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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는 1954년 쓰여진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에 기록된 과학과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다룬 내용이다. 세기가 바뀌는 이 기간동안 신학이나 과학 모두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램이 이야기한 많은 내용들을 수정해야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 있는 것은 그가 신학자로서 과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당시 신학과 과학의 대립되는 상황들 속에서 대화를 하고자 노력했고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내용이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 교회는 60여년전의 고민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젊은 지구론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성실한 자세로 학문에 임할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기존의 학문적 성과로 인해서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여전히 다스리시고 섭리, 보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과학교과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우리들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기에 현대의 어떤 과학 이론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면 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아니 더 나아가 온 우주가운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 비밀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서 발견된다면 우리는 도리어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1장. 기독교와 과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긴급한 필요성
초정통주의가 과학을 무시하는 것 만큼이나 종교적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도 어리석은 태도다.(37)

*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긍정적 관계
1. 창조 교리는 기독교 신학과 성경 신학의 근본을 이룬다. 
2. 과학은 계시의 빛이 필요하다. 
3. 계시는 과학의 관점이 필요하다. 
4. 과학과 신학은 모두 인류의 근본적 과업이다. 

2장. 신학과 과학의 충돌에 관한 분석
과학이란 자연과 자연현상에 관해 우리가 아는 대략적 지식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순수 과학과 혼합과학이 포함된다. … 신학은 거듭난 마음과 지성이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의 체계를 밝히는 학문이다. 
-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작품 혹은 피조계를 탐구하는 것이고, 신학자의 임무는 성경과 자연과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자연에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일치해야 한다.(53)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충돌
1. 신학자가 범하는 잘못
과학에 냉담하거나 의심하고 이해하지 못함 / 특정한 세계관을 과학 도는 성경과 동일시 하거나 창세기 1장의 일반적 주장에서 지나치게 많은 실증적 또는 구체적 정보를 추론 하는 것
2. 신학자와 과학자가 공통으로 범하는 잘못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어떤 과학 이론을 최종적인 것으로 선언하는 경우가 있다. / 신학과 과학 둘 다에 인간의 지식이 불완전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과학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
3. 과학자가 범하는 잘못
반종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 과학주의의 환원주의적 정신을 비판해야 한다.  / 목적론적 사고에 대한 과학주의의 비합리적 편견을 비판해야 한다. /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과학주의의 편견을 비판해야 한다.

- 만일 신학자와 과학자가 신중하게 각자의 과업에 충실하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세심히 공부하고 발언했다면,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비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불화 이외의 부조화는 그들 사이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구원자 사이에 가져다 놓곤 하는 쓸데없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3장. 기독교와 과학의 근본 문제들

1. 자연적 사물들에 관한 성경의 언어
1) 자연 문제에 관한 성경의 언어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대중적 언어다. 
- 보통 사람들의 언어
2) 성경의 언어는 현상적 언어다.
- 겉모습과 관련된 언어, 해가 뜬다.
3) 자연적 사물들에 관한 성경의 언어는 비주장적이다. 
- 성경은 사물의 실제 속성에 관해 이론화하지 않는다. 
4) 성경의 언어는 성경이 쓰인 시대의 문화를 계시의 매체로 사용한다. 
- 시간, 심리학 관련 단어(심장, 간, 뼈, 창자..), 의학 언어, 수학적 내용과 도량형, 지리적 용어

* 문화적인 것과 초문화적인 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1) 성경에서 자연적인 것과 직접 관련이 있는 모든 내용은 당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개념의 기준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2) 온전히 신학적이거나 교훈적인 내용은 초문화적 개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3) 우리는 성경의 초문화적 요소를 분명히 이해하고 언어사회학을 분명히 이해함으로써 문화적 형식 아래 있는 초문화적 요소를 판독할 수 있다. 


2. 자연에 관한 성경의 관점
1) 창조론이 매우 직설적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전능하신 창조자시다. 
2) 성경적 자연관은 또한 우주가 하나님의 섭리로 유지된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3) 성경의 일관된 창조론과 보조를 맞추는 것은 피조물에 대한 숭배를 일절 금지한다는 것이다. 
4) 성경은 자연의 규칙성은 하나님의 불변성이며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법칙임을 분명히 가르친다. 
- 자연의 균일성(p.96-7), 요리사가 햄을 구웠다. 오븐이 햄을 구웠다. 
5) 성경은 자연이 일과적일 것으로 전망한다. 
6) 성경은 자연을 시험과 심판의 영역으로 본다. 

3. 성경의 우주론
1) 우리의 기본 입장 : 자연적 사물들에 대한 성경 저자의 언급은 대중적이고 비장적이며 그들이 살았던 문화의 관점에서 쓰였다. 
- 우리는 과도한 열정을 품고 히브리어 단어나 표현속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나 현대 천체물리학의 개념을 찾으려고 애써서는 안된다.(107)
2) 성경의 우주론은 체계적이거나 주장적이지 않다. 

4. 기독교 자연철학
- 기독교 자연철학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 신학이 방향성을 제공하는, 폭넓고 포괄적인 자연 해석 방법 빛 체계다. 
1) 자연 철학의 필요성
- 자연에 대한 성경의 접근은 볼질적으로 종교적이며 신학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강조하지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과학은 풍부한 실증적 결과를 도출하지만 인식론의 형이상학과 신학처럼 더 큰 문제는 다루지 못한다. 
2) 기독교 자연철학의 요소
- 하나님은 자연의 세계적 근거이시다. 
- 자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 / 따라서 피조물을 그 운명으로 인도하고 피조물이 그 속성에 맞게 발달하도록 하며 피조물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다.(아브라함 카이퍼)
- 점진적 창조
3) 요약
- 하나님의 정신안에 개념이 존재한다. 
- 그다음 공허 혹은 무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에 의한 즉성적 창조 행위가 일어난다. 
- 다음으로 창조과정 즉 파생적 창조가 일어난다. 

4장. 성경에 예기된 과학적 사실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안에 파동이론, 원자이론, 첨단 과학 이론들이 예시되었다고 하는 여러 주장들은 성경안에 현대과학이론을 밀어넣는 것과 같다. 이는 진정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지지받기 위해서 성경의 특정내용을 오독하는 행동이 된다. 
- 성령은 성경 저자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적 틀과 언어로 참된 신학적 교리를 무오하게 전달하셨고, 그들에게 현대 과학의 비밀을 알리지는 않으셨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현대 과학의 비밀을 찾으려는 시도는 영감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153)

5장.  천문학
천체의 목적은 첫째로 시간을 알리고 빛을 비추는 것이며 둘째는 징조 역할이다. 
우주의 일과성을 입증하려는 가장 진지한 노력은 엔트로피 법칙에서 도출한 논증이다. 자연의 카드 섞기라고 할 수 있는 엔트로피 현상이 가리키는 것은 자연의 방향성이다. 에딩턴은 이를 시간 화살(Time Arrow)이라고 부른다. 

성경안에 등장하는 여러가시 천체의 기적들
- 여호수아의 긴 하루(수 10장)
- 아하스의 해시계(사 36장; 왕하 20장)
- 베들레헴의 별(마 2장)

6장. 지질학
경건한 태도를 지닌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며 자연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 그리고 자연에 목적론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성을 동반한 신앙은 과학이 타당하게 제기하는 질문을 수용할 넉넉한 여지를 두고 신앙의 영역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 독단적인 신학적 주장을 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198)

* 창조의 6일
1) 단순한 문자적 관점. 
- 주전 4000년 전이라고 보는 견해, 어셔는 창세기 족보와 다른 성경 자료를 취합하여 세상의 창조부터 그리스도까지 약 4036년의 시간 간격이 있다고 보았다. 이어 라이트풋은 어셔의 연대표를 살핀후 창조는 주전 4004년 10월 18일 부터 24일 주간에 일어났고 아담은 그리니치 자오선 동경 45도 기준 10월 23일 오전 9시에 창조되었다고 말했다. (201)
-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태초의 창조가 일어난 연대가 주전 4000년 경이라는 입장을 오래전에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 비그리스도인 학자 다수는-버트런드 러셀과 오즈번같이 유명한 이들도-보수주의 기릇도인들이 주전 4004년 창조설을 믿는다고 생각한다.(200)
2) 종교적으로만 해석하는 이론
- 창세기는 신학적으로는 참된 자연관을 제공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3) 홍수 지질학
- 홍수 지질학의 부흥은 제7일안식교 지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프라이스는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홍수 지질학의 중요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이들은 상대 이론의 논리적 오류를 드러냄으로 자신들의 이론이 옳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이론은 균일설이라는 현대의 골리앗에 당당하게 맞선 다윗으로 여겨졌기에 호응을 받았지만 그의 물맷돌에 골리앗은 쓰러지지 않았다. 
4) 연속적 격변
- 퀴비에가 주창하고 아가시가 수정한 이론으로 홍수와 같은 격변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새창조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는 이론이다. 
5) 국지적 창조
6) 시간 경과 이전 혹은 이상 시간 관점
- 성년 창조설, 하나님이 창조시에 어떤 사물들은 실제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7) 창조-파괴-재창조 이론 또는 복구이론 또는 간격이론
- 창세기 1:1과 2절 사이에 엄청난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8) 시대-일 또는 신의 날 이론 또는 일치론
- 창세기의 날을 시대로 해석
9) 회화일(Pictorial Day) 이론 및 온건한 일치론
- 창세기의 주목적은 신학적이며 종교적으로 그 소극적 목적은 우상숭배의 금지이고 적극적 목적은 우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고 우주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성,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함을 장엄하게 드러냄을 가르치는 것이다 
- 창세기는 사실 과학적이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창조기사에서 과학 자료를 찾으려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창세기의 언어는 과학적이거나 인과적이지 않으며 현상적이고 대중적이다. 
- 신학자는 하나님이 창조자시라는 것은 알지만 창조의 언제와 어떻게는 알지 못한다. 지질학자는 우주가 언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알지만 누가 창조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연의 창조자, 보존자, 지탱자, 공급자시다.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법칙이고 자연의 규칙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반영이다. … 모든 생명, 모든 종, 모든 지질 변화, 모든 지질학 법칙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267)

노아의 홍수는 성경 이야기의 자자가 살던 지역과 그의 관찰, 그가 지닌 정보 선에서는 보편적이었다. 또한 노아의 홍수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나란히 합력하여 이루어진 사건이다. 

7장. 생물학
생물철학은 진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1) 관념론 철학자 : 실재하는 모든 것은 영이나 정신, 혹은 가이스트이다. 물질 혹은 과학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적 세계의 연쇄적 표상들이 유형으로 확립된 것이다. 
2) 가톨릭 생물학자 : 하나님이 없으면 영적, 지적, 물질적 운동은 불가능하다. 직접 창조인가 진화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3) 극단적 초정통주의자 : 성경의 기록대로 즉성적 창조를 믿는다. 진화가 참이라면 성경은 거짓이다. 나는 진화론과 맞선다. 

러시아의 국정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진화론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과학의 창조 이론으로 보고 크게 반겼다. 진화론은 무신론과 윤리적 허무주의와 반신론적, 반성경적, 반기독교적 사고를 뒷받침하는데 사용되었디.(310)

진화는 완벽하게 입증된 법칙도, 무오한 것으로 확인된 법칙도 아니다…. 진화 이론은 개연성 진술이며 절대적 진리나 영속적 진리 같은 것이 아니다. 

과학의 역사는 일반화가 부서지고 무너져 온 역사다.(천동설->지동설, 뉴턴의 운동법칙->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 진화론에 필요한 제한은 무엇인가?
1) 진화는 결코 자연의 자기 창조가 될 수 없다.
2) 진화는 결코 우주에 대한 근본 설명이 될 수 없다. 
3) 진화는 자연 내의 에너지와 설계를 고려해야 한다. 

우주의 무대 전체가 생명을 위해 꾸며지지 않았다면 태고의 물웅덩이에서는 단 하나의 생명 세포도 등장할 수 없었다. 무엇을 근거로 이런 사실들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우주적, 화학적, 물리적 특징들-생명이 존재하려면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특징들-이 이 행성 한 곳에서 우연히 발생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인가?(328)

* 인간의 초월적 특성
1) 이성적 사고 능력
2) 도덕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
3) 미적 체계
4)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마음

많은 과학 이론들이 반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선언되었지만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용되며 아무런 악영향도 없다. : 대척점, 외과 수술, 백신 접종, 진통제와 마취제, 하수구, 피뢰침…

어떤 이론이 기독교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부정할 때 반기독교적 이론이 된다.(진화론, 행동주의 심리학, 실증주의 사회학)

8장. 인류학

인류학은 시간과 공간 속의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인류의 단일성은 기독교 신학의 중요 문제이다.(창세기, 롬 5:12-17; 고전 15:21-58)

초정통주의는 화석인류 연구가 비록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고는 있지만 연구 과정 전체가 매우 비과학적일 정도로 추측과 짐작, 공상적인 재구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인상을 만들어 냈다.(365)
필트다운 사건(두개골은 인간의 것이지만 턱뼈는 유인원의 것을 조작한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진화론을 지탱하던 지지대가 뽑혀 나갔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의 방법론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폭로가 가능했던 것은 오직 폭로에 사용된 방법론 덕분이었다.(369)

창조 기사는 전체가 비유적이다. 하지만 비유적이라고 해서 비역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창조 기사는 신화적이다. 신화는 특정 문학 형식으로된 역사다. 

타락은 인류 역사의 조용한 전제다. 
인간이 죄를 짓기 오래전에도 자연계에는 질병과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다. … 우리는 이 죽음과 질병과 피흘림이 모두 사탄의 타락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 생명이 생명을 잡아먹는 창조를 좋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는 좋음의 의미를 예단하는 주장이다. 자연의 순환은 놀라운 일이며 생명과 생명의 관계는 장엄한 자연의 균형을 이룬다. 

우리는 지성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이야말로 가장 많은 사실을 가장 훌륭하게 설명하는 해석이다.(407)

9장. 맺는 말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어떤 신념에 대한 부정 진술
1.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세계가 주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2.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인간이 주전 4004년에 등장했다고 믿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3. 복음주의자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또는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4.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진화가 신앙에 반한다고 믿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5. 복음주의자들이 물리학, 천문학, 화학, 지질학, 생물학, 심리학의 구체적 세부 내용에 대한 최종 판단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긍정진술
1. 기독교를 역사와 자연에서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2. 성경은 최종적인 과학 이론을 가르치지 않으며, 성경의 저자가 성경을 쓰던 시대와 장소의 문화의 관점에서 최종적인 신학적 진리를 가르친다. 
3. 자연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비주장적 또는 현상적이며, 기괴하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없다. 
4. 우리는 과학자가 과학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타당한 이유를 댈 수는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5. 기독교는 종교이지 과학이 아니다. 

10장. 해설(송인규)
이 책의 목적 : 과학과 성경에 대한 19세기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전통-과학과 성경 둘 다를 존중하는 태됴-를 다시금 살려 내야 한다는 것. 

* 램의 입장
1. 창세기 1장의 날과 관련하여 회화일 이론을 주창
2.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온건한 일치론을 견지
3. 점진적 창조야 말로 하나님의 창조 및 섭리 과정을 합당히 드러낸다고 봄.

- 성경의 언어는 일차적으로 대중적, 현상적, 비주장적이라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다. 물론 이는 성경의 언어가 반과적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전과학적이라는 뜻이다.(443)

* 이 책의 의의
1. 이 책은 점진적 차조론의 핵심 내용을 밝혀주는 교과서같은 안내서이다. 
2. 이 책은 점진적 창조론의 전체적 면모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3. 이 책은 무엇보다도 신학자의  저술이다. 
4. 램은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도록 돕는 매우 교육적이고 유익한 접근 방식을 시도한다. 
5. 이 책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실정에 매우 적실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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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배제되는 위험과 세상 전체로 침투하는 위험 모두를 극복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1장. 신앙의 기능 장애
* 상승 기능 장애(기능 축소와 우상으로 대체)
- 기능 축소 : 겉으로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여 전망하고 실천하나 실상은 그 내용과 추진하는 방법이 신앙의 핵심에 근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의 핵심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 우상으로 대체함 : “어느 날 예언자들이 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돌판에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금송아지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이상한 연금술을 통해 “내가 너를 승리하게 하리라”는 말로 변형되고 십자가가 적대감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사랑이 아니라 파괴와 폭력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 회귀 기능장애
1) 신앙의 나태함 : 유혹의 미끼, 체제의 힘(개인으로서는 결코 하려고 하지 않을 일들을 부대안에서 군인은 기꺼이 하고자 한다.), 신앙에 대한 오해(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게 하고, 그길을 인도하며,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의미를 부여할 때라야 고유한 과업을 수해하는 것이다.)

2) 신앙의 강요 
- 신앙이 억압의 수단이 되는 모든 경우, 사실은 신앙의 기능장애가 일어난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억업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온 이유 : 신앙의 왜소화(수단의 경시는 신앙의 왜소화로 이어진다. 그러 인해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형성하지 못하고, 신앙과 상관없는 가치에 의해 세워진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신앙에 의해 목표를 설정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수단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신앙이 현실에 부적절하게 보인다는 문제, 좁은 길로 가기를 꺼리는 문제

2장. 나태함
- 신앙이 나태해지는 이유 : 1)신앙인의 인격, 2)체제안에 갇혀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하여 신앙의 요구사항보다 체제의 규칙을 따름, 3)신앙자체와 관련
신앙의 네가지 기본방식 1)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2) 어떻게 실패에 대처할 수 있는가? 3)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않아도 되는가? 4) 왜 어떤 활동에 꼭 참여해야 하는가?

- 우리의 행동에 대한 신앙의 지침 : 개인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분별하는 것 : 전쟁을 개전함에 있어서의 정의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정의, 한 국가는 전쟁을 일으킬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쟁 자체는 부당하게 수행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이라 해도 우리는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윤리적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을 분간해야 하고 그러한 결정에 의거해서 행동해야 한다. 도덕적인 문제는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이다. 또한 적절하게 기능하는 신앙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을 넘어서 도덕적으로 탁월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 하나님이 우리 일의 의미와 관계를 맺는 방식 : 고용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 하나님과 협력, 보존

3장. 강요
오늘날 종교의 재부상은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 볼때 종교적으로 정당화된 폭력과 더불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공적 영역에서 종교를 약화 혹은 무력화 하고 더 나아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 표층적이면서 열정적인 신앙의 실천은 폭력을  촉진하기 쉬우나 심층적이면서 전적으로 헌신된 실천은 평화의 문화를 낳고 유지된다. 

* 유일신 신앙
- 유일한 신의 도덕적 형이상학적 성격에 관한 진리 주장이 보편성을 띠면 불가피하게 공적 주장이 된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주장은 특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든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든 이와 반대되는 주장과 마주칠 때 충돌을 야기한다. 

유일신 신앙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특징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속하는 데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포함한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믿음의 일부가 폭력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이 폭력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오용이다. 이러한 행동은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표층적이게 만듦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예언자적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은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하여 우리의 노고를 축복하고 우리의 실패를 위로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도덕적인 지침이 되어 주며 우리의 삶과 활동을 지지하는 의미의 체계를 제공해준다. 

예언자적 종교에는 두가지 근본적인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것과 세상으로 회귀하여 그 메시지를 따라 이땅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과정 모두 필수적이다. 상승이 없으면 전할 것이 없고, 회귀가 없으면 전할 대상이 없다. 

* 구속
-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적인 행위로 악한 자들을 정복하러 세상에 오신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 

4장. 인간의 번영
낙관주의(푸투룸)는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
희망(아드벤투스)은 외부,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과 연관

* 인간의 번영을 파악하는 세가지 단계 :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보편적인 선행, 경험적 만족감
- 델반코는 무한하신 하나님에서 구원자 미국이라는 이상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기자신이라는 소멸점에 이르기까지 희망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 예언자적 종교에는 두가지 근본적인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것과 세상으로 회귀하여 그 메시지를 따라 이땅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과정 모두 필수적이다. 상승이 없으면 전할 것이 없고, 회귀가 없으면 전할 대상이 없다. 

*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도전
1)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번영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번영을 위한 열쇠라는 주장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은 하나님이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5장. 정체성과 차이
-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원화된 세상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수많은 행위자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1) 현대사회의 네가지 주요 특성
- 자발성, 차이, 다원주의, 상대적 자족

2) 이러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가운데 부적절하게 보이는 세가지 방식
- 적응(자유주의적 프로그램), 순응의 방향의 반전(후기 자유주의 프로그램), 세상으로부터 철수(분리주의 프로그램)

3) 보다 나은 대안
- 떠나지 않으면서 다르게 사는 것 :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의 어떠한 요소들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어진 문화안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문화의 요소중 그리스도인이 거부해야 할 것들이 있다.
-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 환경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네트워크이다.(137)
*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와 해야하는 한가지
-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적응도 불가능하다 : 그렇다면 문화적 변화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과 차이를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기독교의 정체성은 외부적인 것을 거부하고 싸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핵심요소를 포용하고 강조함으로 생긴다, 외부에 있는 대상과의 관계는 사랑으로 지배되어야 한다, 경계는 투과성이 있어야 한다) 
- 참여가 답이다 :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의 전존재를 통해 세상에 참여하며, 이 참여는 문화의 모든 차원과 연결된다.(그리스도인의 참여는 문화의 모든 영역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하나도 완전히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영역에서 선을 추구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보존하고 강화한다. 범위로는 전체적이지만 정도로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제한은 개인적 제도적 혹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한 저항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유한성과 연약함 때문에 나타나며 변화를 추구하면서 선한 방법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나기도 한다.)

6장. 지혜를 나누며
- 이 시대는 만족의 근원은 상관하지 않고 만족을 경험하는 것, 즉 자신의 만족만이 중요하게 되었다. 
- 다원적인 세상에서 모든 종교의 주된 사명은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희망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사람을 살게 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 지혜는 조언의 작은 조각, 삶의 방식, 거룩한 인격등의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 왜 지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가?
- 그리스도인에게는 지혜를 나눠야 하는 의무가 있다. 지혜를 나누는 의무는 이웃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안에 거하는 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 지혜를 나누는 핵심적인 방법(증언)이 아닌 것은?
- 증인은 무엇을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다, 증인은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이 아니다.(무언가를 팔고자 하는 이는 상품을 구매자의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라도 판매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처럼 지혜를 사고 팔면 지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형성하기 보다 기껏해야 마음속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쓰일 뿐이다.) 뭔가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증인은 단지 산파가 아니다.

- 주는 것과 받는 것, 이 두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지혜를 나누는데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 자신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지혜를 나눠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지혜를 나눈 통로가 되는 것이다. 
- '예언의 역전’이 필요하다. :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외부로부터 그들의 신념과 관행을 흔들어 놓을 예언적 자극과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아니 그런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지혜에 좀더 일치하게 순간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 

- 우리는 지혜가 사람들의 삶에 자리잡게 되는 것을 돕기 위해 사람들을 기만하고 강압해서 지혜를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된다.
- 우리는 지혜를 통해 기꺼이 회개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지혜가 매력적이고 합당하고 유용한 것임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 우리는 신앙의 지혜를 입맛에 맞고 먹기 쉬운 지혜의 조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려는 계획속에 삽입하여 적용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7장. 공적 참여
종교가 그 힘을 잃을 것이라는 세속화론은 잘못되었다. 다양한 근대화의 길 가운데 경제성장, 기술발전, 그리고 지식의 증대와 전파 같은 현상이 번성하는 종교와 편안하게 공존하고 있다. 
- 오늘날 빠르게 자라나는 세계관들 : 기독교, 이슬람, 불교, 세속적 휴머니즘

* 종교적 다양성
- 근대화론자들이 품었던 세속 세계에 대한 동경은 ‘기독교적인 유럽’이나 ‘기독교적인 미국’에 대한 기대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깨지게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종교
- 자유주의는 자신의 해석이 어떠하든지 각 사람의 인생관에 따라서 살아갈 자유와 개인의 인생관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을 두가지 기본개념으로 하고 법 앞에 평등한 보호를 보장하는 것이다. / 자유주의는 자신이 택한 신앙이 시키는 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 세속주의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고 한 묶음의 연관된 가치들과 진리주장들인데 이는 부분적으로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과 시장에서 생성된 것 그리고 자연과학으로부터 뽑아낸 것들로 구성된다. / 종교적 이성을 공적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고 정교분리를 철저히 시행할 때 세속주의는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선호되며 이는 신앙인들에게 아주 불공평하다. 
- 이에 대안으로 월터스토프는 사회적 협의(consocial)라고 부르는 자유민주주의 형태를 제안한다. / 다수 공동체의 공존의 정치

* 다원주의를 정치적 과제로 지지해야할 충분한 이유
1) 신은 한분뿐이시므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2) 유일하신 신이 중심적으로 명하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는 황금률에서 표현된 대로 네가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3)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는 타인의 권리를 우리와 우리가 소속된 집단을 위해 주장하지 못한다. 
4) 내면적으로나 외적 행동에 있어서나 종교는 강요될 수 없다.

*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상이한 인생관으로 폭력적 충돌이 생겼을때 평화의 문화를 길러 낼 내적 자원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자신의 종교적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말한다는 것은 두가지 근본적인 신념 즉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종교적 정체성은 통과할 수 있는 경계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 신앙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하여 ‘해석학적 호의’를 베풀고 서로 선물을 교환해야 한다.(191)
- 논쟁만 하는 것으로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행동을 멈출 수 없다. 논쟁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정치체계에서 행동하는 중요한 방식은 투표하는 것이다. 논쟁하고 나서 투표하고 또 논쟁한다.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잘 운영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이 취하는 방식이다. 

결론 
- 오바마 대통령의카이로 연설(2009년)-문명의 충돌의 주장에 반대 /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해석하게 되면 종교적 전체주의에 반대하며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 현대 문화 속에서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추진력이 사랑을 즐거워하라는 것으로 대체되어야만 진정으로 인간이 번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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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종교 문화(안점식, 죠이선교회)

 

 

서문

한국에서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학생 선교단체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주로 개혁주의 전통의 기독교 세계관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당시 이 운동은 일부 지식층의 전유물로 지식 차원에만 머무르고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주춤해졌다. 하지만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포스트모던 환경속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다양한 가치들이 혼재된 상황 속에서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세계관 훈련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생각해보자. 

1. 세계관의 변화 없는 신앙은 혼합주의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를 보고 두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첫째는 단기간에 유례없는 성장을 한 것이고, 둘째는 인구의 20%이상이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외형적인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교회 구성원들의 균형잡힌 성숙은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겉으로 보여지는 종교적인 행동, 행동 양식의 변화에는 성공했지만(예를 들면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 금연등), 그들의 가치체계나 더 본질적인 세계관은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은 신앙은 반드시 혼합주의의 모습을 띠게 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샤머니즘의 기반위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 타당성 구조위에 기독교가 전해졌기에 더더욱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추구해야할 필요가 있다. 

 

2. 세계관 운동은 체질 변화 운동이며 성숙 운동이다. 

삶의 질은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성경적인 세계관은 하나님, 나 자신, 타인, 자연, 사회, 역사를 잘못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의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해준다. 

세계관 운동은 지적 성향이 강한데 사실 세계관은 단순히 지적 차원이 아니라 지정의 모든 영역에 걸쳐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존재방식이자 체질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변화란 지식이나 인식의 전환을 넘어 삶의 존재방식과 체질이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 세계관을 체질화 하기 위해서는 인식적 차원에서 세계관을 정립해야 하고 나아가서 올바른 감정과 결정을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3. 세계관 운동은 영적 전쟁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비성경적 세계관을 전파한다. 사탄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결론으로 인간을 매료한다. 

기독교 학문 운동은 성경적 세계관을 인식적 차원에서 정립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절실하고 중요하다. 학문 또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문가 집단이 비성경적 세계관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포할 때,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와 진화론, 마르크시즘의 영향력을 체험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포된 비성경적 세계관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바로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 안에 침투한 비성경적 세계관(물신주의와 기복신앙)이다. 이러한 비성경적 세계관은 교회 바깥에 있는 명백한 적이 아니라 내부로 교묘하게 침투한 적이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4. 한국 교회 안의 바알적 신앙을 뿌리 뽑아야 한다. 

한국 교회안에 두드러진 비성경적 세계관은 권위주의와 성공주의이다. 

 

1장.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세계관은 실재를 보는 안경이다. 무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고, 범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범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 세계관은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되는 체질.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함으로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의도적으로 의식화하고 외현화하여 조직적으로 서술하면 철학이나 사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내면화되고 체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을 통해서(through) 또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with)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전 과학적 단계이자 전 철학적 단계다. 

- 세계관은 전제로서 받아들여지는 관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을 통해서 생겨난다.(롬 10:17)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2장. 문화와 세계관

세계관은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어떤 문화 속에서 태어나며 그 문화의 영향 아래 있는 가정,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사회화되고 문화화된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바뀌는 경우가 혼합주의이다. 

선교 사역은 진공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문화가 있는 곳에 들어가 이미 존재하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의 토양 안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불러온다. 이러한 세계관 대결은 영적 대결의 본질이다. 

- 타락한 이 세상의 원리는 힘과 물질이다. 권력과 재물, 즉 기득권 때문에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연합하려면 힘과 물질, 즉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현하려고 해야 한다. 연합은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원리를 거슬러 힘써야(엡 4:3) 가능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국가의 권력과 종교의 권력은 손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과 달리 가난한자의 편에 서지 않게 되었다. 50

- 새 예루살렘 문화, 즉 천국 문화와 타락 이후 발생한 세상 문화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일반은총의 산물은 연속적일 것이지만, 이 세상 문화 안에 나타나는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의 산물은 불연속적일 것이다. 53

 

3장. 종교와 문화

전통 사회일수록 종교와 문화가 거의 같이 간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컨대 종교는 우주의 기원과 목적, 인간의 기원과 본질, 인생의 목적등을 제시한다. 또 종교는 세상에 있는 죽음과 고통과 악의 기원과 본질, 이런 것들의 극복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 공식종교(고등종교)와 민간종교(하등종교) : 민간 종교는 형통함(where, what)에 관심이 많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식능력이 전락하였고 왜곡된 인식 능력이 인간에게 내재된 선천적 종교성과 결부되어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 63

-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이해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이 자기가 놓인 상황(context), 즉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상황에 따라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선호(favor)과 편견(bias)이 있을 수 있다. 신학이란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해석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어도 신학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67

- 종교는 일반 계시에 대한 반응,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섞여 있다.(크리스토퍼 라이트, 해롤드 네틀랜드) 69

- 진리에는 능력이 있지만,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진리는 아니다. 73

- 진리, 즉 옳음의 기본은 ‘관계적 옳음’이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관계적 옳음에서 시작된다. 관계적 옳음은 인식의 옳음을 가져오고 인식의 옳음은 행위의 옳음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옳음, 즉 관계적 옳음이 인식론적 옳음과 윤리학적 옳음에 선행한다. 존재는 항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관계적 옳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존재 상태는 옳게 된다. 사랑은 내가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음을 나타내며 올바른 존재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으로써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게 된다. 76

 

4장 궁극자, 절대자

* 세계관 유형을 결정하는 중요 3요소 : 궁극자, 인간, 자연

유신론 : 인격적이고 초월적이며 유일한 신을 궁극자 또는 절대자로 간주하는 관점

범신론 : 우주를 초월한 궁그가 또는 절대자는 없으며 만물 속에 궁극성, 절대성, 신성이 내재한다는 관점

유물론 :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가 전부이며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물질에서 우연히 파생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관점

 

사회 규범이나 도덕 규범에 대한 관점(예 : 살인하지 말라)

유신론 : 신의 명령

범신론 : 우주의 질서 또는 자연의 질서

유물론 : 인간의 경험이 규범의 기초

 

5장 인간

- 각 세계관에 따라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공산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계몽주의의 정신은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이다. 

인간성에 대한 낙관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자본주의-공산주의)은 공산주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두개의 큰 기둥이었다. 이슬람, 유교도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인간성과 이상 사회론을 따른다. 그런데 이 세계관들이 역사적으로는 모두 실패했다. 

공산주의는 잉여 생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힘과 재물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간 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잘 간파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바로 이 타락한 문화의 원리를 그대로 좇아서 계급투쟁(힘)을 통한 잉여 생산물(재물)의 평등 분배를 추구했다.(91)

정교 일치를 추구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율법주의가 가지는 경직성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6장. 자연

기독교 :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불연속성,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범신론 : 궁극자, 인간, 자연의 삼자를 수평적 관계로 이해

 

기독교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일원론적이다. 하지만 헬라적 범주개념(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데아와 현실)이 기독교 신학으로 들어오면서 이원론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후 16-7세기 과학혁명을 지나면서 뉴턴과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이신론적 사고방식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세속화의 문제가 발생했다. 

초자연은 종교영역으로서 주관적이고 사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자연은 과학 영역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적인 사실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세속화로 정부, 공공 교육기관 등의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애니미즘(정령숭배)-기독교 세계관-세속주의

 

애니미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신적 이상을 귀신들림으로 간주하고, 세속주의에 물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신적 이상을 정신질환으로 간주해 버린다. 

세속주의 세계관은 이신론과 무신론을 포함한다. 초자연이 있지만 자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신론이고, 초자연과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가시적으로 보이는 자연계, 즉 물질 세계만이 궁극적 실재라는 주장이 무신론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은 인격적인 신이 자연법칙이든 도덕법칙이든 법칙 위에 있어서 인격적으로 법칙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초월의 의미(하나님은 비과학이 아니라 초과학)

구원은 곧 회복이라고 할 때 자연계의 회복도 구원의 내용 안에 들어 있다.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는 힘의 원리에 따른 굴복이 아니라 영적 원리에 따른 순복이다. 

 

7장 죽음

-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런데 기독교는 죽음을 비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타락의 결과로 사망이 들어왔고 언젠가는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110)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진심으로 눈물 흘리시는 주님(요 11:35) 사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공감하시는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을 철학자로 계시하시지 않는다. 생명의 부여자이자 창조자이심을 계시하신다.(112) / 예수님과 석가모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112)

- 영생 불사를 위한 인간의 노력, 탄트리즘 : 성적 합일과 종교적 합일, 성적 엑스터시와 종교적 엑스터시는 일맥상통한다고 봄, 바알 신앙의 경우 풍요와 다산이라는 현세기복주의와 성적 합일을 통한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신비주의 vs 과학 : 불사를 위한 노력, 인과율을 다른 방식으로 추구

-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죄로 보고 영생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 : 연속, 불연속, 윤회

 

8장 고통

- 약함은 고통의 문제와 악함은 죄의 문제와 연관된다.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더욱 필요하다. 

- 세계관이 일단 형성되고 나면 폐쇄성을 띠고 굳어지므로 세계관이 바뀌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폐쇄성과 경직성이 바로 고집과 강퍅함으로 나타난다. 이집트에서 형성된 물질주의 세계관의 뿌리가 너무 깊었기 때문에 생존과 안전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했다.(출 16:2-3; 민 11:4-5)(126)

- 타락한 인간에게 생존과 안전은 체감적 필요(felt need)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진정한 필요(real need)이다.(통전적 사역-주님의 사역)

- 인간의 문제가 무지의 문제인가?(불교) 반역의 문제인가?(기독교)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기독교는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고통에 대한 설명체계 : 소경으로 난 사람에 대한 질문,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144-7)

1) 인과업보 : “이사람의 죄 때문이다” 전생의 죄라고 여김

2) 애니미즘적 설명 “ “가계에 흐르는 저주” / 초자연적 영에게 저주의 실효적 능력이 있다고 봄, 기계적 공식, 모든 불행을 악한 영들의 소행으로 여김

3) 성경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 자신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 애매한 고난(벧전 2:19-21)

- 기독교 세계관의 탁월성은 바로 열매에 있다. 

 

- 그리스도인은 고통이 있지만 죄를 짖지 않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생존 문제가 심각하지만 생존에 급급히 매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도록 부름받은 자이다.(151) /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하늘 소망의 개념으로 탈바꿈한 이유(각주)-데이비드 보쉬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나라가 이 땅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나라라고 변호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 대신 불변하는 영원한 나라의 관념이 강해졌으며, 그 결과 저세상적이고 내세적인 장소로서의 '하늘나라'의 관념이 더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9장 세계관과 영적 전쟁

- 비성경적 세계관은 반드시 비성경적 가치체계와 비성경적 행동양식을 유발하는데, 바로 비성경적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은 다름 아닌 죄이다.(155) / 죽지않음, 눈이 밝아짐, 하나님과 같이 됨, 선악을 알게 됨, 이 네가지 거짓말은 비성경적 세계관의 기본 유형이다.

- 사탄의 거짓말에 속으면 미성숙하고 비생산적이며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히틀러는 신비주의와 진화론(그리고 멜더스의 인구론)에 따른 형질인류학적 견지에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확신함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157)

- 목적론적 세계관의 회복 : 풍성한 삶이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삶, 질병이나 사고, 실패가 없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알적 신앙은 이런 고통없는 삶을 풍성한 삶이라고 하지만 야훼 신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풍성한 삶이라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획한 삶을 살아가는 것, 즉 합목적적 삶을 사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 내에 던져진(피투성, Geworfenheit)” 존재가 되었다. 

-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싸움인 동시에 인간에게는 평화, 즉 샬롬이 걸린 싸움이다.(160)

-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 즉 샬롬이 실현되는 곳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샬롬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나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나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타인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며, 나아가서 다른 피조물과도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된다.(165)

 

10장 문화의 토양과 한국인의 의식구조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 한국의 문화 토양은 샤머니즘, 불교, 유교, 세속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공영방송에서 노자의 도덕경, 불교의 금강경, 논어등을 강의했다면 크게 반발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영방송에서 기독교의 성경을 강의한다면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시청자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용비어천가를 배우고 수학여행동안 많은 불교와 유교의 문화재를 방문한다. 사찰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통해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가르침을 흡수한다. 우리는 이처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불교적, 유교적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이러한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흡수하고 내면화한다.(170-1)

- 한국 그리스도인은 유교적 그리스도인이고 샤머니즘적 그리스도인이다. 

- 한국인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껴 가까이 잘 지내고 싶어도 위아래 서열이 결정되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묘한 긴장을 형성할때가 많다. / 사람을 처음 만나면 나이를 먼저 묻는 문화(172)

- 유교적 서열의식은 권위주의로 나타난다. / 성경적 가치체계에서 교회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을 섬기는 곳이다. / 한국의 유교적 토양에서 성장한 한국 그리스도인은 위계와 질서, 신분과 직분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174-5) / 177표

- 한국처럼 약점 은폐형 문화에서는 약점 노출형 문화보다 훨씬 위선적이 되기 쉽다. 

- 샤머니즘적 권위주의가 능력지향적이라면 유교적 권위주의는 권력지향적이다.(180)

- 샤머니즘의 특징은 진리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능력은 성공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 성공주의는 결과주의와 외형주의를 가져오고 이는 적당주의와 과시주의로 나타난다.(188)

- 참된 믿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라면 무데뽀는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 확신으로 믿는 것이다. 무데뽀와 믿음 사이에는 혼동할 만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둘 다 인간적인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된 믿음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는 반면, 무데뽀는 하나님의 약속도 없이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194)

-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잘못된 태도)

- 정(관계윤리는 발달 but 대중윤리는 미약)과 체면문화

- 귄위주의의 오류 : 권위의 남용, 권위의 포기, 권위에 대한 도전, 한국은 권력거리가 큰 문화이다. 

 

11장 문화의 토양과 영성

- 선교는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일으키며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문화 바깥층인 가치체계와 행동양식만 변화시킨다면 혼합주의가 나타나고 명목적인 신자만 양산하게 된다.(212)

- 성경적 관점에서 볼때 영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능의 측면이라고 정의한다면 타락한 인간의 영은 죽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실체적 죽음이라기 보다는 관계적 죽음이자 기능적 죽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능을 잃어버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혼과 육의 측면은 죄성에 지배당하고, 전적 부패와 무기력 상태로 전락하였다.(219)

-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지킴은 단지 내 생각과 감정을 조종하는 차원이 아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이 세계의 질서와 원리에 대한 거짓말, 즉 비성경적 세계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정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보고, 하나님,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의 영성 수련법이 마음공부라면 기독교 영성수련법은 하나님 공부다. 기독교는 마음을 탐구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골 1:10)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228)

- 온전한 영성은 약 1:27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수직적 경건은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이고, 수평적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는 사랑이다. 거룩이 하나님의 본체적 속성이라면(사 6:3; 계 4:8) 사랑은 피조물과의 관계적 속성이다.(요일 4:16) / 순결이 수직적 차원의 영성이라면 지혜는 수평적 차원의 영성이다.(마 10:16)(229)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 순종, 거룩함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적 영성은 자기의나 휴머니즘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초월성만 강조할 뿐 역사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 아래 지정의를 의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롬 12:2) 세상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연, 사회, 세계, 역사, 개인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영적인 사람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 실재, 즉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넘어(요일 2:16)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나아가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 기독교의 영적 훈련이 타종교 수행법과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성경적 계시로 체험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한편 동양의 체험주의는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도 체험의 종교지만 동시에 계시의 종교이며 정경에 기초한 교의의 종교이다. 체험과 계시가 충돌하면 체험을 포기해야 한다. 체험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시를 자의적으로 자신의 체험에 짜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면 이단이 된다. (234)

- 성경적 예언의 목적은 회개를 촉구하고 현재, 바로 지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지, 사사롭게 미래를 미리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240)

- 설교자는 성경말씀뿐 아니라 상황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고 초월적 원리를 이끌어내는 통찰력은 물론 상황을 해석하고 성경말씀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력도 필요하다.(241)

- 잡신의 방법이 강압적 소유(possession)라면 하나님의 방식은 인격적 감화(inspiration)이다.(244)

- 성경적인 관점에서 영적인 사람은 대속사역의 기초위에서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한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외감과 친밀감을, 자기 자신안에서 평안과 기쁨, 내적 고요함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관용의 성숙함을, 사회에 대해서 정의로움과 공평무사함을, 자연에 대해서 긍휼함을 가지고 관계를 맺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안으로는 평강을 실현하고 밖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248)

- 영성의 다섯가지 차원 : 지성적, 감성적, 도덕적, 사회적, 신체적 차원(248-250)

- 정체성의 기반을 타인에게 두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따라 늘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런 사람은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게 정체성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속칭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끄덕이지 않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행복할지 몰라도 독불장군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께 정체성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건전한 자존감을 가진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만 잘난 것처럼 남의 평가를 무시하지도 않는다.(253)

- 진리대결(Truth encounter), 능력대결(Power), 충성대결(Allegiance)(256)

 

12장 복음과 상황

- 복음은 칭의로서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을뿐 아니라 성화로서의 구원도 관련되어 있다.(261)

- 우리의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험으로 실제화한 사람은 낮은 자존감이나 우월감,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상처받은 자아, 부끄러운 자아, 두려운 자아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기 때문에 치유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목표는 자아의 치유가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다. 자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자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주재권을 자리바꿈하는 것이다.(273)

- 회개는 불순종을 인식하고 그것을 후회하고 슬퍼하며 의지적으로 돌아키는 것이다.(지정의, 274)

- 상황화 : exegesis vs eisegesis, 주해와 자기해석

- 세계관 차원에서의 상황화(279) : 세계관 차원의 상황화는 세계관의 본질을 파고들어 하나님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경적 영성, 즉 성령의 열매와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282)

- 한국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순결함을 상실했다.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사회에서 증인이 될 만한 지혜로움을 상실했다. / 서구적 시각에서 진리주장을 검증하는 기준은 논리적 정합성과 실재와의 부합성이라면 동양에서는 이론과 실천, 지와 행, 앎과 삶의 일치를 더 중요한 진리주장의 검증 기준으로 본다.(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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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교전 수칙

교리의 해석학 : 우리는 교리들과 교리들의 명제, 발전, 논박, 재진술 등을 그 당시의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당연히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환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59p)
예를 들면 16-17세기의 위대한 신앙고백서들은 당시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복음과 교회 모두가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세계 모두에 적절한 영향을 끼치게 하고, 중세 카톨릭 교회 안에 존재했던 너무나 명백한 실수들을 피하려는 아주 거대한 투쟁으로부터 등장한 것이다.(60p)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칙중의 하나는 바로 단어와 용어에 대한 모든 연구는 그 역사적 맥락(정황)속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There&then의 말씀을 now&here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읽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성경 해석은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읽을때 1세기, 근동지역에 사는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해내고 이후에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적용해 가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 본문을 읽을때 결코 백지 상태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립적인 일상적인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이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다양한 전통에서 자라나온 다양한 해석들이 있고, 그 해석들은 신학적인 검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고 주해적인 면에서도 검토를 받아야 한다. … 서구 개신교 전통에서 일상적인 해석으로 간주되어 온 많은 해석들이 바울이 실제로 기록한 내용에 대해서는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왔다는 사실이다.”(66p) - 톰은 개혁주의자들의 일상적인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전 수칙 : “무엇보다도 주해를, 그것도 역사적인 도구를 총동원해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인 본문이 원래 갖추었던 모양에서 병형되는 방식으로 본문을 왜곡하거나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민감하고, 본문의 주장에 민감하며, 본문의 뉘앙스에 민감한 해석을 지원하고 조명하려는데 있어야 한다.”(67p) - 이후 톰은 NIV 성경이 개신교와 복음주의 전통에서 바울이 말했다고 광범위하게 이야기하는 내용을 바울이 실제로 말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번역되었다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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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Justification : God’s plan and Paul’s vision

이 책은 서문에서 톰 라이트가 밝힌대로 존 파이퍼가 “칭의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톰라이트가 펼친 칭의 관련 내용을 비판하는 책에 대한 응답의 일환으로 쓰여졌다. 개혁주의자들의 집중포화가 이 톰 라이트가 펼친 주장에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지금까지 개혁주의 전통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칭의 교리에 대해서 “바울의 새 관점”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논란은 구원의 성격과 범위, 구원의 수단, 칭의의 의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1장. 칭의는 무엇에 관한 내용이며, 왜 중요한가?
톰은 파이퍼의 주장을 상당히 강력하게 비판한다. 파이퍼의 주장이 마치 천동설과 지동설의 논쟁과 같다고 비유한다. 파이퍼가 톰이 주장한 내용중에 바울에 대해서 틀린 내용을 주장하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교리들을 고수해야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마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으니 너(톰)의 지동설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톰은 칭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의 구원에 한정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논쟁에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인류의 구원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더 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파선된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과 함게 뒤로 물러나 편하게 앉아서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목적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만약 종교개혁 전통이 바울 서신들만큼 복음서를 중요하게 취급했다면 이러한 실수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30p)

톰은 ‘새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용어의 사용이 의도된 것은 아니었는데 샌더스, 던, 톰 라이트에 의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은 기존의 바울 신학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신선한 관점으로 바울을 읽자라는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주장과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의 주장과 샌더스의 주장이 서로 다르며 새관점을 뛰어 넘어 다양한 측면에서 바울을 좀더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관점이 개발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톰은 기존의 성경 읽기가 문제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이다.”(41p) 또한 바울의 신학을 읽을때 단일한 연속된 내러티브로서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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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응급실 의사로 본의 아니게 주일 응급실 고정 근무를 맡게 되면서 토요일을 본인의 안식일로 갖는다. 그때 처음 성경을 접하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 만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이후 성경을 연구하면서 안식이 가지는 성경적인 의미를 탐구했고, 자신의 의사로서의 경험과 성경의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 바로 이 “안식의 평화”이다. 본 책은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의 중간 중간 안식과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가만히” 멈춰서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해준다. 나 개인의,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안식의 날을 정해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안식일과 같은 기반 위에 있다." 

"안식일은 행위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을 수있는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날이다." 

"안식기, 피정, 순례는 연중무휴 세계와 부조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삶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안식일을 지키는 삶을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우리는 삶의 방정식 속에 그분을 포함시킨다. 그분에게 해결의 일부를 맡기는 것이다."

"안식의 쉼이란 노동을 중단하는 것 뿐 아니라 성취와 이익에 대한 욕구, 효율성의 현대적 기준에 따르는 근심과 불안, 자신이 하나님인 양 삶을 통제하려는 노력, 강한 소유욕과 문화화,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삶에서 흘러나오는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중단하는 것이다.(마르바 던)"

 

"안식일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활동과 충분히 거리를 두는 정돈된 시간과 공간이다.(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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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Utah, Canyonlands National Park(젊은 지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지질학적 증거들)


현 기독교 안에서 창조의 문제는 “창조냐? 진화냐?”라는 자극적인 논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앙이 좋은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받고 있으며, 과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이 현대 과학의 주장과 다르기에 신앙을 떠나거나 대화를 중단하는데 이른다. 존 왈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것을 제안한다. 창세기 1장을 물질의 기원이 아니라 성전 낙성식, 기능적 차원에서 읽자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우주의 기원, 생물의 기원, 인간의 기원을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경본문이다.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게 되고, 현대 과학의 증거들과 소통을 위해서 오래된 지구론을 주장하게 된다. 결국 중요 관심사는 물질의 기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텍스트를 받는 고대인들이 이 문맥을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내용을 전개한다. 그래서 저자는 창세기 1장을 우주 성전 낙성식 견해를 제시한다. 이는 고대 세계의 사람들이 물질의 기원과 구조보다는 그 물질의 기능, 세계의 기능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기존의 주장들은 현대 과학의 발견과 성경의 텍스트를 물질의 기원 문제로 해석할려고 노력했고 결국 그 충돌을 필연적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창세기 1장을 기원이 아니라 기능의 문제로 볼 때, 즉 누가 그것을 움직이게 만들었고 주인이고 책임자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과학, 특히 생물학적 진화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화의 과정 자체가 목적과 목표를 가지시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보는 목적론을 견지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창세기 1장을 기능적 기원 기사로 읽을때 신앙과 과학의 갈등을 피할 수 있고,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과 믿음중에 택일을 강요함으로 기독교의 입지가 제한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공공 교육에 있어서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 보다 과학의 문제이기보다 신앙의 문제인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진화와 함께 가르치지 않도록 요구하는것이 더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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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십자가와 신약 성경

속전에 관한 말씀과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에 나타난 지배적 이미지들은 출애굽 사건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에거 가장 큰 핵심은 죄 자체의 문제나 죄를 해결하는 제사의 필요가 아니다. 오히려 해방의 이미지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세대, 그리고 그 세대의 정체성 형성이다. 74

* 제사가 강조하는 것
1) 보상으로서의 속죄(expiation, 제사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의 책임과 결과에서 자유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한 수단)
2) 화해로서의 속죄(propitiation,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수단)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말론적 권세들의 지배가 끝났고(골 2:15)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갈 1:4) 골로새서는 이것이 권세들이 섬멸된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된 결과라고 말한다. 102

3장. 십자가와 신약 성경 2
- 누가복음, 요한복음, 히브리서, 베드로전서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 의의

예수의 죽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기에 그 의미를 한 가지 해석에 가두거나 한 가지 해석에만 권위를 둔다는 것은 도리어 그 의미를 해치는 것이다. 135

4장. 신약 성경이 전하는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 의의
- 신약 성경은 우선 고유의 대화 양식과 필요, 문화적 관심을 지닌 특정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신약 성경의 책들은 문화적 산물이다. 즉 그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사회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었다. 140
- 속죄 신학을 거부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속죄론(루터와 안셀무스, 이레니우스의 이론)이 시대에 뒤처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 상황에서 그 이론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나, 이는 그 이론들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지 거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141
- 형벌보상론(안셀무스) : 죄를 범한 인류는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범죄한 인류를 대신해 죽으셨다. 인류가 받아야 할 벌을 그분이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 143
- 신약 성경은 속죄에 대해서 다양한 은유적 이미지(법정, 상업, 인간관계, 예배, 전쟁터)를 사용한다. 은유의 속성상 구원론 모형 하나로 진리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시대에, 또 분명히 그 후로도 그리스도인들이 늘 한 목소리로 예수는 우리의 구주라고 말해왔지만, 이주장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또한 목회적인 이유로 인간의 상태를 다르게 설명하려면 그리스도가 이 상태를 어떻게 바꾸셨는지 설명하는 것도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면 길을 찾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적대 권력에 눌려 있다면 해방되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원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화해해야 한다. 어떤 이미지든 설명은 이런 식으로 달라진다. 154
- 속죄 사상의 몇가지 함의 : 구속 / 제사 / 계시 / 화해
* 속죄 사상의 중심 주제 : 사람의 처지 / 사람의 응답 / 하나님의 사랑 / 집단을 차별하지 않음

5장. 속죄론1
- 우리의 목적은 속죄를 훌륭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관심은 속죄론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설명하는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다. 
* 네가지 주요한 속죄론 : 승리자 그리스도 모델 / 보상설 / 도덕 감화설 / 형벌 대속론

1) 승리자 그리스도 
당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셨기 때문에 가이사를 주로 모시는 지배 사회의 압박을 받았다. 교회나 제국이나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교회 역사의 첫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각지에서 박해를 당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악한 세력의 우주적 대립 구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와 마귀, 악한 권세를 이기셨다는 관점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논의 했다. 
- 이레니우스 : 총괄갱신(recapitulation)으로서 승리자 그리스도 / 하나님은 사람의 옛 형상을 총괄갱신하셔서 죄를 없애고 죽음의 권세를 박탈하고 인류를 살리셨다. 
- 니사의 그레고리 : 몸값으로서 승리자 예수

2) 보상설(안셀무스- Satisfaction theory) - 봉건제도, 영주와 농노의 관계속에서 설명
- 예수가 대속의 죽음으로 성부 하나님을 만족시켰다라는 이론
-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을까?… 하나님에게 마땅히 드려야할 영광을 드리지 않는 것,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죄다.
- 사람은 하나님에게 보상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첫째는 죄의 심각성, 둘째는 죄를 지은 상대의 지위(하나님) 때문에 보상할 능력이 없다.
- 보상설에 대한 평가 : 그의 보상설은 봉건제도의 상황속에서 설명되었다. 따라서 그의 속죄론은 중세 생활의 경험과 그 시절의 논리와 통념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명예에 집중하기 때문에 죄 자체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안셀무스에게 구원이란 채무의 탕감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과 제자의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더 강조한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명예에 집중하면서 결국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죄의 관계성을 간과한다. / 현대의 형사 사법 제도에서 ‘보상’은 범죄자의 체포와 처벌을 의미하는 반면 안셀무스와 동시대인들에게 보상은 충성과 명예에 대한 일정한 책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는 우리를 대신해 그리스도를 처벌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진 빚을 그리스도가 보상, 즉 갚으신다고 말한다. 
- 이후에 해석자들은 안셀무스의 핵심사상을 따로 떼어내 자기 시대의 법률 용어와 사상을 집어넣은 후 이것이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성경적 속죄사상인 것처럼 제시했다. 200

3) 도덕 감화설(아벨라르-Moral influence theory) 
- 아벨라르에게 십자가의 구원행위는 주로 주관적이거나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모범적인 예수의 생애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불러 일으키고 우리는 더욱 의롭게 변한다. 아벨라르에게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객관적인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비길 데 없이 사랑하신다는 표현이다. 
- 아벨라르가 설명하는 속죄론에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라는 점이나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도 화해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빠져있다. 

6장. 속죄론2-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
“하나님은 사람과 사귀며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를 바라셨지만 사람의 죄에 가로막히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곁에 두실 수가 없다. 사람은 스스로 완전무결함에 이를 수 없으므로 공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지은 우리를 벌하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법을 찾으셨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지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게 하신다. 예수가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것을 믿으면, 그리고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211 (열차 비유와 프라이팬 비유)

* 찰스 하지의 형벌 대속론
- 하지는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지 않은채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며 그분은 거룩하지 않은 자와 사귀실 수 없다라고 말한다. 
That God cannot pardon sin without a satisfaction to justice, and that He cannot have fellowship with the unholy, are the two great truths which are revealed in the constitution of our nature as well as in the Scriptures, and which are recognized in all forms of religion, human or divine.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2 (Oak Harbor, WA: Logos Research Systems, Inc., 1997), 492.
- 하지의 형벌 대속론 평가 : 하지는 성경의 본문(구약의 제사제도)을 인용하지만 성경의 제사 개념은 형벌 대속론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에의 제사제도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지의 이론은 형벌 보상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 한스 보어스마 : 특히 개혁주의 교회는 형벌 대속의 목소리 이외에는 모두 합창에서 배척했던 것이 사실이다….. 형벌 대속의 목소리가 지배적인 목소리가 되도록 하지 말고, 합창단의 목소리 중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29

  • 하지의 이론의 오류
1) 형벌 대속론을 속죄를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이나 모든 이론의 기초로 제시
2) 성경의 법적 용어가 서구의 법 제도에서 유래한 것 처럼 그 용어를 해석

* 톰 라이트는 성경이 말하는 대속과 형벌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임의의 법정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세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이해의 근거로 삶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우리가 성경이 마련한 점을 사용할 뿐 아니라 성경의 안내를 받아 점선을 연결해야 형벌 대속론이 성경적인 그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239

7장. 소외의 수치를 없애다.

- 서양(북미)는 죄책 문화인 반면 동양(일본)은 수치 문화이다. 
* 수치대 죄책


수치(자아 중심)죄책(행위 중심)
잘못의 성격자기 기대를 위반함법적 기대를 위반함
내적 반응
당황/치욕
자기 비하
버림받을 두려움
원한 
자기 단절(분노)
소외
정죄/후회
자기 비난
처벌받을 두려움
분노
자기 합리화
적의
사회적 반응
조롱과 격리
치욕과 멸시
비난과 질책
비판과 책임 추궁
고발과 정죄
처벌과 보복
교정
동일시와 소통
사랑으로 수치를 없앰
보상이나 형벌로 죄를 씻음
칭의로 죄책을 없앰

구약 성경에 기록된 제의적 정결과 부정의 개념, 또 질병과 사망, 유배를 형벌로 보는 견해들은 “죄책보다 수치를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이스라엘에서 죄의 문제는 부정한 사람을 영원히 추방하는 일 없이 죄에 오염된 나라를 정결하게 하는 문제였다.” 247

- 크라우스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형벌은 수치를 없애지 못한다. 수치를 씻는 것은 사랑이다. 따라서 일본의 상황에서 십자가의 구원 의의를 제시할 때는 십자가 형벌의 치욕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수치를 당하셨다. 254

그리스도의 구속, 대속을 이해함에 있어서 죄책만이 아니라 수치를 강조함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8장. 재간과 사랑으로 악을 이기다.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본 속죄, 보상설과 도덕 감화설의 문제를 이해하고 지적하면서 승리자 그리스도의 모델을 주의 깊게 수정한다. 

9장. 또다른 증언들

*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 부활한 아슬란이 이렇게 말한다. “마녀는 심오한 마법을 알긴 했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마법은 모르고 있었다. 마녀가 아는 것은 태초 이후의 것일 뿐. 하지만 태초 이전의 고요한 어둠 속을 조금만 더 볼 수 있었다면 또 다른 마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테지. 반역을 꾀하지 않은 자가 스스로 반역자를 위해 죽는다면 돌 탁자는 깨지고 죽음은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을” 299
아슬란은 인간인 에드먼드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한다. 아슬란은 에드먼드를 대신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법의 요구를 충족한다. 그런데 여기에 비밀이 있다. 바로 서구의 형벌 보상론에는 존재하지 않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랑이라는 더 심오한 마법이다. 루이스의 속죄 이미지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형벌 보상론의 보복적 정의가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10장. 오늘을 위한 속죄
오늘날 사람들에게 속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때 ‘시온의 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미 기독교적인 문화속에서 기독교적인 단어, 속죄의 은유를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전제가 없기 때문에 성경의 이야기를 너무 단순화시켜서는 안된다. 

* 일곱가지 죄
1) 불안 : 상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2) 불신 :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여김
3) 교만 : 신이 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
4) 소유욕 : 욕망, 정욕, 질투, 탐욕, 욕심
5) 자기 정당화 :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것, 곧 선합을 소유하려함
6) 잔인함 :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함
7) 신성 모독 : 하나님과 그분의 것을 자기 정당화에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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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Emerald Lake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세계관(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게 되고 필연적으로 우리는 내가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세계관을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상황과 문화속에서 다양한 세계관이 경쟁하며 우리의 삶을 장악하려고 한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의 삶에 어느 영역, 시간도 중립지대는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떤 세계관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경-이성-경험-전통을 통해서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풍부한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동안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9장. 종교가된 심리 치료 :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 심리학과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
1) 심리학이 인간의 영적, 정신적 건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성경적 상담을 강조, 심리학적 문제를 영적 실패 또는 부적응의 한 형태로 규정
2) 종교가된 심리 치료 : 영적 문제를 본질적으로 심리학적인 문제로만 정의함으로 이문제를 축소, 영적 차원은 완전히 거부
3) 심리학이 유용하지만 불완전한 학문이기 때문에 심리학적 연구와 치료방법은 충만한 삶을 향한 온전한 추구와 통합되어야 한다.

* 다양한 심리학파
1) 프로이트와 정신 분석 : 프로이트는 삶을 경쟁하는 내적 힘들의 요구를 중재하는 일종의 투쟁으로 이해했다. 이는 이드와 초자아(superego)의 긴장상태속에서 자아가 두 충동을 중재한다고 본다. 
2) 로저스와 인간중심 심리학 : 오저스는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심리학적 체계와 방법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여기며, 심리학자는 환자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 즉 독특함을 낳도록 도와주는 산파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3) 스키너와 행동주의 : 로저스는 다른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환자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타고난 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스키너는 자유와 도덕적 선함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목표는 환경적 조건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더 잘이해함으로, 행동과학에 따라 사회구조를 완전히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4) 가족체계치료 : 가족체계치료는 상호주관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는데 단순히 개인을 치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고 가족의 상호관계가 바뀌어야한다고 주장한다. 

* 심리학의 긍정적 측면
1) 심리학과 기독교의 통합은 우리가 이미 해오던 것을 인정한다. 
2) 심리학은 우리에게 가장 넓은 의미의 구원이 하나의 과정임을 기억하게 한다. 
3) 심리학은 우리가 과거나 인간관계에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워 준다. 
4) 기독교와 심리학은 치유와 건강을 추구한다. 
5) 기독교와 심리학은 인간이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사랑, 수용, 존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 종교가 된 심리 치료의 잠재적 문제
1) 많은 심리학적 접근방법이 높은 수준의 결정론을 가정한다. 
2) 심리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에 기초하여 작동한다. 
3) 종교가된 심리 치료는 인간의 문제를 심리적인 문제로 축소한다. 
4) 종교가 된 심리 치료가 주장하는 가치중립적 심리학이라는 가정은 신화일 뿐이다. 

* 결론
심리학은 일반 학문 분야보다 삶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답을 줄 가능성이 가장 많은 후보자로 인식된다. 그래서 심리 치료사는 종교적 권위자의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절한 심리 치료는 건강한 방식으로 하나님, 이웃,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기 기독교 세계관의 우산에서 벗어나 자신이 스스로 구원을 제공하는 태도는 도가 지나친 것이다. 

10장.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세계의 상호교류에 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또한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차적인 의도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목적은 근본적인 변화, 곧 정체성, 확신, 윤리, 행동의 변화이다. 

* 하나님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행동
1막) 1장-창조, 2장-인간의 창조
- 창조세계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창조세계가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창조세계의 가치와 중요성의 원천은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2막) 타락
3막) 언약
4막) 성육신
5막) 구원

* 구원이란
뉴에이지
이원론적 환상을 극복함으로써 신적 자아를 해방한다. 
자연주의
미신(종교 등) 때문에 발생한 무지를 극복하고 이성을 이용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종교가 된 심리 치료
심리 치료 방법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타인 및 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개인주의
이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 타인의 모든 제약적 기대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특정 목적을 달성한다. 
소비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충분한 부를 축적한다.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정치적 힘을 통해 지배집단의 억압을 극복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지킨다.
국가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을 이용하여 국가 이익, 전통, 국토를 지킨다. 
도덕적 상대주의
타인이 우리에게 부과한 제한된 가치판단에서 해방되고, 행동의 차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구원
하나님의 자녀됨, 노예상태에서 해방, 칭의, 용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 죄로부터 자유, 새로운 탄생-창조, 회복

이야기는 명제 체계보다 비체계적이다. 
기독교의 신념이 비록 성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해도, 성경은 기독교가 우리의 신앙이 타당한지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유일한 자료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11장. 기독교 세계관 개발하기
세계관이 다르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며, 세계관은 우리의 삶을 놓고 경쟁한다. 삶이 중요하다고 가정한다면,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적인 과제이다. 

* 세계관을 정립하고 평가하기 위한 도구
웨슬리 사중 방법론(성경, 이성, 경험, 전통)
- 네가지 원천이 상호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 성경이 일차적 권위를 가진다. / 그리스도인들마다 이런 기준들에 부여하는 신뢰 수준은 저마다 다르다. 
1) 성경(Scripture)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세계, 인간의 본성과 목적,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성장하는 방법에 관한 참된 지식을 충분하게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성경은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때 살펴보고 의지할 수 있는 첫번째 자료이자 최후의 권위다.
2) 이성(Reason)
이성의 핵심적인 기능 : 현대의 많은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성경을 보완한다. / 성경을 해석 / 이성을 통해 사상을 정리하고 종합하여 조리있는 세계관으로 만든다. 
3) 경험(Experience)
삶의 경험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이성에서 끌어낸 결론을 테스트하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4) 전통(Tradition)
전통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다양한 상황과 문제에 적용해 온 것을 말한다. 전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유지하는 여러 방법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한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 전통은 인간 본성의 역사적, 사회적 측면을 인정하고, 이성은 우리가 인식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경험은 우리의 심리적, 물질적 구성요소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인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풍부한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다. 끝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의도하신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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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뉴에이지 :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뉴에이지는 개인이 자기 내면의 신성함-하나님 의식 혹은 대아와 같이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한다. 

* 서양과 동양의 만남
- 서양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동양은 일원론적인 기초를 뉴에이지에 제공한다. 이원론 대신 범신론 혹은 만유내재신론을 주장한다. 
- 뉴에이지 운동은 계몽주의 시대가 옹호했던 돠뇌적이고 직선적인 형태의 논리인 이성(logos)에 의존하는 대신, 영지(gnosis)를 추구한다. 영지는 신비적이고 직관적인 지식 형태를 일컫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뉴에이지의 핵심적인 특징
1) 과학적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한다. 정신, 영혼,  하나님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뉴에이지 세계관은 물질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격하시키거나, 유일한 참된 실재인 신성한 힘 안으로 편입시켜 버린다. 
2) 뉴에이지와 과학적 자연주의는 무지를 진리와 구원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물로 본다, 둘 다 깨달음을 추구한다. 거러나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역사적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이 자연주의적 세계관 안에서 자유를 얻는 열쇠라는 것이다. 이성은 과거의 초현실주의의 미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 그러나 뉴에이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영지는 이원론의 족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3) 집단 윤리에 댈해서는 거의 근본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지지하고, 이와 동시에 개인적 도덕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적인 견해를 주장한다. 
- 현대 기독교에 광범위하게 미친 세 가지 뉴에이지 영향 : 개인주의/주관주의, 반지성주의, 물질 영역의 경시

* 뉴에이지 사상의 긍정적 측면
1) 뉴에이지는 영적 차원을 인정하고 우선권을 부여한다. 
2) 뉴에이지는 제도 종교의 일반적인 문제점을 일깨워 준다. 
3) 뉴에이지가 진리의 수문장으로서 계몽주의적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다. 

* 뉴에이지의 잠재적 문제점
1) 뉴에이지는 편협한 유물론을 편협한 영성주의로 단순히 대체한다. 
2) 뉴에이지 운동은 자기 구원을 목표로 삼는다. 
3) 뉴에이지는 자신이 내세우는 사회적 과제에 대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4) 뉴에이지는 비합리성으로 치닫는다. 

* 결론
기독교와 뉴에이지 사상이 사용하는 언어와 실천방식이 상당히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뉴에이지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적인 전통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또한 기독교의 기초와 목적(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이 뉴에이지의 기초와 목적(우리는 신이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8장.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 나의 부족이 곧 나의 세계관이다. 
세상이 급변하면서 전통적인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던 집단들이 등장하여 지배적인 사회 권력 내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저항해왔다. 이 모든 것들이 문화의 위치와 문화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주제, 어휘들이 있다. 바로 다문화주의, 소수집단 우대정책, 포스트모더니즘, 해방신학, 문화상대주의, 후기제국주의, 노인 차별, 메타내러티브, 소국분할화, 정체성 정치학, 해체주의, 문화 전쟁…)
이런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결속하기 위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고 싶어한다. 

* 용광로에서 다문화주의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까지
19-20세기 초 미국은 용광로처럼 다양한 민족성을 가진 이들이 평범한 미국인이 되어 갔다. 하지만 이후 문화적 정체성 상실에 대한 우려와 사회로부터의 배척으로 인해 용광로라는 겨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결과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다문화주의는 차이점을 녹여서 없애는 대신 보다 폭넓은 통일성 안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했다(모자이크 모델).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와 진리가 정치와 권력에 관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을 근대주의에 반대하거나, 근대주의를 초월하거나, 근대주의 이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근대성은 근본적으로 절대적 확실성,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각 개인의 편견을 버리고 적절한 조사방법을 사용한다면 이런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근대주의의 목표-보편성, 확실성, 절대적 진리, 개인주의, 공정한 중립성, 합리성, 과학에 대한 신뢰, 정복-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리오타르는 “나는 포스트모던을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했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와 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실제적이고 선하고 참된것으로 여기는 것을 해석할 때 사회적 위치가 차지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백인이고 그리스도인인 미국인 같이 유력한 부족은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구원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처럼 자신을 약자로 여기는 부족은 출애굽 이야기를 그들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희망찬 비전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죄라는 비물질적인 힘으로부터 영적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한다. 
- 비교불가능성 : 표면적으로 동일해 보이는 것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 성경의 이야기가 원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내용과 상관없이 그것을 읽는 독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의 긍정적 측면
1)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우리가 공감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 
2) 부족주의는 그리스도인이 낯선 권력 개념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3) 부족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죄의 제도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4) 문화는 질서 있는 생활방식을 제공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의 잠재적 문제점
1)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문화결정론을 가정한다. 
- 문화적 차이가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가 아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2)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부족들을 상대화시키는 반면 내부족을 절대화시킨다. 
3)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또 다른 권력 싸움으로 변질된다. 
4)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피해의식을 가진 문화를 만들어 낸다. 
5)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문화적으로 환원주의적이다. 

* 결론
근대주의는 흔히 진리의 수호자라고 자체하며 자신의 지배문화에 다른 문화를 동화시키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기독교의 대응은 모든 문화적 차이를 없애 버리는 근대주의의 노력이나 부족을 절대화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정반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문화적 수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 자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계시록 7장의 환상(어린양의 보좌앞에 모든 민족이 예배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이 특정한 국가, 부족, 언어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하나님을 향해 경배를 드릴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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