞장섰다.(잉카 문화) 이전에는 자연적으로 풀뿌리 선교가 이루어졌다면 이제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만 선교 사역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선교의 이원론)

 

5. 모라비아 교도들의 선교

진젠도르프 백작이 만든 헤른후트 공동체,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서 직접 선교비를 조달했으며 선교지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았다

 

핵심대항해 시대가 되면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가 활발히 일어났지만 이전에는 선교사라는 직함없이 흩어져 성도들에 의한 풀뿌리 선교가 계속 되었다. 그런 풀뿌리 선교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행한 해외 선교에 나타난다

 

 

4. -현대에 등장하는 풀뿌리 선교의 열매

1. 구마모토 밴드와 삿포로 밴드

- 일본의 근대화, 난학의 발전, 난학은 네델란드를 의미하는 화란에서 학문이라는 의미로 의학과 과학, 그리고 기술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지식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 구마모토 밴드, 구마모토 양학교에 제인스 대위가 와서 근대 무술과 영어, 서양문화를 가르쳤고 평신도로 성경 공부와 기도모임을 진행했다

 

- 삿포로 밴드, 일본은 홋카이도 농업 국립학교에 클라크 박사를 초청한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있는 조건으로 초청에 응한다. 클라크 박사는 짧은 1년의 시간동안 영향을 미쳤다. 이후 농업학교 2 입학생으로 우찌무라 간조가 들어와 영향을 받았다

 

- 요코하마 밴드

 

2. 식민지에 영향을 그리스도인들

- 인도네시아의 안팅, 현지인 전도에 힘씀

 

- 조선에 영향을 일본의 그리스도인들, 다우치 치즈코 그녀는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웠고 윤치호와 결혼하여 조선의 고아들을 돌봤다

 

3. 직업을 위해 흩어진 사람들

-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 따갈로그오와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영어교사느 해외에서 가정부로 일함

 

- 홍콩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여성들

 

핵심 : 본격적인 제도권 선교가 진행되었던 지난 200년의 선교 역사 속에서도 일본에 제인스 대위, 클라크 박사 등과 해외 취업을 통해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사역의 열매가 많았다

 

 

5. 바이끄 이야기에 등장하는 풀뿌리 선교

  1. 바이끄의 여정
  2. 양동철 형제
  3. 어머니, 아버지라 불린 그리스도인
  4. 장대순 집사님
  5. 구원이라는 고리의 부분만

풀뿌리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고리 가운데 부분을 감당하며 자기에게 주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핵심 : 신실한 무슬림이었던 바이끄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그녀를 돕는 주변의 손길이 많이 있었다. 풀뿌리 선교란 구원이라는 고리 중에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6. 직업 선교와 풀뿌리 선교

  1. 직업 선교의 다섯 가지 유형

 

  1. 4유형 선교인의 세부 유형

 

  1. 5유형 선교인의 세부 유형

 

  1. 인도네시아에서의 가슴 아픈 경험
  • 2유형 선교사들이 3유형 선교사 혹은 4유형 선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발생해 서로에게 상처를

 

  1. - 선교와 풀뿌리 선교의 화합

 

핵심 : 직업 선교의 다섯 가지 유형 4, 5유형이 풀뿌리 선교 모델에 해당한다. 선교인이란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면서 전문 직업인으로서 타문화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다.

 

 

7. 풀뿌리 선교의 사역적 전문성

  1. 사역적 전문성의 필요

Language Acquisition Made Practical(LAMP)에서 제안한 언어 평가 단계

0단계 : 여행객 언어 수준

1단계 : 생존 언어 수준

2단계 : 일반적인 직장 생활이 가능한 수준

3단계 : 자신의 전문 지식을 전달할 있는 수준

4단계 : 현지인 전문가가 구사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수준

5단계 :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

 

  1. 사역적 전문성의 다섯 단계

0단계 : 사역적 전문성이 거의 없는 단계

1단계 : 개인 전도가 가능한 단계

2단계 : 양육이 가능한 단계

3단계 :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인도할 있는 단계

4단계 : 신자들의 공동체를 인도할 있는 단계

 

  1. 타문화 사역에 대한 이해

행동양식 : 사람들이 행동하는 모든

가치관 : 한국(나이), 인도네시아(체면)

믿음 : 이슬람(접대)

세계관 : 문화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 세계관에서 믿음이 나오고 믿음에서 가치관이 나오며, 가치관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행동하게 된다.

 

  1. 최악의 풀뿌리 선교의 사례
  • 교수 이야기, 파키스탄의 무슬림 학생에게 교회 게스트 하우스를 내어주면서 새벽기도에 참석하라고
  • 돼지고기를 먹어야 참된 기독교 신앙?, 회심한 무슬림 친구에게 회심의 증거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함

 

  1. 다윗의 물맷돌처럼
  • 다윗은 물맷돌을 던지는데 달인이었다.
  • 다윗왕이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기술자를 소개하며 사람들을 '유능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핵심 : 풀뿌리 선교를 한다는 것이 사역적 전문성이 낮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역에 따라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8. 풀뿌리 선교의 시대적 요청

  1. 시의적절한 풀뿌리 선교
  • 2 세계 대전 이후 선교적 상황의 변화

 

  1. 기독교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
  • 1914 1 세계대전, 1936 2 세계대전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 2 세계 대전 이후 피식민지들의 독립, 이로 인한 민족 종교들의 부활, 선교사들이 비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

 

  1. 세계적인 도시화
  • 도시에 산다는 말은 단순히 삶의 장소가 지리적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 이로 인한 선교지 생활비의 증가(임차료, 생활비, 교육비, 활동비 )
  • 많은 외국인들의 거주로 선교사들이 더이상 외국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웃들과 접촉하기 위해 창의적인 방법들을 동원

 

  1. 세계 기독교 중심의 남진
  • '글로벌 사우스', 이는 문자적 지리적 중심의 이동이 아니라 기독교 인구 분포의 변화를 말한다. 이제 3세계는 더이상 선교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 세계적인 이주
  • 세계적인 인구의 이동
  • 우리나라 사람가운데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은 800만명 정도로 남한 인구의 15% 해당한다.
  • 현재 한국에 들어와있는 외국인 수는 200여만명으로 직업 170, 결혼해서 이주한 사람 20, 유학생 18만명
  • 한국에 있는 외국인 비율은 이미 인구의 5% 넘었기에 이미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있다.
  • 종족 무지(tribe blindness) : 타문화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미국 남부의 한인교회 멕시코 선교를 준비하여 열심히 봉사하지만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멕시코 직원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못함

 

  1. 풀뿌리 선교가 해답

1)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 속에서의 풀뿌리 선교

  • 선교사라는 정체성이 없는 일반 성도가 자신의 직업을 통해 타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풀뿌리 선교에 대해서는 아직도 세계가 활짝 열려있다.

2) 세계적인 도시화에 적합한 풀뿌리 선교

  • 비용의 증가 문제에 대해서 풀뿌리 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비량 선교를 하기에 문제를 극복할 있다.

3) 기독교 중심의 남진 상황에 적합한 풀뿌리 선교

  • 파송국과 선교지의 경제력 차이가 늘어날 수록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4) 세계적인 이주 상황에 적합한 풀뿌리 선교

  • 로마제국 말기 게르만 민족의 이동 시기에 기독교는 게르만족 사이에 이미 널리 분포
  • 이제 선교지와 피선교지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모든 성도가 타문화로 가거나 타문화로부터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핵심기독교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과 도시화, 세계 기독교 중심의 남진, 세계적 이주 등과 같은 선교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해결책은 풀뿌리 선교다.

 

 

9. 풀뿌리 선교의 확산을 위한 전제

  1. 성도들의 이해
  • 풀뿌리 선교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선교적으로 사는 것이 준비되어야 한다.
  • 매우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들, 우리가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예수를 전염시킬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상, 변화 vs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자의 증상, 변화)
  • 타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상징 빼앗기-symbol theft)
  •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대한 이해와 헌신,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위험을 무릎쓰고 오지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 섬김을 위한 유능함과 기쁜 마음
  •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선교지에 간다고 해서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만약 자기의 본국에서 선교사가 아니라면 배를 타고 간다고 해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허드슨 테일러)

 

  1. 지역 교회들의 이해
  • 선교적 상황 변화에 대한 이해
  • 풀뿌리 선교에 대한 이해, 지역교회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선교적 체질을 강화시켜야 한다.

 

  1. 제도권 선교사들과 선교 단체들의 이해
  • 풀뿌리 선교를 주장하는 것이 제도권 선교를 무시하거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비싼 자동차를 만들어 주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어렵게 부품을 조달하기보다 현지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운송수단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핵심 : 선교는 열정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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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복음주의(데이비드 베빙턴, 한들)
 
 
서문
이 책의 임무 1) 사회에 끼친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을 살펴보는 것, 2) 복음주의적인 종교가 환경에 의해서 형성되는 방법들에 대해 연구
  • ‘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순수한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 종교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동시에 주변 환경에 의해서 언제나 영향을 받아왔다.’(에드워드 기본)
 
역자 서문
이 책은 영국의 복음주의 자체의 변화와 복음주의가 영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 대중 문화가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 베빙턴이 정의한 복음주의의 4가지 특징
  1. 회심주의(conversionism) :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삶이 바뀌어야 한다. 
  2. 행동주의(activism) : 복음을 실현하려고 노력
  3. 성경주의(biblicism) : 성경의 권위를 강조
  4. 십자가 중심주의(cruicentrism) :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강조
 
웨슬리를 중심한 18세기 복음주의자들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는 중에 회심을 강조하며 복음 전파를 강조했고, 에드워드 어빙을 비롯한 19세기 전반기 복음주의자들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천년설과 성경 문자주의등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이 낭만주의는 19세기 후반에 케직파 모임을 중심으로 전개된 성결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에서 19세기에는 복음을 실현하려는 행동주의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는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성경의 권위가 강조되었다. 20세기의 은사 운동은 초현실주의 예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베빙턴은 분석한다. 
 
제1장 복음의 설교 : 복음주의 신앙의 본질
  1. 복음주의의 특징들
베빙턴이 강조하는 우선권의 사각형(회심주의, 행동주의, 성경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을 통한 우리 죄의 용서인 칭의와 회심의의 시기에 우리 타락한 인간 본성의 갱신인 신생을 근본 교리로 강조했다. 
 
  1. 회심주의
회심에 대한 요청은 복음의 내용으로 회개해서 죄로부터 돌아서고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회심의 수단과 관련된 정통적인 교훈은 참된 회심은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찰스 피니와 같은  대중 부흥운동의 주도자들은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간섭을 부정하고 ‘자력-회심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1. 활동주의
회심을 경험한 이들은 다른 영혼의 회심을 위하여 노력하고 헌신한다. 
복음주의에 속한 이들이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섬기고 봉사했다. 
여기서의 활동은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을의 섬김을 포함하는데 이는 봉사활동, 전도활동, 심방과 설교, 선교활동으로 이어진다. 
“행동이 덕의 생명이고 세상은 행동의 극장이다.”(한나 모어)
 
  1. 성경주의
성경에 대한 그들의 헌신은 모든 영적 진리가 성경 안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의 결과이다. 
존 웨슬리는 “나로 한권의 책의 사람이 되게 하라”고 선언했다. 
 
  1. 십자가 중심주의
존 웨슬리는 “속죄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정당하게 이신론과 기독교 사이에 구별점이다.”라고 말했다. 
십자가 이외의 어떤 다른 주제를 신학적 체제의 지렛대로 삼는 것은 복음주의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을 오직 선민을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말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논쟁속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은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하다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회개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데서 옳았고, 칼빈주의자들은 거룩한 은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서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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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우리 가족 뿐입니다(김민철, 죠이북스)
 
 
한솔 교회에서 10여년간 자신의 가족만을 청중으로 인내하며 꾸준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목사님의 이야기는 같은 목회자로서 많은 생각과 감정을 교차하게 한다. 
나도 현재 선교단체 간사로, 더기쁨교회 담임목사로, 전주대학교 강사로, 한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매순간 내 안에서 꿈틀대는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을 추스리기는 쉽지 않음을 알기에 저자의 삶의 고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영혼이 주께로 나아오는 것이 천하가 나아오는 것으로 여기며 주어진 자리에 순종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세워나가는 그 일을 나도 인내하며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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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그리고 목사직(이재철, 홍성사)
 
- 목사가 목사에게 던지는 7가지 질문
1) 나는 지금, 왜 목사로 살고 있는가?
2) 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두 목회자 가운데 어느 유형인가?
3) 나는 목사이기 이전에 전도인인가?
4) 나는 얼마나 자발적으로 고독한가?
5) 나는 얼마나 인간을 알고 있는가?
6) 나는 나의 목회를 소위 더 큰 목회를 위한 징검다리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7)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있는가? 
 
이재철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마치고 사역을 하는 목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날카롭다. 이 질문을 동일하게 사역을 하는 간사들 하고 싶다. 먼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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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제시한 키워드는 ‘RABBIT JUMP’이다. 더 높은 도약을 준비하는 검은 토끼의 해라고 설명한다. 아래의 내용은 트렌드 코리아의 요약 내용을 중심으로 캠퍼스 사역의 환경에서 함께 고민할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다. 
3년간의 팬데믹의 출구에서 여러 경제적, 지정학적인 위기속에서 회복 or 침체로 나아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격변의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격변 자체가 아니다. 지난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The greatest danger in turbulent times is not turbulence, but to act with yesterday’s logic).”(피터 드러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선박의 존재이유는 아니다. 거센 풍랑이 예고되는 2023년이지만 어쩌면 그 위기가 우리의 근본부터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다. 
 
 
2023 10대 키워드
Redistribution of the Average(평균 실종)
Arrival of a New Office Culture: 'Office Big Bang’(오피스 빅뱅)
Born Picky, Cherry-sumers(체리슈머)
Buddies with a Purpose: 'Index Relationships’(인덱스 관계)
Irresistible! The 'New Demand Strategy’(뉴디맨드 전략)
Thorough Enjoyment: 'Digging Momentum’(디깅모멘텀)
Jumbly Alpha Generation(알파세대가 온다)
Unveiling Proactive Technology(선제적 대응기술)
Magic of Real Spaces(공간력)
Peter Pan and the Neverland Syndrome(네버랜드 신드롬)
 

1. 평균 실종 Redistribution of the Average

'평균'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집단을 대표하는 평균값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대푯값으로서 평균이 의미 있으려면 해당 모집단이 정규분포를 이뤄야 하는데,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분포의 정규성이 크게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이 기준을 상실하는 경우는 1) 양극단으로 몰리는 '양극화', 2) 개별값이 산재하는 'N극화', 3) 한쪽으로 쏠리는 '단극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평균 실종' 트렌드의 배경은 구조적이고 추세적이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속성을 지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 넘도록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경제·사회·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가 가속화됐다. 각종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준거집단이 다원화되고 개인 맞춤화 경향이 강해지는 가운데 시장의 전형성이 사라졌고, 규모의 효율에 극도로 좌우되는 플랫폼 경제와 경쟁의 외연이 넓어지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발달하면서 승자독식의 쏠림이 심화됐다.
평균 실종 트렌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엄중하다. 평균으로 표현될 수 있는 무난한 상품, 평범한 삶, 보통의 의견, 정상의 기준이 변화하고 있다. 정규분포로 상징되는 기존의 대중(mass) 시장이 흔들리며, 대체 불가능한 탁월함. 차별화·다양성이 필요한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 일 것이다. 양극단의 방향성에서 한쪽으로 색깔을 확실히 하는 '양자택일' 전략, 소수 집단(때로는 단 한 명)에게 최적화된 효용을 제공하는 '초다극화' 전략, 마지막으로 경쟁자들이 모방할 수 없는 생태계(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승자독식' 전략이다. 평범하면 죽는다. 특별해야 한다. 평균을 뛰어넘는 남다른 치열함으로 새롭게 무장할 때 불황으로 침체된 시장에서 토끼처럼 뛰어오를 수 있을 것이다.
 
- 정규분포가 사라지고 양극화, N극화, 단극화로의 변화
- 라이프 스타일의 다양화로 개인 맞춤 시대이다. / 평균주의의 시대는 지났고 개개인성의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2. 오피스 빅뱅 Arrival of a New Office Culture: 'Office Big Bang'

우리의 일터가 송두리째 달라지고 있다. 인재가 떠나가고, 조직 문화가 바뀌며, 노동 시장의 시스템이 변하고 있다. 일을 둘러싼 변화가 매우 폭발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오피스 빅뱅(office Big Bang)'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오피스 빅뱅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현상은 퇴직 열풍이다. '대사직 시대'가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른 요즘, 한국에서도 이직이 경력 관리의 수단이자 직장인의 로망이 됐다. 이직과 퇴직 열풍 속에서 인재를 지키려는 조직 차원의 시도 역시 주목받고 있다. 연봉이나 성과금 인상은 기본, 젊은 직원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세부적인 복지가 눈길을 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경험한 재택근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원격근무 지원, 거점오피스 제공, 워케이션 기회 마련 등 물리적 공간의 변화도 작지 않다. 나아가 조직에 속하지 않는 제도권 노동도 증가하고 있는데, 디지털화로 인한 플랫폼 노동자와 슈퍼 프리랜서 규모의 증가세가 심상찮다. 긱 경제는 조직에서 이탈한 퇴직러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으며,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장도 성장하는 추세다.
오피스 빅뱅의 원인은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업무 방식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임금노동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으로 “회사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고 여기는 조직 동일시가 "조직의 성장보다 나의 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변화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앞으로 오피스 빅뱅은 직장 내에서 그치지 않고 개인·조직·시장의 변화를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일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해졌다.
- 코로나 이후 ‘조용한 퇴사’가 늘어나고 있다. '일은 충실히 하되,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회사의 평가나 경쟁과는 결별한다.’
- 조직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서로간의 소통을 통해 신뢰를 구축해나가야 하며 구체적이고 측정가능한 핵심성과지표를 마련해야 한다.
 

3. 체리슈머 Born Picky, Cherry-sumers

전례 없는 인플레이션과 자산 가치의 하락으로 소비 심리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세계경제 전체가 현대판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비용 대비 효용이 뛰어난 것만 쏙쏙 골라 매우 합리적으로 구매하려 한다. 흔히 구매는 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챙겨가는 소비자를 ‘체리피커(cherry picker)'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진일보하여 한정된 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알뜰소비 전략을 펼치는 소비자를 ‘체리슈머(cherry-sumer)'라고 명명한다. 불경기에 '짠테크' 소비가 확산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셈에 능한 요즘 소비자들이 나누하며고 쪼개는 실속소비는 과거의 불황 때와는 사뭇 다르다. 체리슈머는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딱 맞춰 구매하는 '조각 전략'으로 실속을 챙기고, 함께 모여 소비하는 '반반 전략'으로 절약을 도모한다. 그리고 '말랑 전략'으로 유연한 계약을 찾으며 리스크를 줄인다.
체리슈머의 등장이 최근의 경제 악화에 기인하는 것은 맞지만, 1인 가구의 증가로 작고 유연한 소비를 선호하게 되는 구조적 변화이자 앞으로 계속 발전해나갈 추세적 변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똑똑하고 창의적인 MZ세대들의 성향이 체리슈머 트렌드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체리슈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체리슈머를 불황 속에서 꼼수를 부리는 소수의 특이한 소비자로만 바라봤다면, 이제 그 생각을 바꿔야 할 때다. '문간에 발 들여놓기' 전략을 통해 브랜드 친숙도를 높이고, 가격대별로 촘촘한 제품군을 마련하여 다양한 소비자들의 니즈에 그때그때 대응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소비자들 역시 실속을 챙기면서도 소비자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매너소비자'의 덕목을 갖춰야 할 것이다. 소비자와 기업 모두 큰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있는 가운데, 그 이후를 준비하는 변신의 계기를 모색할 시점이 다가왔다.
 
-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이자 똑똑하고 창의적인 MZ 세대들은 그 어떤 세대보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즐긴다.
 

4. 인덱스 관계 Buddies with a Purpose: 'Index Relationships'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지인과 연락하던 시절은 가고, 다양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시대가 왔다. 수단이 본질을 바꾼다. 소통의 매체가 진화하면서 관계 맺기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 소수의 친구들과 진한 우정을 쌓아가는 것이 예전의 '관계 맺기'라면, 요즘의 관계 맺기는 목적 기반으로 형성된 수많은 인간관계에 각종 색인(index)을 뗐다 붙였다 하며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관계 관리'에 가깝다. 이제 현대인의 인간관계는 "친하다/안 친하다"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선망하는 '인친'-함께 덕질하는 '트친'-최신 뉴스를 알려주는 '페친'-동네에서 만나는 '실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이렇듯 요즘 인간관계는 여러 인덱스를 붙여 관리 되는 형태를 띤다는 점에 착안해 '인덱스 관계(Index Relationship)'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인덱스 관계는 1) 만들기, 2) 분류하기, 3) 관리하기의 3단계로 나뉜다. 먼저 관계 만들기는 과거처럼 학연·지연 같은 인연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혹은 완전히 우연에 기대는 '랜덤' 방식으로 형성된다. 둘째, 이렇게 관계를 만들고 나면 그 친분을 분류한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체가 다양한 만큼 그 관계의 친소도 매우 복잡하다. 다시 말해 관계의 중요도가 다차원적으로 구성되면서 관계의 '밀도'보다 '스펙트럼'이 중요해졌다. 마지막은 관계를 관리하는 단계다. 분류된 관계에 붙여진 인덱스를 뗐다 붙였다 하기를 반복하며 관리해나간다.
개인주의화되는 '나노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사회생활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는 가운데 관계 맺기의 양상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인간관계'가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이제 문제는 다양한 인덱스 관계가 사람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행복한 인간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느냐다.
- 목적이 관계보다 우선한다. 많은 사람과 얕고 넓은 관계를 맺기보다는 친밀함과 신뢰도가 높은 소수의 관계를 맺는 것이 행복감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 자기중심성이 강조되는 시대이기에 자신이 선택하고 끊을 수 있는 관계를 선호한다. 보안과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5. 뉴디맨드 전략 Irresistible! The 'New Demand Strategy'

어떻게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는 모든 비즈니스에 숙명처럼 주어지는 질문이다. 비슷비슷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품과잉의 시대'에 고객이 지갑마저 닫는 지금 같은 불황기에는 그 해답이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아무리 상품이 과잉이고 경기가 나쁘다고 해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에 소비자는 솔깃해지고 허를 찌르는 참신함 앞에서 지갑을 연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제품과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상향 표준화되는 시장 상황에도 불가항력적인 수요를 만들어내는 수요 창출 전략을 ‘뉴디맨드(New Demand)' 전략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상품을 개발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방법론을 가리킨다.
수요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그 발생 상황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용하고 있던 제품을 바꾸는 '교체수요'이고,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지 않던 제품을 구매하는 '신규수요'다. 이때 각 유형별로 뉴디맨드 전략을 펼치는 방식이 다르다. 교체수요는 1) 업그레이드하기, 2) 컨셉 덧입히기, 3) 지불 방식 바꾸기를 통해, 신규수요는 1) 전에 없던 상품, 2) 새로운 카테고리의 상품, 3) 마이크로 세그먼테이션에 기반한 상품을 통해 창출할 수 있다.
소비자가 열광하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궤도를 이탈하여 최대한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며 집요하리만큼 파고들고, 전복적 사고로 무장하며 훈련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독창적이고 앞선 기술이 적용된 상품이라 할지라도, 소비자지향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답은 항상 고객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 아이폰의 iOS냐 삼성의 안드로이드냐에 따라 사용하는 앱 생태계가 달라지므로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통해 고객을 잡아둘(Lock-in) 필요가 있다. 캠퍼스 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대상을 잡아둘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라. 
- 기술 혁신은'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과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구분된다. 파괴적 혁신 기술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게임체인저 역할을 한다. 우리들의 사역가운데 혁신 기술이 있는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뛰어넘기 위한 어떤 시도들을 하고 있는가? / 의도적으로 궤도를 이탈하여 최대한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며 집요하리만큼 파고들고, 전복적 사고로 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술과 브랜드와 상품을 재정의 함으로써 소비자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
 

6. 디깅모멘텀 Thorough Enjoyment: 'Digging Momentum'

단순한 취미라고 부르기에 부족할 정도로, 'ᄋᄋ에 진심인 사람'이 늘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괴짜로 보일 수도 있지만 본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몰두의 대상이 다소 특이하고 그 몰입의 정도가 꽤 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현실도피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시간과 돈과 열정을 투자하며 누구보다도 삶에 열심이다. 이처럼 자신의 취향에 맞는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트렌드를 ‘디깅모멘텀(Digging Momentum)'이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디깅모멘텀은 단지 취미 생활에 대한 트렌드가 아니다. '멀티 페르소나' 시대에 '찐자아를 찾으려는 열정 가득한 노력이자, 코로나 사태와 불경기 속에서 흔들리는 실존적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행복전환점을 찾으려는 삶의 매진이다.
디깅은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몰입하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컨셉에 열중하는 컨셉형, 2) 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몰두의 정도를 높이는 관계형, 3) 특정 물건이나 경험의 수집을 통해 만족과 과시를 추구하는 수집형이 있다. 디깅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엔터테인먼트·콘텐츠·취미·키덜트(kid+adult)등 관련 산업도 함께 크고 있다. 나아가 디깅러들의 ‘입소문힘(viral power)'이 강해지면서 일반 산업에서도 이들의 마케팅적 역할이 중요해지는 추세다. 특히 순발력, 마이너 감성의 주류화,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 수 있는 매체 전략 등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디깅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될지, 자아에 대한 치열한 몰입이 될지 명확한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일상과 디깅을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핵심은 성장이다. 자기 성장이라는 큰 지향점 아래에서 삶과 적절히 어우러질 때, '디깅'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진정한 발돋움의 '모멘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느끼는 행복도는 이미 가지고 있는 유전적 기질, 주어진 외부 환경과 더불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의 합으로 결정된다. 고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자율성을 높이는 것, 즉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인간의 행복은 마음속에 관심있는 대상이 존재하는 상태이며 그 대상을 향해 스프링처럼 튀어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됐을 때가 행복한 상태’이다.
 

7. 알파세대가 온다 Jumbly Alpha Generation

태어나 처음 말한 단어가 '엄마'가 아닌 '알렉사'라는 진정한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소비자가 등장하고 있다. 1995~2009년생을 일컫는 Z세대의 다음 세대, 2010년 이후에 태어나 13세 이하인, 초등학교 6학년보다 어린 '알파세대'가 바로 그 주인공이 다. X-Y-Z를 잇는 알파벳이 없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알파세대라고 명명했는데, A 가 아니라 '알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순히 2세대의 다음 세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의 탄생을 은유한다. 알파세대는 신세대의 기수인 1980년대생 밀레니얼 세대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길러졌으며, 코로나 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알파세대는 저마다의 매력을 존중하고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닌다. 자기중심성이 강해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고 믿는 까닭에 모두가 스스로를 셀러브리티이자 아키텍트라고 여긴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는 '틱톡'을 주요 SNS로 활용하고, '국영수코'로 불리는 코딩 학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더불어 '머니러시' 트렌드를 따르는 '자본주의 키즈'의 후예답게 소비와 투자를 아우르는 경제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고 있다. 팬데믹 이후 오프 라인 활동이 제한됨에 따라 '줌'을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으나 온라인에서 해소되지 않는 오프라인에서의 실제 활동에 대한 갈증도 크다.
이전 세대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한 디지털 환경에서 풍족하게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알파세대지만, 정작 "그들이 행복한가?” 하는 것은 이와 별개의 문제다. 이들의 행복지수는 OECD 최하위이며, 디지털 격차로 일컬어지는 양극화 문제 역시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 어린 세대의 행복에 부모와 학교와 사회 전체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알파세대의 미래가 곧 대한민국의 미래다.
- 틱톡, 로블록스, 다이소-인생네컷-마라탕-버블티
- 알파세대는 자기중심성이 매우 높고 남들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정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8. 선제적 대응기술 Unveiling Proactive Technology

돌도끼부터 인공지능까지, 인류는 기술 발달에 힘입어 차츰 쾌적한 삶을 누려왔다. 기술은 사람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지만, 지금까지는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이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맞춰 조작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술이 이용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스스로 파악해 미리 제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고객의 사용 흐름을 읽어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술, 나아가 고객이 필요를 표현하기 전에 고객을 위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술, 궁극적으로는 고객이 필요를 깨닫기도 전에 먼저 솔루션을 제공해 불편함을 해소시켜주는 기술을 '선제적 대응기술(Proactive Technology)'이라고 명명한다. 고객 데이터가 축적되고 이를 인공지능이 학습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맥락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선제적 대응기술은 이미 소비자의 일상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하루하루 적용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수준 또한 높아지고 있다. 소비자와 상호작용할 때의 주도성 (proactiveness)을 기준으로 그 적용 수준을 1) 고객의 사전적 대응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 2) 사용자의 맥락에 따라 기능이 자동적으로 맞춤 조정되는 단계, 3) 사용자의 필요를 예측해 해당 기능을 수행하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선제적 대응기술의 적극적인 확산이 기대된다. 소비자가 환호할 수 있는 선제적 대응기술을 선보이기 위해서는 고객의 행동을 분석해 데이터로 축적하고, 그로부터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추출한 후, 타이밍에 맞는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에게 선제적 도움을 주는 제품을 개발하려면 소비자행동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도 필요하다. 소비자가 모르는 욕구를 먼저 파악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상상력을 누가 먼저, 더 적합하게 발휘하느냐가 선제적 대응기술 경쟁력의 승부처가 될 것이다.
- 맞춤형 기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이해와 기술이 절대적이다. 일괄적인 방식의 훈련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대상의 수준이나 상황, 환경에 따라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 사역자의 능력이 중요하다.
 

9. 공간력 Magic of Real Spaces

공간의 힘을 다시 보라. 작은 개인 블로그부터 거대한 메타버스에 이르기까지 가상공간이 세상을 호령하는 시대지만, 가상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실제공간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흔히 가상공간을 온라인, 현실공간을 오프라인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실제공간은 단지 온라인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근본적인 토대이자 터전이다. 자기만의 매력으로 무장한 실제공간에는 아무리 정교한 가상공간도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힘을 '공간력'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간력은 1) 공간 자체의 힘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력', 2) 가상의 공간과 연계되어 효율성을 강화하는 '연계력', 3) 메타버스와의 융합을 통해 그 지평을 넓히는 ‘확장력'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공간의 인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1) 매장을 더 크거나 작게 하며 마치 중력처럼 고객을 끌어당겨 고객과의 거리를 최대로 가깝게 하는 방법, 2) 차별화된 고객 경험을 느끼게 하는 방법, 3) 지역 주민의 교류와 공감의 마당이 되게 하는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공간의 연계력을 높이려면 각종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1)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고, 2) 상품이 고객에게 이르는 퍼스트마일-미들마일-라스트마일-엑스트라마일의 전 단계에서 서비스 속도를 향상시키며, 3) 매장내 고객행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서비스로서의 리테일' 개념의 도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확장력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제 가상공간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유통의 공간을 넘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고객의 입소문을 유도하는 매체의 역할도 수행한다. 엔데믹 시대에 펼쳐질 공간의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테마파크와 같은 궁극의 경험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 공간은 사람을 이끌고, 머물게 하고, 느끼게 한다. 
- ‘일상이란 죽음으로 가는 지루한 통로’(자크 라캉)이며 지루함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비일상성으로 일상에서 볼 수 없는 환상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일상속에서 영원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는??

 

10. 네버랜드 신드롬 Peter Pan and the Neverland Syndrome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나이보다 어리게 사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 되고 있다.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사는 피터팬과 그 친구들이 사는 곳, '네버랜드'의 이름을 따서 우리 사회에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피터팬들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네버랜드 신드롬은 1) 공주세트나 포켓몬빵 같은 아이템을 구매하는 등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2) 외모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승진을 마다하면서까지 현 상태에서 더 나이 들지 않으려 하며, 3) 아이들처럼 쉽고 재밌고 명랑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세 유형으로 나뉜다. 우리 사회의 유년화는 단지 일부의 취향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사고방식(way of thinking)', 나아가 ‘생활양식(modus vivendi)'이 되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의 확산을 미래가 불안정하고 힘든 상황에서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으며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동반하게 된 생애주기의 구조적 변화에 있다.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면서 청춘의 기간이 길어진 가운데, 생애과정이 다양화되며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네버랜드 신드롬은 사회 전체가 유아화되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낳는다. 자기중심적인 주장만 강요한다든지, 생명이 없는 캐릭터에 집착한다든지, 문제 발생의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나 정부의 탓으로 돌린다든지, 자기 취향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등의 행동은 아동기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청년의 활기는 극대화하면서도 유아적 미성숙의 징후를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버랜드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다. 유아적이고 무책임한 자기중심주의가 아닌 청년의 신선함과 발랄함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 때, 우리 개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진정한 성숙이 가능할 것이다.
- ‘청춘이라는 나라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그 나라의 명예시민이 되고자 한다. 40대, 50대, 심지어 60대도 자기는 아직 청춘인 것 같다고 말한다.’(파스칼 브뤼크네르)
- 어떻게 어린이 같은 삶의 경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경험의 지혜를 일생을 통해 켜켜이 쌓아 올려갈 수 있을까? / 청년 대학생만이 아니라 동문들에게 여전히 네버랜드(죠이어)의 삶을 꿈꾸고 살아가게 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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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감정론(조나단 에드워즈, 부흥과 개혁사)
 
 
이 책 신앙감정론은 예일 대학교 출판부의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27권중 1권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편집자 서문
에드워즈는 이 책을 통해서 “성령의 임재 여부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라는 청교도 개신교의 중심적인 질문과 씨름했다. 그는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종교적 부흥이 제기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1. 역사적 배경
에드워즈는 18세기 초반 자신이 경험한 여러 부흥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감정론의 내용을 전개한다.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얻게 되는 복음 진리에 관한 새로운 감각(new sense) 또는 새로운 확신(new conviction)에 대한 것이다. 새로운 감각을 통해 복음의 진리성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봄’ 또는 직접적 인식의 체험은 ‘마음의 감각(the sense of the heart)이라는 에드워즈 사상의 원천이 된다. 이 새로운 감각의 의미를 해석하는 확신 교리가 바로 ‘감정론’의 주요사상이다. 
 
에드워즈는 이 책을 통해 소극적인 증거와 적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소극적인 표지는 부흥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손이 임재하셨는가를 판단하는 참된 기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사건이나 그 사건의 특징들이다. 반면에 적극적인 표지는 부흥 현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어떤 통일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에드워즈는 이것들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실 때 나타나는 확실한 표지로 규정했다. 
 
  1. 논의 : 은혜로운 감정의 열두 가지 표지
‘감정론’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언어의 정확성과 생생함이다.
우리의 과업은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은 무엇이며 감정은 어떻게 일어나며 감정과 성령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리고 감정이 의지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감정을 판단할 수 있는 표지나 기준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은 영혼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향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향하든지 그 영혼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다. 
감정은 성향이 지성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감정은 지성의 생각들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으며, 일반적으로 의지의 탓으로 돌려지는 행위의 원천이다. 성향은 지성과 관계 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향은 자아가 판단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교리나 사상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은 영혼의 깊이에만 관련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오로지 지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참된 믿음은 대부분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 : 감정은 믿음에 필수적이며, 믿음의 본질 가운데 대부분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에드워즈의 입장은 감정은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만, 참된 감정뿐만 아니라 거짓된 감정이 있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따라서 작용들과 체험들의 방식이나 순서는 신적인 본질에 대한 분명한 표지가 될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 
 
소극적 표지
1) 감정의 정도
2) 몸의 격렬한 반응
3)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4)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5)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6) 사랑의 피상적 표현
7) 감정의 정도
8) 감정의 체험 순서
9)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10) 찬송을 열심히 부름
11) 자신의 구원 확신
12)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적극적 표지
1) 첫째 표지 : 성령의 내주 -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영향에서 비롯되는 감정만이 참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원칙에 기초
2) 둘째 표지 :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인식 
3) 셋째 표지 :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4) 넷째 표지 : 하나님을 아는 지식 - 거룩한 감정은 빛이 없는 열이 아니며 지성이 받아들이는 어떤 지식적 정보나, 영적 가르침이나, 어떤 빛 또는 실제적인 지식에서 비롯된다. 
5) 다섯째 표지 :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6) 여섯째 표지 : 참된 겸손 - 기준은 교만과 자기 영화를 낳는 ‘영적인 업적’이나 ‘크고도 압도적인 체험’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가운데서 생겨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7) 일곱째 표지 : 성품의 변화 - 이는 회심 즉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부패된 본성을 떠나는 것의 표지이다. 한 시간 동안 감정을 고양시키고 열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새롭고 영속적인 본성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감정은 은혜로운 것이 아니다. 
8) 여덟째 표지 :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감
9) 아홉째 표지 : 하나님을 두려워 함
10) 열째 표지 : 신앙의 균형
11) 열한째 표지 : 하나님을 향한 갈망
12) 열두째 표지 :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거룩한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반드시 영향을 주어야 한다. 
 
3. 신앙, 부흥운동 그리고 신앙감정
‘감정론’이 제공하는 공헌 세가지
첫째, 신앙을 신앙이 아닌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막는 길을 보여준다. 
둘째, 지식이 독특한 개인의 체험을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지식은 신앙의 영역안에서 보존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해 준다. 
셋째, 부흥주의적인 신앙에 대한 현재의 관심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초를 제공해준다. 
 
 
부흥운동가들은 진리가 일반적인 수준으로 퇴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긴급성과 심각성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에드워즈는 참된 감정은 지성의 빛이 없는 뜨거운 감정만이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순진한 부흥주의자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는 배움의 노력과 수고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직접적인 계시가 진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 의미가 아주 분명해서 사람이 뛰어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단호하게 이런 생각을 거부했다. 
 
“감정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감정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감정들이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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